75. 닭의 머리 (3)
옛 시인 읊기를 청명 절기에 비 부슬부슬, 길가는 나그네는 서글퍼질 따름 (淸明時節雨紛紛 / 路上行人欲斷魂)이라 하였는데, 청명은 지난지 한참이요 여름은 건조할 뿐이나 서러운 마음만은 그 구절 뜻에 맞았다.
퀴리 선생 계신 곳 어드메더냐 물으니, 대학원생인지 노비인지 싶은 허름한 행인은 말없이 강의동 옆 헛간을 가리켰다.
“내 팔자야 하고 한탄하면, 사서 고생이라 하겠지. 그렇지 않소?”
“어찌 무엄한 언사를 가슴에라도 함부로 담겠습니까.”
답장이 오지 않아 기다리던 중, 대체 무슨 제갈무후 흉내냐며 답답함 못 이기고 직접 파리 시립산업화학대학원(École Supérieure de Chimie Industrielles de la Ville de Paris)이라는 이름도 거창한 배움터에 직접 행차한 안양대군이 투덜대니, 얼떨결에 함께 끌려나온 공사 김홍집이 받아주었다.
물론 역관 붙여주고 저는 저의 일 볼 수도 있겠지만, 대군이 직접 행차한 마당에 혹 예를 다하지 못하기라도 하였다가는 여러 사람 곤란해지는 것이요, 또 물정 모르는 젊은이를 노리고서 누가 무슨 수작 부릴 지도 안심할 수는 없는 일.
그러므로 내색이야 하지 않지만, 대체 무슨 사정 있기에 초대에 답하지 않는지 그 피에르 퀴리라는 작자에게 묻고 싶은 것은 김홍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미 파슨스의 일로 허탕을 치고 해협 건너온 안양대군의 초조함만 할까.
“저기로군. 이곳 예법에 문 열기 전 사람 있다고 알림이 맞소?”
“물론 문 두드리는 예가 있기는 하나, 애시당초 그것에 구애받을 이라면 진작에 답하는 글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과히 무엄하여 상시 방약무인한 자이거나, 아니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일 테다.
낡은 나무 문 손수 밀치고 들어서니 휑한 헛간에 걸상과 책상이 여럿 있고 바닥에는 웬 돌덩이가 너저분하니 쌓여 있는데, 저기 멀리에 부스럭대는 소리 들리니 해산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배가 소복 솟은 여인이었다.
“흠흠, 거 퀴리 선생 계시냐고 물어주실 수 있겠소?”
“저이도 퀴리 선생인 듯합니다.”
“아, 부부가 모두 배움에 힘쓴다 하였던가.”
곧 김홍집이 그 민망함을 깨고자 먼저 나서서 조선의 왕자 되시는 분이 직접 찾아왔다 마리 퀴리에게 일러주었더니,
“아.”
한 마디 하고서 도로 저의 할 일을 하다가,
“아!”
한 마디 더 하고서 그제야 후다닥 안양대군 있는 쪽으로 잰걸음하였다.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예요. 워낙 바쁘다 보니.”
처음에는 혹시 집 주변에 사교계 명사로 동명이인이 있지 않은가 싶어 어리둥절하기도 하였다. 혹시 잘못 보낸 것은 아닌가 확인차 답신을 해보기로 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공사관에 글을 써본 적은 없고, 일은 바빴다. 거기에 산기는 다가오지, 몸조리 마친 뒤에 곧장 집안 살림 보태려면 어디 교직 남는 자리는 없는가 찾아보기도 해야지, 그러기 전에 그 원수 같은 피치블렌드는 모두 처리해서, 저의 직감대로 그 안에 무언가 특이한 물질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확인도 해야지. 몸이 세 개 쯤 되면 조금은 숨 돌릴 틈도 있었을 테다.
“흠흠. 부군께서 오시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소?”
아무리 외국 생활 오래 하였다지만, 천생 옛적 사람이라 안양대군 같은 젊은 사람만큼 태연히 외간 여인과 얼굴 마주하기는 어려웠던 김홍집이 부지불식간 차오른 민망함에 뱀발을 붙였다.
“바쁘다니까요. 둘 다. 우선 용건을 말씀해주시면 논의하고 알려드리도록 할게요.”
삼고초려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었음에 만족하자고 스스로 되뇌이며 안양대군이 용건을 내놓았다.
“아, 런던의 마담에게서 소개를 받았군요! 그분께 얼마 전 남편이 신세를 지기도 했지요.”
“그렇소이까?”
“별 건 아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었다고나 할까요... 남편이 요새 유난히 바쁜 것도 그 때문이기는 하지만요.”
그렇게 용하다는 – 풍문에 따르면 운명의 실타래를 모두 읽고, 영어로 이른바 좋은 판(Good Panne)을 벌여 액운을 모두 없앨 수도 있다 했으니, 처음 런던 사교계에 등장한 이후로도 아직 그만한 영매가 없었다 – 소문 듣고서 피에르가 그 자기장 계측의 건을 꺼냈는데, 그랬더니 정중한 회신 돌아오기를, 그렇게 하였다가는 ‘좋지 않은 기운’이 서로 묻을 수 있으니 관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묘하면서도 흥미로운 지적이었지요. 관측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라.”
‘부정 탄다’라는 뜻을 에둘러 거절하는 말로 포장한 것이 저리 엉뚱한 오해를 불러왔으니, 정말로 센 강 하백(河伯)의 영검이 있던 것일까? 누구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어쨌든 그 답변 받아본 피에르의 눈에 불꽃이 일더니, 근 며칠 피곤하게 밤새 수식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조금 뒤 밤에 녹초가 되어 나타난 피에르는 들뜬 표정으로, 비록 자신은 아닐지 몰라도 후에 어떤 천재, 혹은 천재의 어깨 위에 올라선 누군가가 나와 물리학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 이 통찰을 잘 정리해둘 생각이라 밝힐 것이었다.)
“좌우지간 그래서, 조선으로 우리 부부를 초빙하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소.”
그러나 어디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도 아니요, 저의 고집만은 꺾지 않은 채 억세게 살아온 마리 스쿼도프스카(퀴리의 본성)를 혹하게 하려면 그것으로는 불충분할 것이었다.
“조건을 더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계속 연구만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조선은 너무 먼 걸요.”
“그것은...”
“더구나 연구 여건을 제대로 갖추어준다고 보장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 조선도 훌륭한 나라고 - 공사님 앞이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에요 – 또 저와 남편이 갈 만한 자리가 있으니 이렇게 왕자님께서도 오신 것이겠지만, 그래도 솔직히 말해 아직 근대 학문을 제대로 시작한 것이 채 삼십 년이 되지 않았잖아요.”
차라리 제갈공명이었더라면, 두 번 허탕은 쳤을지언정 세 번째에는 공짜로 데려갈 수 있었을 테다.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홍집이 말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잠시 상의를 해볼 필요가 있겠소. 잠시 양해를 구하오.”
하고서 곧장 묻기를,
“데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마침 어명이 내리지 않았습니까? 대감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외국 여행 갔다가 선물만 사와도 기특한 것인데 – 자식 있는 노인네들이 종종 자랑도 하곤 하지 않았던가 – 나라에 보탬 되도록 우수한 인재를 데려오겠다 하니, 한양의 귀남이 보기에 어떻겠는가.
하여 자리가 없더라면 만들어서라도 줄 것이니 우선 도움 될 인재 구함에 진력하라 하유하였다.
허나 해 뜨는 쪽에서는 격려의 뜻으로 전한 말이, 번개같이 달려 해 지는 쪽에 당도할 때는 마치,
‘데려오는 자는 필히 중용할 것이니, 이 일에 내 큰 기대를 걸고 있노라.’
하는 말로 들려, 반가움만큼이나 그 묵직함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하였다.
그렇다고 높은 자리를 마치 그 옛날 공명첩 날리듯 여기저기 약속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요, 따라서 정말 저 여유(女儒) 귀씨와 그 지아비가 훌륭한 공을 세울 수 있다면 좋은 일이로되, 천금과 경대부의 자리를 허투루 약속하였다가는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꼴도 그런 꼴이 없을 테다.
“잘 모르겠소... 이럴 줄 알았으면 오기 전에 성균관에 짓쳐들어가 그 과학 배운 자들을 모두 앉혀두고 번갯불에 콩이라도 굽는 것인데...”
체통 없는 언사에 절박함이 묻어났는데, 김홍집도 이곳에서는 교양 갖춘 동양 신사 소리 들을지언정 과학이니 수학이니 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저 좋은 스승을 만나 과거가 고시 되기 전 출사함을 남몰래 다행으로 여기는 수준이니 딱히 돕지 못하였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하는 말이,
“만약 이곳 대서 땅에 그 진가를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면, 벌써 영달하여 천금은커녕 만금을 약속하여도 쉬이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으음...”
조선말로 조용히 아들뻘이나 될 왕자와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공사를 보면서, 퍽 소탈하다 여기는 것도 잠시, 진리야말로 인생 최고의 보배요 그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땀과 눈물 – 잠 못 이룬 눈에서 하품 한 번마다 한 모금씩 나오는 그것 – 으로 값을 치루어야 한다 여기는 마리 퀴리는 다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앞서 피치블렌드를 담궈둔 용액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러 갔다.
애초에 이번 어려움을 기화로 삼아, 지난 번 ‘교통사고’ 이후로 저를 예전과 같이 보지만은 않는 듯한 아버지 주상의 눈에 다시 들어보고자, 그리고 이왕이면 그와 더불어 대군대감께서 일을 다룸이 참으로 훌륭하다 하는 인망이나마 알량히 얻어보고자 꾸민 일이었는데, 또 막상 결정 내릴 때가 되니 솜털처럼 가볍던 일이 때아닌 소나기에 한껏 물 머금은 격이 되었다.
그러나 이럴 때 주상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문득 생각해보았다. 그 수많은 인재들이 과연 처음부터 내 여기 있노라 하면서, 돌 가운데의 옥처럼 드러나 있었겠는가. 우선 믿고 썼기에 지금에 이른 것. 만약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라는 것은 아직 젊은이의 근심할 바는 아니다.
“천리마의 뼈도 오백금을 주고 산다 하였으니, 혹 사람을 잘못 초빙한다 하더라도 어찌 공효가 없겠소?”
“그렇다면 무엇을 귀씨에게 확약하실 생각이십니까?”
“허허실실 계책을 베풀어야지. 실(實)로는 도저히 이 자리에서 쉽게 내어줄 수 없으니, 대신 허(虛)로써 불러와 사귀어야만 하지 않겠소?”
말하는 안양대군도 반신반의하는 듯하였지만, 어쨌든 본인의 결정할 바였으므로 김홍집은 고개 한 번 숙이고는 퀴리 부인이 다시 지금 하는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참으로 잘 하였다.”
저도 모르는 새 긴장하고 있었던 것일까. 진심어린 격려에 저도 옥죄고 있는 줄 몰랐던 숨이 푹 놓였다.
“더불어 함께 연락한 치씨라는 이도 글을 보내왔으니, 그자 역시 기인이사로 그 헤아림 깊음이 두드러지더구나.”
석 달 전 진령군의 그 수첩 – 앞에는 큼직하게 생사록(生死錄)이라고 적어놓기도 했는데, 내력 물어보니 순순히 답하기를 다름아닌 저의 밥벌이가 이 작은 수첩에 담겨있으므로 어찌 생사가 걸리지 않겠느냐 하였다 – 속에서 나왔던 이름 몇 가지 중에서 가장 가까웠던 파리의 귀씨 부부네를 제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최대한 공들여 서한을 보내둔 덕이 있었다.
물론 그 서한이란, 영어로 된 것은 민영환이 다 쓰는 동안 대군 자신이 심적으로 열심히 지원해준 (물론 본인만 아는 바였다) 것이요, 법국 글로 된 것도 김홍집의 ‘윤문’을 거쳤는데, 과연 진심이 덜 들어간 탓인지 조선에 와서 보니 그 사이 조선국에 찾아와 저의 배우는 뜻 펼쳐보려는 이는 없었다.
허나 엉뚱하게도 저는 제 고향에 머물고 싶은데 자신이 창안한 기구만을 대신 만들어볼 수 있겠느냐며 역으로 제의하는 이도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진령군 지나가듯 언급한 아라사 치씨(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라.
“그나저나 그 귀씨는 곧 조선국에 온다 하였는데, 한 사람도 아니요 어린 아이 둔 부부가 어찌 그리 먼 곳까지 오게끔 하였느냐. 참으로 언변이 훌륭하구나.”
“모두 아바마마의 깊은 은혜가 있었기에 비로소 가하였던 일입니다.”
“너무 겸양할 것까지는 없느니라.”
그런데 완전히 겸양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기반이랄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오히려 더 호재라 이 말인가요? 대체 어째서 그렇지요?’
저의 시간을 진지하지 않은 제안으로 빼았는다 여겨서일까, 앞서보다는 조금 목소리가 높아진 마리 퀴리였다.
‘물론 허허벌판에 막무가내로 데려다 두고, 거기서 연구를 하라고 한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겠지. 하지만 재정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두 사람 몫은 충분히 있고, 더구나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쌓아올릴 수도 있는 것이오. 이를 위해 벼슬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제수할 수 있고.’
자리야 만들면 되고, 연구 기반이라 해 보아야 이 헛간의 상태를 보았을 때 사실 그렇게까지 거창한 무언가가 필요할 듯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앞서 고민하면서, 혹 실패하여 망신을 당하더라도 아버지께서는 저를 책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조금은 두려움이 가셨다.
‘동양에 이런 말이 있소. 소의 꼬리가 되느니 닭의 머리가 되어라. 그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하겠소이다.’
‘물론 조선의 왕자께서 하시는 말씀이 허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제 아이의 어머니 될 몸으로 쉽게 내릴 수는 없는 결정이네요.’
도끼 아홉 번 찍은 아름드리 나무에 한 번 더 찍는 심정으로 문득 떠오른 근거를 꺼내들었다.
‘우리 조선은 회계 고문으로 온 프랑스인 노인도 참의대부, 그러니까 그대들 말로 국회의원도 할 수 있는 나라요. 그것이 벌써 스물 하고도 다섯 해 전 일인데, 지금은 어떻겠소?’
“하하, 그것이 또 그런 전례가 되는구나.”
“그러니 어찌 성은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다시 군밤 구울 계절 되어, 아들 여독이나 얼른 풀리라며 해줄 수 있는 일을 해주는 귀남이, 어느새 보령에 슬슬 어울리게 된 너털웃음을 지었다.
“거기에 더불어 아라사 치씨는 그 성정이 모나고 별나다 하였는데, 소자 듣기로 얼마 전 자신이 창안한 기물의 제도를 바치겠다 하였다 하니 이것이 어찌 소자 홀로 꾀하여 될 일이었겠습니까.”
자신이 사는 칼루가(Kaluga) 바깥으로 나오기는 싫은데, 벌써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 자신의 발상이 현실에 나타나는 것을 원하기는 하던 치올코프스키는, 찾아온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찰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제쳐두고 과감히 역제안을 하였다.
혹시 자신이 그리는 설계도와 동봉한 논문만 받아가고, 값은 저의 설계대로 기물을 만들고 잘 움직이는지 확인하여 알려주는 것으로 치르면 아니 되겠느냐 하였는데, 그것이 안양대군 조선 도착할 때였으니 아마 치올코프스키도 멀리 칼루가에서 속을 적잖이 썩인 모양이었다.
허나 그 기물의 제안을 살핀 귀남이 대희(大喜)하여 곧장 크게 격려하는 뜻으로 상금을 주라 하였으니, 그 구상 가운데 이른바 ‘날틀’도 있고, 안에 뜨거운 기운 불어넣어 띄우는 비구(飛球)도 있었던 것이다.
“장차 이 사례가 퍼져나가면 천하의 빈궁한 서생들로 비범한 뜻을 흉중에 품은 이들이, 금세에 토포악발(吐哺握髮) 고사가 나타났다 하여 아국에 모여들지 않겠습니까. 재차 말씀드리건대 모두가 두터운 성덕에 말미암음입니다.”
긴장 풀리니 도로 혀에 윤기 돌아온 안양대군이었다.
“그런데, 저 귀씨 부부나 치씨야 저들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치고, 대군은 무엇을 바라는가?”
“소자 어찌 감히 무엇을 더 바라겠나이까. 오직 신이 원하는 바를 구하여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윤기 돌아온 혀는 도로 주인을 배반하고야 말았다.
“허어, 이 아비가 못나 대군이 무엇을 원하고 즐기는지를 미처 몰랐구나. 계구우후(鷄口牛後)의 고사가 어찌 대서 서생들만을 이르는 것이겠는가? 마땅히 대군도 즐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내 힘을 써보도록 하겠다.”
그, 테레비에 나오는 신동들을 보면 공부하는 것이 참 재밌다고들 하지 않았던가. 글공부가 아니라 이런 과학이니 기술이니 하는 것에 흥미가 있었던 둘째아들을 지금껏 퍽 괴롭게 하였구나 – 어째 자동차를 좋아한다 싶었다 – 싶어 문득 미안해지고 또 아들이 대견해졌다.
“아바마마?”
“물론 대군으로서 나라의 일을 돕는 것을 아니 된다 여기는 이들도 있겠으나, 잘 타이르면 어찌 바른 도리를 깨닫지 않겠느냐. 내 영상과 공판에게 일러 마땅히 자리를 마련하라 하겠느니라.”
다음날부터 공조 오가며 원하는 과학과 술기의 일을 힘껏 이끌라 하유하며, 모르는 이가 보면 푸근하기 이를 데 없는 아버지 미소 짓는 귀남이었다.
--- *** ---
대중적으로는 아내 덕에 잘 알려졌지만, 사고로 요절하지만 않았어도 아내만큼 많은 과학적 공헌을 할 수 있었을 피에르 퀴리는 이 무렵 실제로 심령현상에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 유럽의 많은 식자들처럼 심령주의 자체에 경도되었다기보다는 영혼에 전자기적 성질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철저히 과학적인 목적의식에 입각한 흥미였다고 합니다. 주변에 능력 있는 영매가 없었거나 강령회를 열 만한 ‘인싸’가 주변에 없었던 탓인지, 그의 관심은 본래대로라면 심령주의에 관한 책을 탐독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입니다.
마리 퀴리의 대표적 업적인 라듐의 발견은, 보헤미아의 광산에서 나오던 우라니나이트의 일종인 피치블렌드를 화학적으로 분해하는 작업에서 출발했습니다. 피치블렌드 내의 각종 불순물을 제거하고 방사능을 띄는 것만 찾아내는 작업은 상당히 수고로운 것이었고, 라듐 발견 초기 마리 퀴리의 업적이 단순노동의 산물로 간주되어 평가절하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결격사유’는 여성 외국인 학자였다는 데 있겠습니다.)
작중 시점에서 마리 퀴리는 장녀 이렌느를 회임한 상태입니다. 이렌느는 마리의 제자인 졸리오와 결혼했고, 1935년에는 졸리오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합니다. 그 아들딸들 – 엘렌과 피에르 둘 다 모두 생존해 있습니다 – 역시 가업(?)을 물려받아 핵물리학과 생물물리학에서 큰 공헌을 하였지요.
박봉에 시달리던 남편으로 인해 마리 퀴리는 본인만의 실험실을 가질 수 없었고, 남편이 일하던 학교 옆의 헛간을 얻어 작업실로 사용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마리 본인도 이렌느를 낳은 뒤 생계에 보태기 위해 에콜 노르말 수페리에르(É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 교편을 잡아야 했지요.
지난 화에서 니콜라이 표도로프의 제자로 지나가듯 언급된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그의 스승만큼이나 여러모로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선홍열을 어렸을 때 앓아 난청을 겪게 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학으로 교원자격을 취득했습니다. 이때 독학을 하던 중 사서로 일하던 니콜라이 표도로프와 연을 맺기도 했지요.
스승이 다룬 우주 진출을 위해 다양한 수단을 궁구한 그는, 잘 알려진 로켓뿐 아니라 비행기, 비행선 등 다양한 비행의 수단을 강구했습니다. 특히 이 중 금속 외피를 사용한 비행선에 대해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주 정거장이나 에어락 등, 우주 진출을 위해 필요한 각종 개념들을 (홀로) 제시하였지요.
하지만 고향 칼루가를 떠나지 않으려 하던 본인의 성격과 재정난 등으로 인해, 생의 말년에 접어들 때까지 그는 조용히 연구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고다드의 로켓 실험이 성공을 거두자, 이미 지역에서는 명사였기에 칼루가 시민들이 나서서 그를 알렸고, 이것으로 인해 그는 기성 학계 바깥에서 스스로 선구적인 연구성과를 낸, ‘볼셰비키 과학’의 대표주자로 추앙받게 됩니다.
그리고 스탈린이 집권하자,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얻은 명성으로 인해 숙청의 위기를 겪고, 노년에 평생 고문 후유증을 앓게 되었지요. 그러나 곧 복권되었고, 이후 그에 대한 우상화는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치올코프스키 본인의 의사와는 별 상관이 없던 우상화 작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상화에 홀랑 넘어가 우주와 비행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게 된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시골 농부의 아들 유리 가가린도 그 중 하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