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가장 높은 자리 (3)
모두가 주상의 심모원려를 생각하느라, 기실 그 심원(深遠)한 지경에는 아무런 계책도 없었음을 너무나 늦게 깨닫고 허둥댈 무렵.
형조는 형조대로, 사법원은 사법원대로, 또 한성부 서헌은 서헌대로 모두 오밤중까지 불 밝은데, 형판 서광범이 오늘 잠을 이룰 수 있든 없든 김옥균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혹 야밤에 청하지 아니한 귀한 손이 찾아온다면 오늘일 테니, 만일 점치는 셈 치고 동전이라도 던져본다면 필히 수괘(需卦) 나와 기다림을 말할 것이었다.
허나 그도 나이가 나이인 것일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예전만큼 발품 팔기를 좋아하지 않음을 잊었던 탓에, 안느장이 문 두드려 동궐(東闕)의 ‘이 처사’가 전화로 저를 찾는다 알려주었을 때 그제야 굳이 미복하고 찾아올 필요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영상에게 사사로이 도움 구하고자 야심한 때에 이리 연통을 넣게 되었으니 다만 양해를 구할 뿐이오.”
“대군 대감께서도 뜻밖의 일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시겠습니까. 이때를 빌어 심심하게 위로의 마음 한 터럭이나마 전할 따름입니다.”
“영상으로부터는 항상 도움만 받는구려...”
하고서 곧장 묻기를,
“내 어찌하면 좋겠소? 홀로 고민해도 마땅한 방책이 떠오르지 않으니, 그저 두렵게 여기고 있소이다.”
귀남의 동년배 사내들이라면 아비 노릇 수십 년을 하여도 서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식에게 속마음 보이는 것이라, 딴에는 걱정하여 그리하였다지만 안양대군은 아버지의 손찌검이 마음에 크게 남았다.
별단이가, 별 일 아닐 테니 걱정 말고 조심히 다녀오라 하였다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뭉게뭉게 걱정이 피어 올라, 그럴 리 없음을 잘 알지만 천만에 하나쯤, 아버지께서 저를 마속(馬謖)으로 삼으려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우직하여 속 편할 저의 형이었다면야 다 아바마마께서 깊은 뜻이 있으려니 하고서, 속 편히 잠자리 들고 내일 출두할 채비를 하였으련만.
“지금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혹시 내각에서 형조나 사법원에 미리 일러둔 바 같은 것은 없소?”
“그쪽들도 지금 발등의 불이 활활 타올라 이미 눈썹에 닿은 지경인데, 미리 계책 준비하였다 하여도 이미 뒷전일 것입니다.”
그 김치진이라는 자가 올린 소장 내용을 전해들으니, 그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두 가지로, 대군 자신이 장차(掌車) 잘못하여 저의 영업에 손해를 미치고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니 마땅히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요, 허물의 귀추 그리할진대 외려 자신이 죄 받았으므로 그것이 또 형률(刑律)의 잘못임이 또 하나였다.
요컨대 대군 자신과 저를 추포한 당국 관헌 둘을 모두 건드리는 것이었다.
“역시 그렇소이까... 하면 내일 서헌 출두하여 내 무얼 하면 좋겠소? 이 또한 홀로 고심하였으나 어찌 생각하여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오.”
저들이 어찌 대군을 감히 무어라 하겠는가 가볍게 생각했는데, 다시 곰곰이 살펴보니 국제에도 떡하니 무한한 군권(君權)을 나누어 문무 백관에게 맡긴다 하였으므로, 따지자면 신하가 신하를 다스리는 것이지 무슨 무엄함이 따로 있지는 아니하였다.
허나 그렇다 하여 정말 별단이가 즐겨 보던 소설에 나오던 것처럼, 내일 출두하여 만인 앞에서 잘잘못 가린다면 그 또한 망신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민망한데 정말 저의 잘못이라 판가름까지 한다면 어떻겠는가.
“사실대로 말씀하심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가뜩이나 곤란한 판에 손수 변론까지 하라는 말씀이시오?”
“마땅한 대송(代訟, 변호·법무사)을 구하자니 그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김옥균이야, 외국 사정을 아니 차차 바꿔나가야 한다 여기지만, 남들은 별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이 대송인(代訟人)으로, 한줌씩 나오는 법과(法科) 등과자들로는 나날이 늘어나는 인구에 맞추어 겨우 사법원과 이하 서헌들을 꾸리는 정도라 – 나라의 선비가 많다지만 그들 중 학원으로 새고 또 신상(紳商)으로 변하고 하는 자들도 많았다 – 결국 대송인들은 대대로 율관(律官) 하던 이들이나 그 일가붙이들이 아직 많았다.
물론 나라의 풍속이 어떤 재주든 깊게 배우면 그것으로 먹고사는 것을 그리 천하게만은 여기지 않게 바뀌고 있었고, 또 대송인들도 고작해야 소장 양식 외우고 수령에게는 아첨을, 아전에게는 기름칠을 하던 정도는 진작에 넘어 나름대로 학식 있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먹고 살 수 없는 판국이었다.)
허나 풍습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고, 더구나 점잖은 대가들에서는 아예 서자들 사업 도우려 스스로 국법을 배우거나 한미한 선비들을 거두어 그 문중의 송사를 맡아보게 하는 등, 이른바 율유(律儒)를 제각기 두곤 하였으므로, 갑자기 대군이 사사로이 대송을 구한다면 그 일 맡아볼 만한 이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이치에 맞았다.
이치에 맞든 않든 답답함은 매한가지라, 차마 참지 못한 한숨이 기물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그 한숨 들은 김옥균이 저도 모르게 씩 웃으며 말했다.
“지금 이렇게 기다리며 노심초사하고 계시니 괘(卦)로 따지면 수괘(需卦)인데, 『역』에도 이르기를 피 흐르면 굴에서 나오라 하였습니다 (需于血 出自穴).”
“아니, 그 무슨...”
“어떻습니까. 제가 『주역』을 끌어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난 혼례 이후로 부쩍 가까워졌기에, 더욱 괴이쩍었다.
“나랏일을 직접 다루기도, 먼발치서 보기도 한바, 성상께서 치세하시는 요결도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 나서서 행하니, 무슨 삿됨이 꼬일 것이며, 누가 농간을 부리겠습니까?
이번 일 역시 언뜻 보기에는 위엄 상하는 일이므로 화(禍)와 같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상도 그리 여기시는구려... 후.”
한동안 침묵 감돈 뒤 말이 이어졌다.
만일 손수 변론한다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 문답 이어지고 밤 깊어지는데, 마침내 끝이 다가왔다.
“기연가미연가하던 것에 비로소 믿음 가지게끔 해 주었으니 참으로 고맙소. 국사로 다망한 공에게 늦은 밤 공연히 마음쓸 일만 만들었으니 미안한 일이외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대감께서도 안녕하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전화기 전음통(傳音桶) 내려놓으니 김옥균 입에 미소 감돌았다.
“안느장, 내일 동 트면 바로 『경화시보』에 연통을 좀 넣어주게. 섭영을 제대로 찍을 준비를 해 두고, 최소 셋은 들고 가서 대군대감의 섭영을 여러 면에서 취할 수 있도록 하라고.”
아무리 전후 돌아가는 사정이 정신 없다지만, 마차 대신 자동차를 택할 만큼 주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여 다음날 아침 서헌 앞에 내렸는데, 이게 웬걸.
“험험, 송구스럽습니다.”
“뭐, 송구스러울 것까지 있는가? 어차피 이리 될 줄은 알았지 않은가.”
어지간히 구경거리도 없는지 몰려든 인파가 ‘파(波)’라 족히 부를 만하였다. 아침에 듣기로, 다른 잡인과 혹 발걸음 겹치면 곤란한바 정해진 시각보다 두 각 전에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들게 하였다는데, 그러니 이들은 그저 저의 판심청 들어가는 것만을 보려 모여든 자들일 터.
얼핏 보니 섭영기 들고 온 번듯한 자들도 벌써 한둘씩 있었으므로 안에 들면 더 많을 것이었다. 그 주목이 부담스럽기도 하였으나, 꼭두새벽부터 별단이와 함께 몸단장 힘쓴 보람도 있었다.
처음에야 대개 고제(古制)대로 기와집 대청마루에서 송사를 처결하였지만, 점점 세상일 복잡해지다 보니 송사에 관계되는 사람은 늘고 소요되는 시일도 더불어 늘었다. 하여 큰 도시의 판심청은 근래 대개 양옥으로 올리고, 그 안에 큰 당(堂)을 두어 여러 사람들이 오래 앉아 변론할 수 있도록 하곤 하였는데, 그런 소요에 있어 팔도 제일인 한양이 어찌 예외일까.
양옥이야 경운궁에서도 많이 보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처음 보는 건물 신기하여 두리번대며 지정된 곳에 들었더니, 탁 트인 방에 단상이 있고, 자리는 다시 좌우로 나뉘니 그 중 한 쪽이 필히 저의 앉을 곳이라.
“대군대감 납시오!”
문 지키던 이가 가갈하니 곧장 우수수 일어나는 소리. 멀리 금번 사안 처결할 세 사람이 단상에서 일어나 간례(簡禮)로써 고개를 숙였다.
그 눈매가 죄다 퀭하여, 주눅이 팍 든 안양대군 보기에는 은근 저승차사와도 같았다. (그들로 하여금 성급히 모여 밤을 새게끔 한 원인이 본인과 그 아버지에게 있음을 안양대군이 어찌 알 수 있으랴.)
면면 살피자면 곧 판사(判事)는 화서학원 유중교의 제자로 사법원 초기부터 일을 거들었던 장년의 선비 고능선(高能善)이요, 함께 배석한 심사(審事) 둘은 형조와 사법원 사람들이 머리 맞대고 급히 선정한 가장 총명한 법과 출신자로 곧 이준(李儁)과 함태영(咸台永)이었다.
본디 사안의 경중만을 따진다면 비록 신문물 자동차가 나왔다지만 기실 본질은 우마차 따위로 사람 상해케 한 것이라, 그간의 관례를 살피면 사실 이만큼 판심하는 사람이 나올 것도 없었지만, 또 인선과 예법을 과중하게 해도, 너무 소홀하게 해도 어떻게든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 명백하였다.
하여 밤샘 논의의 결론은, 종국에 성려(聖慮) 일으킬 일 없도록 중도를 걷자는 것으로, 심리의 절차는 그대로 하되 그 틀 안에서는 최대한 예를 갖추기로 하였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대송할 사람을 보내거나, 하다못해 또 다른 당사자인 이민굉만을 보내거나 하기를 바랐건만, 정말로 대군이 출두하였으니 어쩌다 이 일 맡게 된 세 사람은 – 물론 아직 혈기 넘치는 두 심사(審事)는 조금 심사(心事)가 달랐지만 – 기실 안양대군만큼이나 긴장하였다.
운 좋게 일 맡지 않은 다른 형조와 판심청 사람들은 저기 뒤편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잘해보라’ 하며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곧 고능선이 소장에 언급된 이들의 이름을 읊고 – 대군에게는 ‘안양대군 대감 되시옵나이까’ 하는 식으로, 하소서체로 단답만 나오도록 물었다 – 곧 소장의 사실과, 관계되는 죄목 등을 따라서 읊었다.
이어서 변론할 때가 되니, 대송할 사람 있는 김치진과는 달리 안양대군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고생하였다.”
기나긴 하루 끝나고, 창경궁 행차하여 밤 구워주는 귀남의 말이었다.
“불초한 소자의 허물로 말미암은 일이거늘 어찌 고생을 함부로 입에 담겠나이까.”
“녀석, 언변으로는 지금 종실에서 너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아마 별단이가 돕고 김옥균이 믿음 주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먼저 나서서 자신의 과실을 죽 읊어내려가니 – 물론 그 중 임금이 나올 부분은 모조리 생략하였다 – 김치진이 할 말이 없었다.
이르기를, 비록 미끄러져 전차에 부딪힘이 모두 잘못은 아니라 하나 얼음이 다 녹지 않은 날 무리하여 어차(御車)하였은즉 종국에는 저의 잘못이요, 또 아랫사람 이민굉이 장차수 김치진과 그 승객을 추포하는 것을 미처 막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저의 잘못이요, 하물며 저자의 두 상한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도 이리하면 안 될 터인데, 나라의 높은 사람으로 큰 은혜를 입었으나 행실 경솔하였으니 또 큰 잘못이라.
이리 죽 늘어놓고서, 뉘우치는 뜻과 배상하는 재화로써 화해하고자 하니 부디 김 공은 받아달라 청하였다.
(그리고 그때 『경화시보』 채사군이 섭영을 찍기 시작하니, 곧장 장중이 소란스러워졌다.)
“국법대로 하자 하였는데 실지로 그대로 따라와 주었으니, 아비된 사람으로서 고맙고 기특하구나.”
전생의 말미에 반짝 나온 시쳇말로는 무슨 ‘갑질’이라 하였던가. 많이 보고, 듣고, 또 겪었던 바로는 사실 힘 있는 사람과 그의 덕 입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저의 뜻대로 강짜 부림은 늘상 있는 일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풍조가 바뀌었다.
허나 그 이전 사람들이라고 원한 품지 않던 것은 아니요, 후대의 사람이라고 속이 갑자기 좁아진 것도 아니라 (물론 버릇들이 많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더구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귀남 본인과 그 피붙이들로서는 누구보다 원한도 쉽게 살 수 있는 자리이니 어찌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귀남도 임금 노릇이 서른 해를 훌쩍 넘겼으니 언변이 적잖이 늘은바, 그런 마음을 다른 신하 앞에서라면 말할 수 있겠지만, 자식들 앞에서 말하기란 또 어렵고도 막막한 일. 그리하여 차마 이를 일러줄 방도 알지 못하던 귀남이었으므로, 안양대군이 더욱 애틋하고 또 기특하였다.
“못난 아들은 그저 부끄럽게 여길 뿐입니다.”
겸양하며 받는 안양대군 머릿속은 복잡하였다.
아마 내일이면 자신의 심리 이야기가 신보에 널리 퍼질 것이다. 저도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던 김치진이 당황하여 곧장 저의 내민 손길을 받아들였고, 그로써 송사라는 체면 상할 일이 하나의 미담으로 변하였으니, 멀리 청국에서도 안양대군 네 글자는 들어 알게 될 테다.
위엄을 버림으로써 위세를 얻는 것이 무슨 이치인가 싶어 얼떨떨하였는데, 그러나 기분만은 결코 나쁘지 않아, 한편으로는 더욱 취해보고도 싶어졌다.
허나 그렇게 붕 뜬 기분에 마냥 빠져들 수만도 없었던 것은, 끝내 해결치 못한 질문이 있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부왕의 뜻은 그렇다면 본래 어디에 있었을까?
그러나 물음은 끝내 혀끝을 떠나지 못하고, 대신 변함없이 달달하고 구수한 군밤이 와 닿았다.
『익정신보』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판심청 문 닫힌 뒤에 겨우 섭영기가 당도하여, 마차 내리고 오르는 대군만을 찍었을 뿐이며, 『해동일보』는 고작 한 대만을, 그것도 심리 전체 모습만을 찍는데 힘썼기에 저 특종감을 반쯤 놓쳤다.
(종실의 위엄이 중하니 어찌 감히 그런 기물을 빌리겠느냐 여기던 『청구시무』 편집진들은 애초에 섭영기 들여다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멀리 북경의 자이티얀과 타타라씨가 알면 섭섭하게 생각할 일이었다.)
서양 물 먹은 사람이기에 감히 품을 수 있는 생각으로, 성상의 용모가 반드시 준수하다고 할 수만은 없고, 중궁전 쪽에서 들려오기로도 – 자·타의 모두로 인해 적절히 걸러진 궁궐 이야기는 혼인한 궁인과 내관들 입을 타고 암암리에 퍼지곤 하였다 – 국모께서 현숙하시다는 말은 있어도 자색이 유난히 빼어나다 하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므로 안양대군 역시 딱히 생김새 비범하다고는 하기 어려운데, 『경화시보』에 떡하니 내각 심의 받고 실은 섭영을 살피니, (물론 여인네 분까지 가져와 보이지 않게 펴발라준 별단의 숨은 공이 있었지만) 인물은 훤칠하고 품위는 고상하여 가히 종친 중에서도 돋보인다 할 만했다.
펼쳐둔 여러 신보를 치우고 있던 최익현이 당사 찾아온 전봉준을 맞이하며 말했다.
“금번에 서헌 출두한 일은 살피니 작위(作爲)가 없지 않았네. 자네도 그리 보는가.”
“저도 그렇게 여깁니다만, 애시당초 일을 덮어 감추든, 지략으로 유야무야하게 하든 필히 계책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사안이지 않았겠습니까.”
당장 전봉준 본인부터가 전차 내려서 이곳 광통교 앞까지 걸어온 것도, 가산 부족하여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때 명분과 도의가 국정의 지도리였듯, 이제는 민심과 공론이 곧 고동 아니겠습니까. 저 있던 영길리 말로 ‘쇼-’라고 하더라도, 그 뜻만 바르다면 반드시 백안시할 일만은 아닐 듯합니다.”
“하.”
최익현의 짧은 탄식인지 자조인지를 제쳐두고, 전봉준이 본론을 꺼냈다.
“대군대감께서 친히 출두하신 것을 보니, 과연 성상께서는 참의원의 공론에 위호(位號) 높이는 일을 맡기고자 하시는 듯합니다.”
일전에 영운국 앞에서 전차 기다리며 오세창과 주고받은 문답을 고스란히 최익현에게도 전했더니 그도 역시 잘 보았다며, 우선 돌아가는 사세를 더 관망하자 답한 바 있었다.
“우리 자유당 당론은 본래 반대였으니 무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원군 눈치를 아니 볼 수 없는 노사학원 쪽에서는 그래도 ‘아예 불가한 것만은 아니다’ 정도 입장이었지만, 화서학원 쪽이 워낙 강경하였고, 거기에 더불어 – 군자연하는 이들로써 함부로 드러낼 수는 없으나 – 칭제를 찬동하는 이들이 개화당 사람들이기도 하였기에, 그 사이 정해진 자유당 당론은 최익현 말마따나 왕호를 지키는 데 있었다.
“저희도 비슷하였습니다만...”
“미련 남는다는 미욱한 무리가 있다, 이 말이겠지.”
“역시 면암 선생이십니다.”
아첨기 없이 전봉준이 가볍게 받았다.
“사람들 세워놓고 일장연설 풀어놓거나 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만, 정연한 글로 여러 사람 설득하려 하니 잘 되지 않더군요.”
저의 공산주의 사상도 막상 글로 쓰려니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아내 도움을 많이 받고 있지 않던가. 사람 재주가 팔방으로 모두 뻗을 수는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설득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치가 그러한데.
들어보게. 애초에 황제가 왕보다 높다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인가? 동양에서는 진시황이 스스로 꾸민 말이요, 서양의 소위 임황(任皇, 임페라토르)이니 사황(沙皇, 차르)이니 하는 것이야 거슬러 올라가면 개씨(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수양아들이 ‘왕(Rex)’ 이름을 꺼리는 대진국(로마)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오고자 지어낸 작위에서 말미암은 것 아닌가.
그리고 설령 황제가 왕보다 높다 한들, 지금 천하에 아국이 성상 전하를 국왕으로 모시고 있다 하여 우리를 업신여기는 자가 있는가? 청국은 이미 스스로 이 이치를 만방에 알렸고, 일본국도 저들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그 ‘천황’을 나라의 주인으로 모신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드러내었네.”
최익현이 지나가듯 말한 『대일본연방헌법』은, 십여 년 전 애국공당 인사들의 진언을 통해 이 헌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를 깨달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다른 곳에서 스스럼없이 양보하면서도 중대한 조항은 끝까지 저의 뜻 관철시켜 굳혀버린 결과물이었다. 그 1장 1조부터 ‘대일본연방은 일본 국민의 총의에 입각하여 만세일계의 천황을 통치와 통합의 상징으로 삼는다’ 하였으니, 요시노부의 본뜻과는 달리 인용된 셈이었지만 최익현 말이 그럴듯했다.
“그러니 오히려 우리가 왕호를 지켜나감이 그러므로 저들 개화당 좋아하는 소위 국위(國威)에도 맞는 길일세. 열방의 황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상을 국왕으로 모시는 나라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저, 송구스럽습니다만...”
“무엇인가?”
“한 번만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제야 자신이 말한 내용이 남들 듣기에는 그 자체로 정연한 글 한 폭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최익현이, 나이에 맞지 않게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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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도 한 번 언급하였던 것처럼, 작중의 서양 이름 음차는 점점 중국어의 음을 빌린 것에서 한국어 독음 기준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럴 기회가 없이 중국식 음차 자리에 일본식 음차가 들어온 원 역사와는 다른 부분이지요. 마찬가지로 각종 용어들도 한중일이 혼용되고 있는데, ‘판사’, ‘심사’와 같은 관직명은 원 역사 대한제국의 경우 일본의 제도를 참고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익숙한 판·검사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고능선은 원 역사에서도 유중교의 제자였는데, 스스로 학문으로 그렇게까지 대성하지는 못하였던 듯합니다. 유중교 문하를 떠난 뒤의 행적은 상세하지 않으나, 1893년 해주에 살던 중 안태훈의 초빙을 받고 신천 청계동에 안태훈이 꾸린 마을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때 안태훈에게 의탁하였던 김구와도 연을 맺었습니다. 역시 유학에 일가견이 있던 안태훈이었기에 종종 두 사람은 학문이나 시사를 두고 논쟁을 벌였는데, 소싯적 김구는 이를 흥미롭게 보았다고 『백범일지』에서 회고하고 있습니다.
원 역사의 조선에는 변호사라기보다는 오늘날의 법무사와 비슷한 이들이 있었는데, 당연히 국가 공인은 아니고 사사롭게 의뢰를 받아서 소장을 써주고 변호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거기에 더 나아가 남들의 소송을 부추기는 등의 폐단이 있어서 결국 성종 시기에 이를 법으로 금하게 됩니다. 그러던 것이 대한제국 시기에 다시 금제를 완화하여 곧 소송을 돕는 직업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는 다시 말해 금지되었음에도 암암리에 그러한 일을 도와주는 이들이 존재하였음을 암시합니다.
1905년에는 처음으로 『변호사법』이 제정되어, 대송이라는 이름 대신 이 이름이 알려지게 되고, 이후 1912년에는 조선인 변호사로 개업한 이가 100인을 넘게 되었습니다.
작중에서는 이미 제정된 지 오래인 일본 헌법이 일부 등장했습니다. 첫머리의 국체를 다루는 부분에서 원 역사의 일본제국헌법과 전후 일본국헌법이 묘하게 섞였는데, 1870~1880년대 민권운동과 사의헌법운동에서 실제로 다양한 헌법들이 민간에서 제의되었음을 고려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전개는 아니었다고 감히 자평해봅니다.
헤이그 특사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이준은 함경도 북청 출신-위화도 회군에 반대한 이성계의 이복형 완풍대군의 후손입니다-으로, 17세에 상경하여 흥선대원군과 김병시, 박영효 등 여러 계열 인사들과 연을 쌓았습니다. (이때 김병시의 중매로 조선 최초로 부인상점婦人商店을 열었던 이인정과 혼인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법관양성소가 설립되자 속성과정 1기를 이수하여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첫 근대 사법 경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국권 피탈이 임박하자 보광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활동에 힘썼고, 결국 헤이그 특사로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하였지요.
나이로 따지면 훨씬 아래(1872년생)인 함태영((咸台永)은 이준과 함께 법관양성소 1기를 이수하였는데, 이때 수석을 차지하였습니다. 함경도 무산의 무관 집안 출신으로, 한창 과거를 준비하던 중 과거제가 철폐되자 꿩 대신 닭으로 법관의 길을 걸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결코 길지 않은 기간 중에 많은 일을 겪었는데, 특히 고종과 순종이 마시던 커피에 독을 탔다는 혐의를 받은 김홍륙(金鴻陸) 사건을 맡기도 했습니다. 당시 함태영의 회고에 따르면 증거불충분을 사유로 경미한 처벌만을 내리려 하였으나, 끝내 민씨 집안의 요구로 인해 김홍륙은 곧장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국권피탈 후로는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함께 추진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제3대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후 1964년 사망할 때까지 원로로서 예우를 받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