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25화 (225/320)

74. 가장 높은 자리 (2)

동대문서 청량리 가는 길 보제원 앞에서 대군이 사람을 칠 뻔하였다가 대신 전차를 들이받았더라 하는 이야기는 일파만파 퍼졌다.

가담항설 부풀리기는 옛날에 비해 오늘날 더해졌지 결코 덜해지지는 않았으므로, 골목에서 골목으로, 귀와 입을 번갈아가며 전해질 때는 전차가 아예 박살이 났고 대군께서는 피칠갑을 하셨다 하는 정도까지 갔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궁에 전해진 소식은 부풀려지기 전 안양대군 본인이 미리 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 하여도 어디인가. 가뜩이나 조심하라 하였는데, 아직 먼 경칩을 기다리며 논두렁 구석에서 졸고 있을 진퉁 청개구리 대신 엉뚱한 저의 작은아들이 청개구리 되어, 큰 사고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 뒤처리조차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이는 후에 귀남이 생각한 것이었고, 당장 안양대군이 다치어 귀한 피까지 흘린바 내의원으로 급히 옮겼다 하였을 때는, 오직 아버지 마음만이 앞서서 급히 기무회의 박차고 나와, 곧장 들이닥쳐 멀쩡한지 살피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이치로,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하니 이 또한 천행이로다. 허나 내 신신당부하였건만 그것을 어기고서 이리 큰일을 내어 나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마음을 철렁이게 하였으니, 그 잘못은 어찌할 테냐?’

하며 가볍게 꾸짖는 대신, 내의원 들어 아들의 겉모습 살핀 뒤 멀쩡함을 한 번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살짝 힘 빠진 손으로 안양대군 뺨을 걷어올리고서는, 어색하게 한 번 눈으로 이마와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러고서는

“국법대로 하거라.”

라 하고 헐떡이다시피 하며 달려온 것이 무색하게도, 할 말 없는 어색함에 곧장 등 돌려 나가버릴 뿐이었다. 어안 벙벙한 안양대군은 한참이 지나서야 저의 뺨이 아려옴을 느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국법이라 하였으니, 결국 저를 위하여 사정 살펴주겠다는 뜻이겠거려니 싶었다.

물론 근래 사법원에서 말한다는 민률(民律)과 형률(刑律)의 구분이 어쩌고, 고의와 과오의 구분이 저쩌고 하는 것까지는 저는 물론이요, 주변의 다른 궁인들도 제대로 알기 어려웠지만, 상식적으로 보아 법으로 따진다면 저는 종친 중에서도 대군이니 팔의(八議) 중에서도 으뜸이요, 죄로 따진다면 종친, 그것도 대군을 해칠 뻔하였으니, 과실임을 감안하여도 옛날 기준으로는 참형에서 겨우 감하여 원악도(遠惡島)나 북변에 충군함이 마땅한 죄목이었다.

영 께름칙하여 주변을 빙빙 돌던 무관 이민굉(李敏宏) 정위가 들어왔다. 난데없는 손찌검으로 누가 말하지 않아도 흉흉한 분위기에서 저리 당당히 들어왔으니 – 딴에는 슬그머니 들어온다 하였지만 - 지모의 깊음은 몰라도 담력의 웅대함에 있어서는 무관 중 상등(上等)에 속한다 할 터였다.

“아마 국법대로 하여 그 전차와 그 뒤의 사람들에게 죄주는 구색 맞추고 곧 사면해주실 듯합니다. 대개 과실이라 함은 사해주지 못함이 없다 들었습니다.”

“그리 되겠는가?”

본래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갈림길에서 한참 고민하더라도 막상 어느 한 쪽을 고르게 되면 내 그리할 수밖에 없었노라, 그리함이 그때는 최선의 길이었노라 회술하기 마련인데, 이민굉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은 일개 무부로 국법의 지엄함이나 국정의 절목은 잘 알지 못합니다. 허나 이미 대군께서 몸이 상하셨은즉 누군가는 그 허물을 써야 할 것인데, 대군대감께서 친히 어차(御車)하시었으니 잘못을 삼을 수는 없고, 굳이 구한다면 마땅히 살펴야 하였으나 비키지 못한 장차수(掌車手, 차장)와 그에게 미리 일러주지 못한 주변 백성들에게서 잘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께서는 어지시기가 하늘과 같은데 어찌 백성들에게... 아.”

그제야 혼란스러운 마음이 조금 잦아든 안양대군 생각도 그에 닿았다. 아직 봉록 오래 받지 못한 무관이 황망한 사태를 맞이하여 즉석에서 낸 꾀 치고는 그럴듯함이 있었다.

굳이 죄를 준다면 대군 저의 체통이 있으므로 장차수와 승객들에게 주어야 하는데, 우선 그렇게 잘잘못 가린 뒤에 더 살피면 잘 모르는 안양대군이 보기에도 영 잘못이 경하였다.

그러므로 법 조목대로 종친을 상해하거나 욕준 죄를 묻지 않고 곧장 방면한다면, 심리 기다리면서 잠시 옥에 있던 것을 제하면 누구도 크게 상하지 않고 원만히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이 처음 꾀 낼 때처럼만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의 조선이 옛 조선이 아니고, 『대명률』이나 『대전회통』으로 죄와 다툼을 다스리던 시절 지난지 오래이듯, 대군이 귀한 피를 중인환시 하에 보이고야 말았다지만 엄연히 저의 잘못일진대, 엉뚱한 자신이 며칠이라도 옥살이하고, 명목상이라지만 죄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냐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그 와중에 아직 심리가 끝나지도 아니하여 옥중에 있던 문제의 장차수 김치진(金致鎭)이 저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외려 잘못을 따지면 보필을 잘못한 무관이나 혹은 대군에게 있노라 절절히 소장을 써서 한성부 판심청에 밀어넣었은즉, 일은 결코 가볍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한성전차영운국(漢城電車營運局)의 젊은 국장(局長) 이채연(李采淵)은 저의 아버지뻘 될 김치진 때문에 느닷없는 마음고생이 한가득인지라,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전봉준이든 아니든 붙잡고서 하소연하고픈 심정이었다.

치부하여 문벌 반열 들어보고자 멀리 칠곡서 가산 처분하고 상경하여, 야심차게 전차의 업에 뛰어든 이래 부침도 많았다. 한때 자금줄이 걱정되어 문을 닫을 지경이 되기도 하였고. 특히 황란으로 말미암아 영운국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걱정도 하였건만, 겨우 안정 되찾아 이제는 다시 나날이 커나갈 도성 크기의 덕을 입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큰일이 터져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장차수 김씨는 퍽 억울하다며, 도저히 소장을 물릴 생각을 아니 하고. 이 사람만 참으로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무탈히 풀려날 것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으니 어쩐 연유랍니까?”

“그것이... 후, 사연이 깁니다.”

전봉준 따라온 오세창이 – 본래는 오세창 홀로 올 것을 전봉준이 따라붙은 것이었지만 - 겸사겸사 채사할 마음으로 양복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들었다.

“그 사람으로 말하자면 본디 저기 내동(奈洞) 사는 선비인데, 그 옛날 기사년(1869)에 집안 어려워 싸전 일을 시작한 이래로 계속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었더랍니다. 헌데 무인년(1878)에 은을 잘못 샀다가 그간 그러모은 돈도, 싸전도 모두 날려먹고, 그 뒤에 어찌어찌 하다 장차수 노릇까지 하게 되었다만 여전히 선비 마음씨만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대로지요.”

이 자리에 최익현을 대동 – 같은 ‘야당(野黨)’ 처지로 근래 공산당과 자유당이 함께할 일이 많았다 – 하지 않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만일 그가 옆에 있었더라면 참 훌륭한 사람이라며 이채연의 속을 박박 긁었을 테니.

“이번에도 그 대쪽 품성이 어디 가지 않은 탓에 이리 사달 벌어지게 되었잖습니까. 어디 여상한 반가의 자제가 그 자동거인지 자동차인지를 몰고 가다가 전차에 들이박았더라면야, 저라도 당연히 송사 걸고 여차하면 경인(京仁) 오십만 백성에게 두루 하소연했겠지만, 나랏님 상대로 송사라니...”

물론 정확히는 ‘안양대군 대감’을 넣어 소장 꾸민 것이지만, 나라에 대군이 고작 둘이요, 그 대군 이름의 뜻 모르는 자는 찾기 어려운바, 가까운듯 아득하니 먼 주상 전하께옵서 친히 마음 쓰실 일을 자청해 만드는 격이었다.

“그래서 우리 당이나 『익정신보』에서 어찌 도와드리면 되겠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송사는 어찌 처결이 되든 큰일이라 막막하기만 하지요.”

김치진 본인이야 명성을 얻겠지만, 이채연이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 감히 말업(末業) 손대는 놈이 종실의 위엄에 누를 끼쳤으니 언제고 눈 떠보면 공안서 낯선 천장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지레 겁 먹고 있는 이채연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오. 아무리 사안이 중차대하다고 하지만, 아국이 엄연히 문명국인데, 정정당당한 법도가 있고 또 판심청·평리원 제도 있은즉 결코 사사로이 해 입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외다.”

그러면 암암리에 삭 치워버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갑자기 어떤 심정 고약한 서울 토박이 장차수가 술자리에서 넌지시 알려준 옛 천하장안 뜬소문이 떠오르며 더욱 등골 오싹해졌다.

허나 어쨌든 찬 물 더운 물 가릴 때가 아닌 고로, 전봉준 말에 마음에도 없이 고개 끄덕였다. 전차 생기자마자 함께 생긴 전차도중을 앞뒤로 밀어주며, 영운국의 소득을 팍팍 줄인 전적이 있으므로 지금이라도 이렇게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기도 했다.

“어찌 끝나든 저희네 입장을 잘 알려주셔서, 더 억울할 일만 없게 해주시면 그것으로도 감읍할 일입니다.”

이채연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목 좋은 곳을 잡다 보니 영운국 앞을 바로 전차 선로가 지나고 있어서, 일 마친 전봉준과 오세창은 곧장 나와 전차를 기다렸다. 인력거가 값이 그리 헐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프롤레타리아 생활양식을 고수해야 한다는 ‘마나님 어명’으로 말미암아 적어도 월초에 끊은 표에 구멍이 다 뚫리기 전까지는 전차 아니면 걷기뿐이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처(恐妻)보다는 애처(愛妻)였으나, 남들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분명 만민공산당 영수라면, 흥선대원군 정도 위세는 – 꼭 본인이 노리지 않아도 – 따라올 줄 알았건만, 엉뚱하게도 파락호 흥선군 위세 누리고 있으니, 궁궐도 드나드는 몸이 퍽 처량도 하다며 자조할 무렵. 무언가 생각하던 오세창이 옆에서 말을 건넸다.

“듣고 보니 큰일은 큰일입니다.”

“그런가.”

“앞서 찾아가 뵌 면암 선생께서도 그러시더군요. ‘금번 일이 사소해 보여도 국체(國體)의 지엄함에 엮여 있으니 마치 효묘의 의리 논쟁(예송)과 같은 것이라’ 하시더군요.”

“딱 면암 선생 하실 말씀이로군. 따지고 보면 일리는 있지만.”

예송의 논쟁과 각 당의 당론이 어찌 되었고 선정(先正) 송자께서 그때를 당하여 무슨 의리를 밝혔는가 하는 것은, 전봉준이 알 바 아니었지만, 적어도 화서학원을 비롯해 노론 학통 이은 곳에서 구구절절이 밝힌바 그 핵심은 가장 높으신 지존께 사대부와 같은 예를 준용할지에 있었다.

이번 일도 따지고 보면, 종실의 위엄과 나라의 법 중 무엇이 앞서야 하느냐에 따라 결착이 날 것이니, 늘 그렇지만 한 발 물러나 세상 이치 살피는 데는 아마 저의 장인과 함께 세워두어도 사흘 밤낮을 내리 논쟁하였을 법한 최익현이었다. (어디 서원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논쟁하는 두 사람 모습을 떠올리니 퍽 웃겨,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더 크게 보면, 잠시 사그라든 칭제 운운하는 논의와도 맞닿겠군. 그러잖아도 우리네 당론을 확실히 해야 할 텐데.”

“아직은 ‘민생이 우선이다’ 정도가 전부였지요?”

“그렇지. 허나 이번 송사로 조금이나마 어심이 보인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나.

지존의 위엄이 앞선다면 곧장 칭제하면 될 일이고, 국헌이 앞선다면 참의원 공론에 따라 갈릴 일이지. 우리네 국제에 ‘대조선국’이 나와있지, 예컨대 ‘진(辰)’이니 ‘한(韓)’이니 하는 것은 없으니.”

별칙으로 정하기를 개정 발의는 참의원의 삼분지이(⅔) 동의를 받아야 한다 했으나, 누가 말로 꺼내지는 않아도 이 일에 있어 모두가 가장 중히 기색 살피는 곳은 광화문 안쪽 만인지상 마음속이라. 만일 금상께서 칭제에 마음 없으시다 하면, 그때는 홀로 삼분지이는커녕 과반도 미치지 못하는 개화당이 곧장 밀어붙이기도 곤란할 테다.

그러므로 이채연도, 아직 얼굴 보지는 못한 김치진도 다 알지는 못할 것이로되 참으로 큰일이라는 말이 맞았다.

“예컨대 성상께서 김치진 그 사람을 방면케 하시고는 입궐하라 명하시어 품으신 뜻을 밝히시던가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면 종실의 위엄도 지키면서 선후를 가리기에 족하지.”

“글쎄요.”

지금까지 계속 고개 끄덕이던 오세창이 이번에는 가로로 저었다.

“아버님께 평소 들은 바로 짐작컨대 이번에는 어째 성심이 다르게 드러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기라도 하시렵니까?”

“이 사람, 서양서 못된 것만 배워와서는. 지존을 두고 그리하면 되겠는가?”

서양 물 든 것은 사실 공산당에 (아내를 제하면) 저만한 사람이 없을 테니, 아마 그것보다는 서예 때문에 운현궁 드나들다가 대원군의 고약한 마음씨가 옮은 탓일 테다.

“그리고 우리 사이 얘기지만, 큰돈 걸었다가 잃으면 자네는 몰라도 나는 곤란허이.”

“나랏일 맡으신 분께서 이처럼 청렴하시니 어찌 아국의 홍복 아니겠습니까.”

“예끼, 이 사람.”

오라는 전차는 어찌 이리 오지 않는다는 말인가. 혹 어디서 또 다른 자동차가 튀어나와 허리께를 들이박은 것인가 하는 소소한 원망을 품었다.

한미한 율관들 모임도 아니요, 나라에서 선비의 쓰임 지켜주고자 세운 사법원일진대, 아무리 황망한 건이라 한들 어찌 예외를 두겠는가? 필히 특별한 마음씀이 있으리라 여기면서, 한성부 판심청 사람들은 김치진의 소장을 우선 다른 소들과 마찬가지로 처리하기로 정하였다.

가뜩이나 꾸준히 한양 민호가 늘면서, 조만간 각 부별로 따로 서헌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 몇 년째 나오는 판에, 크나큰 사안이라 하여도 오래 붙잡고 있기도 뭣하였던 것이다.

조정에서도 이 일을 두고 – 특히 형조판서 서광범(徐光範)도 심란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귀남의 말씀 한 마디를 바랐는데, 바로 그 한 마디가 이전과 동일하게,

“국법대로 하라.”

였으므로 무어라 더 묻기도 곤란하였다.

그러나 듣는 이들 생각에, 저리 이르심은 공안서를 움직이든, 종친들을 시키든 하여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조용히 처분할 방도를 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미 언짢아하는 기색 있는데 함부로 어심을 어지럽힐 만큼 담대한 내각 사람은 김옥균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 김옥균도 생각하기를,

“성상께서 어련히 그리 하유하셨겠는가? 무언가 홀로 처결하시고 우리에게 감추시거나 하실 성상이 아니시네. 산적한 현안이 있거늘 어찌 이런 일에만 마음을 두려 하는가?”

지나가듯 기무회의에서 대책으로 나온 - ‘돌기름 수레’도 나왔으니, 이제 다른 기물이 나올 때가 되기도 하였다 - ‘땅밑 다니는 기차’만 하여도, ‘영국에는 이러한 문물도 있으나 아직 한성에는 필요치 아니하다’ 정도로 아뢰려 하였는데, 그것을 되받아 ‘언제고 반드시 필요하게 될 터이니 미리 계획들을 짜 두어라’ 하유하였은즉, 김옥균 말처럼 개화당 내각에 할 일이 이번 대군의 일 말고도 없지 않았다.

또한 홀로 고생하는 어윤중을 안쓰럽게 여긴 성상께서 더불어 하유하시기를, 육조 가운데 한둘만 유난히 바쁜 것은 옳지 않다고 근래 이르시기도 한바, 자칫 소관하는 부서의 권한이 뭉텅 잘려나가거나, 반대로 과중하게 되어 새로운 ‘탕약’ 앞에 저들 부서 이름 붙지 않도록 각자 대책을 마련하여야 하기도 했다.

(이는 처음에는 미국 사람 간씨(에이사 G. 캔들러)가 저의 고가활인수(高嘉活人水) 전영을 내었다기에 공조에서 발원한 농이었는데, 지난 번 하유 이후에는 모두가 진지하게 두렵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대원군 이하 종친과 중전 민씨, 그리고 공안서 등등에서는 생각하기를, 성상께서 무언가 하유하실 법한데 아직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필히 내각에 무언가 일러둔 바가 있으리라 여기었다.

그리고 귀남 한 사람을 제한 모두에게 당혹스럽게도, 한성부 판심청이 출두 명한 그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편전에서도, 경무대에서도 하등의 왕명이 내려지지 않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적어도 무슨 명을 받았는가 물어보는 정도 성의만 기울였더라도 되었을 것인데, ‘국법대로 할 것이다’ 하는 답이 너무나 단호하여 그 뒤에 정말 아무런 다른 뜻 없으리라 여기지 못한 탓이 컸다.

겨우 하나씩 정신 차리고 발등에 떨어진 불 끄듯 성상 의중 여쭙는데, 또 무심히 답하기를,

“아니, 국법대로 하겠다 하였으니 그에 따라야지, 무어 다른 것이 또 있겠소? 출두하라 하였으니 그에 따르면 될 일이지, 이 사람이 직접 가는 것도 아니요, 대군이 스스로 한 일로 말미암아 가는 것인데 무슨 군왕의 위엄이니 할 바가 또 있다는 말이오.”

하는 것이었다.

후에 급보를 전해들은 전봉준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때 오세창의 꾐에 넘어가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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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위 이민굉은 본 역사에서는 1895년 춘생문 사건에서 현장 지휘를 맡았던 초급장교입니다. 친미·친러파 – 이른바 ‘정동파’ 세력이 을미사변 이후 집권한 친일파를 타도하려 직접 군인을 이끌고 입궐하려 시도한 일종의 친위쿠데타 시도였는데, 결국 실패하였으나 이듬해 아관파천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게 됩니다.

1861년생인 이채연은 1887년 번역관 자격으로 미국행에 동참,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함께 육 년간 미국 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이때 득남을 하였는데, 기록상 미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한국인입니다.) 이때 비교적 영어에 능숙하여 외교 실무를 직접 맡아보기도 하고, 귀국 후에는 공을 인정받아 농상공무 협판, 한성판윤 등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그는 미국과의 인연을 활용해 전차와 전기의 도입에도 앞장섰습니다.

김치진은 생년이 따로 전하지 않으나, 서울에 거주하던 가세 곤궁한 양반으로 결국 장삿일에 손을 대었다고 합니다. 야담으로 전하는 바로 그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아내는 병약하고 아들도 마찬가지라, 병구완에 얼마 안 되던 가산을 탕진한 김치진은 결국 쌀을 들여와 팔 요량으로 내수사에서 돈을 빌렸는데, 하필 그게 대원군이 발행한 뒤 악성 재고(?)로 쌓여있던 당백전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첫 상행은 크게 실패했지요. 그럼에도 그는 수완 좋게 돈을 더 빌려, 배를 매입한 뒤 충청도와 평안도를 오가며 미곡의 시세 차이를 이용해 이익을 남겼다고 하며, 후에는 인삼 밀매에도 손을 대었다고 합니다. 작중에서는 밀매 대신 조금 소소한 벌이를 하다가, 당백전 대신 은 소동에 휘말려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사실 그리 드물지는 않았는데, 예컨대 1897년에는 이러한 진신(縉紳)들과 본래 있던 객주들이 뭉쳐 인천에서 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전에 잠시 전차 노선을 깔기 위해 신작로 포석을 뒤엎는다는 정도로 언급되었던 전차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당시 아시아 기준으로도 조선은 빠르게 전차를 도입한 축에 들었는데, 오사카에 이어 동아시아에서는 두 번째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차는 대한제국 시기 내내 많은 고난을 겪었는데, 운행 초기에는 매달 한번 꼴로 인명사고가 발생해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거나 (이에 대해 ‘전기가 가뭄을 일으킨다 믿어 폭동을 일으켰다’ 따위의 보도가 외신을 통해 기정사실화되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일본인 운전기사들이 사고 수습을 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원인이었습니다), 예상 외로 저조한 운영실적으로 인해 고질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요. 엉뚱하게도 만성적인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밤에 발전기로 전등을 밝히는 사업을 하면서 전기 보급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1899년 8월 서대문-청량리 노선이 준공된 후 전차는 어쨌든 한양의 신문물 중 하나로 많은 얘깃거리를 낳았습니다. 초기에는 정해진 정류장 없이 직접 차장에게 언질을 주어 하차하고 구간별로 요금을 징수하는 형태였는데,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점차 변화하여 일제강점기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진 경성, 그리고 이후 1960년대 서울에 이르기까지 대중교통 수단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교통사고의 역사는 의외로 오래되어, 증기기관 자동차가 등장할 때부터 이미 사례가 여럿 있었습니다. 도시화가 진전되어 본격적으로 사고가 일어나기 쉬운 환경이 되면서 이는 급증해, 1890년 런던의 경우 마차와 전차 등으로 인한 충돌·추돌사고가 총 5,728건, 사망자는 144명이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내연기관 자동차가 얽힌 사고 중 최초가 무엇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어찌 되었든 작중 시점에서 자동차 교통사고는 일상이라기보다는 해외 토픽에 가까운 정도입니다. 안양대군의 사고가 그 자체로 최초는 아니어도, 널리 보도된 사례로는 분명 최초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동아시아의 전근대 형법에 있어 고의와 과실의 구분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예컨대 『대명률직해』 상사소불원((常赦所不原) 조는 “고의로 범죄하여 죄를 받는다면 설령 임금의 사면령이 있더라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 (...) 과오로 범한 죄 등은 (...) 마침 임금으로부터의 사면령이 있으면 모두 용서하여 놓아줄 일이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안성훈·김성돈(2015), 『조선시대의 형사법제 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p.97에서 재인용.).

또한 신분제 사회의 형법으로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분도 양형의 중대한 근거가 되었는데, 특히 『대명률』은 팔의(八議)라 하여 특권을 갖는 계층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록 귀족 계층의 특권의식(‘형벌은 사대부에 이르지 않는다 刑不上大夫’)에서 말미암은 것이지만, 대명률로 오면서 그 범위 안에 국가유공자(의공議功), 재능이 뛰어난 인재 (의현議賢, 의능議能), 성실한 관리(의근議勤) 등이 포함되어 근대적 합리성과도 일부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고가활인수는 우리가 잘 아는 그 코카콜라가 맞습니다. 작중 시점에서는 이미 유리병에 넣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 모양은 아직 아닙니다.) 형태로 미국 내에 유통되고 있는 상태지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코카콜라 브랜드의 소유주로 올라선 사업가 에이사 챈들러는 1882년 공식으로 ‘코카콜라사(Coca-cola Company)’를 세웠고, 원 발명가 존 펨버튼이 1888년 사망하자 마침내 코카콜라의 지분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본인이 바로 그렇게 썩 정정당당하지는 않은 방법으로 코카콜라를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미 에디슨이 크게 홍역을 치룬 바 있던 실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선에 미리 전영을 내어두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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