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가장 높은 자리 (1)
옛날 로마에서는 개선하는 장군의 뒤에 종 하나를 붙여,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고 계속 되뇌도록 하였다고 했던가. 추거에서는 대승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자승자박하는 꼴을 만들었으니 김옥균 머릿속에 저 일화가 절로 떠올랐다.
“거, 많이 피곤해보이십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보이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지로도 피곤해하는 김옥균 앞에 일더미를 더 넘겨주면서 그의 새 비서 안느장 푸아송-킴이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전했다.
호부(呼父) 못하는 아들인 안느장 - 아직 어색한 조선 이름으로는 김안장(金岸璋) - 이 나타난 것도 사실 얼마 전 화평회의의 예기치 못한 결과였다.
김홍집에게 처음 이야기해두기로 많아야 저의 혈육이라고 나타날 사람은 셋이라 하였는데, 정확히 네 명이 나타났다. (그나마 조사해보니 그 중 셋은 금방 거짓이 들통났다.) 그중 안느장은 김옥균이 중간에 몰래 리옹 여행갔을 때 맺었던 인연의 소산으로, 정작 옥균 본인도 술기운으로 말미암아 잘 기억하지 못하였는데, 안느장의 어머니 푸아송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허나 ‘코레’라는 곳에서 온 귀공자 ‘킴’이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어서, 프랑스 언론에서 다시 조선이 어쩌고, 그곳 총리 무슈 킴이 저쩌고 하는 것을 보고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가서는 자신이 어머니께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더니, ‘그분이 징표로 비단을 두고 가셨다’ 운운하던 다른 사기꾼들과는 달리 곡절의 앞뒤가 맞는 것이라.
마침 어머니의 대를 거치며 집안에 빚만 남았는데, 그렇다고 몸 놀려 갚을 만큼 부지런한 성격의 안느장은 아니라, 여차여차하여 한양까지 건너와 김옥균 아래서 일하게 되었다. 서자가 문중 일 돕는 것이야, 아직 작첩하던 시절 나온 이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자업자덕’, 아니, ‘득’이지 않습니까.”
“윗사람 허물을 그렇게 면전에서 말하면 이곳 조선에선 좋은 대접 못 받네.”
가끔 이렇게 저의 성격대로 툭툭 말 던지는 것을 제하면, 누구를 닮았는지 일처리는 퍽 똑 부러져서 마음에 들었다. 허나 안느장 말마따나 이 칭제건원의 일은 뿌리는 다른 곳에 있다 하여도 어쨌든 자신의 실수로 이렇게 꼬였으니,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무엇하였다.
호조의 평가에 따르면 황란이 완전히는 아니어도 칠할 정도는 극복되고, 민간의 들뜬 마음으로는 이미 계사년 전을 넘어섰다고 자부하며, 경제개발 오개년 계획도 벌써 목표를 달성한 부문이 여럿 나오고 있다고 하였다.
거기에 더불어, 청국에 나아가 정난(靖難)하고, 만방을 한데 모아 회맹(會盟)하니, 어찌 개화당 공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배길 것인가. 개화당 하는 일은 옳아도 그 뒤에 있는 이들은 마음씨 옳지 못하다 여기는 이들, 다시 늘기 시작한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 등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마음도 자유당과 공산당 사이에서 쪼개진바, 결과 살피니 절반에 아슬아슬하게 못 미치는 의석을 개화당이 확보하였다.
내각에서 한 자리씩 하고 있는 당 중진들이 보기에도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지금까지 추거를 열 때마다 단자의 추이가 요동쳤던 것은 매번 그 단자 써서 내는 이들의 수가 달라졌기 때문이지요.
허나 해를 거듭할수록 가멸찬 집안은 늘어나고 향시 응하는 백성도 치를 때마다 많아지는데, 그런 추세를 타고 우리 당이 기세를 얻었으니 당분간 참의원 안의 위세는 불변일 것입니다.’
금릉위 자리가 혹 걸릴까 저어되어, 내각에 들어가는 대신 당무만 계속 맡고 있는 박영효의 말마따나, 먼 훗날, 일개 공장의 일꾼 남녀들까지 단자를 쓰게 된다면 모를까, 적어도 그러기 전까지 새로 저들의 목소리 내게 되는 이들은 근래에 가장 공적 드러난 개화당에 마음 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점은, 개화당에게 단자 주고 나아가 당적까지 얻는 이들 중 저들의 생각을 당의 기세 업고서 펼쳐 볼 심산 품고 오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세우기로는 충군이요 떠들기로는 애국이니,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의론임을 알면서도 억누르기는 무엇하였는데, 그러다가 무슨 바람 불었는지 갑자기 청평 산속에서 나온 전 대사헌 조병세(趙秉世)가 일을 터뜨리기를,
‘우리 동방의 문물을 살피면 단군이 처음 나라를 연 것이 당요(唐堯)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데, 이어 여러 성현이 혹은 건너오고 혹은 스스로 나와 삼대(三代)의 풍속을 절로 갖추었습니다. 마침내 중화가 우리 해동에 보존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사람이 스스로 꾀한 일이겠습니까?
우리 태조대왕께서 왕업(王業)을 개창한 뒤 오백 하고도 오 년이 지나, 마침내 성인(聖人)이 내렸으니, 요즘의 연소한 젊은이들은 ‘국운의 흥성함은 우리가 스스로 한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늙은 신을 비롯해 나라의 은혜를 여러 해 입은 이들 중에는 나라의 운수가 불과 삼십 년 만에 크게 변한 것이 어디에 말미암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릇 지존의 칭호는 오직 공업(功業)에 따르니, 예악(禮樂)과 명교(名敎)가 갖추어지면 능히 천하를 다스리기에 합당합니다. 지금 천하에 제위를 칭하는 나라가 많으나, 어찌 우리만 하겠습니까? 대통과 역수(曆數)가 모두 맞으니 이때를 맞이하여 마땅히 황제의 칭호를 정하고 새로이 연호를 정하여, 만천하를 도의로써 밝혀야 할 것입니다.’
하면서, 마치 신보가 처음 나라에 생겼을 때처럼 상소문을 떡하니 『경화시보』에 게재하였다. 회담 일로 바빠서 자신 선에서 쳐내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뭐, 듣는 사람 없으니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 아니,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했던 것이 황제인데, 지금 임금님이라고 하시지 못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게 쉬우면 진작에 했지, 이 사람아.”
한편으로는 겉치레 없이 속마음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좋기도 했지만, 그래도 명문가 자제로서 사람 사이 위아래 있음을 체득한 김옥균으로서는 이 낯선 아들 녀석이 빠득빠득 말대꾸하는 것에 간혹 거슬림을 금할 수 없었다. (만약 다 늙은 김병학이 이 꼴을 보았더라면 ‘네놈 법국서 돌아왔을적 우리네 심정이 그러하였다’ 했을 것이다.)
여하간 저 상소문이 개화당 당원 자격으로 떡하니 실린 이래로, 찬동하는 목소리 연이어 나오고, 그만큼 반대하는 이들도 적잖이 나왔다. 목소리로 따지면 전자가 훨씬 컸지만, 문제는 반대편에 선 자의 좌장 최익현이 자유당 영수가 아니라 화서 학통 이은 사람으로서 우군을 잔뜩 불러모았다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솔직한 김옥균 감상으로는 황제라는 가장 존엄한 자리를 놓고서 말싸움은 진흙탕에서 하게 되었는데, 유럽과 아메리카 어디를 가도 말싸움으로 지지는 않을 사람들이 나서서 다투다 보니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이 되고 해가 바뀐 뒤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전우가 교체(郊禘)의 예를 들고 나와 지금의 조선에서는 불가함을 외치고, 유인석은 구주 땅 황제의 대통이 이천 년 전 개씨(凱氏,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대부터 이어져 이곳저곳 나뉘었으니 지금의 황제란 그저 편히 붙인 이름이라 설파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목소리에서 밀림은 어쩔 수 없었으니, 최익현도 결국 술수에 의존하기로 마음먹고 얼마 전 김홍집이 법국에서 써서 효험 보았다는 방편을 꺼내들었다.
‘대체로 황제란 큰 나라를 일통하여 문무(文武) 모두 떨친 군왕을 이르는 말이니, 나라의 크고 작음이 그 지체의 높고 낮음과 같지 않듯 반드시 황제라야 다른 인군(人君)의 위에 서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과거의 칭호를 이어받음은 가당한 일이나, 없던 황제의 칭호를 만들어 스스로 붙이는 것은 저 진시황이나 나파륜 같은 자가 하는 것이니, 좋은 뜻이라 하여도 패도(覇道)요 나쁜 뜻이라면 난세를 불러온다.’
다시 말해, ‘네놈들 성정은 진시황과 같다’ 하는 것이어서, 지금까지 전우와 유인석이 백번 떠들었던 것을 한 번에 응축하여 비판하는 말이었다. 그런 논설 실린 곳이 다름 아닌 『청구시무』라, 언제고 그것 읽게 될 청국 서생들도 한편으로는 역시 남의 불행과 어지러움을 저들 스스로 높히는 기회로 삼지 않으니 예의의 나라라 찬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화당은 참으로 난신 무리라 혀 차곤 할 터였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칭제 외치는 자들의 세는 도리어 강성하여, 심지어 얼마 전에는 광무(光武)니 건양(建陽)이니 하는 연호를 사의(私議)로서 내놓는 무엄한 자도 있었다.
차라리 주상께서 뜻 밝혀. 상소 가납해 언제고 하늘에 제사 올리겠다(칭제를 말함) 하답하거나 반대로 무엄한 언사 그치라는 뜻에서 교체(郊禘) 제사와 팔일(八佾) 춤 운운하는 자들을 데려와 어제 군밤으로 입을 막거나 하면 모를 일이겠으나, 공론에 따르겠다 하고서 관망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어느 한쪽 면이 상하고서야 끝날 일이었다.
“... 결국 너무 교만하여 아랫사람 단속 못한 탓이지, 뭐.”
“그래도 이제 해 바뀔 때까지 끌었으니, 만약 이대로 간다면 곧 잊히겠지요. 왕이든 황제든, 아니면 대통령이든, 아래에서 보면 크게 바뀌는 것 없다고들 하던데요, 저 살던 리옹에서는.”
“어디 가선 그런 소리 하지 말게.”
“제 걱정은 마십쇼. 누구 귀에 이 검은머리 외국인이 그렇게 떠든 것이 들어가면, 어수룩한 저를 탓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에게 조선말 가르쳐준 것이 틀림없는 사람을 탓하겠습니까?”
“어이구, 정말...”
이럴 때면 차라리 내 핏줄이라며 찾아오는 놈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니 공사관 문 안에 들이지 말라고 해둘 것을 그랬다는 가벼운 후회도 들곤 했다.
그래도 저렇게 삐딱하게 이죽대는 것이 꼭 저 보는 것 같아 무어라 하기도 뭣하고, 또 그렇게 툭툭 던지는 말 중에 – 역시 저 닮아 재치는 좋다고 뿌듯해하는 김옥균이었다 - 사리 닿는 것이 없지 않아 흘려듣기도 뭣하였다.
“요새 조금 크게 벌어질 만한, 그런 일은 없는가? 신보로 보나, 조정에서 일할 때 들으나 그럴 소지 있는 사안이 없지 않던데...”
“있기야 많이 있지요. 세상이 시끄럽지 않을 때가 있었나요.”
말도 맞는 것이라, 요즘 세상 돌아가는 정국을 보면 무언가 다른 일이 언제고 터지기는 할 것이요, 이미 이번 칭제의 일로 여러 달을 내리 끌었으니, 기회만 닿으면 어영부영 다른 쪽으로 마음 쏠리게 되기는 할 듯했다.
당장 이번 필리핀 일만 하여도, 그 아시아인들이 홀로 서는 데 동의하였으면서 왜 엄연히 하나의 나라였던 저들에게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느냐며 러시아 반대편 바르샤바에서 항의하는 모임이 열리는 등 – 어째서인지 십여 년 전부터 반정부세력에 대해 갑자기 관용으로 일관하는 러시아 당국이었다 – 시끄러워질 여지가 차고 넘쳤다.
또 다른 이야기거리로는 노씨권학상 받기로 한 이태리국 마씨(굴리엘모 마르코니)가 답방하기로 한 일이 있었는데, 애초 노씨부터가 구주 사람이니 그 자체로는 이상할 일이 없었지만 지금껏 명륜당에 모여서 상을 정하던 학사들이 무안할 정도로 성의 없는 답례만 표하던 다른 국외인들과는 달리, 대희(大喜)하며 직접 상 줄 때 참여하여 저의 발명한 물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 것이었다.
(후문에 따르면 성상 이르시기를, 그것이 필히 큰 쓰임새 있는 물건이 될 것이라 하였다는데, 그것과의 관련은 모두 알 수는 없었다.)
“뭐, 어떤 쪽으로든 조만간 잦아들기만을 바랄 수밖에. 지금처럼 지존께 이목이 쏠리는 것은 성상께서도 그리 바라지는 않으실 것이니...”
그리고 곧 엉뚱하게도 그럴 일이 생겼는데, 만일 미리 김옥균이나 귀남이 알았더라면 썩 반기지는 않았을 사건이었다.
대체 그 물건이 무엇이기에 아버지 주상께서도 즐기고, 그 부품 들여와 조립하는 번씨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며, 이제는 선비라면 마땅히 배워야 할 재주가 그 수레 모는 것이라 떠든다는 말인가.
그러나 처음 몰았을 때 눈앞에서 휙휙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니 자못 호쾌하여 처음의 의문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때부터 자동차 몰기를 취미로 삼게 된 안양대군이었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아니, 실은 대부분이었다. 아내 별단과 어머니 중전은 물론, 형과 동생, 병자 시늉하다가 정말 병자가 되어서 도통 운현궁 바깥 거동하지 못하는 – 부쩍 세자가 그로 인해 미안하고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 대원군까지, 자신이 이 차를 몰고 여기저기 다니는 것을 영 못마땅히 바라보곤 하였다.
그나마 하고픈 것 다 하라며, ‘그 수레가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데 걱정이 과하지 않으냐’ 하여 여러 사람 놀라게 했던 아버지 주상은 예외였는데, 얼마 전 놀랍게도,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았는데, 두 다리로 선 사람도 빙판에 미끄러지니 바퀴 달린 수레는 더욱 위태로운 것이다.”
하유 내리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퍽 걱정이 늘었다며 무엄한 생각을 하면서, 각별히 주의하겠다 아뢰고서는 오늘도 차 몰고 창경궁을 나섰다.
때늦은 눈은 절기 잘못 만난 탓에 태반이 땅에 닿자마자 녹아내려, 끽해야 이곳저곳 담 아래 응달 같은 곳에나 점점이 쌓여, 검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정도였다.
안양대군이 생각해보면 확실히 주변 사람들은 참 걱정이 많았다.
눈도 없는데 얼음 걱정을 하시는 아버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뿐인가? 바깥의 여러 국인들이 아뢰기를 황제 자리에 오름이 가당하다 하는데, 안양대군도 그것이 마땅하다 여겼다. 이제 청국 황제도 천하 만방의 주인 노릇을 걷어내기로 하였다는데, 전조에서도 외왕내제(外王內帝)로 참람된 호칭을 쓴 판국에 훨씬 그 이름에 어울리는 아버지께서 못할 것은 무엇인가?
허나 한 번 그 연유 여쭤보니 답 내리기를,
‘황제라는 것은 임금보다 높은 자리인데, 그런 자리에 올라 남을 내려다보게 되면 시기와 질시를 사기 마련이다. 공연히 남의 원한을 사서 좋을 것이 무어란 말이냐?’
만약 나라 사람들이 입 모아서 제위에 오르라 하였다면 그때는 또 얘기가 달랐겠지만, 사세 부득이하여 칭제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요, 또 최익현처럼 배운 사람들도 하나같이 칭제를 하지 않음이 도의에 맞다 하니, 과연 저의 원 생에서 망국한 뿌리 중 하나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막연히 생각하는 귀남이었다.
허나 그런 생각을 털어놓으면 안양대군은커녕 중전 민씨나 대원군조차 믿어주지 않을 테니, 저렇게 궁색한 논리라도 그러모아 일러줄 수밖에.
그런 줄 알 리 없는 안양대군으로서는, 육십만 대군을 말 한 마디로 끌어와 청국 조정을 거꾸러뜨리며, 천하를 저들 것으로 여기는 콧대 높은 구미의 사람들을 한양으로 불러모으는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갑자기 겸양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역시 말 한 마디면, 안양대군 본인 생각에 개국 이래 그 공적이 최고라고 종묘에서 고해도 열성조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아버지실진대 어찌하여...
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동승한 무관이 외쳤다.
“대감! 전차입니다!”
“나도 아네.”
몰랐지만, 쭉 알았던 척을 하며 제동을 걸었다.
훤칠히 뻗은 길이 전차 쇳길과 만나 사거리를 만들었는데, 그 한가운데 정차하는 곳이 있었다. 잠깐 멈추었다가 전차 출발하면 그때 옆으로 지나가면 될 일었는데,
“엇, 어엇?”
바닥에 정말 얼음이 있는 것일까? 분명 당기라고 했던 손잡이를 당겼는데 차가 멈추기는커녕 계속 미끄러져 나아갔다.
“거기 비켜라! 비키란 말이다!”
그러나 전차 차장이 생각할 여유가 있었더라도, 자신이 움직이면 그 뒤에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덮칠 것이므로 쉽게 비키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나마 내리막길은 아니라서, ‘쾅’ 소리와 함께 들이박고서 보니 안양대군이 앞에 머리를 가볍게 부딪혔을 뿐 큰 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마 찢어져 피는 흐르고 있었으므로, 잠깐 새하얘진 머리를 서둘러 정돈한 무관은 서둘러 달려온 경무서 경관들에게 외쳤다.
“대군 대감을 해하려 한 자들이다. 모두 추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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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장은 당연히 가공의 인물입니다. 안느(Anne)는 본디 ‘한나(Hannah)’에서 기원한 이름으로 여성에게 흔히 쓰이지만 저지대 국가들과 그 인근에서는 남성에게도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고대 게르만어 이름 ‘아른(Arn, 독수리)’이 변형된 흔적이라고도 합니다. 그 외에도 이름 여럿을 붙여 쓰는 프랑스의 관습을 생각하면 (예컨대 앞서 등장한 프랑스 대통령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원 역사의 대한제국 칭제건원은, 청일전쟁 패배로 청의 조선에 대한 권리가 부정된 상태에서 고종이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주도하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이미 이전에도 ‘대군주’라는 애매한 칭호로써 황제 대 왕이라는 구도 탈피를 꾀한 바 있었지요. 그러나 칭제건원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은 작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고종 34년 4월 13일자 실록에는, 건양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이것은 우리 성상의 뜻이 아니’라 하여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갑오개혁 이후의 조정에 대한 다분한 불신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또한 더 잘 알려진 것으로 최익현, 유인석 등 위정척사파의 칭제건원 반대론이 있습니다. 이름만 높여보았자 없는 위엄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중화를 자임하는 국가로서 천명을 이어받지도 않고 마음대로 호칭을 높이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명분론적 관점에서의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칭제건원을 언급한 것으로 등장한 조병세는 1827년생으로 상당한 원로였는데, 원 역사에서도 잠시 벼슬이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1893년 은퇴하고 가평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노구를 이끌고 을사5적 처형을 진언하는 등 정치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녀, 을사조약이 끝내 기정사실화되자 음독자살하였습니다.
무선통신의 선구자로 유명한 굴리엘모 마르코니는 순수한 과학자라기보다는 에디슨이나 테슬라와 같이 사업가를 겸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곧장 자신의 발명을 상업화하려고 노력했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대서양 횡단 전보 송신 같은 각종 홍보행사를 연출하기도 했지요. 유럽에서 무시당하는 작중의 노벨상을 기꺼이 받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한때 중유럽의 강국이었던 폴란드는 17세기 중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결국 18세기 후반에는 세 차례에 걸쳐 주변국에 분할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서 강경한 동화정책이 시행되어 많은 반발을 낳기도 했지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났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고, 결국 베르사유 조약으로 사실상 승전국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뒤에야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도 잘 알려진 것처럼 2차대전으로 영토가 크게 변하는 등 여러 강대국 사이에서 불행한 역사를 겪게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