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23화 (223/320)

73. 아시아의 사냥감 (3)

누가 시작하였는지는 몰라도 이미 널리 퍼져 있는 방식으로, 머릿속에서 바를 정(正)자 그려가며 김옥균은 세고 있었다.

무엇을 세는 것인가? 김옥균 생각에 밑도 끝도 없이 화평 두 글자 내세운 이 회담에 직접 참여하든 멀리서 글로 뜻을 표하든 하는 만국의 사람들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으니, 최익현보다도 고리타분한 선비다움은 한 수 위일 – 어째 호형(呼兄)에 어색함이 없다 싶었다 – 앙리 뒤낭과 같은 부류가 우선 하나 있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귀국의 노력은 이미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오히려 앞서 문명의 빛을 밝혔다고 자부하는 국가들이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지요. 이는 차르 폐하와 그분의 충성스러운 종복인 정부, 그리고 저 개인이 모두 동의하는 것으로, 이 기회를 빌어 우리 러시아는 오직 선의와 평화만을 바라고 있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하필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던 것이 러시아였는데, 직접 찾아온 마르텐스(Friedrich Fromhold Martens)를 슬슬 건드려본바, 본인은 그닥 진심이 아닌 듯하였으나 그가 대변한다 밝힌 차르의 뜻은 진심인 듯하였다.

물론 정말 냉소적으로 본다면야, 당분간 적어도 극동에서는 무조건 화평을 외쳐야 하는 입장이므로 먼저 나섰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똑같이 문명과 도덕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든 ‘문명을 위해 야만을 때려잡아야 한다’ 같은 호전적인 말로도 포장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 그리고 조선 안의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필요할 때는 자신도 거기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는 – 김옥균이 생각하기에는 그러하였다.

두 번째 부류는, 당연히 이 평화란 저들의 뜻이 모두 이루어진 상태라 여기면서, 어떻게 한몫 얻어볼 수 있을까 해서 찾아온 이들이었다.

“카이저 폐하께서는, 독일이 세계 무대에서 더 큰 힘과 그에 맞는 책무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시아 역시 그런 무대에 속하지요. 만일 필리핀이 문명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독립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우리 독일의 손을 잡는 것 역시 좋은 방편이 되리라고 봅니다.”

처음 아주대회를 이야기했을 때는 침묵으로 일관하던 유럽이었으나, 엄연히 강대국 중 하나인 러시아가 그 침묵의 공조를 깨고 적극 동참으로 돌아서니 다른 나라들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간 소위 세계로 나아가는 정치(Weltpolitik)를 말하면서, 식민지 개척이 어렵다면 다른 나라로부터 뜯어오면 될 일이라는 식의 논리를 개진해 왔으므로, 이번 필리핀 사안에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던 독일이 그 대표 격이었다.

그렇게 독일이 끼다 보니 당연히 그 옆 프랑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고, 저들 제외한 유럽 국가들이 하나씩 들어가다 보니 영국도 눈 돌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조선이 직접 불렀더라면 ‘너희가 유럽으로 와도 만나줄까 말까한 판국에 극동까지 가라는 말이냐’ 하였을 국가들이 하나씩 대표를 보내게 되었다.

제 몫을 챙기면서 남에게 훼방 놓을 생각으로 찾아온 프랑스도 그런 축에 들었는데, 대표로는 ‘명예로운’ 은퇴 생활을 보내던 중 자청하여 직접 삼색기 들고 찾아온 예순다섯 나이의 앙리 드 벨로네 같은 이들이었다. (조선 속담대로 물 들어올 때 노 저을 생각으로, 이번 기회에 아시아 전문가에서 외교의 달인으로 프랑스 국내에 확실한 인상을 심을 생각이었다.)

“험험, 몇몇 선구자들의 노력이 있었던 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동방의 문명국 조선과 유럽의 문명국 프랑스 두 나라 정부와 국민의 일치된 뜻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평화와 발전이 극동에서 이루어진 것이지요. 본인은 이전에도 그러하였듯 이번에도 오직 문명과 평화, 이 둘만을 마음에 두고 찾아왔습니다.

예컨대 필리핀이 과연 홀로 설지, 아니면 새로운 후견국을 구할 지는 아직 미정이라 하지만, 만일 전자가 된다면 확실한 벗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 테고, 후자라면 제대로 된 조건을 내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옛정을 생각해 경복궁 구경도 할 겸 간만에 율란 맛이나 보러 오라는 귀남의 청을, 여독으로 몸져누운 탓에 도저히 그리할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한 벨로네는, 병자 치고는 매우 생생한 표정으로 김옥균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는 필리핀의 사례를 들어 어떻게든 저들의 짐덩이를 처분해보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당사자 스페인뿐 아니라 콩고로 인해 골머리 앓는 벨기에, 동병상련 처지인 이탈리아 등등이 역시 진심으로 참여하였다.

국제 무대에 ‘진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겠냐만, 통상 외교적 수사로 가득한 공식 접견 뒤에 찾아와 직설적으로 하소연하곤 하여, 그 절박함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아비시니아는 이미 충분히 문명화된 나라인데, 아직도 야만을 겨우 면한 수준이라 우기면서 당초 약조한 해안뿐 아니라 본토의 개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수단의 마흐디(Mahdi)군을 상대로 원정까지 할 만큼 군사적으로도 강력한 국가가 그러고 있으니, 참 답답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보통 백인 정복자들과 비백인 원주민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화약으로 해결하는 것이 지난 수백 년 동안의 모범적인 답이었는데,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김옥균은 알면서도 침묵을 지켰다) 기관총과 연발소총까지 들고서 날뛰는 아비시니아와의 분쟁을 정면으로 해결하자니 비용 지출을 줄이기 위해 전쟁에 호소하는,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 될 것이 명백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개발의 대가로 외교권도 잠시 이탈리아에 맡기겠다 해두고서는, 군권은 엄연히 아직 저들 소관이라며 수단의 마흐디군을 제압하는 대가로 영국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니 속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벨기에의 미래에는 암운이 드리웠고, 그 암흑의 핵심에는 모든 예산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심연 콩고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번 회의에서 문명화의 정의를 공정하고도 객관적으로 내리고, 그에 맞추어 콩고의 자치를 보장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한숨을 푹 쉬면서, 사석에서 본의를 털어놓는 벨기에 대표 오귀스트 베르나르트(Auguste Beernaert)도 비슷하였다.

이렇게 세 부류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당연히 저들 몫으로 떨어지는 것 구하려는 이들과 저들의 짐 덜어내려는 (그리고 이왕이면, 평소 눈에 거슬리던 이들에게 그것을 넘겨주려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끼리 섞어 두면 나오는 이야기를 보았을 때는 다들 첫 번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니, 최익현 같은 사람이 알았다면 내 무어라 하였는냐며 일장 훈계를 할 일이었다.

여하간 다사다난했던 첫 ‘곁가지 모임’ 끝나고서, 그래도 다른 곳도 아닌 이곳 한양에서 – 애초에 아주대회 준비 모임의 부속으로 시작하였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 이처럼 성공리에 국제적인 행사 마쳤으니 그 또한 개화당 내각의 성과 아닌가 뿌듯해하고 있는데, 옆에 리살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각하.”

“하하, 별 말씀을요. 그리고 이제 품계로 따지면 이 사람과 별반 다르지도 않으니, 말씀을 편하게 하시지요.”

처음에야 그저 올림픽 흉내내는 마당에 가서 저들도 번듯한 나라로 서려 한다는 뜻 밝힐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판이 커질 줄은 몇 달 전까지 꿈도 꾸지 못했던 리살이었다.

그것이 갑자기 국제회의로 번지자, 필리핀에 남아 있던 카티푸난 중진들도 급히 회동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그 결과 우선 회의에 한몫 제대로 끼려면 정부 시늉이라도 내야 하니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 마닐라의 도독령 당국도 회의 소식을 들은 뒤에는 쉽게 건드리지 못하여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 조선에 가 있던 리살을 (당사자 동의 없이) 부통령 겸 외무장관으로 추대하였다.

“은인께 어떻게 그리 하겠습니까. 더구나 오늘 이후로는 절대 불가한 일입니다.”

저의 마음 속에도 없던 선의로 말미암아, 이 혈기 넘치는 젊은이의 선망하는 눈길을 받게 되니, 그 동안 주상과 어울리던 – 또는 주상께 휘둘리던 – 외국인 공사들의 심정이 이러할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어찌 저 한 사람에게만 공이 있겠습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조선은 실로 신사(Gentilhomme, 君子)의 나라라 하겠습니다.”

진담을 겸양으로 받아들이니 난감하기도 하였으나, 굳이 고쳐주어서 이익될 바는 없었다.

지리적 이유로 조금 일찍 시작할 수 있었던, 아직 이름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아주대회’ 개최 논하는 본 모임보다도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낸 곁가지 모임이 이번 평화회의였다.

처음 시작할 때는 당황하면서도 이 기회에 필리핀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설파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이후 참가하려는 나라와 그 대표 명단이 하나씩 나오면서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프랑스 내에서 과장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소위 ‘유라시아 동맹’의 기초를 닦았다며 자타가 공히 자랑하는 앙리 드 벨로네부터 시작해 온갖 쟁쟁한 유럽의 인사들이 모여드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신이 그 자리에 낄 수 있을 듯하지는 않았다.

하여, 적당히 모임 파한 뒤에 사적으로 찾아가 지지를 호소하는 정도로 만족하여야겠다 생각했는데, 청하지도 않은 초대를 조선이 전달하는 것 아닌가.

‘이 자리는 천하 여러 나라들이 그 종주(宗主)와 번속(藩屬)의 도리를 논하고자 모이는 자리입니다. 나라의 크고 작은 것과 주번(主藩)의 구분으로써 들고 빠지는 것을 정할 수도 없거니와, 직접 일을 당한 나라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명(名)과 실(實)이 맞다 하겠습니까?’

하는 논리였다. 유럽 국가들끼리 모이는 자리도 아니요, 더구나 그 콧대 높은 유럽 나라들로서도 필리핀 대표단이 끼어야만 저들 뜻하는 바를 당당히 이룰 수 있는 처지인 나라가 많아서, 스스로 발의하지는 못하여도 남의 발의를 거절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이미 유럽을 나서서 한양에 모임으로써, 조선의 사회자 역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판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허나 그 덕에 리살이 ‘필리핀 임시정부’ 이름 걸고 당당하게 그 모임에 – 비록 발언권은 명목상으로만 인정되었다지만 –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이 ‘문명과 주권, 지배와 자치, 그리고 분쟁의 평화로운 해결에 관한 일반 협정’의 초안이 논의되는 가운데에 낄 수 있었으니, 설령 김옥균 이하 모든 사람이 흑심 품고 있었다 한들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걸어주신 기대에 마땅히 부응해야 하겠지요. 비록 어떤 길을 걸어갈지, 아직 정해진 것은 없고 앞으로도 평탄하지만은 않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열린 문을 도로 걸어잠그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 초안이 제대로 된 조약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수 해는 더 필요할 것이었다. 하지만 필리핀 정부의 이름도 들어간 초안이 이곳저곳에 회람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독립은 반쯤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여느 나라의 정부가 그러하듯, 지금쯤 마닐라에 입성하였을 임시정부 역시 즉시 독립하자는 쪽과 한 번 독일을 믿어보자는 쪽으로 갈려 말로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살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고개를 숙였다.

두어 해 전 학당 일에서 물러난 뒤로 무료한 세월 보내던 뒤낭이었는데, 비슷한 처지였던 최익현은 종종 찾아가 바둑이든 체스든 두며 어울리곤 하였다. 따지고 보면 뒤낭이 서울 터주대감 된 까닭도 - 이제는 까마득한 신미년 일이지만 – 최익현 저로 말미암은 것이요, 또 그 이면에는 지난 연경행 이후 마음 속에 남은 고민이 계속 그의 발을 움직였던 탓도 있을 테다.

그런데 오늘은 뒤낭의 누추함을 겨우 면한 집 – 억척스럽게 생긴 찬모(饌母) 하나, 그리고 적십자 일로 돌아다니다 주워온 황구 한 마리가 식구의 전부였다 – 에 먼저 온 손이 둘이나 있었다.

“무슨 일인지요?”

반 시진쯤 뒤에야 객들이 다 떠났다. 최익현이 사정을 물으니 시렁에서 바둑돌 통을 들어 낡은 판 위에 올려두면서 뒤낭이 대꾸했다.

“이번 회담 때문에 여러 나라 기자들이 서울을 드나들고 있지 않은가. 어디서 내가 옛날 적십자사 창립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인터뷰 청하는 이들이 여럿 있더군.”

“잘 된 일입니다. 형께서 세우신 공은 세상에 알려질 만하고도 남음이 있지요.”

“솔직히 말하면, 항상 명성을 얻고 싶다고 마음 한 구석으로 생각하기는 했었네. 그런데 지금 보니 이것도 생각보다 힘 드는 일이군그래. 두 번 얻었다가는 가뜩이나 늙은 몸이 남아나지 않겠어.”

포석을 툭툭 화점에 두면서 반쯤 농담으로 뒤낭이 툴툴댔다.

“그 모임은 얼추 잘 끝났다 들었네.”

“그렇다고 합니다. 두 모임 모두 잘 끝났으니 천행(天幸)이지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도직입은 늙은이 특권이라 종종 너스레도 떨었던 뒤낭이었다.

“종종 작금 천하정세를 열국 병립하던 때에 비유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눈에야 이것이 회맹(會盟)과 같으니, 즉 아국이 패(覇) 이룬 것이라 떠들기도 하더군요.”

“자네는?”

“형 앞이니 풀어놓는 얘기지만, 엉킨 것이 조금은 풀린 심정입니다. 존주(尊周) 입에 담기에는 그 주나라가 스스로 풀어 헤쳐진 지금이지만, 도의만은 남아 이제 그것을 버리지 않는 첫 걸음을 내딛은 셈이라 하겠습니다.”

매사는 처음이 어렵지, 전례 남으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이루어지는 힘이 생기기 마련. 식민지 독립에 있어 그 절차와 요건은 이러하여야 한다 규정하고, 그 과정에서 싸움이 생기지 않도록 중재하는 방도도 명시하였은즉, 그 뜻을 이어가 다음에는 또 다른 주제를 들어, 예컨대 모임 말미에 아라사국 대표가 말했다는 것처럼 잔학한 무기는 어떤 경우에도 쓰지 말자고 화약한다던가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형은 어찌 보십니까?”

‘이만하면 조선은 조금 다르다 할 만하지 않은가’ 하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백돌을 먼저 두면서 뒤낭이 저의 생각을 토로했다.

“자네 말대로, 첫걸음이라 생각하네. 도의를 숭상하고, 그것을 모두가 따르게 하는 것도 좋지만, 모든 도의가 옳은 것은 아니거든.”

“‘옳지 않은 도의’라면, ‘둥근 네모꼴’과 같은 말이지 않겠습니까?”

“아니지. 예컨대 사람 사이에 함께 정 나누는 그런 도의도 있지만, 먹잇감을 나누어 뜯어먹는 맹수 무리의 도의도 있는 게야. 그 둘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고, 그 분별에 따르는 것도 어렵겠지.”

갑작스레 뼈 있는 말,

“이번 모임을 계기로 유럽 곳곳에서 평화 떠드는 사람들이 종종 이 사람에게도 글을 보내오곤 하고 있다네. 개중 블로크(Jean de Bloch)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꽤 눈길 끄는 이야기를 하더군그래.

대전쟁... 강대국들 사이의 유례없는 대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하였네.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한 번 일어나면 지금까지의 전쟁은 아이들 놀이처럼 보이게 할 그런 전쟁이 될 것이라더군. 그리고 그 뒤로는 오직 증오와 파멸만이 남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였다네.”

“저 하늘이 어찌 그리 하루아침에 무너지겠습니까? 사단(四端)이 사람 마음속에 있으니, 그렇게까지 가지는 않겠지요. 설령 이륜이 무너지더라도 결국은 올바른 길로 나아가리라 믿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과연 대포와 기관총도 동의할까?”

단순히 전쟁의 두려움만 말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 블로크라는 자는 나름대로 연구를 꽤 하였는지 짜임새 있는 표와 함께 글을 보내왔다. 서두부터 평화의 당위성 대신, 현대 총기의 사거리를 비교하면서,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최소 수백만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너무나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하, 열심히 노력한 사람에게 너무 우울한 얘기만 하였군. 그래도 이번 모임이 성공리에 이루어졌으니, 자네 말마따나 더 좋은 길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겠지. 그랬으면 좋겠네.

그나저나, 일이 이렇게 풀리는 바람에 오히려 그 ‘아시안 게임’ 이야기는 묻혀버린 듯 하던데.”

훨씬 덜 진지한 이야기가 화두로 나왔는데, 최익현이 외려 난색을 표했다.

“그것이... 제 일신에는 더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무어라? 어째서?”

“저더러 자동차 모는 모임의 좌장이 되어 달라 청하더군요.”

사정은 이러하였다.

그가 육예(六藝)를 재주 겨루는 종목의 기준으로 삼자고 한 것을 어디서 들었는지, 맥안공행 안태훈이 번씨차창과 손잡고, 자신들이 후원할 테니 자동차 경주도 종목으로 올리자 제의하였던 것이다.

‘우마가 끄는 수레는 짐승을 괴롭게 하니, 만일 수레 끌 방도가 그뿐이라면 어찌할 수 없으나, 피할 수 있다면 피함이 옳습니다. 또한 자전거는 근래 새 바퀴가 나와 부쩍 편해졌다 하지만 단정한 의관으로는 몰기가 곤란하지요.

허나 이 자동차로 말하자면 사람에게도, 짐승에게도 수고를 끼치지 않고 먼 길을 편안히 갈 수 있으니 어찌 금세의 군자가 어(御)하는 예에 맞지 않겠습니까?’

최익현 앞에 와서 유학의 논지를 말하니, 노반(魯班, 유명한 목수) 집 앞에서 도끼 놀리는 격이지만, 더 살펴보니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실은 공산당에서도 저들 세를 모으고자 서예하는 이들을 모아 회(會)를 만들고 아주대회에서 겨루는 것으로 서예를 올리려 하고 있답니다. 개화당이야 윤성흠(聖欽, 윤치호) 그 사람이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말이야 같은 아주라고 해도, 실제로는 글만 겨우 조금 같은 정도이지 즐기는 것이 모두 달라, 종목 정하기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은근슬쩍 이번 대회에 들어와 저들도 아시아에 속한다고 주장하려는 하와이 대표 조지프 나와히(Joseph Nawahi)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나라들이 떨어져 있으니 마땅히 조정(漕艇) 종목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높은 사람이 가야 체통이 선다는 이유로 졸지에 내몰려 온 북경 공화정부의 서세창(徐世昌)은 서예가 마땅히 그 종목에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그 외에도 일본과 의기투합 –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 하여 아주대회를 연다면 반드시 무덕(武德) 선뵐 종목도 있어야 한다고 외치는 유구의 임세공(林世功, 린 세이코) 일행도 있었다. 아마 세상을 둘러보다 보니 저들의 당수(唐手) 재주가 뛰어난 축에 듦을 깨닫고서, 검 쓰는 일은 일본, 손발로 싸우는 일은 유구가 각각 내세우기로 물밑에서 합의를 한 듯하였는데, 아무래도 정말 육예가 오롯이 종목으로 채택된다면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인 듯하였다.

하여 결론 아닌 결론을 모임에서 내리기로는, 우선 되는 대로 모두 집어넣되, 규칙을 아예 모르는 나라도 있고 또 규정의 유불리를 두고 싸움이 일어나기 좋았으므로 사 년의 유예를 두기로 하였다.

그 직후 곧장 각 나라의 재주 있는 이들끼리 뭉치기 시작했는데, 스스로도 솜씨 있거니와 뒷배도 든든한 오세창이 나서서, 대원군을 좌장으로 모시고 발족한 조선화필회(朝鮮華筆會)는 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대원군이 - 물론 난초 치는 것보단 못해도 - 나름 명필이라고는 하지만 남들 보기에 그를 모신 것이 암만 보아도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라, 때아닌 잡기 경쟁이 참의원 안팎을 덮치게 되었다.

“그래서 무어라 했는가?”

“아무리 그래도 저도 나이가 나이인데, 조금은 어렵겠다며 사양했지요. 그래도 한사코 붙기에, 우선 요새 한가한 다른 사람을 붙여주었습니다.”

결국 대원군처럼 이름만 올리기로 하고 실무는 황현에게 떠넘긴 최익현이었다.

“허허, 하다못해 공자께서도 직접 수레 몰고 전쟁에 나선 적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선비라는 사람이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공자께서 전쟁에 나가셔서 이기신 적도 없음을 잊으면 안 되겠지요.”

뒤낭이 고약한 농담 던지니 최익현은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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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자로 수를 세는 것은 그 기원을 알 수는 없으나, 한중일을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습니다. 5획 한자 중 가장 단순하기도 하거니와, 丁, 下, 止 등 비슷한 자형의 글자가 있어 인쇄하기에도 편리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Hsieh(1981), “Chinese Tally Mark.” The American Statistician 35(3)). 그러나 이러한 셈법이 행렬을 맞추어 표를 사용하는 관행이 먼저 존재해야 널리 쓰일 수 있음을 고려하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원 역사에서 1899년 개최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이후에도 많은 나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상설중재재판소 설립, 독가스와 할로우포인트(덤덤) 탄 사용 금지 등 여러 성과를 이끌어냈습니다. 1903년 대한제국도 서명국으로 참여하는 등, 여러모로 ‘만국’이라는 한자 이름에 어울리는 성과였지요.

그러나 국제법 관점에서는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정작 과열되기 시작한 열강 간의 경쟁을 식히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 한계가 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1907년 2차 회의 당시 헤이그 특사의 실패로도 잘 알려져 있고, 보다 크게는 1차대전이라는 거대한 파국이 있었지요.

비록 네덜란드 헤이그(덴 하흐)에서 열리기는 했지만, 원 역사의 만국평화회의는 본디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발상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작중에 등장한 프랑스계 러시아인 장 드 블로크의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과의 군비경쟁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라는 현실적인 의도도 있었지요.

작중 뒤낭의 언급으로도 등장한 블로크는, 본래 경제학자이자 성공한 사업가로,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쟁이 모든 열강에게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논증하려 노력했습니다. 일례로 그의 연구를 집대성한 1899년작 『전쟁의 미래(The Future of War)』는, 당위적인 주장이 아니라 개인화기의 발달에 대한 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마르텐스는 저명한 법학자이자 러시아 외무부의 일원으로서 국제법과 관련된 사안에서 러시아의 입장을 내세우는 데 크게 일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후대의 국제법학자들에게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합의된 육전협약의 유명한 ‘마르텐스 조항(명시적인 조항이 없는 경우에도 일반적인 인도주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내용입니다)’에 이름을 올리는 등, 현실 국제정치에도 나름의 족적을 남겼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총리와 국회의장을 역임한 오귀스트 베르나르트는, 헤이그 평화회의에도 벨기에 대표로 참가해 상설중재재판소 설립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0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지요.

린 세이코 - 일본식 이름(야마토나)으로는 나시로 슌보(名城春傍) -는, 원 역사에서는 코치 쵸조(쇼 토쿠코)와 더불어 일본의 류큐 병합에 반대하고자 청으로 밀항한 류큐의 지사입니다. 원 역사에서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류큐 처분이 공식화된 뒤 자결하였지만, 작중에서는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중국 유학생 출신의 엘리트라, 작중에 등장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와 함께 언급되는 당수는, 중국 남부의 무술과 류큐 고유의 무술이 결합한 것인데, 후일 류큐 합병 이후 가라데라는 이름으로 일본, 나아가 전 세계에 퍼지게 됩니다.

조지프 나와히(하와이식 이름으로는 이오세파 카호오루히 나와히오칼라니오푸우)는 원 역사에서도 하와이의 정치인으로 활약했으며, 릴리우오칼라니 국왕 아래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샌포드 돌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곧 미국에 편입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하자, 나와히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옮은 결핵으로 말미암아 1895년 사망합니다.

앞서 지나가듯 언급된 에티오피아 사정이 조금 더 자세히 나왔습니다. 함께 언급된 수단은, 1881년 종교지도자 마흐디를 중심으로 일어난 봉기로 말미암아 영국의 사실상 지배를 받던 이집트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1885년 수단의 현 수도이기도 한 하르툼을 함락시키고 영국군 장군 고든을 전사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바로 옆 에티오피아를 공격해 황제 요한니스 4세를 전사시키고,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를 공격하는 등 호전적인 행보를 지속했습니다. 고든의 복수와 수단 재정복을 목표로 파견된 키치너에 의해 1899년 멸망할 때까지 마흐디 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여담으로, 이때 마흐디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옴두르만 전투는 기관총의 위력이 여실히 드러난 사례인 동시에, 윈스턴 처칠이라는 젊은 소위가 참전한 전투이기도 했습니다.)

전근대적인 무장이 대부분이던 마흐디군이 거의 20년 가까이 버틸 수 있던 이유는 여럿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영국에게 수단이 “가치가 상당하기는 하되 파산과 대규모 증세만큼의 값어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집트 통감으로 있던 크로머 백작의 평가입니다.). 그러던 중 마흐디군을 위협할 수 있던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를 공격하다가 아두와 전투에서 에티오피아군(원 역사에서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후원을 받았습니다.)에게 전멸당하면서, 이 지역 전체가 반영으로 돌아서거나 다른 열강이 개입할 것을 두려워한 솔즈베리 내각이 전면 개입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언급된 조선의 바둑은, 사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둑과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특히 인기를 얻어 ‘국룰’로 정착된 순장바둑은 초반 포석이 규칙으로 확정되어 있는 등 (실존하는 조선시대 바둑판의 화점이 많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일본 바둑의 표준이 도입된 뒤와는 많은 것이 달랐습니다.

자동차 경주는 사실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보다도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증기기관 등을 활용해 인력이나 축력을 사용하지 않고 움직이는 교통수단으로서 자동차의 개념은 19세기 초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다만 상용화가 어려웠을 뿐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자동차가 발명된 직후부터 체계화된 자동차 경주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작중 시점에서는 이미 프랑스를 중심으로 정례화된 장거리 경주가 열리는 상태입니다.

공자가 전쟁을 지휘한 사실은 『사기』 공자세가를 비롯해 여러 문헌에 전합니다. 노 정공 12년(BCE 498), 국정을 전횡하던 세 가문인 삼환(三桓)의 세를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던 공자는 끝내 무력에 호소하여, 삼환의 하나인 맹씨(孟氏)의 요새를 포위공격했으나 끝내 이기지 못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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