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22화 (222/320)

73. 아시아의 사냥감 (2)

비율빈이야, 대만 오가는 이들이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늘어나면서 더 남쪽 바다에 그런 곳도 있다 하는 정도로 아는 자들이 많았지만, 정작 그 종주(宗主) 되는 서반아(西班牙, 스페인)국에 대해 아느냐 길거리에서 묻는다면,

‘서반(西班, 무관) 많아 서반아인가? 아니면 반아국의 서쪽을 일컫는 말인가?’

할 것이다.

스페인 입장에서도 딱히 할 말은 없는 것이, 처음 조선이 개항하겠다 하였을 때 수호조약 체결한 뒤로 주중공사로 하여금 혹 일이 있으면 맡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한 이래, 그 후로 공사가 파견되었다고는 하지만 딱히 연 맺을 일이 그 뒤로는 별로 없던 것이다. 그나마 가배 원두 들여오는 정도로 소소한 연 – 밤 새는 관료들에게는 악연 중의 악연일 것이다 – 있는 것이 전부랄까.

다른 당이라면 모를까, 실익을 잘 따진다고 자부하는 개화당 내각 젊은이들이 보기에, 서반아 공사 베르나르도 데 콜로간(Bernardo Jacinto de Cologan y Cologan)이 항의야 하든 말든, 카티푸난(Katipunan, 필리핀의 독립단체)의 붉은 깃발 휘날리며 보무당당히 입성한 리살 일행을 접견한다 해도 조선 입장에서 둘러댈 변명은 많고 서반아 쪽에서 들고 나올 수는 별로 없었다.

물론 개화당은 물론이요 하다못해 개항 이전이라고 하더라도, 유원(柔遠, 멀리서 온 이를 대접함)은 예의지국 조선의 법도이므로 박대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필리핀 땅에서 나오는 원두는 아국 서생들의 벗이기도 하지요.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스스로 힘으로 발전하는 조선국을 보니, 언제고 저의 고국이 나라로 바로 설 때 본받을 수 있을 듯하여 그간의 고생이 모두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으로, 예조 사람 대신 이 사태의 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 윤치호로 하여금 공조 아문에서 리살을 맞이하게 하였는데, 리살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응대하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달달하면서도 씁쓸하여 맛의 덕을 고루 갖추었다고 여러 사람이 – 주로 그 가배 내오라 하는 귀남 앞에서 – 찬탄하는 ‘가-배’를 즐기는 것은 진심인 듯하였다.)

“이번에 아시아의 사람들끼리 교류하는 행사를 기획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에스파냐 본국은 멀리 대륙 반대편에 있지만, 우리 필리핀은 엄연히 아시아의 일원입니다.”

조심스러운 환대를 보고서, 본심을 내보여도 괜찮다고 판단한 것인지 리살이 곧장 본론을 털어놓았다.

“비록 에스파냐의 국력이 쇠퇴한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필리핀 땅에서는 여전히 그 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우리를 제대로 된 문명국으로 이끌 만한 힘은 없지만 탄압할 정도의 힘은 남은 것이지요.

허나 평화와 도덕의 이름을 받들어, 우리 필리핀 사람들을 대표해 이렇게 왔으니 그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물론 조선도 사람 사는 곳이니, 예컨대 리잘의 말만 듣고 곧장 그 이름난 육십만 대군을 마닐라로 진주시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적어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개입하기 좋아한다는 그 명성(혹은 악명)은 널리 퍼져 있었다. 그 무렵 유럽에서 학창시절 보내던 리잘도 당연히 조선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들어 알고 있었다.

“으음... 그런 뜻이라면 차라리 루손에서 가까운 대만이나 홍콩을 통해 우리에게 연통을 넣는 것이 맞았을 듯하군요. 이번에는 오직 예(藝)로써 사귀는 자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인데...”

물론 스페인 국기 대신 엉뚱한 적기를 휘날리며 들어왔을 때부터 무언가 정사에 관한 속뜻이 있으리라 짐작은 하였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꺼내드니 윤치호도 잠시 당황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저와 함께 온 사람들도 모두가 훌륭한 젊은이들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오직 총칼만이 답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도독령(Capitanía General de Filipinas)이 내건 소위 개혁들이 이름만 거창할 뿐 내실은 없었으니 그렇게 여기는 심정도 이해는 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납과 피 대신, 땀과 잉크로 독립을 이루는 길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회를 통해 그런 뜻을 보이고자 한다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카티푸난의 존재가 드러났으니, 소식이 도독령으로 전해지면 곧 탄압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 전에 먼저, 확고히 우리의 대의를 세계 만방에 떨치고자 합니다.”

그 무렵 소식을 듣고 긴급한 본국의 지령을 받아 황급히 접견을 요청한 콜로간 공사도, 귀남 앞에서 절절히 저들 사정을 밝히고 있었다.

“... 그리하여 식민지를 유지할 여력이 그리 많지는 않은 상황입니다. 지금까지는 저들... 불온분자들이 그래도 당국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선을 지키고 있었지만, 만일 저들이 본색을 드러내어 무력에 호소한다면 상당히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요.”

따지고 보면 식민지 획득과 운영의 비용을 터무니없게 올려버리는 데 일조한 조선의 탓이기도 했지만, 그 내막을 모두 아는 이들이 아니고서야 그 인과를 알 수 없으므로, 조선으로 말미암아 입은 해를 바로 그 조선 국왕 앞에서 하소연하는 조금은 이상한 판국을 정작 당사자들은 괴이쩍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굳이 트집을 잡는다면, 아무리 국왕이라지만 남의 나라 사람인데 이렇게 속내 여실히 드러내는 것을 들 수 있을 테다.

그러나 그것도 정동 일대의 상식으로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국왕이라는 이가 고작 군밤 굽기로 소일한다고 해서 우습게 여겼다가 -조선 속담을 빌리자면- ‘거대한 코에 부상을 입은’ 사람이 (너무나 늦게 프랑스 외교계의 위인으로 대접을 받게 된) 앙리 드 벨로네 이후로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여겨서, 저의 속뜻을 뱅뱅 돌려 이야기하다 보면, 오히려 저의 그 미사여구와 명분이 또 다른 빌미가 되어 골탕을 먹거나, 분명 잘 풀리기는 하였지만 본뜻과는 한참 동떨어지게 되는 경우가 또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완전히 조선 국왕을 이해하려 지나치게 힘을 쏟느니, 차라리 적당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서 원하는 바와 그 주변 사정을 상황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진솔히 털어놓는 것이 모두에게 가장 속 편한 길이라는 것이 정동의 상식이었다.

“애물단지다 이 말이구려. 그러면 저들 원하는 대로 놓아주면 될 일이지 않소?”

독립은 좋은 것 아닌가. 더구나 지금 들어보니 주인 행세하는 이 서반 무슨 나라 – 언뜻 비슷한 이름을 테레비에서 들었던 것도 같았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 도 사정 여의치 않다 하니, 그 독립을 애써 막을 이유가 무엇인가 싶었다.

“그것이 또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너무나 큰 사냥감을, 너무나 약한 턱으로 붙들고 있는 셈이지요. 그대로 잡고 있기도 힘들지만, 놓아주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찬란한 과거의 영광 전체를 잃게 될 것입니다.

유럽에서 쓰는 말로,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Homo homini lupus)라고 합니다. 만약 필리핀을 그대로 떨어져나가게 한다면, 그 다음에는 쿠바가, 더 나아가서는 바로 본국의 목젖인 모로코까지 다른 늑대들의 이빨이 닿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저들 필리핀 사람들과 이번 기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 봄은 어떻겠소? 내가 듣기로 저들도 폭력은 원치 않아, 화평 지키면서 하나의 나라로 설 뜻을 밝히기 위해 찾아왔다 했소.”

“허나 먼저 나서서 물러날 뜻을 밝힌다 해도,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그것이 고심거리입니다. 독립을 약속하든, 자치권 확대를 약속하든 해서 명예로운 철수를 내세운다 한들, 필리핀 현지인들이나 다른 열강이 믿지 않는다면 결국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그대 나라에서 청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오?”

“귀국에 제공할 수 있는 대가가 없으니, 과분한 요구도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나라 사이 우의를 생각해, 저 필리핀의 자칭 대표단을 받아들이더라도 부디 그 이상은 하지 않아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시 말해 박대까지는 하지 않아도 이 아주대회라는 것을 할 때 당당하게 나라의 반열에 동참시키거나 하지는 말아달라는 뜻이었다. 마음이 모질지도, 모진 시늉 할 만큼 단단하지도 못한 귀남은 우선 알았노라 이야기하고 돌려보낼 뿐이었다.

“거참, 여럿 모여서 재주 겨루는 대회 한 번 열어보려 하였는데 사정이 복잡하게 되었구려.”

한쪽에서는 윤치호를 통해 들어온 리살네 필리핀쪽 사정을 취합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귀남 본인이 들은 스페인 본국 사정을 정리하여 보니, 각자 원하는 바는 많고 다 맞추어주기는 난망한 듯하였다.

‘필리핀’ 이름 내걸고 스스로 참여하겠다 하는 쪽과, 그것만은 막아달라 하는 쪽이 있으니 충돌이요, 더 크게는 지난 수백 년을 지구 곳곳 돌아다니며 깃발 꽂던 대서 나라 버릇의 뒷수습과 얽히게 되었으니, ‘복잡하다’ 하는 귀남 말에 일리가 있고도 남았다.

이 일의 발단이 된 경연 모임을 그대로 소집하여 대책을 묻고자 함은 그 떄문이었다.

“지난 북경행 이후로 동방 정세가 다소 어지럽게 되었으니 그럴 법도 한 일입니다.”

내각의 예조판서로는 금릉위 박영효의 형 박영교(朴泳敎)가 따로 있지만, 아무래도 개화당 내각에서 가장 세상 이모저모 많이 보고 듣고 접한 김옥균이 드러나기도 더 드러나고 본인 나서기도 더 나서는 편이었다. 우직하게 실무만 수행하는 성품의 박영교가 아니라, 예컨대 저 나름대로 할 말은 하는 병판 홍영식 같은 – 얼마 전 북경에서 철병할 때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했다 – 이었더라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테다.

“청국이 이제 변법의 길을 틀어, 각 성으로 하여금 자부(自富)케 할 방편을 구하게 한다 하니, 일전에 법국과 아라사국이 제의했던 것과 같이 몇몇 성들을 묶어 저의 강역과 다름없게 하려는 그런 심산을 대서 나라들 중 한둘 쯤은 품을 법도 합니다.

저들은 바다를 건너오니 반드시 연해(沿海)한 곳을 저들의 터전으로 삼아, 중원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얻고자 할 것입니다.”

몇 해 전 미국 땅에서 마한(Alfred T. Mahan)이라 하는 서생이 대서의 사적(史籍)을 폭넓게 인용하여 밝히기도 한 바 있었는데, 얼마 전 김옥균도 이를 접하고 흥미롭게 읽은 바 있었다. 그 논지대로라면 대만 다음으로 중원에 가까운 땅이 비율빈이니, 덕의지는 반드시 탐낼 것이요, 지금까지는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제하였다지만 이만한 먹잇감이라면 미국 역시 가만히 있으리라는 보장은 또 없었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비율빈이 서반아의 지붕 아래 남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말씀 올리건대, 서반아 공사의 청을 가납하심이 어떠할지요?”

길거리 장삼이사를 데려다 놓아도 정사를 능히 논할 수 있는 것이 조선 사람이요, 그리하였을 때 차라리 주먹다짐으로 결착을 볼지언정 결코 저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 또 그 흔한 성정이다.

“신 봉준은 아뢰옵나이다. 영상의 진언과는 반대로 비율빈의 이씨를 높임이 가당하다 하겠습니다.”

나이 먹으면서 영국과 독일, 조선 아낙들의 억척스러운 굳건함을 모두 저의 것으로 합일(合一)한 엘러노어가 타박 반 걱정 반으로 툭하면 전봉준에게 말하기를 그 나이 먹었으면 눈치가 반절은 따라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곤 하였다. (그런 사정까지는 신경쓰지 않는 호사가들은, 오경석의 예를 들어 잡혀 사는 것은 공산당 팔자라고 놀리기도 하였으나 전봉준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할 말은 하는 것이 평소 성정이거니와 올바른 처세의 길이라 여기는 전봉준은, 그 공산당 이론 얘기할 때마다 썩 내키지 않게 듣는 주상임을 알면서도 꼭 이렇게 한두 마디씩 꺼내어 저의 뜻을 밝히곤 하였다.

“사사로이 장인 되는 마극의 이론을 미루어 보면, 결국 서반아국이 비율빈에 한 것처럼, 말과 땅 다른 부류를 강제로 묶어 한 임금을 섬기게 하는 것은 그로써 이익을 얻기 위함입니다. 허나 그 이익은 부득불 나날이 줄어들고, 결국 힘이 다하게 되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서반아국은 대서 나라들 중에서도 세력이 약하여 마치 한(韓)과 같은데, 그러므로 비율빈이 처음으로 불거진 것이요 장차 천하의 다른 모퉁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대세인데, 지금 잠깐의 평온을 위하여 이를 거스르게 되면 도의를 숭상하는 아조의 이름에도, 또 실리에 있어서도 결코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기무회의처럼 이목 많은 곳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어전인데, 이렇게 정면으로 공박을 당하니 김옥균도 자연스레 호승심 생겨, 곧장 다시 반박하여 논쟁이 붙었다.

물론 경연판에서 이렇게 논쟁 일으킨 뒤에 지켜보는 것이 옛날 김옥균이 처음 경연관 들어왔던 시절부터 귀남이 종종 하던 일이기는 하지만, 이번 일은 들을수록 남의 일만은 아닌 듯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반아 사정도 나름대로 안타까운 면이 있는 것도 같아, 양쪽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마찬가지로 함께 고민하던 최익현이, (비교적) 연소한 두 사람이 말 마치기를 기다려 저의 뜻을 밝혔다.

“나라 사이에 크고 작은 이치는 처음 사람이 나라를 세울 때부터 있었으나, 이는 정해진 것도 아니요, 또 견주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컨대 연(燕)은 중원에서는 가장 궁벽한 곳에 있어 그 군세도, 민호도 부족하였으므로 약하였지만, 이웃한 옛 조선을 쳐서 이천 리 땅을 빼앗았으니 둘 사이에서는 강하였습니다.

아성(亞聖)은 이르기를, 오직 어진 자만이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다 하였습니다. 중원이 스스로 천조 되기를 포기하였으니, 이제 헤아리기에 따라 우리도 큰 나라입니다. 지금 세상의 큰 나라들이 작은 나라를 속국으로 삼는 병폐가 있는데 여기에 뇌동한다면, 낙천(樂天, 하늘을 즐겁게 여김)은 물론이요 외천(畏天, 하늘을 두려워함)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번 열린 입에서 간만에 문장이 쏟아져 나오니, 한 발 떨어져 보면 마치 젊은 사람들에게 ‘너희만 입이냐’ 하면서 본때를 보여주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김옥균과 전봉준 모두, 그런 최익현의 말을 썩 좋게 여기지는 않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유생의 말이라 여기기 때문일 터.

“그렇다면 어찌하여야 하겠소?”

“신이 듣기로, 금번 사안은 비율빈과 서반아 두 곳의 사람이 서로 믿지 못하고, 또 그 이웃을 믿지 못하는 것이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공양전』에서는 대일통(大一統)을 말했으니, 이는 천하를 한 지붕 아래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문덕(文德)으로써 만국을 묶는 것입니다. 이미 아주대회를 여는 일을 논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초빙하였으니, 다시 한 번 글월을 보내어 대회의 일과 함께 이들 소위 ‘식민지’ 나라를 풀어주는 방편을 논의하자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최대한 정중함 갖추면서도 심드렁하게 김옥균이 반론하였다.

“이르신 바는 물론 그 뜻이 고매하지만, 앞서 아주 각국뿐 아니라 연이 있는 다른 대서 나라들에도 우리 예조가 글을 보냈지만 대개 답서(答書) 보내기를 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직접 이익에 닿지 않는 일에 있어서도 이러한데, 혹 면암 선생께서는 대서 나라들로 하여금 우리 땅에서 회맹(會盟)케 할 방도를 알고 계신지요?”

허나 의외로 최익현의 머리에서는 나름대로 구체적인 방안이 나와, 김옥균을 무안하게 하였다.

“정말 그대로 하면 되겠습니까?”

박영교 한 사람에게만 전해주면 될 일인데, 그 자리에 홍영식도, 윤치호도, 또 그들 따라다니는 서재필도 끼어서 자리가 번잡하였다.

“어지가 그러하니, 무어라 반박할 명분 없으면 이대로 하세나들.”

최익현의 방편이란, 아주대회의 일은 곁가지로 제쳐두고, 이른바 ‘화평회의’를 새로 열자는 것이었다. 속번(屬藩)과 식민지들이 하나씩 이반하는 것이 천하의 대세라면, 반드시 그로 말미암아 언제고 크나큰 전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 여력이 있고 또 감정이 크게 상하지 않았을 때 대서 나라들을 묶어, 예컨대 원치 않거나 유지할 수 없는 그들의 외번을 어찌 처리할 지에 대해 약조 나누도록 하면 될 일이라는 것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앞으로 전쟁 벌일 일 있을 때 지켜야 할 규칙 따위도 논의하고, 속국과 식민지 다루는 일도 논의하고, 좌우지간 해석하기에 따라 세상 만사를 논의할 수 있다는 식으로 글을 보내자는 것일세. 그리하면 우선은 자리에 빠져서 손해보기를 원치 않는 나라들이 하나씩 나아올 것이라는 말인데...”

물론 최익현이 한 것치고 현실적인 제안 – 그를 다소 낮추어보는 감이 있는 김옥균이었다 – 이라 여길 뿐, 실제로는 대개 형식적으로 응할 뿐이리라 여겼다.

“그런 대책 없는 ‘아이디얼리스트(이상주의자)’가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그나마 아국이 누대에 걸쳐 선비를 드높였으니 그런 이들이 많은 축에 들지, 나라의 고관들을 어지간히 대충 뽑지 않고서야 진지하게 나오지는 않을 걸세. 그러나 우선은 시도부터 해 보아야 후에 할 말이 있지 않겠나?”

그리하여 정말 최익현 발상대로 여기저기에 글을 뿌렸는데, 엉뚱하게도 동맹의 의리인지 아라사를 시작으로 법국이 따라오고, 영국은 물론이요 마침내 덕국까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김옥균은 반드시 그들 대표단이 오게 되면 무슨 생각인지 따져물을 생각을 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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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 개척’을 통해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긴 스페인은,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국가 파탄의 위기를 맞은 뒤 근대로의 전환에 난항을 겪었습니다. 30년전쟁 후 유럽 내에서의 영향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국내적으로는 식민제국을 재정비하고 안정화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19세기에 접어들 무렵 시몬 볼리바르를 필두로 한 남미 독립운동으로 식민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본토가 피해를 입은데 이어 내전까지 겪게 됩니다.

1898년 미서전쟁으로 쿠바와 필리핀을 상실한 것은 몰락의 결정타였습니다. 그나마 유지되던 식민제국은 이로써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되었고, 그동안 세계제국으로서 스페인이 가졌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미서전쟁으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아, 코앞인 모로코까지 독일과 프랑스의 각축장이 되기까지 했지요. 이러한 우울과 혼란 속에서 많은 인문학자(이른바 ‘98세대’)들이 배출되기도 하였으나, 그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할 무렵 다시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한때의 강대국에서 다른 강대국의 대리전 전장으로 전락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당시 스페인의 서글픈 위상을 보여주는 한 가지 일화로, 의화단 운동 진압 후 열강이 청 정부로부터 받아낸 배상금 4억 5천만 냥 중 스페인의 지분은 38만 8천 냥에 불과하여, 일본을 포함한 열강들 중 가장 적었습니다. 이 협상을 맡았던 것이 1894년부터 주청공사를 맡던 베르나르도 데 콜로간이었는데, 여러모로 부족한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발언권을 행사하였다는 점을 인정받아 귀국 후 여러 훈장을 수훈키도 하였습니다.

무장 독립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에 따라 스페인은 필리핀을 일본에 매각하는 안도 고려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미서전쟁 패전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요.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필리핀에 대한 스페인의 식민통치도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특히 유럽과의 경제적·인적 교류가 강화되면서, 필리핀 현지 엘리트들의 경제력과 교육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스페인 본국에서도 자유주의 기조가 확산되어 필리핀의 자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스페인 본국에서 지지 기반을 얻기 쉬워졌습니다. ‘필리핀인’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지요.

그러나 필리핀인 정체성의 확립과 독립투쟁 노선의 확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스페인 당국의 탄압이었습니다. 특히 1872년 카비테(Cavite) 폭동에 관여했다는 일방적인 혐의로 무고한 성직자 세 명을 처형한 일(곰부르자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점차 독립투쟁은 조직화되었고 기존의 온건 개혁파들도 점차 과격화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필리핀 독립의 영웅으로 지금도 기념되고 있는 호세 리살(리잘)은 유럽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 출신으로 – 실제로도 일기를 쓸 때마다 언어를 달리하여 적는 버릇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능력이 있었습니다 -1892년 필리핀 연맹(Liga Filipina)을 창설하여 개혁운동의 저변을 넓히고 다양한 실력양성 운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 전부터 유명한 필리핀 민족주의 소설들(대표적으로 『나를 만지지 말라(Noli Me Tangere)』)로 인해 당국에 밉보였던 그는 곧 체포되었고, 필리핀 연맹 역시 내부 노선투쟁을 겪게 됩니다.

여기서 득세한 것이 과격 독립투쟁 노선이었고, 이들은 작중에 등장한 카티푸난(타갈로그어로 겨레의 후예들의, 가장 존엄하고 권위 있는 연합 Kataastaasan, Kagalanggalangang Katipunan ng mga Anak ng Bayan의 준말입니다. 다소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약어로는 KKK가 되겠습니다.)을 결성하여 무력독립을 준비하게 됩니다.

리잘은 카티푸난의 노선에 대해 다소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6년 카티푸난 조직이 발각되면서 그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이는 조직 발각 직후 시작된 무력혁명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아직 열강의 말석에나마 드는 스페인이었기에, 대규모 병력을 증파하여 한때 혁명군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지만, 결국 전황은 교착에 빠지게 되었고, 그러던 중 미서전쟁이 일어나, 그 일환으로 미국 태평양전대가 핵심 거점 마닐라를 습격하여 스페인 해군을 전멸시키면서 결국 필리핀은 스페인의 손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것처럼, 겨우 독립을 얻은 필리핀 역시 불과 1년 만에 미국에 의해 다시 독립을 상실하게 되지요.

국제사회의 무정부상태를 춘추전국시대에 비유하는 것은 한중일을 막론하고 근대를 통틀어 흔한 비유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합종연횡’ 같은 고사가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영향력이 있다 하겠습니다.)

작중에는 아직 ‘한국’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지 않은 관계로 오해의 소지가 적은 한(韓)나라는 전국칠웅 중 힘이 약했을 뿐 아니라 진, 초, 조 등 강한 국가들 틈바구니에 끼어 좋지 않은 쪽으로 환상적인 입지를 자랑했습니다. 비슷하게 약소국에 들었던 연나라는 반면 북동쪽 변경에 위치하여 그만큼 수난을 당하지는 않았지요.

지나가듯 언급되는 마한, 즉 알프레드 메이헌은 명저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1890)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는 강대국 군비경쟁이 가시화되던 시대적 상황과 맞물린 면이 컸습니다. 당시 그의 명성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일대를 방문했을 때 국빈 자격으로 대우를 받을 정도로 높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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