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20화 (220/320)

72. 빛의 실마리 (3)

간만에 힘을 쓰는 바람에 슬슬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허리와 그 이하 관절들을 애써 무시하며, 황급히 귀국한 이홍장은 예를 갖추었다.

“내 불민하여 경이 여유롭게 외유하지 못하게 만들었구려.”

황제의 얼굴을 살피니, 이홍장 자신이 쫓기듯 떠나갈 때 보았던 그 패기는 사라지고, 대신 나이에 맞지 않는 고뇌와 그만큼의 원숙함이 깃든 듯했다.

“나라의 은혜 거듭 입은 몸으로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더구나 구주 천지 어디에도 이번의 이... 정변을 논하지 않는 이들이 없는바, 몸이 만리 밖에 있다 하여도 마음이 도저히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그런 역신들이 신의 아래에서 나와 급기야 차마 말로 옮길 수 없는 화란을 일으킬 지경을 만들었으니, 비록 천운이 따라 수습되었다지만 어찌 신의 죄가 망탁(莽卓, 왕망과 동탁)에 견주어 가볍다 하겠습니까.”

“모든 잘못은 이 한 사람이 짊어지기로 하였거늘, 이제 와서 무슨 허물을 더 논하겠소?”

“참으로 지극한 성덕입니다. 천시(天時)와 지세(地勢)가 모두 대청을 버린다 한들, 사람이 그 사이에 남아 있는 한 폐하께서는 이번의 성단 하나만으로도 결코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 들은 광서제가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경의 앞이니 허심탄회하게 말하자면, 아직도 잘한 일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소... 그저 비상한 시국에 비상한 계책을 내어야 하니,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부여잡고 거짓으로 성세(聲勢) 꾸몄을 뿐인데, 한편으로는 후련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끝내 미련을 버릴 수 없소.”

“큰일에는 그만한 회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홍장 본인부터가 그런 회한에 휩싸여 돌아오지 않았는가.

‘네놈들이 정녕 망국을 바라마지 않았던 모양이로구나’ 하면서, 원세개 아래에 있던 모자란 놈들 셋을 모두 꿇어 앉혀 놓고 가슴팍 두어 번씩 차 주고, 좌우 균형 맞추어 얼굴도 몇 번 후려갈겼더니, 잠시의 화는 조금 풀렸지만, 그만큼 앞날 근심도 차올랐다. (직접 목을 부러뜨리고 싶은 심정 들게 만들었던 원세개는, 어딘가로 사라져 누구도 종적을 모른다 들었다.)

“경의 말이 이치에 맞소. 자, 그러면 젊은 사람 넋두리는 그만 듣기로 하고, 아마 아뢰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 찾아온 것이리라 믿소만.”

“그렇습니다, 폐하. 이전에 가까이 두시던 학사 무리들이 아직 경조에 남아, 더욱 해괴한 계책으로 나라 앞길을 어지럽히려 하고 있기에, 혹 이것이 성총의 그늘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두려워 찾아왔습니다.”

자칭 ‘북양삼걸’ - 이홍장 생각에, 그런 자들이 호걸이라면 저나 스승 증국번 같은 사람들은 천존(天尊)쯤 될 것이었다 – 주먹찜질해준 후 손덕명 그 작자와 다른 애송이들 머무는 곳에 쳐들어가 멱살을 잡았더니, 당당하게 하는 말이 이렇지 않은가.

‘중원 땅에 잘못을 저질렀으니 수습도 저희 손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중당께서 마침 찾아오셨으니 고견을 미리 청하겠습니다.’

멱살 잡혀 발이 땅에서 두어 치 떨어진 뒤에도 애써 태연한 시늉하며 그리 말하니, 한 번 들어나 보자 하는 생각에 내려놓았더니, 나오는 말이 점입가경이었다.

‘중당께는 죄송한 일이나, 북양군을 흩어 각지에 두는 것은 이미 황상께서도 약조한 바입니다. 이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한 강남의 민심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중원과 옛 외번을 그래도 겉으로나마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것이 군병의 힘임은 자네들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렇습니다. 그러니 병장 대신 다른 방편으로 천하를 한데 묶으면 될 일입니다.’

손 한 번 잘못 잡았다가 청운의 꿈이 줄줄이 파탄날 판이었던 변법공자들이, 황상이 내어준 마지막 동아줄을 부여잡기 위해 열흘 밤낮을 머리 맞대고 궁리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천하의 대세가 합한 지 오래되면 반드시 갈라지고, 갈라진 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진다 했습니다. 그러나 옛일을 살피면, 합칠 때도, 갈라질 때도 중원은 크게 혼란해져,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사이(四夷)는 구주를 탐내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어떻겠습니까.

하여, 저희가 생각하기에 방편은 천하를 합치지도, 갈라놓지도 않고 금만 간 채로 묶어두는 데 있습니다. 이미 백이십여 년 전 미리견 땅에 화성돈(워싱턴)이 나와 합중국을 세웠으니, 천하에 처음 있는 형국도 아닙니다.’

어느 순간엔가 힘 풀려 손덕명의 발이 다시 땅에 닿았다. 하지만 손의 힘은 다했을지언정 이 백면서생 무리들을 믿지 못하는 마음만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남양 군세를 흩은 것처럼 각 성에 군을 두어 스스로 운영케 하고, 다시 육군(六軍, 천자의 군대)을 두어 방비의 핵심으로 삼겠다?’

‘그렇습니다.’

‘주·소(周召)의 공화(共和)는 고작 열네 해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문무성강(文武成康) 네 선왕의 은택(恩澤)이 앞에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네 녀석들의 이 우활한 계책이 장구지계는커녕 미봉책에도 들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고, 비록 누대의 교화가 있었다 하나 소인의 수는 군자에 비할 수 없다. 여러 성 중 하나에서라도 원가처럼 사특한 자가 나타나, 주어진 군병으로 천하를 저의 것으로 삼을 흉계를 꾸미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겠느냐?’

그러나 고사와 이론으로 이들을 이겨보려 한 것은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이홍장의 실책이었다. 기세가 눌렸을 뿐 그 머리는 얄밉게도 멀쩡히 돌아가, 양계초를 필두로 하나씩 나아와 저들의 계책이 치밀함을 뽐내니, 늙은 이홍장이 홀로 다 논박할 수는 없었다.

‘추거로써 이를 막을 것입니다.’

‘추거가 무슨 양장(良將, 훌륭한 장수)의 이름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간사한 자의 마음은 어려운 것은 피하고 쉬운 것은 쫓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국헌을 새로 고쳐, 인심만 얻으면 작게는 자정·자의 양원(兩院)에 나아가고 크게는 이제 새로 세울 총통(總統)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다 하면 누가 은밀히 역모를 꾸미려 하겠습니까? 설령 그런 자가 나온다 한들 가장 그 자리를 탐내는 무리들끼리 서로 억누를 것입니다.’

절박한 마음 절반, 마지막일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저들 뜻 펼칠 최대의 기회 맞이하여 흥분되는 마음 절반으로 꾸민 방책이 한둘이 아니어서, 이어서 구구갑이 재정의 방책을 말하고, 담사동은 문(文)으로 중원을 하나로 지키는 방도를 소개했다.

끝내 이기지 못하고 나아왔지만, 그래도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못한 구석이 있었다. 조금 머리가 식자, 저의 화풀이에 눈이 돌아가 귀국 인사를 황상께 올리지 않았던 것도 흠례(欠禮)라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하여, 겸사겸사 찾아와 아뢴 것이었다.

“허허, 그런 사정이 있었구려. 허나 합중국의 법도라면 그들이 처음 떠올리고서 내게 와 고하였으니 따지자면 양달의 한가운데에 있는 셈이오. 이만하면 천조의 위엄을 대신할 방책으로 적어도 지금의 대에는 족하지 않겠소?”

‘천조의 위엄’ 하니 그제야 떠오르는 바 있었다. 자신이 집정하던 시절 가장 큰 걱정으로 삼았던 일이었는데, 이제야 염두에 두게 됨은 본인의 노쇠한 탓도 있지만 회군의 자식과도 같은 북양군이 자칫 나라 망하는 원인을 만들 뻔하였다는 데 놀란 것이 더 큰 연유일 터이다.

“듣기로 외번이 불공(不恭)하다 하였습니다. 이번에 천조가 더 이상 천조로 남지 않겠다 하셨으니, 저 몽고와 토번이 가만히 있지 않을까 두렵고, 또 조선이 혹 우리를 가볍게 여기고 무도히 전횡할까 그것이 근심됩니다.”

“애초에 천조가 천조가 아니라면, 구태여 사람이 다르고 말이 다른 족속들을 하나의 지붕 아래에 둘 필요가 어디 있겠소? 그리고 만일 그들이 중화와 함께하기를 원치 않아 제 발로 걸어나간다면, 비록 물 새고 외풍 드는 지붕이라지만 없던 것보다는 나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오. 그에 대해서도 우리 학사들이 세운 방책이 있소이다.”

서생으로 신문물을 이용해 신상(紳商) 중에서도 최대의 거부가 되었다는 남통재자 장건의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또 사실상 유배당한 공친왕이 동삼성 땅에서 식산(殖産)에 힘써, 한때 산과 벌판만 있던 곳에 이제는 금은이 넘쳐흐른다는 풍문도 직례에 떠돈 지가 오래였다. 이재(理財) 꺼리지 않는 광동 사람들이 대부분인 변법공자들도 모를 리 없었다.

“경세치용이 비록 나라의 힘쓸 바라 하나, 실제로 재보를 늘리고 물산을 풍족케 하는 것은 백성이라 하더이다. 각 성에서 스스로 민생 풍요케 할 길을 구하게끔 하면, 그 공효는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 만기(萬機)를 친람하는 것에 비할 수 없을 것이오. 이는 이미 강남과 동삼성에서 입증된 바요.”

그 ‘경제’라는 것은 사실 이홍장도 그리 비중 있게 생각하지는 않은 일이어서, 한편으로는 새롭게 여기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하고 있었다.

“중원은 넓고 땅은 비옥하니, 관민이 합심하여 스스로 부유케 한다면 필히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허나 이것이 외번이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과는 무슨 연관이 있을지요?”

“각 성이 자부(自富)할 계책을 세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각자 가장 잘하는 것을 그 업으로 삼는다면, 비록 시일이 걸릴지언정 종국에는 크게 이로워질 것이오. 외번으로 말하자면 결국 중원 바깥의 황복(荒服)으로 사람과 땅이 모두 부족한데, 그들이 예컨대 영국이나 아라사에 의탁한다 한들 부국할 길을 그 안에서 얻을 수 있겠소?

중원이 다시 풍요로워지게 되면, 결국 한때 떨어져나갔던 이들이 제발로 걸어들어오게 될 것이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병장은 오직 스스로 지킬 만큼만 갖추어도 이러한 일을 이룰 수 있다면, 비록 미답(未踏)의 길이라지만 한 번쯤은 택해볼 만하지 않소?”

“백년의 큰 계획으로 삼기에 족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다만 조선의 일이 여전히 걱정될 따름입니다.”

“아무리 이번에 갑자기 무위를 떨쳤다 하나, 그 조정의 온량함은 천하가 알고 또 나도 믿는 바요.”

결국 외번들이 떨어져 나간다 하면 그대로 내버려두고, 조선의 경우에는 그 선의를 믿는다는 것이었다. 딱히 답이 없기도 하여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이번에는 적어도 대계가 바탕에 있으니, 잘 버티기만 하면 무언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실낱만큼이나마 품게 되는 이홍장이었다.

북벌 아닌 북벌이 끝나고, 승첩 아닌 승첩 장계가 올라온 것도 몇 순은 되었을 무렵, 국왕 귀남은 손님을 맞고 있었다.

“미우라(三浦) 공사의 잘못은 재차 사과드립니다, 전하. 우리 일본국은 조선과의 우의를 이어나감에 있어 일말의 다른 마음이 없으며, 항상 예와 의를 지킬 것입니다.”

신임 일본 공사 이와쿠라 도모사다(巖倉具定)가 고개를 넙죽 숙였다.

처음 삼십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미우라가 경복궁 찾아와 조선이 무위를 드러냄을 축하한답시고 정성들여 만든 일본도 한 쌍을 선물로 바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귀남 눈에는 똑같은 왜놈 칼이요, 옛적 왜경(倭警) 순사들 차고 다니던 것과 비슷도 하여, 께름칙한 마음 감추고서 적당히 돌려보냈는데, 그 완곡한 거절의 말이 일본 사람들 듣기에는 영 섬뜩하게 들렸는지 며칠 뒤에 공사 체임 소식이 들려왔다.

가뜩이나 조선과의 군사적 충돌을 겨우 피한 상황에서 육십만 대군이 떡하니 현해탄 건너에 나타났으니, 그 진격 방향이 신주 반대편이라 해도 안심할 수 없는 판에, 지금 일본의 거의 유일한 수출 시장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을 조선이 군사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바, 일본으로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지만,

“딱히 이전에도 그가 실례한 것은 아니니 지나치게 그 한 사람을 책주지는 마시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미우라 한 사람의 실례가 아니다’라는 말도, 그런 판국이었으니 ‘미우라 한 사람이 아닌 일본 전체의 실례다’로 풀이될 수도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는 – 아마 귀남이 아니라 어지간한 조선 사람들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않을 테다 – 귀남은, 그저 왜 이리 이 일본인이 저자세를 취하는가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보다... 이번 일을 두고 중국 정부와의 사후처리가 완만히 진행되었다 들어 축하의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이제 아주 전체의 형세가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니, 우리 일본국은 조선의 우방으로서 마땅히 화평을 위해 힘을 다하겠습니다.”

요컨대 사후처리 사안 중 일본이 끼어들 만한 구석이 있다면 부디 알려달라는 청이었는데, 하필 배배 꼬아 얘기하다 보니 귀남의 대답은 짧았다.

“아, 고맙소.”

그리고 어색한 침묵.

“험험, 전후처리, 아니, 사후처리에 있어 일본 정부에서 파악한 바로는 전하의 정부가 매우 관대한 요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관대한지는 함부로 논하기 어려우나, 우선 은으로 출병한 비용을 보상하는 정도는 합의가 되었소.”

무릇 배상금이라 하면, 말이 배상이지 기둥뿌리 하나쯤은 뽑음이 상례일 터인데, 정말로 정직하게 계산하여 죽고 다친 이들에게 후하게 보상하는 것을 제하면, 정확히 군영에서 받는 봉급의 세 배씩을 각 군병 앞에 지급하기로 했으니, 조선 기준으로는 작은 돈이 아니겠지만 청국 기준으로는 미미하였다.

그러므로 유럽의 상식으로나 일본의 상식으로나 무언가 더 받는 것이 있을 듯했다. 지금 집권한 개화당이 대체로 서구에 가까운 성향이라고도 하고, 또 꼭 그렇지 않아도 다음번 총선을 위해서라도 무언가 더 얻어낼 법도 했다.

그런 의문을 최대한 말하지 않고 얼굴로 드러냈더니, 귀남이 덧붙였다.

“통상이야, 이전의 예를 그대로 따르고 수호통상하는 도리를 금석과 같게 하겠다 한 것은 그대도 들었을 게요.”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최대한 정중히 ‘끝입니까?’하는 표정을 이와무라가 지었다.

“영은문과 삼전도비를 옮기는 일이야, 우리가 스스로 할 일로 청국도 아는 바요.”

기무회의에서 다름아닌 김가진이 발의한 것이었다.

물론 청을 지나치게 자극함이 도의로 보나 실리로 보나 옳은 일은 아니라 하여, 처음 김가진이 발의한 대로 다음 정초를 맞이해 폭파하는 것에서, 미리 안 보이는 곳에 옮겨두어 후대의 참고할 바로 삼는 쪽으로 논의가 정해지기는 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사정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대체 그 비석 하나가 얼마나 중한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어쩌면 일본에도 알리지 않을 만큼 무언가 엄청난 밀약을 맺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하나만을 품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압록강을 건넌 조선군이 곧장 페킹에 들이닥쳐 황제를 폐위하고는 이제부터 중국은 없고 조선령 지나만 있다고 하였더라면, 과욕이라고 혀를 찰지언정 이해는 하였겠으나, 정말 그 이름에 맞게 소박한 배상금 조금에 형식적인 선언 조금, 그리고 엉뚱한 비석 하나 옮기는 일 정도로 끝을 내었다 하니 유럽 외교가도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돌아간 이들이 공돈을 마구 국내에 풀고, 또 중국 시장의 안정이 예고된바 그토록 노력해도 팔리지 않던 국채가 다시 팔리기 시작하는 효험이 있었지만, 투자자와 금융가들이라면 모를까 외교관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저들이 잘 아는 이야기를 끌어와 억지로 가져다 붙이는 것이었다. 마침 비슷한 사례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때려잡던 1866년 전쟁이 있지 않던가.

외교적 함의가 매우 큰 비유였는데, 지금 파리의 전쟁성에 모인 군인들로 말하자면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조선이 극동의 프로이센이든 아니든, 대륙 반대편에 있고, 더구나 우리 대프랑스의 유서 깊은 우방이자 동맹국이오. 더 중한 것은 이번 사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함의가 무엇이냐지.”

그 반대라면 모를까, 대육군(Grande Armée, 프랑스 육군)이 동양 황인에게 배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기관총이야 진지 방어 용도 외에는 별 쓸모가 없고, 철조망은 기지 경계용이라면 모를까 그 외에는 마찬가지로 별다른 쓰임새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 지키고 있는 전쟁성 장관 오귀스트 메르시에가 보기에는, 배울 만한 점이 하나는 있었다. 저들과 마찬가지로 자존심 높은 메르시에가 쉽게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으므로, 좌중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메르시에가 저의 후배를 소개했다.

“그 함의가 무엇인지, 여기 포슈 소령이 잘 설명해줄 거요.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지.”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드레퓌스 그 작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소란으로 한때 곤혹스러운 지경에 처했지만, 조르주 피카르를 이용해 기사회생은 물론이요 오히려 저의 눈에 거슬리던 자들 – 특히 생시르 출신들 – 을 대거 쳐내는 데 성공한 메르시에는 나날이 기세가 올랐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저의 파벌을 제대로 만들어보고자,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 중 저의 편을 들어줄 자들을 대거 발탁하거나, 발탁하기 위해 점찍어두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적당한 겸양의 말을 내놓고서 곧장 브리핑을 시작하는 전쟁대학 교관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소령이었다.

“... 이상으로 이번 중국 사태에서 드러난 조선군의 동원체계에 대한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네, 포슈 소령. 자,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동원된 병력은 머릿수만 채울 뿐 별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과거의 발상에 지나지 않소. 아무리 중국이 상대라지만, 이렇게 대규모 병력을 동시에 운용함으로써 큰 전투도 없이 중국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오.

신속한 동원령으로 소집한 대규모 병력을 집단으로 운용해, 신속한 공세로 적의 전쟁수행 의지 자체를 공략하는 것이 바로 현대전의 비법이라 하겠소!”

당연히 저를 따를 법한 이들만 모아두었으므로, 아첨 혹은 찬탄하는 반응이 대다수요,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도 잘 해보아야 신중론 정도를 제시하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조선이 보여준 것은 아직 세련되지 않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 이를 전략과 교리로 가다듬어 완성하는 것은 우리 대육군 참모들의 일이 될 것이오.”

“각하의 혜안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런 착상에는 모름지기 그에 맞는 명칭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말을 꺼냈는데, 곧장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다.

“극한에 이르는 공격(Attaque à outrance)은 어떨지요?”

“우리 대육군이라면 조금 더 멋진 표현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외에도 여러 방안들이 나왔지만, 다들 의도한 것인지 어딘가 없어보이는 이름뿐이었다.

“살아 숨쉬는 프랑스 국민의 전의로써 적을 굴복시킨다... ‘엘랑 비탈(Élan vital, 생명의 도약)’ 어떤가?”

그 표현이 철학적이다 못해 시적이라, 듣던 장군들은 하나같이 훌륭하다고 찬탄하고, 그만큼 메르시에의 입꼬리도 내려갈 줄 몰랐다.

한편 그 무렵, 조선의 일반 백성들에게는 삼전도비보다 더 중요할 지도 모르는 변화가 태동하고 있었다.

북양대신 치소에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만큼, 그 근처에도 차나 음식 따위를 파는 곳이 여럿 있었는데, 개중에는 나름대로 맛나다고 소문난 곳도 있었다.

정병 일만오천 중 하나로 옛날에는 연행(燕行)이라며 따라가지 못해 사람들이 안달을 냈다는 그 길을 오게 된 젊은 이 참위는, 보로의군 운운하며 조선군 따라들어온 – 조선군과는 별도로, 사람 부린 삯을 쳐서 조정에서 은자 나누어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 장씨와 함께 그런 곳 중 하나를 찾았다.

장씨로 말하자면 이름은 작림(作霖)으로 스물 남짓한 젊은이인데, 붙임성도 좋은데 나름대로 머리도 있어, 고작 농장 경비하는 일로 청춘 보내기를 원치는 않았다. 하여 동삼성에서 보로의군의 한 무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곳 북경에 당도하여서는 조선에 연줄 하나쯤 만들어볼 요량으로 (동삼성 한인이 출세하려면 만주말과 조선말 배워두는 것은 필수였다) 군영 안팎을 드나들며 두루 사귀었다.

그 중 하나가 함께 이곳 밥집을 찾은 이승만(李承晩) 참위였다.

“음... 그래도 청국 음식이 맛나다고는 들었는데, 이건 좀...”

“입맛에 아니 맞소? 나는 맛나기만 한데.”

올해 나이가 약관이나 겨우 넘겼을까 싶은 젊은이가 –따져보니 장작림 본인과 동갑이었다- 참위 소리를 들으니, 남의 아래에서 ‘이놈 저놈’ 소리 듣기 싫다는 일념으로 죽어라 서책에 몰두하여, 동리의 수재 소리 들으며 하사 대신 참위로 입대한 것이었다. 군복 입자마자 북벌 따라오게 되었으니 따지자면 박복한 셈이었지만.

“아니, 자네야말로 나름대로 먹거리 가려 먹는 축에 든다고 말하지 않았나?”

“말만이 아니라 실지로도 그렇수다. 이만하면 미미(美味)인데. 이거 아마 조선 땅에 그대로 옮겨 팔아도 꽤 이득이 될 거요.”

“장맛부터가 글렀는데 무슨. 이대로는 어림도 없네, 암.”

그러나 이 참위를 따라온 다른 조선인들은 그럭저럭 맛나게 먹는 것이, 아마 이 사람만 유난히 까다로운 듯했다.

“정 입에 안 맞으면 다음에는 저기 옆 비룡당(飛龍堂)으로 가보면 될 일이지. 그곳 숙수 묘성(昴星)이가 어리지만 누룽지탕을 그리 잘 한다던데...”

미리 북양군 군교들에게 적당히 은조각 쥐어주고서 이름난 곳은 얼추 파악해둔 장작림이었다.

“허허, 장 아우, 이 참위님 입이 짧은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오. 나도 맛나게 먹었소. 그런데 이 국수는 이름을 무어라 하오? 장만 조금 맛을 바꾸면 조선에서 팔아도 잘 팔릴 듯한데.”

언뜻 듣기로 군문 벗어나면 장사할 생각이 있다고 했던, 저보다 두어 살 위인 하사였다.

“이왕 연경 온 것 이 국수 만드는 솜씨나 배워서 돌아갈까? 쌈지에 은자도 남겠다...”

“안 될 일도 아니지. 다만 통변 알아봐주는 값은 따로 쳐 주쇼.”

반쯤 농담삼아 말 주고받는데, 역시 맛나게 먹고 있던 다른 조선인이 또 물었다.

”그런데 이 국수는 이름이 어떻게 되오?”

“산동 음식인데, 작장면(炸醬麵)이라 한다오.”

간혹 심양에도 흘러들어온 이들이 밥집을 차리곤 하여 종종 먹어보았던 장작림이 무심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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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공화(共和)란, 임금이 없는 시기의 임시정부를 뜻합니다. 『사기』에 따르면, 주나라 여왕(厲王)이 실덕하여 쫓겨났을 때 주 정공과 소 목공(이홍장이 말하는 ‘주소’입니다)이 공동으로 정무를 돌보았는데 이를 ‘공화’라 일컬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착안하여 일본에서 Republic의 역어로 공화를 쓰기 시작한 것인데, 작중에서의 의미는 조금 더 본뜻에 가깝습니다.

황제 치하의 중앙집권적 천조질서의 국내적 대안으로 연성자치론 비슷한 방안이 제시되었습니다. 원 역사의 연성자치론은 신해혁명 이후 특히 1920년대 군벌시대에 큰 인기를 모았는데, 이는 손문이 주도하는 북벌 통일론에 반대하는 지식인들과 역시 통일을 바라지 않던 남중국 군벌들의 이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그로 인해 연성자치론은 정략적 담합을 정당화하는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후대의 평가이나, 이는 1920년대에 연성자치론이 나름대로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며 격렬한 찬반 논의를 일으켰다는 당대 현실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김세호 (2006), “진형명의 국가건설 구상”, <동아연구> 제50집 등). 실제로 작중에도 등장한 잠춘훤 등 여러 정객들도 연성자치론을 지지하기도 했지요. 이는 청말민국초에 등장한 다양한 근대국가건설 담론의 한 측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장유재가 지난번 북벌 에피소드에 등장했을 때 잠시 언급된 장작림(장쭤린)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이 무렵, 정확히는 그가 스무살 되던 해 발발한 청일전쟁 당시에 두각을 두러냅니다. 당시 한반도에서 패퇴한 청군이 계속 밀려나고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너 산해관을 노리는 상황에서, 청 조정은 급히 요동에서 병력을 초모했는데, 마술(馬術) 재주가 있었기에 입대 후 기병이 되었습니다. 이때 번 돈으로 지주 집안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이후 의화단 운동으로 만주 일대의 치안이 극히 불안정해지자 장인의 도움을 받아 자경단(대단)을 꾸리게 됩니다. 한때 중국 전체 제패까지 노렸던 봉천군벌의 시작이었지요.

장쭤린과 동갑인 이승만은 이 시기 이미 이름을 승룡(承龍)에서 승만으로 바꾸었습니다. 본디 황해도 평산 출생이나, 어려서부터 서울에서 자랐고, 갑오개혁으로 과거가 폐지된 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이름을 떨치게 되지요.

여담으로 그는 대체로 싱겁고 부드러운 음식이 취향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그가 출세한 이후, 즉 30년 넘게 미국 생활을 한 이후의 입맛이기 때문에 작중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미식가였다는 증언도 여럿 있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까탈스러운 축에는 들었을 듯합니다. 그러니 소위 ‘단짠’ 맛으로 한국화되기 전의 원판 작장면이 입에 맞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편, 드레퓌스 사건에 얽혔던 오귀스트 메르시에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지독하게 독선적이었지만 능력은 있었는지 파나마 스캔들 이후의 개각에서도 유임되었는데, 이것이 그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작중에서는 거기에 더불어 드레퓌스 사건에서 살아남은 것도 한몫 거들게 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반드레퓌스파의 중심을 끝까지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1898년 퇴역 후 190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920년까지 의석을 지킨 것을 보면, 군인으로서는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재능이 있었다고 해야 할 듯합니다.

악명 높은 1차대전기 프랑스군의 공격 위주 교리 ‘엘랑 비탈’은, 본래는 한참 뒤인 1900년대 후반에 등장하게 됩니다. 자국의 동원체계, 나아가 非직업군인 전반에 대한 불신 – 이는 2차대전 무렵까지도 고질적인 문제로 남았습니다 – 으로 인해, 동원을 통한 전면전보다는 소수 정예군을 중심으로 한 방어전에 치중하는 것이 20세기 초까지 프랑스군의 대독전선 작전계획이었는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독일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해올 가능성이 제기되자 소수 병력 위주의 방어와 역습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점차 체계적인 병력 동원으로 막대한 방어 전력과 예비대를 확보하는 것으로 중점이 변동되고, 대전 직전에 이르러서는 일시적인 수적 우위를 활용한 조기 공격까지 검토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1차대전 초 프랑스의 동원은 보불전쟁 당시와 비교를 불허할 만큼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결과적으로 전쟁 초 프랑스군의 어설픈 공세가 처참히 실패한 뒤에도 프랑스가 버틸 수 있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본디 ‘엘랑 비탈’이라는 표현 자체가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사용한 것을 가져온 데서 비롯하였지요. 다만 생명에 생화학적·기계적 기전 외에 환원할 수 없는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는 그 이전부터 계속 존재했기에, 작중의 메르시에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용어는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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