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17화 (217/320)

71. 도끼를 들고 (3)

북양군 장수 조곤(曹錕, 차오쿤)은, 요양과 심양 사이에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원세개의 명 받들어 산해관 넘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도로 북경에 와 앉아있었다.

“멍청한 놈! 총 한 발 쏘지 않고 물러나다니, 그러고도 네가 군관이냐?”

재능으로 따지면 단기서나 풍국장, 왕사진만 못하지만, 원세개의 숙부와 연이 있었기에 나름대로 아낌 받던 조곤이었다. 만일 그가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주먹이나 발이 나갔으리라.

“대인, 소장은 그 상황에서 최선의 방책을 택했을 뿐입니다. 분명 넘어온 것은 삼만이라 듣고 방비하려 하였는데 눈앞에 나타난 것은 삼십만이니, 고작 일개 협을 가지고 무얼 어찌 해보겠습니까?”

“삼십만? 그래보아야 태반이 맨몸에, 진두에는 서생들이 서 있다고 하였잖은가!”

“그래서 더 곤란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맨 앞에 전 총리라는 사람이 직접 도끼 들고 나와 있는데...”

“허 참, 그것이 참이었느냐? 최익현 그 사람이 직접?”

“그렇습니다. 맨 앞에서 걸어들어오면서 총으로 막으려면 저부터 쏘라고 하는데, 소장이 무얼 어찌하겠습니까?”

처음 요양 방어선 앞에 그가 나타났을 때는 조곤도 대체 아편 대신 무슨 해괴한 약을 피우고 있는 것이냐며 보고한 군교를 몇 번쯤 더 진문(陣門) 오가게 만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사이에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당당하게 조선말로 외치는 것 아닌가.

‘이곳 장수는 들으시오! 우리는 북경 계신 천자께 시무책을 아뢰러 가는 조선 백성들인데, 철도의 편리함에 의탁하려 하거늘 그대가 이것을 막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혼자서 도끼 들고 왔더라면 최익현이고 누구고 우선 총칼로 윽박지를 생각을 품었겠지만, 그 뒤에 삼십만 명이 있으니 이 불청객 맞이하는 조곤도 절로 예(禮)를 깨닫게 되었다.

‘그, 그렇지만 총 든 이들이 있는데 어찌 저들을 백성이라 부르십니까?’

‘저기 보이는 장정들은 그저 다툼을 막기 위해 대동하여 온 것이오. 만일 우리가 정녕 군병으로써 침탈하고자 하였더라면 그대들이 여기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었겠소이까? 이 군중에 마련된 탄환보다 우리 백성 수가 더 많을 텐데?’

물론 급히 출병하였는데 동삼성 쪽도 썩 협력적이지는 않았으므로 보급 사정이 여의치는 않았지만, 아마 눈앞의 조선인들보다 탄환이 조금 더 많기는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세세히 따질 만큼 눈치 없는 조곤은 아니었다. 더구나 정말 총으로 쏜다면 눈앞의 이 거물부터 맞추어야 할 터인데, 도저히 그 후과를 짊어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장은 엄연히 명 받들어...’

‘어허, 지금 저 장정들이 모두 나라의 부름 받들어 한 마음으로 천자 계신 곳까지 나아가고 있는데, 허투루 시일 보내게 해서야 되겠소? ’

만일 이홍장 나이뻘 되는 옛 회군 장수들이 이 자리에 서 있었더라면 조곤보다야 잘 대처했겠지만, 아버지뻘 되는 노인이 추상같이 몰아치니 흔들리는 마음이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결국 홀로 책임 지기는 두렵기도, 싫기도 했던 조곤은 철수를 기약하고, 시간을 끌면서 철도를 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 그것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조금은 덜 꾸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물러나면서 동시에 철도를 끊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보로의군(保路義軍) 자칭하는 놈들이 또 설쳐서...”

조곤이 은근슬쩍, 계엄 선포한 주제에 바로 옆 동삼성도 제대로 단속 못한 원세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말투로 돌아서자 원세개 머리에 내 천자가 새겨졌다.

“듣기 싫다! 그렇게 해서 고작 끊었다는 것이 심양과 요양 사이가 전부이지 않으냐!”

긴장이 고조될 때 이미 한발 물러난 동삼성이다. 조선이 도의 지킨다면 가로막지 않겠다 했는데, 심지어 공식적으로는 출병한 것도 아니요, 지금 몰려드는 군복 입은 무리들은 끽해야 서넛에 하나쯤 총을 들었을 뿐, 그들 몫의 총과 화포는 여전히 의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대놓고 ‘어서옵쇼’ 환영하며 그들에게 양곡 파는 것을 방관할 뿐 아니라, 심지어 몇몇 군인과 대단(大團)이라 자칭하는 무뢰배들이 작당하여 소위 ‘의로운 군대’ 꾸리려 설치는 것도 은연중에 부추기고 있었으니, 속이 뒤집어질 노릇이었다.

우선은 터뜨리고 ‘비적들’이 그리하였다 우겨댈 생각이었는데, 진짜 비적들이 나타나 철도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으니, 신군이 아무리 매섭다 한들 둔갑술까지 익히지 않고서야 어찌 마음껏 운신하겠는가.

“대인, 동삼성이 조선군 지경이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선 할 수 있는 일은 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맨몸으로 들어와 그 유지하는 비용이 적다고 하나 군량과 급료는 고스란히 들어가고 있습니다. 확실히 우리 힘이 미치는 산해관에서 막는다면 조선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요양과 심양을 내주었다지만 아직 개주(蓋州)와 여순(旅順)은 우리 손에 있습니다. 싸움이 시작되면 그쪽에서 요동을 빙 돌아 바로 봉황성이나 안동을 노릴 수 있으니...”

“계책은 훌륭하다만, 저들이 정말 육십만을 동원하였다면 본토에는 삼십만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신군의 장수로 사지(死地) 걸어들어가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가? 여력이 있을 때 개주에서 바다를 건너 전군을 산해관에 모으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도둑놈 심정은 도둑놈이 안다 했던가. 원세개의 추기급인(推己及人)이 절묘하여 좌중 모두가 탄식하였다.

하기야, 몇 달 전 조선왕이 송양공이니 진문공이니 따지던 때, 오히려 저들이 수양제(隋煬帝)에 맞서는 고구려 사람 심정을 깨우치게 될 줄 알았겠는가. 손속에 아낌 없는 수(數)의 폭력 앞에서는 백계(百計)가 무효(無效)한즉 고작 십계(十計)쯤 내어도 많이 나왔다 할 북양군의 젊은 군관들로서는 한숨만 푹푹 나올 일이었다.

“하지만 철도를 끊지 못했으니 산해관까지도 금방 닿을 것입니다. 그때는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누군가는 할 말을 해야 하는 것이라, 단기서가 당면한 문제를 꺼내들었다.

“본관이 직접 가겠다. 북양대신이라면 조선국 총리 정도와 급이 맞겠지. 남은 이들은 경사를 철통같이 방비하여 일말의 방심도 없게 하라.”

“예, 대인.”

‘대답은 잘 한다’ 탄식하며 원세개는 몸을 일으켰다. 협잡으로 얻은 자리, 협잡으로 지켜낼 방도를 고심하면서.

조·청 두 나라의 날선 공방 중 태반은 물밑에서 이루어졌기에, 유럽 나라들이 사안의 전모를 파악한 것은 최익현이 이끄는 조선군, 아니, 조선인들이 압록강을 건넌 뒤였다. 그제야 급히 공사들에게 지시 내린바 국왕 귀남도 일정에 없던 접견을 허하게 되었으니, 만나기를 원하는 이 한둘이 아니나 맹방의 도리를 생각해 법국과 아라사국 공사 둘을 먼저 만나기로 하였다.

하여 미리 이곳 경무대에서 귀남은 김옥균과 함께 두 공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오늘도 ‘진군’이 순조롭다는 소식 들어와 두 사람 모두 기분이 좋았다.

“세자도 달래고, 좌상(좌의정)도 달래고 하다 보니 어쩌다 나온 것인데, 그것이 이리 효험 있을 줄 누가 알았겠소.”

물론 기발한 생각 한둘로 나라에 큰 이로움 가져옴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라지만, 수십만 대군이 움직이는 큰일에서 이리 되었으니 기분 퍽 뿌듯하고도 통쾌하여 자화자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하, 전쟁은 아니 될 일입니다!’

처음 이 계획이 입안되었을 때 어윤중이 얼마나 단호하게 반대하였던가.

‘인명 상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많이 끌어가야 하오. 이왕이면 화포도 많이 쓰고. 사람 목숨보다야 화약 값이 헐하지 않겠소?’

‘목숨도, 화약도 모두 값진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겨우 황란을 넘어설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문턱에서 다시 뒤로 고꾸라지도록 미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병력을 더 동원하는 것이 어떻겠소? 어차피 무위(武威) 보이고자 가는 길인데, 우리가 대군을 쏜살같이 모았음에 저들 마음이 한 번 흔들린다면, 실제로 누구를 격파할 힘이 있고 없고는 아마 헤아릴 여력이 없을 것이오.’

그랬더니 저와 어쩌다 같은 생각을 떠올렸던 김옥균도 동조하여, 말하자면 공동으로 발의한 셈이 되었다.

‘무릇 병(兵)이란 궤도(詭道, 속이는 도)라 하였으니, 성상 이르시는 바가 참으로 옳습니다. 좌상도 재고해보십시오. 물론 아예 다투지 않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나, 저들이 우리와 일전을 감수할 만하다 여기어 정말로 쇠와 피로 겨루는 것보다는 지금 이 방도가 더 나을 것입니다.’

‘으음... 그리하다면 어찌 더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국가의 대사가 중하다 여기어, 곳간을 함부로 허무는 폐단이 생기지 않도록 해주기를 삼가 아뢰고 청할 따름입니다.’

정말 성상과 영상의 단언대로 나랏돈이 정면으로 붙는 것보다는 덜 나가기를 바라며, 어윤중도 끝내 승복하였다.

그리하여 이번의 기이한 출병이 있게 되었으니, 귀남 말마따나 어쨌든 전쟁은 아니어서, 나름대로 마음 굳게 먹고서 상언하였던 세자는 김이 새는 일이었다.

그때 이제는 슬슬 적응되는 굵은 내관 목소리와 함께, 조선말 인사가 들려왔다.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총리 각하께서도 평안하셨는지요.”

나란히 들어오는 두 사람은 평소 동양 문물에 관심 많아 의기투합한 사이인 법국 공사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와 아라사 베베르다. 다만 베베르와 달리 플랑시의 조선어는 아직 짧아, 곧장 프랑스어가 나오고 김옥균이 직접 옮겼다. 이 두 나라와 동맹을 맺어 사사로이 좋은 점이라면, 따로 통변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 있었다.

“험험. 전하... 물론 조선의 선공이니 참전의 의무는 없지만, 우리 러시아와 프랑스 양국은 동맹의 선의를 존중하여 조선의 든든한 우방임을 재확인하고자 합니다. 이번 전쟁은 분명 중국의 책임이니, 우리는 하나로서...”

근대 화기로 무장한 육십만이 순식간에 모였으니, 나라는 작아도 그 옛날 앙리 드 벨로네가 누누이 강조하였듯 극동의 강국 아닌가.

그만큼 유럽은 시끌시끌할 것이었다. 그런 나라와의 동맹은 바로 자신의 발상이라며 입안자가 갑자기 여럿 나오고,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지난번 황태자의 순방 당시에 연해주의 실상이 일부 드러났기에, 빠르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구축하면 극복의 단초를 얻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연해주가 아니라 자칫 철도 타고 밀려올 수도 있는 조선군을 걱정해야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중대한 시국이므로 출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법. 이번 전쟁에서 어떻게 조선 편을 잘 들어 이권을 따낸다면 공사에서 대사로 올라가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그러므로 미리 외교적 수사를 한껏 준비하였는데, 귀남의 말에 마치 구멍난 풍선과 같이 되었다.

“그 무슨 말이오? 전쟁이라니?”

“예?”

그나마 조선의 엉뚱함을 많이 접해본 베베르는 품위 없는 반문까지 튀어나오지는 않아, 입이 절로 벌어지는 정도로 그쳤다.

“험험. 이것은 지부상소라 하여, 조선 전통의 정치참여 방식입니다. 간언을 듣지 않으려면 나를 죽여도 좋다, 그런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지요. 우리 전 총리께서 손수 나가 계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암. 잘 말해주었소. 그러므로 이것은 전쟁이 아니오. 음... 무력 시위라고나 해야 할까.”

시위(示威)라 하면 귀남이 생각하는 그 최루탄과 화염병의 시위든, 보통 유럽 나라들이 장기로 삼아 군함과 대포로 종종 하는 – 요새는 부쩍 줄기는 했다 – 시위든 낱말로는 같다.

“저, 전하. 그렇지만 분명 총 든 군인들이 여럿 도강을 했고, 저기 묵덴(심양) 거리에서는 지금 조선군이 행군을 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로 전쟁이라 할 수 있소? 전쟁이라 하면 사지 멀쩡한 사내는 모두 총 잡고 나가고 아낙들은 모두 논밭과 공장에 나가야 그것이 전쟁이지. 동원령 내렸다고는 하지만 아직 장정 태반은 나라 안에 남아 있소이다.”

설마 이래서 그동안 서양 사람들과 서양물 먹은 검은머리 사람들이 쉽게 전쟁을 입에 담았던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좌우지간 금번 일은 아국과 중국 두 나라의 정치적 분쟁 상황으로, 아직 전쟁을 말하기에는 한참 이릅니다. 물론 중국 내의 몇몇 과격분자들이 동아시아철도회사 소유의 시설물을 손괴한 일이 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사후 충분한 처벌과 보상이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하필 상대가 저들만큼 유럽 사정을 잘 아는 김옥균이라, 틈새가 나올 때마다 미리 탁탁 막으니 말문도 절로 막혔다. 학벌로 따져도 김옥균이 위 아닌가.

“그...렇지만, 어쨌든 무장한 군인들이 여럿 강을 건넌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충돌이 일어날 경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말씀을 들어보아도 될지요?”

“재차 강조하지만 이번 시위는 중국 정부가 우리 지분이 있는 병기창과 여러 산업시설의 운영권을 강제로 환수하고, 우리는 물론 자국민들에게도 판매를 불허한 것이 그 발단이었습니다. 이런 일로 전쟁까지 가게 되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특히 그런 일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여러 유럽 나라들의 ‘명예로운’ 개입을 당한 중국으로서는 더욱 그러겠지요.”

베베르와 플랑시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상식적으로 삼십만 명 중 일부만 무장했다지만, 저만한 병, 아니, 인력이 저들 영토로 들어오고 있다면 군대가 나서서 막을 것이다. 그렇게 못하도록 억지하는 것이, 겉으로는 도끼는 들었지만 어쨌든 비무장 - 이라 우기는 중 - 인 선두의 최익현과 여러 선비들이요, 더 중한 쪽으로는 공공연히 ‘유사시에 대비한다’는 목적으로 의주에 머물고 있는 소총과 기관총, 그리고 탄약이다.

(지금쯤이면 철도 파괴를 명분으로, 역시 공공연히 의주에서 요양으로, 요양에서 심양으로 조금씩 옮겨지고 있을 것이다.)

유럽의 상식으로는 전쟁이 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만일 정말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만한 무력시위를 감행한 조선이 중국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는 없었다. 동양 사정을 얼추 아는 베베르와 플랑시가 보기에도, 이번 일은 말하자면 오도아케르가 수십만 게르만인을 데리고 로마에 와서 임금 협상을 하는 셈인데, 끝나고 나서 과연 ‘천조’가 말짱히 남아 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정말 많았다.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보아도 될 일.

“알겠습니다, 각하. 본국에도 귀국의 입장을 왜곡 없이 진실되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심양의 대로가 쑥색으로 가득 메워진 것도 오늘이 사흘째였다.

그 색은 조선에서 부르기로는 ‘어제국방색(御製國防色)’이라 하는데, 흙먼지 묻어도 티가 나지 않고 또 숲이나 들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묘한 색이라, 이전의 거무튀튀한 제복 – 예복으로 남기는 했다 – 보다 멋은 없어도 일선의 군졸들은 퍽 좋게 여기곤 했다.

내취(內吹, 군악대)가 흥겹게 악기 놀리니 날라리 소리에 발걸음도 가볍다. 『희망가』 전주(前奏)가 끝났으니 선창이 나올 때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희망이 무엇이냐?”

주변에서 후창 이어진다.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재차 묻듯 던지기를,

“담소화락(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충군보국(忠君報國) 넉 자로도 희망이 족하리!”

그러고서는 태평소 가락이 다시 독주를 시작하니, 듣는 서양인들은 해괴하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물론이요 구경꾼 만인들도 흥겨워 들썩이는 취타(吹打)의 군악(軍樂)이다.

북경에서 심양까지 이어진 철도는 한 번 크게 꺾여, 천산(千山)에 많은 광산의 이익을 취하고자 요양으로 향한 뒤 거기서 다시 의주로 향하였다. 그런데 차라리 산속 험중한 곳이라면 모를까, 산 다 넘은 요양과 심양 사이를 끊었으니, 다시 기차 타러 심양까지 걸어가는 행군로는 평탄하고 적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 심양 안에 들었으니, 슬슬 지쳐가는 몸을 다시 기차에 싣고 편히 갈 생각에 도시가 반갑고, 저들 기세에 눌려 절로 요동이 열리는 것이 보여 흥겹고, 그 전공 아닌 전공을 총알 한 발 쏘지 않고 세우고 있으니 즐겁다. 나라에서 계획대로 된다면 전쟁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 하고, 또 그렇게 된다 한들 육십만 대군이 등 뒤에 있을진대 어찌 지겠느냐 하였으니, 무릇 싸움 중 최고는 저들 이기는 싸움이라.

“이왕이면 조금 더 점잖은 곡이 좋을 듯합니다. 군악이 저러하니 위엄이 살지 않는군요.”

저의 옛 군복 대신 도포 입고 나온 ‘황 상사’ 황현이, 이층 누각에서 길가를 살피면서 최익현에게 말했다. 아마 저 가로 메운 사내들과 그 행렬 바라보는 구경꾼들로 길이 막혔기 때문인지,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공친왕은 한참 늦고 있었다.

“두게나. 저 정도면 그래도 속요(俗謠) 중에는 점잖은 축에 든다네.”

공식적으로는 전쟁이 아니므로 선봉장도, 중군도 없는데, 굳이 앞장서는 자를 장수라고 부른다면 최익현이 그 사람이요, 황현은 그 옆에 있으니 비장(裨將)쯤 될 것이다.

“내 총리로 있는 동안에, 군부의 천가 성 쓰는 부령이 어디서 들었는지 저런 속된 노래를 군에서 널리 불러 기세 돋우는 데 쓰자고 헌책하였다네. 그때 이후로 하나의 풍조가 되었으니, 자네 있었을 때와는 같지 않을 걸세.”

천 모란 곧 장인어른(최한기) 닮아 영특한 고명딸을 안정여숙에 보내느라 저의 급료 한 푼 아쉬운 천덕만이요, 옛정에 이끌려 천덕만이에게 넌지시 공 세울 방도랍시고 운현궁 통해 몰래 군악의 발상을 전해준 것은 다름아닌 주상이다.

처음에는 ‘대충 이렇게 해보라’ 하고 ‘친제’한 가사 몇 줄에 대충 흥얼거린 곡조 전해준 정도였는데, 그것이 절로 살이 붙어서 양이 기악 조금, 이런저런 타령 가사 조금 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개중에는 『월남 김상사 타령』 같이 정말로 날라리 곡조인 것도 있었으니 최익현 말에도 일리 있었다.

‘요즘 군대 참 편해졌다’하는 단상 제쳐두고, 황현이 마저 투덜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출병은 지난번보다도 더 훌륭한 뜻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하다못해 그 뼈대라도 『시경』에서 따올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유건병월이니 여화렬렬이라(有虔秉鉞 如火烈烈, 당당한 풍모 있어 도끼 잡으니 기세 불과 같이 열렬하다). 어떤가? 적어도 지금 우리네와는 들어맞는 구석이 있군그래.”

<상송(商頌)>의 한 단락을 인용하니, 최익현 말마따나 그들이 도끼를 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 농담치고는 절묘하였다.

“하하, 정말 우리가 탕왕(湯王)의 뒤를 따르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싸우러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모르니까 우리가 도끼 들고 가는 것 아닌가.”

“하하... 그랬지요.”

최익현 대꾸에 뼈가 있어, 황현의 기분도 착 가라앉았다.

북경에서 신군이 천자를 유폐하고서 마음대로 계엄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공안서 통해 곧장 내각과 참의원의 알아야 할 이들에게 알려진 직후, 처음 참의원에서 이번 출병 계획이 논의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모두가 입 무거운 것은 아니므로, 우선 당의 영수급에 해당하는 이들을 불러모아 김옥균이 이름도 거창한 ‘비전지전(非戰之戰)’의 초안을 내보였는데, 대강은 이러했다.

전쟁으로 치닫게 되면 모두가 곤란하다. 대통도 대통이지만, 청국이 번국과 군병으로 다투어 패전하는 모양새가 되면 갑자기 균형이 깨지는 것이라, 중원 전체가 더욱 혼란해지고 구주의 열강들도 끼어들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얻는 바가 있다 한들 모두 게워내어야 할 것이요, 그러므로 공연히 힘만 써서 남의 좋은 일만 해주는 격이 될 터인데,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도의를 따르면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능히 찍어누를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실제로는 그러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지금 북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삼십만 대군은 군대가 아니라, 천자에게 직소하기 위해 나아가는 이웃나라의 천하 근심하는 국인(國人) 무리였다.

이 기막힌 행렬을 눈앞에 둔 청국 장수라면, 신군이든 아니든 첫째로 당황할 것이요, 둘째로 자칫 자신이 경거망동하여, 예컨대 눈앞의 조선인 대열에 방포한다던가 한다면 그때야말로 전쟁의 명분이 되니, 신군 우두머리들이 제정신인 이상에야 절로 삼갈 것이다. 설령 북경에서 누군가 작정하고 방포를 지시한다 한들, 그 책임을 오롯이 자신이 져야 할 터인데 인화 부족한 신군에 그것을 그대로 따를 자가 과연 있겠는가?

“이 비전지전의 계책이 그럴듯하기가 마치 조괄(趙括, 전국시대의 졸장)의 병법과 같아, 겉으로는 그럴듯해도 실제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잖은가. 성은 거듭 입어 생긴 이 몸의 허명(虛名)이 저들을 제압하기에 족하기만을 바라야겠지.”

한쪽에서는 자칫 세자가 전선에 나가는 참담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어떻게든 명명백백히 전쟁으로 치닫지는 않게 하자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시에 상대 제압하고자 그처럼 많은 대군을 냄은 무리한 일이라 외치니, 결국 타협하여 만들어진 안은 이처럼 구멍이 많았다.

말이야 그럴듯해도, 중원이나 천하의 평안 따위 크게 중히 여기지 않는 자가 만일 총을 잡고 있다면 곧장 어그러질 계책이였다. 그리 된다 한들 조선이 쉽게 지지는 않겠지만, 만일 지금 상황에서 조선과 청국이 정면으로 붙게 된다면, 비록 그 청국 전력이 반쪽이라 하지만 어느 쪽도 몸 성히 끝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특히 선두에 서는 이들은 총 들지 않고 있어, 만일 어느 소인(小人)이 흉심 품는다면 자칫하면 전쟁 일으키는 미끼로 쓰일 수도 있는 것이니, 나라의 부름 받아 나아온 백성들이 그리 되도록 함부로 방치한다면 어찌 어진 처사라 하겠는가. 생각 그에 미친 최익현은 곧장 선봉을 자임하였고, 자유당의 서생들도 여럿 따라왔다.

그때 공친왕이 들어왔다. 최익현만큼 늙은 얼굴에는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북벌의 대망(大望)을 마침내 이루었으니 그대 나라의 선비로서 어찌 즐겁지 않겠소?”

“북벌이라니,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적어도 북경의 원가는 그리 생각하는 모양이오. 산해관을 열어줄 테니, 그대와 서생 몇몇, 그리고 조선 예조의 관헌 한둘만 북경 바깥 통주(通州)에서 회동함은 어떻겠느냐며 밀담을 제의하더이다. 북경에서 직접 전하기에는 보는 눈이 안팎에 여럿 있어 그리한 것이겠지.”

“그렇습니까.”

“만일 공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로 산해관을 걸어잠그고, 인기척만 있으면 양창을 난사하겠다고도 하였소.”

원가라면 원세개요, 최익현도 좋지 않은 쪽으로 그 이름 익히 아는 자다. 허나 여기까지 온 이상 가지 않음도 직무를 버리는 셈이라.

“틀림없이 함정일 테요. 그가 전해달라고 하기에 전하기는 한다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흉이 될 것은 아니외다.”

“제게는 허물이 아니 될 수 있으나, 비밀리든 공공연히든 화평할 길을 얻을 수도 있는데 이를 내쳤다 한다면 나라에는 허물이 될 것입니다. 어찌 나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오... 연통을 넣어 미리 기차를 준비해 놓으라 하겠소.”

용건은 다 끝났는데 그제야 차가 나와, 모두를 소소히 민망케 하였다.

그러나 그러건 말건 발치 아래의 쑥색 물결은 계속되었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그러할 것이다. 적어도 산해관에 이를 때까지는.

--- *** ---

‘어제국방색’은 우리가 아는 그 국방색입니다. 원 역사의 대한제국군은 다른 것은 몰라도 제복 하나만은 멋지다는 평을 듣곤 하는데, 그런 멋은 버리고 대신 실전성을 택한 셈입니다. ‘레드코트’ 영국군이 위장색 개념으로 카키색 군복을 도입한 것이 보어전쟁 이후였기 때문에, 작중 조선군은 군 전체적으로 위장색을 도입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가 될 듯합니다. 여담으로 우리가 아는 국방색의 기원은 2차대전 미군이 작업복 용도로 사용하던 올리브 드랩(Olive drab) 색상인데, 표현 자체는 1892년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니 배색으로 따져도 최신 트렌드에 속합니다.

글 첫 부분 조선군이 부르는 『희망가』는 본래의 노래를 일부 개사한 것입니다. 원래는 1910년 일본에서 추모곡으로 번안한 찬송가를 다시 번안한 곡으로, 1920년대 민요와 창가로 널리 인기를 끌었던, 즉 귀남옹이 처음 들었을 ‘유행가’ 축에 들어가는 곡입니다.

취타는 오늘날에는 흔히 왕실 행사의 의례곡으로 인식되는 듯합니다만, 본디 군악이었습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만 해도 선전관청 외에도 오위, 각 지방 감영, 병영, 수영 등이 각각의 취타수 편제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 큰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소취타(小吹打)도 있었습니다.

최익현이 인용하는 『시경』 단락은 <상송>의 장발(長發)로, 전하는 해석으로는 상나라의 제사에서 쓰이던 의례곡입니다. 상의 시조 탕왕이 하의 마지막 군주 걸왕을 토벌한 공을 기리는 내용입니다.

베베르와 함께 등장한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는 원 역사에서도 긴 기간 주조선프랑스공사를 역임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동양에 관심이 많아, 학업을 마치자마자 외교관으로 진로를 정하고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이후 을사조약 시기까지 거의 계속 조선에 머물렀고, 조선을 떠나자마자 은퇴하였으니 일평생을 한국과 함께한 셈입니다. 여담으로 그는 베베르와 마찬가지로 조선 – 정확히는 동아시아 전반 – 문물에 관심이 많아, 도자기와 서책 등을 수집했는데, 그렇게 입수하여 프랑스 본국으로 보낸 소장품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직지심체요절』이었습니다.

최익현과 공친왕은 1살 차이로, 공친왕이 손윗사람입니다. 다만 청불전쟁의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딱히 비중 있는 역할을 – 서태후의 철저한 간섭이 있었습니다 – 맡지 못했기에, 1898년 적지 않은 나이로 사망하였음에도 노년으로 갈수록 더 활발히 활약한 최익현에 비해 젊다는 인상이 있지요.

지난 화에 지나가듯 언급된 조곤(차오쿤)은 북양군벌의 거두 중 하나로, 앞서 등장한 왕사진·단기서·풍국장(북양삼걸)의 바로 다음 기수 정도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원세개의 숙부(겸 양부) 원보경(袁保慶)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던 수군 제독 조극충(曹克忠)의 눈에 들어, 그 연줄로 원세개에게 접근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이 설을 택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