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도끼를 들고 (1)
삼각산 자락 화계사(華溪寺)는, 전하는 말로는 유서 깊은 명찰(名刹)이다. 오랜 세월 – 그리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으나, 지엄한 국법(國法) - 이 쉴 새 없는 파도처럼 기억과 기록을 마멸(磨滅, 깎아 없앰)한 고로, 법인대사(法印大師)라는 옛적 고승이 처음 암자를 짓고, 후에 신월(信月)이라는 큰스님이 종실의 후원 받아 창건하였음은 알지언정, 그것이 언제인지, 각 전각의 내력은 어찌 되는지는 아무도 다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전각 대부분은 아직도 처음 칠한 색 명명하니, 끽해야 상량이 일세(30년)나 되었을까 싶었다. 주지가 영검한 점지 받아 금맥을 찾은 것은 아니요, 굳이 말하자면 금맥이 화계사를 찾아온 셈이니, 지금 멀리 대웅전 내다보이는 방 안에 큰대자로 누워 있는 늙은 대원군이 그 사람이다.
늙은이 체통으로도, 종실 체통으로도 절간에서 그리 편히 누워 있음은 썩 좋은 일은 아니라 하겠지만, 바깥에 알려지기로는 ‘불사 드리러 갔다가 갑자기 무슨 소식 듣고 그 자리에서 앓아누웠다더라’ 하였으니, 병자 시늉을 할 따름.
허나 그 소식을 일으킨 세자가 누굴 닮았는지 퍽 쇠고집이라, 이 ‘계책’ 처음 내놓은 중전이 사사로이 원망스러웠다. 병자가 한가로이 난을 치고 있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세자가 아직 뜻을 거두지도 않았는데 부처님 영험 받아 나았다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여서, 쏜살같이 흘러가던 늙은이 세월이 이 삼각산 자락에서는 어찌 흘러가지 않는가 홀로 궁시렁대고 있었다.
“거 바깥에 뉘 있느냐.”
부르니 큰 시주보살 시중 드는 불목하니 하나가 곧장 답하기에, 이르기를,
“해는 밝고 소일거리는 없으니 퍽 심심하구나. 이 절이 대찰은 아니라 해도 요새 사람 늘었으니 신보 구해다 보는 이 하나 없겠느냐?”
하였더니, 쫄쫄 가서는 곧 종류별로 하나씩 들고 왔다. 저의 마음 살피는 것이 퍽 영특하다 싶었는데, 이게 웬걸.
“아니, 그냥 하나 달라고 하면 되었지 무얼 훔쳐보고 있느냐?”
“죄, 죄송합니다.”
스물도 채 되지 않았을 앳된 불목하니가 신보 내려놓고서는, 딴에는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뭉그적거리는 것 아닌가. 이제 보니 펼쳐놓은 신보의 큼직한 글씨를 눈으로 흩고 있었다.
허둥대는 모습이 아직은 어리다 싶었는데, 간만에 그 못된 심보 나와 장난스레 으름장 몇 번 곁들여 추궁하였더니, 어느 안전에서 거짓 고하겠는가. 내력이 술술 나왔다.
불목하니는 아직 계(戒) 받지 아니하여, 세속의 이름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성이 한(韓)이요 명이 유천(裕天)이라. 집안 빈궁하였으나 그 형이 가세 일으켜 먹고살기는 걱정 없고, 하여 집안에서는 말하기를 잔반 집안에서 ‘잔(殘)’을 뗄 때도 되지 않았느냐며 총명한 그의 어깨를 눈으로 짓누르곤 하였다.
허나 정작 본인은 대관절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남이 들으면 배부르다 할 고민에도 마음이 한껏 빠졌기에, 작년에 가출하여 떠돌다 절간에 들어왔다.
“허, 그런데 왜 하필 여기더냐. 나라가 불도를 꺼린다 하나 저기 강원도만 가도 명찰이 수두룩하고, 산길 호환도 이젠 거의 옛말인데.”
“그것이...”
그런데 또 곧장 어디 명산으로 찾아가자니, 이왕 가출한 것 세상을 더 보고도 싶던 것이라, 하여 딴에 생각하기를, 서울 옆 이곳 삼각산이면 사바세계(娑婆世界) 소식도 족히 들어오겠다 싶어 이리로 찾아왔다.
“껄껄. 그러잖아도 주지가 ‘요새 어린것들은 하는 일 없이 잡생각만 많다’ 불평을 하더라니, 네가 그 어린 무리의 막내쯤 되는 모양이구나.”
저보다도 더 정정한 아내 민씨가 동네 천주교인들의 기둥쯤 되는 사람이라면 대원군은 아마 조선의 석교(釋敎, 불교) 믿는 사람들 전체의 기둥쯤 될 것이다. 보시하는 재물도 재물이지만, 무엇보다 그 사람이 종실의 이력에 충실하게 불사 일으키기 좋아한다 하는 소문 있는 것이 전국의 수령으로 하여금 ‘중놈들’ 트집 잡을 것을 열에 아홉은 삼가게끔 하는 효험이 있었다.
근래 김옥균이네 내각에서 교첩의 제도를 폐하고 - 줄어든 세수만큼은 대신 각 교당(敎堂)에 일괄적으로 물리기로 하였다 – 소위 ‘신교(信敎) 자유’를 외치면서, 민씨를 비롯해 집안 눈치 보던 이들이 대거 세례를 받고 (물론 대부분은 비밀리에 받았다), 더불어 전국의 사찰들도 신도들이 더 당당하게 오가게 된바 세금 늘어난 만큼 시주도 늘었다.
그러나 삼보(三寶) 중 승(僧)에서 말썽 일어났으니, 나라의 살림이 펴면서 예전에는 먹고살기 어려워 출가하는 자들이 늘었다면, 요새는 그보다 훨씬 처리가 곤란한 무리가 법문(法門)에 귀의하는 것이었다. 이 유천이처럼, 세상사 이면의 오도(悟道) 깨우치고자 찾아오는 이들이었는데, 이것이 불심의 뿌리라지만, 대부분이 염불보다 잿밥 구하여 출가하였던 그들의 앞 세대와는 보고 듣는 것이 다르고, 또 행하고자 하는 뜻도 달랐다.
물론 그들에게 치이는 옛 사람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하겠지만, 대원군이 보기에도 불법 전체로 보면 이득이 될 듯했다.
이대로 몇 년만 지나도, 목소리 크고 머리 깨인 자들이, 언제까지고 천하고 못 배운 중놈 대접 감수할 것이냐. 먼저 배우고 익혀 불법 널리 떨치자 할 것이니, 조금 더 기다려볼 일. 나라에서 작첩 금한 뒤에 슬슬 절간 앞에 슬며시 놓이곤 한다는 ‘처자가 홀로 낳은’ 아이들이 동자승 티 벗을 무렵에는 뭔가 달라지기는 할 터였다.
“그래, 그러면 훔쳐본 값을 한 번 내어 보거라. 네가 보기에는 금번 청국 소란이 얼마나 갈 것 같으냐?”
앞에 있는 사람이 원 역사에서는 언제고 만해(萬海)라는 법명 받을 불목하니 유천이 아니라 그 옛날 보우(普雨)라 하여도, ‘시주께서는 어찌하여 청정한 절간에서 세속 말씀을 하시는지요’라 쉬이 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저의 말대로 나름 머리는 있는 녀석인지, 의외로 처음 어려워하는 것을 버리니 술술 답했다.
“우리 신보에도 널리 알려질 정도라면 국사에 힘쓰시는 분들께는 마치 명경(明鏡)으로 살피는 것과 같으시겠지요. 더구나 지금 대국은 연경 천자는 달리기를 원하고 강남 백성들은 숨 돌리며 걷기를 원하니, 머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다리는 뒤쳐지면 사람이라도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한다고 보느냐?”
심심풀이 문답에 제대로 된 방안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녀석 말이 의외로 짜임새가 있었다.
“아직 계를 받지는 않았지만 장차 법에 귀의하려는 사람으로서, 살생은 옳은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업보 쌓지 않겠다며 다른 중생을 내버려둔다면 그 또한 옳은 길이 아닐 것입니다.”
“하하, 업보라. 네 말에 일리가 있구나.”
공안서 실무를 나누어 저의 며느리와 김가진이 맡는다 해도 여전히 가장 위에서 들어야 할 것은 모두 듣는 대원군이 따져보니 그러하였다.
불목하니 유천이야 알 리 없지만, 지금 청국의 젊은 황제가 사람 때리고 쏘아가며 급히 변법하는 까닭은 조선이 어쩌다 보니 중원의 문물을 추월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요, 이것은 그 옛날 전봉준이가 강철과 피죽 운운하던 시절부터 나라에서 노리고서, 우리의 민생 다져 다른 나라도 민생에 힘쓰게끔 만들자 하던 계책의 결과라 할 수 있었다.
또한 청국 사정에 부득불 조선이 매일 수밖에 없는 까닭 역시, 그 옛날 서태후가 딴에는 묘책이라며 저들의 나라 문을 조선 도고들에게 널리 열고 또 동삼성과 대만의 경영을 허하기까지 한 데서 말미암았으니, 이익을 본 만큼 얽힐 수밖에 없었다. 당장 비록 극복의 단초를 얻었다지만 겨우 숨통 몇 곳 트인 정도에 불과한 황란도 어쩌다 들이닥쳤는가 생각해보면 이 ‘업보’라는 말이 참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원군도, 삼각산 자락에만 머무는 한유천도 아직 모르는 사실은, 중생들 쌓는 업보에 구업(口業)도 있는바, 전란 일어나면 세자가 대열 앞에 서기를 청하였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나가 북경 구중궁궐까지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폐하! 감축드리옵나이다! 반적에 맞서 대승 거두었으니, 이로써 다시 사해에 대청의 위엄을 널리 떨치는 첫 걸음을 뗀 것이라 하겠습니다!”
득의양양한 원세개가 정말 감축하는 마음으로 – 물론 대청 종실보다는 저 자신을 위함이 더 크겠지만 – 승첩을 고하였다.
아라사와 라싸 오가면서 공작 벌이던 악왕롭샹에게는 당황스러운 소식으로, 옛 남양군 절반이 순순히 황명 받잡고 북으로 향해, 차하르성의 불순한 마음 품은 왕공들에게 순순히 토지를 내놓으라며 총을 들이밀었더니, ‘아직 때가 아니다’ 만류하는 젭춘담바 후툭투의 말 따위 흘려버리고서 – 말이 같은 몽골이지, 사이 갈라진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 곧장 활과 총 들고 말 위에 오르는 자들이 있었다.
그 규모는 옛날 셍게린첸과 함께 직례와 산동에서 활약하던 옛 몽골팔기에 비하면 티끌 정도였지만, 기세만은 높았다. 한양병공창에서 뽑아낸 기관총 총구와 마주하기 전까지는.
조선이 한창 천하 만방에 무기 팔러 다닐 때, 맥안공행에 비싸게 주고서 아예 그 제도를 들여왔던 장지동 덕에, 남양군이 별 생각 없이 가져온 맥씨기창(麥氏機槍) 앞에서는 저들의 조상이 함풍 연간에 팔리교(八里橋)에서 그랬던 것처럼 쓸려나갈 따름이었다.
“도적을 꺾은 일은 나 또한 들었다. 허나 무릇 변법의 길은 인명 살상하는 데 있지 않으니, 기꺼워하면서도 안타까워하고, 즐거워하면서도 근심할 일이다. 북양대신을 내 치하하나, 부디 이를 잊지 말지어다.”
“망극한 황은이 태산(泰山)과 같으니 신이 어찌 감히 새기지 않겠나이까.”
전혀 새기지 않으면서 원세개가 또 이어서 말했다.
“신이 듣기로, 또한 조선국에 기이한 풍문이 돌고 있는데, 만에 하나 전란이 일어나면 부디 그 선봉 맡기를 원한다고 그 나라의 세자가 상언하였다 하였습니다.”
조선의 역사가 잘 알려진 것은 근래의 성공이 중원의 세인 눈길 끌었기 때문이니, 꼭 실록을 공개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실록에 나라 세우기 전 저들 조상 이야기가 많이 있으리라 여기고서, 심양에서 조선 찾아가는 젊은 학자들이 여럿 있기는 했다.).
“내 알기로도 이는 드문 일이다. 그러나 조선이 전쟁을 꺼리는데, 아마 젊은이의 의기로 마땅한 도리라 여기어 그리한 것이 아니겠는가?”
“신이 짧게나마 군무와 외무의 전말을 살펴온바, 이는 어쩌면 깊은 뜻이 더 있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이 원한다면 곧장 내게 아뢰었을 것이다. 무슨 뜻이 더 있겠는가?”
“지금 그 나라는 소위 황란이 닥쳤는데, 그 원인은 이익을 탐하던 어리석은 무리들이 우리 변법을 두려워한 소인배들의 황언(荒言)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소국의 소심함은 아무리 당세(當世)에 풍족하게 되었다 한들 쉽게 가시지 않으니, 괴이한 일은 아닙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이제 강남에서 변법이 널리 이루어지게 되면 다시 그 나라 민심이 요동칠까 두려워하여 미리 다스리는 뜻에서 이러한 풍문을 일으킨 것일 듯합니다.”
예컨대 아라사 같은 나라가 세자 – 물론 실지로는 사황(차르)이 아직 젊어 세자가 없지만 – 를 국경에 보낸다던가, 전란 일어나면 스스로 그 앞에 서겠다 공언한다던가 하였더라면 이는 필히 근심할 일이지만, 조선을 어설프게라도 아는 이라면 그 반대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조선국이 전란을 두려워함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입니다. 그 땅에서 이제 불측한 일을 입에 담는 이는 곧 그 나라 세자, 나아가 대통(大統)을 거론치 아니할 수 없게 되었으니, 번병이 대국을 위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단칼에 변법을 밀어붙여, 이 절호의 때를 오롯이 써서 후에 미련이 남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듣던 황제 자이티얀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손덕명의 분병(分兵) 정책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유영복과 엽지초가 다툰 일까지 우선 무마하였으니, 짧게 보면 잠시 평온을 되찾은 셈이다. 하지만 이 다툼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음으로써 상하의 믿음이 한 번 깨졌으니, 여기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것이 강남이 되었든, 북양군이 되었든.
그리고 길게 보면 나라 전체에 더 큰 화란이 될 터. 누구의 원한도 사지 않은 채, 누구의 피도 흘리지 않은 채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일이 어찌 이리도 어렵다는 말인가. 끝내 원한은 원한대로 사고, 피는 피대로 흘리고야 말았으니, 남들과는 다른 뜻에서 조선이 부러워지는 때였다.
“무근전의 학사들은 무어라 하였느냐.”
“그들은 대개 강남 광동의 사람들이니, 수천 리 떨어진 중원의 북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여상히 다룰지언정 그들까지 얽힐 일에 있어서는 미덥지 못함이 있습니다.”
“하하. 그렇더냐. 네가 황은의 무거움은 알면서 성총의 헤아림은 모르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구나.”
충동질이 거하게 실패한 원세개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하북과 산동, 섬서와 산서에서 변법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떠돌던 백성들이 다시 자리를 잡고 있음은 알고 있다. 직례 근방의 두려운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강남이나 사천에 이르기 전 잠시 숨을 고를 때라 하겠다.”
“예, 폐하.”
“잊지 말지어다. 이제 구주(九州)를 통틀어 신군은 하나로 묶이게 되었다. 비록 아직은 이름만 그렇다지만 장차 실제로도 그리 될 것이다. 이 일에 있어 내 믿을 곳이 어찌 여럿이겠느냐?”
남양군이 흩어졌으니 이제는 북양의 신군 천하라 여기기만 한 것이 패착이었다. 원세개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믿을 곳이 이제 하나뿐인데, 자신이 그 하나에 반드시 든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중원 천지에 북양군에 대항할 이가 없어지면, 북양군의 쓰임이 다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변법이 늦춰지게 된다면, 정말 그런 지경에 이를 수도 있을 터. 신군이 하나로 묶였음은 반대로 강남에서 이름 떨친 문무 군관들을 그대로 북양군 머리 위에 올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섣불리 나서다 원하지 않는 깨달음만 얻고 물러나는 원세개의 주먹이 힘껏 쥐어졌다.
그나마 이번 찰합이 싸움에서 드러난바 그 기관총인지 기창인지 하는 물건이 참으로 큰 효험이 있으니, 언제고 북양군의 쓰임 다하는 일이 없게 하려면 저것이 관건일 터였다. 그것 하나만 있으면, 어디를 쳐들어가지는 못해도 막아내는 것은 능사이니, 일개 영(대대급)으로 능히 일개 협은 물론 진(사단급)도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직접 병법을 시행해본 적이 거의 없는 원세개조차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북양의 사람이 그것을 독점해야 할 것이다. 조선이 대국 사정에 끼어들지 않고, 한양의 병공창도 오직 북양을 위해서만 신묘한 총포를 만들어낸다면, 혹 누군가 반기를 든다 한들 어디서 총포를 구하겠는가. 양이들이 작정하고 백문제개의 형세를 깨뜨리려 개입하지 않는 한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하여 강남 민심 고려해 허울 뿐인 통제 자리도 허용치 않고 도로 직례로 불러들인 엽지초 대신 한양에 내려보냈던 풍국장에게 전보를 보내었다.
‘각 성으로 흩어진 옛 강남 군세가 그 기창을 더 확보하지 못하도록, 병공창을 비롯해 여러 기기창의 단속을 엄중히 할 것.’
그런데 받아보는 풍국장은 하필 공에 몸이 달아있는 상태였다.
이홍장과 같은 안휘성 사람이라, 다른 북양군 군관들에 비하면 그나마 회수 남쪽의 사람들과 말이 통하리라는 생각에 원세개는 지휘를 단기서에게 맡겼는데, 떡하니 그가 찰합이성에서 군공을 세웠던 것이다.
세워진 이후로 한 번도 실전 치를 일 없던 신군의 첫 전공. 그것을 그 합비 놈-물론 겉으로야 형제와 같네, 참으로 지재가 ‘북양의 호랑이’라 일컬을 만하네 하지만- 이 채갔으니,
‘하간(河間) 사람이라고 못할 것은 또 무어란 말이냐!’
할 만했다.
그리하여 곧장 답하기를,
‘명 받들고자 하나, 남양대신 장지동과 그 아래의 장건, 장패륜 등이 반발하고 있음. 그들이 주장하기를 첫째, 병공창의 총포는 오직 중원 사람들이 값싸게 화포의 리(利) 얻게끔 하는데 목적이 있으니 마땅히 모두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며, 둘째, 조선 역시 저들 기기창에 고분(지분) 있으니 지금 함부로 문을 걸어잠글 수 없다고 함.’
하면서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므로 지난번에 미처 드러내지 못한 신군의 위엄을 이번에 떨치기를 제언하는 바임.’
대원군은 세자의 고집이 사람 죽이기를 원치 않던 저의 아들에서 나왔다 여겼는데, 아들 귀남은 반대로 나라와 자신의 권세 욕심을 거두지 않던 저의 아버지에게서 그 고집이 나왔거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강제로 명하면 부자간 정리만 상할 것 같아, 우선은 그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안양대군을 시켜보았는데, 여전히 그 결심은 요지부동.
안양대군이 설득에 실패했더라면, 설령 누가 충동질한 것이 발단이었다 한들 세자 본인이 굳게 믿고서 그런 글을 올리게 되었다는 뜻이니, 이제 와서 누구 한 사람만 탓한들 될 일은 아니었다.
“경들 가운데 대통의 안위에 관한 말을 밖에 드러낸 이는 없으리라 믿소.”
하여,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관계자들을 경무대 – 이름에 어울리는 용도였다 – 모아놓은 귀남이, 너무 일동이 그 자리서 얼어붙은 듯해 이렇게 말했더니 오히려 더 얼어붙어, 한겨울 얼음골의 고드름과도 같았다.
“듣기로, 근래 대국 정황에 두려워지는 면이 없지 않소.”
“실로 그렇사옵나이다.”
군부의 장수들이 날래고 용감하기가 용호(龍虎)와 같다 스스로 뽐낸다던데, 한 사람 앞에서 이리 두려워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주상은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자신도 여기 와 있지 않다면 조금은 우스운 일이라 생각하며, 김옥균이 먼저 나섰다.
“흠흠, 내각을 대변하여 제장(諸將)에게 일러두고자 하오. 변법을 두고 여러 사람의 마음이 맞지 않은바 혹 일시의 무력으로써 전횡하려는 흉한 마음 품는 자가 나올 수도 있다 하였소이다.
강남은 대국뿐 아니라 우리 백성이 직접 나아가 교역하고, 또 만든 물산을 내어 미곡과 보화를 얻어오는 터전이기도 하니, 함부로 그 땅에 간섭해서도 안 되지만 또 그 평온이 흐트러지는 것을 좌시할 수도 없는 것이오.”
정예한 군병이 이십만. 그중 실제로 총 드는 이가 꾸준히 늘어나 지금은 십오만.
호조에서는 계속해서 저만한 군병이 어디 필요하냐며 깎으려 노력해왔지만, 어심은 확고부동하여 (따라서 신료들 사견에 세자의 고집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명백하였다), 대신 고생스러운 곳의 근무를 돌려가며 수자리서듯 하는 식으로 제도를 운영해 왔다.
그렇지만 막상 싸움에 대비하려니, 이대로라면 참위 이척도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전장이라는 것이 아무리 뒤의 군막에 있다 한들 언제 유시(流矢) 하나쯤 흘러들 지 모르고, 또 춥고 거친 북변에서 고생 모르고 자란 세자가 잘 지낼지, 그것도 확언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가 귀남과 무장들, 그리고 병조 관헌들이 이해를 같이하는 바였다.
“병법에 이르기를 싸우지 않고 굴복시킴이 선지선(善之善, 최선)이라 하였으니 가히 취할 만합니다.”
군부의 원로 한성근이 ‘이왕 그렇게 된 것, 어떻게 늘 그랬던 것처럼 예조가 잘 해결해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말을 돌려서 했다.
평소라면 그동안 예산 줄이자고 주장해 왔던 중신들에게 큰소리 칠 기회라 여겼겠지만, 사세가 이러하니 오히려 저들 입으로 저들 쓰임새 줄이는 방도를 구하자고 하게 되는 무관들이었다. 이 서러움을 누가 알아줄까.
“그 말이 실로 옳습니다. 비록 대국의 변법이 순탄치 않다 하나, 아국이 한 일을 어찌 다른 나라가 따르지 못하겠습니까? 혹 중정(中正) 벗어나는 때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다져온 우의가 간성과 같으니 오직 인의로써 달래고 타이르면 될 것입니다.”
“허나 두려운 일은, 근래 신편한 정무군의 등단(대장)으로 원세개라는 이가 있으니, 이는 수 년 전부터 아국을 모해하는 말로써 이익 취해온 자입니다. 그런 이가 군권을 쥐고 있으니, 도의와 충언으로 능히 해소하지 못할 다툼의 근원이 될까 그것이 안타깝고 또 무섭습니다.”
아웅다웅 떠넘기는 문무 양반(兩班) 사이에서 귀남과 옥균은 동시에 고심하고 있었다. 물론 둘 중 더 짜임새 있게 고심하는 쪽은 임금이 아니라 신하라.
그 계책을 하루이틀 본 것이 아닌 김옥균이 보기에 방편은 이러하였다. 택일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전제를 하나씩 도끼질해 무너뜨리다 보면, 지붕이 송두리채 내려앉기 전 하나쯤은 기괴하고도 기묘한 발상이 떠오르기 마련.
“그러나 한 번 총칼이 나서게 되면, 그때는 아직 대국 안의 어지러움을 모두 알지 못하는 서양 나라들도 개입케 될 것이니, 그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만일 대국의 정사가 간난(艱難,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싸우지 않고 그 조정 안의 난신을 굴복시키는 방도가 최선일 것인데, 난신이라면 반드시 말로 달랠 수 없으니 사람이 직접 나서야 할 것이오. 이것을 싸움 없이 해낼 방편이 있겠소?”
귀남 생각에, 나라와 나라 사이 뜻이 맞지 않는다면 – 아니면 그냥 한쪽이 정말 못된 나라라면 – 전쟁이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나라 대 나라가 아니라 사람끼리 뜻이 맞지 않는다면 꼭 전쟁으로 흘러갈 필요까지는 없었다.
당장 그 옛날 매일같이 시위 하던 이들도, 보면 정말 싸우지 않으면서 – 물론 중간에 최루탄이나 화염병이 심심찮게 오가서 그의 장사를 방해하곤 했지만 – 저들 맘을 알리고 상대를 따르게끔 하고자 그리한 것 아니겠는가? 꼭 말로 하지 않더라도 뜻을 바꾸는 방법이 없지는 않은 셈이었다.
“나라 밖으로 나서되 싸우지 않는 방편이 있지 않겠소?”
“비전지전(非戰之戰)이라! 신의 생각도 그와 같사옵나이다.”
가만 있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발상 내놓으니, 나머지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과연 그것이 다가올 노도 넘어서기에 충분할 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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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는 대원군이 직접 후원하였던 원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본래 고려 광종 시기에 암자가 지어진 것을 ‘서평군 이공(西平君李公)’ - 방계 왕손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봅니다 – 의 후원을 받아 중종 연간에 창건하였는데, 이후 부침을 겪은 듯합니다. 이후 대원군이 위세를 떨치던 1866년에 건물을 보수하였다고 하는데, 일설에 따르면 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대천자(二代天子)’ 묫자리로 이장한 것도 화계사에서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 설화는 대원군이 얽혀 있던 여러 절에 동시에 전하기 때문에 신빙성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유천’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만해 한용운은 몰락 양반 집안 출신으로, 한명회의 동생 한명진의 후손입니다. 그의 형 한윤경이 가세를 일으켰고, 본인은 신동으로 이름났지만,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가출하여 한동안 방랑하던 중 잠시 설악산 오세암에 의탁해 불목하니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후 귀가와 가출을 되풀이하던 중 마침내 1905년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출가하고 우리가 아는 만해라는 법호로 알려지게 되지요.
중간에 언급되는 보우는 명종대의 이름난 승려로, 문정왕후의 힘을 빌려 숭유억불 기조를 잠시 누그러뜨리고 불교 진흥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문정왕후 사후 곧장 성균관 유생들에게 탄핵을 당해 제주도로 유배를 당했고, 그곳에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장살(杖殺)당합니다. 이후 대중적인 인식으로는 어지러운 시기에 등장할 법한 일세 요승(妖僧) 정도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도 그런 시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본래 역사에서 중국의 근대화된 방위산업 역량이 제대로 발휘된 것은, 역설적으로 군벌 시대에 들어서였습니다. 하지만 한양병공창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이는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재정적 문제에 말미암은 면이 훨씬 컸습니다. 한양병공창은 이미 1890년대에 소총의 양산에 들어갔고, 1910년대에는 독자적으로 반자동소총(이른바 류장군 소총)을 설계할 정도였습니다. 일례로 1910년 남경에서 열린 전람회에서는 자체 제작한 야포와 속사포, 카빈과 기관총이 전시되기도 했지요. 같은 해에는 사천의 성도(청두)에서 독일의 맥심 기관총 기반 기관총인 MG08을 면허생산하기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국지적으로 이루어졌고, 여러 이유로 인해 결코 통합적으로 발휘되지 못했습니다. 한 예로 1908년 시점 북양군벌 소속 진(사단)의 구성을 보면, 총원이 12,512명에 달하고 예하에 독자적인 포병, 공병, 기병 편제 등을 완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관총은 사단급 지원화기로 운용되고 있었습니다 (Fung (1981), The Military Dimension of the Chinese Revolution,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