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누룽지 한 덩이 (2)
“장차 천하 유란(有亂)케 되는 화근이 될까, 그것이 두려울 뿐일세. 내가 힘써서 얻은 군권도 아닐진대 추호라도 감히 아쉽게 여기겠는가.”
지난 십수 년간 지녀왔던 부월(斧鉞)을 하루아침에 돌려주게 된 – 실제로는 도끼 대신 서류의 산더미를 넘겨주었다 – 장지동은 의외로 무덤덤하여, 한껏 긴장한 손덕명은 안도하는 한숨을 고개 돌리며 내쉬었다. 그제야, 장지동이 내오게 한 차의 향이 느껴지며 치소 정원의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이 남양대신으로 재직하며 한때 북양대신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일대의 군병을 하나로 통솔하게 된 것은, 본디 일신 욕심이 아니라 천하를 안정케 할 임시의 방편으로서 그리한 것이었다네. 이제 이를 거두어 북양의 신군에 합친다 하나, 잘못하면 오히려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 그린 것보다도 못하게 될 터이니 부디 주의하게나.”
그 옛날 이홍장이 북경에서 처음 권신 노릇하던 시절, 저에게 강남을 맡기면서 던져준 것이 남양수사였다. 심보정(沈葆楨)이나 유곤일(劉坤一)처럼, 사교를 손수 진압하며 나름대로 군재 드러낸 이들에게 나누어 맡겼다가는 곧장 엉뚱하게 일이 흘러갈 수도 있으므로, 귀한 군대가 함부로 무너지지 않게끔 하라는 뜻 절반, 이 정도면 권세라 할 수 있으니 만족하라는 뜻 절반으로 장지동 한 사람에게 쥐어준 군권.
허튼짓하였다가는 설령 성사(成事)할지라도 대청의 종사에게 결코 이롭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이 장지동이요, 옛 청류파 사람들의 우두머리로서 인망과 지재는 있으되 군재는 본인과 그 아래의 장패륜, 장건 등을 합쳐도 이홍장은커녕 원세개 한 사람보다 못할 사람이 또 장지동이라, 지금까지는 얼추 천하 평안을 위한 일시의 계책으로서 그 구실을 잘 하였다.
“예, 대인, 이 손 모는 재차삼차 감사의 말씀 올릴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본인의 군재 용렬하다 한들, 조선의 은이 뿌리가 되고 동철의 수익이 줄기가 된 강남 일대의 병기창과 선정국(조선소)은 날로 성업이었다. 거기에 서태후 ‘요양’ 마치고 돌아갈 제 보내준 후원이 또 있었으니, 장지동에게 일말의 역심이 없다 한들 마치 천하가 하나되어 그를 역적으로 만드는 듯하였다.
그러니 일이 불거지기를 기다리느니, 장지동 한 사람 손에 들어간 강남의 군권이라도 환수하여, 혹 대청의 어지러움을 원하는 자들이 요행 노리고서 발칙한 짓 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 손덕명의 발상이요, 곧 광서제의 뜻이었다.
조선이야, 서토 활불의 스승이 찾아와 보란듯 강남 유람한 사실-광서제가 사람 풀어 확인하니 곧 참으로 밝혀졌다-을 누구보다 먼저 직고하였으니, 만일 이간질을 하려면 능히 할 수 있었을 것을 더 부풀리지 않았음에서 여전히 그 올곧음에 변함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차하르성(현 내몽고자치구 동부 일원)이 된 차하르부의 몽고 왕공들은, 스스로 반기 들기는 두렵고, 강남에서 대놓고든 암암리에든 조정에 먼저 항거하는 뜻 보이면 진퇴양난에 빠진 카안(천자)이 저들 요구를 들어주리라 여겼다. (달라이 라마와 젭춘담바 후툭투가 나라 세우려고까지 생각하고 있음을 이들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므로 장지동의 충심을 믿고 내놓은 이 위험천만한 계책이 성공을 거두는 듯하였다.
겉으로는 악왕롭샹이니 몽고니 하는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남양 땅의 뭍과 물에 이제 화포와 전선의 제도가 갖추어졌으니, 비상(非常)을 되돌려 상도(常道)로 돌아간다 하였다.
“이제 다시 천하의 군권이 한곳에 모였으니, 어찌 화근이 남겠습니까? 이제 상군이나 회군도 없고, 오직 신군(新軍) 하나만이 남아 조정의 위엄을 보이고 만백성의 간성(干城)으로 굳건히 자리 지키게 될 것입니다.”
“허허, 본관의 뜻을 잘못 새긴 듯하군그래. 남양수사면 족할 것을, 어찌하여 뭍에서도 군사를 모으고 여러 영을 두었는지, 그 이치를 아직 살피지 못하였는가? 이는 강남을 외세로부터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중원을 강남으로부터 지키기 위함일세.”
“무슨 말씀이십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모든 일을 황상 한 분의 뜻으로 처결하겠노라 하면서, 자의원과 여러 성의 자의국 문을 닫았더라면 지금에 비할 수 없었을 게야. 민가의 세 살배기 아이도 주었던 것을 도로 앗아가면 이를 노엽게 여기는데, 하물며 신사의 부류에 이르러서는 어떻겠는가?”
그러잖아도 불만이 많을 판에, 그런 불만을 털어놓을 판을 마련해주었다. 비록 자의원은 흠정(欽定)하는 신법에 찬동하는 그 한 가지 힘만 남은 처지라지만, 자의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니 생각 품은 자들은 많고, 그 생각이 실제로 이루어질 방편은 없으니, 자의국 한 곳만 각 성에서 가장 시끄러운 곳으로 남았다.
그뿐인가? 멀리 화북에서 농토 잃고서 휴지조각에 가까운 지권 달랑 들고 오는 지주들이, 새롭게 그 기세 떨치는 도시들 곳곳에 눌러앉아, 그런 불온한 마음에 부채질하듯 이르기를,
‘이 지권의 값을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조만간 조정에서는 강남 땅의 세금으로 지권에 상당하는 값을 미리 치르고자 할 것이다.’
하곤 하였다.
아예 위에서 정하는 조세에, 중간에 관에서 떼어가는 잡세에, 사교와 염군의 난 이후로는 곳곳의 이잡(釐卡)에서 단련의 이름으로 떼어가는 이금에 모두 시달리던 때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겠지만, 한때 황상까지도 움직였다던 여론의 힘을 스스로 확인한 마당에 어찌 가만히 참고만 있겠는가?
“... 그러고도 그들이 감히 무엄한 뜻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은, 아직 남양수사와 육군이 있어, 혹... 권신이 머나먼 경조(京兆)에서 불측한 책략으로 그들을 핍박하는 일이 있다면 능히 막아낼 것이라 여기기 때문일세. 그런데 사정 모르는 이가 보기에, 군권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객장(客將)에게 넘어간다면 어떻겠는가.”
“허나 성상께서는 오직 중흥의 대업을 완수하시어 대동(大同)의 기틀을 닦는 것만을 일심으로 삼고 계십니다.”
“자네도 바로 옆 내 마음을 모두 모르는데, 어찌 양광에서 직례의 마음을 알겠는가?”
장지동은 영명한 – 실제 지재야 어쨌든, 무엄함 무릅쓰고 생각하자면 나라 위해 손수 오욕 감수하는 것만으로도 근 백년 사이 가장 영명한 황상이었다 – 천자를 보필하는 젊은이가 이리 생각 짧음을 안타까워하고, 손덕명은 수십 년 동안 천조의 근본이 된 강남 땅을 굳게 지킨 충신이 변법의 시급함을 이리도 몰라주는가 여기며 답답히 여길 뿐이었다.
“지금은 실로 변법의 마지막 적기입니다. 조선국이 아직 우리에게 충실한 가운데 일본국과 결연하였던 것은 깨졌으므로 가까이 우환이 없고, 아라사가 동쪽으로 뻗는 것은 아직 끝이 요원하므로 심려에 들지 않습니다.”
영국 가는 배 기다린다는 핑계로 상해에 머무르던 이홍장이, 찾아간 장지동 그에게 한 말도 얼추 비슷한 가닥이었다.
“한때 우리 중원은 천하의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문물예약이 모두 여기서 일어났으며, 그 부를 부러워하여 만국에서 입조하였지요. 그런데 이제 그것이 희미해졌으니, 여기서 다시 한 세대가 지나면 ‘가운데 나라’는 잊히고 오직 오랑캐 말 ‘지나’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생은, 그리고 황상께서는 중흥의 이름으로 스스로 기망하며 가라앉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홍장도 그렇고, 이 젊은 손씨도 그렇고, 일전의 그 라마승 악왕도 그렇고,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 난을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부가 쌓이는, 풍요로운 땅을 두고서 굳이 있던 것을 갈아엎고 없던 것을 만들어내며 안달을 낼 필요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백을 쥐면 천을 얻고 싶어하고, 나귀를 얻으면 준마를 탐하니, 장지동은 그것을 안타깝게 여길 뿐이었다.
“본관이 여기서 무엇을 더 말하든, 자네는 물론이요 황상께도 뜻이 모두 전해지지 않겠지. 허나 이것만은 염두에 두게나. 이처럼 강남의 민심이 군권의 추이를 살피고 있으니, 설령 이 사람 손에서 떼어낸다 하더라도 반드시 겉으로 위무하는 처분을 함께 내려야 하네.”
“그러면... 이것은 어떻겠습니까?”
담노(談老, 노자를 논함)하는 자들이라면 ‘지모를 끊고 계책을 버리면 백성의 이익은 백 배가 된다’ 하였을 텐데, 군권의 처분에 대해 전권 일임받고 온 손덕명이 재빨리 구상한 계책이 과연 더 큰 다툼을 불러오게 되었으니 그 말이 틀리지 않은 셈이었다.
“조선국 속담에 호랑이 없는 골짜기에는 여우가 임금이 된다 하였는데, 과분하게도 다시 그런 자리를 얻었으니 황은이 참으로 망극합니다.”
유영복 딴에는 예의를 갖춘 것이었는데, 떠오르는 성현의 글귀 없어 동철에서 일할 때 들었던 조선국 속담을 끌어오고, 그마저도 용례를 잘못 알고서 인용하니, 졸지에 중원을 종단하게 된 회군 출신 엽지초(葉志超)는 한껏 불만 가득하던 터 더욱 기색 다스리기가 어려워졌다.
“흐흠. 그대는 이미 공을 세워 이름 드높으므로 이러한 중임을 맡게 되었소. 앞으로도 부디 충군(忠君) 두 글자를 마음에서 놓지 말기를 바라오.”
강녕(남경)과 한양 등지에 있던 남양군-따로 그리 자칭한 적은 없었지만 상대가 북양군이다 보니 절로 이름이 그리 붙었더랬다-을 흩어, 각 성에 하나씩 신군으로 이루어진 진(鎭)을 두고, 각 진은 스스로 병력을 초모하고 군자를 모아 운영하되 오직 그 군령만은 하나로 모으기로 하였다.
손덕명 생각에, 지금 한쪽의 근심은 남양의 군세가 한데 모여 화북을 도모함이요. 다른 쪽의 근심은 조정에서 이를 걱정해 아예 남양의 군세를 흩어 없애버림이었다.
그러므로 묘책이라고 생각한 것이, 군권을 한 사람 손에 모두 모아두지 않고 각 성에 흩어서, 그 군자의 관리는 각 성 자의국이 맡게 하는 방안이었다. 할 일 없이 떠드는 자들에게는 일이 생기고, 또 설령 한양에서 나오는 신형 양창 들었다 한들 성 하나로는 철도 타고 내려올 북양군을 막을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전체 병력은 그대로 유지되니, 모두가 만족할 만한 방편이라고, 아직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젊은이는 자부하였다.
허나 아무리 백면서생인 손덕명일지라도 그 우두머리로 난데없는 안휘성 노장(회군 장수)이나 북양군 젊은이를 앉혀두면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으므로, 대신 일대에 군재 있는 사람을 자의국 통해 천거받기로 하였다.
장지동으로서는 께름칙하였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요, 옛날 흉흉하던 시국이었더라면 자칫 저를 역적 모의 한 것으로 능히 몰아갈 수도 있었을 상황이라, 우선 지켜볼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남양군을 모두 삼킬 것이라 생각하고 잔뜩 마음 부푼 채 손가 그 녀석과 함께 남쪽으로 온 엽지초에게는 그런 청천벽력이 없었다. 그 놈의 전보라는 요물로 인해 차일피일 미룰 수도 없고, 곧장 조정에서도 가뜩이나 재정 부족한데 참 좋은 생각이라며 받아들였기에, 저의 것이 될 수 있었을 부대들을 흩어놓는 것이 졸지에 엽지초의 일이 되고야 말았다.
하여 어울리지도 않는 신군 군복을 차려입고서, 망궐례 갖추고 ‘광동진통제(廣東鎭統制, 대략 사단장에 해당)’ 임명장 봉칙하는 유영복을 바라보는 엽지초의 눈매가 고울 턱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서 유영복이 나름 달랜답시고 어쭙잖게 고사 읊으며 고매한 시늉을 하는 것은 마치 딱지도 안 진 흉터에 염장하는 것과 같았다.
“하하, 감사합니다, 대인. 이 유영복이, 분골쇄신하여 충군애국하겠습니다.”
‘자, 세세한 사항은 다시 하달될 것이니, 본관은 이만.’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연회가 계획되어 있었으므로 엽지초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두 발로 걷는 것은 양친 두 사람 외에 모두 먹고, 네 다리 있는 것은 의자 빼고는 모두 먹는다 하며 놀림받는 것이 광동의 잔칫상인데, 이왕 받을 놀림이라면 적어도 그에 맞추는 시늉이라도 하겠다는 양, 상다리에 그릇 하나 놓일 때마다 삐걱일 만큼 화려하게 차림상 챙겼는데, 엽지초의 짜증 가득한 표정 본 유영복이 분위기 띄워보려 없는 말발로 옛 이야기를 꺼낼수록 도리어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 해서, 서생들이 저를 자의원인지에 추천하는데, 어디 저처럼 무식해서 무부 축에도 겨우 드는 사람이 그런 자리를 맡겠습니까... 아래에 그, 고홍명이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그 아이, 아, 이젠 아이도 아니구나. 하여간 그 젊은이가 총명해서 대신 보냈지요.”
“그렇소이까. 역시 인복도 있으시구려.”
어찌 되었든 천하의 명사요, 천조의 일만 양장(良將)과 백만대군도 하지 못하였던 서양 군대 물리치는 일을 실제로 이루었던 사람 앞이므로 그 성의 없는 칭찬이라도 해주는 것이었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의 옛 얘기나 풀어놓는 것을 좌시하지 않고 ‘도적놈이 과분한 황은 입어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하면서 꾸짖든, 때리든 하였을 것이다.
아마 질투도 있었을 것이다. 원세개 그 어린놈은 회군 시절이었다면 어디 영 하나쯤이나 맡았을 만한 자가 북양군 전체를 거느리는 자리에 올라 거들먹거리고 있고, 그를 따르는 더 시퍼런 애송이들은 (엽지초가 보기에는 별반 대단할 것도 없는) 서양 병학(兵學) 배운 인재라며 그 옆에서 한 자리씩 다들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나마 노장들 챙겨줄 큰어르신 이홍장은 멀리 구주인지 유람을 떠났고, 겨우 자신이 오를 만한 자리가 생기나 했더니 그나마도 유명무실이라. 이제는 하다못해 고작 시운 잘 만났을 뿐인 산적 수괴의 –서양 군대의 위력은 잊히고 그들 손에 들린 서양 무기는 늘다 보니, 그리 생각하게 되었다- 수작을 받아주는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여하간 그래서 낙향해서는, 그냥 한량처럼 살았지요, 무어. 민심 달래는 것도 이제 철도가 한양에 닿아서 잠시 철도 부설도 쉬고 있으니 한동안 일감 없고, 그저 남양대신 어르신과 그 아래 괴재(蕢齊, 장패륜) 선생께 가끔 소소하게 조언하는 일이 전부였답니다.”
유영복의 정복에 붙은 반짝이는 계급장이 저를 놀리는 듯했다. 실제 군병 대부분은 아직 곳곳에 흩어져 있어, 군의 조직이 끝날 때까지 한동안은 이름뿐인 통제겠지만, 그래도 저것이 어디인가. 솔직히 그저 오랑캐 복식이라 관복의 진중함만 못하다 싶었지만, 자신은 들지 못한 신군의 대열을 상징하는 듯해 마음을 불편케 했다.
거기에 술까지 몇 순배 돌았으니, 유영복이 필사적으로 꺼내는 이야기-허나 저의 자랑하는 것이 입에 붙어버렸으니, 이제 와서 어찌할 텐가-는 감추려 해도 감추지 못할 화를 오히려 돋우는 셈이었다.
“... 이를테면. 군사들이 자꾸 민가의 재물을 약취하여 민심과 군기가 모두 어지러워지는 일이 있었지요.”
“군문에 효수하여 엄정함을 보이셨겠지요?”
“하하, 그리하면 오히려 더 숨어들 뿐이니, 도적질 생리가 대저 그렇습니다. 대신 누가 민가의 재보 훔쳤다고 고변하는 자는 그 재보를 고스란히 받게 하고, 처음 훔친 자는 자신이 훔친 만큼의 재보를 본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였지요. 그랬더니 도적의 마음 품은 자들끼리 서로 다투면서 곧 모두가 청렴하게 되었답니다.”
“하하, 정말 대단하십니다그려.”
칭찬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명백히 비꼬는 것이라, 가뜩이나 불편한 자리가 더 불편해졌다. 그나마 유영복 따라다니던 옛 흑기군 두령들 – 그가 동철 떠나 한량이 되자 옛 정 반절, 뭐 떨어지는 것 없나 하는 마음 반절 – 은, 이 자리 지키는 것이 엽지초와 함께 내려온 옛 회군 병사들이었기에 자제하고 있었다.
“흠흠, 대인께서 먼 길 오가시느라 피로하시어, 잠시 실수하신 듯합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허나 취중진담이라! 유 통제, 사람의 뿌리는 함부로 고칠 수 없는 법이오. 나라의 은혜로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앞으로는 더욱 삼가고 조심하여 망동하지 않아야 할 것이외다.”
하고서, 지금까지 유영복이 늘어놓았던 자기 자랑 – 유영복으로서는 성현의 말씀도, 재담도 떠오르지 않아 부득불 분위기 띄워보려 한 얘기였는데, 저의 부족한 말주변을 탓할 일이었다 –에 상응하는 훈계와 잔소리를 내놓기 시작했다.
“엥이, 츳츳. 대인은 무슨. 소인 중의 소인이구만.”
겨우 엽지초에게 하직 고하고서, 안 들릴 만한 거리까지 가자마자 푸념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무리 천하영웅이니 명장이니 하는 소리를 들어보았자, 정작 높은 분들에게는 그 놈의 도적 수괴 취급이니, 울컥 한스럽다는 느낌이 올라왔다.
“두목, 아차, 통제 대인. 저거 가만히 내버려두어서야 되겠습니까?”
“맞습니다. 원래 관이라는 것은, 한 번 깔보기 시작하면 계속 하대한다니까요.”
이제 저들도 그 관(官)에 속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옛 도당 두령들이 떠들어대었다. 그 중 고홍명이 따라붙기 전까지는 그나마 모사 노릇하던 – 그래보아야 장비(張飛)에게 모사로 이규(李逵) 붙은 꼴이라며 그들끼리 스스로 비웃곤 하였다 – 자가 말했다.
“헴헴, 쇤네, 아차, 음, 소관에게 묘책이 있습니다요.”
“무엇이냐?”
“거 보니까, 그 엽 대인이 무슨 쌈지를 애지중지하는 것 같던데, 아까도 챙겨와서 좀처럼 떨어뜨리지를 않더군요. 어차피 오늘 안에 여기를 떠나지는 못할 텐데, 뭔지는 몰라도 퍽 귀한 게 든 쌈지일 테니 훔쳐버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직접 해치지는 못하더라도 체면은 조금 깎을 수 있겠죠.”
유영복도 학문이 짧아서 그렇지, 보고 들은 바는 있었고, 또 그렇게까지 특출나지는 않은 군재라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될 계책과 되지 않을 계책을 분간하는 정도의 재주는 되었다.
만약 멀쩡한 고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망신을 준다면, 그것은 한판 붙자는 이야기다. 하지만 앞서 보니 취중 실언을 할 만큼 술도 거나하게 마셨겠다, 지금이라면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아마 뭔가 귀하고 민감한 물건이 들어있을 터. 그런 것을 잃어버릴 만큼 취하였으니 엽지초 한 사람의 망신이요, 또 앞서 한 실언도 그 술기운 탓으로 몰아갈 수 있으니 체면을 깎되 당장 그 자리에서 사생결단 각오로 달려들 만큼 깎는 것도 아니었다.
“좋다, 한 번 훔쳐와 봐라. 물론 중간에 걸리면 너와 나는 전전생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본 사이다.”
“헤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누구 무서울 게 없는 유영복의 부하들이라, 곧장 엽지초 들어간 방에 야음 틈타 들어가서는 쌈지를 훔쳐왔는데, 이게 왠 걸. 무슨 귀물인가 하고 열어봤더니...
“이게 뭐야?”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요, 고작 이런 것을 귀물이라고 애지중지하였음을 의아히 여길 뿐이었다.
만일 유영복이 황제의 칙령으로 군인들 사이에서 아편을 엄금하고 있었음을 알았더라면, 그리하여 엽지초를 지나치게 몰아붙인 셈이 되고야 말았음을 알았더라면 거기서 곧장 다른 방편을 생각해보았겠지만, 그것을 알 턱 없는 관계로, 아마 최상등 아편인 모양이라 여기고서 곧장 자러 갔다.
그랬더니 아뿔싸. 다음날 극히 대노한 엽지초가 문을 박차듯 들어와서는, 유영복 자신을 아편 잠상이라며 바로 위에 고하여 죄 받게끔 하겠다는 것 아닌가.
광동 땅에서 아편으로 소란 일어난 것이 무슨 몇 백 년 전 일도 아닌데, 다시 이렇게 아편으로 말미암아 파란 일어나게 되었으니, 임칙서가 살아 돌아왔더라면 머리 싸맸을 법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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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과 오대십국의 뒤를 있는 또 다른 혼란기를 장식한 근현대 중국의 군벌들은,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연원이 태평천국의 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태평천국의 난 초기 진압에 실패한 이후 각 성의 신사들에게 민병대인 단련(團練)을 조직케 한 것이 풀뿌리로 기능했지요. 그 흐름을 타고 명성을 떨친 1세대가 증국번의 상군입니다. 하지만 ‘1.5세대’라 할 수 있는 회군부터 이미 군벌화의 조짐이 가속되었는데, 다양한 세력이 한데 모인 상군과는 달리 이홍장을 중심으로 하는 안휘성 인맥으로 훨씬 강한 결속력을 보인 회군과 거기서 발원한 북양군이 곧장 안휘군벌과 직례군벌로 성장할 수 있던 것은 그런 밑바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련의 조직이 군벌의 기층을 이루었다면, 청말 지방관들의 크게 늘어난 권한은 군벌의 상층을 형성하였지요. ‘천조’가 대등하게 외국과 교섭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청 조정은 총독들에게 독립적인 외교권을 일찍부터 허용하였고, 북양대신직과 남양대신직에서 볼 수 있듯 통상과 근대적 무력을 갖출 권한 역시 곧 허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련 조직과 더불어 군비 조달을 위한 독자적 조세인 이금(釐金)의 수취가 허용되기까지 했지요. 이 이금은 본래는 얼마 떼어가지 않는다는 뜻에서 ‘이(釐)’자를 붙였는데, 그 수취기관인 이잡이 각지에 생기면서 실제로는 청말의 상업 발달을 상당히 저해하는 한 요소가 됩니다. 이후 세금으로 장난치는 것 역시 중국 군벌의 단골 군자금 확보 수단이 됩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지방의 행정권력과 조세권, 군권이 합쳐지게 되는, 청대는 물론이요 그 이전부터 여러 왕조들이 피하려 노력했던 상황이 갖추어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소수의 고관들이 근대화를 개인적으로 추진하게 되면서,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듯 양무운동의 실패로 이어지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지요.
엽지초는 원 역사에서도 회군의 장수로 활약했습니다. 염군의 난 진압에서 처음 두각을 드러냈지만, 그 후에 공을 세운 금단도의 난 (지난화 작가의 말에 언급되었습니다)이나 그리 공을 세우지 못한 청일전쟁이 모두 일어나지 않아, 조용히 퇴물 취급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실제로도 그는 아편 중독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중에서만큼 확고한 군권을 지니지는 못하였던 - 유곤일 같은 다른 세력자의 존재, 그리고 결정적으로 청불전쟁에서의 남양수사 궤멸 등 - 원 역사의 장지동은, 청일전쟁 직후 자강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자체적으로 편성하였습니다. 그의 근대화 노력의 중심지였던 한양과 무창, 즉 현재의 우한 일대는 그 기반이 되었지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과학보습소, 공진회 등 젊은 혁명가들의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병력 규모로는 2천여 명 전후였지만, 북양군과는 달리 과거길이 막힌 젊은 서생들을 중심으로 탄탄한 장교진을 갖추었습니다. 이후 호북신군으로 재편된 자강군 중 혁명사상에 경도된 이들을 중심으로 1911년 10월 10일 무창 봉기가 일어나, 신해혁명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장지동의 엉뚱한 유산으로 소위 '공돌이' 기질이 있었는지, 무창봉기에도 공병대 소속 부사관들의 공헌이 컸고, 또 그 전 1908년에는 열기구 정찰부대를 편성해 중국 최초의 '공군'부대를 만들기도 했지요.
작중 손덕명의 울며 겨자먹기 군제개편은 실제 역사에서 실권을 장악한 원세개가 러일전쟁 전후 주도하였던 군사제도에서 따왔습니다. 독일 모델을 수용해 사단급 부대(진)를 전국에 창설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했고, 연대급 규모였던 정무군은 원세개의 권력에 힘입어 1905년에는 6개 진(이른바 북양육진) 규모로 확대됩니다. 이 성과에 고무된 청 조정은 1906년 전국 각 성에 1~3개의 진을 두는 이른바 36진편련계획을 추진하였는데, 의화단의 난 이후의 고질적인 재정난으로 인해 그 비용의 상당 부분은 지방에서 자체 조달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