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에덴의 동쪽 (2)
유럽인들이 한데 뭉치는 일은 역사 이래 한 번도 없었다. 중원에 비하면 그리 넓지도 않은 땅덩어리건만, 기껏 나라 하나가 떨쳐 일어나 그 땅을 일통하는가 싶으면, 그때부터는 저들끼리 편 나누어 다시 싸우고, 근세에 와서는 숫제 영영 싸우는 것이 소망하는 바인양 조금 세력 커진다 싶으면 소진과 장의도 혀 내두를 합종(合從)의 술로써 몰아치니, 조위(曹魏) 시절 대진국 로마가 혼미하였던 이래로 구주 천지에 화평이란 없었다.
어찌 보면 항상 싸울 길을 찾아 고민하는 듯하기도 하였다. 겨우 문명이 일어나 대놓고 서로 죽이기 곤란하게 되면, 그때는 또 어떤 명분으로 피를 흘릴까 고심하고 있으니, 뻔히 그들 가운데에 잘 어울려 사는 유대인들을 몰아내고 죽여야 한다 외치는 자들이, 저들이 세상에서 가장 고매하고 발달하였다 자부하던 족속이라는 말인가.
이것이 재동 사랑방 드나들던 순박한 선비로서의 김홍집에게 든 단상이었다.
옛 벗 김옥균의 개각 후 사실상 좌천되어 이곳 파리에 조선공사로 부임한 – 물론 조선과 법국의 동맹을 생각하면 마냥 좌천이라고 볼 수만은 없겠지만 – 닳고 닳은 외무 관료로서의 김홍집이 보면 조금 보이는 것이 다르기는 했다.
개화는 천하에서 조선만 하는 것이 아니요, 비록 이미 그 수준 높으므로 빠르기로만 따지면 조선만 못하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발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덕에 도시에서 말업(末業, 상업)에만 종사할 것을 강요받던 유대인들이 오히려 덕을 보아, 개중에는 혼자 힘으로 치부하여 가문 일으키는 이들도 있었다 하니, 문제의 알프레드 드레퓌스도 그런 집안 출신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유럽 나라들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때 반역도당이다, 반체제 분자다 하면서 그 백성들 죄주던 것을 물리고, 너희도 정당 하나 차려서 나라에 고하면 인정해주겠노라 했는데, 그로 인해 고개 내민 소위 공산당이니 하는 무리들은 결국 학식은 많은데 정부와 체제에 불만은 많은 사람들이라, 자연히 그 가운데 유대인이 많았다.
허나 그것이야말로 유대인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훌륭한 핑계였으니, 러시아에서는 차르부터가 앞장서서 그들을 겁박하고, 독일에서는 카이저가 저의 입맛 맞는 말 하는 카를 뤼거(Karl Lueger)를 뜻있는 서생이라 친히 칭송하고, 이곳 프랑스에서는 공공연히 에두아르 드뤼몽(Eduard Drumont) 같은 자들이 유대인들은 만악의 근원이라고 떠들고 다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이 유대인 미워하는 것은 편하게 민심을 얻기 위함이든, 일시의 명성 얻기 위함이든, 아니면 그로써 이 세상에 족적 남기고 싶은 마음을 달래든, 사사로운 이득을 위함을 터. 군자국 자칭하던 조선국에서도 사람이 저의 욕심 부리는 것은 오백 년간 변하지 않았으니, 아마 조선이든 프랑스든, 하다못해 지금 뭇매 맞고 있는 유대인들이든 그런 본성이 드러나거나 감춰짐의 차이일 뿐 속은 별 다를 것 없을 터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곧 도성에서 가끔 마주쳤던 그 오페르트 영감 – 수염을 말끔히 단장하니 한 십 년은 젊어 보였다 – 이 들어왔다.
“전 장관 각하를 다시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참, 세상 일은 알 수 없군요.”
“저 역시 영감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신임 총리 김옥균이 궐외의 묘당(廟堂, 의정부/비변사)에 옛 경연관 동무들을 불러모으고서는, 저의 개각 구상을 공개하였던 것이 엊그제 같았다.
그때 이르기를, 저에게 소중한 단자를 던져준 이들을 위해서라도, 다른 나라처럼 정승과 판서도 싹 갈음함이 가할 것이라며 양해 구하였다. 하여, 홍영식을 필두로 나이와 경력 되는 이는 판서 자리에, 그렇지 못한 이는 참판 자리에 하나씩 앉히겠노라 하였는데, 그런 자리 하나씩 맡고 있던 김윤식과 어윤중, 김홍집 세 사람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싸움의 중간에 장수 바꿈은 필패(必敗)라, 어윤중 한 사람은 좌의정으로 올려 이 경제의 일을 이어가도록 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내치겠다 통보하였는데, 나이 환갑 내다보는 김윤식은 자신이 먼저 한 몇 년 쉬고 오겠노라 밝히고, 김홍집은 애매하게 붕 뜨게 되었다.
하여, 외무에 밝으면서 지체도 높은 사람 가기 가장 적당한 곳으로 법국 공사 자리를 김옥균이 먼저 제의한바, 지금 이 소란 한 가운데에 김홍집이 서 있게 된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물론 김옥균이 이 드레퓌스 사건을 미리 알고서 저를 골탕먹이려 그리한 것은 아닐 것이요, 만에 하나 자신의 자유분방 혹은 방탕하였던 유학 시절 흩뿌렸던 춘정(春情)의 소산이 찾아올 경우의 대처 부탁고자 함이 그나마 저의에 가까웠을 테다 (부임할 때 은밀히 직접 전한 편지에 따르면, ‘잘하면 없고, 많아도 3명이니 그 이상은 거짓부렁’이라 하였다.). 나라의 인사를 저의 사적인 일로 전횡할 만큼 어리석은 옥균은 아니므로, 그저 겸사겸사 일 맡긴 것이겠지만.
“자, 그보다, 지금 영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럿 있으니 얼른 움직이시지요.”
“후, 그럽시다.”
아무리 조선이 구미 바깥의 나라 중 명성 있는 축에 든다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조선 공사관은 유난히 성대한 축에 들었으니, 그 옛날 파리 코뮌 무너질 무렵 최익현이 단돈 1프랑에 장기임대한 건물 중 적당히 좋은 쪽으로 옮긴 덕이었다.
그런데 그 용도를 재연하겠다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저들의 회당 내버려두고 이곳 공사관 드나들고 있었으니,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은 학계에서 명성 높은 쥘 오페르트도, 에른스트를 불러온 수석 랍비 자크앙리 드레퓌스도 아니요, 서른 남짓한 젊은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이었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이 사람이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의문이기는 합니다.”
“영감의 일가붙이 되시는 분들이 오죽하였으면 스스로 뭉치거나 다른 유럽 나라에 의탁하는 대신 우리 조선의 힘이라도 빌리려 하겠습니까. 그만큼 절박한 것입니다.”
복도를 지나며 오페르트가 배 타고 온 두 달 사이의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주었다.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그 젊은 대위가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고, 강등과 불명예 전역 처분을 당했다는 것까지는 들었지요.”
“그러면 얼추 상황은 다 아시는 셈입니다. 그 이후로 형이 집행되어 드레퓌스 대위는 멀리 남미로 호송되었고, 여론은 영감의 사돈 집안과 겨레 전체에게 모든 비난을 쏟아붓고 있지요.”
대(大)응접실 – 방이 많다 보니 응접실도 여럿이었다 –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피 이어졌다지만 영 어색한 사이인 쥘 오페르트는 외려 엉거주춤하고, 헤르츨 한 사람만 눈에 띄게 반색하였다.
“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각하!”
“가, 각하라니, 과찬의 말씀이오.”
“미답의 땅 동방에 나아가 이름 떨치신 분이라면 찬사 받으실 만하지요! 이번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빌려주시리라 믿습니다.”
결국 맨입 칭찬은 아니었음을 깨달은 에른스트도 떨떠름해져, 저의 형 쥘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건 말건, 열띠게 헤르츨은 말을 이어가고,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Mathieu Dreyfus)도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듯 간간이 추임새 넣었다.
“지금 반유대연맹(Ligue antisémitique de France)은 이때다 싶어 날뛰고 있고, 군부는 정부에 벼르고 별렀던 칼날을 들이미는 형국입니다. 공화국 자체에 별로 감정 좋지 않은 교회도, 또 이번 기회에 인기나 얻어보자 하는 사람들도 여기에 편승하고 있지요.”
“군부까지?”
“저는 본업이 기자입니다. 빈에 소재한 『신(新) 자유언론사(Neue Freie Presse)』 소속이지요. 그러다 보니 조금은 들어 아는 게 있습니다.”
정부와 군부의 악연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 옛날 베트남에서, 유영복에게 한 대 맞고, 이때다 싶어 당시 정부와 함께 군부까지 내리깔며 집권한 쥘 그레비와 조르주 클레망소는, 그 이후로도 열심히 문명과 선의를 내세우며 대외정책을 추진했다.
그 와중에 러불동맹도 체결되었으니 완전히 현실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군부의 불만은 오히려 늘어만 갔다.
‘어째서 우리 국방비에 투자하지 않고, 저 미덥잖은 타타르 야만인들의 손을 잡는 것인가? 이보다 더 비-프랑스적인 정책이 있는가?’
‘생시르(Saint-cyr) 사관학교로도 충분한데,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의 저들 동문을 자꾸 군 안에서 추켜세워주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이제는 유대인들까지 같은 국민이니 임관시켜도 된다고 한다! 다음에는 숫제 독일인들을 데려다 사령부에 앉힐 생각인 모양이다!’
알자스 유대인 집안에,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의 소위 엘리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그러므로 군부의 불만 가득한 장군들에게 이상적인 표적이었다.
그리하여 극비리에 개발 중이던 중포의 제원을 독일에 넘겼다는 혐의로 그를 잡아들이고서는, 독일 주재무관 폰 슈바르츠코펜(Maximilian von Schwartzkoppen)의 휴지통에서 입수한 찢어진 편지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억지 논리로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억지 재판도 그런 억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고가 틀림없다는 심증만 있고, 정작 물증은 없으니 – 있더라도 무서워서 누가 제보를 하겠습니까 - 아무리 저나 여기 마티외가 노력한들 한계가 명백하였지요.”
“아니, 그러는 동안 대통령은 무얼 했단 말이오? 언뜻 듣기로 카르노 대통령은 꽤 지지도가 높았다고 했는데.”
어떻게든 자신이 힘 들이지 않고 빠져나갈 방도를 고심하던 오페르트가 대통령 사디 카르노(Marie François Sadi Carnot)를 언급하였다.
“대통령이 인기 많아도 하등 소용이 없지요. 측근들이 모두 힘을 잃었는데. 그 파나마 스캔들 때문에요.”
“흠흠, 그 일은 우리 조선 공사관도 상당히 예의주시한 건입니다. 비난하는 논리가 아무래도 우리까지 걸고 넘어가는 것이라서요.”
식민지 개척은 숭고한 문명국의 의무지만 비용이 많이 소요되니,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방안은 수에즈 운하나 동철처럼 군대 대신 유럽 기술과 자본만 들여서 인류 전체의 복지와 국익, 투자자의 사익을 모두 도모하는 것이라며, 그레비 행정부와 뒤이은 카르노 행정부는 모두 저들의 치적으로 파나마 운하 개발을 홍보하곤 하였다.
그러나 사실 파나마 운하 공사는 막대한 비용과 인명 피해만을 일으키고 큰 진척은 없는 상황이었으며, 결국 개발을 맡았던 파나마운하회사(Panama Canal Company)도 파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자산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회사가 지지부진한 공사 현황을 은폐하기 위해 바로 그 조르주 클레망소를 비롯해 여러 장관과 의원들에게 골고루 뇌물을 바친 것이 발각되고야 말았다. 더구나 하필 그런 은폐를 주도하였던 금융가들 중 유대인들이 여럿 있기도 했다.
조사 과정에서 대통령 사디 카르노는 파나마운하회사는 물론이요 그 전 정치적 경력에 걸쳐 뇌물을 전혀 받지 않았음이 드러났기에 오히려 청렴결백하다는 명성을 얻었지만, 갈수록 높아지는 반대파의 불만 앞에서 저의 편 들어줄 이들이 모두 몰락하였으므로, 이 드레퓌스 건도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 뻔히 알면서 손발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구려...”
“오죽하면 ‘늘 바쁜’ 너에게까지 연락할 생각을 하였겠느냐.”
쥘 오페르트가 ‘오죽하면’에 방점을 찍으며 한 마디 붙였는데, 헤르츨이 거기에 뱀발을 달았다.
“이게 다 나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없으니 세력이 없고, 세력이 없으니 모두가 우리를 편한 먹잇감 내지 땔감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저기 언약의 땅에 우리 보금자리가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궁색하게 이런 공사관에 모여 머리 맞댈 일도 없었을 텐데...”
“이보게, 지금 그런 말 할 때인가. 그리고 내 누누이 말했지만, 그 땅에 돌아갈 날이 언제 올지는, 인간이 정할 일이 아닐세.”
가만 듣던 랍비가 헤르츨을 나무랐다.
그것을 계기로 중근동 하면 해박한 쥘 오페르트가 반박하고, 아무리 사돈(예정) 집안이라지만 타나크(Tanakh) 말씀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하는데 랍비로서 좌시할 수 없는 자크앙리가 재반박하면서, 다시 남의 나라 공사관 모여든 유대인들끼리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는데, 결국 나설 사람은 김홍집이었다.
“자, 자. 잠시 말씀들 멈추시지요. 어찌 되었든, 우리나라의 고관인 오페르트 영감의 일가를 무고한 것이 사안의 본질입니다. 이를 해결함이 급선무지요. 여기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도우라는 본국의 지시도 있었고요.”
“그 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이의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마땅치 않잖습니까?”
건너건너 소문만 듣다 보니, 에른스트가 동방의 지혜로써 뾰족한 수를 마련해주리라 은연중 기대하고 있던 헤르츨이 방금 전과는 대조되는 낙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선은 늘 하던 대로 해 보아야지요. 언론으로써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는 우리 조선이 천하의 제일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수위는 다툰다 자부합니다.”
그러나 청국 속언(俗諺)에도 이르기를, 도(道)가 한 척 높아지면 마(魔)는 한 장(丈) 높아진다 하던가.
“옛날 영국에서 선인(先人)들 하던 것처럼은 안 되는군요.”
“저 때문입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기로는 오페르트 때문이 맞았다.
우선은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조선에서 백정의 아들이 국가적 영웅으로 모셔지고 있다. 예로부터 내려오던 귀천반상의 구분을 무너뜨림에는 유럽의 도덕적 도움이 큰 공헌을 하였다. 앞으로도 이처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하면서 넌지시 드레퓌스 사건을 언급하였는데, 그것만 해도 곧장 역풍이 들이닥쳤다.
‘그 나라에 자신만의 작은 왕국을 구축한 것으로 알려진 유대인 오페르트가 유럽에 돌아온 것을 본지는 확인하였다. 공교롭게도 반역자 드레퓌스를 비호하는 글을 조선 공사 무슈 김이 발표한 것도 그 무렵이다. 조선이야말로 남에게 참견하기 전 자신이 품은 이들 중 혹 독사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는 투의 비평은 그나마 신사적인 축에 들었는데, 직접 거론하기 무엇한 비난조 글들도 공통적으로 오페르트를 걸고 넘어지곤 하였다.
물론 옛날 이광도감 시절부터 계속 그 자리 차지하고서 근 삼십 년을 조선에서 광산 개발하는 데 보냈으니, 심지어 고국 독일보다도 더 지리에는 빠삭하게 되었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공기업 사장 자리 차지하고 있던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니 억울할 따름.
“영감께서도 부단히 공을 들이셨다 들었습니다.”
“허나 그 역시 모두 공(空)으로 돌아갔지요. 사세 돌이킬 수 없이 되었으니 아쉽고 안타깝게 여길지언정 무얼 더 하겠습니까.”
김홍집이 저의 공사 간판 내세워 여론을 조금 움직여보려 하는 동안, 오페르트도 – 사실 선망 가득한 시선에 떠밀린 것이 컸지만- 근 몇 달을 부산히 움직였다. 저의 직함이 어찌 되었건, 저 성난 군중 앞에서는 ‘그래보아야 유대인’일 테지만, 사회의 저명한 이들에게는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으리라 믿고서, 그 옛날 조선 산야 누비던 발품을 팔아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러 다니곤 하였다.
파리 바깥에 있는 이들을 상대로는 편지도 열심히 보내고 하였지만, 어느 쪽도 큰 성과는 없었다.
유럽 정·재계에 잘 나가는 유대인들은 몇몇 있다지만, 그들은 오히려 함께 비난당할 것이 두려워 같은 일족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유대인들은 나선다 한들 드디어 본색 드러냈다며 뭇매나 맞을 것이었다.
반유대주의 내세워 지지도 끌어올리려는 이들에게 반감 품은 지식인이나 좌파 정치인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파나마 스캔들로 기세가 크게 꺾인데다가, 그들을 결집할 증거도 없는 상황. 무언가 깃발을 내걸고 그 아래 모이라 해야 할 터인데, 지금 부는 광풍을 견뎌낼 깃대조차 구할 수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이만하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하겠지요. 집안 사람들에게는 잘 이야기하고 슬슬 다시 조선으로 향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저의 뿌리에 대해 큰 관심 없는 오페르트라지만, 자신이 원하여 된 것도 아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에게 도매금으로 욕 당하는 것을 보고 또 겪으니 소회가 없지 않았다.
“오랜만에 돌아오신 유럽인데, 더 계시지 않고요?”
“이런 시국에 더 있어봐야 뭐 하겠습니까. 이제 보니 보금자리로 삼을 만한 곳이 지구상에 몇 곳 없더군요.”
동생 구스타프 말마따나, 아브라함의 자손이 발 붙일 곳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젊은 헤르츨이 그 사이 ‘이 기회에 시온에 터전을 일구자’ 하면서 여기저기 뜻 같이하는 이들 – 지난 러시아 포그롬 이후로 몇몇 유대인들이 그런 뜻으로 뭉치고 있다 하였다 – 모으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적이었다.
“공사께서도 그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도덕과 명분도 물론 좋지만, 통하지 않을 때가 있기 마련이지요.”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릅니다.”
이만하면 조선 돌아가서도 손가락질 당하지 않을 만큼의 도리는 다한 셈이요, 저 대신 총국에 박아넣을 유대인 젊은이나 몇 명 ‘보쌈’ 해가면 그것으로 긴 여행의 보람은 있으리라 여기고 있는데, 오히려 김홍집은 그 말을 듣고서 저 부임하기 전 김옥균이 한 말이 떠올라 오기가 도졌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도원 형.’
‘거, 날 내쫓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데.’
약간의 섭섭한 감정 담아 농으로 받았는데, 김옥균의 말에는 진솔한 동문의 정이 의외로 묻어나왔다.
‘법국 정국이 파나마 사건 이후로 심상치 않습니다. 어쩌면 그간 저들을 문명이니 진보니 하는 길로 이끌어온 것이 조선이라며 모두 뒤집어씌우며 비난하는 자가 나올지도 모르지요.’
‘이 사람, 나도 녹봉을 허투루 받지는 않았네.’
‘그렇기 때문에 더 걱정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물론 존형과 저는 뜻이 종종 맞지 않았지만, 지금 아국이 한 사람 인재를 허투루 여길 만큼 인복(人福) 넘치는 실정은 아니지 않습니까. 딱 존형과 같은 성정의 사람이 파란 닥칠 때 화 입기 쉽습니다.’
물론 김홍집이 어디 가서 샌님 소리 들을 법한 성정이긴 하다지만, 그 사람 모난 데 없이 둥글어 어디 가든 화 당하지 않겠다 하는 말을 죽었다 깨어나도 듣지 못할 김옥균이 제게 그런 이야기 할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운양(김윤식) 형은 못된 마음으로 찔러서 푹 들어가도 허허 웃으며 피 한 방울 내지 않을 성정이요, 일재(어윤중) 형은 애초에 일 바빠서 해치려 한들 호조 담 넘기 전에는 보기 어렵지요.’
‘그건 그렇지. 요새 일재 형이라면야, 누가 환도 들고 달려들면 그 환도 살 때 나라에 조세는 제대로 바쳤냐 물어볼 테니.’
‘그런데 형은 그런 자가 있다면 몸을 피하거나 같은 칼날로 받아치는 대신 당당하게 이치로 설복하려 하겠지요. 그것이 저는 걱정입니다.’
‘뭐, 나라고 자네처럼 지략 못 부릴 줄 아는가.’
‘못 부린다는 것이 아니라, 부릴 수 있어도 아니 부리리라는 것입니다.’
미래를 보고서 김옥균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의 이 상황에서 무력한 자신을 돌이켜보니 어찌 그 일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러던 차 ‘이만하면 되었으니 슬슬 단념하자’ 하면서 건드리는 오페르트의 말을 들으니 어찌 오기 차오르지 않겠는가.
“오냐, 내 한 번 독해져 보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하, 혼잣말입니다.”
눈에 총기 도는 것이, 잘못했다가는 그 옛날 자신이 졸지에 관복 입게 되었던 것처럼 휘말려들어갈까 오페르트가 급히 경계하였다. 그러건 말건 김홍집은 생각을 정리하면서 들으려면 들으라는 것처럼 방백(傍白)하기를,
“영감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옛 사헌부는 불문언근(不問言根)이라 하여, 소문만 있어도 능히 한 사람을 탄핵해 죄줄 수 있었다 하지요. 지금 드레퓌스 씨를 공박하는 무리들도 난데없이 그 시늉을 하고 있으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불문언근에는 풍문거핵(風聞擧劾)으로 맞서야 하겠지요.”
하였다.
“저들의 기세 등등하여 침묵을 지키고는 있다지만, 클레망소 전 장관을 비롯해 우리 편을 들어줄 법한 신보나 서생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럴듯한 말로 우선 그들을 꾀어낸다면 능히 제압할 기세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함부로 외국의 공사가 남의 나라 여론을 건드릴 수는 없으니...”
결국 자신을 대신 내세우겠다는 뜻이라, 오페르트는 한숨을 삼켜야 했다.
‘우리는 고발한다!’
조선의 공산당에 우호적이었고, 따라서 그 조선의 은밀한 부탁도 고려해 볼만한 입장이던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Auguste Marie Joseph Jean Léon Jaurès)가 운영하던, 『작은 공화국(La Petite République)』 지에 ‘E. J. O.’의 명의로 실린 글은 그 결과물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싸고서, 사법 전 과정에 총체적인 부정이 있었음을 고발하는 글이었는데, 소제목으로 인해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내에 암약하고 있는 독일 간첩들이 조작한 것이다!’
그 대략은, 참신할 만큼 비논리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귀에 잘 들어박히는 것이었다.
‘우리 프랑스에 독일 첩자들이 암약하고 있다! 국회는 물론이요, 심지어 공화국의 보루여야 할 군부에까지 카이저의 종복들이 수두룩하다. 이 글을 쓴 본인은 신변의 위협으로 인해 함부로 밝힐 수 없는 경로를 통해, 프랑스에 광범위하게 뿌리를 내린 간첩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간첩단 삼백 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은 공개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만 쓰면 아무도 믿지 않을 선동이지만, 그 뒤에는 사람의 눈을 끌어당기는 현란한 비(非) 논리가 있었다.
‘카를 뤼거와 같은 반유대주의자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자가 있으니, 바로 베를린의 빌헬름 2세다. 프랑스의 숙적 독일이 이처럼 유대인을 악당으로 만들어버리려 하고 있는데, 그 흉계를 간파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거기에 동조하고 있다.
비록 지금 상황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모두 밝힐 수는 없지만, 우선 그 어떤 물증보다도 확실한 심증은 여기에 있다! 카이저와 반유대주의자는 한통속이며, 베를린의 음모는 이 프랑스 공화정 정신에 반하는 암적인 사상을 퍼뜨려 우리를 약화시키는 데 있다!’
(나중에 이 글의 개략을 보고받은 베를린의 카이저는,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유로 비난을 받았음을 깨닫고 누구인지는 몰라도 배후가 밝혀지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소소한 원한을 마음 속에 새겼다.)
그러나 우선 깃대부터 세우고 보자는 김홍집 생각으로 시작한 이 황당한 논설은, 소기의 목적대로 세간의 이목을 끌은 바, 곧 여러 지식인들이 ‘그 문제의 글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으로 시작하는 글들을 내도록 이끌었으니, 멀리 조선의 김옥균으로서는 괄목상대할 일이 생긴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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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는 유럽 사회 전반의 기층에 존재하던 반유대주의가 수면 위로 올라온 시기였습니다. 지난 화에 언급한 포그롬과 이번의 드레퓌스 사건 등은 모두 이와 관련이 깊지요. 또한 1882년에는 반유대주의 국제총회가 열리고, 1889년에는 작중에도 지나가듯 언급된 반유대연대가 창설되기도 했습니다.
여담으로 반유대연대의 결말은 후대인 관점에서는 다소 우스웠는데, 드레퓌스 사건 후 프랑스 제3공화국의 뒤에 있는 흑막이 과연 유대인 세력인지, 아니면 프리메이슨인지를 놓고 음모론자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1899년 반프리메이슨 활동을 우선시하는 쪽으로 조직이 변화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작중에 언급되었던 반유대연대의 창시자 드뤼몽은 쫓겨나게 되었지요.
반유대주의의 또 다른 선구자 카를 뤼거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시장으로,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면 포퓰리즘적 정치성향으로써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극성 반유대주의를 우려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무려 네 차례나 그의 시장직 당선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끝내 교황 레오 13세까지 움직여 다섯 번째 도전에서 시장 자리를 꿰어찼던 것은 그의 인기와 당시 팽배했던 반유대주의 기조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하지만 카이저 빌헬름 2세가 뤼거에게 동조했다는 것은 작중의 설정입니다. 아버지가 세운 자유주의 정치개혁으로 인해, 대중적 인기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늘리고자 하는 유인이 생긴 탓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실제로도 퇴위된 뒤 빌헬름 2세는 유대인 음모론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작중에 나온 대통령 사디 카르노는 열역학 쪽에서 이름 듣지 않기가 더 어려운 사디 카르노의 조카입니다. 원 역사에서는 반체제인사 탄압에 항거한다는 명분으로 1894년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살해당하지만, 작중에서는 반체제 활동의 양성화가 대세이기 때문에 화를 피했습니다. 하지만 엉뚱한 나비효과로 파나마 스캔들은 원 역사보다 훨씬 파괴력이 증폭되었지요.
지난화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알렉산드르 3세는 강한 반유대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에 유대인들이 관여했다는 대중의 반유대 정서에 영합하여 1882년 내린 ‘5월 포고령(May Law)’은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에 따라 유대인 거주가 허용된 러시아 서부를 대상으로, 추가적인 마을 개척이나 확장이 금지되었고, 대출과 부동산 거래도 금지되었습니다.
5월 포고령은 공식적으로는 ‘유대인의 법적 지위 조정’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임시 조치였지만, 실제로는 제정 붕괴까지 폐지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강화되었습니다. 1891년에는 고위층을 제외한 모든 유대인-약 2만 명에 달했습니다-이 모스크바에서 추방되기도 했지요.
이로 인해 초창기 시오니즘 운동에서도 가장 열렬한 참여를 보인 것은 러시아 본토와 그 일대 동유럽 유대인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러시아 및 동유럽의 경제적 저발전 등으로 인해 자신들의 열의를 뒷받침할 여력이 부족했고, 결국 강해지는 탄압조치 앞에서 많은 수는 러시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기회의 땅 미국으로 향했지만 – 19세기 말 많은 유럽 하층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 대학생들을 비롯해 일부 젊은이들은 대신 팔레스타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개척자(‘빌루Bilu’)들의 활동은 역으로 오스만 투르크 당국의 경계심을 일으켜, 헤르츨의 초기 팔레스타인 이주 계획이 무산되는 나비효과를 낳았습니다.
이처럼 19세기 말로 향할수록 거세게 대중적으로 일어난 반유대주의 운동은, 그 이전까지 많은 유대인들이 심정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주장했던 유럽 사회로의 동화 노선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현실적인 이유로도, 종교적인 이유로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팔레스타인 이주가 본격적으로 고려되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시온주의가 발흥하게 되었습니다. 작중에 나온 젊은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그 중심에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