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09화 (209/320)

69. 에덴의 동쪽 (1)

때는 겨울이나, 절기로는 동지 무렵이라, 다시 천하에 양기 감돌기 시작할 때요, 마침 꼬박 이레 동안 내리 우중충하던 하늘이 맑게 개어, 안양대군의 혼례가 우울한 시국의 한 줄기 희사(喜事)임을 공언하는 듯하였다.

아무리 친영(親迎)이 통례라지만 마포의 허름한 집에 대군이 직접 찾아가기는 무엇하여, 운현궁을 별궁 삼아 이제는 창녕부부인(昌寧府夫人) 조씨로 봉해진 조별단이로 하여금 머물게 한 뒤, 맞이하여 예식 올리는 이곳 경운궁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그 행차 준비하고, 또 위요(圍繞, 왕실 혼례의 들러리)할 종친들 – 개중에는 왕실의 위엄 생각에 이 혼례를 못마땅히 여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 모여들기를 기다리느라 조금 여유가 있었는데, 귀남 생각에 이럴 때 가족사진을 찍지 또 언제 찍겠는가 싶어, 느닷없는 발상으로 피붙이 한데 모아 지엄한 섭영을 찍었다.

곧장 인화된 것을 들여다보니, 새신랑 둘째아들 모양새가 퍽 우스워 귀남이 농으로 핀잔하였다.

“녀석, 기쁜 날인데 입이 다 찢어지게 생겼구나.”

“흐흐, 송구하옵나이다, 아바마마.”

사람 좋은 노인 시늉이 여전히 어색한 대원군과 별로 어색하지 않은 여흥부대부인 민씨부터, 그 덩치가 양친이나 대원군도 아닌 까마득한 조상 태조대왕을 닮아 종실의 기둥 같은 경양대군 – 아마 소싯적부터 소위 ‘개화식’을 즐겨 먹은 덕이겠지만 – 까지, 세간 기준으로 그리 풍성하지만은 않은 가족이지만 오직 안양대군 함박웃음이 있어 꽉 차 보였다.

“이 모든 일에 지극한 성은 입지 않은 것이 없사옵나이다.”

“무얼. 저기 영상에게도 가서 고맙다 하려무나.”

속마음이 들켰는지 웃음 한편에 뜨끔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허나 말은 맞는 것이었다. 대군이라면 비록 종실의 사람이라지만 엄연히 하나의 신하라, 대례 올릴 때 주상 친림함은 그러한 예가 없고, 새색시 집안의 한미함에 이르러서는 더 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조정에는 반대하는 이는 없고 외려 영의정 겸 총리대신부터가 이를 부추겼으니, 물러난 민태호의 뒤에 올라온 사람이 바로 김옥균이었던 것이다.

국민의 잠시 마음 돌릴 바를 마련할 수 있으니 그 또한 하나의 이로움이요, 더욱이 한미한 집안 여식으로 반상과 귀천의 구분이 없음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또 온 겨레의 경사라 하여, 적극 찬동하며 밀어붙였으니, 안양대군이 아무리 저의 속내 평소에 잘 감춘다 한들 그에게 은인 되는 김옥균에게 어찌 고마운 마음 표하지 않을까.

발걸음도 가볍게 정말 하란 대로 하는 안양대군을 보며, 문득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이른바 ‘보궐추거(補闕推擧)’였던 지난해 추거는, 민태호의 사직 여파로 공산당이 힘을 못쓰는 가운데, 구관이 명관이라 최익현이 자연스레 돌아올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그 와중에, 전봉준이 직접 출마를 고려하던 중 사주를 보았더니 갑오년에 큰일 일으키면 초반에 잠시 흥하고 곧 대흉(大凶)할 팔자라 하여 삼갔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끝내 나서지 않았던 김옥균이 갑자기 나서더니, 자칭 ‘경제공약’을 마구 내걸기 시작했다. 자유당도, 세간의 식자들도 처음에는 그저 금력으로 민심 얻기로 이골난 개화당이므로 늘상 하던 일이겠거려니 여기고 넘어갔는데, 곧 윤곽 드러난바 단순히 돈을 흩뿌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지의 대계(大計)로, 그 짜임새와 방대함이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추거에 단자 내밀 사람도 나날이 늘어가는 판에, 본래 자유당 지지하던 사람들도 먹고살기 급한 시국이라, 사람 마음 쏠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하여 귀남 본인이 ‘너와는 일하기 어렵겠다’ 통보하며 내쫓았던 김옥균이, 비록 그때의 천둥벌거숭이 본성은 조금 다듬어졌다 하나 귀남 본인이 발의한 제도에 힘입어 나라의 실권을 쥐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불편하지 않다 하면 거짓말일 테다.

“신이 노쇠하여 눈은 어두워졌지만, 아직 사람은 능히 살필 수 있습니다. 직접 헤아린바 총리대신은 감히 지존을 털끝만큼이라도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 것인즉 성려를 잠시 거두심이 어떠할지요.”

쫄래쫄래 김옥균에게 다가가 정말 찬사 늘어놓는지 웃음꽃 한 번 더 피우는 안양대군을 보며 교차하는 만감이 겉에 나타났는지, 대원군이 어느새 슬쩍 다가와 말을 건네었다.

“영상의 충심은 나 또한 아는 바요. 그 때문에 심평(心平)치 못한 것은 아니외다.”

“비록 금번 혼사 이루어짐의 주된 공은 영상과 개화당 젊은 사람들이 세웠다 하지만, 결국 앞서 누누이 만민을 허통(許通)하는 큰 뜻을 성단으로써 밝히지 아니하였더라면 관중(管仲)이나 악의(樂毅)도 하지 못하였을 일입니다.”

귀남의 심기 한 구석 불편함을 보고 때려 맞춘 것인지, 아니면 경사 맞아 귀남의 마음 흩어진 까닭인지, 마음을 술술 읽어가는 대원군이었다.

“기쁜 날에 어찌 한탄을 하겠소.”

“이 늙은 신하 앞이 아니라면 또 어디서 한탄을 하시겠습니까.”

한탄할 건이야 없지 않았다.

비록 재주로는 용렬하기 그지없음을 스스로 아는 귀남이라지만, 그래도 저의 얼마 안 되는 배움과 경험으로 가끔 도움 되는 발상을 해서 모두를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이 소소한 보람이었다.

그런데 정승의 자리에 오른 김옥균은, 그 전의 최익현이나 박규수 등과는 달리 엉뚱한 발상들을 스스로 내고 과감히 추진하곤 하였으니, 평소 그런 발의 하는 것을 저의 할 일이자 소소한 자긍심으로 삼던 귀남으로서는 은근히 기분 상하는 일이었다.

일례로 당장 얼마 전, 개각을 단행하자마자 김옥균이 발의한 것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동해 바다에서 일본 전선의 포에 맞아 죽은 이들을 기리자는 것이었다. 하여 원래 있던 충훈부(忠勳府)를 혁파하여 기충보훈국(紀忠報勳局)을 총리 직할로 두고, 사직과 겨레 위해 목숨 바친 충정을 영세토록 현양키로 하였다.

더구나 죽은 병사 중 하나는 남해 살던 고리백정의 아들이었는데, 김옥균 본인이 자기 이름 내걸고 참의원에서 발언하기를,

‘조선 백성 이천만 중에서도 가장 미천한 집안의 아들로, 이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쳤으니 어찌 기리지 않겠습니까. 죽고 다친 이들에게 옛날에는 전답과 미곡을 내리고, 지금은 금은으로 돌보는 도리를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디 고작 금은을 위해 진충(盡忠)한 것이 아닐진대, 어찌 금은으로써 그 공덕을 표창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공신의 제도를 새로이 하여, 보국에 유공(有功)한 이들은 모두 남김없이 상응하는 영예와 보답을 받게끔 하고, 나라와 겨레가 그들을 잊지 않음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귀남 본인도 나라에서 죽고 다친 이들과 그 유족을 돌보라 일전에 이야기하였는데, 거기에 대해 적당히 조처하였다 하여 별 생각 없이 지나갔건만, 자신이 놓친 것을 김옥균이 착안하여 마침내 완수하였으니, 고맙기도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석연치 못함이 있었다.

자신이 누릴 칭송을 남이 앗아갔다는 생각에 말미암은 석연찮음이었는데, 귀남이 아직 세상 쓴맛 모르는 마음 젊은 사람이었더라면 거기서 그치고 말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기에 도리어 심란함만 가일층되었다.

평범한 사람이 임금 자리 간수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터인데 그런 생각 품었음에 또 깜짝 놀라고, 죽은 백정의 아들을 미리 챙기지 못한 것을 두고 김옥균을 질투하는 듯한 마음이나 품고 있으니 또 부끄럽게 여기고. 그러니 어찌 김옥균 바라봄에 마음 가지런할 수 있겠는가.

그런 속내까지는 모두 모르는 대원군이었지만, 얼추 아들 주상과 김옥균 사이가 마냥 수어(水魚, 물과 물고기) 사이 같지만은 않음은 알고 있었다.

바로 그 김옥균네 신보쟁이들로 인해 저의 삶을 돌이켜보고 있는 대원군이었는데, 그 옛날 남 괴롭히던 지재로 저의 살아온 길 돌아보니 깨닫는 바가 없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들을 진작 깨달았더라면 그가 살아왔던 것처럼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갈 길 가지는 못했을 터이니 후회는 없었지만, 적어도 항상 고마운 아들에게 한두 마디쯤 보태줄 말이 없지 않았다.

“문득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오?”

“중궁전이 근래 서간으로 한탄하기를, 신이 맡아보던 일을 자신은 아무리 힘써도 다 따라가지 못했는데, 새로 총관 된 김 모는 곧장 사무의 대체(大體) 파악하기를 한 번 털어 그물의 씨줄과 날줄을 가지런히 하듯 하니, 부럽기도 하고 질시하는 마음도 든다 하였습니다.”

아마 귀남 본인 앞에서는 감추려 애쓰던 속마음일 테다. 오래지 않아 흉중의 비밀은 모두 땅 속에 들고 들어가리라 여기고서 대원군에게는 털어놓은 것이리라. 딱히 드러내지는 않아도, 저에게 빗대어 하는 말임이 명백했다.

“답하기를, 국조 이래 성모(聖母, 국모)로서 위엄 등등함이 자전(慈殿) 같은 예 없는데, 어찌 이미 얻은 곤덕(坤德)과 위엄을 두고 또 남과 수고로움으로 견주려 하는가. 망령되이 그리 일러주었습니다.”

귀남이 처음 박규수부터 시작해 여러 유능한 신료들에게 믿고 일을 맡긴 것이 모두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저의 생각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지금 자신의 머리 바깥에서 용한 꾀 나왔다고 안타깝게 여길 것도 없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직 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면 그것으로도 공은 남김없이 드러나 아름다운 이름 남길 것이라 하였지요.”

곰곰이 곱씹던 귀남이 마침내 답했다.

“경은 어찌 해를 거듭할수록 그리 현명해진다는 말이오. 참으로 고맙소.”

귀남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 군밤 굽는 것을 대원군이 이르지는 않았을 테니 차치하고 – 여력은 있고 욕심은 없는 자리에 앉아, 되는 데까지 남 돕는 일. 그 초심으로 돌아가 살피고 또 행하면 될 것이었다.

“지금껏 베풀어주신 성은의 만분지일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어찌 말을 아끼겠나이까.”

마침내 준비가 다 끝났는지, 가례청의 일 맡아보는 내관이 주상 앞으로 나아옴을 보며 대원군이 답하였다.

세자든 대군이든, 왕실의 큰 경사가 있을 때 종친은 물론이요, 조정의 재추(宰樞)도 빠짐없이 함께 경하하는 마음 보임이 상례이나, 본인이 원한다면 능히 그 자리 낄 수 있을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한성 대신 심양에 가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동삼성 일원의 광업 현황을 파악하고, 조선 팔도 안에는 수익 날 만한 광산을 더는 쉽게 찾을 수 없게 된 마당에 혹 치고 들어갈 만한 구석 없는가 알아보기 위한 방문이었지만, 실제로는 김옥균의 사적인 청탁을 받아 온 것이었다.

“한참 찾았네, 에휴. 대체 이놈의 간판은 왜 이따위로 해둔 건지.”

겨우 동생 구스타프 머무는 호텔을 찾아온 오페르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인사가 아닌 투덜대는 말이었다.

“뭐, 어차피 유럽식 건물이 많은 동네도 아닌데. 간판도 없는 야산 누비고 다니는 우리 형님께서 어려워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주민 구성 복잡하기로는 드넓은 중국 안에서도 수위를 다툴 도시가 봉천부 심양, 묵던이다. 본래라면 끽해야 만인과 한인, 거기에 흘러들어온 조선인 정도가 전부일 테지만, 서태후 실수로 몰려들기 시작한 뜨내기 미국인들, 동치 연간 이후 부쩍 살기 어려워져 여기저기 흩어져 살다가 신앙의 형제가 고관으로 있다 하여 동삼성까지 흘러들어온 회민(回民)들까지.

그런데 몇 년 사이 유독 간판만은 만주 글로 통일되고 있었는데, 비법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리하면 세금을 감면해주자고 은퇴한 재상 마신이가 헌책한 데 있었다. 애초에 만인들이 자주 찾지 않을 이곳 호텔 같은 업소들은 그대로 알파벳 표기를 지키고 있었지만, 만주어 간판 숲속 한 그루 나무와도 같기에 길찾기가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이 녀석, 왜 내가 여기까지 왔는지 알면서도 그러기냐. 너 때문에 우리 새 총리께서 화가 많이 나셨더라.”

“대성하신 형님을 오랜만에 뵈어 이 아우도 퍽 반갑습니다그려.”

“인석아, 아무리 나도 공기업 사장이고 너도 학자고 그렇다지만, 우리는 본래 상인 집안이야. 상인이라면 신용이 최우선이지. 그런데 계약을 그렇게 내팽개치고 여기 틀어박히면 어떻게 되겠니?”

“신용이 최우선이기는. 한탕 올려서 제대로 벌어먹는 게 최우선이겠지요.”

내일모레면 나이 예순이지만 터울 큰 두 형 앞에서는 항상 막내인 구스타프가 볼멘소리로 답했다. 남 앞이라면 근엄한 학자 티를 내겠지만, 각양각색 사람들 한데 섞여 좋게 보면 활기차고 나쁘게 보면 어수선한 이곳 심양에서는 남의 눈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뭐? 누가 그런 말을 하데?”

“형님이 그러셨지요. 옛날 함부르크 시절부터 ‘한탕’, ‘한탕’ 노래 부르고 다녔잖습니까. 홍콩 건너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제대로 한 건 건져서 근 삼십 년을 떵떵거리며 살고 있기도 하고.”

감숙성에서 발견한 대규모 불교 유물을 당초 계약대로 김옥균에게 넘기는 대신, 독실한 불자 많은 만주인들에게 넘기기로 하고 그 대가로 심양에 새로 세워질 대학교의 석좌교수 자리를 받기로 한 구스타프였다. 형 때문에 졸지에 말년에 전공 바꾸게 된 것을 못마땅히 여기던 차, 그나마 본 전공에 가까운 불교 쪽이 마음에 맞았다.

계약 파기에 따른 위약금도 유물 값으로 치고 모두 공친왕 이힌이 대신 내주기로 하였으니, 법적으로 하등 문제될 것은 없었기에, 수가 궁한 김옥균은 이번에도 안 되면 그냥 손 털 생각으로 에른스트에게 부탁해 동생을 설득해보라 하였던 것이다.

“이제는 이 아우도 그런 한탕을 마침내 건졌다 이 말입니다. 나이도 나이인데, 슬슬 한 자리 눌러앉아 편하게 살고 싶은데.”

“그래서 돌아올 생각이라던가, 그 돈황인가에서 나온 유물은 넘길 생각이라던가 하는 건 전혀 없는 거지?”

“네.”

확고부동한 동생 마음을 확인한 오페르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뭐. 개인적으로야, 이 정도 자리면 잘 된 편이라고 여기고는 싶다.”

“맞는 말입니다. 저기 남중국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북중국이나 저쪽 서부에 비하면 이곳 만주는 정말 사정 좋은 축에 들지요.”

“그 정도야?”

“요새 개혁이니 뭐니 해서 페킹 정부가 워낙 강압적으로 나오고 있잖습니까. 여기까지 오는 중에 슬쩍 본 것만 해도 심상치 않습니다, 분위기가.”

차라리 돈만 슬쩍 찔러넣어 주면 아예 주둔하고 있는 군대까지 동원해 경호해 주던 감숙성 서쪽은 사정이 나았다. 분위기 심상치 않음을 일찍 알아챈 산동이나 산서에서는, 눈치 빠른 지주들이 농토 청산하고 미국이나 하와이로 가든, 영가(永嘉) 연간의 호족들처럼 강남으로 도피하든 했지만, 소식은 늦고 행정력은 닿지 않아, 결국 총 들고 쳐들어가는 것 외에 답이 없던 섬서만 해도 그렇지 못한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 결과, ‘역도적자(逆徒賊子)’ 푯말 건 지주를 조리돌림하는 것도, 느닷없이 길가에 총성 울려 잘 가던 마차 급히 세우는 것도 심양 오는 길에 조금 과장해서 하루에 한 번씩은 보아야 했던 구스타프였다.

“그러면 더 안전한 조선으로 돌아오는 건 어때?”

“하하, 형님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총리가 화가 많이 났다면서요.”

“후, 그래. 이만큼 했으면 총리에게 부탁받은 만큼의 성의는 다한 것이겠지.”

“뭐, 이번 정부에서 환심을 사서 마침내 사직할 계획이었습니까?”

“사람이 꿈은 꿀 수 있는 것 아니냐.”

“글쎄요. 형님께서 정말 사직을 원하시는지도 아우는 요새 조금 갸우뚱합니다만.”

“거 무슨 소리야?”

“아니, 솔직히 말해서, 형님도 즐기고 계시잖습니까. 저기 영국의 디즈레일리라던가, 우리네 짐손(Eduard von Simson) 법관 같은 분도 계시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브라함의 자손 소리 들으면서 출세하기가 쉬운 세상은 아니잖아요. 몇 해 전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포그롬(Pogrom, 유대인 박해)도 있었고.

그런데 이곳 동방에서는 이름난 국영 광업회사 겸 오페르트 무역회사 사장으로 떵떵거릴 수 있으니... 당장 이곳 묵덴(심양)만 쳐도 형님께 줄 대보려고 안달 난 사람들로 줄 세우면 얄루 강(압록강)까지 닿을걸요?”

“아니, 그건... 에휴, 말을 말자.”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야 사직해보려 발버둥을 쳤지만, 지금은 동생의 말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었기에 마냥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여생을 저의 사업에 바친다 한들, 그 여생이 이제 그렇게 많이 남지만은 않았는데 얼마나 뭘 더 해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율리 큰형님께서도 말씀은 하지 않지만, 아마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실걸요. 물론 그와는 별개로 절 납치해간 일로 미워하는 마음은 그대로겠지만.”

“그래. 마지막으로 편지 주고받은 게 언젠지 모르겠다.”

“여하간 덕분에 오페르트 집안 전체가 잘 나간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던데, 덕분에 파리 수석 랍비(Grand-rabbin)의 딸과 큰형님 막내아들이 약혼하기도 했고요.”

“오, 그러냐. 수석 랍비?”

뒤숭숭한 중국 내륙 뒤지고 다녔던 구스타프가 정작 대륙 반대편 본가 소식을 에른스트보다 먼저 들었던 것은 조금 우스운 일이었지만, 에른스트가 학자의 길을 걷던 구스타프를 꼬드겨 그 나이 먹도록 고생하게 만들었다 여기는 율리우스는 저의 둘째 동생을 결코 곱게 보지 않았으므로 그 덕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싫을 법했다.

“대대로 훌륭한 랍비가 나왔던, 걸출한 집안이지요, 드레퓌스(Dreyfuss) 집안은.”

“잠깐, 잠깐. 드레퓌스?”

그렇지만 유럽 본토 전체의 소식으로는 한양과 인천 오가는 에른스트가 훨씬 빠를 수밖에 없었고, 그러므로 지난 겨울부터 프랑스 전역을 좋지 못한 쪽으로 달구고 있는 ‘그 이름’을 모를 수 없었다.

“네, 큰형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셨는데요.”

“아니, 그게 아니고... 너 혹시, 아니다. 내가 직접 확인하는 게 더 빠르겠다.”

성급히 한양으로 돌아온 에른스트를 기다리는 소식이 몇 가지 있었는데, 한 가지는 다행히 막내조카 에두아르와 인연 맺게 된 그 드레퓌스(Dreyfuss) 집안은 문제의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와는 거리가 꽤 있었다. 물론 굳이 깊게 파고들면 출신지가 같든 하겠지만, 반역자로 낙인찍혀 온 프랑스에게 매도당하고 있는 ‘그’ 드레퓌스가 랍비의 아들이라면 반드시 더 큰 파란이 일어났을 것이었다.

다른 소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지원 요청이 들어온 사실이었다.

전보로 전해진 짤막한 단신은, 형 율리우스가 아니라 수석 랍비 자크앙리 드레퓌스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당장 조금이라도 도움이 급하였기에 그리 하였으리라.

문제는 그의 입 가벼운 비서가 토설하였는지, 아니면 그간의 유럽 소식을 마침내 접한 구스타프가 난리를 친 것인지 순식간에 그 소식이 퍼졌다는 데 있었다.

“암, 마땅히 도와야지. 어찌 그런 큰일로 무고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소?”

총국의 일은 내려놓고 싶었지만, 어째 이 일에 얽히게 되면 더 머리가 아파질 것이라는 직감이 팍팍 들어서, ‘정말 안된 일이다’ 하는 뜻만 데면데면한 사이의 큰형에게 전하고 말 생각이었는데, 오지랖에 있어서는 아시아 최고라 해도 무방할 조선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마치 그가 당장 관직 내려놓고 프랑스로 갈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오배 영감의 문중과 가연(佳緣) 맺게 된 그 집안을 무도한 법국인들이 역당이라 무함하고 있으니 참으로 슬프고도 원통한 일입니다.”

누가 꺼낸 말인지, 어느새 조정의 풍문에 두 드레퓌스 집안은 같은 집안이 되었고, 심지어 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막내조카 에두아르의 손윗처남 되지 않느냐며 묻는 자도 있었다.

“이처럼 슬프고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아무리 나라에 닥친 황란 이겨내기가 급하다 하지만 어찌 이보다 더 급하다 하겠습니까. 성상께서도 사직을 윤허하셨으니, 얼른 다녀오시지요.”

하다못해 저를 심양에 보냈던 김옥균도 이렇게 이야기하니,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운명의 야속함을 탓할 뿐이었다.

--- *** ---

이전에 언급된 오페르트 가문은 본래 함부르크 출신의 유대인 은행가 집안인데, 유독 에른스트 오페르트의 대에 들어서 학문으로 대성한 사람이 둘이나 나왔습니다. (그중 에른스트는 홀로 학문으로 대성하는 대신 역사학 연구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원 역사에서도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하던 율리우스(프랑스식으로는 쥘) 오페르트의 늦둥이 아들 에두아르(1871년생)는 클레어 드레퓌스(1876년생)와 결혼하였는데, 클레어의 아버지 자크앙리 드레퓌스는 작중에 나온 것처럼 1880년 벨기에 수석랍비를 거쳐 1891년부터는 파리 수석랍비(Grand-rabbin)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자크앙리 드레퓌스도 그의 조상대부터 알자스 일대에 거주하기는 하였으나, 대대로 랍비 출신이었음을 고려하면 대대로 상인이었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그의 아버지 라파엘의 대에 직물업으로 가세가 겨우 일어난 정도였습니다)와는 머나먼 친척 이상이 되기 어려웠을 듯합니다.

이상의 족보는 Geni 사의 웹사이트(https://www.geni.com/family-tree/html/start)를 참고하였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상상을 초월하는 참상이 벌어지기 전까지 유대인 박해로 가장 악명이 높은 나라는 제정 러시아였습니다. 근대화와 산업화에 힘입어 서유럽의 유대인들은 큰 부를 모았고, 간혹 개종한 유대인 집안 출신들 중 디즈레일리나 작중에 언급된 독일 제2제국의 초대 대법원장 에두아르트 폰 짐손 같은 이도 나왔습니다. 반면 러시아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단폭력 행위도 자주 일어났는데 이를 포그롬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중간에 구스타프가 언급하는 포그롬은 원 역사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직후인 1881년, 오데사, 키예프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인민의 의지’ 당원 중 유대인들이 많다는 소문이 퍼졌고 – 일정 부분 사실이기는 했습니다 – 알렉산드르 3세와 러시아 당국도 이를 방조 내지는 은근히 부추기는 입장을 취했지요. 물론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초라한 정도의 폭력에 그쳤지만, 다음 장에 더 쓰게 될 시오니즘의 발흥에 일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작중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이 늦춰졌기 떄문에 1881년 포그롬도 그만큼 늦어졌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