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오십 번째 쪽 셋째 줄 (2)
통제수사의 양연(襄沿) 호와 일본 해군의 류조(龍驤)가 충돌하여, 포화 주고받은바 양측에서 수 명씩 죽기까지 하였으므로, 일본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러하였다.
“그 바위섬은 누구의 땅이라고 명명백백히 밝힐 만큼 기록이 상세하지는 않다. 하지만 본디 우리 어민들도 다케시마 혹은 마츠시마라 부르며 종종 오가던 곳이다. 천황 폐하의 정부는 신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반면 비공식적인 입장은 이러하였다.
“보상도, 사과도 모두 드리겠습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정확히는 이번 일을 뒤에서 기획하였던 이토 히로부미의 간절한 청이었다.
“아직 답은 없는가?”
“예, 아직입니다. 아무래도 공식적인 경로로 취한 연락이 아닌지라.”
그렇게까지 간곡한 연락을 보냈음을 들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표정이 근심으로 일그러졌다.
백발의 노신사가 된 지도 오래인 오쿠보였는데, 아예 머리가 센 이후로는 오히려 새치 그득하던 시절보다는 인상이 밝아졌다. 특히 조선국에 경제위기 닥치기 전부터 슬그머니 추격하고 있던 일본의 산업이, 여전히 아시아의 신흥 시장에 관심은 있지만 조선은 살짝 불안하다 여기던 자본까지 받아들였기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마침내 왔구나 여기고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영일동맹의 혜택을 슬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현해탄 사이에 두고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자는 것이 이토의 발상이었다.
아예 전쟁으로까지 번지지 않도록, 조선왕이 싸움 싫어한다는 막연한 인상에만 의지하지 않고, 공황으로 인해 저의 일신이나 문중에 급전 필요하게 된 젊은 신료 몇몇을 포섭하자는 것 역시 이토의 제안이었는데, 지금은 영 효험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
“하기야. 아무리 금전 필요하여 우리 손을 잡았다지만, 지금 당장 우리 쪽 입장을 조선국 조정 안에서 드러낼 만큼 어리석은 자라면 끄나풀로도 쓸모가 없지.”
“애초에 끄나풀도 아니요, 유사시 연락책 정도만 해 주면 족하다 하고 포섭한 것입니다.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지금 같은 상황이 될 줄 알았더라면...”
아무리 그 품성이 간사하다 하여도, 대세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나라 팔라 하면 누구도 따르지 않을 것이요, 꼬리라도 밟히게 되면 그때는 두 나라 관계가 정말 뒤집힐 수도 있는 법.
그러므로 말은 포섭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물밑 제안을 저들이 제안인 줄도 모르고 받아들이게끔 하는 ‘채널’ – 미국 물 먹은 이토는 부쩍 말에 영어를 섞어 쓰곤 하였는데, 이것이 의외로 정부 젊은이들 사이에 많이 퍼졌다 – 에 가까웠다. 아마 돈 받은 권 모도, 모두 이로운 길이니 조금 도와달라 하는 청탁 받았다 하는 생각만 하고 있을 터.
그때, 집무실 창을 뚫고 바깥에서 시위하는 군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구(元寇,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에게는 신풍(神風)이 내렸지만, 그 타이코(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마저도 바다를 건너 남을 쳤을 때는 끝내 자신도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 집안도 멸문당하고야 말았습니다. 저 현해탄을 남을 해칠 생각으로 건너는 자에게는 어느 쪽이든 항상 파멸이 내렸습니다!”
흘깃 보니 단상 위에 올라 등짝 보이고 있는 중키의 사내 하나 있어, 아마 사이온지 긴모치 그 자의 충복 노릇하는 가타야마 아무개인 듯했다.
“허, ‘데모’로군요?”
“공산당 놈들이라네. 애국공당 눈치가 보여서 어지간하면 집회는 허가해주는 쪽으로 방침을 잡으라 하였는데, 그러니 아랫선에서도 별 생각 없이 이번에도 승인해준 모양이지. 이젠 그 방침을 이제 슬슬 재고할 때도 되었군.”
일이 터지자마자 저만한 군중을 모은 것은, 첫째로 그들이 공산당 나름대로 다른 나라와 통하는 경로가 있어 사태의 발발을 즉각 알아챈 덕이요, 둘째로 급히 사람 불러모았음에도 족히 무리가 수백은 될 것이니 그만큼 알음알음 그 세가 불어난 덕일 테다.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서양 나라들이 가까이 있으면 오직 전쟁으로 위아래를 가릴 뿐이니, 그것을 하지 않는 다른 나라를 흉잡아 미개하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봉건 귀족들, 그리고 뒤이어 그 자리를 차지한 자본가들의 흉계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고생은 누가 합니까?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의 아들이 죽고 다칩니다. 집안에 남은 딸은 홀로 피땀 흘려가며 생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원하십니까?”
“조선이 흥하니 한 가지 좋은 점이라면, 더 이상 철 지난 정한론을 입에 담는 이는 없다는 것이었는데.”
“뭐, 국학 하던 자들이야 열심히 지나(중국) 오가면서 학자 행세 하고 있고, 나머지들은 오히려 조선을 두려워하는 쪽이니까요.”
처음에는 막연히, 우리는 섬나라니 해군만 기르면 될 것이다 여겼는데, 막상 지나고 보니 조선의 상승세는 그칠 줄 모르고, 그만큼 부단히 군비도 늘어났다.
물론 일본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고, 동양 평화(즉 저들 장사에 방해 되지 않는 상태의 유지)를 위해 영국에서 동맹 체결시에 원조와 차관을 제공해주었기에, 여기저기서 사들이고 또 자체적으로 건조하여 총 톤수로는 조선과 능히 일전 벌일 만하였다.
조선의 거함들은 덩치만 크고 내실은 없으니, 신무기 어뢰를 이용하면 충분히 격퇴할 수 있다 하여 – 아직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아 조금 불안은 하였지만 – 최신 어뢰정도 여럿 구비하고, 육군도 애국공당과의 타협(즉 애걸)을 통해 요시노부가 발의하는 형태로 징병제까지 도입하였다.
이만하면 부국강병의 완성까지는 아니어도, 메이지(明治) 원년부터 닦아온 장구한 대업이 마침내 늘어지고 늘어졌던 첫 단계의 완성을 고한 정도는 되리라 자부할 수 있었다. 메이지 30년(1897) 총선 후 은퇴한다는 오쿠보의 소소한 계획이 차곡차곡 이루어진 셈이었다.
“딱 우리나라 하나 지킬 정도까지는 올라왔다 자부하였건만, 이제는 그것이 도리어 발목을 잡게 되었군그래.”
“송구스럽습니다. 해군의 이토(이토 스케유키, 伊東祐亨)도 어쩔 수 없다더군요.”
“전장에 나선 장수라서 조정 명은 안 받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육군이 그 프러시아식 지휘 도입한다 하여 저들도 따라하고 싶다는 건지, 원.”
일본 쪽에서는 한 사오 년쯤 전에 진작 훈련함으로 전환했어야 했을 류조를 끌고 나간 반면 저쪽은 함급은 비슷해도 실제 전력에 드는 함정을 끌고 나왔다. 거기에 경고사격을 한답시고 함교 바로 옆을 쏘기까지 하였으니, 가뜩이나 경계하던 류조의 함장으로서는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만일 거기서 물러났더라면, 그때는 우리 국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다 비난받을 수도 있다 여겼겠지요. 상하 신뢰가 무너짐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토사구팽이 책장 사이 고사로만 머물지 않는 실정이니...”
이토 스케유키 본인부터가, 조슈와 에도의 야합 틈바귀에서 살아남아 상비함대 장관까지 올라온 사츠마 출신이니 그 생리는 잘 알고 있다 자부할 법했다.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규슈 전체의 자랑거리인 사이고 다카모리처럼 거하게 헛물켠 셈이었지만.
“변명은 되었네. 어쨌든 우리 방안 덕분에 두 나라 모두 구라파에서 자금은 들여왔으니, 이제 조선이 늘 그랬던 것처럼 묘안 내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우리 바다에 들어와, 우리 전선에 먼저 쏘았으니 잘못을 청하여도 마땅할 판에, 도리어 허물을 아국에 돌리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소이까?”
‘엥이, 못된 놈들’이라는 말을 나름대로 돌려서 말하는 귀남이었다.
자리에는 예조와 병조의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고, 아랫사람 단속 못한 잘못으로 애먼 공조도 끼어 그 판서가 좌불안석하고 있었다.
급한 빚도 해결하고, 기무회의에서 주목도 받았으니 참 잘 되었다 생각해 의기양양하던 권재형이, 급변하는 사태를 보고서 덜컥 겁 먹어 풀 죽은 채로 ‘저의 사사로이 교유하던 일본국 벗’이 전한 글이라며 예조에 슬쩍 글 한 통을 전한 것이 그제였다.
살펴보니 여전히 귀남의 마음에 안 드는 이등박문 그 자가, 일전의 ‘가짜 다툼’ 약조를 잊지 말아달라며 간곡히 신신당부하는 것이 그 골자였다.
“참으로 하유하신 바가 합당합니다. 다툼을 가장하되 실제로는 그리하지 않음이 미리 한 약조였을진대, 이를 어기고 작은 이익을 취하려 하니 괘씸하면서도 분한 일입니다.”
하지만 분기는 일시의 것이요, 나라 사이의 관계는 여러 해에 걸치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은밀히 뜻 보내온바 이번 일은 저쪽에서 노린 것은 아닌 듯하니, 더욱 신중을 기하여야 할 일입니다.”
누가 불안에 떨건 말건, 저의 할 일 하는 김홍집이 운을 떼었다.
“일본국 안은 단합되지 않아 조정부터 군부까지 당이 여럿 갈리었다 합니다. 대개 이번 일에 있어서도, 겉으로는 우리를 억지로 성토하는 듯하지만, 그 내막을 보면 꼭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 된 가장 큰 원인을 조선이 제공하였음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설령 있더라도 우리는 오직 도우려는 마음으로 나섰을 뿐이니 스스로 갈라진 너희 잘못이라며 오리발 내밀 터였다.
“군부는 나라의 은혜를 여러 차례 입은바, 지난 북벌 이래 내려주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때가 오지 아니하여 짐짓 아쉽게 여김이 여러 해입니다. 만일 하명하신다면 즉시 나아가 저 괘씸한 무리를 징치할 것인즉 삼가 알아주시옵기를 청합니다.”
민태호가 내각 꾸리던 데 끼어 병조에 어쩌다 앉게 되기 전까지는 문신이었지만, 자리 오른 뒤 군무 맡아보다가 저들 아는 것보다 훨씬 그 군세 강력함을 깨달았던 정하원(鄭夏源)이 호기롭게 말했으나,
“허나 군을 움직임은 곧 비용이 들고, 일전의 북벌 때와 달리 지금은 다시 국용이 부족할 때입니다. 한 번 싸워 바로 일본국을 굴복시키고 끝내는 것은 오직 소설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는 어윤중에게 곧장 눌렸다. 임금의 총애도 총애거니와, 지난 경제개발 오개년계획 이후 아직도 나날이 밤샘하는 호조 관원들은 판서부터 서리까지 독기 가득한바 함부로 건드리지 않음이 근래의 통례였다.
그리하여 어윤중 말이 끝나자 잠시 좌중이 모두 가라앉았는데, 정초에 공안서 총관으로 올라 이 자리에도 참석한 – 또 엉뚱한 소리 하는 자 있으면 그 뒤를 캐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 김가진이 문득 발의하였다.
“그러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소소하게 싸움을 이어나감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리하여도 인명이 상하고 병기도 여럿 소요될 터이니 국용의 지출이 없지는 않겠지만, 능히 아라사와 법국을 통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병비에 힘쓴지 여러 해인데 일본국을 제압하지 못한다 하면, 저들은 우리가 약하다기보다 저들이 강한 것이라 여길 것이요, 그만큼 영국이 뒤에서 많이 힘쓰고 있다 여기지 않을지요?”
“예조판서 아뢰옵나이다. 총관의 발의에 옳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다투는 시늉만 하자고 하였음에도 인명이 상하였는데, 예컨대 계속 이어나가던 중 아예 우리 전선이 통째로 깨어져 가라앉는다면 그때는 어찌할 것이오?”
여기서 ‘그리 되지 않도록 한껏 힘쓰겠나이다’ 라고 답하였다가는 대책 없이 임금 앞에서 말만 늘어놓는다고 후에 탄핵될 수도 있는 것이라 – 당장 상감의 지적한 바에 일리가 있지 않은가 – 다시 모두가 궁리하게 되었다.
“꼭 무(武)가 아니더라도. 문(文)으로 흉악한 기세를 통어하는 방편이 없겠소?”
말싸움도 싸움 아닌가 생각하며 귀남이 다시 발의하였다.
“오래 다투면서도 사람의 정분 외에는 상하는 것도 없고, 또 따로 국용도 들지 않으니 다투는 시늉하기에는 글에 의지함이 내 보기에는 제일일 듯하오. 지금까지 아국 나아온 길을 살피면 반드시 다툼 일어날 것이라 한 일에서도 말로써 풀어낸 바가 적지 않은데...”
“하유하신 바 지당하오나, 울도군과 그 일대에 대해서는 전적 소략하여 역대에 교섭한 바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귀남이 알던 그 유행가도 나온 것일 테다. 오죽 사람들이 몰랐으면 노래로 만들어 불렀을까.
“그러면 상고하여 밝히면 될 일이지 않소? 당장 옛 지리지를 살피면, 그 섬의 내력을 남김없이 밝히어 의심의 여지가 없게 하였을 터인데.”
“그러나 나라에 문자 전한 지 오래되어, 지리를 밝히는 문헌이 여럿인데 그 중 상충되거나 의심스러운 것도 적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보다 짧을지언정 일본국도 진서를 쓴지 오래이니, 만일 찾는다면 그 근거가 어찌 없겠습니까.”
노래 가사에 무어라 하였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노래 나왔을 때면 아시안게임 하던 무렵이었으니, 저의 기억도 그리 또렷하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세종실록지리지 어쩌구 하였던 것으로 보아, 아마 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면 조종 대대로 찬수해온 실록을 상고하면 어떻겠소?”
“일찍이 나라 강역을 널리 살펴 그 부록에 실었으니, 필히 그 가운데에서 옛 우산국 내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 또한 그대 나라의 저작이니 모두 믿을 수는 없다’ 할 것이므로, 다툼 가라앉히는 명분으로는 부족함이 있을 듯합니다.”
“그것은 저들이 우리 사관들이 대대로 힘써온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겠소?”
무슨 문화유산인가가 될 만큼 이 실록은 참 대단하다 들었던 귀남이 고쳐 물었다.
“일본국에도 사가(史家) 있었고 또 지금도 학자가 여럿 있으니, 우리 백성과 그들이 모두 실록을 널리 보게 하면 비로소 우리의 기록한 바가 얼마나 상세하며 또 믿음직한지를 알게 될 것이오. 그리 되면 저 동해에서의 옳고 그름 다툼도 능히 해결할 명분을 얻을 수 있을 것이외다.”
그러나 실록은 나라의 치란(治亂)을 모두 담고 있는 것이요, 함부로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라, 모두가 정확히 왜인지는 알지 못하여도 어째 께름칙하다 여기는데, 그 중 어느 참판이 드러내어 아뢰기를,
“실록은 이미 그 편수하는 도리를 정교하게 갖추어, 여러 나랏일을 행하기 전 전례 살핌에 있어서도 널리 쓰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모두 드러내는 것은 또한 예에 맞지 않으므로, 생각건대 그 절요(節要)만을 드러내 세인에게 알려도 하유하신 방편을 행할 수 있을 듯합니다.”
허나 귀남의 한 마디에 이 반론 역시 정리되었다.
“참 좋은 뜻이오. 그러면 어느 부서가 이 일을 맡음이 가하겠소?”
결국 그 자리에 관계 없다 하여 참석하지 않았던 예문관 – 참관하는 사관이 있기는 하였으되, 품계 낮아 차마 무어라 이야기 꺼내지 못하였다 – 에게 일을 떠넘겨, 따로 절요를 정리하지는 않되 잡인이 함부로 종실의 위엄 더럽히는 일은 없도록 오직 여러 나라 학자들이 청하면 심사하여 열람케 하기로 하였다.
병장에 호소하면 결국 같은 병장만이 돌아올 뿐이니, 차라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말다툼으로 해결을 보자 하는, 어찌 보면 참 조선스러운 답이 일본에 돌아왔다.
군으로서도, 만일 말싸움에서 진다 한들 저들 잘못은 아닌 셈이니 딱히 나쁜 방안도 아니요, 무릇 나라 사이 다툼이니 기세 잡기가 중하다 하여 서로 함대 대동하여 만나기로 하였으니 사안에서 배제되는 것도 아니었다.
“공사들도, 주재무관들도 다들 의아하게 생각하더군요. 듣기로는 영토분쟁에서 우리가 승기를 잡아, 국지전 감수할 요량으로 함대 몰고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상륙해서는 일이 고작 학술토론이었다 하니...”
“무어라 대꾸했는가?”
간만에 유쾌함 되찾은 오쿠보가 웃으며 물었다.
“제가 이래봬도 유학 생활은 오래 하지 않았습니까. 그대 나라도 전쟁할 때 그 법 따지지 않는가. 따지고 보면 이는 서양의 프레데릭(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도 한 일이니 오히려 우리가 그대들 전통에 따르는 셈이다 하였더니, 곧장 입을 다물더군요.”
울릉도에 있던 옛 집터까지 상고해보자 하여, 멀리 중원을 헤집고 다니던 고증하는 이들까지 끌고 울도군에서 양국 대표단이 만났으니, 일본은 신무기 어뢰를 선보이고, 조선은 ‘신(新)’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비장의 무기로 저들의 실록이라는 서책을 선보였다.
수평선에 양국 전함이 죽 늘어서 대치하고 있는데, 가까이서는 도포자락 날리는 선비와 양복 입은 학자들끼리 우르르 산 타며 집터 구경하고 책 펼쳐보고 있었을 터이니, 아마 누군가 사진기를 들고가 찍었더라면 적잖이 희극적인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영국에게든 프랑스에게든, 평화롭던 동양에 갑자기 다시 일어난 이 무력분쟁의 진상이 밝혀지면 서로 곤란하였기에, 기자들의 출입은 미리 금해두었고 짤막하게 ‘논쟁을 벌였다’ 정도만 보도하기로 했지만.
“하하, 그것도 따지면 문(文)으로 무를 제압한 축에 드는가.”
물론 합의는 하지 않기로 미리 뒤에서 합의를 해 두었으나, 그렇게 지시를 하지 않더라도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학자라는 족속인즉, 감탄할지언정 그와 동시에 새로 이론(異論) 내놓을 터였다.
“거기에 더불어 저 골칫거리 공산당도 나랏일 돕게끔 만들었으니, 겨우 잘 풀린 셈이 되었군그래.”
다시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약조 깼다고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공식적으로 비공식 통로를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졸지에 버리는 패가 된 조선의 권 아무개야, 그쪽에서 알아서 조사하여 적어도 관직 생활은 끝난 셈이 되었다지만 오쿠보든 이토든 알 바 아니었다.
대신 보다 믿음직스러운 수단으로 공산당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서로 공공연하게 충돌 예정인 지점과 규모를 합의하면서, 만일 이것이 발각되면 공산당의 첩자가 있어 양국 사이에서 기밀을 누설하였다 둘러대리고 한 것이었다.
(이미 제도권에 들어선 조선 공산당이야, 실제로 그런 첩자 놀음 즐겨하던 사람이 세운 당이므로 별 군말이 없었고, 일본 공산당은 나라에서 그리하자 하였을때 딱히 반기 들 방편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저쪽 서양인들이 나라 사이 다투는 일을 여럿 만든 탓이지 않겠습니까. 다 그들이 업보를 돈으로 치르는 셈이지요.”
“여하간 말솜씨만 늘어서, 원.”
어느새 옆의 조선에서 엉뚱한 물이 들어, 전쟁을 골칫거리로 여기고, 평화를 모범적인 길로 여기게 되었다는 데는 이 둘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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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일본 해군은, 이미 에도 막부 시절부터 좌막과 도막 두 진영이 각자 철갑함을 구비하는 등 이른 시기부터 많은 투자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확장은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잘 알려진 것처럼 청일전쟁 시점만 하더라도 총톤수 기준으로는 아시아 내 최강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었지요.
동명의 항공모함으로 더 잘 알려진 코르벳함 류조는 원 역사에서는 구마모토번이 구매한 뒤 신정부에 헌납하여, 1870년대에는 신정부 해군의 가장 강력한 함선으로 널리 활약했습니다. 물론 작중에서도 언급되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낡은 함선이었기에, 1877년 사고로 좌초한 뒤에는 훈련함으로만 쓰였습니다. (여담으로, 이때 원양항해를 하면서 처음 각기병 문제가 인식되었고, 그로부터 일본 해군의 식단 개선사업이 추진되면서 그 결과 카레라이스 같은 음식이 개발되어 근대 일본 식문화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유영복과 조선의 개입으로 엉뚱하게 해결된 청불전쟁은, 어뢰라는 신무기가 처음 활약하는 전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비록 복주선정국에서 제작되어 질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일단 겉모양은 어느 정도 갖추었던 남양수사를 간단히 무너뜨린 것은 프랑스 해군의 어뢰였지요.
이는 그 전부터 영국 해군에 대항할 수단을 마련하고자 고심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내에 출현한 청년학파(Jeune École)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어뢰정 등 신기술을 적극 채용한 소형 함선 위주의 해군 전략은 19세기가 다 가기도 전 실효성이 의심된다는 인식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작중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어뢰 자체의 가능성은 1880년대 초부터 주목받고 있었기에, 한정된 예산으로 안보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일본도 이를 덥석 물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는 조금 의외일 수 있는 사실로, 가요 ‘독도는 우리땅’은 개그맨 정광태가 1982년 처음 선보인 것입니다. 이후 잠시 방송금지가 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벌써 장년기에 접어들었던 귀남옹은 아시안게임(1986년) 즈음에 나온 유행가로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 이미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직접 학교에서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더라도 가사 정도는 귀에 익었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귀중한 문화유산이고, 조금은 다른 이유에서지만 조선시대에도 전·후기를 막론하고 매우 귀중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일례로 조선 중기의 문신 유희춘(柳希春)이 남긴 미암일기(眉巖日記)는, 당시 편찬이 완료된 실록을 각지의 사고에 옮기는 봉안사의 업무를 기재하고 있는데, 봉안 일정이 결정된 뒤 관찰사에게 따로 연락하여 봉안사 접대를 지나치게 하면 백성에게 폐가 됨을 언급한 것이나, 도착 후 관찰사가 외직으로 춘추관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고(史庫)를 여닫는 자리에 절대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 것 등은 당대의 실록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국정 운영을 위해 자주 실록이 상고되기도 하였는데, 당장 실록이 책으로 정리되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던 1990년대까지도 전산화되기 전에는 대중이 쉽게 이용하지 못하였으니 당대 조선에서는 어떠하였을지 그 고충을 얼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현종 연간에 신덕왕후 강씨의 능묘인 정릉(貞陵)을 정비하는 문제를 두고 실록을 상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현종 10년(1669) 3월 2일에 강화도로 출발한 일행이 돌아온 것은 3월 14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12초도 걸리지 않을 일이지요.
이토 스케유키는 사츠마 출신의 군인으로,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카츠 카이슈 아래에서 근대 항해술을 공부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행보는 전혀 걷지 않고 군인으로서만 처신하여, 1894년 청일전쟁을 맞아 설치된 임시직 연합함대의 첫 사령장관을 맡았습니다.
마지막에 이토 히로부미가 능글맞게 서양 공사들에게 들이민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고사는, 그가 115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한 이후부터 야심차게 추진한 북이탈리아 정복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롬바르디아 일대에 대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신생 볼로냐 대학교의 네 법학자(The Four Doctors; 마르티누스, 불가루스, 야코부스, 후고)의 도움을 받았는데, 비록 결과적으로 롬바르디아 일대의 교황파(구엘프) 세력을 제압하는데는 실패하였으나 국가의 주권과 통치권을 전쟁과 무력 대신 법으로써 인정받으려 한 중세 유럽 최초의 사례로 널리 언급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