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오십 번째 쪽 셋째 줄 (1)
철도의 이름도 경래선(京萊線) 대신 경부선(京釜線)이라 부를 만큼, 개항 이후 일본국 오가는 사람과 배가 늘어나면서 동래부 본래의 읍내보다 부산항이 더 커지게 되었다. 배보다 배꼽 큰 형세가 되었는데, 그만큼 중한 배꼽인 관계로 통제수사(統制水師)가 가장 신경 써서 방비하는 곳이기도 했다.
반면 멀리 동쪽 울도군(울릉도)은 아마 가장 신경 쓰지 않는 축에 들 터인데, 나라의 군략(軍略)과 군부 안의 묘한 사정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개항 후 어쩌면 저 절해고도 울릉도가 참 중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여, 군을 설치하고 백성을 여럿 보내기는 하였는데, 정작 그 후로 아라사와 다툴 일도 없고, 따라서 아라사 싫어하는 영국이 넘어올 일도 없어, 말만 해중요해(海中要害)요 벌목과 강치잡이 외에는 별 신통할 것이 없는 섬으로 남아 있었다.
함경·강원 양도의 얼마 안 되는 수군을 덕원부에 합쳐 조그만 연안경비 수영을 두기는 하였다만, 그것으로는 말 그대로 해안이나 지킬 뿐이었다. 항상 욕심보다는 부족한 국용(國用)으로 인해 서쪽 바다의 통어수사(統御水師)와 통제수사 둘에 큰 전함 몰아주면 끝나는 판에 덕원 쪽까지 나누어줄 것은 없어서, 결국 울릉도는 평시에는 덕원수영에서 조그마하게 함선 분견(分遣)하여 경비하고, 천만에 하나쯤 될 희박한 공산으로 동해에서 바다 싸움이 붙게 되면 통제수사가 지키기로 하였다.
그리 되었으니 어느 쪽에서도 크게 관심은 두지 않게 되었다.
비록 일본국과 화약한 것이 예전같지 않다 하더라도, 만일 전쟁까지 나게 된다면 일본국 안에 육군이라 할 것이 그닥 없으니 수군으로는 통상하는 바다의 길목을 막지 울릉도는 건드리지 않을 것이요, 아라사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수군 나설 것도 없이 육군이 나아가 연해주를 점령하면 그만이었다.
그 옛날 전조(고려) 시절에 여진족 해적들이나 왜구가 동해 오가며 노략질하던 시절이 재림하지 않고서야, 울릉도 먼 바다 신경 쓸 일은 없으리라는 것이 그러므로 군부 안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던 차, 대마도 바라보이는 부산항 앞바다에서 또 한 차례 거하게 수조(水操, 해군의 훈련) 마치고서 피로 가득한 통제수사에 다시 급한 군령 내려와 출항을 명하니, 영문 모르는 수사 사람들은 아마 울릉도 어디께로 간다 하는 풍문만 듣고서도 다들 입이 한 자씩 나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지금이 전시도 아닌데, 우리 쪽에서 굳이 나설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덕원수영이 아무리 작아도 엄연히 수영인데...”
제법 식견은 있으나 그만큼 열의는 없는 어느 참위가 툴툴대는데, 배를 준비하는 이들 중 호응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맞는 말입니다요. 더구나 근래 원양(遠洋)서 수조도 잦은데, 군병 피곤하면 될 일도 아니 되는 법입죠.”
‘급료도 도로 짜게 줄어든 판에’라는 말을 붙이려다 말았는데,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음은 천만다행이었으니, 그들 옆에 나이 환갑 넘은 군부의 숙장(宿將) 이규원(李奎遠)이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사람들, 나라의 무부로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거 누가... 헛, 통제사또 나리!”
그를 보지 못하였던 아까의 참위만 홀로 곤혹스럽게 되었다.
모두가 급히 군례 갖추고 입은 다물었는데, 이규원 속도 누굴 꾸짖을 만큼 여유롭지는 못하였기에 다행히 거기서 더 문제삼지는 않았다.
“군말하지 말고 출항 준비나 마치게들.”
하고서 통제영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툴툴대던 자들은 한시름 놓았다 생각하며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하였다. 놀란 마음 진정되지 않아, 다시 불평하는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나라 안의 군영이 대개 그러하듯, 통제영도 별 중요하지 않은 건물들은 모두 허물고 신식으로 짓지만 중요한 건물은 간간이 보수할 뿐 더 고치지 않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연대도 거슬러 오르는 듯하였다. 그 옛날 인묘조에 통제사 이완(李浣)이 지은 이래 그대로 내려오는 운주당(運籌堂)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규원의 눈에 고색창연한 멋이 들어오지는 않았는데, 한성에서 내려온 명령 생각으로 심사 복잡하였기 때문이었다.
‘다투는 시늉을 하되 정말 다투지는 말라... 참으로 위험한 계책인데.’
싸우는 시늉도 실제로 싸움질 많이 해 본 이들끼리 하여야 사람 상하지 않고 끝나는 것이 병장의 이치. 반대로 평소 병기 멀리한 사람끼리라면 하등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손속 좋지 못해 피를 보게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운주당 대청에 오르니 소집한 장교들이 모두 예를 갖추었다.
“조금 늦었네그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각설하고, 제장을 이리 부름은 중대하지 않은듯 중대한 사안 때문일세.”
미리 준비된 해도를 짚으며 이규원이 말했다.
“울도군과 그 일대는 평시 우리 수사가 맡는 곳이 아님은 모두가 알 것이야. 헌데 울릉도에 속한 먼 바위섬 하나에서 근일간 어민 사이 다툼이 일었다 하네.”
해도에도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아, 따로 표시하고서 위에 만년필로 굵게 ‘독섬(獨島)’이라 쓰여 있는 곳을 짚었다.
“송구하오나, 울도군 관장이 다룰 일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 어민끼리 다툼이 아니라 우리 백성과 바다 건너온 일본국 백성 사이 다툼이라더군. 그전에도 종종 다툼이 있었는데, 지난번에는 울도에 파견된 덕원수영 전선이 직접 나서야 했다 하네.”
아무리 처음 황란 당했을 때만큼 민심이 어수선하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벌이가 시원치 않으면 후했던 인심도 곧장 박해지기 마련.
“그랬더니 일본국 쪽에 누가 무고를 했는지, 이번에는 그쪽에서도 전선이 종종 나와 우리를 도리어 겁박하려 한다더군. 바다의 경계 확정하는 것은 후에 예조가 할 일이고, 우선은 기선(機先)을 취하여야 하니 우리가 나서는 것일세.”
자신의 아래 사람들에게 밝힐 수 없는 전모는, 일본국 쪽에서도 동일한 약조가 되어 있어, 거짓 다툼을 하기 위해 그쪽 전선도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 한쪽이 실수하여 인명 상하게 되면 자칫 나라 사이 다툼으로 번질 수 있는 일이니, 내 직접 나서는 것이야. 제장은 이를 알고 엄중히 준비토록 하게.”
아무리 서로 다투다 보니 그 성정 다스려졌다 하지만, 승냥이 심성은 그대로인가.
조선국에서 그 ‘경제발전’을 위하여 차관도 널리 들여오고, 국채도 발행하고 하겠다 공포하니, 관심 표하는 나라가 은근히 많아서, 처음에는 그 권재형의 발안한 바를 굳이 따를 필요도 없었지 않은가 뒤늦게 생각하였는데, 곧 밝혀진바 그 중 선의만 품고 오는 나라는 별로 없었다.
‘중국은 이름만 상국이요, 조선은 실지의 상국이다’ 한다는 유구국은 그 나라 경기가 조선과 함께 수직낙하하여 도울 여력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바다 건너 벗을 위한다며 왕실의 내탕으로 국채를 조금 사들인 하와이국은 깃털 하나만큼의 도움은 되었다.
그 정도를 제하면 모두들 나름의 꿍꿍이가 있었는데, 그 전 발안국(트란스발)의 재미 본 이야기를 어디서 전해 듣고서 조금 헐하게 조선 총포 들여올 궁리를 하던 섬라(暹羅, 시암. 태국) 국왕은 그래도 당당히 그런 속내 보이고서 교섭을 타진해온바 이야기가 원활히 풀렸다.
그리하여 대금으로 얼마, 대금을 깎아주는 대가로 국채 또 얼마 하는 식으로 기관총과 연발소총을 넘기기로 하였는데,
“정말로 선량한 나라가 이 지구 위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개는 악의를 드러내도 괜찮을 만한 힘이 없는 국가를 그리 착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곳 조선 같은 예외도 있지만요.”
하는, 신임이되 구면(舊面)인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의 말이 참 맞는 것이었다.
“그러니 조선이 받아들이기 쉬운 거래를 제시하는 나라는, 도와준다고 해 보아야 그 도움이 얼마 되지 않고, 제대로 도움 될 법한 나라는 보통 감당하기 어려운 값을 제시하기 마련입니다.”
처음 외교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의 파릇한 모습은, 그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앙 부처에서 경력 쌓고 다시 공사로서 돌아온 지금은 –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인심 쓰듯 공사대리에서 올려준 공사가 아니라, 실제 그 경력과 연륜에 맞는 인사로서 부임되어 온 것이었다 –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의 행간에 담긴 진심은 소싯적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부임 인사를 겸하여 이번 무기 거래 협상의 전후 사정을 설명하는 베베르를 바라보는 귀남의 시선은 그리 냉랭하지는 않았다. 서로 안타깝게 여길 뿐.
“그런 와중에 우리 청을 받아주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오. 역시 동맹을 약조한 벗이라 할 수 있소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이 나라와 접경한 유일한 서양 이웃으로서 마땅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영국과 독일이 이론상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으르렁대고 있음을 간파한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의 파디샤 압뒬하미트 2세는, 영독동맹에 편승하면 홀로 영국을 상대하는 것보다 여러모로 이득이 많으리라 여겨 이집트와 테살리아(현 그리스 중동부 일대)의 원한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리고 이는 한 번 자치권이 보장된 뒤에도 지속적으로 더 많은 권리와 더 적은 간섭을 요구하던 – 완전 독립 전까지는 만족되기 어려운 욕구였다 - 다른 발칸의 자치령들에게는 썩 좋지 못한 전개요, 그들의 후원자 자처하는 러시아로서도 숙적 투르크가 나름대로 믿음직한 우군을 확보하는 것에 있어 대응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아버지의 대표적인 치적 중 하나인 발칸 제(諸)민족의 자치가 무너지는 것도 원치 않았던 차르 알렉산드르 3세에게 조선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전해진 제안은, 러시아가 조선에게 관대한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하고 (러시아라고 사정이 썩 좋지는 않으니 그 차관의 상당 부분은 다시 파리 금융가에서 나올 예정이겠지만), 그 대신 조선은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 무기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베베르 생각하기에도 러시아나 프랑스가 직접 무기를 넘기든, 자금을 대든 하여 발칸 공국들을 부추기는 것보다는, 여러 약소한 나라에 무기를 팔겠다고 천명한 조선이 들어오는 편이 나았으므로 서로 만족할 만한 제안이었는데, 조선에서는 엉뚱한 부분에 딴지를 걸었다.
“조선과는 대륙 반대편에 있는 나라들이니, 그 사정은 잘 알지 못하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이 보기에, 자칫 큰 전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는데, 그런 일에 함부로 개입하여 인명 살상되는 계기 만듦은 군자국 자처하는 우리가 취할 방도에 들지 않소이다.”
“제가 전하를 만나뵙고, 또 이 나라 조선의 사람들과 두루 사귄 것이 몇 년인데 그것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것이 관철되었으니 참 좋은 일입니다. 부디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지요.”
엄연히 돌궐의 말예(末裔)인 토이기국을 상국으로 모시고 있는 두 나라이니, 도리에 따르자면 설령 병기를 넘기더라도 이를 당당히 밝힘이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술탄이 발칸 공국들의 전력을 오판하는 것이야말로 러시아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발칸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기던 러시아로서는 그리 환영할 만한 역제안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자칫 그대로 협상이 결렬되든, 아니면 급한 쪽인 조선이 먼저 뜻을 굽히든 할 것이었는데, 다행인지 아닌지 그 무렵 프랑스가 ‘동맹국 간의 신의와 협력’을 위해 모두 한발씩 양보하자며 중재를 해 왔다. 그리고 그 명분은, 바로 요새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부딪히기 시작한 한일 양국의 사정이었다.
“흠흠, 비록 한때 동맹도 맺었다 하나, 우리와 일본국은 다툰 것이 매우 오래되어 구주의 영불 두 나라도 비할 수 없소. 그러니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외다.”
두 나라의 외무 보는 이들과 치안 맡은 이들이 협조하여, 혹시 영국 같은 나라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은밀히 공모한바, 조선에서는 거문도에 상륙하여 점령하는 훈련을 하고, 또 대마도 목전 조선 영해에서 함대를 모아 위세 부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두 나라의 쌓아온 우의가 있었기에, 처음에는 대마도의 어느 주민이 배 타고 나아와 날 더운데 고생한다며 감을 주고 간다던가, 일본국 장병들 훈련에 인천목 취급하던 어떤 조선 포목상이 군복으로 쓰라며 옷감을 기부한다던가 하는 미담이 있었는데, 그것도 하루이틀이라 슬슬 상대의 적의가 오히려 진심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감돌 무렵이었다.
이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접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하는 것이 얼마 전 두 나라 사이에 오간 합의였다.
“나름대로 자부하기로는 문명을 먼저 일구었다는 유럽의 입장에서, 그런 부분에서는 조언하기가 어려우니 염치가 없을 뿐입니다. 통상 그만큼 악연이 얽히기 전 전쟁에 호소하여 풀고는 하였지요.”
물론 몇몇 공상가들이 슬슬 걱정하듯, 이러다가 유럽의 문명 또한 전쟁으로 파멸하는 게 아닌가 하는 목소리도 없지는 않았다. 베베르도 그런 걱정에 나름의 논리가 있음은 인정하였지만, 그래도 설마 거기에 이르겠느냐 싶어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다.
“우리와 일본 두 나라가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오.”
익숙한 통제영 앞바다와는 달리, 누가 정말 물감을 한가득 풀어놓은 듯 짙기만 한 바다. 멀리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마저 그 빛을 받은 듯 언뜻 파랗게 보였다.
그 가운데 둘로 쪼개진 바위섬이 툭 나와있으니 형세 기이하다 생각한 것도 잠시. 덕원수영 보고대로 일본국 국기 휘날리는 배가 어선 대동하고 나와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확실히 전선이로군. 꽤 구식이기는 한 듯하지만.”
“배의 크기로 보면 언뜻 위함(衛艦, 코르벳) 정도는 될 듯하니 우리와 같습니다.”
영국과 동맹하기 전부터 수사, 그들 말로 해군에는 나랏돈 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니, 전선이라 하여도 저런 배가 나왔음은 무언가 노림수가 있는 것일 터.
“오래 되었다 하나 배가 작지는 않으니, 단순히 경비하러 온 것은 아닌 듯하네.”
속으로는, 그 구식 설계를 보며 저쪽도 ‘싸우는 시늉’ 할 생각으로 왔겠거려니 하였다.
“우선은 물러나라고 말로 해보세나.”
물론 말은 아니고 깃발로 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화포를 먼저 쏘지는 않으니 소정의 도리는 지키는 셈이었다.
“저쪽에서도 응수하기를 우리더러 물러나라 합니다.”
그렇게 같은 뜻이 오가기를 몇 번. 이만하면 저쪽이 이쪽에 선공을 양보한 것이리라 여기고서 지시하였다.
“경고하는 뜻으로 몇 번 방포하게.”
“예, 사또.”
멀찍이 저쪽 함미에 물보라가 일더니, 조금 뒤에는 배 고물 쪽에서 멀리 물보라 소리가 들렸다.
“좋아, 잘 되고 있군. 몇 번 더 쏘게.”
“그래, 그렇게만...”
“너무 근접하였어! 조심하게!”
통제사또씩이나 되어서 일일이 포 쏘는 것을 감독하고 있으니 조금은 우스운 일이지만, 또 필요한 일이기도 하였다.
이만하면 적당히 포탄도 쏘았겠다, 서로 물러나면 될 것이라 여기고서, 저쪽이 배 돌리는 시늉 하자마자 회항을 지시할 생각이었는데-
잠시 ‘휙’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가 싶더니 큰 충격이 선체를 휘감았다.
별로 대비하지 않고 있던 선교의 대소 군교들은 나동그라지고, 운 좋게 의지할 기둥을 잡은 이규원은 울리는 귀를 진정시키며 외쳤다.
“피해 보고!”
“우현에 중환(中丸, 피탄)!”
그간의 훈련이 효험 있었는지, 당황함의 극에 달했음에도 누군가 제정신 차리고 보고를 하였다.
“방포! 응사하라!”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상황.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는가 묻는다면, 적어도 군부에서는 ‘어째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는 답변 정도는 내어놓을 것이었다.
“적함 명중!”
“방포 중지!”
“적이 물러갑니다!”
그러나 이규원이 ‘천세’ 외치지 않았으므로, 결코 이것이 좋은 일 아님을 직감한 노련한 뱃사람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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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 초 공도정책으로 빈 섬이 된 울릉도는 개화기에 다시 개척됩니다. 임오군란 당시 회군의 막료로 조선에 머물던 문관 장건(張謇)이 자신과 교분을 맺은 조선 선비에게 지어서 준 시무책 『조선선후육책(朝鮮先後六策)』에도, 울릉도를 개척해 러시아나 일본을 견제할 것을 제안하고 있을 만큼, 실제 실행된 조치가 적은 것에 비해 많은 관심을 받았지요.
그런데 하필 처음 울릉도 개척의 총책을 맡은 것이 김옥균이어서 – 김옥균이 어린 시절 아버지 김병기와 함께 강릉에서 지냈던 것이 나름대로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 갑신정변 후 울릉도 개척은 잠시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그리고 후의 대한제국은 현지인 사이에 도장(島長, 후에는 도감島監)을 제수하고 벌목권을 (당시 대한제국치곤) 상당히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등, 울릉도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독도가 ‘돌섬’(남도 사투리로 ‘독섬)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 시기지요.
작중 조선의 수군 편제는 당연히 작가의 창작입니다. 원 역사에서는 영 열악하였던 사정상 제대로 된 해군을 육성하지 못한 반면, 작중에서는 수영 체제가 유지되던 시절 판옥선 – 건조 방식과 목재의 문제로 인해, 수명연한이 생각보다 짧았습니다 – 을 대체해 기선을 유지하던 것부터 시작해 징병제 등으로 그 편제가 살아 있습니다.
그 결과 제도적 관성으로 함대의 구성 역시 조선 후기의 통제영(경상+전라+유사시 충청) + 통어영(경기+황해+유사시 충청) 체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작중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본래 상황에 따라 통솔 권한이 옮겨지던 충청수영은 통어영 예하로 들어갔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으로 인해 잘 알려진 삼도수군통제사의 진영을 말하는 통제영은, 임란 초 한산도에 있다가 칠천량 해전 후 완도군 고금도로, 그리고 여러 곳을 거친 뒤 1601년 현 통영인 두룡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미 조선시기부터 두룡포(1900년 진남군으로 고성에서 독립) 일대를 ‘통영’으로 부를 정도로 그 규모가 작지 않았지요. 그 중심 건물인 운주당은 본디 이순신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현전하는 건물은 1645년 이완이 통제사에 재직할 때 지은 것입니다.
이규원은 본 역사에서 1881년 울릉도검찰사로 섬을 시찰하기도 한 무관입니다. 갑신정변 이후에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 함경남도병마절도사 (덕원 –현 원산-이 여기 있습니다) 등을 역임하고, 갑오개혁 시기에도 함경북도관찰사를 역임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비록 후대에 이름은 잘 남지 못했지만 당대에 새롭게 대두되는 각종 군무를 맡는 데 있어 나름의 전문성을 인정받았던 듯합니다.
1875년 동방위기와 제12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작중에서는 유야무야되면서, 산 스테파노 조약과 베를린 회의로 발칸의 오스만 속국들이 독립 혹은 반독립 상태로 이행하는 대신 캐나다 같은 자치령으로 변모하였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초중반부터 일대서 발흥하기 시작한 민족주의의 기세는 완전히 꺾이지 않았지요.
이 시기 파디샤(술탄) 압뒬하미트 2세가 이끌던 오스만 투르크는 군대 현대화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의 위협을 막기 위해 자체적인 방위산업 역량 육성보다는 최신 무기 구매에 훨씬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후로도 이는 이어져, 공군이나 잠수함 도입 등에서는 매우 빠른 모습을 보였지만 정작 내실은 없는 문제를 낳았고, 가뜩이나 엉망이던 내부 재정 상황에 짐덩이로 작용했지요. 물론 그 결과 비서구 열강 중에서는 (졸전을 거듭했어도) 세계대전에 얼굴을 내밀 수준까지 올라왔으니 완전히 성과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암, 즉 태국의 국왕 라마 5세(쭐랑롱꼰)는 오늘날에도 대왕으로 불리는 군주로, 태국의 근대화와 독립을 모두 달성한 것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절묘한 지리라는 지정학적 요인과, 그 동안 태국이 점령하였던 라오스와 미얀마 북부, 캄보디아 등을 내어주면서 핵심 영토를 지킬 수 있을 정도였던 넓은 강역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