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겨울밤 화롯가 (3)
김옥균 예상대로 호조의 상황은 뒤숭숭하였다. 무에 그리 급할 것까지 있느냐던 병조의 한 관원에게 호조 관원 하나가 이르기를,
“자네에게 왕명 내리어 사흘 뒤 모시(某時)까지 십만대군을 바다 가운데 제주도에 모으라 했다고 생각해보게.”
하였다는 것이 재담으로 관아 안에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종종 가배 마시면서 이렇게 한담할 짬마저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고된 일정 버티는 것은 끽해야 며칠이 한계였으리라.
“그래도 잘 된 셈이지 않은가.”
“적어도 가배 들여오는 양행들은 이 황란을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잘 된 셈이라면 잘 된 셈이지요.”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하는 말투로 홍종우가 툴툴대며 대꾸하였다. 그러나 어윤중 본인 앞에서나 이럴 뿐, 다른 관원 앞에서는 저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얘기할 터인즉, 짙게 주름진 눈가에 웃음기 감돌았다.
“지난날 은 소동이나 기묘년 일에는 우리가 목소리 내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모든 고랑이 풀린 셈이니 오직 한 분 보시기에 합당하면 되지 않겠는가.”
민태호 한 사람이 나서서, 본인이 관직 내려놓을 테니 나머지 조정은 참의원이나 세간의 비난 걱정하지 말고 황란 넘어서기에 매진하라 하였으므로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삼대의 원수처럼 미워하고 멀리하더라도, 막상 떠나게 되면 아쉬운 것이 이른바 조선의 정(情)이라, 내각 안의 공산당 사람들도, 사실상 성씨만 같았지 보태준 것 별로 없는 중전 민씨도 위로해주고, 민태호는 덤덤히 ‘본디 오르지도 못하였을 총리 자리에 한 번 앉아본 것으로 족히 여겨야 할 것이외다’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민태호나 최익현은 고사하고 저기 창경궁 시절부터 나라의 재무를 맡아보고 있었으니, 허심탄회하게 말하자면 그저 기무회의나 업무 보고할 때 마주할 사람 달라지는 것뿐이었다.
물론, 이제 다음 추거부터 그 자리 앉을 사람이라면, 이번에 호되게 깨우친 바 있으므로 필요할 때 쓸 재정만 있으면 족하다 여기던 전임자들과 달리 이리저리 개입하고 또 다그칠 것이므로, 곧 그것도 옛말이 되겠지만.
“요즘 관아의 젊은이들이 형과 저를 일컬어 ‘옛 사람’이라 하더군요.”
“말이야 맞는 말 아닌가?”
“아니, 옛 사람이라면 저기 오배 영감 같은 사람이 석인(昔人, 어젯적 사람)이지, 고희 넘기기도 대수롭지 않은 요즘 세상에 쉰도 안 된 우리네가 무슨 옛 사람입니까.”
이제 수염은 길렀은즉 범만 한 마리 데리고 다니면 영락없는 산신령이라 놀림당하는 오배 영감만큼은 아니어도, 젊은 관원들에게는 대략 그와 동류로 간주되고 있었으니, 세월의 무게가 갑자기 느껴져 부쩍 신경쓰일 연배인 홍종우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작 두 살 위 어윤중이 껄껄 웃으며 받기를,
“이 사람, 생각해보게. 우리 머리 위 전구를 누가 주상께 아뢰어 들여왔는가? 바로 자네지. 법국 사람들에게 직접 배운 사람들도 거의 기로(耆老) 대접받는 판국에, 그 나라 뒤집히기도 전에 건너가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 누군가? 또 자네지.”
“그러는 형께서도 굳이 따지자면 환재대감의 수제자 아니십니까.”
“그렇지, 그러니 우리가 옛 사람 대접 받음이 가당하다 이 말일세.”
마지막 한 모금이 목을 넘기니, 국고 바닥나는 것 다음으로 두려운 가배잔 바닥이 보였다.
“휴, 다시 해 보실까요.”
“그러세.”
그 유례없을 광화문 독대(獨對) 이래로 참의원도 분위기가 확 바뀌어서, 황란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우선 뜻 모으기로 다들 당론 일치한 모양이었다.
그때 당장 취한 조치가, 처음 황란 닥쳤을 때 식주공회 문 걸어잠갔더니 오히려 미덥지 못하다는 오해를 주었던 듯하므로, 다시 문을 열겠다 한 것이었는데, 한 번 그사이 밀렸던 폭락분만큼 푹 떨어진 후 미약한 상승세 보이며 장을 마쳤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몇 주가 지나, 겨울 다 지나고 훈풍 불어올 무렵까지 더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제 일시의 두려움에 말미암아 성급하게 재보 빼내거나 하는 이는 없는 듯하니, 조금 더 긴 구상을 내어놓을 때가 되었네.”
“또 광화문에서 소란 일으키는 자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야지요.”
다행히 조종의 위엄 두터워, 몇몇 사람 걱정하였던 것처럼 그 이름 밝히지 않은 사내 이후로 저도 은전 입어보겠다며 난동 부리는 자는 없었다.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면 만백성 어버이 주상이 스스로 위엄 깎아 민심 위무하는 일이요, 그 또한 쌓아둔 위엄이 없으면 곤란한 조치이므로, 자주 하기는커녕 한 번 하고 갈무리함이 마땅할 터인데, 만에 하나 또 누군가 나서서,
‘그때 분명히 나라의 가장 빼어난 인재들이 새 계책을 내어놓는다 하였는데, 소식이 없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며 볼멘소리 하였다가는 모두가 더없이 곤란해질 것이라, 장구한 평안을 위해서라면 홍종우 말처럼 서두를 필요가 있었고, 지난 몇 주간 호조 관원 모두가 머리 싸매며 매달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얼추 끝이 보이니 다행입니다.”
“글쎄, 끝이라기보다는 고작 대청에 오른 것(升堂)에 가까운 듯하네. 장차 방에 들려면(入室) 아직 갈 길이 멀지.”
“아니, 밤을 여기서 새는 것의 끝이라는 얘깁니다.”
두꺼운 문서철을 헤쳐 다시 책상 위에 늘어놓으면서 홍종우가 말했다.
그 발단은, 광화문 안팎 굵직한 사건이 대개 그러하듯 군밤이었다.
“이왕 굽기 시작한 것 마구 구웠으니 다 식기 전에 드시오들.”
길가에서 길가 만난 이후 도로 호조 주관 회의에 돌아온 귀남이, 어제 군밤을 남발하며 말했다. 그간에야 국왕 체통 어쩌구 하는 것에 신경이 쓰여서 밤 굽기를 스스로 멀리하고서 고작 저의 가족과 궁인 몇몇에게 나누어줄 뿐이었지만, 이미 나라 전체가 궁상맞게 된 판국에 도로 부지깽이 잡았으니, 몇 년간 쌓인 질화로의 한을 풀어줄 때가 되었다.
그러니 신료들은 성은 망극하다 말씀 올리고서 다들 맛볼 수밖에. 이 시국에 또 고 상신 문충공을 운운하였다가는, ‘지금 만나고 온 길가도 먹은 것이 내 군밤이오.’ 하는 답이 나올 것이니, 여전히 께름칙하게 여긴다면 속히 궁중에 군밤 외 다른 주전부리 나올 수 있도록 나라 경기를 되돌리면 될 터였다.
그리하여 어느새 시간도 훌쩍 지났는데, ‘시장할 테니 파하자’ 하는 말은 군밤의 효험으로 말미암아 모두 달디단 군것질거리로 요기한 탓에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설령 누군가 그 얘기를 꺼낸다 한들, 자칫하면 가배와 군밤이 더 나와, 원하는 답이 나오기 전까지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 오늘도 별 효험 없이 궁리만 하다 끝나겠거려니 가볍게 여기고 왔던 관원들로서는 청천벽력이 따로 있을까.
우선 식주공회 문 다시 여는 것 등등의 단기적인 조처가 다 나온 뒤에 다시 귀남이 하문하였다.
“그래서, 시중을 안심시키는 외에 취할 방책은 여전히 따로 없소이까?”
“그렇습니다. 앞서 어전에서 아뢴 것과 같이, 지금의 황란은 나라에서 상무를 직접 관할치 않고 상고의 손에 맡기면 절로 이루어지는 이치의 일부이니, 이는 앞서 여러 대서 학자들이 궁구하여 밝힌 바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서의 이론 아니오? 하다못해 저 공산당조차 그 논의의 잘못됨을 고쳐서 새롭게 쓰겠다고 하고 있는데, 하물며 재무와 후생(厚生)의 학에서는 어찌해야 하겠소.”
하지만 학문으로써 벼슬에 올라, 일문 다시 일으켰다는 것은 홍종우 흉중의 자긍심 중 하나라, 설령 무시무시한 어제 군밤 내세우는 성상 앞에서도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서의 이론이 반드시 해동에서 틀리리라는 법도 없는 것입니다. 예컨대 또 다른 학자로 법국의 세씨(世氏, 장바티스트 세)는 이르기를, 소산(所産)하는 만큼 소요(所要)가 된다 하였으니, 비록 지금 식주공회나 은행 등이 화 입었다 하나 이는 평소의 교만하고 흠 많은 관행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나라 공상의 큰 밑바탕은 멀리 연해주부터 대만까지 오가는 우리 재주 있는 백성들이 하나요, 넓지 않을지언정 소출은 느는 팔도의 옥토전답이 하나요, 개항 이래 인천과 재령 등지에서 그 위세 더해가는 공장이 또 하나인데, 이들은 비록 잠시 문을 닫았을지언정 그 뿌리가 남아있어 마치 겨울철에 망울 피울 준비하는 동백과 같습니다.”
그때 주상에게 예 갖추고서 어윤중이 반론하였다.
“지금 참판의 이르는 바가 일리 있고 또 정연하나, 놓친 부분이 있는 듯하여 좌중 논의에 첨언코자 하오.
이번 환난의 근원을 재고해보면, 부국(富國)할 방도를 남의 나라에서 구하면서, 거기에 스스로 머물러 더 나아가지 않음이 원인이었소. 지금 참판은 법국 세씨를 끌어왔는데, 반대로 나라에서 정사를 펼쳐 소산을 크게 늘리면 절로 소요도 늘어나는 것이오.”
“호판은 그리하면 무엇이 취할 만하다 보는가?”
“개략적으로 떠오르는 바를 감히 어설프게 아뢰자면, 비록 나라의 흥성함이 고금에 드문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 아직 천하 전체로 살피자면 미진함이 많습니다. 소신이 일전에 미리견 땅 거쳐 들어오는 전영의 청을 살핀바, 이룩하지 못한 기물의 법도가 아직도 나날이 창안되고 있고, 이미 있던 법도는 달마다 나아져 같은 사람과 같은 자재로 능히 더 많은 소득을 낼 수 있습니다.
비록 놀란 민심은 성상께서 친히 진정케 할 단초를 마련하셨다 하나, 이번 황란이 스스로 잦아들기를 기다린다면 몇 년이 더 필요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사이 굶주린 자를 진휼하고 두려워하는 자를 다독임에 안주한다면, 그만큼 우리는 시일을 잃는 것이요, 청국과 일본국은 우리를 따라올 것입니다.”
처음 안인수네 전등 문제가 불거졌을 시절부터 어윤중이 해왔던 생각이기도 하였다. 그때 이후 근 십오 년이 지났지만, 청국으로 건너가는 그 절묘한 자리 가운데에서 이익 얻는 것이 많았기에, 그나마 맥안공행이나 융비총국이 그 술기 익혀 스스로 따라잡는 데 근접한 것을 제하면 아직 공상의 주력으로 삼는 분야는 변함이 없었다.
“참판 이른 것과 같이, 아직 나라 살림살이의 근저는 상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이를 저당 삼아 다시 자금을 융통하여, 면필이나 인삼을 넘어 저들 대서 나라가 만드는 기물을 모두 능히 우리가 만들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먼저 만들고 저들이 우리를 따라하게끔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성상께서 간혹 이르셨던 기름 태워 절로 가는 수레 같은 기물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 마지막 줄만 이야기해도 귀남은 적극 찬동했을 것이었다.
“호판 제의한 바가 역시 나름의 온당함이 있으나, 지금 대서에서 융통한 자금은 모두 미리견 거쳐 절반 이상이 빠져나갔고, 아라사와 함께하던 아주개발은행 역시 대서 정국이 급변한 후 크게 미덥지 못합니다.”
“나라의 힘을 그러모으고, 필요하다면 다시 개항 직후에 그리하였던 것처럼 어떤 기기창을 세우고 무슨 술기를 배워 스스로 다룰 수 있게 하라 정령(政令) 세우면 불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홍종우가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참아보자는 신중론을 제기하였으나, 이미 어심의 향방은 명백하였다.
“두 사람의 의론이 공히 참 좋소. 그러나 지금 살피기로는 호판의 말이 조금 더 취할 만하오.”
아마 저의 본래 생에서 있었던 ‘그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의심하는 마음 들었는데, 이는 한구석으로 밀어놓고 귀남이 말을 이었다.
“생각건대 식산흥업을 나라의 장구지책으로 삼되, 단순히 기기창 따위를 몇 곳 짓는데 그치지 않게 하려면 분명히 어떤 업을 흥하게 하겠다, 이것을 조정에서 정하고 그 목표를 세워 선포하여야 할 것이오. 또한 나라의 추거는 사 년을 기한으로 하니, 그 부침에 따라 곧장 방향이 바뀌지 않도록 방책을 고쳐 정하는 기한은 오 년으로 함이 좋겠소.”
마음속 뜻을 내어놓기에 앞서 신중하게 여러 신료의 의견을 듣는 주상 – 실제로는, 스스로 생각해본들 좋은 방안이 절로 떠오르는 경우가 별로 없으므로 경청하는 것이었지만 – 께서 이리 단언하셨으니, 홍종우도 반대하는 뜻을 거두고, 별 생각 없던 말직 관원들은 상쾌한 바깥 공기를 마음속에 그리기 시작하였다.
“상께서 하유하신 바를 되새기니, 모두 이치에 합당하여 가히 국책으로 삼을 만합니다. 계획의 대강은 성심이 힘쓸 바가 아니라 하나, 혹 그 표제로 적당한 것이 있다면 청컨대 사여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좌장으로서 어윤중이 마무리 삼아 물었는데, 귀남 생각하기에 답은 너무나 자명하였다.
“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이라! 허사(虛辭) 없이 요체 모두 담았으니 어찌 절묘하지 않겠습니까. 효유하신 것과 같이 이번의 일은 비단 백년의 대계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놀란 민심을 다독이는 데도 그 뜻이 있는데, 표제가 이리 간명하니 그 밝은 뜻을 모르는 이가 팔도에 없을 것입니다.”
이 계획에서 주상 귀남이 한 일이라고는, 처음 홍종우가 발의한 것에 때맞추어 떠오른 이름을 즉흥적으로 붙여준 것 하나뿐이었다. 비록 뼈대만 있고 살점은 아직 붙지 않은 개략적인 계획이라지만, 어차피 대소 신료들 태반은 뼈대만 보아도 이것이 범인지 고양인지 알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눈에 들어오는 바는 제목 하나가 거의 전부라 해도 무방하였다.
그러므로 실제 계획을 행할 때라면 모를까, 지금 계획 초안을 발표하는 이 자리에서는 어윤중 이하 호조 사람들이 흘린 (코)피와 땀, 눈물을 모두 알아주는 이는 주상 한 사람, 잘 쳐도 어윤중과 친분 여전한 김윤식과 김홍집까지가 전부일 터였다.
아마 이 두 사람이 앞장서서 찬사 보냄은 그런 연유가 있을 것이었다.
“금번 황란으로 깨달은바 과연 화식(貨殖)의 일은 경세제민(經世濟民)과 맞닿았으니, 본업인 농(農)조차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를 추려 ‘경제’라 칭하니 참으로 명(名)과 실(實)이 맞닿습니다.”
‘에코노미(économie)’를 옮길 때 협소하게 ‘상무(商務)’라고도 하고, 이용후생 네 글자를 간추려 이후(利厚)라고도 하는 등, 정작 재무를 다루면서도 나라 전체의 먹고사는 것을 무어라 옮길지는 제각각이었다. 근래 멀리 한주학원을 시작으로 전문 삼아 배우는 이들은 이를 경제 두 글자로 옮기곤 하였고, 홍종우도 이를 따르고 있었는데, 정작 그 용어 널리 퍼뜨린 공은 귀남이 본의 아니게 채가게 된 셈이었다.
“또 개발(開發)로 말하자면 개화하고 발재(發財)함이니,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스스로 닫힌 것을 열고 없던 이익을 있게 함은 실로 군자가 스스로 이롭게 하는 도리입니다. 이미 아주개발은행 등으로 그러한 용례가 남았으니 뜻이 널리 통할 것입니다.”
이번 황란이 뼈저리게 모두에게 가르쳐준 것이 하나 있다면, 그 누구도 ‘곳간 차야 예절 알고 의식 족해야 영욕 안다 (倉廩實則知禮節 / 衣食足則知榮辱)’ 하는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다못해 초야의 선비들조차 저들 운영하던 학원과 서원이 후원 끊겨 존폐기로 놓이자 이를 깨달았으니, 물론 저 한 몸이야 계속 고고하게 지낼 수 있겠지만, 선비 아닌 사람을 선비로 만드는 것은 재화를 요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좋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통문처럼 각자 앞에 한 부씩 놓은 계획 대강을 살피던 김홍집의 눈에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다만 한가지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이 계획은 큰 자금을 요할 듯한데, 융통할 방도가 혹 있는지요?”
그 부분은 ‘어떻게 도원(김홍집)이 잘 해줄 것이다’ 하고 넘겼던 이가 바로 어윤중이었으니, 예상하였으나 바라지는 않았던 질문에 홍종우가 저의 상관을 간절히 쳐다보았다.
“흠흠. 그에 있어서는 결국 바깥에서 잠시 나랏빚을 들여와야 할 것입니다.”
나라가 빚 지는 것이 사실 금세의 상례이며, 더욱이 그 ‘자동차’ 같은 기물을 일찍 들여와 앞서나가기 위해서는 크게 자금 융통하여 처음부터 거하게 사업 벌림이 가당하다 하는 논리로 겨우 주상을 설복시켰는데, 거기까지가 어윤중 심력의 한계였다.
“허나 당장 우리 나라살림이 마뜩잖을 것이라 짐작하고 융통해준 자금을 모두 되돌리는 판국입니다. 결코 녹록지 않을 듯하니, 다른 계책이 없다면...”
결국 이 계획의 요체라면, 그간 (바닥에서 다시) 쌓아올린 조정에 대한 신뢰를 밑천 삼아 한동안 불황을 버티면서, 단기적으로는 핵심적인 산업을 위주로 먼저 기능을 복원하고 장기적으로는 유망한 쪽에 선제적으로 밑천을 댄다는 것이었는데, 결국 바깥에서 자금 들여오기가 시원치 않다면 첫단추도 제대로 끼우지 못하는 셈이었다.
사람 일손을 팔아 자금 마련하자니, 그 길은 조선이 스스로 청국 백성들을 바깥 나라에 두루 돌렸으므로 스스로 막았고, 그나마 아주 바깥에서 알아줄 만한 상품인 도자(陶磁)나 화포 등은 결코 큰 사업 일으킬 만한 수익 올릴 수 없을 것이었다.
귀남이 그때 끼어들어 어윤중의 곤란함을 해소해주었다.
“나라에 벗이 없지는 않잖소? 아라사와 법국과는 동맹까지 약조하였는데...”
“그러나 그들은 자강하여 구주 땅에서 세 높임에 바빠, 우리를 도울 여력 있다 한들 선뜻 돕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때, 궐석인 공조 공상참판(工商參判)을 대신하여 참여한 참의 하나가 일어나 제의하였다.
“삼가 한 가지 발의코자 합니다. 권도(權道)로 계교 쓸 때가 이 무렵이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우리를 도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늘 다툼의 소지 있는 구주와는 달리 우리 아주가 태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다툼을 만들어, 관계된 나라끼리만 이를 비밀로 삼으면 어떠할지요?
일본국은 마침 영국과 같은 편이니, 이 꾀에 함께 할 만합니다.”
귀남이 그의 이름 물으니 권재형(權在衡)으로, 일찍 두각 드러낸 이래 공조에서 이런저런 실무 맡아보던 이라 하였다.
귀남 태어나기 삼십일 년 전의 원 세상에서 그가 이름을 권중현(權重顯)으로 바꾸었고, 다시 그로부터 두 해 뒤에는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크게 나라에 해 끼치게 되었음을 알았더라면, 부득불 그런 계교라도 취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좌중의 논의를 이끌어가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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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중이 언급하는 것은 『논어』 <선진(先進)>에 나오는 장구로, 제자 자로의 악기 연주하는 솜씨를 공자가 비평한 말입니다 (子曰 由也升堂矣 / 未入於室也). 어느 정도 성취는 이루었지만 완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과 일본의 지원에 힘입은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베트남전 참전 급부로 막대한 차관을 들여올 수 있게 되었고, 미국이 베트남전 수렁에 빠진 이후로는 그 역할을 일본에 넘기면서 한-미-일 안보 분담체제가 완성되는 구조적 환경이 상당히 작용하였지요 (대표적으로는 신욱희(2019), 『한미일 삼각안보체제: 형성, 영향, 전환』 , 파주: 사회평론아카데미).
작중에서는 그런 변수가 작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본을 제공해줘야 할 미국도 덩달아 흔들리는 상황입니다. 고전경제학적 관점에서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홍종우의 신중론이 나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간에 언급되는 프랑스의 고전 경제학자 장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는 오늘날에는 흔히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세이의 법칙’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악의적인 요약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고전 경제학 이론이 불경기와 불황을 제대로 다룰 수 없음을 보이고자 다분히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생산 자체가 다른 생산으로 이어짐으로써 경제 전체를 활성화하고, 생산성을 높인다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습니다. 즉 이러한 건전한 생산활동이 유지될 수 있는 기반, 특히 금융 기반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요 (S. Horwitz (1997), ”Understanding Say’s Law of Markets.“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