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04화 (204/320)

67. 겨울밤 화롯가 (1)

한강이 언 것은 평년과 별반 다를 것 없건만, 사람의 마음 얼어붙기로는 훨씬 더하여서, 철모르는 꼬마들이나 간혹 빙판 위에서 썰매라도 타고 놀 뿐이요, 그마저도 평소에 비하면 활기가 덜하였다. 저들이 원하여 나왔다기보다는 집안에 불화 있어 도망나온 것일 테다.

개국 연호로 오백삼 년, 서력 1894년이 된지도 한 달 훌쩍 지났지만, 익숙하지 않은 이유도 있고, 또 이것이 다 저 놈의 양력 탓이다 하여 은근히 기피하는 경우도 있어, 다들 여기기로는 아직 세밑이라 하였다.

그러나 무어라 부르든 얼어붙은 경기가 풀리지는 않고, 원단(元旦) 맞이하면 세배들 다니며 만사형통이니 만사여의니 서로 운운하겠지만 이 겨울 매서움을 누그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일 것이었다.

“내 정초에는 포천 내려가려 하여서, 지금 세배 갈음하여 모두 길운 있으라 빌겠소.”

이제는 창호 밖에 보이는 목멱산처럼 흰머리 희끗한 최익현이 이 회동의 서두를 떼었다. 총리직 내려놓고 딱히 참의대부로도 나서지 않았으나, 자유당 영수 자리는 앞으로 적어도 십 년은 더 해야 할 것이라 모두가 믿었으므로 이 자리에 임함에도 한결 어색함이 없었다.

“예, 대감께서도 올 한 해 대길하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대수(大數) 맞기를 기원드립니다, 대감.”

그에 비하면 아직은 젊은 축에 드는 김옥균과 전봉준이 덕담으로 가볍게 응대하였다.

“이렇게 세 당의 거두가 모였으니, 대서 나라 하는 대로라면 섭영사 데려와 정경 담기도 하고, 다음날 신보에도 내고 하였을 텐데요, 때늦은 아쉬움입니다.”

박정양이 당에 누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며, 낙선 후 개화당 영수 자리를 공식적으로 내려놓으면서 그 자리에 올라선 김옥균이 농 삼아 말을 꺼냈다.

“겉치레가 중한 자리는 아니므로 삼가는 것이 좋겠구려.”

점잖게 사양하는 최익현에게 전봉준이 소리 없이 찬동하는데, 만일 이 모습을 누군가 정말 찍었더라면 기세 오른 한 사람과 억눌린 두 사람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 기세의 억양(抑揚)은 작년 가을부터 시작한 이번 전란(錢亂), 아니, 새로 쓰이기 시작한 말로 황란(慌亂, 공황) 이후의 시세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사람의 첫 생각은 빠져나갈 길 구하는 것이요, 그 다음으로 드는 것은 대관절 누구의 허물로 인하여 이리 괴로움을 당하는가 원망할 사람 찾는 생각이다.

이번 황란으로 말하자면, 이미 만사휴의(萬事休矣)인즉 빠져나갈 길이라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데, 원망할 사람은 조선 팔도에 차고도 넘쳤다.

싸게 들여오는 잡곡만 믿고 농사 폐하고서 공장에 일자리 찾아 왔는데, 그 공장이 문을 닫았으니 이는 악덕하고 저만 아는 공장주의 잘못이요, 말로는 일하는 사람들 편이라면서 수수방관하는 공산당의 잘못이었다.

소소하게 시골서 전답 부쳐먹으며 지내던 중, 이자 후하게 쳐 준다는 말 듣고 새로 생긴 은행인지 금행인지에 평생 아끼고 아껴 그러모은 가산 가져다 맡겼더니, 그 증표로 받은 종잇장으로 벽지 도배나 해야 할 판이 되었으니 이는 미리 규제하지 않은 조정의 잘못이었다.

여기저기서 농토 처분하고 상경하는 이웃들을 보고서, 이때를 만나 저도 천석꾼이나 되어보자 하며 빚 내어 논 사들이고 재령 쇠로 만든 농기구까지 들여왔는데, 소출은 많아도 정작 그것을 사갈 이들이 없어졌으니 아마 그 총리라는 자 잘못일 터였다.

“민심 여차하니 당색을 넘어 오직 나랏일 도울 마음을 모음이 가당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남의 나라에서 이렇게 경제위기 맞게 된다면 자본주의의 종착이라 여기겠지만, 아직 그 경제가 여물지도 않은 나라에 이처럼 시련 닥치니 차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던 전봉준이 거들었다.

“무릇 국난을 당하게 되면 가장 고통받는 것은 민려(民黎)의 가운데지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 논쟁을 그치자니 이미 우리들 손을 벗어난 것 같다, 그 말씀 하시려는 것인지요.”

“마음을 읽으셨군요.”

김옥균이 끼어들어 말을 끊는데, 말투 나긋할지언정 동정하는 언사는 아니었다.

“그렇지요. 머릿수로 따지자면 여염집 백성이 가장 많이 괴로움을 겪고 있겠지만, 손해 본 크기로 따지면 벌열가에 비하겠습니까.”

아침에 문만 열면 땅 꺼뜨릴 기세인 식주 매매를 보고, 비로소 말업(末業) 공상(工商)의 폐해 드러났다 주장하며 식주공행 문을 아예 한동안 걸어잠그자 한 것은 자유당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더 큰 화를 불러왔으니, 아직 공회에 나서지 않은 세도가들 사업이야말로 큰돈 굴릴 기회라 여기며 막대한 자금을 융통해준 해외의 전주(錢主)들이 저런 극단적 조치를 고작 한 달 만에 내리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저들 모르는 더 큰 사정이 있으리라 여기면서 자금줄을 동여매고 이미 내어준 빚은 더는 기일 연장하지 않겠다 통보하였다.

그나마 한강 다리 놓는 일로 일거리 남아 사정 낫다는 장동 김문의 광통이도국조차, 김병국의 소위 혜안으로 말미암아 강철과 양회(洋灰)로 고대광실(高臺廣室) 짓기 위해 이런저런 설비와 술기 들여오느라 차입한 빚이 적지 않았다.

하물며 다른 거족들은 어떻겠는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나 그대로 문중 무너지게 생겼으니 삼수의 옥(三手獄, 임인옥사)보다 참혹하다는 말이 행랑 사이에 나돌고, 그것이 몇 달 계속되니 끝내 분사하는 이도 나왔다.

그것이 부풀려져, 모 문중의 아무개 어르신이 안인수네 – 여기도 맥씨 통해 들여온 미국 쪽 자금이 싹 빠져나갔기에, 썩 여유롭지는 못하였다 – 에 조금 도와달라 염치불구하고 찾아갔더니 문전박대하기에, 끝내 집에 돌아오자마자 목을 맸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으니 거족과 여항의 민심 공히 흉흉함을 능히 알 수 있었다.

“면암 대감께서 이 회동을 제의하시고 여기 해몽(전봉준)도 동의한 것은, 아마 이로써 저희 개화당으로 하여금 참의원에서 다른 두 당 비난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 않다고는 못 하겠군요.”

단도직입으로 물으니 최익현은 침묵하고 이번에는 대신 전봉준이 답하였는데, 이어지는 은근한 고발에 다시 전봉준도 할 말이 없어졌다.

“허나 거족들이 사업을 방만하게 운영하여 국난에 한몫하였다 주장하는 대부들이 먼저 있지 않았습니까. 속담에도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 하였던가요.”

“그것은... 우리가 단속하지 못한 것이 맞네. 허나 나라의 어려움을 맞이하여 이제 모두 화약 맺고 오직 사태 수습할 생각만 함이 가당하지 않겠는가.”

“두 분 앞이니 가감 없이 토로하자면, 이번 일은 개화당에는 절호의 기회가 맞습니다. 금번 사태가 비록 청국 변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지만, 어찌 되었건 그 기저는 면암 대감께서 영규(영의정)의 직을 맡으시고 공산당이 참의원에서 세 얻었을 때 깔린 것이니, 어설픈 눈으로 보기에는 잘잘못이 명확하지요.”

만백성을 선비로 만들겠다, 무산자 계급투쟁을 이끌어내겠다 운운하던 것이 졸지에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게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 애초에 공산당도, 자유당도 그것을 알았기에, 면피하고자 참의원에서 섣부른 계책을 남발하였고, 사태가 더욱 가중되어 여기에 이른 것이었다.

“저 기회를 남김없이 취한다면 어찌 못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리 되었다가는 더욱 정국을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을 알기에, 저 역시 당인(黨人)으로 하여금 자제케 하고 있습니다. 다 같은 단군의 후예요, 나라의 백성이다... 그러니 불우(不虞)의 변 당한 이웃을 십시일반으로 돕자. 제가 직접 지어서 게재한 글인데, 보셨는지 모르겠군요.”

“물론 보았소이다. 상부상조는 향약의 기틀인데 그것을 우리가 미리 행하지 못하였으니, 고맙고도 무안한 일이오.”

“그런데도 참의원에서 서로 비난하는 말이 비등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 보아야 하겠습니까. 이미 이치로 따져서 될 판은 아닙니다.”

“그래도 방도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봉준의 딴지에는 힘이 영 없었다.

“방도가 있기는 하지요. 우리 안에서 탓할 이를 구하지 않으려면, 나라 밖에서 구하면 됩니다. 사실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이 사태는 오직 청국의 변법이 잘못이니, 우리가 옆에서 그리 도왔음에도 결국 비수를 찔렀다... 지금 같으면 충분히 만백성의 호응을 얻을 수 있겠지요. 그리 됨을 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옛날 같았더라면 김옥균도 이 말을 진지하게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사세로 따지자면 적어도 총리대신과 참의원을 모두 따내고 상감까지 설복케 할 이론을 가다듬은 뒤에 내어야 할 말이요, 도의로 따져도 전쟁으로 일어서지 않은 나라를 전쟁으로 이끌어 살려내려는 것은, 그 비용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인바 아직은 국익에 맞지 않았다.

“맞게 보았소. 우선 우리 안에서 해결할 길을 구해보아야지.”

“그렇다면 적어도 저는 더 떠올려 바칠 계책이 없습니다.”

과연 그 이후로도 계속 논의해 보았지만, 각 당의 이득을 헤아리지 않더라도 도저히 뾰족한 수는 없는 것이었다.

공상에 힘써 이익 얻어온 개화당 입장에서는, 당론상으로도 다른 두 당을 공박할 수밖에 없었으며, 당리까지 따지게 되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 당쟁을 삼가자니, 이미 누군가 싸잡아 매도하고픈 민심이 가득한 판국이었으므로 그들 셋이 삼가자 하여 막을 수 있는 다툼이 아니었다.

“후... 섭영 찍을 이를 데려오지 않음이 천행이었구려. 이리 회동하였는데 얻은 수가 없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리까.”

최익현의 한탄에 전봉준은 씁쓸히 동조하고, 그나마 사세로 이익 보는 축에 드는 김옥균도 고소(苦笑) 금할 수 없었다.

딱히 보태줄 것은 없어도, 나라 임금으로서 백성 가난한 일은 마음 안 쓸 수 없기에, 귀남은 이번 황란의 대책 마련하는 회의 할 때마다 친람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보니 아예 육조거리 호조 아문 대신 궐내에 호조와 공조, 예조의 실무자들 모아놓고 대책을 궁리하게 되었는데, 일 터지고 몇 달 동안 참의원 발의하는 일대로 하면 모두 성과가 즉 공(空)이요, 저들끼리 고심하여 방책 내어놓으면 그 역시 효험이 없었다.

그 사이에 귀남 끼어들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그 역시 차마 묘수라 할 수는 없었다. 하루는 그렇게 공으로 끝난 회의 마치고, 경무대 나와 동십자각(東十字閣)에 올랐다. (누군가 우르르 오기에 금군의 군기 살피러 어떤 대감이 오시는가 생각하던 망루 위의 군교와 병졸들은 갑자기 닥친 큰일에 마음만 졸이고 있었다.)

망루치고 그리 높지 않은 십자각이지만, 경복궁은 경무대 하나 빼면 끽해야 경회루가 높은 건물의 축에 들고, 궁궐 인근의 오래 묵은 저자에는 저쪽 운현궁 옆에 세운 양관처럼 높아도 이삼층이니, 눈 내린 도성 정취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환경 중하다 얘기해도 정작 왜 그것이 중한지는 설명할 수 없는 귀남이요, 신작로 내기 전 거리에 진동하던 분변의 악취에 비하면 매연이 훨씬 낫다 생각하는 신료들이었기에, 지금처럼 하얗게 눈 쌓인 도성의 모습은 새삼스레 색다른 멋이 있었다.

그러나 보는 사람 마음 심란하니, 그 순백도 창백하게 보일 뿐. 겨울바람 휭 불어가는데, 그 결 타고 들려오는 것은 무정한 철새 우짖음인가, 아니면 또 때이르게 명줄 끊어진 이 애도하는 곡소리인가.

“근래 국사에 어려움이 적잖다 하나, 어찌 옥체의 중함만 하겠습니까. 부디 보중하시옵소서.”

이제 청년 티 나는 저 목소리는 세자일 것이다.

“녀석, 아비가 되어서 어린것 옆에 있어주지는 못할망정 여기는 무슨 일이더냐.”

이 어려운 시국에 무사히 세자빈이 군주(郡主, 세자의 적녀)를 해산하여 세자도 한 사람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귀남은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이라 이왕이면 아들이면 좋았으려니 싶어 하면서도, 전생에는 연 없던 손녀딸이 퍽 귀여웠다.

아들만 셋이라 여염집 기준으로는 무슨 비법으로 그리 점지 받았느냐며 부럼 살 중전도 손녀를 귀히 여기고, 신료들은 또 그들 나름의 궁리로, 한편으로는 국경(國慶)이었으면 더 좋았겠거려니 하면서도 그로 인해 세자가 군문에 드는 것이 재차 연기된바 비상한 시국에 근심이 줄었다고 여기곤 하였다.

“아바마마께서 근래 침식을 잊고 이번 황란의 대처에 온 성심을 기울이신다 들었습니다. 이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무엇을 우려하겠습니까.”

아마 저 비슷한 말로, 세자 주변의 내관들끼리 수군대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 걱정에 어린 군주 옆을 떠나 궁 가장자리 여기까지 왔으니, 한편으로는 기특하면서도 문득 짖궂은 마음이 들었다.

“세자빈이 들으면 무어라 할까 궁금하구나.”

“그것이...”

“되었다. 어차피 며늘아기 모르게 나온 것도 아닐 테니.”

반쯤 농담으로 던졌는데 의외로 깊이 박혔는지, 세자의 순박한 얼굴에 근심이 또 어렸다.

처음에는 그저 세자 본인처럼 순하디 순하기만 할 줄 알았던 세자빈은 의외로 살 맞닿는 범위 내에서는 앙칼지다 할 만큼 야무졌으니, 중전 통해 들려오는 말로도 궁합은 잘 맞되 한쪽이 이미 지극히 귀한 몸이 아니었더라면 고충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자 본인이 간택 아닌 간택에 끼어들어 고른 상대이니 세자 본인 팔자 외에 무엇을 탓할까.

말문 막혀 대화의 맥이 끊어진 사이 귀남이 입을 다시 열었다. 잠시 가벼워졌던 분위기는 다시 눈 한껏 내릴 양 하늘 덮은 구름처럼 진중해졌다.

“설경은 참 좋구나.”

정말 눈 내린 모습 보고서 한 말이 아님을 알 만큼은 성숙한 세자였기에, 귀남의 찬탄이 실은 한탄임을 알았다.

“내 저자에서 장사할 때, 살림 어려워 고생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땟국물만 흐르지 않으면 신수 좋다 여기던 동란 직후는 물론이요, 저기 중동인가에서 이씨 나라끼리 전쟁 나서 기름값이 마구 요동치던 시절 (제2차 오일쇼크), 그리고 부자 나라 다 되었다 자부하던 갑자기 터진 아엠에푸까지,

사람이 밥 먹고 사는 것은 못 줄여도 길거리 군밤은 언제든 끊을 수 있는 법인데, 정작 큰 불황 닥치면 저는 굶더라도 저녁에 돌아갈 때 아이들 주전부리는 챙겨서 들어가는 불경기 고객이 종종 있었기에 그 심리를 익히 아는 귀남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십자각 아래로 저기 북촌부터 구름재, 광통교 언저리까지 보이는데, 그 길 오가는 사람들 걸음걸이 보면 딱 그때와 같았다.

물론 그런 사정 꿈에도 모를 세자는, 그 옛날 국운 기울기가 극에 달했다는 임술년에 부왕께서 효자밤 팔던 얘기인 줄만 알았지만.

“그들 말하기를 ‘가난이 죄라’ 하는데, 정말 그리 여김이겠느냐. 허물이 있다면 내 한 사람 허물일 테다.”

나라가 내일모레 망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모두 잘 살게 해주고픈 마음은 변함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래서 나름대로 옛적 기억 되살려 이런저런 이야기 꺼내면, 다들 잘 어울려주며 거기에 살 붙여 정책으로 만들고, 그것이 다시 어찌 잘 풀리곤 하였는데, 이번에는 또 그렇지 않았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비록 견식 넓지 않으나, 이번 황란을 두고 여러 조정 신료들 의론을 들은바 이는 결코 누구의 잘못도 아니요, 나라 안팎 백성들이 대경(大驚)하여 황망하고도 두려운 마음 품은 데서 말미암았다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호조 관원들을 만나고 온 모양이로구나.”

아마 그랬으니 자신이 곧장 이리 향함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바로 방금 전, 비장의 수로 그가 이야기한 금모으기 운동에 난색을 표하면서 어윤중이 한 이야기를 추려서 읊는 것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어윤중이 말하기를,

‘나라와 백성의 도의를 제하고 논하더라도 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신 등이 지난 몇 달간 면밀히 살핀바, 이번 황란은 비록 화근이 여러 해 동안 묻혀있기는 하였으나, 지금 보이는 것과 같이 큰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운을 떼니, ‘그러면 어찌하여 이리 되었단 말인가?’하는 하문에 곧장 옆의 홍종우가 합세하였다.

‘이때를 빌어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감히 아뢰고자 합니다. 나라의 문호를 열고 공상의 업을 크게 진흥한 이래, 나라의 경제(經濟)하는 일은 그 법도를 대개 서양에서 따왔으니, 이는 영국의 수씨(애덤 스미스) 등이 모두 밝힌 이치입니다.

그 법도에 따르면, 물산의 값과 백성의 빈부를 모두 오직 스스로 그리 되도록 맡김이 길게 보아 모두에게 이익이 됩니다. 이번 일로 말하자면, 비록 작게는 청국의 일에서 말미암았으나, 크게 보면 능히 다른 길을 취할 수 있음에도 오직 청국에 면포 등을 파는 것으로 이익을 영위하려 한 탓입니다. 허나 이를 계기 삼아 새로운 술기 익히고 교역하는 폭을 넓히게 될 것이므로 반드시 난(亂)이라고만 일컬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어디 책상물림이 함부로 그리 가난을 말하느냐 면박을 주었지만, 태생으로 따지면 저보다 기구하다 해야 할 홍종우요, 식화로써 경세제민하는 이치는 나라 안에서 어쩌면 가장 통달하였을 사람이 또 홍종우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리 되었다는 말인가? 벌열과 여염을 막론하고 모두 수심 가득한 것은 어째서인가?’

‘오직 잠시의 황망함에 눈길이 쏠려, 그 마음의 가운데를 잃어버린 탓입니다. 그러므로 세인이 적절히 이름붙이기를 황(慌)이라 한 것입니다.’

‘하면 한 번 치우친 그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다면 어찌하여야 하는가?’

‘조금 더 기다리면 어찌 그런 놀라고 두려워하는 일시의 마음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밤중에 독행(獨行)하던 중 잠시 귀신의 형체를 보고 흠칫 놀랐다가, 다시 살펴 그것이 나무에 달빛 비친 것임을 알게 되면 두려움 없이 길을 재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이야기는, 어찌하면 그런 두려움 없이 떠나가려는 바다 건너 자본 – 듣기로 미리견 땅에서도 비슷하게 자금이 막혀 여러 은행이 문을 닫고 일 잃은 무리가 급증하고 있다 하였다 – 을 붙잡아두고, 몇 년 사이 난립한 국내의 은행 중 아직 버티고 있는 그나마 규모 되는 곳들을 어찌 통솔할 것인가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치에 닿는 계책이 이치 따위 모르는 놀란 마음에 얼마나 효험 거두겠는가. 지난 몇 달으로 능히 증언할 수 있는바, 별 효력은 없었다. 어쩌면 고작 몇 달이 지났기에, 정말 어윤중 이하 신료들 말대로 조금 더 기다릴 필요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초조한 마음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소자 듣기로도 사람의 마음은 평소의 어진 행실로 흥기하고 또 억누를 수는 있어도, 마치 말 몰듯 작정하고 몰고 갈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이미 베푸신 성덕이 태산과 같으니, 믿고 기다리면 반드시 공효 거둘 것입니다.”

“허허, 세자가 언제 이리 장성하였는가.”

설복되지는 않았지만, 아비 걱정하여 이리 찾아와, 나름대로 설득하려 노력하는 것이 기특하였다.

“다만 내려가기 전 이 군사들에게 무어라도 사여하고 가야겠다. 나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느냐. 날 풀렸다지만 아직 겨울일진대 그리 부동하고 있으니 어찌 손발이 시렵지 않을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부복하였다.

“지금 수라간에 내줄 수 있는 주전부리가 무엇 있는가.”

옆의 내관에게 물었는데, 황송하게 고개 숙이며 아뢰기를,

“일찍이 금번 황란 그칠 때까지는 과자 등을 함부로 내지 말라 하신 어지 받든바, 미리 준비된 것이 없사옵나이다.”

그렇다고 비단 따위만 내리고 그치자니, 귀남 본인도 그 옛날 초소에서 근무 설 때 느낀 것이지만 마음만 따뜻해진다고 얼어붙은 손발이 절로 함께 따스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불현듯 그때 떠오르기를,

“등잔 밑이 어둡다 하였던가. 내 이런 방편 있음을 잊고 있었구나!”

하였다.

“간만에 솜씨 부려 보겠구나. 화로와 밤을 대령할지어다.”

패기 넘치는 신료들은 과감히 어제 군밤을 사양하기도 한다지만, 가까이서 귀남 모시는 이들 입장에서는 사양한 뒤의 탈이 또 없지 않아서, 강권하면 곧장 받아서 드는 것을 상례로 삼고 있었다. 그들마저 사양한다면 일국의 국왕이 직접 밤을 굽겠다 한 그 뜻을 받들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핑계였는데, 정말 충심에서 나온 것인지, 나이 많은 상선과 상궁들의 욕심에서 나온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욕심으로 가장한 충심인지는 당사자 외에는 모를 것이었다.

끝내 만류하려던 세자도, 잘 구워진 것 몇 톨을 입에 미리 물려주었더니 더 군말을 붙이지 못하였다. 그나마 외풍 맞으면서 굽게끔 하였다가는 그야말로 옥체에 누 미칠 것이라, 십자각 아래로 내려가 옆의 행랑 치우고 거기 앉아 굽기로 하였다.

그랬는데 세자가 낼름한 것 바로 다음의 군밤을 들고서 십자각 다녀온 내관이, 빈 쟁반 대신 이야깃거리를 들고 왔다.

“전하, 신이 어제하신 군밤을 군교 장 모와 그 아래 군졸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누각 아래에서 누군가 무엄한 말로 외치기에, 금군이 나서서 살피고 있나이다.”

“무엄한 말이라? 그리만 이르면 내 어찌 전말을 알 수 있겠느냐. 기탄없이 털어놓으라.”

몇 번 주저하더니, 끝내 밝혔다.

“그, 이르기를 ‘너희만 입이냐’하였습니다. 필히 심신 온전하지 못한 자의 난언일지니, 청컨대 마음에 두지 마시옵소서.”

“아니, 그 말이 옳다. 가뜩이나 매서운 겨울인데, 우리만 맛나게 먹어서 되겠느냐. 내 몇 톨 더 구울 테니, 그 백성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고서 슬슬 돌아가려는데, 얼마 후 다시 내관이 달려와 이렇게 이르는 것이 아닌가.

“저, 전하. 앞서 그 백성에게 군밤을 내려주었는데, 내막을 듣고서는 지금 광화문 앞에 나아와 부복하고 죄를 청하고 있습니다.”

“거, 담이 작구나. 무어 죄를 청할 것까지 있단 말이더냐.”

마침 일정도 비었겠다, 팍팍한 시국에 사람 하나쯤 기분 좋은 일 있으면 그 또한 나쁘지 않으리라 여기며, 무심히 광화문 행차하는 귀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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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1893년 공황이 조선에도 닥치고 말았습니다. 본래는 이전에 잠시 언급하였던 아르헨티나의 쿠데타와 그 외 여러 요인이 겹쳐 미국에서 촉발된 금융 공황이었는데, 신흥국 리스크가 커지면서 보다 안전한 자산(은)으로 옮기려던 유럽 자본들로 인해 금융시장에 패닉이 발생하고, 공격적이고 방만한 투자를 하던 여러 철도회사들이 연이어 도산하면서 일이 커지게 되었지요. 대략 만 3년 동안 지속된 공황 기간 중 미국 내에서 파산한 은행만 500여 곳에 달했으며, 기업 전체로는 약 1만 5천여 업체가 문을 닫았습니다. 가장 타격을 심하게 입은 주였던 미시간의 실업률은 43%에 달했다고 합니다.

원 역사의 조선도 많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개화기 동안 적잖은 금융 파란을 겪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외부의 금융 때문이 아니라 자체적인 정치적 불안정으로 말미암은 것이 다르지요. 대원군의 당백전 발행부터 임오군란 후의 당오전, 갑오개혁기의 백동화 등 악화가 남발되면서, 기반이 취약했을지언정 아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던 개화기 상공업을 붕괴에 이르게 하는 한 가지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지나가듯 언급되는 ‘삼수옥’이란, 경종 연간의 임인옥사(1722)를 말합니다. 세도가 대부분의 조상뻘인 노론의 거두들이 삼수, 즉 세 가지 흉수(칼, 독, 모반)로써 경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고변을 하면서 촉발되었기에 ‘삼수의 옥’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경종 즉위 후 있었던 신축환국(1721)과 더불어 ‘신임옥사’, 혹은 ‘신임사화(노론 쪽의 입장이 반영된 명칭입니다.)’로 부르기도 합니다.

궁궐(宮闕)의 ‘궐(闕)’이란 본디 정문 양옆의 높은 망루를 이르는데, 그것이 담장과 망루 등 경비시설의 명칭으로, 나아가 그것으로 경비하는 궁 자체를 이르는 말로 점차 의미가 확대되었지요. 이는 경복궁 역시 마찬가지로, 지금의 광화문 양 옆 모서리에 경비하는 망루 동·서십자각이 있었습니다.

이후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전차 노선을 증축하면서 철거되었고, 동십자각은 궁장(宮牆)이 철거된 뒤에도 남아 있었지만, 이후 경복궁을 재건할 때 궁장이 축소 및 일부 이전된 채 복원되면서 지금도 궁궐의 일부가 되지 못한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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