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00화 (200/320)

66. 천하의 대세 (1)

자의원과 자정원을 두고, 골칫거리 서태후까지 그리 보내버린 지금, 만일 어떤 간 큰 기자 있어 황제 자이티얀에게 한 가지 좋은 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로 황제 노릇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노라 답할 것이었다.

물론 그 황제 노릇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금성 안쪽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요, 엄밀히 말하면 자이티얀이 노려서 그리 되었다기보다는 천하의 대세 논하는 곳이 천안문 안팎에 고루 흩어졌기 때문이었지만, 그 옛날 고독하던 시절 잊지 않은 자이티얀으로서는 딱히 불만은 없었다.

덕분에 요새는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예컨대 영국인 자일즈(Herbert Giles)를 교사로 초빙해 – 태생이 서생인지, 궁 안의 서적들을 열람케 해주겠다 제의하니 급료는 묻지도 않고 곧장 저 있던 영국 공관에 사직서를 냈다 들었다 – 영어 배우는 일이라던지, 마찬가지로 바깥의 서양 사내들을 궁 안에 들여 황비 타타라씨로 하여금 좋아하는 섭영술(사진술)을 배우게 한다던지 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소싯적에는 꿈속의 꿈이었던 호사를 누리는 셈인데, 그의 표정이 밝으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근심이 많으신 듯합니다, 폐하.”

언제 다가왔는지, 귓가에 젊은 황비 목소리 들려와, 상념에서 깨었다.

“그리 겉으로 드러났소?”

“근 반 각을 옆에 서 있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시니, 감히 기색을 직접 살피지 않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물증은 차고 넘쳤으니, 사람 입에 봄기운 전하지 못하고 쓸쓸히 식어가는 찻잔이 하나요, 탁상 위에 놓인 북경과 한양, 상해발 신보가 또 하나요, 어제 조선에 있는 흠차대신 옌창이 보내온 장계가 또 하나였다.

“섭영을 보여주러 왔소?”

“그렇습니다. 지난 겨울에는 미숙하여 설경을 찍지 못하였으나, 경산(景山, 자금성 뒤편 인공산)에 찾아온 봄은 담을 수 있었답니다.”

얼핏 보았더니 뭔가 달랐다.

“허, 빛깔이 있구려. 덧칠한 것이오?”

“아, 지난 겨울에 조선에서 찾아온 양인 고씨가 헌상한 것인데, 섭영을 찍을 때 물체의 색을 따로 잡아내어 후에 합치는 기법입니다. 빛의 세 원색(原色)을 구분하여...”

운을 뗀 황비가 저에게는 그저 머나먼 소리인 그 ‘과학’ 이론을 줄줄 늘어놓았다. (문득 그 옛날 서태후가, ‘궁중에 총명한 여인은 하나면 족하다’ 했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제 발로 출궁한 셈이라지만, 만일 둘이 함께 자금성 안에 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궁금은 해도 그리 알고 싶지는 않았다.)

“... 하여 알록달록한 봄꽃을 모두 고스란히 살려 담았답니다.”

“그대가 좋아하니 나 또한 좋소.”

그러나 그 말에 실린 마음이 가벼운 탓이었을까. 은근히 토를 달았다.

“폐하, 신첩이 이 섭영을 좋아하는 연유를 언제고 말씀 올린 적이 있던지요.”

“없던 듯하오.”

“그림은 사람이 그리는 것이니 재주에 따라 같은 물건이 다르게 둔갑하기도 하지만, 이 섭영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찍을 때마다, 빛에 따라, 찍는 방향에 따라 정취가 완전히 달라지니 어찌 묘하지 않습니까.

감히 짧은 식견으로 생각하건대, 아마 세상의 일도 크게 보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뜻대로 되지 않아 갑갑한 것도, 또 다르게 보면 뜻이 크게 이뤄지는 길의 한 목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셈입니다.”

아직 나이 스물도 되지 않은 – 물론 그리 따지면 자이티얀 본인도 겨우 스물을 넘겼지만 – 황비가 또박또박 그 뜻을 털어놓으니,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차마 참고 넘기다 보면 절로 해결될 만한 일이 아니라는 저의 생각을 대꾸에 싣지 못하였다.

다행인지 아닌지, 시위하던 내시 – 서태후가 스스로 출궁한 이래 부쩍 ‘황상에 대한 일편단심’을 고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였다 – 가 최대한 점잖게 아뢰기를,

“폐하, 조선국 공사로 하여금 대시(待時)케 하겠사옵나이다.”

하니, 즉 은근히 저의 일정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아니, 그럴 것 없다. 그 나라가 근래 추거 치루어 내 하문할 바가 많으니, 어찌 미루겠느냐.”

“예, 폐하, 송 모(송헌빈宋憲斌)로 하여금 들라 전하겠나이다.”

“나 또한 곧 가겠느니라.”

황비에게는 적당히 얼버무리고서 나아가니, 몸은 움직이나 마음은 그대로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타타라씨(황비) 말대로, 섭영이라는 기물로 세상을 보면 같은 문물도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형편없게 보이기도 하는 것인데, 지금 자이티얀의 어깨 위에 있는 다이칭 구룬 사직의 모양새는 어째 후자가 그 진상에 가까운 듯하였다.

참으로 기이한 천하였다. 한편으로는 광서 연간이 곧 강건(康健, 강희~건륭 연간)의 대와 나란히 회고되지 않겠느냐며 섣부른 말이 들려왔는데, 희망 가득할지언정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끝내 작년에 조선과 손잡고서 함께 옛 성현의 자취를 찾아보자 하였는데, 하필 시작부터 나온 것이 옛날 고려국(고구려) 대왕이 압록강 너머에 세운 큼직한 비석(광개토왕릉비)이라, 만에 하나 조선에서 뭐라 난언(亂言) 꺼내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곧장 이어서 왕의용(王懿榮)이라는 중원 서생이 하남성 안양(安陽)에서 기이한 문양 새겨진 뼈를 찾아냈다.

혼자 고민했더라면 이것이 그림인지, 스스로 새겨진 무늬인지 잠시나마 고심했겠지만, 성현 기자의 발자취 찾는데 눈이 벌게져 있던 조선 선비 몇몇이 토를 달기를, 『예기』에 이르기를 ‘점을 친 거북 껍질이 낡으면 땅에 묻는다(龜策弊則埋之)’한 것이 혹시 이것 아니겠느냐 캐물었고, 고증과 금석학에 능통한 왕씨 서생이 다시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금문(金文)과도 그 자체(字體)가 닮았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직 파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이 ‘갑골(甲骨)’이 수두룩하게 나왔고, 벌써부터 세간에서는 그 땅을 ‘은허(殷墟)’라 부르고 있었다. (그 소동으로 인해 멀리 둔황 어느 굴에서 유물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끝내 묻히고야 말았지만, 중원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서양 문물을 배워서 개화 이루자 운운하는 자들이라도 조금 연로한 이들은 천생이 유학자라, 곧장 공공연히 칭송하기를,

“아아, 성현 모신 곡부(曲阜)에 만방의 후학이 모두 모였는데, 삼천 명으로 시작하여 이제 억만(億萬)에 달하였으니 사문(斯文)의 창성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난 삼천 년을 내리 묻혀 있던 삼대(三代, 하·은·주)의 유허(遺墟)가 다시 드러났으니, 이 모든 일이 불과 삼 년 사이 일어남은 필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잠시 흔들림이 있었으나, 저 하늘이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습니까?”

하곤 하였는데, 자이티얀이 보기에 지독한 역설은, 바로 그 상서로운 징조를 운운하며 대청의 무궁한 광영을 입에 담는 이들이 바로 그 대청을 갈라놓는 언설을 함께 내놓고 있다는 데 있었다.

“나라의 힘은 백성에 있으니 천조도 그 이치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백성의 힘은 배움에 있으니 화이(華夷)의 차이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같은 대청의 백성으로 아직 학문을 벗삼지 않는 무리가 외번(外藩)에 있는데, 중원과 그 사람이 다를지언정 문풍(文風)만은 일치케 하여야 비로소 참으로 같은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면서 가뜩이나 근래 불만 많은 자정원의 티베트와 몽골 왕공들을 쿡쿡 찌르는 언사를 내놓고,

“살피건대, 일전의 난민들이 ‘땅과 일’을 외친 것은 참으로 그 뜻이 얕은 듯하나 깊습니다. 그런데 신이 듣기로 근래 동삼성과 바다 건너 북해도국은 모두 본디 그 땅이 척박하여 농경이 어렵다 하였으나 한 번 손을 대니 천하의 옥토가 되었다 합니다. 즉 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도 놀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 백성으로 소출 없는 이들이 간혹 바다 밖으로 나가고 있는데, 저 감숙(甘肅)이나 청해(靑海)에 아직 힘써 일궈보지도 않고 황지(荒地)로 치부되는 땅이 많거늘 어찌 아깝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말은 그럴듯해도 결국 저들 땅을 내놓기 싫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 처음 강유위가 변법(變法)으로 자강(自强)하자 외치던 것에 빌붙어, 우리네도 변법 하겠다며 이렇게 물을 흐리는데, 서태후야 사실 아랫사람들 사정 어찌 되든 저의 힘과 재산이 되면 그만이라, 그것이 민심 얻은 것이라 여기고 이러한 세간의 추이에 은근히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거기에 군함이나 총포 사들일 여력이 있으면 얼른 조선이나 일본국처럼 식산흥업하여 인천목을 막아내자 하는 목소리 나오니 흠정당에 발 걸친 북양군 인사들은 눈꼬리 치뜨고, 처음 저들이 내걸던 뜻이 어느새 묻혀버린 데 불만 품은 국민당의 젊은이들도 당 안에서 소란 일으키고, 하여 어지럽기 그지없었으니, 같은 사물이라도 찍기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섭영의 이치가 어찌 여기에도 맞지 않겠는가.

상념 그치고 용상에 앉으니, 곧 조선국 공사가 들어와 문안인사를 올렸다. 아직 사람 보는 눈이 제대로 개안하였다 할 수는 없는 자이티얀이 보기에도 썩 비범한 위인은 아닌 듯하였으므로, 긴장의 끈을 살짝은 내려놓았다.

“... 그대 나라에서 이처럼 추거의 법도를 시행하여 널리 모범이 되고 있으니, 대국으로서 참으로 고마운 일이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폐하.”

“그대도 이미 알고 있지 않소? 이곳 경조(京兆)만 하여도 조선국 소식에 다들 귀를 기울이고 있다오.”

물론 그만큼 조선이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들려오는 추거 소식이 그만큼 흥미진진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여러 여건이 맞지 않아 중원 땅에서는 시기상조요. 겨우 성을 둔 중원 바깥 땅에 이르러서는 추거는커녕 자의국 제대로 돌리는 것조차 언감생심이라지만, 어찌 되었든 조선국이 세운 추거의 법도는 장차 중국에서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국민당 당원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바로 그 추거를 통해 저들이 권세 얻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선비 자처한다지만 중원 독자들의 구독하며 치르는 값을 무시할 수 없던 『청구시무』 집필진도 그러므로 세태에 영합하여 추거 이야기를 곧장 실었기에, 금번의 기묘한 추거 모양새도 곧 알려졌다.

기묘하다 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참의원에서 정족(鼎足, 솥발)의 세 갖추어진 것도 기이하거니와,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를 아무도 노리지 않아 조선국 백성의 무엄한 말로 삼국지 속 천자 자리와 같다고 하게 된 것도 묘하였다.

참의원 추거에서는, 공산당과 자유당에서 ‘금으로 단자를 산다’하며 비난하는 것을 무심히 받아들이며 열심히 재보 뿌리고 다닌 개화당이 약진하였고, 호황 덕에 저들 재보 늘어나자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는 공산당 소리에 시골 향원(鄕愿, 동네 유지)이 등을 돌리면서 공산당 세는 쪼그라들었다. 그리하여 원내 1당은 어부지리로 자유당이 가져가고, 그 뒤를 차례로 공산당, 개화당이 잇되 그 차이는 미미하였다. (한편으로는, 야학에서 공부한 식자들이 늘어나면서 인천부에서는 전봉준이 당선되기도 했다.)

반면 총리대신으로 말하자면, 아직 최익현 외에 딱히 거물이랄 이가 없는 자유당이야 중임이 불가한바 어쩔 수 없고, 용(임금) 아랫자리 노리는 범-예컨대 김옥균-은 아직 때가 아니라 여겨 그윽한 골짜기에 몸 숨겼으므로, 한강변 섬 이름을 따 ‘여의(汝矣, 너나 가져라)’ 총리 추거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 권세보다 나라 정사 맡는 것이 더 중하다 여기던 전 좌의정 민태호가 마침내 공산당 대표로 출마하였고, 끝내 영규(領揆, 영의정)의 자리 올랐으니, 저는 나름대로 올바른 처신에 힘썼지만 어쩌다 억울하게 쭉정이 취급 받게 된 개화당 박정양은 곱절로 아쉬운 일이었다.

... 하는 사정이 모두 신보 통하여 청국에도 전해지니, 어디 먼 나라 이야기도 아니고 다름아닌 조선에서 이렇게, 속된 말로 지지고 볶고 하는 이야기가 퍽 재미있는 고로 – 게다가 아무리 시끄럽다 한들 중국 일은 아니니 설령 화가 된다 한들 강 건너 불구경 아닌가 – 이곳 북경에서도 세인의 입에 종종 오르내리곤 하였다.

“나라 안의 소소한 사정이 이리 널리 알려지니, 전례 없는 일이나, 이미 이와 잇몸 같은 대국과의 사이가 이로써 더욱 가까워진다면 어찌 공효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대의 말이 맞소. 허나 이를 칭송하기 위해 경이 발걸음한 것은 아닐 터.”

“항상 헤아리심이 일월과 같이 밝으십니다.

새로 세워진 내각에서 다루고 있는 사안으로 두 건이 있는데, 하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나 미리 삼가 양해를 구하는 건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두 나라 모두에 이익이 될 건입니다.”

살피니 그 중 첫째는 역법의 일이었다. 작년이 개국 오백 년이라 나라 안팎 경사로 삼았는데, 그 일로 말미암아 생각해보니 꼭 연호 쓰지 않더라도 ‘개국’으로 햇수를 셈하는 방도가 있었다. 하여 서양 문물 들여오기에 늘 열심인 개화당이, 세력도 조금 불었겠다 싶어 제의하기를, 이번 기회에 역법을 고쳐 양력을 쓰고, 시헌력은 폐하지는 않되 마치 전보와 인편의 관계와 같이 하자고 하였다.

시쳇말로 국제 표준이기도 하고, 농사짓는 이들에게도 절기 일정하니 보탬이 되고, 좌우지간 말은 많아서 그 장점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었는데, 단지 이 얘기가 나오기만 하여도 청국 안에서 또 어떤 모함하는 말이 나올지 모르는 것이라, 미리 해명코자 이리 왔다는 것이었다.

“그 일은 그대 나라에서 심려치 않아도 될 듯하오. 대개 요언(謠言)이란 민심이 어지러울 때 흥하는 것인데, 지난날 그런 말을 실어날랐던 난민 무리가 대거 빠져나갔으니, 이제 지난해와 같지는 않을 것이외다.”

그 의화단 무리의 전말은 자이티얀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자금성 안쪽에서 무소불위라 하여 바깥에서도 그렇지는 않음을 새삼스레 통감케 하는 일이었다. (이홍장 입궐하였을 때 추궁할까 생각도 하였지만, 그의 지친 표정을 보고서 마음이 그만 약해지고야 말았다.)

“실로 망극한 천은이라 하겠습니다. 이어서 둘째 건으로 말씀 올리자면, 그와 유관한 것인데...”

‘솥발 참의원’ 형세 덕에, 지난 내각 말미에 공안서 사다리에 발 걸친 김가진을 누구도 내쫓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차례로 총관 자리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하루는 국왕 귀남이 제의하였다.

‘내 듣기로 작년에 경이 연경에서 봉변하였다 하였소.’

‘실로 그렇사옵나이다. 사실이 그리하니 어찌 가감하여 아뢰겠나이까.’

‘그런데 공안서는 무릇 나라 민심을 어루만지고 또 위엄으로써 평온케 하여야 하는데, 나라안팎을 막론하고 혹 업신여김 당하는 일 있으면 어찌 이롭겠소이까?’

중원 땅 속담에 이르기를,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하였는데, 김가진은 중원 사람은 아니요, 군자는 더욱 아니어서, 높은 자리 오르자마자 청국 안에 사람을 심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중원 땅 속담에는 또 이르기를, 호랑이도 터줏대감 고양이에게는 한 수 내준다 하였다. 하물며 자의원에서 흠정당 세 밀릴수록 더욱 직례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북양군 틈바귀에 세작 심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사정을 김가진이 토로하자, 귀남 생각하기를, 공안서라 하면 저의 세상 중정이나 안기부와 같은 것인데, 물론 무고한 사람 족치지 않으면 그것도 좋겠지만, 애시당초 누구도 건드리지 않고 또 아무도 건드릴 엄두 못 내는 것이 서로 편한 일이었다. 하물며 나라 바깥에서는 어떠할까.

그런데 마침 청국의 젊은 천자가 저를 친하게 여기고, 또 듣자 하니 연소한 이가 구중궁궐에서 고장난명 형세로 있다 하니 필히 서로 도울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하여 이리 제안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실제로는 만만찮은 세력들이 바깥에 포진하고 있다지만, 대청의 유일한 주인은 엄연히 황제 본인이다.

그러나 그런 위엄이 있다 한들 명 받들어 횡행할 수족이 바깥에 없다면 마치 석 자 명검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세 길 물 아래 고기를 낚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여 제의하기를,

“흠... 그러니 그대 나라의 공안서에서 북경에 사람을 보내 대신 눈과 귀가 되어주겠다 하는 것이오?”

“늘 살피시는 바가 옳음을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북경에서 자금성의 도움을 받아 얻어걸리는 소문은 반드시 용상에도 알리고, 또 자이티얀이 만일 살피고자 하는 도성 내 사정이 있다면 반드시 돕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 사이라면야 악용될 여지는 많고 신용은 없었으므로, 어수룩한 두 나라 군주끼리나 통할 발상이기는 했지만, 또 서로 어수룩함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더 비빌 구석이 되기도 하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우선 올 계사년(1893) 한 해만 우선 운영해보기로 합의를 하였는데, 그 해 여름이 되기도 전에 심상치 않은 소식이 걸려들었다.

“지금 무어라 하였는가? 독(毒)?”

“송구스럽게도 지금은 온전히 단정할 수 없으나, 정황상 의심할 바가 없지 않습니다.”

“허나 태후가 머무는 공왕부는 일하는 이도 한둘이 아니다. 간혹 그 중 들고 나는 이도 있기 마련.”

“그러나 유독 침식(寢食)의 일을 맡은 자들이 근래 갑작스레 갈리고 있고, 그 새로 든 자들이 대개 신상 수상한바, 반드시는 아니라 하여도 미심쩍은 바가 있는 것입니다.”

영 인상은 어벙하지만, 그래도 일 이야기가 나오자 나름대로 진지해진 조선국 공안서 관원 – 이름이 이용익이라 했던가 – 이 아뢰었다.

“알았다. 우선 그대는 더욱 기찰(譏察)에 힘쓰도록 하라.”

“예, 폐하.”

서태후가 독살당할 일을 자신이 만들 줄로 알았는데 (혹은 그 반대거나), 오히려 지켜주게 될 지도 모른다니, 자이티얀 생각에는 퍽 공교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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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의 어원은 라틴어 ‘scio’(알다)로, 굳이 직역하면 ‘학(學)’ 그 자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철학’ 같은 다른 학문의 이름이 직역해도 나름대로 구분 가능한 여지가 있었던 반면, ‘과학’은 그런 어려움이 있었지요. 1874년 니시 아마네가 처음 사용한 표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학(理學)’ 등의 다른 경쟁자 표현을 뚫고 1880년대에야 겨우 보편화되었습니다.

작중에서는 조선과 일본, 중국이 모두 나름대로 번역어를 만들고 있고, 어느 한쪽이 지성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인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 개념으로의 오인을 피하기 위해 ‘이학’, ‘격물학’ 등의 대안적 번역어 대신 ‘과학’이라는 말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19세기 중국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취하던 나라답게, 영국은 이 시기 많은 걸출한 중국학자를 배출하였습니다. 허버트 자일즈는 그 중 한 사람으로, 웨이드 표기법을 정비해, 한어병음 체계가 널리 보급되기 전까지 광범위하게 쓰인 중국어 로마자 표기법인 웨이드-자일즈 표기법을 창안하기도 했습니다. 본래 영국 공관에서 일하던 중, 1897년 그의 대선배격인 토마스 웨이드가 작고하면서 그가 맡고 있던 케임브리지대 교수직을 제안받는데, 작중에서는 광서제가 먼저 채갔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광서제는 (물론 엄청난 비판을 받고 곧 물렸지만) 무술변법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고문으로 데려올 생각을 하는 등 외국인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사진을 좋아해 직접 배우기도 했던 원 역사의 진비 (작중 정비 타타라씨)는 이런 움직임에 찬성했다고도 하고, 또 반대로 광서제의 덕을 입었다고도 하지요. 물론 무술변법의 실패로 인해 두 사람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지만요.

총천연색 사진은 의외로 이른 시기부터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는, 원색을 합쳐서 다양한 색조를 표현하는 기법의 원리는 1855년 맥스웰(맥스웰 방정식의 그 맥스웰입니다.)에 의해 개발되었지요. 비록 초창기에는 매우 번거롭고 까다로웠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조금씩 이런 칼라 사진도 촬영되기 시작합니다.

작중 조선 공사 송헌빈은 원 역사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106인에 포함된 것과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머물 때 『동경일기』를 쓴 것 외에 별 행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내각이 수차례 바뀌던 1880~1890년대에서 관료로 살아남아 마침내 경술년에는 중추원 부찬의에 올랐습니다.

원 역사에서 광개토대왕릉비는 비록 그 존재는 계속 알려져 있었지만, 금나라 황제의 비석으로 알려지는 등 그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비로소 1880년대 만주 지방이 개발되면서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특히 1880년대 초 일본군 밀정에 의해 탁본(여기서 일부 변조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되면서 소위 ‘재발견’되었는데, 작중에서는 그럴 일 없이 평범하게 농부들이 강 건너가 경작하는 정도이다 보니 오히려 이러한 일이 늦게 일어났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갑골문과 은허의 발굴은 본디 그 일대 농부들이 발굴해 약재로 쓰던 것을 1899년 우연히 학자 왕의용이 발견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상나라 청동기가 널리 발굴되어 고증학의 연구 대상이 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형태적 유사성을 금방 알 수 있던 것이지요. 이후 수차례 발굴조사가 시도되었다가, 청말민국초의 학자 왕국유(王國維)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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