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아버지의 죄 (3)
“그래, 이 늙은이는 어찌하여 찾아왔는고?”
주름진 얼굴 곳곳에 검버섯 피었는데 유독 안광은 형형하여, 묻는 말에 적의 없음에도 김옥균조차 잠시 긴장케 만드는 그런 기운이 아직 운현궁 주인에게는 남아있었다.
“양가(兩家)에 보탬 되게끔 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우리에게 보태주는 이야기야 언제든 반갑지만, 자네 집안은 글쎄... 일단 들어는 보겠네.”
하룻강아지 농락한다 여기는 범 심정이 저러할까. 그러나 김옥균도 믿는 구석 있었으니, 설마 주상께서 한 번 해보라 하신 것이 가볍게 나온 안이겠는가. 아무리 일이 어그러져도 저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거리낌 없이 품은바 뜻을 내놓았다.
“근래 신보에 실리는 기사로 떠들썩한 것은 합하께서도 들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다 해두세.”
“그 뒤에 누가 있는지는 몰라도, 저희 쪽 여러 번듯한 집안의 번듯하지 못한 사정을 꿰뚫고 있으니, 쉽게 당해낼 수 없어 근심이 되고 있지요.”
“허나 애초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더라면 근심할 일도 없었을 터인즉, 지금에 와 뉘 탓을 하겠는가?”
붕당이 있던 시절에도 경화(京華, 서울)의 사족들은 문중에 따라 교유하고 또 끊곤 하였으니, 따지자면 집안의 원수인 대원군을 김옥균이 찾아옴은 결코 여상치 않은 것이라. 슬슬 건드리면서도 경계하기보다는 우선 궁금히 여기는 마음이 드러났다.
“합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그리고 남의 손가락질로 인하여 잘못이 드러나게끔 내버려 두느니 차라리 먼저 털어놓고 뉘우침이 가당하지요. 그러나 무릇 사람의 눈은 앞을 향하기 마련이라, 저의 뒤는 스스로 살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남의 눈을 빌어야 하는데, 소위 권세 있는 집안의 그런 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분께서 엄연히 이곳 운현궁에 계실진대 어찌 다른 이를 찾겠습니까?”
곧장 꿰뚫어 본 대원군이 흔치 않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맞불을 놓겠다 이 말이로군그래. 헌데 자네 문중의 웃어른들이 허여해주던가? 영어(김병국)라면 몰라도, 영초(김병학)는 결코 가납치 않았을 것인데.”
“어찌 잘 통사정하니 가로막지는 않겠다 하는 답을 받았습니다.”
어차피 무언가 감추어서 이익 볼 계제는 아니었으므로, 운현궁 들기 전 전동 김병학네에 들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당연히 순조롭게 승낙을 받아냈을 리 없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였느냐! 네놈이 정녕 미친 것이더냐! 이... 이! ”
“형님, 우선 체통을 지키시지요.”
김옥균이 급조한 것 치고 나름 짜임새 있는 계획을 털어놓자, 분기 오르다 못해 김병학은 뒷목을 잡고, 김병국은 제게 원망하는 눈길 보내랴, 형 걱정하랴 바빴다.
“지금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조상의 잘못을 후손이 드러냄이 어찌 사람이 할 일이더냐. 더구나 멀리 선대도 아니요, 바로 우리 위 하옥 대감 시절의 이야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호기(好機)라 하겠습니다. 그때의 허물은 기억 어딘가에 어렴풋이 남은 정도가 되었지만, 아직 모두 잊혀 한낱 한담거리가 되지는 않았으니, 잘못을 직시하고 뉘우치는 기색 보임이 공효가 있겠지요.”
“그러니 조상을 팔아 네가 덕을 보겠다는 것이 아니냐? 이런 파륜(破倫)한 일이 있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는지, 저는 식견이 짧은지 다 요해(了解)치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상을 팔았다 하셨는데, 문충공과 문정공의 덕으로 권세 누린 선대는 그렇다면 무어란 말입니까?”
병학과 병국이 냉온 교차하며 꾸짖고 또 타이르는데, 그들이 한때 문중의 기대를 받던 적자(嫡子)가 어찌 이러한 적자(賊子) 되었는가 속으로 한탄하건 말건 김옥균은 또박또박 저의 할 말을 다 했다.
“어차피 우리가 이 조선 겨레 사이에서 계속 세족으로 남기 위해 반드시 청산하여야 할 옛일입니다. 어째서 이를 깨닫지 못하십니까?”
‘만일 조선이 계해년 이래 중흥치 못하고 고꾸라졌더라면, 후대인들은 그 원인의 태반은 장동 김문에 있었다 할 것이다’ 덧붙이려다, 자칫 붉으락푸르락하는 김병학이 이대로 분사하지는 않을까 싶어 참았다.
“후... 그래, 네 말이 일부는 옳다 치자. 임술년(1862) 사정 모르는 너희 후대에서 보기에는, 우리가 실기하여 대세를 놓쳤기에 지금처럼 겨우 개화당 하나를 이루어 버티고 있다 여길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우리 문중을 한데 묶고 있는 것은 선대로부터 내려온 의리 두 글자다. 그것을 지금 버린다면 너의 대에는 몰라도, 그 뒤에 장차 어떻게 되겠느냐.”
번갈아 법국 구경도 한 두 노인들의 생각이 이리 막혀 있음은, 결국 식견의 문제이기 이전에 세상 보는 눈 자체의 차이일 것이다.
“우리 문중을 묶고 있는 것은 의리가 아니라 그 이름과 재화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미 선대부터 그러하였던 듯한데, 지금은 다만 이를 밝혀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개화가 되었을 뿐이지요. 아마 다른 벌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되었다. 더 듣기 싫으니 원하는 것이나 말하거라.”
“하직을 고한 뒤에 곧장 운현궁에 찾아갈 것입니다. 제가 경영하고 있는 신보를 통하여, 아직 대원위께서 대원위 아니었던 시절 이야기부터 하여 우리 집안과 다른 거족들에게는 영 아픈 내력을, 재미있게 글로 꾸며 실을 생각입니다.”
물론 아직 당사자 여럿이 살아 있으니, 이름이나 장소는 조금씩 바꾸되 지난 세월 기억하는 이들은 무엇을 지목하는지 쉬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한들, 누구보다 지난날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고 있을 대원군에게 직접 듣고, 또 암암리에 있을 지존의 비호 믿고서 과감히 실어낼 수 있으므로, 지금 농간 부려 세간을 미혹하는 쪽보다 훨씬 이목 끄는 이야기를 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문중을 한낱 비웃음거리로 전락시킨 뒤에 무엇을 할 것이냐.”
“이르신 대로 세간에서는 비웃겠지요. 그리고 더불어, 그런 우리를 이겨낸 것이 대원위가 아니라 글 읽는 저들 자신이라 착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못 통쾌히 여기어, 원한 대신 골계(滑稽, 익살)로써 우리의 허물을 다시 보게 되겠지요.
그때를 노려, 꼭 우리 집안 이야기는 아닌 듯하나 이 글을 읽고서 옛 허물 깨달은 바 있어 이제 그간의 허물을 뉘우치고자 하노라. 그 수령이 인정 마련코자 조세 포흠한 이 고을에는 새로 다리를 놓고, 진상하던 공물로 농간 부려 고생한 저 향리에는 학비 지원하여 그 자제들이 맘껏 공부할 수 있게 하겠다. 이렇게 알릴 것입니다.”
아무리 저두평신(低頭平身)하며 사과한들 맨입으로 한다면 별반 호응이 없겠지만, 반대로 그럴듯한 이익과 함께 뉘우치는 소리를 하면 다들 그 물려주는 바에 눈길 쏠려 참으로 대범하다,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니 용기 가상타 할 것이다. 세인들이 그리 호응치 않는다면 궁중에서 먼저 하지 않겠는가.
물론 여전히 머리 굳은 서생들이야, 어찌 사람으로서 저의 조상을 스스로 욕보일 수 있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개화당에 표를 주지 않기 마련.
“그래서, 거기에 들 재물을 내어달라 청하려는 것이냐?”
조금은 진정한 듯한 김병학이 재차 물었다.
“소요될 만큼 내어가겠다 미리 말씀 올리는 것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아니 된다고 한다면? 그때는 어찌할 테냐?”
“그리하신다면 제가 어찌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다만 지금처럼 방관하였다가, 1867. 아차, 정묘년에 청국 흠차대신 마 공을 찾아가셨던 일 같은 것이 드러나게 되면 그것은 문중 망신으로만 그칠 일은 아니겠지요.”
“무엇이? 네... 네가 그것을 어찌?”
“스승으로 삼은 이가 누구와 교유하고 있었습니까. 후에 물으니 조용히 일러주더군요.”
김옥균의 소싯적 스승이라면 곧 그의 양부 김병기가 아들의 출세에 보탬 되리라 믿고서 붙여준 유홍기요, 그의 벗이라면 그 옛날 김병학이 ‘조선국이 대국 몰래 양이들에게 사절을 보내려 한다’ 알리려 했던 것을 듣고 박규수에게 알렸던 오경석이다.
그리고 유홍기로 말하자면 비록 근래 개화당 돌아가는 모양새를 썩 좋게 여기지는 않지만 벗이자 스승인 박규수와의 의리를 생각해 이런저런 당무를 돕고 있었으니, 언제고 김옥균이 찾아가 혹 일이 곤란케 되었을 때 어르신들을 설복케 할 만한 무언가 없느냐 넌지시 물으니 역시 넌지시 알려주었다.
물론 자칫하면 엄청난 풍파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라서 그 내막을 모두 알려준 것은 아니요. 그저 그때 잠시 청국 흠차대신 마신이와 모종의 사안이 있었다 한 데 지나지 않았지만, 말머리만 꺼내어도 질겁하는 김병학을 보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러니 정말로 문제될 것들을 덮기 위해서라도 지금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간혹 나오는 침음 외에 더는 반발하는 소리가 없었다.
김옥균이 이러한 사정을 적당히 가감하여 털어놓으니 한때의 적수가 된통 당한 것을 은근히 통쾌히 여기는 대원군은 빙긋 웃었다.
“뭐, 여실히 말하면 이 늙은이로서는 자네 집안이 망신 당하는 것을 결코 안타깝게 여기지 않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지.”
“감사합니다. 허여해 주신다면 곧 사람을 불러와, 합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을 받아적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네, 천하장안이라고 들어보았는가? 셋은 천수 누리다 떠났지만 아직 장천동 한 사람은 남아있지. 그이도 찾아가보도록 하게나, 내 연락해놓을 테니. 늘그막에 적적하지는 않다 하여 반길 게야.”
과연 그 반긴다는 것이 증손주 귀여움에 푹 빠진, 사람 좋은 노인네 된 장천동 이야기인지, 아니면 돌려서 토로한 대원군 본인 심정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재보를 내어 백성들 환심을 살 생각인가? 지금 노리는 계교가 잘 들어가면 이번 추거에서 우세를 점하지는 못하여도 지난번처럼 과반을 내어주지는 않을 듯하다만, 들어갈 수용(비용) 적지 않으니 자네 당 안에서 이의 많이 나올 터인데.”
“선대의 앙금이 오래 묵었으니 한두 푼 돈으로 해결하기는 부족할 것입니다. 허나 한두 푼으로 안 될 것 같으면 한두 냥을 내놓으면 될 일이지 않겠습니까? 화식(貨殖) 운운하지만 묵혀둔다고 해서 절로 불어나는 재보도 아니요, 또 옛 고사에 이르는 것처럼 빚보다 중한 의(義) 사들이는 일이니 말입니다.”
“진 빚을 없애 의를 사들인다라. 금세의 풍환(馮驩)이었군! 맹상군(孟嘗君)은 뉘신가?”
떠보는 말인가, 단순한 농담인가. 눈앞의 사람이 평범한 서생이라면 전자일 것이나, 다름 아닌 대원군이므로 필히 뜻이 다른 데 있을 것이었다.
“요새 하는 말로, 이 나라 겨레 아니겠습니까. 명문세족이든 고리백정이든 같은 조선 사람인데, 그간 갈라놓고 위아래를 매겼던 것을 터서 없애니 이것이 개화(開化)겠지요.”
“퍽 포부가 당차군. 스스로 그 말을 믿고서 그리 이르는 것인가?”
“합하께서는 어떤 답을 원하시는지요?”
도리어 반문하니 간만에 호탕한 웃음 나왔다.
“하하! 내 늘그막에 동류(同類) 만남인가!”
늙었을지언정 바깥 소식을 끊지 않았으므로, 근래 개화당에서 은근슬쩍 이 겨레니 민족이니 하는 소리 내어놓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본래 그 뜻은 정확히 몰라도 충군애국 네 글자에는 익숙한 조선 사람들이라, 저들에게 이득 되는 소리와 함께 내놓는다면 울림이 작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논의의 연원 거슬러 올라가면 필히 눈앞의 이 불혹께 되었을 사내에게 있을 것이다. 실익을 위해 대의를 내세우는가, 대의를 위해 실익 구하는가 물어보니 끝내 답하지 않고, 정녕 진심으로 답하려 한들 본인도 딱 잘라 말할 수 없을 것이라, 종실의 위엄과 자신의 권세를 잘라 생각하지 못했던 이하응이라는 젊은이가 떠올랐다.
“광영입니다, 합하.”
지난번에 호되게 꾸중하고서 안태훈이 따로 벌준 바는 없었으니, 만일 안중근에게 철이나 눈치 둘 중 하나가 없었다면 어찌 잘 넘어갔다 여겼겠지만, 그날 이래로 서원 나아갈 때면 스승들 눈초리 예사롭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오니, 반드시 저 모르는 새 뭔가 아버지께서 조처한 바가 있겠거려니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너그럽게 넘어가주었다기보다는 어째 ‘봐주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는 듯하여, 절로 몸가짐 삼가고 부득불 학업 정진케 되었는데, 그렇게 기세 죽어 다니던 어느 날, 서원 파하고 저의 방으로 돌아가던 그를 안인수가 불러 세웠다.
“애, 이리 들어와 보려무나.”
노인네 특유의 퀴퀴한 냄새 은은히 풍기는 할아버지 방에 드니, 전등 아래 놓인 것은 종잇장이요, 다시 들여다보니 신보였다.
“내 일꾼들이 하도 이야기하길래 어찌 한 부 구했는데, 막상 보니까 글씨가 너무 잘아 도통 읽히지가 않는구나.”
노안이 진즉에 왔지만, 평소 저는 건강하다며 애체 따위 필요 없다 외쳐온 안인수였기에, 안태훈은 몰래 사람들을 시켜 안인수가 직접 살필 글 – 예컨대 ‘어르신 보실’ 『해동일보』 - 은 그 글자를 유난히 크게 찍거나 쓰도록 하곤 하였다.
그러니 저 보고 대신 읽어달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 시켜도 되는데 굳이 ‘귀한 손주’ 시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싶었으나, 다시 신보를 살피니 다름아닌 『경화시보』라, 그 내막이 얼추 짐작되었다.
“『무치춘일기(霧峙春日記)』”
제목 다섯 글자에 이어, 위에서 아래로, 우에서 좌로 낭랑히 읽어내려갔다.
“이하영(李昰迎)은 조선국 한성부의 안갯재(霧峙)에 살았는데, 집안이 한때 부귀하였으나 선대 어느 때를 당하여 가세가 기울어, 세간에 업신여기는 자가 많았다. 특히 이웃 동리의 하당(荷堂) 처사는 그 위세 등등하여 줄곧 하영과 그 집안을 가볍게 보았는데, 하영은 이를 분히 여기었다.
하여 일일(一日)은 결의하기를, ‘우리 집안 일으킴은 곧 나 한 사람에게 말미암음이구나! 도의도 학문도 좋으나 내 한 사람이 위세를 얻지 못한다면 어찌 가세 일으킬 수 있겠는가. 고로 나는 이제 나 한 사람을 위해 살겠노라.’ 하였다.”
하는데, 안중근은 글 읽느라 가만 듣던 안인수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짐을 보지 못하였다.
조금 나이 먹은 사람으로 어디 산구석 촌부가 아니고서야 이쯤에서 금방 알아채지 않겠는가. 등장하는 사람 이하영이란 곧 이름자만 바꾼 대원군이요, 제목에 걸어놓은 ‘안갯재’란 곧 구름재이며, ‘하당처사’란 곧 ‘하옥(荷屋)’ 대감이었다.
어디 산골 선비가 홀로 쓰는 글도 아니요, 신보에 실은 글이 대원군 이야기를 실었으니, 필부(匹夫)가 마음대로 썼더라면 그의 간은 배 밖으로 나오다 못해 크기가 사방 십리는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필히 대원군 본인이 썼든, 그의 문인에게 시켜 싣게 했든 하였을 터라, 조선국 사람이 어찌 흥취 아니 생길까.
좌우지간 계속 읽어 내려가 끝에 당도하니 본문 끝난 뒤에 이런 사연이 덧붙여져 있었다.
“이 글은 운현궁의 한 문객이 본보(本報)에 전해주는 옛 이야기를 소설(小說)로 풀어낸 것인데, 심심한 재미가 있어 이처럼 매번 조금씩 풀어 싣고자 한다. 무릇 소설이란 잡다한 글에 지나지 않으나, 오히려 당당한 글월로써 풀지 못하는 사정을 빗대고 풍자하여 풀어낼 수 있으니 나름의 공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표에서 눈을 떼자, 할아버지의 표정에 고심 가득한 것이 보였다. 무슨 고심인가 하였는데, 곧장 나오는 말이 의외로 사소하였다.
“끝이더냐?”
“예, 끝입니다.”
“허... 거 매정도 하다. 어찌 거기서 끊어서 사람 애를 타게 하는지...”
소설이라 하면 여인네들이나 한량들이 간혹 호롱불 피워놓고 짚어가며 읽는 허황된 이야기로만 여겼는데, 안인수 그가 젊었을 적 서울에서 일어난 생생한 암투 이야기요, 써놓은 것도 거두절미하고 보아도 벌써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중근에게 물었다.
“애야, 네 서원 오가는 길에 혹 신보 살 만한 곳이 있느냐?”
“주로 다니는 골목에 하나 있습니다.”
실은 근방에는 딱히 없고, 빙 돌아가야 하나쯤 있지만, 할아버지 청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얼추 깨달았기에 곧이곧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심부름 두 가지만 시키자꾸나.”
“요 『경화시보』 사와서 읽어드리는 것 말씀이세요?”
“옳지, 역시 뉘 손주인지 영특하구나.”
“하지만...”
“인석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사람 시켜서 보내달라, 그 왜, 요즘 말로 배달인가 시켜서 받지 못하고 네게 시키려는 것 아니냐.”
지금껏 개화당 하면 모두 덮어두고 싫어하던 안인수다. 처음 다짐했던 것처럼 손주 녀석 다 크기 전 세도가들을 무릎 꿇리겠다 하는 것은 끝내 이루지 못했고, 지금은 정말 묵은 한보다, 주변에서 그에게 그러한 원한 있다고 떠드는 것이 더 중해졌다.
솔직히 지금도 내키지는 않지만, 한 편만 보아도 어째 더 읽고 싶어지니 이렇게 옹색한 심부름을 시키게 되었다.
“흠흠. 개화당 놈들은 상종하면 안 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저 신작로도 김문에서 닦은 것이니 밟으면 아니 되지 않겠느냐.”
“할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이 나쁘다 하여 그 사람 가산으로 세운, 어, 활터라든가, 정자라든가, 이를테면 그런 곳까지 출입을 끊는다면 지나친 것이겠지요?”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세운 건물은 더욱 아니 미워하지 않겠는가. 실낱같은 희망 품으며 정미소 지나가던 참새마냥 살포시 안중근이 물었다.
“뭐, 우리 손주 녀석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대꾸한 안인수는, 미처 감추지 못하고 씩 올라가는 안중근의 입매를 미처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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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 김문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린 김조순, 그 다음 핵심인물이었던 순원왕후 김씨(순조의 정비, 김좌근의 누이) 등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세도가 절로 난 것이 아니라, 정조가 김조순에게 어린 순조를 맡겼다 (물론 김조순 본인의 주장입니다)는 인식, 누대에 걸쳐 의리로 이름난 명신을 배출하였다는 자부감 등을 보였습니다. 물론 그와는 별도로 우리에게 전하는 수많은 야담들은 당시 일반 백성들이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어떻게 보았을지를 능히 짐작케 합니다.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 주민의 민가마다 책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프랑스 장교의 기록은 유명하지요. 그런데 그 책 중 아마 상당수는 경전이 아니라 한글소설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8세기 상업의 발달과 세책업(도서대여업), 방각본 출판의 성행 등으로 인해 한글소설의 유통은 일대 혁신을 겪었고, 대중적인 문화생활의 일환으로 진화했습니다. 일례로 1910년경 최남선이 서울에 남아있던 한 세책집을 조사했는데, 이미 사양산업이었던 세책업이었지만 소장된 소설이 3천 2백권 (물론 단위가 ‘권’이지 질은 아님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에 달했다고 합니다 (정병설, 2005. “조선 후기의 한글소설 바람.”).
이러한 소설의 대중적인 소비는 개화기 신소설로 이어집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소설’이라는 말이 쓰인 것이 (작중에서는 조금 달라졌습니다만) 다름아닌 신문에 실린 책 광고였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1906년 2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연애소설 『명월기연(明月奇緣)』을 ‘현대걸작의 신소설’이라 칭한 것이 최초라고 합니다.)
신문의 출현으로 연재소설 형식이 나타나고, 거기에 더불어 석유 램프가 도시 중상층에게 보급되어 여성층이 야간에 독서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등은 이런 추세를 가속화했습니다. 역시 작중 조선에서도 비슷한 조건이 갖추어지고 있는데, 거기에 더불어 대원군이라는 초특급 소재 제공자가 등장하였지요.
풍환(혹은 풍훤)은 전국시대의 유명한 유세객으로, 전국사군자의 한 사람인 제나라 맹상군의 식객이었습니다. 전하는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맹상군이 빚이 많이 밀린 지역의 추심을 맡겼더니, 빚문서를 모두 모은 뒤 불태워버리고 돌아와서는 ‘의(義)’를 사서 돌아왔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사서에 따르면 맹상군이 저의 잘못을 깨닫고 크게 기뻐했다는데, 그만큼 풍환의 말솜씨가 뛰어났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는 후대가 상상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