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아버지의 죄 (2)
개국 오백 년에 백성은 이천만이니 개중 재주 있는 이도 참 많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십년지기마냥 달라붙어 그 이웃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아낼 수 있는 넉살 좋은 채사군(기자)이 하나 없을 것이며, 그 사연을 일대의 기담(奇談)으로 자아낼 만한 글쟁이가 또 하나 없겠는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명문 벌열 사이에 암암리에 돌던 이야기를 감히 발설한 자가 없고서야, 지금처럼 차마 부인할 수 없는 일들을 꺼내어 싣는 참담한 지경에 이를 리가 없었다.
처음 그 옛날 도성 ‘모 대감’의 애첩이었다는 나합(羅閤, 나주 합하. 김좌근의 첩)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는, 김병학과 김병국 두 사람이라면 모를까 다른 원로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옥대감 시절 김문이 행패 부린 일이 적지 않았으므로, 수십 년 권세 부렸으면 그만한 뒤탈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헌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순묘·헌묘조의 이런저런 일들을 글로 옮겨, 소위 세도 부리던 집안들을 싸잡아 풍자하며 그 부정하고 부패한 내력을 드러내니 – 그나마 웃어른 잘 둔 덕에 백성 사이에서도 이름났던 반남 박문은 화를 피해갔다 – 이대로라면 집안 체통이 세인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넘어 모두가 비웃는 지경에 처할 지경이라, 곧 저들 발등에 불 떨어진 격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서양 속담으로 ‘절름발이 오리(lame duck)’처럼 되었어야 할 기무회의에서 왈칵 논쟁 한 판이 벌어져, 어전에서 무슨 망령된 언동이냐며 최익현이 제지해야 할 상황에 이르고야 말았다.
그나마 그날의 마지막 안건으로 한강에 다리 놓는 일의 추진되는 현황을 모두 보고한 김병시가 말미에 ‘근래 풍속’을 문제삼았기에 망정이지, 만일 회의 서두에서 일을 꺼냈더라면 정말 논쟁으로만 회의가 범벅된 채 파하고야 말 뻔하였다.
“일시의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어전에서 망측한 말로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으니, 그 죄를 어찌 함부로 헤아리겠나이까.”
회의 끝나고서 겨우 마음 진정한 김병시가 편전에 찾아와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데 상께 송구히 여기고 뉘우치는 뜻을 보이고자 하는 것은 김병시 한 사람뿐이 아니었으니, 곧 바깥에서 굵직한 – 아직 나이 많은 신료들은 들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하였다 – 내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조판서 오경석이 입시를 청하옵나이다.”
“들라 하라.”
나이 지긋한 이들 – 물론 귀남 전생 기준으로는 노인정에 발도 못 들여놓을 연배지만 - 둘이 자칫 어전에서 다투다 언성 높일 뻔하였으니 조금은 우스운 일이었지만, 다투는 까닭만은 결코 우습지 않았다.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민망한 일이지만, 그 언성 높인 상대가 바로 옆에 나아와 함께 주상을 뵙게 되었으니 송구함을 아뢰려던 말문이 턱 막히고야 말았다.
“분에 넘치는 성은 입은 늙은 신이, 앞서 사사로운 정으로 말미암아 성려(聖慮)를 끼쳤으니 그 죄를 청하지 않고서 어찌 감히 관복을 더럽히겠나이까.”
그런데 무릇 사과라 함은 ‘내가 잘못했다’로만 끝나서는 아니 될 터인데, 하필 당사자와 어깨 맞대게 되었으니 누구도 먼저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성은 내리듯 귀남이 그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내 보고 듣기로, 근래 한 신보에 실린 글이 여러 중신들의 심사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경들의 실화(失和)함도 능히 참작할 만하오. 사람이란 모름지기 그 뿌리를 차마 잊을 수 없으니, 조상의 대에 얽힌 이야기라 할지언정 어찌 가볍게 여기겠소.”
“헤아려주심이 망극하옵나이다.”
먼저 저의 편을 들어준다 여긴 김병시의 기세가 올랐는데, 그 이어지는 말에 도로 푹 꺼졌다.
“그러나 국법을 굳건히 세운 것이 여러 해인즉 무근(無根)한 말로 여러 세족을 무함하는 것이라면 그 전말을 드러내어 판심청(법원)에 부치면 될 것이오.”
“신이 일시에 중도를 잃어, 그 말이 격해져 좌중을 어지럽혔으나, 당초 공판에게 이르고자 한 뜻도 그와 같았습니다.”
반대로 기세 오르는 오경석이었다.
“그것이... 후.”
곧장 무어라 반박하려던 김병시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다시 뭔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비록 신보에 실리는 글이 난삽하고 천박하기는 하나, 뿌리 없는 무고가 아니므로, 다만 국법으로 언설을 막는 처분 내리자 하는 외에 별도의 주장을 펴지 못한 것입니다.”
“그른 것을 그르다 당당하게 이르고 그 처분을 받으면 족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아성(맹자)께서 이치 드러내신바, 그러할 때는 천하를 헌신짝처럼 버려도 (棄如敝屣)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오경석이 재차 토를 달았는데, 이어지는 말은 반박이 아닌 수긍이었다.
“자식으로서 선대의 잘못을 가림은 도의에 맞지 않으나, 오직 홀로 그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뢰건대 선대왕 세 분의 치세에 이르러 국인(國人)의 마음이 한데 모이지 못한 데에는 저희 일문(一門)의 잘못이 작지 않습니다.”
귀남은 들어 알고 오경석은 겪어 아는바, 장동 김문의 자긍심 하나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 지금 수긍하는 저 말도 결코 가볍게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무언가 더 토 달려던 오경석도 잠시 입을 닫고 경청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국난에 처하였을 때 저희 문중의 문정공(김상헌)은 높은 의리를 현양하였고, 문충공(김상용)은 그 충심을 드러낸바 일찍이 부조(不祧, 불천위)의 은전을 입었습니다. 이후 조상의 충의로 현달한 후손이 그 아름다움을 모두 잇지 못하였으나, 지극한 성은을 입어 다시금 중흥에 미력이나마 거들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지금 생의 소년 시절, 다름아닌 오경석이 직접 귀남에게 들려주었다. 청나라 오랑캐가 들이칠 때, 한 사람은 심양에 끌려가서도 절개를 지켰고, 다른 한 사람은 강화도에서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국하였다 하였다.
“한때 누대의 은덕에 보답하지 못하였으나 옛 계해년 이래 심기일전하여 국사에 다시 도움 되는 것은, 소위 벌열이라 하는 다른 거족들도 반드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상께서는 깊이 헤아리시어, 저희를 내치지 마시옵소서.”
김병시가 앞서 회의에서도 청하였던 것은, 그러므로 『해동일보』에 가볍게 주의만을 주자는 것이었다. 이른바 신보의 제도가 근 스무 해 사이 무섭게 창성하여 옛적 언관들이 공론 이끌던 데 비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일정한 법도를 따르게 하자는 정도로, 나라의 판서쯤 되면 안가 놈 그 작자에게 아예 죄를 씌울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던 문중 뒤채 노인들의 채근한 바에 비하면 훨씬 온건한 것이었으나, 오경석 보기에는 영 못마땅하였다.
“지난 서른 해를 걸쳐 국운이 크게 융성하였으니, 도리어 과거를 돌이켜보면 이리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작 삼십 년 세월에 이만큼 올 수 있었다면, 그 이전 육십 년 동안은 어찌하여 그리하지 못하였는가? 능히 이런 질의를 꺼내어 물을 수 있는데 감히 그리하지 못함은, 아직도 옛 세도가 남아있어 언로가 다 트이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공판이 지난일의 잘못을 공변되이 살핌은 물론 상찬할 만한 일이나, 고치지 않을 것이라면 잘못을 백 번 살핀들 무엇하겠습니까?”
다시 싸움에 불 붙을 것을 직감한 귀남이 말렸다.
“무릇 사람이라면 자신은 옳고 남은 그르다 하기 마련이니, 이는 상정(常情)이오. 시시비비를 따진다면 두 사람의 다툼만으로 처결해서는 아니 될 것이므로, 오늘은 그만 삼가도록 하시오.”
그제야 둘이 모두 저들이 앞서 범한 과오를 다시 범할 뻔하였음을 새삼스레 깨닫고서 재차 망극하다 말 올리는데, 그렇다 한들 상한 옛 감정이 절로 붙지는 않을 것이라 귀남 또한 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라에 분란 일어나면 좋을 것 없고, 그렇다고 다투는 두 사람들 중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면 사안이 해결되기는커녕 원한만 깊어질 것이었다.
녹봉 오래 받은 중신들이든, 새로 들어오는 젊은 관료들이든, 따지자면 김병시네 벌열 입장 아니면 오경석네 나머지 집안 입장 중 어느 한쪽에 마음 기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책을 마련한다면 어느 한 쪽이 먼저 나서서 내가 잘못했으니 구원(舊怨) 잊자고 한다던가, 다른 한 쪽이 옛일은 없던 일로 치고 장차 재론치 말자고 하거나 해야 할 터인데, 추거가 눈앞에 다가온 판국에 누가 저의 손해볼 일을 앞장서서 하겠는가.
하다못해 최익현조차, 사사로이는 스승 이항로의 원한이 김문에게 있으며, 도의로 따져도 선왕 재위할 때 기유년(1861)에 전례없이 4대(김수항·김창집·김제겸·김성행)에 걸쳐 부조지전을 내린 것처럼 김문이 도의와 예법 숭상하는 집안이라 하기에는 흠결 많음을 알았으니, 언제고 귀남이 하문하자 이러한 사정을 가감없이 아뢰어 자신이 한쪽에 마음 두었음을 알렸다.
또한 덧붙이기를, 더욱 사사로운 이익으로 말하면 이번 일로 개화당이 힘 잃고 공산당이나 저의 자유당이 추거에서 힘 얻을 것이므로, 더욱 자신이 나서서 한쪽에 목소리를 싣기 어렵다 하였다.
그리하여 귀남 홀로 편전에서 고심하고 있는데, 문득 시위하던 승지가 알렸다.
“전하, 공안서의 김 독리(督理)가 입궐하여 중궁전을 뵙고자 하고 있사옵나이다.”
아내 자영이 외무(外務) 여럿 보다 보니 부득이하게 외간 사내들과 마주할 일이 있었다. 세상 빠르게 바뀐다지만 어찌 이것이 가하더냐 하고 반발하는 이들이 있어, 형식상으로 구색 갖추고자 이렇게 남정네들 출입할 때는 귀남 자신에게 ‘재가’ 받도록 하고 있었는데, 귀남 생각에는 한 두세 해쯤 지나면 반발하는 자들도 이것이 언어도단(言語道斷)임을 깨닫을 테니 – 애시당초 내관도 멀쩡한 사내로 뽑고 있는데 수시로 궁의 안팎을 드나들지 않던가 – 그때에 이르러 아예 폐하자 하면 될 것이었다.
“나랏일 하는데 어찌 막겠느냐. 지도(知道)하였다 알고 있거라.”
“예, 전하.”
김 독리라 함은 곧 김가진이라. 지난날 청국에서 모계(謀計)하던 일이 거하게 실기할 뻔한 이래, 김가진도 느낀 바가 심심하여 마침내 대원군에게 청하여 공안서 관직을 얻고자 마음을 먹었다. 저의 물러난 뒤에 며느리 중전의 영 미덥지만은 못한 일처리를 보좌하고, 또 때로는 견제할 사람이 필요하다 여기던 대원군도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허나 이전까지 따로 벼슬한 바 없던 이를, 곧장 총관이라는, 실권이야 (아직) 없어도 어쨌든 한 관서의 수장이 되는 자리에 부임케 하기에는 여론이 두려워, 우선 독리라는 자리를 하나 만들어 제수하고 장차 총관직으로 올리기로 암암리에 합의를 해두었다.
그러니 번듯한 관직도 하나 얻었겠다, 본격적으로 대원군 물러난 뒤의 일을 상의코자 종종 궁을 오가곤 하였다.
“그러고 보니 김 독리도 장동 김문의 사람이렷다?”
“그러하옵나이다. 다만 서출로서 그 문중의 덕은 거의 입지 못하였다 합니다.”
“음, 어쩌면 이번에 국론 갈린 일에 나름의 심상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승지는 말을 전하여, 김 독리로 하여금 시급한 일 마치고 여력 되면 들라 하여라.”
물론 그 말이 사람 입과 전깃줄을 거쳐 김가진에게까지 전해졌을 때에는, 복술(卜術) 하는 이들이 외우는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시급히 명에 따르라)’ 주문과 같이 되어, 조금만 더 빨리 움직이면 숨 차오를 만큼 잰걸음 하여 편전에 이르게 되었다.
입시하니 기다리는 것은 주상과 가배 두 잔이요, 나오는 것은 여전히 거론될 때마다 심경 복잡케 하는 그의 문중 일이었다.
“외람되이 나랏일을 함부로 말할 수 없으나, 미욱한 신이 알기로도 신의 문중에 떳떳하지 못한 일이 여럿 있습니다. 지금 신보에서 떠드는 것은 고작해야 술잔 하나가 넘친 정도(濫觴)요, 파헤친다면 더욱 참괴한 말이 필히 나올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미리 드러내 잘못을 가림이 마땅하지 않겠소?”
“밝은 도리에 따르면 이르시는 바가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감히 생각건대 권도(權道)로 말하자면 저의 집안의 잘못을 모두 드러냄이 상책은 아닐 것입니다.
국법을 경장하여 반상과 적서의 귀천을 없게 하시었으니 참으로 그 뜻이 아름다우나, 국인의 어짐이 성상을 따르지 못한바 외려 이미 있던 구분이 마치 암벽에 새긴 듯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여도 미워하고 질투하기 마련입니다.”
서얼과 적자들 사이 분별을 허물 방도 있는가. 처음에는 나라에서 벼슬길 널리 허통해주면 절로 해소될 것이라 여겼건만,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 물론 지금 개화당 김옥균이 하고 있는 것처럼 문중의 사업 이끄는 서자들을 결집하여 하나의 세를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정작 그 개화당 내에서도 그런 김옥균의 행보를 언제고 제지해야 한다며 벼르는 노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나마 김옥균 제치면 당 이끌 만한 인재가 박정양 한 사람뿐이라 참고 있는 것이리라.
향촌에서도 마찬가지로, 한편으로는 향약이다 무엇이다 하여 목이 꼿꼿하던 이들과 허리 펴지지 않던 이들이 함께 이야기 나누게 되었다지만, 사람끼리 섞일수록 되려 구분하고 차등 두고자 하는 마음은 강해지고 있다 하였다. 생각해보면 자유당 총리 최익현이 있을 때 시행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자유당이 이익 얻은 셈이 되었으니 절묘하다고도 하겠지만.
“그러므로 어느 한쪽 편을 들어 다른 한쪽을 낮추게 되면, 설령 어심이 탕평(蕩平)에 있다 하여도 다시 한쪽은 억울히 여기고 다른 한쪽은 절로 교오(驕傲, 건방짐)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한편이 결자해지로 나서지 않는 한은 어렵겠다는 것이구려.”
“그렇사옵나이다.”
이럴 때 대비하여 민간에 연줄 하나쯤 있었더라면, 그를 시켜서 뭔가 획책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대원군 노쇠하여 그에게 기대기가 미안하니 스스로 나설 필요가 있을 터였다.
잠시 눈을 감고, 이번 생에 맺은 인연들을 죽 회상해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싶을 만큼 당연한 답이 나왔다.
“그래서, 저로 하여금 우리 문중을 스스로 욕되게 하라, 그리 이르셨다는 말씀이군요.”
“그리 되었소.”
문중의 체통보다 자신의 위세를 앞서 생각할 사람은 얼마 전 벼슬 내려놓아 귀남으로 하여금 한시름 놓게 한 이완용이 외에도 수두룩하지만, 그렇게 저의 앞가림 하면서 능히 나라에 보탬도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김옥균 외에 그리 많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의외로 저의 집안 체통을 중히 여길 수도 있는 것이라,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하는 말을 반드시 강조하라 – 갈수록 주변 사람들이 저를 어렵게 여기는 듯해 사소한 고민을 하고 있는 귀남이었다 – 하였는데, 그 덕인지 의외로 수월하게 답변이 나왔다.
“성상의 마음 쓰심이 참으로 깊으니 어찌 받들지 않겠습니까?”
물론 듣는 김옥균 생각에는, 성상께서 허투루 자신에게 명을 내린 것은 아닐 것이요, 거절은 자유지만, 반대로 따른다면 필히 크나큰 기회가 될 것이었다.
“허나 어찌 실행할지 그 방편은 조금 고심해보아야 할 터인데... 동농 형,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물론이오.”
김가진이 다과 – 해가 아직 중천이라 약주 내오기는 뭣하였다 - 즐기게끔 내버려 두고, 잠시 일어서 몇 번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한 각쯤 지났을까. 문득 묻기를,
“형께서는 아직 운현궁을 드나들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소만.”
“장동 김문의 옥균이가 곧 찾아가 뵙겠다고 말씀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야 가능은 할 것이오만, 무슨 일이라 전해야 하겠소?”
“흐흐, 범 잡으러 범 굴에 들어간다 해 주십시오. 저는 우선 전동 계시는 어르신들을 뵙고 곧장 향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웃음은 능청맞다 해야 할까, 음흉하다 해야 할까. 대원군이나 김병학이 걱정할 일이지 자신의 일은 아니라 여기면서 김가진은 알겠노라 승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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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인구 통계에는 불확실한 점이 많아, 이 시기 조선의 인구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이 시기에 상투적으로 ‘이천만 동포’라는 표현이 등장해 널리 쓰이게 되었지요. 다만 정확한 수치가 어찌 되었든, 실제 이천만 명은 한참 밑돌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반올림하였다고 치면 문제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레임덕’이란 표현은 의외로 연원이 깊어, 18세기 중반 영국 금융가의 은어에서 발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중반에 알 수 없는 사정으로 미국 정계로 전파되어, 우리가 아는 의미로 다시 변화하게 되었지요.
잘 알려진 것처럼, 장동 김문, 즉 흔히 말하는 (신) 안동 김씨가 세도를 쥐게 된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했던 김상헌과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때 화약고에 불을 질러 순사(殉死)하였다고 알려졌던 김상용을 배출하면서, 김문은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힘을 뻗치기 시작합니다. 이후 부침을 겪다가 순조대에 이르러 마침내 외척이 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세도정치를 펼치면서 전횡하게 되지요.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동 김문 본인들은 스스로 검소하고 충성스럽다고 여겼다는 점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집권 기반이 한때 엄격한 의리관과 명분에 있었다는 인식, 그리고 군주의 권위에 기대는 세도정치의 기반이 그리 견고하지 않다는 위기의식 등이 종합되어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어느 정도의 자제력을 발휘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경구 2013, “조선 후기 안동 김문의 의리관” <조선시대사학보> 64).
세도정치 및 세도가에 대한 온갖 야사는, 얄궂게도 이때 쇠퇴한 조선이 끝내 망국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많이 전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당시의 소문을 모은 『대동기문』이나 보다 더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는 『매천야록』 등은 비록 역사적으로 엄밀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치밀한 방법론을 통해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있다고 알려진 – 예컨대 당시 경험자의 증언을 채록하거나 여러 야담을 교차검증하는 등 – 이야기를 편집하였는데, 조선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집필되기도 여러웠을 뿐더러 출간은 더욱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작중 초반에 잠깐 언급되는 ‘나합’은 김문 위세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를 잘 보여주는 인물로, 김좌근이 아끼던 나주 출신의 애첩입니다. 고작 첩실이었으나 김좌근의 총애를 바탕으로 위세를 부려, ‘나주 합하’ (줄여서 ‘나합)라 불렸다고 하지요.
또 다른 예로 언급되는 부조지은이란, 4대가 지나도 신위를 묻지 많고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지정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 조선 말에는 사사로이 불천위를 지정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직접 조정에서 지정하는 것이 훨씬 영예로운 일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듯합니다. 1861년 학문과 절의로 유명하다는 ‘세평’이 있던 장동 김문의 선조 네 사람을 불천위로 지정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장동 김문의 가문 서원이라 할 수 있는 양주 석실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물론 이후 대원군 집권기 서원 철폐령이 내리자 곧장 훼철되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