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아버지의 죄 (1)
나라에서 한강에 철교를 놓는다고 하니, 곧장 강 건너편 벌판 지가가 크게 뛰었다. 상류로 올라가면 크고 작은 지류에 둑 하나쯤은 쌓여있기 마련이라, 그 옛날 장마철만 되면 수십리 바깥 바다를 안으로 끌어온 듯하게 되던 것은 이제는 드문 일이 되었지만, 그렇다 한들 아예 넘치지 않는 것은 아닌지라 강변에는 별 쓸모가 없는 땅이 여전히 많았다.
그러나 기화가거(奇貨可居)란 여불위 이래 기천 년 불변의 도리라, 한성 안의 가쾌(家儈, 주택 매매 중개업자)들 중 장삿속 유별난 이들이 앞장서서 스스로 지쾌(地儈)라 이름하고는, 그런 남아도는 땅에 값을 붙여 매매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두세 해에 한 번은 물에 잠기니 딱히 쓸모가 없다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헐하게 미리 사들이면 – 지금 시중에 남아도는 금은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 훗날 무슨 조처가 있어 한강이 넘치지 않게 될 때 크게 이문을 남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무슨 대동강 강물 팔아먹는 소리냐 하였겠지만, 또 그리 따지면 정말 한강에 쇠로 다리 놓는 공사를 벌이리라는 것은 누가 알았겠는가.
문중의 가산을 내든, 저의 딴 살림이 있든, 개화당 젊은이들 중에도 그렇게 강 반대편에 땅 사두는 자 적지 않았다. 그때 비록 석전 갈음하는 것은 통렬히 실패하였다지만 여전히 소위 ‘육체(育體)’하는 일에 마음 쓰기를 그치지 않던 윤치호가 발의하기를, 어차피 한동안 가택 올리지는 못할 땅이니, 놀리지 말고 총포 따위를 습사(習射, 사격훈련)하는 터로 씀이 어떻겠느냐 하였다. 이것이 열음정(洌陰亭) 열린 내력이었다.
대개 활터라 하면 한량들이 자주 찾기 마련인데, 이 열음정은 아직 그런 무리에게는 낯선 총을 쏘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그 운영하는 이가 운영하는 이다 보니, 범상한 사람들은 간혹 기차 오가는 소리 사이에 울리는 총소리는 들을지언정 감히 찾아가 노닐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그 열음정에서 나와 나루에서 배 기다리는 두 소년은 범상한 축에 들지 않을 것인데, 그 면면을 살피자면 얼굴은 앳되었으나 덩치는 장사인 김창암(金昌巖)과 생긴 것은 평범하나 그 집안이 비범한 안중근이었다.
“햐, 암만 생각해도 재주가 신통하다니까. 어떻게 그만치 떨어진 과녁에다 백발백중이람.”
“그게 뭐 재주라고. 그냥 숨 참고 잘 겨냥해서 쏘기만 하면 맞는 게 총인데.”
김창암의 칭찬에 머쓱해진 안중근이 겸양하였다.
“그렇게 따지면 경서 읽고 셈 배워서 치르면 붙는 것이 고시겠다. 사람이 칭찬을 하면 좀 받아.”
“그건 되었고, 이제 무사히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해 보아야지.”
김창암은 병자(1876)생이요, 안중근은 기묘(1879)생이니 굳이 연배로 따지면 김창암이 형이요, 반대로 가세로 따지면 김창암은 해주 고을의 별 볼 일 없는 집안 출신으로 안인수네에 의탁하고 있으니 – 이제 국법으로는 그런 구분이 없다지만 – 안중근이 상전이다.
그러나 저의 가친이 해주서 미곡상 계속 하고 있는 안인수의 장남 태진에게 간청하여 받아낸 편지 한 장 달랑 들고 처음 창암이 상경하였을 때, 마주치고서 통성명한 뒤 안중근이 곧장 제의하기를 사정 여차하니 적당히 가감하여 동갑내기로 지내자 하였으므로, 둘은 어느새 말 툭 터놓는 것이 하등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안중근이 뉘 집 자제인 줄은 알아도 -열음정 오간 것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창암 내력은 모르는 뱃사공이 보기에는, 아무리 보아도 잡인과 시비 붙을 때 대비하여 대동하고 다니는 머슴인데 흉허물없이 떠드는 것이 퍽 신기할 뿐이었지만.
“요맘때쯤이면 아버님은 아마 안 계실 테고... 할아버지만 잘 피하면 되겠네.”
“글쎄, 요새 추거가 임박하다 보니 어르신 일정이 꼭 예전 같지는 않을 텐데.”
시계 흘낏 들춰본 안중근의 낙관에 김창암이 딴지를 걸었다.
“설마 그러겠어? 그리고 추거 때문에 누굴 만난다고 해도, 아버님 구락부로 찾아오든, 사랑방으로 찾아오든, 그쪽이 찾아오겠지, 아버지께서 찾아가지는 않으실 테니 마주칠 일 없는 것은 매한가지야.”
“뭐, 그랬으면 좋겠네. 우리네 서원에서야 늘 그렇듯 발설할 사람은 없으니 그쪽은 걱정 없고.”
가업을 이어야 한다, 학문도 대성하여 누가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들 뜻이야 잘 되라 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안중근 그에게 요하는 바가 많았는데, 가늠쇠와 가늠자 사이에 과녁을 두면, 나머지 세상은 보이지 않고 오직 명중과 부중(不中) 둘이 있을 뿐이니 그 느낌이 좋아 안중근은 종종 이렇게 서원에서 도망하여 열음정으로 가곤 하였다.
그리하여 총질에 별 감흥 없는 김창암을 충동질하여, 혹 훗날 시험 보기가 걱정이라면 몰래 가르치는 사람을 구해줄 터이니 함께 가자고 끌고 오곤 하였는데, 안중근이 집안 내세워 선생들 입막음을 하고 김창암이 차분하게 나머지 원생들을 타이르면 – 그를 따르는 원생도 적잖거니와, 설령 심복하지 않아도 그 주먹은 다들 두려워하였다 – 이렇게 달포에 한두 번쯤 빠져도 뒤탈은 없었다.
뒤탈은 그러므로 반드시 집안에서 발각되었을 때 생길 터인데, 특히 개화당 하는 일이라면 덮어두고 싫어하는 안인수는 그의 아끼는 손주가 개화당이 만든 누각에서, 개화당 젊은이들과 어울려 노닐었다 하면 곧장 경을 칠 기세로 달려들 것이요, 효심 지극한 안태훈의 귀에 먼저 들어간다면 조금 은밀하게 할 뿐 훨씬 엄한 처분이 내릴 것이었다.
“언제고 할아버님 마음속 심화(心火) 다 풀리면 떳떳하게 쉬는 날마다 이렇게 올 수 있겠지만, 그런 좋은 날이 올 리는 없겠지 아마.”
“엉. 큰어르신께서 장동 김문에 원한 깊은 것은 나도 알 정도니까.”
“거참, 나라도 작은데 다들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나.”
“글쎄, 과거지사라는 게 그렇게 쉽게 잊히지 않잖아. 오히려 대 이어갈수록 심해지면 심해지지.”
당장 김창암 본인부터가, 아버지께서 옆동네 이 생원네와 거하게 싸움 붙은 뒤에 이리 오게 되지 않았던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반상(班常)의 구별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니, 너는 반드시 양반이 되어라.’ 하는 것이 상경하기 전 그가 들은 마지막 당부였다.
물론 요즘 세상에, 어디 상놈이 양반 시늉을 하느냐 하면서 노상에서 붙잡아 갓을 찢어발긴다던가 하는 일은 없겠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한때 그런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는 거듭 부풀려지고 그에 따라 미움도 이어지기 마련. 당장 김창암 본인도 더 철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안중근을 꼬드겨 해주에서 그 이가 놈들의 코를 눌러줄 방도 없을까 속으로 고민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지금이야 안중근에게 또래의 동무 하나쯤 붙여두는 셈 치고 군말없이 식객으로 받아주어, 학비까지 상당히 지원해주는 그 은혜가 작지 않음을 알 만큼 머리 굵었으므로 그런 생각은 감히 품지 않았지만, 김창암 본인이 그럴 정도라면 다른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누가 먼저 툭 터놓고, 그때 일은 우리네 오대조께서 잘못하신 게 맞다. 내가 대신 사죄하겠노라, 이런 식으로 풀어가면 참 좋을 텐데.”
푸념 사이에 안중근의 입에서 엉뚱할 만큼 거창한 소리가 나왔는데, 그러건 말건 마포는 부쩍 가까워오고 있었다.
농한기에야, 도성에 퍽 신기한 문물 많다더라 하면서 구경 오는 농군들이 많으니 그런 ‘신기한 문물’의 대표격인 전차는 항상 밀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만한 이들은 죄다 논밭에서 김매고 있을 철이요, 아직 일터 오가는 사람들이 몸 실을 때도 아니어서 비교적 한산한 축에 들었다.
그 덕에 거의 십 리는 걸어야 할 것을 삼군부 앞에 내려서 한두 리만 걸음하면 되게 되었으니 운이 좋았다.
그렇지만 거기서 운이 다했는지, 쪽문으로 은근슬쩍 들어가 행랑 사이로 살금살금 행보하는데, 그림자만 보여도 누군지 뻔히 보이는 김창암 대신 먼저 정탐하던 안중근이 급히 손짓하여 몸을 낮추었다. 오늘따라 기력 왕성한 안인수가 직접 마당 쓸던 이들 두엇을 불러다 꾸중하고 있던 것이다.
더구나 하필 그 위치가 절묘하여, 우회하는 길은 단 한 갈래. 사랑방 쪽이었다. 과연 가까이 갔더니 두런두런 목소리.
사박사박 나는 발소리를 최대한 숨기며 다가가니, 목소리 하나는 익숙한 아버지 것인데, 나머지 하나는 금시에 초문(初聞)이라. 언뜻 들어도 민감한 정국의 이야기라, 채근하는 김창암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기 마련이라지만, 배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니지요.”
“그렇습니까.”
지금 그의 마음속에 품은 바가 과연 복수심인가? 이완용 본인 느끼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지만, 아마 그의 처지에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면 필히 그런 마음 품었을 것이므로, 바깥에 내보이기로는 ‘나는 개화당을 위하여 힘썼는데 돌아오는 것은 냉대뿐이었노라’ 하면서 원한 품은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 결코 세상 일에 어둡지 않을 눈앞의 안태훈도 이 핑계를 그럴듯하게 여기는 것을 보면, 그런 시늉이 꽤 효험을 보았다 해야 할 것이었다.
“예. 하여 『해동일보』의 도움을 조금 얻고자 하고 있습니다. 장담컨대 신보의 사업에도 결코 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말씀해 보시지요.”
“아조 오백 년에 명신도 많고, 또 간신도 많았지요. 지금이야 현량한 인재가 가득하다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금일의 성세로 인해 과거의 잘잘못이 모두 가려져 잊힌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잘못일 터입니다. 예컨대... 장동의 김문만 하여도 지금이나 예전이나 나라의 동량과 같다지만, 그 기둥의 재질로 말하면 꼭 한결같지는 않았지요.”
상감이 아무리 한때 김옥균을 아끼셨다지만, 정말 그 어심에 변함이 없었더라면 애초 내치지도 아니하셨을 것이요, 또 저나 저의 아버지가 상감 혹은 대원군에게 누 끼친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갑작스레 김옥균이 저를 원수로 대하게 된 것은 성상 혹은 그 주변 누군가가 윤대에서 자신이 실토한 것을 고변하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본래 김옥균이 저를 쓰고 버리려 하였기 때문이라 봄이 가당하였다.
헛된 공명 대신 부귀 두 글자를 바라는 마음은 변함없는데, 지금 조선국 조정에서 능히 그리하기 위해 잡아야 할 연줄 세 가닥 중 둘 – 즉 개화당과 공산당 – 은 끊어졌으니, 마지막 남은 하나는 자유당이었다.
그러나 안인수와 그 아들은 명문가 자제라면 우선 덮어두고 의심부터 할 것이요, 명분과 도덕 놀음에 머리가 굳어있을 뿐 안목은 날카롭기 그지없는 최익현도 저를 바로 받아주지는 않을 것이라, 무시할 수 없는 공을 하나쯤 세워야 하였다.
“지난 계해년 이래로 세월이 서른 해나 지났다지만, 아직 예전 일을 기억하는 노인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런 사정을 잊히기 전 세세히 채록하여 세상에 알림이 신보의 본디 해야 할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왕 척진 사이인 김옥균의 집안, 장동 김문을 팔아, 자신이 능히 재기할 바탕을 얻는다면 속된 말로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자칫 여기저기 다른 집안들과 혈연 이어진 자신도 곤란해질 수 있으니, 기고할 때는 그럴듯하게 남의 이름을 쓰든 해야겠지만.
“이르시는 말에 일리가 있군요. 헌데 하필 추거를 앞둔 지금 이리 찾아오심은 필히 다른 뜻이 있음이겠지요.”
“예. 지금 헤아리시는 그 연유가 맞을 것입니다.”
공산당이 향리에서 무섭게 세력을 모으는 바람에, 집안끼리 계속 소소하게 다투었다가는 자칫 향회고 유향소고 모두 공산당 놀이터가 되어버릴 것을 깨달은 향반들이 뭉치고, 또 더러는 최익현 본인의 강력한 권유로 지체 낮은 이들도 그들 사이에 끼워주고 있다지만, 그래도 안인수와 그 뒤 신흥 ‘재벌(財閥)’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 안씨네 추천 받아 자유당 입당하고 이 다음 추거쯤 하여 어디 감투나 하나 얻어내면 우선 그의 양아버지 앞에서도 면이 살 것이요, 훗날 다시 기용되어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한낱 역관의 아들도 판서를 하는 세상에 자신이 못할 것은 무엇인가?
“흠, 그렇군요. 그러면 『일보』 쪽에 연통을 넣어, 채사(취재)할 사람 몇몇을 붙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덮어두고 의심부터 하는 듯해 송구스럽습니다만...”
“하하,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믿어주심에 깊게 감사드려야 할 일이지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일어서, 문을 열었다. 아마 이완용이 지금 안태훈 쪽에 서 있었더라면, 바로 앞에 있다가 쏙 사라지는 앳된 얼굴 둘을 언뜻 볼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언뜻 들어도 뭔가 중한 일인 듯하여, 귀동냥함이 영 께름칙하였던 김창암이 계속 속삭이기를 얼른 갈 길 가지고 하였다.
덩치도 큰 녀석이 퍽 겁도 많다고 여기면서 괜찮다고 장담하는데, 하필 재수가 없게도 그렇게 소근대느라 사랑방 안의 객이 일어나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하였다. 객이 문을 벌컥 열자 그제야 몸을 숨겼는데 (그 객이 누군지는 몰라도, 언제고 소소하게 골탕을 먹여주어 앙갚음하겠다고 결의하는 안중근이었다.), 그 사이 안태훈의 눈총에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너희 두 놈 다 멀쩡히 보았으니 그 자리 꼼짝 말고 있으라’ 하는 눈길 주고, 그 ‘일당(一堂)’이라는 자를 섬돌까지 배웅한 뒤, 대문 닫히는 소리 난 뒤에야 안태훈이 입을 열었다.
“나오너라.”
둘이 쭈뼛쭈뼛 나와 섬돌 아래 섰다.
“금일 서원이 휴강하였다는 이야기는 내 듣지 못하였다.”
“어르신, 제 잘못입니다.”
“아서라. 네가 꾀어냈을 리 없지 않으냐.”
시키지도 않은 김창암이 먼저 나섰으나, 안태훈은 치기 어린 의리에 그리 감명을 받지 않은 눈치였다.
“우리 공행에서 총포도 만들고 있음은 중근이 너도 모르지 않을 게다. 집안일 돕는 이들 중 탄알이나 화약 냄새를 알아차리는 이가 하나 없었겠느냐. 네가 축지법을 익혀 저 북변에서 포수 노릇 하는 게 아니라면, 필히 저 열음정 오가는 것이겠지.”
“아버님, 죄송합니다.”
“중근아. 네 나이가 올해로 몇이냐.”
“열넷입니다.”
“시세풍속이 예전과 같았으면 성혼하여 일가 이룰 나이다. 언제까지 철부지처럼 처신할 것이더냐?”
어조는 차분하되 차갑기로는 폐부를 찌르는 듯. 이어지는 말 한 마디마다 안중근이 절로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해도 반박하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 그리고 그 개화당이 어떤 무리더냐. 우리와는 뿌리가 다르다. 그런 자들과 상종한다면 후환이 어찌 없겠느냐? 네 한 몸 즐거움을 위해 집안에 화란을 몰고 올 생각이더냐?”
안중근도 배워 알고는 있다. 소위 세족(世族)이란 수백 년간 명신을 고루 배출하였으니, 자칭하기로는 안향(安珦)의 후손이라지만 실제로는 그 뿌리가 다분히 의심스러운 – 차마 누구도 입 밖에 내지는 못하지만 – 자신과는 다르다.
“... 지금이야 번듯한 사업으로 치부하여 여기저기 공장도 짓고, 양행도 운영하고 한다지만, 그 밑천이 어디서 나왔는가 생각해 본 적 있느냐? 우리 집안은 네 할아버님과 그 윗대에서 근면히 노력하고, 또 지극한 성은을 누차 입어 여기에 이르렀지만, 저들의 밑천은 모두 그 윗대에서 팔도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 얻어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두어 해 전, 아버지를 따라 인천부 맥안공행 공장에 찾아갔을 때 본 바, 밑천의 근원이 어떠한지는 몰라도 지금 경영하는 것에 있어서는 소위 ‘저들’과 자기 집안이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였다.
앞서 사랑방에서 새어나온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마 잘은 몰라도, 장동 김문이니 풍양 조문이니 하는 집안들의 부가 꼭 깨끗한 것만은 아니라는 말은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들을 성토하여,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선조의 잘잘못을 가려 깔끔하게 사과하고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세상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음을 알 만큼은 성숙한 안중근이었다. 저 ‘일당’이라는 자의 말대로 옛날옛적 벌열 조상들의 부정을 낱낱이 고발한다고 해 보자. 개화당 사람들-열음정에서 몇 번 마주쳐 개중 면식 있는 이들도 있었다-이 어찌 나올까.
그들로서는 가만히 앉아 있다 갑자기 욕을 당하는 셈이니 우선 반발부터 하고 볼 것이다. 다들 나름의 생각도, 재주도 있는 자들이니,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요, 오히려 역으로 몰아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싸우고 또 싸우다 보면, 옛적의 원한은 해소되기는커녕 더 쌓이기만 할 것이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잘못이 저질러진 지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지금 드러내어 꾸짖지 않으면 오히려 영영 한을 풀 기회가 없을 것이요, 이후로도 옛 잘못을 청산하지 못하였다 하는 허물이 꾸준히 남아 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생각이 그에 이르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도저히 판가름이 되지 않아, 계속 가을철 서리처럼 내리는 아버지의 꾸짖음과 겹쳐 머릿속이 멍해졌다.
“... 이러한 시국이니 네 한 몸 즐거움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 이어지려는 찰나, 모퉁이 너머로 지팡이 짚는 소리와 함께 홀로 궁시렁대는 노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하간 요즘 것들은 투미하기가 한결같으니 원... 엥, 응칠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
꾸중 마치고 불평 들어줄 사람 찾아다니던 안인수가 모퉁이를 지나 모습 드러내니, 두 소년에게는 설상가상이었다.
“아, 아버님. 오늘 서원이 휴강이라 합니다. 하여, 서원이 쉰다 한들 글공부는 게을리 하면 아니 된다 훈계하고 있었습니다.”
“허어, 그렇더냐. 암, 그래야지. 열심히들 하거라.”
얼어붙은 두 사람 대신 안태훈이 태연자약하게 먼저 답하여 집안의 고식(姑息)을 지켜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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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몇 번 언급된 가쾌, 혹은 집주름은 흔히 조선시대의 부동산 공인중개사로 불리곤 합니다만, 실제로는 그 성격이 많이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 거래 대상은 가옥 위주였고, 그런 거래의 수요가 있는 한양, 평양 등 일부 대도시에서만 운영이 이루어졌습니다. 직접 발로 뛰기 어려운 노년의 집주름들은 대여섯씩 모여 일종의 사무실 같은 것을 운영하곤 하였는데, 복덕방(福德房)이라는 유서깊은 명칭은 여기서 기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한양, 평양뿐 아니라 개항장 등지에서 갑작스러운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부동산 투기와 사기가 성행하였고 이에 따라 1890년 각종 중개업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된 『객주거간규칙』을 통해 중개업의 체계화가 시작되었고 1893년에는 한성부에서 처음으로 일종의 공인중개사 인증인 첩장(帖帳)을 발급하였습니다.
또 다른 해주 사람으로 안씨 일가에 이어 김창암, 더 잘 알려진 개명 후의 이름으로 김구가 등장하였습니다. 안중근의 세계(世系)가 불분명한 것처럼, 김구 역시 본래 (구) 안동 김씨의 후손이라고는 하나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본인이 『백범일지』에서 술회한 바에 따르면,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이 몰락할 때 연좌를 피하고자 해주로 피신한 뒤,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김구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인근 양반가들에게 박대를 당하는 처지로 굳어진 듯합니다. 그의 아버지 – 아마 체구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도 특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옆의 반가인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 일족과 자주 다투었고, 길을 가던 중 그의 친족을 만난 어느 양반이 갓을 빼앗아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는 일화도 전합니다.
작중에서는 여러 이유로 그만큼 반상의 차별이 심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전 조선의 사회구조는 약화되었을지언정 계속 유지되고 있고, 무엇보다 그 기층의 의식이 남아있지요.
원 역사에서도 김구는 소싯적에 학문에 뜻을 두었습니다. 과거를 보아 양반이 되겠다는 뚜렷한 신분 상승 욕구에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원 역사에서 1892년 상경해 과거에 응시하여 당시의 부패상을 본 것은 그에게 매우 큰 충격이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