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씁쓸한 힘 (1)
조선이 러·불동맹에 끼어들게 되었음이 공포된 날 밤, 독일 제국의 황태자 빌헬름은 꿈을 꾸었다. 적어도, 지금 비스마르크 앞에서 열변 토하는 빌헬름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멀리 동쪽에서부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소. 구름이 지나는 곳마다 번개가 내리치고, 검게 그을린 폐허와 황무지만이 남았지. 그 먹구름 위에는 한 거인이 서 있었소.
처음에는 이교의 신인 줄 알았지. 하지만 곧 구름이 더 다가오면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소. 섬뜩한 웃음이 만면에 가득한 콘푸치우스(공자)였다오.”
“본래 꿈이란 것은 허황되기 마련이지요.”
암 재발 진단을 받은 이후 나날이 병세 악화되는 카이저의 안부를 묻고자 찾아온 비스마르크는, 하필 비슷한 이유로 찾아왔던 빌헬름을 맞닥뜨리는 바람에 전혀 관심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계속 들어보시오! 꿈에서 깬 뒤 한참을 생각했소.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깨달았지. 콘푸치우스는 하나의 상징이오. 지금 우리 대독일을 가로막기 위해 뭉친 구세계의 위선과 모순, 그것이 우리의 숨통을 틀어막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외다.”
“글쎄요. 제가 늙어서 요새 세상 물정에 어두운 탓인지, 조선이 강대국으로 도약해 유럽을 위협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은 듯합니다. 언제적 소식이었는지요?”
이미 세간의 여론 – 아마 눈앞의 황태자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 이 거세게 일어나 퇴직이 임박한 판국에, 황태자의 눈치 따위 보아줄 필요는 없었으므로 대꾸에는 냉소가 한가득이었다. 그러건 말건 이미 머릿속으로는 대관식까지 그리고 있던 빌헬름은 말을 이어갔다.
“그 얘기가 아니란 말이오!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게요? 구세계의 위선, 그것은 우리의 ‘동맹’ 영국이나 프랑스, 그런 나라들이 만들어냈고 저 동양인들은 거기에 기생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문명이다 운운하며 그럴듯한 껍데기를 씌워주고 있을 뿐이오.”
“예, 못 들은 척하겠습니다. 정치에서 위선이 언제부터 악덕이었습니까? 그리고 영국이 아무리 싫다고 한들, 영국 없이 러시아와 프랑스 두 나라를 억지할 수 있으리라 믿으십니까?”
“내게는 현명한 친우들이 여럿 있는데, 그들 중 몇몇이 계산을 해보았소. 우리 독일의 산업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이미 경제력으로는 영국 본토를 추월했다더군!”
그 계산 중 절반 이상은 지난 베를린 회담에서 황태자가 그리 혐오하는 조선 대표단이 선보인 개념에서 차용해온 것이겠지만, 비스마르크가 더 비꼬기를 기다리지 않고 황태자의 자신만만한 장광설은 이어졌다.
“이대로 가면 수년 안으로 우리는 혼자서 프랑스와 러시아를 상대할 수 있게 될 거요. 그러니 억지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 오히려 때를 기다렸다가 한 번쯤 다시 쓴맛을 보여줘야지. 지난번(보불전쟁)에는 우리가 너무 관대했소.”
“황태자 전하의 군재가 대왕(프리드리히 대왕)이나 나폴레옹보다 뛰어나심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으니 저의 불찰입니다. 과연, 영국 없이 우리 힘만으로 양면전선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외교고 무엇이고 시간낭비일 뿐이지요!”
내일모레 사직한다지만 곧 즉위할 황태자 앞에서 이 정도로 비꼬아도 될까 싶어, 졸지에 둘 사이에 낀 시종장을 비롯해 주변인들이 모두 숨을 죽이는데, 황태자가 늙은 대신의 냉소를 진담으로 받았다.
“하! 양면전선이라. 그 고루한 소리는 작고한 몰트케 장군이 한창 활약하던 시절에야 통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전쟁의 논리가 변한다면 정치의 논리도 변해야 하는 법이오. 나폴레옹에게는 철도가 없었잖소?
신임 참모총장 슐리펜 백작(Alfred von Schlieffen)이 단언하기를, 우리가 먼저 동원령을 내린 뒤에 역습을 가한다면, 양면전선 중 한쪽을 순식간에 정리하고 다른 한쪽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더군.”
“그리고 공세가 실패한다면 우수한 독일의 공업력으로 공장에서 사단을 찍어내면 되겠지요.”
“공세가 실패하지 않으면 될 일이오. 이리 말하면 무모한 도박이라 매도하겠지. 하지만 정말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줄지도 의문스러운 영국에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도박 아니오? 더구나 독일의 경제가 앞으로 폭발적으로 발전한다면, 그만큼 소득이 줄어들 영국의 배불뚝이 자본가들은 더욱 우리를 경계하겠지.
그러니 그들이 하는 명분과 도덕 놀음에 어울려주는 것보다, 우리 힘으로 우리 앞날을 개척하여 스스로 위대함을 이룩해야 하오. 그것이 바로 독일 정신이란 말이오!”
황태자의 높아지는 언성에 비례해 신랄해지는 비스마르크의 대꾸가 도를 넘을까 두려워한 시종장이, 힘껏 헛기침을 했다.
“흠흠, 부황께 자칫 폐를 끼칠 뻔했군. 좌우지간 나는 경의 과오를 반복할 생각이 없소. 어차피 함께 국정을 운영할 날이 오지도 않을 테니, 이 정도만 하도록 하지.”
늘 그렇듯 한 팔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빌헬름이 뒤로 사라지자, 비스마르크는 안도인지 회한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전신에 퍼진 암으로 인해 생명이 위험하지 않을 만큼 진통제를 투여하다 보니, 손목의 근육이 이완되어 예전처럼 펜으로 필담 주고받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하여 ‘벙어리 카이저’는 얼마 전부터 대신 타자기를 쓰고 있었다. 한 손가락으로 느릿느릿 타자를 치고, 그것을 시종장이 읽어주는 식이었다.
“정신이야 약기운으로 혼미할지 몰라도, 귀는 여전히 열려 있다네 (라고 하셨습니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폐하.”
“나보다 그대가 먼저 베를린을 떠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신문에서는 벌써, 얼른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헬골란트(헬리골란드)로나 가버리라고 떠들더군요.”
영일동맹이 독일에게 보내는 신호를 놓칠 비스마르크가 아니었다. 이미 러시아와의 관계를 놓쳤기 때문에 오히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삼국동맹을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고, 여기에 영국과의 동맹까지 체결되어 처음 그렸던 것만은 못해도 나름대로 안정적인 동맹구조를 구축하였으므로, 이만하면 마지막 외교적 치적으로 적당하지 않은가 싶었다.
거기에 혼신을 다한 협상으로, 멀리 동아프리카의 잔지바르 술탄국에 대한 불개입 – 즉 영국의 주도적 이권 – 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함부르크 앞바다의 헬골란트를 양도받고, 덤으로 잔지바르 맞은편 대륙 본토(현 탄자니아 일대)에서의 영향력도 인정받았다. 이만하면 영토에 걸신들린 나라 안의 목청 큰 자들까지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결과는 오히려 반대였다.
“별로 위로는 되지 않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협상에서 그대가 최선을 다했다고 믿고 있네. 정치라는 것은 펜스와 같아서, 칼자루 쥐기 전까지는 누구든 훈수를 둘 수 있기 마련이지. 그러니 저 범독일연맹(Alldeutscher Verband, Pan-German league)이 떠들어대는 소리에 너무 상심하지 말게.”
‘늙은 고집쟁이가 우리의 미래를 팔아넘겼다!’ 하는 것이 비난하는 논조의 골자였다. 물론 헬골란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동맹을 체결하였다면, 그때는 또 ‘동맹이 아니라 목줄을 채웠다!’ 운운하며 비난을 했겠지만.
지금이야 말이 요충지지, 바다가 평화로운지 오래되어 휴양지로 더 인기가 있는 헬골란트다. 하지만 킬(Kiel) 운하가 완공되어 코펜하겐 옆을 지나지 않고서도 동해(발트해)와 북해를 오갈 수 있게 되면, 그때는 과거 나폴레옹 전쟁 시기보다도 중요한 곳이 될 터.
그렇지만 욕심 많은 독일의 자칭 식자들은, 동맹이 급한 것은 영국이므로 가만히 앉아서 헬골란트만 내놓으라 했으면 되었을 것을, 치적이 필요한 비스마르크가 서둘러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가만히 있으면 훨씬 많이 챙겨갈 수 있었을 동남아프리카에서의 이권을 포기해버렸다며 목청을 높이곤 하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인수인계 준비는 잘 하고 있는가?”
이렇게 시끄럽게 비난 여론이 이는 가운데, 자유주의 헌법으로 배신을 당했다고 여기는 보수파들도 등을 돌린지 오래요, 이미 이전부터 척진 사이였던 사회주의자들과 카톨릭 세력들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지친 비스마르크는 – 어차피 외교의 무대에서 더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었다 – 얼마 전 사임을 발표하였다. 비스마르크의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자유주의자 카이저 한 사람뿐.
“카프리비(Leo von Caprivi)와 비버슈타인(A. Marschall von Bieberstein)에게 일러두어야 할 사항은 모두 일러두었습니다. 그들이 듣기만 한다면, 적어도 당장 신이 물러난 뒤의 공백은 최소화할 수 있을 듯합니다.”
“흠, 두 사람 모두 영 미덥지 못하다고 여기는 모양이로군.”
“이제 와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독일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 미더운 이가 별로 없습니다.”
카이저의 저 눈빛은, 아마 ‘그런가...’ 하면서 고민하는 것일 테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뒤, 다시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처럼 방에 울렸다.
“그렇다면... 황태자 - ‘내 아들 녀석’이라고 쓴 것을 아마 시종장이 다르게 읽은 듯했다 – 의 또 다른 모험 계획을 미리 자네에게 알려주는 쪽이 좋겠군. 떠나기 전 조언 한 마디라도 덧붙이도록 하려면...”
“모험이라 하셨습니까?”
“트란스발(현 남아공 일부)에 무기 판매를 제안하겠다고 하더군. 영국인들의 비트바테르스란트(현 요하네스버그 일대) 침투에 스스로 맞설 수 있도록 하겠다던데.”
몇 해 전 금광이 발견된 이후로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를 따돌리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트란스발 공화국이다. 아프리카너(네덜란드계 이민자의 후예)들을 독일인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영국에게 속된 말로 한 방 먹이기 위한 것이리라.
“하하. 정말 다 늙은 이 몸을 황태자께서 많이 싫어하시는 듯합니다.”
이미 카이저가 병상에 다시 누운 이후로 대부분의 대외 행사에 고개를 대신 내밀고 있는 황태자 빌헬름은, 저 수상쩍은 범독일연맹에도 필히 손을 대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곧 ‘뜻있는 애국자’ 명의로 트란스발의 자유인들을 돕자는 이야기가 퍼져나갈 것이다.
“아직은 관직을 쥐고 있지 않은가. 녹봉 값은 하고 나가게.”
카이저의 농담에 늙은 비스마르크도 헛웃음을 지었다.
김가진이 북경에서 돌아온 이후 대원군은 곧장 몸져누웠다. 어린놈에게 농락당했다는 데 화가 뻗친 것인지, 아니면 자신 있게 추진하였던 계략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겨우 임기응변으로 화를 모면했다는 데 크게 상심한 것인지, 나이 일흔을 훌쩍 넘겨 이제 그럴 때가 되었기 때문인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삶을 통틀어 자신이 아는 유일한 아버지인 대원군이므로, 직접 병문안을 갈까 생각도 한 귀남이었는데, 궁내부나 다른 중신들이 만류하기도 전에, 송구히 여기는 마음을 표하며 찾아오지 말 것을 구구절절이 청하는 운현궁 서신이 와 닿았다.
“글로써 위로하기에는 재주가 모자라니, 대신 지닌 솜씨나마 써서 마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소.”
글월 대신 군밤으로 답신할 생각이던 귀남이, 의아함을 얼굴로 드러내고 있는 민자영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근래는 세자도, 두 대군도 머리가 굵어져, 밤을 구워달라 조르는 일은 없어졌다. (물론 입맛은 정직한바 막상 구워서 쥐어주면 맛나게들 곧잘 들었다.) 예전처럼 중신들에게 구워서 나눠주는 것도, 본인들이 꺼리는 기색 완연하여 삼가고 있었는데, 그래서 숙직하거나 철야하는 젊은 신료들에게 격려차 구워줄까 생각도 하였건만,
‘저희가 어찌 감히...’
하면서 모두 한결같이 사양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사정을 들어보니, 근래에 출사하여 어제군밤이라 하면 박 문충공(文忠公, 박규수)이나 총리대신 최익현의 스승 되는 이 문경공(文敬公, 이항로) 같은 일세의 명신들에게 하사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만 들었던 이들로서는 질겁할 만도 하였다.
그리고 그보다 젊은 세대로 말하자면, 대만에서 쏟아져나오는 설탕 탓에 마치 귀남의 전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밤보다는 다른 군것질거리를 찾아다니게 될 것이므로, 격세지감이 아니 들 수 없었다.
“그러니 아직 그 맛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을 위하여 구움이 마땅하지 않겠소.”
하면서 화로를 뒤적이는데, 문득 자영이 한 마디 물었다.
“대원위 몸져누운 것이 근래 연경에서 벌어진 소동 때문이라 들었사옵나이다.”
“그렇다 하더이다.”
“물론 대국 정사도 근래에는 그 언로가 트이고 다스림의 방편을 얻었으니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를 미워하는 그 마음은 그대로일 것이라 하였은즉 아마 그것을 심란히 여기는 것이 아닐까, 감히 추측하자면 그렇사옵나이다.”
김가진의 보고한 바는 곧장 운현궁에 들어가고, 운현궁에서 나와 다시 교태전으로 향하고, 마침내 종종 교태전 들리는 귀남의 귀를 그 종착지로 삼았다.
엊그제 다른 중신들과도 잠시 이야기하였던 것이었는데, 그때도 서로 안타깝다 여기는 것 외에 딱히 나온 바는 없었다.
‘땅을 달라’ 하는 것이야 그 나라 안에서 능히 처리할 수 있는 것이라지만, 애초에 모든 사람에게 돌릴 땅이 있었더라면 그런 난민들이 무리를 이루지 아니하였을 것이요, 그들에게 모두 일을 주자면 반드시 다른 땅을 얻든, 농사 외에 공장을 돌리든 장사를 시키든 하여야 할 것이었다.
허나 이제는 공상의 일을 ‘말업(末業)’이라 한들 업신여기지는 못하는 세상이라, 조정 대신들도 어느 정도 그 이치는 터득하고 있었다. 굳이 호조에서 사정 탐문하여 아뢸 것도 없이 앉은 그 자리에서 떠올리기로도, 대국이 공장을 지으면 곧 조선국의 이문이 줄어들고, 장사를 나서게 되면 부득불 조선인 상고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라, 청국 국운 도로 일으키기에는 족한 계책일지 몰라도 조선과의 사이는 더 벌어질 것이었다.
물론 평소 귀남이 강조한 것처럼 언제까지나 면필 짜서 파는 일을 나라의 큰 영업으로 삼을 수는 없으므로, 미리견서 들어오는 기술을 저들 것으로 삼고, 새로운 문물 – 예컨대 종종 언급하곤 하는 그 돌기름 태우는 수레 – 을 만들어 천하를 두루 이롭게 하는 것이 나아갈 큰 길이었다.
그렇지만 언제고 그리해야 한다는 것과 지금 당장 그리해야 한다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고, 당장 인천목 만들기를 폐하게 되면 (당연히) 인천부 공장들이 곤란해지기 마련. 그러므로 사세 부득이하면 그때는 포기해야 하겠지만, 옆 나라 민심을 위해 먼저 나서서 도와주거나 할 일도 아니요, 그저 잘 되면 좋겠다 하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지켜볼 일도 아니었다.
하물며 당장 올해가 추거 있는 해인데 누가 나서서 장차 우리 백성 밥줄 빼앗아갈 수도 있는 청국 공장 짓는 이야기에 호의적인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농사도 아니요. 공상(工商)도 아니면서 일 없는 이들에게 호구지책 마련해줄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있겠소?”
“그것은... 송구하옵나이다.”
“괜찮소. 가뜩이나 운현궁 일 넘겨받는 것으로 분주할 터인데 내 말동무 하고 있으니, 곧장 명안 나오지 아니함도 가당한 것이오.”
그렇게 위로하고서 조선에 뒤탈 생기게끔 하지 않으면서 중국 사람들이 돈벌이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고심하는데, 간만에 번뜩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귀남 본인이 듣고 본바, 나라가 어려울 때 남의 나라에 가서 일하면서 돈벌이하는 수가 있는 것이라, 아직 여인이 바깥에서 일하는 것을 좋게만 보지 않는 세상이므로 간호사를 보내지는 못하겠지만, 광부 정도는 충분히 이곳저곳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지금은 서독이고 동독이고 아직 없고 그저 ‘독일’ 한 나라가 있을 뿐이요, 아마 그 나라에는 일꾼이 충분히 있을 듯하였다. 하지만 아직 세상은 넓고 인구는 적어, 잘은 모르지만 아마 저 원래 있던 세상의 반의 반이나 겨우 채울 것이었으니, 이제 막 나라 간판 내건 그런 동네에 일자리 한둘쯤 없겠는가?
군밤 굽는 것보다 대원군 마음 상한 것 달래주는 데는 이렇게 대책 마련하는 일이 더욱 용할 수도 있겠다 싶어, 다음 번 회의에서 곧장 거론하니, 다행히 신료들도 하나같이 명안이라며 호응하였다.
발상은 이러하였다. ‘고력(苦力, 쿨리Coolie)’이라 하여, 청국 사람들이 지난 백 년 넘는 세월 동안 세상 여기저기서 이미 품팔이를 하고 있었는데, 대개는 그 받는 삯이 헐하기 그지없고, 또 처우도 좋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전에 미국에서 소위 ‘황화론’ 일어나던 시절 조선에도 알려진바, 그처럼 조건 열악한 곳에 사는 화인들은 대개 저들끼리 무리지어 또 각종 악습을 퍼뜨리기 마련이었는데, 물론 서양 사람들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었지만 터럭 하나 정도의 진실은 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생각해내기를, 공식적으로 청국에서 일꾼을 엄선하여 좋은 일자리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고, 청국 혼자서 하면 덮어두고 의심할 나라가 적지 않으므로 재보나 군병은 부족해도 신의는 넘쳐나는 조선국이 보증을 해준다면, 모두에게 탈날 바는 없고 득될 바는 많았다.
이처럼 논의가 죽 진행되어 근래 천하에 이름난 광산 중 일손 급한 곳이 어디 있는가 조사하였으니, 지금 백림(베를린)에서 무슨 일 벌어지고 있는지 알 리가 없는 조정 신료들끼리 궁리한바 그 명단 맨 위에는 비주(아프리카) 남쪽 끄트머리 발안국(潑岸國, 트란스발)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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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언급되는 빌헬름 2세의 꿈은, 그가 실제 역사에서도 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직후의 일이었는데, 그 꿈의 내용은 부처(일본)가 용(중국)을 타고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고 하지요. 당시 궁중화가였던 헤르만 크낙푸스가 『유럽의 민족들이여, 그대들의 가장 소중한 재보를 지켜라(Völker Europas, wahrt eure heiligsten Güter)』라는 제목의 회화로 그려내기도 했는데, 이는 빌헬름 2세의 확장주의와 황화론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지금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1890년 체결된 헬리골란드-잔지바르 협정은, 작중에 언급되는 것과 얼추 비슷한 조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케냐(영국령)에 대한 독일령 일부 할양, 나미비아 서쪽의 영국령 일부 할양 등이 추가되었고, 당연히 영독동맹은 없었습니다.) 본래 덴마크령이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이 점령하여 영유하고 있던 헬리골란드는 비록 넓지는 않지만 19세기에 이미 휴양지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함부르크와 킬 운하를 틀어막을 수 있는 절묘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후 1차대전 중에는 두 차례나 대규모 해전이 치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전 베를린 회담 파트에서도 잠깐 언급된 잔지바르는, 현재는 탄자니아에 속한 작은 섬(서울의 4배 정도 크기입니다)이지만 본래는 다른 나라였습니다. 포르투갈이 전초기지를 설치했던 것을 인도양 일대에 광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했던 오만이 탈취했고, 이후 1856년 독립해 현 탄자니아 해안을 지배하고 내륙과의 교역을 독점했지요. 그러나 베를린 회담 이후 서구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이 가속되면서, 잔지바르 술탄국은 영국과 독일 사이에서 쪼개지게 됩니다.
결국 해안 영토의 대부분은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편입되고, 잔지바르 섬만 남은 술탄국은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합니다. (이 과정에서 개전 후 38분 만에 종결된 것으로 유명한 영국-잔지바르 전쟁도 일어났습니다.)
원 역사의 범독일연맹은 이 협정에 대한 반발로 결성되었습니다. 독일의 확장주의뿐 아니라 반유대주의, 반(反)폴란드인 노선 등을 내걸고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젊었을 때 잠시 가담한 것이지만 유명한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도 한때 몸담았을 정도였습니다. 작중에서는 선후관계가 뒤집혀, 범독일연맹이 황태자 빌헬름의 물밑 선동 등등으로 말미암아 먼저 고개를 내밀게 되었습니다.
본래 역사에서도 독일은 통일 이후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었습니다. 『브리태니커사전』이 요약하고 있는 발전상을 인용하면, 보불전쟁 직전 영국 본토의 철강 생산은 독일의 두 배에 달했지만, 1893년에는 독일이 영국을 추월했고, 1차대전 개전 직전에는 수치가 뒤집혀 독일의 생산량이 영국 본토의 두 배 이상에 달했습니다. 1차대전 직전에 이르게 되면 독일 제조업은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륙 전체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이전에 잠시 언급한 것처럼 중국에서도 영국 다음으로 많은 무역량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1차대전에서의 실패로 인해 지금은 보기에만 그럴듯한 전쟁계획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는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은 러불동맹이 공식화된 이후 구상되기 시작해, 1905년 완성되었습니다. 작중에서는 비록 아직 구상 단계이기는 하지만 러불동맹이 일찍 등장하면서 수 년 일찍 그 뿌리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 핵심 내용은, 빠른 동원으로 비교적 동원이 굼뜬 러시아보다 먼저 대군을 모은 뒤, 속전속결로 프랑스를 패배시키고 신속히 주력부대를 동부전선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1차대전 초기에 실행될 때에는 모든 나라의 군대들이 실수와 실책을 반복하는 바람에 서부전선에서는 참혹한 참호전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원 역사에서 박규수가 받은 시호는 문익(文翼)입니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더 장수하기도 했고, 많은 치적을 쌓기도 했기 때문에 통상 그 격이 더 높다고 여겨지는 ‘문충공(文忠公)’ 시호를 받았습니다.
이항로에게 문경공 시호가 내려진 것은 1904년인데, 『승정원일기』를 살피면 이항로가 사후 거의 언급되지 않다가 러일전쟁 발발 후 최익현이 마지막으로 고종의 자문 요청에 응하여 상경하였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조치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은가 추측하게 되는 정황입니다. 작중에서 이항로의 문하생들이 훨씬 현달하였음을 생각하면, 십수 년 앞서 시호를 받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라고 봅니다.
여담으로 쿨리는 흔히 중국인 이민자 출신 노동자를 뜻하는 말로 (동아시아에서는) 알려져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중국인 이민이 시작되기 전부터 쓰였던 표현으로 어원은 인도에 있다고 합니다. 고력(苦力(kǔlì))이라는 표현은 후대에 음차한 것이지요. 실제로 중국인만큼이나 인도인들 역시 주로 영국 식민지를 중심으로 ‘쿨리’로 널리 쓰였습니다. 영국령이었던 카리브해와와 태평양의 섬나라에 오늘날에도 인도인들이 많은 것은 그 영향입니다 (대표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작가 V.S. 나이폴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