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93화 (193/320)

63.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3)

산동성 관현에서 올라온 조삼다(曹三多)는 태생이 싸움꾼이라, 그 주먹 쓰는 재주로 따지면 각양각색 권법이 번다하게 섞인 의화단 무리 내에서도 꽤 빼어난 축에 들 것이었다.

그러나 의화단은 권법 배우려는 모임이 아니므로, 정작 밥벌이는 주먹이 아니라 품팔이로 충당하고 있었다. 북양대신 비호를 받아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또 간간이 저들 부르는 일이 있으면 고개 들이밀고 몇 푼 안 되는 동전이나마 받을 수 있으니 정말 하잘것없는 백성들보다야 사정이 나을 것이련만.

그런데 기의하기로 약조한 것이 얼마 남지 않아 모두가 게첩(揭帖, 포스터) 만드느라 분주할 무렵, 어디 사람인지는 몰라도 고관인 듯한 사람이 찾아와, 의화단 안에서 나름 지위가 있는 듯한데 혹시 돈벌이 해볼 생각 있느냐 묻는 것이었다.

함께 산동에서 올라온 졸개들은, 푼돈이라도 벌어서 고향에 부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 관은 께름칙하지만, 돈은 항상 옳으므로 - 우선 제의하는 바나 들어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내놓는 말이 섬뜩하게도 역모 어쩌구 하는 것이라, 안 쓰던 머리를 간만에 굴려 몸 성히 빠져나가면서 돈벌이도 할 방법 없을까 고심하고 있었는데, 며칠 뒤 또 그 사람이 찾아왔다.

그런데 대뜸 이르기를,

“자네를 만나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면서 그 양놈들 소굴로 함께 가자는 것 아닌가.

고민 끝에 수락하여, 저의 고향 관현에 세워진 교회를 그대로 부풀린 것처럼 생긴 여각에 따라갔더니, 머리 모양새만 보아도 중국 사람은 아닌 남정네가 하나, ‘나 서양 사람이요’ 하고 널리 알릴 생각인양 코 큰 여인네 하나. 이렇게 두 사람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는 전가라고 합니다.”

무어라 말하는 것을 저를 데리고 온 사람이 옮겨주었다.

“의화단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수다. 뭘 원하시우?”

‘조선’이라고 하면 썩 감정 좋지 않아 퉁명스레 대답했는데,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그 어조는 그대로 전해졌을 듯했다.

헌데 상대편 남정네는 되려 씩 웃으면서 묻는 것이었다.

“우리 조선에 감정이 그리 좋지 않으신 듯하군요.”

“좋을 리가 있수? 우리 집안이 저 오랑캐 도깨비 놀음으로 풍비박산이 났는데 조선도 거기 한몫 거들고 있으니...”

조삼다가 아무리 내공 심후하다 한들 싸움질 솜씨는 싸움이 없으면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 직례에서 북양대신이 의화권 수련하는 장사들을 널리 모으고 있다더라 하는 풍문만 듣고 상경할 무렵에는 본인은 물론 일가 전체가 무일푼에 가까웠다. 후일 둘러대기로는 집안의 재보를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느라 그리 되었다고 했지만, 사실 그의 형 조소이(曹小二)의 도박빚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형이 처음부터 노름꾼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어서, 본래는 바로 옆 요성(聊城)에서 운하 오가는 배들 뒤치다꺼리 – 운하에 모래가 많이 쌓여서, 조금 가물기만 하면 사람 힘으로 옮겨야 할 때가 적지 않았다 – 와 형수의 길쌈으로 오히려 삼형제 중 가장 형편 좋은 쪽이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운하를 오가는 배는 줄어들고, 다른 데서 농사 망친 이들이 일꾼으로 마구 들어오면서 벌이를 폐할 지경이 되었다. 길쌈한 것을 내다 팔려 해도, 조선 인천목 때문에 손에 들어오는 동전이 나날이 줄어드니, 기댈 곳은 도박판이요 바랄 것은 요행뿐이었다. 조삼다 본인도 얼마 되지 않는 땅을 근처에 세워진 교회에서 사들이는 바람에, 권법 외에는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고야 말았다.

황하가 흘러넘칠 때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자들이 조선적십자사가 시작한 구호운동 덕에 명줄 이어 주변 도시로 흘러들었고, 반대로 조삼다의 밭으로 말하자면 본래 교회의 교인들이 억지로 빼앗으려던 것을 동네 오가는 조선 상인 박 모의 충고로 단념하고 헐값이나마 내주었으니 - 교인들과 향인(鄕人) 사이 틀어져 싸움이라도 붙으면 가운데 낀 자신이 곤란해지는 까닭이었다 – 조삼다의 근래 길흉화복이 조선에 말미암았다 해도 아주 잘못된 말은 아닐 터였다.

그런 사정을 모두 알 수 없는 조삼다야, 그저 막연히 ‘이게 다 고려귀자 탓이다’ 하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되뇔 뿐이었지만.

조삼다가 두서없이 저의 집안 사연을 풀어놓기를 마치자마자 대뜸 전가 사내가 물었다.

“그게 왜 조선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누구 탓이우? 토지신에게 뭐 죄라도 지어서 대대로 운수가 사나워졌나?”

빈정대며 받았는데 이번에도 화내기는커녕 또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가운데서 통변하는 사람이 뭘 잘못 옮기고 있는가 싶기도 했다.

“대지의 저주를 받았다... 그것도 일면 말이 되는 듯하군요. 그러면 다시 묻지요. 하늘과 땅이 잘못해서 사람이 불행하게 되었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낸들 아우? 뭐, 관에서 알아서 해주던가 해야겠지.”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의화단 모임에서 권법을 갈고 닦으면서 홀로 분을 삭이고 있는다면, 그런 사정을 관에서 백 년이 지난들 알아주겠습니까?”

“댁도 그 옆에 있는 나리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그래서 이레 뒤에 크나큰 모임을 열어서 우리네 뜻을 알리겠다는 게요. 그러면 다들 정신 차리겠지.”

그런데 저쪽의 입가에 걸린 회심의 미소는 도통 잦아들 기미 보이지 않아, 조삼다가 오히려 미심쩍다 못해 불안할 지경이었다. 뭔가 터무니없는 일에 말려들 듯한 직감이랄까.

“그러면 의화단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서, 모두 조선 탓, 서양 탓을 하면 사정이 나아질까요?”

“배배 꼬지 마시우.”

“의화단이 아무리 위세를 부린다고 해도, 그 부분을 짚지 못한다면 결국 남이 마음대로 써먹을 명분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남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고 싶지는 않겠지요?”

“말이야 좋지. 하지만 나나 내 아랫놈들이나 못 배운 것은 똑같은데...”

“못 배운 사람이 혼자서 떠들면 헛소리지만, 그런 사람들이 수없이 뭉쳐 한 가지 소리를 내놓는다면 그것은 천하의 공론이 됩니다. 지금 의화단에 그렇게 ‘대지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여기에 있는 조삼다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별난 것일까요?”

확실히 그건 아니었다. 다들 먹고살 길 막막하여 그럴듯한 의화단 이름 아래에 뭉친 것 뿐이지 않던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는지, 전가가 계속 충동질을 하였다.

“후... 좋수다. 한 번 해보지. 일이 잘 되든 그르게 되든, 약조한 은자는 내놓아야 하우.”

“물론이지요. 대신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잘 설득해주기 바랍니다.”

“그건 댁이 청하지 않아도 했을 일이우. 그래야 일 어그러졌을 때 나만 콕 찝어서 족치자는 소리가 안 나오니까.”

마침내 자의원 모이는 날이 당도하였다. 논의할 건이 적지 않아 각 성에서 올라온 이들이 하나씩 모여들고, 자의원에 직접 속한 사람은 아니라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깊게 끼어들어 있음을 모두가 아는 서태후도 뒷자리에 스리슬쩍 앉았다.

흠정당의 면면을 살펴보면 ‘합비(合肥) 승상(이홍장)’을 추앙하는 안휘성 출신들을 제외하면 대개 그 옛날 이홍장 국정 전횡하던 시절 한자리씩 차지하였던 늙은 사람들이요. 저의 국민당은 여러모로 명성 떨친 강유위, 광동성에서 저를 추대한다는 소문 듣고 질겁한 유영복이 저 대신 밀어넣은 고홍명 등등, 패기 넘치는 젊은이 천지다.

심지어 중원 바깥에 나가 살던 화예(華裔, 화교)들조차 아직 본격적으로 활동도 시작하지 않은 국민당 소문을 듣고 한몫 거들고자 한다며 찾아오곤 하였는데, 얼마 전에도 바다 건너 하 무슨 섬에서 살다가 근래에는 조선에서 의생(醫生) 재주 배우고 있다던 손 아무개가 찾아온 바 있었다.

장발에 대한 금령을 폐하는 일부터 공상(工商)의 업 중흥하는 방편까지 논할 사안은 산더미요, 아직 흠정당 위세가 작지 않으므로 하루아침에 서태후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늙고 낡은 자들과 젊고 드센 자들의 싸움이요, 더구나 얼마 전 ‘중화공산당’ 창당한다면 암암리에 밀어주겠다고 (서태후 본인 생각에는 매우 후한 조건으로) 약조한 것처럼 서태후 본인도 갖은 공작을 다 벌일 심산이었으므로, 서태후 보기에 흠정당은 바닷가 바위요 국민당은 쉴 새 없이 파도로 그 바위 내리치는 바다와 같아 얼마나 버티느냐의 문제일뿐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자의원 총재(總裁)로 임명된 순친왕 이후완이 얼마 전 병으로 작고한바, 그 대리로 선 경군왕(慶郡王) 이쿠왕(奕劻)이 개회를 선포하는데, 갑자기 문이 발칵 열렸다.

“제공(諸公), 큰일입니다! 바깥에 난민들이 수없이 몰려들어 소란을...”

숨 가쁘게 알리는 군관의 뒤로 함성이 들려오는데, 깃발 어지럽게 날뛰고 소리지르는 것도 하나로 뭉치지 못하여 그 뜻이 닿지 않았다.

“부청멸양(扶淸滅洋)!”

미리 북양대신의 휘하에 있다는 사람과 맞추어둔 말을 누군가 꺼내었다.

“부청멸양!”

화답하듯 다른 쪽에서도 메아리쳐 울렸다.

이제 처음 몰래 지령 받았던 것처럼, 이렇게 기세를 올린 뒤 의원들이 나올 때를 기다리면 될 것이었는데, 군중 가운데 어느 한 구석에서 산동 사투리 거센 고함이 터져 나왔다.

“땅을 달라!”

호응하듯 다른 쪽에서 외치기를,

“일을 달라!”

하니, 다른 의화단 패거리가 듣기에도 ‘부청멸양’이니, ‘척양척조’니 하는 소리보다 훨씬 와닿는 말이었다.

곧 개중 귀 얇은 자들이, 저것이 진솔하게 와 닿는 것을 보아 아마 앞에 외치던 것은 겉치레요 – 역적 소리 듣지 않으려면 ‘부청(청을 도움)’을 내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 이번 모임의 본의겠거려니 하면서 따라붙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되자 반쯤은 은자만 받고 도망할 생각으로 임하던 조삼다와 곳곳에 흩어진 그 수하들도 절로 흥이 돋아, 더 거세게 외쳤다.

“땅을 달라! 일을 달라!”

그러다 보니 어느새 ‘부청멸양’과 ‘땅과 일’ 함성 소리가 비등해져, 처음 내세우던 것이 무엇인지 모호해졌다.

“이 무슨 일입니까? 본래 약조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아... 아마 가운데서 말이 잘못 전달된 듯합니다. 부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멀리서 지켜보던 원세개의 끄나풀 하나가 달려가 추궁하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정무군 정도를 제외하면 나라의 군대도 위의 명이 아래에 닿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아무리 원세개가 북양대신 허울 내세워 저의 수족으로 키웠다지만 적어도 수천, 많으면 수만인 의화단의 말단까지 어찌 바로 영을 전하겠는가.

그러나 허둥대는 사이 부청멸양 소리는 점차 사그라들어만 갈 뿐이요, 그 다음에 내걸려 했던 ‘척조멸양(斥朝滅洋)’은 끝내 운도 떼지 못하였다.

그 동안 자의원 안에서는, 군중이 해산하든, 정무군 출두하여 진압하든 하기를 기다리며 휴정이 선언되었다.

그러던 중 함성 내용이 조금씩 바뀌어가자, 바깥의 군중이 금방 난입하여 저들 강남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의원들이 하나씩 고개 도로 내밀고서 저들끼리 모이기 시작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비록 중간에 주장이 바뀐 듯하기는 하나, 그 ‘멸양’이라고 우긴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필히 우리 국민당을 억누르려는 뜻이 있는 것이겠지요.”

가장 연소한 축에 들지만 명망은 가장 높은 강유위가 우선 신중론을 내세우니 동조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자의원 사람도 아니요, 고홍명의 비서 노릇 하고 있던 손덕명이 절로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공은 그 두 글자는 듣고 그 뒤에 바뀐 소리는 듣지 못하셨습니까? 저들이 ‘땅과 일’을 달라 하였으니 그 말이 비근한 만큼이나 절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진의입니다!”

“이 사람, 여기가 어디라고 의원도 아닌 자네가 나서는가?”

“여기가 어디라니요. 황상께서 민의를 모아 국정을 도우라고 세우신 자의원입니다. 우리가 민의를 받들지 않는다면 자의원을 두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고홍명이야 쩔쩔대건 말건 손덕명은 저의 할 말을 끝내 다 마치었다. 그때, 경망스레 깔깔 웃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니, 다름 아닌 서태후였다.

“참으로 옳은 말이로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였는데, 우리가 저들 의민(義民)의 뜻을 버린다면 누가 또 들어주겠는가?”

다 들으라고 하는 혼잣말 뒤에 본론 붙이기를,

“공들은 들으오. 마침 경군왕이 휴회를 선언하였고, 얼핏 듣기로 바깥의 백성도 수효가 적지 않으니 정무군이 나타난들 모두 헤치려면 족히 한 시진은 걸릴 것이오. 그 전까지 머리를 맞대고, ‘땅과 일’에 관해 정책 한두 건 정도를 얼른 생각해내 보시오들.”

하였다.

“하오나, 태후 전하...”

서태후가 조선국 정국 돌아가는 것을 보고 이해한바, 나라의 여론이 저들 편이라고 우기다 보면 정말 여론이 저들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동철을 세워 중화의 큰 이로움을 꾀했거늘 감히 오랑캐와 한통속이라고 은근히 비난하는 자들이 있어 참 괘씸하다 여기던 차, 이번 기회에야말로 저들은 오랑캐 편이 아니라 오랑캐를 다스려 쓸 뿐이며 그 증좌가 여기 시무책에 있다고 당당히 선포하면 어찌 되겠는가.

“중한 것은 저들이 자의원 안에 저들 편 있고, 그 이름은 국민당이라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오. 하늘이 무심치 않아 이런 기화를 내려주시었는데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소? 공들이 꺼린다면 내 직접 나가서 저들에게 알리도록 하겠소.”

벌써 머릿속에서는, 태후 전하의 은덕에 감읍하며 머리 조아리는 가난한 백성들과, 그 앞에서 짐짓 감격한 척 유세 부리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수프 끓여서 강아지 준 셈이네. 내가 그래서 말도 안 된다고 했잖아.”

“그래도 이 정도면 잘 풀린 것 아냐?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최선은 퍽이나.”

천진에서 기선에 오를 때까지 전봉준 귓가에 잔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엘러노어도 딱히 방편이 없었음은 알았기에 잔소리가 잔소리로 그치고 있었지만.

“그러면 처음부터 사회주의가 어쩌구,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 저쩌구 하면 절로 ‘이제 빛을 보았습니다’ 하면서 공산당에 합류할 줄 알았어?”

참다 못한 전봉준이 쏘아붙이니 이번에는 엘러노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옆에서 조용히 따라가던 김가진은 나이도 마흔 가까운 부부가 퍽 젊게 – 즉 철없이 - 사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동농 형께서는 어찌 보시는지요?”

“내 원세개 그 자를 업신여겨 자칫 실기할 뻔하였으니, 고맙다는 말 외에 함부로 평을 더하겠는가.”

물론 나름대로 향후의 정국을 예상하여 귀국하는 즉시 운현궁에 알려야 할 것이므로, 말과는 별도로 마음 속으로 정리해둔 바는 있었다.

우선은 의화단 무리가 흩어져 예전처럼 난언을 퍼뜨리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니 본디 뜻하였던 바는 이룬 셈이요, 원세개 그 자도 따지고 보면 일을 그르친 것이므로 예전 위세를 회복하려면 조금 뜸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러나 의화단이 저들도 모르는 사이 저들 비호해준 북양대신의 등을 찌르는 격이 되었고, 국민당이 암만 세력 이루었다 한들 결국 그것을 뒷받침할 군병은 멀리 강남에 있으므로, 의화단은 적어도 지금과 같은 세를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였다.

개중 당장 호구 어려운 이들은 잘못을 싹싹 빌고 다시 그 아래로 들어갈 것이요, 귀 얇은 이들은 국민당 공약만 믿고 도로 고향 돌아갈 것이니, 국민당은 구름처럼 두루뭉술한 민심과 명성만 얻고 북경 안에서 확실한 적은 여럿 만든 셈이었다.

“그보다, 말 붙인 김에 묻고 싶은 바가 있네. 그 조가 녀석이 우기기를 저들 삶 불행함이 조선 탓이라 하였지. 그런 심리가 과연 이번 일로 해소되겠는가?”

“이론상으로는 그렇겠지요. 결국 조선이니 청국이니 하면서 편을 가르는 것은 위정자들이요, 가진 것 없는 백성들의 일은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앞에 단서를 붙이는군.”

잠시 우물대던 전봉준이 결국 인정하였다.

“후... 현실적으로는, 글쎄요. 요새 『경화시보』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소위 민족의 장벽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지요. 또 원망이라는 것이 품기는 쉽고 풀기는 어렵기도 한 법입니다.”

“그리 보는가. 고맙네.”

마르크스 부부가 투닥대는 동안 김가진 머릿속에는 만감이 교차하였다. 운현궁과 공안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라면, 조정이 나서야 할 터.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매사 좋게 풀어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더 이상 그리하지 못할 때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배부른 고민이로군.’

당장 운현궁 대원군이 이번 일로 상심하여 공안서 일에서 손을 뗀다면 저부터 신세 처량하게 될 것임을 그제야 깨달은 김가진이 속으로 자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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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삼다는 실존인물로, 원 역사에서는 1898년 관현에서 일어난 ‘관현교안(冠縣敎案)’의 주동자입니다. 황하의 지속되는 범람으로 이재민이 속출하면서 민심이 어지러운 와중, 관현의 선교사와 교인들이 옥황상제 사당을 헐고 교회를 세우려 한 것이 집단 충돌로 이어졌는데, 일대의 의화단을 통솔하던 조삼다는 이때 무리 3천 명을 모아 곳곳의 교회를 불태우고, 진압을 위해 출동한 관군까지 여러 차례 패퇴시켜 의화단의 이른바 ‘도창불입(刀槍不入, 창칼에 맞아도 찔리지 않음)’ 신화에 불을 붙였습니다. 다만 그의 형 조소이나 운하 일꾼 이야기 등등은 작중의 창작입니다.

중간에 등장한 이쿠왕(혁광)은 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맡기도 한 청말 만주 황실의 주요 인사 중 하나였습니다. 공친왕 실각 이후 총리아문을 맡게 되었으며 이때 ‘경군왕’ 작위를 받았지요. (이후 원 역사에서는 1894년 서태후의 환갑을 맞이하여 친왕으로 승격됩니다.) 1891년 순친왕 이후완이 병사하면서 공친왕과 함께 이홍장 등 양무파를 견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황실 인사로서 고위직을 역임하였으나, 사적으로는 수뢰를 일삼고 공적으로도 무능안일한 행보를 많이 보여, 당대에나 후대에나 평이 좋지 않았습니다.

원 역사의 손문은 이전에 잠시 언급되었던 것처럼, 하와이에서 고향 중국으로 돌아온 뒤 본인의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동네에서 갈등을 겪고 광주(광저우)로 떠나게 됩니다. 그 후 홍콩에 세워진 서의서원(西醫書院)에서 의학 공부를 마친 뒤, 약국 (의사면허 관련 문제가 있었습니다.)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혁명 활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손문이 처음부터 투쟁노선만을 밟았던 것은 아닙니다. 청일전쟁 직전 이홍장에게 직접 시무책을 올리는 등 제도권 내에서의 정치활동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청일전쟁 패배 후 만주족 통치 하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마침내 1895년 11월 흥중회(興中會)를 호놀룰루에서 꾸리게 됩니다.

원 역사에서 의화단이 전횡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화 작가의 말에서 언급하였듯 중앙권력의 비호에 있었습니다. 무술정변으로 변법파를 몰아냈지만 정작 그 주동자인 강유위 등이 모두 해외에 망명하여 재기를 노릴 수 있는 상황에서, 서태후와 수구파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지요. 이에 따라 ‘권민’, 즉 의화단을 이용해 친위세력으로 삼자는 주장이 수구파 일각에서 나왔고, 서태후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00년 5월 자금성에서 강신부체 의식을 시연토록 하기도 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의화단의 발생 배경이나 동기 등에는 무관심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끌어다 쓰려 하는 작중의 모습은 원 역사에서와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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