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2)
전봉준은 저의 고부 고향 시절에는 꿈 속의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서태후의 ‘검소한’ 대접에 넋이 반쯤 나가고, 그 아내 엘러노어는 서태후의 의중이 영 의심스러워 먹는둥 마는둥 하고 있을 무렵, 김가진은 영 곤혹스러운 처지에 봉착하고야 말았다.
여기저기에 산동 무슨 현 의화단. 직례 무슨 부 의화단 깃발 내걸고서 저들의 권법이니 무예니 자랑하고 있는 무리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대개는 이름만 그럴듯할뿐 연이은 기근과 홍수 등으로 자리 잃은 빈털터리 농군들이요, 그런 이들일수록 ‘관야(官爺, 관원 나리)’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기운은 날카롭게 눈치채기 마련.
개중 아편 때문인지 도박 때문인지 조금 더 절박해 보이는 이들을 불러다, 묵직하니 동전 쥐어 주고서 사정 탐문하니, 조선왕이 요사한 짐승을 보냈다는둥, 조정을 속여 역대 황릉 파헤칠 궁리를 한다는둥 별 황당한 소문 퍼뜨린 것은 과연 이들 무리가 맞았다.
그리고 의화단 뒤에 그 원세개라는 작자와 북양군이 있음도 분명하였으므로, 이제 당초 대원군과 수립하였던 계획대로 역모 고변할 구실만 찾으면 – 또는 만들면 - 될 일이었는데, 마침 자의원 회기에 맞추어 열흘 뒤 스무이렛날 의화단들이 자칭 기의(起義)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별반 대단한 것도 없고, 그저 모임 마치고 나오는 의원들 에워싸고서 저들 위세 드러내 겁박하는 것이 계획의 전부였지만, 보기에 따라 나라의 귀한 이들을 해치려는 음모로도 포장할 수 있을 듯하였다.
하여, 이왕 발설한 길에 더 도와달라. 그리하면 다음에는 동전이 아니라 은자로 값을 치러주겠노라 하면서, 고변할 이 구하고, 그에 맞추어 증좌 내놓을 이도 구하던 차. 아편 냄새 자욱한 그 소굴 한 군데 나오는 길에 건장한 청년 여럿과 맞닥뜨렸다.
물론 김가진도 방비 허술하지는 않아 몸 쓰는 자들 여럿을 신변에 두고 있었는데, 싸움 붙으려는 찰나 개중 그나마 문자 쓸 줄 아는 듯한 이가 나아와 서신 한 봉을 전하였다.
뜯어보니,
‘대청 정무군(定武軍, 북양군 육군의 정식 명칭)의 원 모가 조선국에서 오신 귀인께 부칩니다.’
하면서, 이미 너의 수작부리는 바는 모두 알고 있으니, 네 나라에 스스로 누를 끼치기 싫거든 제 발로 찾아오라는 말을 퍽 정중하게 써 놓았다.
저의 이름을 당당히 걸면서 저를 ‘귀인’이라 불렀으니, 필히 그쪽에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는 아는 것이요, 그러니 곽분양(郭汾陽, 곽자의) 회흘(回紇) 진중으로 들어가듯 홀로 만나러 간다 한들 감히 해치지는 못할 것이었다.
하여 적힌 곳으로 찾아갔더니, 손님 대접할 채비 다 갖추고서 기다리는 번듯한 누각이라. 결코 본심은 아닐 융숭한 대접 받은 뒤 마침내 기다리던 원세개가 본론을 내밀었다.
“의화권 수련하는 뜻있는 백성들에게 귀국 정부가 이리도 큰 관심을 표할 줄은 몰랐습니다. 선생께서 군부의 사람은 아닐 테니, 무술을 도입하고자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생각해보면 눈앞의 원세개 이 자가, 그저 세간에 요설 흘리는 얄팍한 술수로 이득 취하려는 자이니 소인(小人)에 지나지 않으리라 여기고 넘어간 것이 실수였다. 물론 운현궁 수족으로 일하면서 조선 팔도 섭렵하고 조선인, 한인, 심지어 아라사 역적들까지 모두 대해본 김가진이었으므로 그 사람 보는 눈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지만, 애시당초 소인과 군자는 그저 마음가짐의 차이일 뿐, 그 재주와 간교함은 오히려 소인이 더 빼어날 수도 있음을 김가진도, 대원군도 놓쳤던 것이다.
“아마 제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인지는 알아차리신 듯한데, 대인께서는 어찌 그리 단정하시는지요? 정말 무술을 들여오려 찾아온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원세개의 위세에 억눌린 척, 은근슬쩍 존대하며 받아주니 아직 젊은 사람답게 좋아하는 기색이 도드라졌다. 허나 그 승냥이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어디서 저런 눈빛을 보았는가, 하면 의외로 운현궁에서였다. 집주인 대원군이 만일 종실이나 열성조의 대업 대신 순전히 저의 일신을 위하여 암중모략을 꾸미는 이였다면, 아마 이 원세개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 그랬을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의화단 사람들과 적게나마 교분이 있는 소관이 마땅히 나서서 그 권법 고매한 이들과 연을 이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듣기로도 분주히 경조(京兆) 저자를 오가시며 수소문하셨다 하였는데, 그런 이들은 대개 미덥지 못합니다. 가령 산동 관현(冠縣)에서 올라온 조삼다(曹三多)로 말하자면...”
그러면서서 누구는 매화권(梅花拳)의 권사(拳師)로 내공 심오하여 가히 도검불침(刀劍不侵)이다, 누구는 덩치만 그럴듯하지 내실은 없어, 사람 위압하는 것 외에 쓸모는 없는 자다 하면서 의화단 인물 평을 늘어놓는데, 거론되는 이는 하나같이 자신이 역모 고변에 쓰려고 마음먹었던 자들이라, 저도 모르는 새 김가진의 등골은 오싹해지고 주먹은 한껏 쥐어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소관이 또한 듣기로 열흘 뒤에 일대의 권회(拳會)들이 모두 모여 강신부체(降神附體)의 예를 거하게 베풀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곳 경사와 직례 일원뿐 아니라 멀리는 산동에서도 여러 백성이 올라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처럼 사람이 모이면 개중 흉심 품은 무리도 있기 마련이니, 미리 면밀히 살펴야 하겠군요.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도 마치 병장을 든 것처럼 용력을 뽐낼 수 있는 자들이니 만일 개중 흉사 꾸미는 자가 섞여 있다면 큰 우환이 되겠지요.”
정말로 그 의화단으로 뭔가 꾸미는 일이 있다면 쉽게 답할 수 없으리라 여기고 슬쩍 떠보았는데, 답변하기를,
“이르시는 말씀이 참으로 이치에 닿습니다. 비록 저는 미관말직의 한 무부(武夫)로서 보고 듣는 바가 넓지 않지만, 호천(昊天)의 보우가 있어 소관이 우연히 들은바 근래 나라 바깥에서 찾아온 손 중 간혹 의화단의 여러 사람들을 찾아가 그 동정을 세세히 탐문하고 좋지 못한 일에 얽힌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만일 동란이 일어난다면 그 뿌리는 필히 여기에 있을 듯합니다. 황은을 입은 몸으로 어찌 예의주시하지 않겠습니까?”
김가진은 때늦은 한탄을 속으로 삼켰다.
‘장계취계(將計就計, 상대의 계책을 역이용함)로구나!’
아마 처음부터 자신이 이렇게 찾아올 것을 생각하고서 짠 계책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대로 날뛸 명분까지 마련해주었으니, 범에게 날개 달아준 꼴이 되고야 말았다.
이제는 당초 계획대로 위세를 과시하는 것을 넘어, 능히 개중 몇몇이 폭주하여 의원을 해치도록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의화단이 언제든 저들을 억누를 수 있음을 보이고, 황명을 받들어 정무군이 나서서 진압하면 된다. 그 뒤에 짐짓 놀란 체하며, 흉사의 배후를 캐낸바 조선에서 온 수상한 자가 역모 운운하면서 은자를 나누어주는 것을 보았다는 고변 있었다 하면 계책은 그로써 완성이다.
“참 옳은 말씀입니다. 의화단도 능히 그 이름값을 할 수 있을 듯하군요.”
”소관은 그저, 동방 조선국에서 찾아오신 귀인께서 이런 흉참한 일에 잘못 얽혀들게 되실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마음에 없는 허사(虛辭)로 둘러대었지만 원세개는 걱정하는 듯한 말로써, 내 너의 의표를 찔렀으니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며 묻는 듯했다.
“이미 그 지재 드러난 대국의 군관께서, 변변한 관직조차 없는 이 사람을 이리 걱정하고 또 후대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자칫 저 의화단 무리를 둘러싸고 파란 일어날까 두려우니, 부디 보중하시기를 청할 뿐입니다.”
반갑잖은 손님 김가진이 물러가고 이어서 진짜 잔칫상이 차려지니, 합석하였던 젊은 북양군 군관들은 기세가 올랐다. (애초에 원세개가 그들을 합석케 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기도 했다.) 그들 눈에야, 원세개가 몰아붙이니 천하의 조선국 대원군 수족이라는 자도 별 말 못하고 비척비척 물러나는 것으로 보였으므로, 다들 찬탄하기를,
“과연 위정(원세개) 형이십니다!”
“하하, 저 김 아무개가 억눌려 기를 펴지 못하더군요.”
하며 저들끼리 웃고 떠들었다. 이런 자리에는 꼭 눈치 없이 사족 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막내뻘 되는 단기서(段祺瑞)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습니다! 위정 형의 지략이 곧 대청의 홍복이지 않겠습니까!”
원세개의 마음은 군권에 있지 대청에 있지 아니하며, 그를 숭상하는 북양학당 출신 젊은 군관들도 대개는 비슷하여 대청(大淸)이든 대탁(大濁)이든 저들 영달하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그런 다수 중 하나였던 풍국장(馮國璋)이 잽싸게 말을 돌렸다.
“이제 천하의 민심이 올바른 곳으로 돌아갈 길이 열렸는데, 위정 존형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회군 시절부터 저들 설 자리 하나씩 차지하여 장수 노릇하는 자들이라면 모를까, 나이 서른 넘기면 연장자 축에 드는 이들 젊은 군관들은 앞날이 영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북양대신 이홍장이 언제까지 그 자리를 지키지는 못할 것이요, 그가 한 번 힘을 잃게 되면 결국 저들 출셋길 담보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군권인데, 일군 이끌고 응당의 권세를 얻어낼 깜냥 되는 이는 지금 북양군 막하에 원세개 하나뿐이었으니 어찌 따르지 않을까.
더구나 천진에서 서양 병법을 배운 이들이 보기에는 대청 안에서 그나마 깨인 축에 들 북양군의 원로들도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노인네뿐이었다. 그런 노인들 중 우두머리에 드는 북양대신과 직접 교섭하는 원세개는 – 비록 그들 파벌과 달리 천진에서 공부하지는 않았다지만 - 그러므로 젊은 군관들이 숭모하고 따르는 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얼 어찌하겠는가? 민심은 곧 천심이라 하였으니, 흐르는 것을 살피고, 혹 넘칠까 싶을 때는 나서야겠지.”
어차피 북양군과는 달리 본질을 따지면 난민 무리에 지나지 않는 의화단이다. 그 우두머리들이야 자신을 통해 북양대신과 직접 연줄 닿는다 여기면서 우쭐대고 다닐지 몰라도, 결국 여기저기서 떨어지는 예산의 부스러기를 주워먹고 살아가는 주먹패 집단이요, 저의 사람으로 들일 까닭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정말 넘쳐서 우리가 손쓰지 못하게 흘러버린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위정 형의 심계에 감히 의심 품는 것은 아니지만...”
단기서가 원세개 체통을 깎는다 여긴 풍국장이 곧장 가로막았다.
“이봐, 지천(芝泉, 단기서의 字). 자네가 재주 뛰어난 것은 알지만,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게 의심 품는 것 아니면 뭔가?”
“하지만... 조선이 얽힌 일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소문이 퍼지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무리지어 일어나 소란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때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으니 마땅히...”
“어허! 이 사람!”
둘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는데, 듣고 있던 왕사진(王士珍)이 가로막았다. 목소리 높지 않지만 가운데서 항상 조용히 할 일을 하는 이로, 군관들 중에서는 명망 높은 이라 단기서와 풍국장 모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 다 진정하시오. 이 자리에서 이리 다투어서 되겠소? 위정 형께서 계책을 지니고 계시니 그리 조처하신 것일 테요.”
하고서 상석에 앉은 원세개에게 눈치를 보내니, 고개 한 번 끄덕. 눈치 주고받은 뒤 말을 이었다.
“감히 생각한 바를 두서없이 늘어놓자면, 의화단 무리는 모두 어떻게든 조선과 얽혀 있고, 지금 자의원에서 다투는 것도 부득불 조선이 걸려 있소. 무얼 하든 그러니 우리네 동쪽 번병은 얽힐 수밖에 없는 것이외다.”
조선은 예로부터 상(商)을 천시하였다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 상인들의 처세에는 오히려 대놓고 화인(華人) 멸시하는 서양 오랑캐들보다 더 교묘한 면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관(官)과 결탁하기를 신상(紳商, 신사 출신 상인)보다 더 면밀히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주경 글월 몇 줄을 외우든 숫제 입교를 하든 하여 현지의 코쟁이 선교사들과도 연을 맺었다. 천진 교안으로 그들 무리 수십이 죽고 다친 이후로는 이러한 처세가 더욱 절묘해졌다.
그리하여 산동과 직례 일대의 백성들이 보기에는, 공친왕이 거병하였을 제 기근 닥치고, 황하의 물이 미친듯 불어나 수십만 백성이 죽어나가고, 철도는 날로 뻗어나가 수운(水運)을 생계로 삼던 많은 이들은 고스란히 일자리를 잃어나가는 판국에 이문 취하는 것은 저들 ‘고려귀자’ 뿐이었으니, 당장 목구멍 풀칠 어려운 입장에서 대놓고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백성들의 입 되어줄 신사들은 자의원이니, 『청구시무』니, 석전대제니 하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 양이를 물리치고 저들 백성을 위해주는 대신, 강남의 오랑캐 앞잡이들처럼 저들 손을 잡고 문명이니 개화니, 당장 면도 만두도 되지 않는 공허한 이야기나 하면서 장삿속을 차릴 뿐.
물론 따지고 보면 일반 백성에게도 조선이 알게 모르게 도움 준 일이 없지 않겠지만, 은덕은 드러내놓고 베풀어도 쉽게 잊기 마련인 사람 마음에, 그 반대로 ‘이게 다 조선 탓이다’ 하는 부추기는 목소리만 들려오니, 어찌 쉽게 기울지 않을까.
“그 무슨 소리요? 저 의화단이야 그렇다 쳐도, 자의원에서 조선 이야기는 변죽에 지나지 않을 터인데...”
풍국장이 물으니, 왕사진은 답하고, 사실 직감으로 알 뿐 세세한 사정과 논리는 모르는 원세개 역시 ‘내 다 알고 있었다’ 하는 득의양양한 미소 내세우고서 귀를 기울였다.
“조선을 백문제개의 예외로 두어 해관에서 따로 조세를 거두게 하자는 얘기도, 이미 그 땅을 거쳐 여러 나라의 자금이 들어오고 있으니 협력하여 공장을 널리 세우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라의 나아갈 길을 두고 다투는 것이외다.
그들을 고깝게 여기든, 기껍게 여기든, 소위 동양의 삼국 중 가장 서양 문물을 잘 들여온 나라는 조선이오. 당장 자의원의 제도도 어디서 먼저 시행했소이까. 그러니 서양 법도 참고하여 중원 문물을 일신하는 일에 있어서도 조선의 예를 들지 않을 수 없고, 그 길을 따라야 한다는 쪽도, 중화의 나라로서 어찌 남의 길을 따르겠느냐는 쪽도 모두 의론을 분분히 일으키는 것이오.”
“그리고 북양대신께서는 마땅히 우리가 중화의 나라로 우뚝 서야 한다는 쪽으로 국론을 모으고 계시지. 조선을 어찌 대할 것인지가 정국의 큰 사안인 까닭이 여기 있네.”
마무리로 살짝 끼어드는 원세개였다.
“그러므로 지천이 걱정한 것은 비록 일리는 있으나 대국 전체로 보아 중요치는 않으이. 저들 자칭 국민당에게 민심을 보여주어 위압하고, 조선국이 암중에서 획책하다 실기한 일을 내보여 재차 압박하고, 이로써 정국을 우리 북양대신께서 다시 주도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중한 일이지.”
아마 자신이 경고를 하였다 한들 저 김가진이 쉽게 포기하고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처음 어설프게 수작을 부리려다 잡힌 시점에서 이미 승패는 정해졌으니, 발버둥칠수록 오히려 증좌는 더 많이 생길 것이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과연 위정 형이십니다!”
따지자면 저보다 한 살 위인 풍국장이 재차 아부하니, 원세개도 절로 기분 좋아져 축배를 들었다.
“어찌 이 한 사람에게만 그리 좋은 말을 하는가. 이 자리 모두가 나라 이끌어갈 준걸들인데! 자, 드세나!”
“... 이리 되었으니, 참으로 민망한 일일세. 상대를 낮잡아보면 필패함이 병가의 도리일진대 그것을 잊어 이처럼 궁색하게 되었으니, 내 무어라 더 변명하겠는가.”
그렇게 북경의 한구석에서 젊은 군관들이 청운의 꿈에 백주의 향을 섞어 마시는 동안, 김가진은 서둘러 공사관으로 향했다. 재촉하는 발걸음 사이사이 뒤를 돌아보니 골목마다 누군가 하나씩 버티고서 저를 살피는 것이, 의화단 패거리가 아니요 보다 기율 잡힌 자들이라.
“그리하여 우선 알릴 사정은 모두 운현궁에 알리고, 곧장 자네 두 사람을 만나러 왔다네. 애국이라는 것은 이번 일에서 어떻게 도움 얻을 방편이 있을까 싶어 꺼낸 말이고.”
하고서 긴 말 여러 토막을 일순에 마친 사람답게 목을 축였다. 곧장 전봉준이 답하기를,
“저런... 그러면 저희가, 윽.”
하는데, 엘러노어가 사정 어려운 사람 쉽게 내치지 못하는 저의 남편 옆구리를 팔꿈치로 한껏 찔러 말을 끊고서 대신 물었다.
“우리 두 사람이 굳이 도와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정말 애국할 마음으로 도와줄 것이라 생각하셨다면...”
“내 자네들 공산당 생리 안 것이 몇 해인데 그리 쉽게 여기겠는가.”
이들 부부의 별난 언동을 자주 보았던 김가진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들어보게. 하필 자네들이 이곳 연경 와 있을 때 일이 이리 되었으니, 미안한 얘기지만 이 사안에 자네 부부도 이미 얽혀 들어간 셈일세. 공산당이 우리 조선에서나 제대로 정당 대접을 받지, 당장 대서만 가더라도 대개는 난신적자로 치부하기 마련이잖은가.”
“정말 곤란해지면 우리 탓을 할 생각이라, 이것이군요.”
“매정한 얘기지만 그렇다네.”
영 음흉한 원세개 대신 속내 곧장 보여주는 엘러노어를 대하다 보니, 김가진도 꽉 조여두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려 너스레도 조금 나왔다. (서양인과 대놓고 살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같은 동양 사람과 잘 포장된 위협을 주고받는 것보다 마음 편하니 조금은 우스운 일이었다.)
“정 일이 그르게 되면 내 연해주에 집이라도 알아봐 줌세.”
“사양할게요.”
그때 옆구리를 다 문지른 전봉준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래서... 무얼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딱히 방편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던 끝에 찾아왔네. 자네들이라면 뭐, 영국에서 이럴 때 쓸 법한 기책(奇策) 하나쯤 배워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정말 대책 없이 찾아왔다 이 말이군요.”
“따지자면 그렇지.”
“당신은 정말 못된 사람이에요, 미스터 김.”
“암. 사람이 되다 말았지. 종종 듣는 이야기일세.”
주로 이용익이 저 못 듣는다 여기면서 흉볼 때 듣는 이야기였다. 더 주고받으려는 차에 재차 전봉준이 물었다.
“재담은 여기까지 하고, 우선 방안을 마련해봅시다. 동농 형, 우선 그 의화단에 대해 조금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지금 상황이, 그러니까 그쪽에서, 음, 면식 튼 사람들은 여럿 있는 것이지요?”
“그건 그렇지. 허나 그들을 다시 끌어들이려 한다면 자칫 일이 어그러졌을 때 아국에 튈 불똥만 늘리는 격 아니겠는가? 우리가 무엇을 하든 조계지 바깥에서 거동은 모두 원가 그 자의 귀에 들어간다고 보아야 할 게야.”
“그렇지만 지금 우리 손에 쥔 패는 그뿐이지 않습니까? 다행히 그가 열흘의 말미를 주었으니, 이를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전봉준이 갑자기 떠올린 방안을 죽 늘어놓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 아내 말에 동의해야 하겠네. 터무니없는 발상이야.”
“그래도 다른 방안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 이 안이 여지껏 나온 것 중 최선이라 해도 더 하실 말씀은 없겠지요.”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어서, 김가진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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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정무군은 청일전쟁 패배 후 원세개 주도로 새로 조직된 신건육군의 임시 명칭입니다. 작중에서는 북양함대와 함께 ‘북양군’이 일찍 생기는 바람에, 졸지에 정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벌써 시대가 1890년대로 접어들면서, 양무운동 세대에서 변법운동 세대, 그리고 그 뒤의 군벌시대 초기 세대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작중에 등장한 왕사진(왕스전), 단기서(돤치루이), 풍국장(펑궈장) 세 사람은 흔히 ‘북양삼걸(北洋三傑)’로도 불리는, 북양정부 초기의 핵심 인물들이지요.
회군의 핵심 인물들이 대개 이홍장과 같은 안휘성 출신이었던 반면, 원세개와 그 이후 세대는 (물론 단기서처럼 안휘성 출신인 경우도 있지만) 지연보다는 학연으로 뭉친 사이였습니다. 천진 무비학당(武備學堂, 작중 북양학당)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고, 청일전쟁 이후 군제 개편 과정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지요.
의화단 운동의 발원은 18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미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명칭은 19세기 초에 나타나고 있는데, 백련교 등 여러 종교적 색채를 띈 비밀결사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제2차 아편전쟁 이후 기독교 포교가 허용되고, 서양 세력의 상업적 침투도 가속되면서, 종교적 결사들이 점차 무력단체인 권회(拳會)로 변모하는 양상이 나타납니다. 이는 선교사들과 이들을 배후로 삼은 중국인 기독교도들, 그리고 치안 붕괴로 각지에 횡행하게 된 도적들로부터 스스로 지키기 위한 성격이 강했습니다.
본래 근원이 종교 비밀결사이기도 했고, 또 교회에 반대하는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의화단 내에서도 종교적 면모와 무술이 혼합되게 되었는데, ‘강신부체’ 의식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일종의 ‘신내림’으로, 이를 통해 총칼에도 다치지 않는 몸을 얻고 단합을 다진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의화단은 산동과 직례, 그리고 (원 역사에서는) 만주 등에서 기세를 떨쳤는데, 이는 태평천국의 난 이후 지방세력 중심으로 어느 정도 질서가 유지된 강남과 달리 19세기 말에 각종 자연재해와 정치적 혼란이 집중되었다는 점, 그리고 작중에도 나온 정무기황과 황하 대홍수, 그리고 철도 도입 등으로 사회적·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의화단이 단순한 무장단체를 넘어 중국을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시킨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된 계기는 본질적으로 북경 안에서의 권력투쟁이 있었음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1898년 무술변법의 실패로 서태후와 수구파(후당)가 집권하고, 여기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의화단을 끌어들이게 된 것이 계기였지요. (얄궂게도 그 전까지 의화단 진압에 가장 앞서서 무명을 떨친 사람이 바로 원세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