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91화 (191/320)

63.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1)

경운궁 밤하늘을 색색 불꽃이 수놓고, 폭음으로써 경하하니 실로 나라의 경사였다. 세자 국혼을 맞이하여 온 도성이 시끌벅적하니 불꽃 잦아든 연후에도 저자를 메운 전등 불빛은 하늘에 닿아, 누비이불 같이 드리운 구름이 검붉게 물들었다.

이 혼사를 두고 한때 작게나마 도성 명문가 사이에서 소동이 일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우스운 일로, 며느리는 비록 한미한 방계의 여식이라지만 엄연히 국반(國班)에 드는 광산 김문의 사람이었다. 금첩(禁妾)으로 시끄러웠던 일은 사실 안양대군이 은근슬쩍 주변 떠본 데서 기인한 것이요, 정작 여러 집안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삼았던 세자는 나라의 기둥 될 이로써 마땅히 아버지 주상께서 정해주는 배필 맞이할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여 간택을 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간택을 하는 모양새가 되어, 차이라면 금혼령도 내리지 않고 알음알음 처녀단자 비슷한 것만 받아서, 세자 의중 물어가며 진행하니 마치 귀남 전생에서 양갓집 사람들 선보듯 하게 되었다.

세자는 자신이 뉘 집에 장가 들어야 나라와 아버지께 가장 이로울 것인가를 고민하고, 정작 그 아비 되는 귀남은 네 하고 싶은 대로 정하라 하며 서로 떠넘기니, 잠시 민태호의 딸이 물망에 올랐다가 민태호 본인의 은근한 반대 (지금 세태에서는 국혼이 겉보기만 그럴듯하지, 결코 집안에 이롭지 않음을 여러 해 동안 몸소 깨달은 여흥 민문이었다)로 무산되고, 결국 여러 달을 더 끌다가 겨우 배필이 정해지게 되었다.

그래도 오래 끈 보람이 있는지, 귀남 본인이 보기에도, 또 아내와 아들의 이르는 말을 듣기에도 광산 김씨 – 이름은 평범하니 명숙(明淑)이었다 – 는 성정이 모난 데 없고, 얌전하면서도 주관은 뚜렷한바 아들과 잘 맞을 듯하였다.

가례 올리는 경운궁은 본디 일개 별궁으로, 방치된 지가 오래였던 것을 경복궁 중수할 때 더불어 고쳐 지었다. 궁궐의 성대함으로 위엄 부릴 생각은 딱히 없던 국왕 귀남이지만, 정동 공사관 코앞이 그 부지이다 보니 빈 채로 남겨놓음도 체통에 맞지 않는다 하였기에 – 특히 광통이도국에서 적극적으로 대신들을 부추겼다 – 여차하면 행궁 정도는 될 수 있도록 고치고 남은 터는 나라의 큰 행사가 있을 때 쓸 수 있도록 대서 양식으로 전각과 정원을 두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가례(嘉禮) 성대히 이루어져, 귀남도 저의 첫째 며느리를 맞이하고, 이어지는 연회에서는 바로 옆 정동에서 온 열국 공사들의 하례를 받았다.

허나 세자 국혼을 경축함은 명분에 지나지 않으니, 근래 도성과 나라 전체에 흥 돋는 일이 많았기에 그저 계기 하나를 마련한 셈이었다.

나라의 경사인데 마땅히 연회도 크게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종실의 여러 어른들, 기로소의 노신들을 모시고, 그러고도 자리가 남을 듯하여 한성부 내외의 명사(名士)들, 그리고 공상의 일로 가산 모아 그 이름 떨치는 여러 사람들을 고루 초빙하였는데, 가장 마지막 범주에 당연히 안인수도 들어갔다.

“내 살아 이런 지경을 다 보는구나.”

다 늙은 안인수의 침침한 눈에서 짭쪼름한 무언가 새어 나오더니 곧장 작은 시내를 이루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연미복에 더 어울리지 않는 진사고모(眞絲高帽, 실크햇) 쓴 안인수였는데, 그의 주변 맴도는 다른 한미한 집안 출신의 졸부들로 말하자면 대개 차림새가 그러하였다. 그나마 안인수가 복색을 이리 갖춤은 소위 벌열들에 항거하는 뜻이 가장 컸기 때문에 어색할지언정 우스꽝스럽지는 않았으나, 그저 저들이 공경하는 안 어르신이 그리함을 보고 따라하는 자들은 그렇지 못하여 멀리 또 하나 무리 이룬 옛 세도가 노인네들은 은근히 비웃었다.

“아버지, 섭영의 빛깔이 다 나왔습니다.”

“그새 다 했다는 말이더냐? 과연 고씨(코닥)의 그 섭영기가 신통하기는 하구나.”

이제는 맥안공행을 비롯하여 집안의 여러 사업을 직접 맡고 있는 태훈이 들고 온 섭영을 살피자 입가의 함박웃음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가 되었다.

본 예식에는 관례도 올리지 아니한 어린아이 대동하기 무엇하여, 미리 아침에 손주 응칠이, 제대로 지은 이름으로 중근이를 데리고 와 궐 구경을 시켜주었는데, 그때 만든 섭영이 벌써 완성된 것이었다.

“그리고 섭영 찾아오는 길에 살피니, 금번에 우리 공행이 식주공회(殖株公會)에 끼지 않은 것을 기이하다 일컫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님께서도 들으셔야 할 듯하여...”

돈 오가는 사업 얘기가 나오자, 안인수 만면 가득하던 웃음이 싹 내려가고, 곧장 맥안공행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아는 그 깍쟁이 고집불통 노인네가 돌아왔다.

“흥, 어리석은 놈들 말 들을 것 없다. 여하간 조선 사람은 공돈 생기는 것을 좋아함이 병폐야.”

나이 먹으면서 느는 것은 훈계뿐이라 안인수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의 지론 중 하나가 다시 나올 기미를 보이니 안태훈은 마음의 귀를 막을 준비를 하였다.

“조선 사람이 부지런한 것은 일하는 만큼 돈이 될 때뿐이니, 만일 위에서 누가 빼먹는 것이 있다면 곧장 늙은 나귀보다도 게을러터지게 되고, 또 땀흘려 일하지 않아도 돈 벌 방도가 있다면 만사 제쳐놓고 그리 가서 요행만 바라곤 하는 게야. 내 해주서 쌀장수 하던 시절부터 숱하게 본 일이다.”

얼마 전부터 민간에서 새로 생긴 – 안인수 생각에는 영 미덥지 못한 – 사업 방편이 있으니, 몇 년 앞서서 시작한 일본국 방식으로 부르면 주식(株式)이요, 유행 지난 청국 말로는 고분(股分)이며, 문자 쓸 줄 아는 상인들이 새로 지은 말로는 화식(貨殖)의 밑동이 되는 것이라 하여 식주(殖株)라 부르고는 하였다.

꼬드기는 자들은 이미 서양 여러 나라에서 널리 그렇게 하고 있다면서, 이 식주의 거래를 당당히 드러내놓고 하여 자금의 융통을 훨씬 빠르고 또 용이하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여 광흥창(廣興倉) 옆에 식주공회(殖株公會)라 현판한 성대한 건물을 상량하니, 미리견 땅에서 밑천이 마구 들어오는 요즘 세상에 그 판에 늦게 끼는 이만 어리석게 되었다.

심지어 그간 저들끼리 운영하였기에 바깥에서는 낄 엄두도 내지 못하던 명문거족 경영하는 사업도 하나씩 그 마당에 들어오고 있었으니, 치부(致富)로써 일문 이루어 상민들에게 널리 우러름 받는 안인수가 이 판에 들어오지 않음은 세인들 눈에 꽤 괴이쩍었다.

“식주? 말은 좋지. 그러나 지금 태훈이 네가 보기에도 나라에 과분하게 재화가 들어오고 있지 않으냐. 우리 공행이 당장 사업 밑천이 없어 무너질 것도 아닌데, 무엇하러 섶 지고 불 속에 뛰어들 생각을 하겠느냐?

더구나 이 호황의 대부분은 우리 조선에서 저 청국 상대로 장사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데, 만일 그 사이에서 무슨 일이라도 났다가는 식주고 주식이고 물거품 되는 것이야. 조선이든 청국이든, 상(商)이 관(官)을 써먹을 수는 있어도 그 위에 설 수는 없느니.”

그때, 다시 한 차례 불꽃이 하늘로 치솟으며 굉음을 울렸다. 자칫 주변의 다른 사람들 들을까 마음 졸이던 안태훈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재차 경하드리며, 황상께서 보내신 축의(祝意)가 이로써 오롯이 전해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거리로 보아 가장 먼저 도달해야 할 청 황실의 예물이 조정에서 밀고 당기던 끝에 겨우 당일에 도착하였으니 트집을 잡자면 흠례(欠禮)요, 공사 자리가 여러 달 동안 공석이라 공사대리인 젊은 옌창(廕昌)이 찾아온 것도 합당한 예는 아니다. 그러므로 축하하는 뜻이 ‘오롯이’ 전해지기를 바란다며 귀남에게 말 올리는 데는 이미 스스로 앞뒤 맞지 않는 바 있었다.

물론 조선왕의 성정이 성정이니만큼 노여워하지는 않을 것이요, 이전의 관계를 완전히 폐하지 않아 사대(事大)까지는 아니어도 존대(尊大) 정도는 하는 조선이라지만, 그래도 조선과의 관계뿐 아니라 본국 안에서의 싸움도 걱정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축하에 진심을 담기보다는 우선 조선왕의 기색을 살핌이 중요하였다.

옌창에게는 다행히, 별 탈 없이 고맙다는 답이 내렸다. 마음속 큰 짐 하나 내려놓은듯 안도하며 물러가니, 조선왕 옆에 아직은 그래도 정정한 그의 생부 대원군이 있음은 미처 살피지 못하였다.

“북경에서 당세(黨勢)가 크게 둘로 나뉘어 다투고 있다 하니, 필히 그 때문일 것입니다.”

저의 손주 혼례 올리는 것까지 살아서 보았으니 큰 경사일 것이련만, 그렇다 한들 청국이 얽힌 일이라면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기에 우선 사사로운 축하 대신 나랏일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 일이라면 들어 알고 있소. 국민당(國民黨)과 흠정당(欽政黨)이라 하던데, 필히 그 중 흠정당에서 책동한 것이라 하더군.”

국민당으로 말하자면, 천하를 운운하기에 앞서 당장 나라의 백성을 생각하자는 뜻을 담았으니, 아직 공식적으로는 천하의 가운데인 북경에서 ‘국(國)’을 논하는 과감함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면도, 배척하는 면도 모두 있었다.

천하에 앞서 백성을 위한다는, 저의 마음에 없는 소리 지어내느라 고생 많은 서태후였지만, 그래도 이미 황상 앞에서 출사표 내었으니 물릴 수도 없는 노릇. 다행히 그간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이뤄둔 공덕으로 인해 명성과 위세는 있었으므로, 이를 이용해 뜻 펼쳐보고자 강유위와 여러 혈기 넘치는 서생들이 찾아왔다.

거기에 내세울 얼굴로는 자·타칭 진남장군(鎭南將軍) 유영복이 있고, 아직 그 규모에 비해 내실은 부족하다지만 착실히 따라오고 있는 남양수사와 그 군대가 뒷심으로 있으니 세력이 결코 작지 않았다.

그 반대편에는 황상께서 언로를 허통해주신 큰 뜻 받들어, 국론 일치단결해 나라를 흥성케 하자는 흠정당이 있으니, 누가 보아도 그 뒤에 북양대신 이홍장이 있고, 그가 거느린 북양군과 함대의 강성함은 널리 알려진 바였다.

비록 몇 년 동안 서태후와 장지동을 중심으로 세력이 뭉쳤다 하지만, 이미 그의 스승 증국번 대부터 직례를 지키면서 굳힌 북양대신의 세력도 결코 작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북경 옆 천진과 보정을 누가 지키고 있는지에 생각이 이르게 되면 이 두 파벌의 다툼이 근시일 내에 결착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로 그렇습니다. 성상께서도 이미 그 이름 들으셨을 원세개라는 젊은 자가 있는데, 북양대신의 막하(幕下)에 있던 자로 민심을 널리 어지럽혀 저들 당의 이익으로 삼으려 한다 합니다.”

원세개라 하면 귀남의 지난 생에서도 서울 토박이들 사이에 그 이름 전하던 자다. 귀남 생각하기에 대개 노인네들 늘어놓는 소리가 그러하듯 –본인이 가장 잘 알지 않던가 - 그 중 참이 얼마나 섞여있는 지는 말하는 본인도 알지 못할 것이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는 않을 것이라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인물이기는 할 터였다.

“아국과 청국은 옛일이야 어찌 되었든 이미 이와 입술의 사이가 되었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살얼음 밟는 것처럼 조심하여야 할 것인데...”

“상서롭지 못한 일을 하는 자는 무릇 그 일을 아는 자가 나서야 막을 수 있는 법입니다. 신이 연로한 지금까지 살아옴에 깊은 성은 아님이 없는데, 마땅히 이러한 일에서 미력이나마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 안에서야 원체 사람 해치기를 좋아하지 않는 주상이므로, 옛 흥선군 시절 그러하였던 것처럼 사람을 마구 쥐어패거나 쥐도새도 모르게 이승 하직케 하지는 못할 노릇이지만, 그때의 뒷골목 계략 짜던 머리는 아직 남아있었다.

“오늘의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이러한 일을 더 들어 말함은 상서롭지 못한바, 그 세세한 계책이 마련된 뒤 다시 아뢰도록 하겠사옵나이다.”

아무리 조선국이 겉으로 내세우기로는 군자와 선비의 나라라지만, 그 이면에서 역모를 만들고, 뒤집어씌우고, 뒤집어씌우는 것을 다시 받아치고 하는 것도 이미 이골이 날 만큼 해 왔다. (옛 제도를 버리고 새 문물 들여오기 시작한 이래 이전과 달리 진심으로 도의를 높이게 되었으니, 과연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가 하면 대원군 생각하기에 결코 그렇지 않았다.)

공안서를 통해 듣기로 그 원세개라는 자는 이제 나이가 앞서 물러간 저 음창(옌창)이라는 만인과 동갑이라 하였는데, 고작 이립을 겨우 넘긴 자가 계략에 능하면 얼마나 능하겠는가. 아무리 늙은 자신이라지만 아직 머리까지 흐려지지는 아니하였으니 미리 막아낼 방도 하나쯤 마련하지 못할 것도 아니리라 여기는 대원군이었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지니는 한계일까. 의회의 구색은 갖추었으되 여전히 어설픈 구석이 많은 청국이었다. 물론 스무 해쯤 전 조선의 모습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 하며 한소리 하였겠지만, 지금 전봉준 옆에 있는 엘러노어는 그때 영국에서 파리 코뮌 보도나 보고 있었으니 알 리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

“어떻긴. 말로 보나 생김새로 보나 딱 귀족 집안 마나님이던데. 말로야 그사이 심정이 크게 변하였네, 조선 땅에서 크게 깨달음 얻었네 얘기하지만, 장담컨대 얻었을 깨달음은 딱 하나, 권력의 달콤함일 거야.”

일각에 한정하여서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름 높은 마르크스 부부가 북경에 찾아와 이곳저곳 기웃대고 있는데, 그러던 중 서태후가 친히 그들을 초빙하였던 것이다. 이왕이면 넓고도 넓은 옛 공왕부 저택에 손님으로 몇 달 지내고 가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는 것을 사양하고, 다시 조계지 근처의 호텔로 돌아와 한시름 내려놓는데, 과연 남정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마음이 엘러노어에게는 훤히 보이는 모양이었다.

전봉준이야 – 그렇게 따지면 그 옛날 김가진에게 붙들려 운현궁 구경하러 간 이래 십수 년 세월이 대개 현실감이 없기는 했지만 – 자신이 서태후 같은 귀한 이의 초대를 받아 그 호화로운 곳에서 전각만큼이나 호사스런 식사 대접을 받았다는 데 넋이 반쯤 나갔지만, 엘러노어는 거기에도 해당되는 사항이 없었다. (서태후야, 저의 평소 욕심만큼 대접하여 넋을 아예 나가게 하지 못하였음을 안타깝게 여겨,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시라’ 하는 것이 오히려 본심에 가까웠지만.)

“지금 중국은 서양에서 하는 것처럼 제대로 의회정치를 하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많다... 이름 높은 공산당이 나서준다면 조금이나마 세력의 균형이 올바른 쪽으로 넘어갈 것이다... 결국 공산당을 이용해서 저쪽 안에 내분을 일으켜달라고 요청하는 것 외에 내실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잖아.”

“듣고 보니 또 그렇네.”

삐딱한 성격은 저의 아버지 닮아 변함 없는 아내의 말에 전봉준은 수긍하며 말했다.

“그래도 이쪽 원내에 공식적으로 공산당을 세운다고 해서, 유럽 나라들처럼 탄압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듯한데.”

“뭐,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야 어디 중국 같은 곳에 공산주의냐며 바로 면박을 주겠지만... 네 그 ‘개량주의’ 노선대로라면 이론적으로 못할 것도 없겠지.”

북양대신네 흠정당이야 기회만 되면 다시 의회 문을 닫아버리고 싶은 것이 본심일 테니 아예 찾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양대 세력 중 어느 한쪽이라도 우호적이라면, 지금 세상 전체를 둘러보아도 눈에 띄게 공산당 활동에 유리한 축에 드는 것이 맞았다.

물론 그것은 현실정치의 지형이 그렇다는 것이고, 저의 아버지가 주창한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으로 보아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엘러노어의 변함없는 지론이었다. (그러면 역시 엉터리에 지나지 않을 조선 공산당을 돕고 있는 엘러노어 자신은 무엇이라는 말이냐 하고 전봉준이 반쯤 농담삼아 쏘아붙이면, 조선 공산당은 기묘한 예외일 뿐이며 딱히 남편이 그 당을 맡고 있어서 도와주는 것은 아니라고 둘러대곤 하였다.)

그때, 객실 문앞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곧장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계시오?”

눈빛 두 번쯤 주고받은 뒤 눈싸움에서 밀린 전봉준이 부득불 여독으로 무거운 몸 일으켜 문을 열자, 언제 따라왔는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김가진이 나타났다.

그런데 평소 그 속내 모르는 표정 대신, 눈에 띄게 당황하여 흐트러진 모습이라, 필히 변고가 있었으리라 짐작하며 안으로 들어오라 청하였다.

“공산당이 국가에 대해 가진 감정은 잘 알고 있지만... 혹시 애국 한 번 해볼 생각 없소? 미리 준비한 계략이 제대로 실패하여, 수가 궁한바 이리 찾아왔소.”

엘러노어가 건네주는 손수건을 고맙게 받으며, 흐르는 땀 훔치면서 김가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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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증권거래소가 동아시아에 등장한 것은 1878년으로, 오쿠마 시게노부의 주도로 도쿄에 동경주식취인소(東京株式取引所)가 세워진 것이 최초입니다. 주식회사 개념의 역사가 꽤 오래된 중국의 경우, 최초의 증권거래 시장으로 1891년 상해견객공회(上海掮客公會)가 세워지고 그것이 다시 1904년 상해증권교역소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지요 (지금도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습니다). 작중 조선의 경우, 처음부터 관과 깊게 연관을 맺고 있던 세도가 중심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주식회사의 등장이 조금 늦어졌습니다.

옌창의 성은 끝내 확인할 수 없어 – 성이 인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은 만주족의 독특한 풍습 탓이라고 변명해봅니다 – 명시하지 못했습니다. 청말부터 두각을 드러내 어렸을 때 독일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 이후로도 문무 양쪽에서 이런저런 일을 맡아 보며 교육과 군사, 외교 등에서 치적을 남겼습니다. 청 멸망 후에도 북양정부에 남아 고관을 역임한 몇 안 되는 만주족 인사였습니다.

원세개는 의외로 서울 일대의 구전 민담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감국(監國)으로 있으면서 사사건건 국정에 간섭하였던 점과, 그런 자리에 있기에 파격적으로 젊은 나이였다는 점 등이 민간의 의식에 깊은 인상을 남긴 원인일 듯합니다. 대표적으로 앞서 석전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선달 원봉석의 경우에도, 본래 민담에서 십팔반무예를 뛰어넘는 ‘삼십육기 무예’로 원세개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민담이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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