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90화 (190/320)

62. 키 선생의 나라 (3)

황현에게서 기전 둘러싼 주변 사정을 청취한 다음날, 영의정 최익현은 광화문을 지나 경무대로 향하고 있었다.

나라의 법도로 임금은 지엄하되 신료에게 권병(權柄) 맡긴다고 명명백백히 밝혀두었으니, 아마 할 수 있는 일로만 따지면 최익현은 조선 개국 이래 가장 당당하게, 가장 큰 권세를 손에 쥔 권신으로 꼽힐 것이다.

작정하고 홀로 날뛰려 한다면 누가 어찌 막겠느냐만, 정작 임금 찾아뵙는 일은 예전과 다름이 없고, 세세한 사무라면 몰라도 나라의 대사(大事)는 항상 지존의 의중을 여쭙게 되니, 이 또한 돌이켜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이치가 상례로 굳어진 것이 아니요, 지금까지 금상이 행해온 바가 쌓이고 쌓여 이런 형세가 갖추어진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저의 뒤를 이을 사람 – 같은 사람이 여러 번 그 자리에 오름은 허하기로 하였으나, 예외를 두어 영의정 자리는 두 번 연이어 역임하지는 못하게끔 하였다 – 이 누가 되었든 시일이 지나면 자연스레 바뀔 것이요, 그때는 또 그때의 통례가 새로 정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는 후일의 일이고, 적어도 지금 조정에서는 최익현이 아니라 다른 누구를 세워놓는다 한들 중대사를 어전에서 논의하며 어지 여쭈는 것을 폐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열성조를 살피어도 그 지재가 빼어나다 할 수는 없는 금상이다. 무슨 뛰어난 통찰로써 나라 안팎을 살핌도 아니요, 일이 벌어지기 전 미리 조처하여 후환 없도록 방지하지도 못한다. 사안이 불거질 때마다 그때그때 대응함이 전부인데, 스스로 내놓는 발상은 대개 해괴한 것이 많지만 그것이 중신 여럿 모아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기괴(奇怪)가 바뀌어 기책(奇策)이 되니 그야말로 기이한 일이었다.

예컨대 얼마 전까지 조정의 공론에 오르내리던 사안으로 창경궁 땅을 내어 공원으로 쓰는 일만 하더라도, 다들 황망한 일이라 여겼는데, 그것이 왜 황망한가 굳이 말로 꺼내어 논변하고, 또 주고받고 하다 보니 엉뚱하면서도 사리 따져보면 나라에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던 것이었다.

결국 공원의 부지는 지난 큰불로 소실된 곳으로 정해졌지만, 이미 나온 발상이 다시 들어가지는 않아, 한양 땅이 그리 넓지 않은데 군주 한 사람을 위하여 궐을 여럿 둠은 잘못이지 않으냐. 이제 경복궁도 중수되었는데 창경궁 한 곳 정도는 널리 열어 백성들도 함께 즐길 수 있게 하면 어떻겠느냐 하였다.

그에 반박하다 보니 나온 이야기가, 팔도에 사람이 많다 하나 땅이 그리 좁은 것까지는 아니니 아예 한성부를 넓혀버리면 땅이 아까워 금궁의 위엄을 스스로 버려야 하는 소이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도성을 둘러싼 산까지 도시가 뻗어나가 더 나아가기 어려울 듯하였는데, 그때 과감하게 공조판서 김병시가 주장하기를,

‘강 건너 남쪽에 이미 민가가 많이 들어섰는데, 그럼에도 아직 평탄한 땅이 적지 않게 남아 늘어나는 민호를 능히 감당할 만합니다. 다만 사이에 강이 있어, 하나의 부(府)로 삼기에 어려움이 있는데, 이제 나라의 큰 사업을 일으켜 다리를 놓으면 강은 있으되 마치 뭍으로 이어진 것과 다름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예전 같았다면 그 무슨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지엄한 국사에 늘어놓느냐 공박하였겠지만, 서양의 대읍에서 비슷한 공사를 하나씩 해내고 있다고도 하고, 더구나 능히 그리할 수 있는 기술도 동철에서 중원과 조선을 모두 들쑤시고 다니면서 적잖이 숙련된바 굳이 대서나 미국에서 알아볼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옳게 여기어 그때부터는 장마철에 유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방도를 강구하여야 하는가, 놓는다면 철교를 먼저 놓음이 가한가, 인마 다니는 다리를 앞서 세워야 하는가 등등을 논의하는데, 어전에서 나랏일 거론하다 보면 흐르는 것이 대개 이러하였다.

성상이 홀로 백년을 궁리하여도 내놓을 수 없는 생각이요, 마찬가지로 백관들은 능히 생각할 수 있어도 그리할 까닭이 없는 방안들이 나오니 돌이켜보면 참 신묘한 일. 감히 헤아려보면 그럴 만한 재주를 지닌 주상이 아니므로, 직접 꾀하여 그리 된 것은 아니요, 언로가 트이다 못해 굳이 무슨 길(路)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아무도 내치지 않고 모두 끌어오다 보니 절로 이런 형세 갖추어진 것이었다.

노담(老聃, 노자)이 좋아할 법한 치국의 도인가, 그렇지 않으면 부자(夫子) 이르신 것처럼 북신(北辰, 북극성)과도 같은 군자의 다스림인가. 적어도 후대에 청사를 남길 사람들은 이 논쟁으로 퍽 재미있게 소일하겠거려니 생각하며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경무대를 다시 보았다.

“... 하여, 기전을 헤집은 뒤 이를 어찌 바깥에 알릴지, 그것을 정하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다 합니다.”

조선의 서생으로서 차마 기자를 직접 부정할 수는 없다. 아마 최익현이나 황현의 대가 아니라, 그의 사손(師孫) 정도 대에 가면 당당하게 기자가 없다 한들 어찌 성현 밝히신 도리가 공으로 돌아갈 것이며 해동의 문명이 뿌리 없게 될 것이냐 인정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없는 것은 없다고 이르고, 있는 것은 있다고 이름이 도의에 맞지 않겠소?”

“거짓을 없애고 참을 현양함은 실로 상도(常道)이나, 또 나라 안팎의 사정에 여의치 못함이 있어, 기전의 일에 앞장서는 현이 이를 근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어서 황현이 김옥균네 집에 찾아가서 문답한 이야기를 전하였더니, 하문하기를,

“만일 평양이 아니라 더 북쪽에서 기자의 옛 터전을 찾는다 하면, 그것이 자칫 청국과 다투는 소이가 된다 하였다는데, 경이 보기에도 그리 될 듯하오?”

김옥균이 함께 떠벌였다는 민족이니 겨레니 하는 것이야, 『경화시보』 논설로 종종 거론되기도 하고 또 귀남의 지난 생에서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던 것이라 – 다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들 하지 않았던가 –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는 귀남이었다.

그러나 옛날에 누가 어떤 땅을 차지하였는가, 그 영역은 얼마나 넓었는가, 그런 것을 놓고서 정말 싸움까지 할 것인가 하면 누군가 가운데서 작정하고 이간질하지 않는 한 도저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선현 서여(胥餘, 기자의 이름)를 자(子)로 높여 칭함은 홍범(洪範)을 전해 내려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나, 문헌을 상고하여 보면 그 전에 이미 기(箕) 땅에 봉해진 바 있었으니 즉 이는 작위입니다. 그런데 사서에 이르기를 이후 기자를 다시 조선에 봉하였다 하였는데, 그 봉지가 평양이 아닌 요동에 있었다 하면 능히 그 땅도 본래 조선의 강역이므로 이제 돌려받고자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주장을 안 하면 되지 않소?”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난 대국의 국경(國慶)에 희귀한 짐승을 보낸 일을 두고도 그 나라 백성 사이에 요언(妖言)이 돈다 하니, 우리 백성이 압록을 건너 요동에서 옛 성현의 거취를 찾으려 한다면 필히 그리 될 것입니다. 옥균의 이르는 바에 그러므로 일리가 있습니다.”

듣고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입장을 바꾸어 만약 저의 본래 삶에서 갑자기 일본 사람들이 건너와 한국 곳곳에서 저들 조상의 흔적을 찾겠다며 마음대로 삽질을 한다면 그 또한 모양새가 좋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같이 하면 될 일이다.

“청국의 땅에 우리 사람이 들어가 파헤치면 누구든 그러지 않겠소? 옛 문물을 살피고 땅에서 나온 기물의 이력을 헤아리는 재주는 우리 선비들에게도 있지만 중원에는 아마 인재가 더 많을 것이오. 그들을 청하여 함께 성현의 발자취를 찾는다면 그러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듯하구려.”

“참으로 혜안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두려운 바로는, 만일 이번 평양 기전의 경우와 같이 파내려간 곳에 이렇다할 유물이나 유허가 나오지 않는다면 해동의 문물이 보잘것없다고 스스로 밝히는 것이니, 나라 안팎에서 자칫 이로 말미암아 난설(亂說)로 이익 취하려는 무리가 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걱정삼아 덧붙이니 별 걱정 아니라는 듯 심상한 답이 나왔다.

“대개 사람 살아가는 것은 부침이 있으나 세월 흐를수록 나아지는 법이외다. 당장 아국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소? 옛일이 어떻다 한들 지금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요, 오히려 처음이 초라하고 미미하였다 한다면 지금까지 이루어낸 바가 더욱 빛나는 것 아니겠소?

반대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기전이 있었다고 굳게 믿었지만 정작 파헤쳐보니 엉뚱한 것이 나왔지 않소? 중원이라고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소?”

어지간한 유생이라면 쉽게 할 수 없는 생각이라 듣고서 잠시 골똘히 궁리해보니, 최익현이 보기에도 의외로 사리에 맞는 말이었다. (하기야, 이런 문답이 오가는 곳이므로 스스로 황현에게 장담하기를 범상하지 않은 발상 나오는 전각이라 일컬은 것이리라.)

한 번 힘을 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곡부에서 유생들 모임 하는 것처럼 금석학이니 고고학이니 하는 사람들끼리 모아서 합동으로 옛 터전을 찾아본다면 분명 성과가 있을 것이었다. 변변한 문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면 그만이요. 만일 호경(鎬京, 서주의 도읍)이나 북몽(北蒙, 은의 도읍 중 하나)이 그 성세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이것을 찾아 세상에 다시 알리는데 조선 선비도 공을 세웠으니 어찌 중원 문물 빼어남만 자랑할 것이냐며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하유하신 바가 심원하여 나라의 방도로 취할 바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유사(有司)와 함께 논의하여 절목을 마련해 다음 기무회의에서 거론토록 하겠습니다.”

공손히 예 갖추고 물러나는 최익현의 머릿속에 벌써 이런저런 발상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 이후로 진행되는 소식은 신보로도 잘 알려졌는데,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오래 전의 문물은 이력이 깊은 것이니 예휘각에 자리 마련하여 보관토록 하자는 둥, 성현 자취 어린 유허를 범인이 함부로 손대면 안 될 일이니 이 일대에 구역을 정하여 그 사적(史蹟)을 보호토록 하자는 둥, 처음 기전 파헤친 것이 사실상 허탕을 쳤다는 소식이 보도되었을 때보다 더 많은 주장과 제안이 나왔다.

이윽고 얼추 방향이 잡히기로는, 나라 사이에 협의하여 여러 조정의 관원이 하나로 뭉치는 관아를 세우고, 그 관아에서 옛 터와 문물을 관리하게 하면 어떻겠느냐 하였다. (유냉고인가 하는 곳에서 문화유산을 지정하던 이야기를 언뜻 들었던 귀남도 이에 찬동하였기에, 호응이 결코 작지 않았다.)

“선생께서는 그런 제안이 성사되리라 보시는지요?”

“저는 일개 학자이니, 그런 정치적 사안의 동향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라고 하기에는 쾌활한 어투로 김옥균이 손으로 맞은 중늙은이 덕국인에게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파리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당연히 루브르에도 여러 차례 들려보았지요. 극동의 문명국으로 우뚝 서고 있는 이 나라도 얼른 그런 면은 본받아야겠지요. 더구나 중국 문명의 정당한 계승자 중 하나를 자부하고 있으니, 아직 암흑 속에 갇혀 있을 그런 유적과 유물들을 하나라도 먼저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배, 에른스트 오페르트라면 저의 문중 어르신들이 처음 광통이도국 세울 때부터 이런저런 일로 연이 많았던 자다. 정확히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 관직을 맡은 이후로, 툭하면 사직소를 내지만 번번히 불윤(不允)의 비답을 받는다 하였는데, 국제를 세우고 벼슬아치의 진퇴를 이조에서 직접 관할하게 된 이후로도 ‘어찌 주상께서 내치지 아니하신 인재를 우리가 함부로 내쫓겠느뇨’ 하면서 도통 그 뜻을 이루어주지 않고 있다 들었다.

허나 눈앞의 오페르트는 에른스트가 아니라 그의 동생 구스타프로, 천생 학자로 본디 범어(梵語)를 공부하던 이였다. 저의 형 때문에 어쩌다 지천명도 넘긴 나이에 전공이 바뀐 이래, 어물쩍 극동으로 넘어와 있었는데, 덕분에 그의 형 에른스트를 통해 이렇게 초대할 수 있었다.

“아마 조정에서 논의되는 제안이 공식적으로 중국 쪽에 전달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행되기까지는 최소 서너 해는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도 고대 국가들의 수도 등등을 먼저 탐색하겠지요. 저는 선생께서 그때 빠질 수밖에 없는 불교나 도교 사원의 흔적이라든지, 그런 곳들을 선점해주기를 바랍니다. 아무래도 같은 극동의 사람끼리는 서로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없기 마련이지요.”

“잘 모르겠군요... 저는 고고학자가 아닙니다.”

“이번에 평양에서 그 난리를 쳤던 황 선생은 저널리스트입니다. 고고학에는 오히려 선생이 더 가깝지요. 우선 액수를 보아주시지요.”

슬쩍 내미는 사업계획서를 살핀 구스타프의 눈이 잠시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곧 화색 도는 것이, 물욕은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

“천천히 보셔도 됩니다. 한두 달로 마칠 수 있는 조사 일정은 아니니까요.”

황현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리라는 점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자유당이 있으니 만일 최익현까지 끼어들게 된다면 반드시 조정의 공론에 기전의 일이 부쳐질 것이요, 그리 된다면 당초의 계획은 곧장 폐기처분하는 쪽이 오히려 속이 편할 것이었다.

예전의 김옥균 자신이었다면 대체 어디서, 왜 어그러졌는가 생각하며 머리만 싸매겠지만, 지금은 나이를 먹어 성숙한 덕인지 그렇지 않았다.

어쨌든 그리 숙련되지 못한 이들만 데리고서도 무언가 발굴해내기는 했으니, 평양에는 뭔가 있는 것이 맞았다. 꼭 기자의 족적이 아닐지라도, 그 땅에 도읍을 둔 고구려도 있었지 않은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기전도 구전되어오던 것을 옛 선비 한백겸이 처음 드러내 밝힌 것이니, 지금도 민담과 지명 등등을 따져 두어 군데쯤 더 파내다 보면 옛 안학궁(安鶴宮) 정도는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거기서 그치겠는가? 정말로 파헤쳤는데 별반 흥미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유럽 나라들 하는 식으로 남의 것을 ‘빌려’ 오면 될 일이었다. 남들 하는 것처럼 어수룩한 원주민 속여서 빼앗아오는 것보다야, 당당하게 우리가 찾았으니 잠시 가져가 연구하겠다 (물론 정확한 기한은 주지 않고) 하는 쪽이 훨씬 낫지 않은가? 지금 구스타브 오페르트를 앉혀놓고 저의 구상 설명하는 것은 이를 위함이었다.

“정말... 매력적이기는 합니다만 방대하군요. 규모가 정말 방대해요.”

멀리 서쪽 감숙성 돈황(敦煌)부터 시작해 가까운 산동 임치(臨淄)에 이르는 일정이니 그럴 만도 했다. 제대로 발굴을 하려면 족히 한 세대는 들여야 할 규모.

“잘만 하면 이름은 확실히 남길 수 있겠지요. 결국 그것이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제대로 발굴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깃발만 꽂아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혹시 압니까? 워낙 외침이 많았던 중국이니, 예컨대 어디 토굴 같은 데에 무수한 문화유산을 숨겨두고 다들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곳 한 군데만 찾으면 선생이 바로 발견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프랑스어로 된 중국 지도를 책상 위에 펼치면서 김옥균이 말을 이었다.

“자, 그러면 동의하신 것으로 간주하고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공왕부에서 쫓겨난 북양대신 이홍장이 새로 정한 치소는 예전보다 오히려 검소하여, 멀리서 보면 이름 높은 이중당 계신 곳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이홍장 본인이 검소하다기보다는, 애초에 그 본인이 사치를 부릴 여력이 없을 만큼 바쁘기 때문에 아무 곳이나 서둘러 차지하였기 때문이었지만, 원세개가 저자에 퍼뜨리고 다니는 소문에 따르면 당연히 북양대신의 검약한 성정 덕분이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내 치소를 두고 헛소문을 퍼뜨리고, 그 다음에는 그깟 여우를 두고 낭설을 지어내더군. 이름은 의화단이라 하면서 의롭지도 않고 화평을 깨뜨리는 이야기를 퍼뜨리고 있는데, 이제는 무얼 더 할 생각인가?”

아직도 올곧은 허리와 떡 벌어진 어깨 위에 피로로 가득한 늙은 얼굴. 이홍장이 간만에 대령한 원세개에게 물었다.

“‘조선인들이 역대 황제들의 능묘를 약탈하려 한다’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인.”

“그런 잔재주가 정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는가? 공연히 분란만 일으킬 뿐이야. 내 생각에도 조선의 저 제안은 받아들여서 결코 나쁜 일은 아닐세.”

“북양대신 대인의 명안을 소인이 어찌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주십시오. 미리 이렇게 소문을 내어 놓으면, 후일 반드시 강남의 헛 선비들을 공박하는 근거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후환이 생긴다면 대인께서는 부득이하게 끌려들어가신 것이고, 후환이 없다면 대인께서 가운데서 부단히 노력하셨기에 겨우 흉계를 막아내신 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막 서른이 된 젊은이가 어찌 저리 간계에 능하다는 말인가? 이 또한 난세의 산물이었다. 천하를 더 일찍 평온케 하지 못한 탓이니 이홍장 본인 외에 누굴 더 탓할까.

“이보게, 위정(원세개).”

“예, 대인.”

“나도 이제 일흔이 코앞일세. 대청을 위한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늙은 몸은 매일같이 쇠하고 있지. 그 뒤를 누가 잇겠는가?”

“대인의 휘하에 장재(將材) 지닌 이는 하늘의 별과 같고, 나라의 동량 될 이는 바닷가 모래와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얼핏 살피니 이홍장은 오히려 매섭게 그를 주시하고 있어, 아무리 바깥에서는 날뛰는 원세개라지만 더 이상 헛소리를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대인... 역시 저 한 사람뿐이지 않겠습니까.”

겸양을 하지 않음이 오히려 겸손하게 들리는 기이한 상황이었다.

“그렇지. 내 아래 막료들 중 뛰어난 이들이 많고, 미숙(마건충)처럼 굳이 벼슬하지 않더라도 학자로 이름 날릴 법한 사람도 있지만, 결국 권세란 군권에서 나오고, 이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자네뿐이야. 이미 자네 아래에 또래 젊은이 여럿을 두고 있지 않던가?”

원세개는 뜨끔하는 마음을 최대한 감추었다. 감히 여기서 부정하였다가는 노여움만 살 뿐. 침묵으로 긍정할 뿐. 그제야 새삼스레 떠올랐다. 일개 군졸에서 얼떨결에 이홍장의 부관까지 올라간 것은 그 본인의 힘이요 운이었을지 몰라도, 거기서 다시 지금까지 올라온 데는 이홍장의 안배가 있었음이.

“그러니 이런 자잘한 일에 모략을 벌이는 것은 즐겨서는 안 되네. 적당히 하고 마치도록 하게. 내 정쟁(政爭)으로 심력 쓰게 되는 것은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이렇게라도 하면서 지지부진하게나마 나라를 이끌어나가지 않는다면, 다음은 다시 국란(國亂)으로 이어질 테니.”

공친왕의 난을 사실상 꺾은 뒤로는, 직례와 화북에 오직 북양군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강남에서 여러 서생들이 나야말로 백성의 뜻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노라 하면서 북경에 들어왔고, 그 뒤에는 서태후와 장지동이 있다.

어떻게든 이들을 데리고 다시 국운을 융성케 하지 못한다면, 대청을 믿는 마지막 민심도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차라리 예전처럼 이홍장 그 홀로 나라 이끌어가려 힘쓰던 정국이었다면, 일이 글렀을 때 오직 그 한 사람이 책임을 지고 역적의 굴레를 걸머지면 되었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 마지막 변명거리를 없앤 것이 바로 그가 모시는 황상이었으니, 어디서 하소연하겠는가.

차라리 그렇다면 한 번 해보라는 식으로 장지동과 강남 서생들에게 키를 넘겨줌도 못할 일은 아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나름의 충심인가? 그렇지 않으면 결국 이홍장 자신도 손에 쥔 권세를 내려놓지 못하는 역사 속 수많은 권신과 다를 바 없던 것인가?

“허나 대인, 그렇기 때문에 제가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드리려 이렇게 잡스러운 방편까지 쓰고 있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대인께서 멈추라 하셨다면 소인은 언제든 멈췄을 것이요, 의화단 놀음을 그치라 하셨다면 단번에 그 우두머리들이 민가에 죄 지은 것을 모두 적어 관에 투서하였을 것입니다.”

“그래, 그건 위정 자네 말이 맞군그래... 우선은 지금껏 했던 대로 계속 하게나.”

큰 덩치만큼이나 한숨도 크게 나와, 가뜩이나 흔들리던 등불의 불꽃을 더욱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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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지금은 그 흔적을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찾을 수 없으나, 1920년대 발굴조사에 따르면 평양의 기전은 고구려 시기 도시 구획의 흔적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는 알 수 없고, 사실상 아마추어 수준의 발굴인 작중의 발굴작업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다만 평양에 매우 오래 전부터 인간이 거주했음을 생각하면, 청동기 시대 집터 – 지금도 사람들 살기 좋은 곳에 아파트를 짓는다 하면 이미 고대에 선점한 흔적이 종종 나온다곤 하지요 – 와 이런저런 유물이 출토된 것은 과히 무리한 설정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원 역사 중국에서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넘어가는 시점에 많은 고고학적 발견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돈황의 막고굴과 은나라 수도(은허) 유적입니다. 전자는 돈황의 굴에서 수련을 하던 도사에 의해, 후자는 갑골문을 약재로 팔던 것을 우연히 발견한 청의 금석학자들에 의해 각각 발견되었지요.

허나 이후 중일전쟁 직전까지 국가적으로 연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은허와는 달리, 막고굴은 사실상 방치되었습니다. 물론 중원의 중심부에 있던 은허와 달리 감숙성 돈황은 사실상 변경이었기 때문에 의화단 사건 이후 혼란에 빠졌던 청 조정이 쉽게 힘을 쓸 수 없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겠지만요.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 등의 학자들이 번갈아 찾아오면서 많은 유물이 유출되었고, 그 중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가 입수한 유물 중 상당수, 즉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은 지금 한국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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