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88화 (188/320)

62. 키 선생의 나라 (1)

경인년(1890) 무렵에도 아직 도성 안 여러 고택은 옛 구들장을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멀쩡히 살던 집을 갑자기 뜯어고침이 어색하기도 하거니와, 도성 바깥에 새로 짓는 집들이 연탄을 땔감으로 쓰기 시작하였으므로 외려 장작 값이 헐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람 사는 가운데 자잘한 실수가 없을 수는 없고, 간혹 그런 실수가 액난(厄難)으로 화하기도 하는 법이라. 신묘년(1891) 넘어가던 무렵에 마침내 뉘 집 며느리가 덤벙대었는지는 몰라도 실화(失火)하여 동네 전체가 잿더미 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나마 도성이 커져가면서 경무서에서 떨어져나와 새 살림 차린 구급서(救急署)가 제때 당도한바 인명은 크게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도성 구급서를 반드시 번듯한 관청의 하나로 만들겠다며 평소 동분서주한, 야심만만한 무관 한규설(韓圭卨)의 공이었다.

헌데 사람 구하기에 힘쓰다 보니 정작 꺼야 할 불은 볼 장 다 보고 거의 스스로 꺼지다시피 하여, 끝내 일개 동이 전소되고야 말았다.

“이미 소실된 것은 돌이킬 수 없으니 안타까우나, 이렇게 도성 복판에 공터가 생겼으니 반드시 복구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쓰임새를 찾음이 어떻겠는가?”

국왕 귀남이 제의하였다. 살펴보면 조금씩 자신이 기억하던 옛 서울의 소위 문화시설이니 여가시설이니 하는 것들이 하나씩 갖추어지고는 있었는데 (예컨대 옛적에 베베르가 아라사 조정 재정 반절, 왕실의 내탕 반절로 꾸린 박물관 예휘각(藝彙閣)이 있었다), 정작 자신이 노점상 하면서 자주 찾아 쉼터로 쓰곤 하였던 공원이 없는 것이라. 물론 간혹 공터에 동네 유지가 출연하여 나무 심고 평상 가져다놓는 정도는 있었지만 탑골공원 같은데 비하기는 민망하였다.

하여 이왕 하는 길에 조그마하게 진기한 짐승과 기화요초까지 전시하여 모두의 볼거리로삼자고 하였는데, 서양의 도시들이 어떻게 꾸려지는지 직접 보아 아는 이도, 들어 아는 이도 있지만 아예 모르는 이는 없는 조정이라 그 취지에는 모두가 공감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는 데는 다소 볼멘소리 나왔으니, 가뜩이나 나날이 오르는 도성의 지가인데 그 땅을 모두 매입함이 옳은가, 차라리 성저의 땅을 매입하여 그곳에 성대하게 조성함이 어떻겠는가 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때, 저의 장사하던 동네 바로 옆에 있던 창경원(昌慶苑)을 떠올린 귀남이 덧붙이기를, 생각해보니 남녀고하 막론하고 노닐 수 있는 터전을 둠은 참 중한 것이니, 만일 부지 마련이 여의치 않다면 도성 안의 여러 궁 중 한둘 정도를 내줄 수도 있노라 하였다. 그 소리 나오자마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어심을 조금 얻어보고자 하는 졸부들이 여기저기서 어떤 짐승을 바치고 저의 수중에 들어온 난초를 바치곤 하여, 아직 설계도 끝나지 않은 정원에 전시할 동식물만 늘어났다.

그러니 도성 벌열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라 돌아가며 무언가 올리기는 해야 하는데, 연해주에 발 뻗친 반남 박문에서는 한 산척이 멀리 북쪽까지 올라갔다가 잡아왔다는 진기한 북극여우 두 쌍을 진상하였다. (서양 서적들이 많이 들어온 이래 각종 풀과 짐승의 이름 찾는 데 있어 『산해경』 따위 황당한 서적은 제쳐놓아도 되었으므로, 박정양이 상고하여 보니 이것이 북극 만년빙설(萬年氷雪)에 산다는 여우 별종임을 곧장 알 수 있었다.)

귀남이 듣고서, 북극에서 굳이 데려와 여름에 고생케 하는 것이 안쓰러워 궁인들을 시켜 각별히 대해주라 하였는데, 과연 옛말에 사람 홀리는 짐승이라 했던 것처럼 퍽 하는 짓이 귀여우면서도 잔망스러웠다. 그런데 굳이 두 쌍이나 두어 기를 이유는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털을 위해 가죽을 벗기자니 또 그새 정이 들었던 것이라.

때마침 그 무렵 옆 청국에 경사 있으니, 나이 창창한 스물에 아직 정비가 없던 천자가 마침내 스스로 간택하여 타타라(他他拉) 씨와의 국혼을 선포한 것이었다.

천자가 장성하기는커녕 아직 글자도 다 떼지 못하였던 시절 서태후가 미리 안배해둔 계획로는, 저의 집안 예허나라 씨 중에서 정실을 들이고 타타라 씨족에게서는 후궁을 들이도록 할 것이었으나, 천자는 서태후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서겠다는 뜻 때문인지, 아니면 그 예비 후궁을 배필로 들일 작정을 한 것인지 거세게 밀어붙여, 두 해 넘는 밀고 당기는 갈등 끝에 마침내 정측(正側)의 분간이 뒤바뀌게 되었다.

박정양이 여우를 진상하며 함께 아뢰기를 북극여우는 한 번 배필을 정하면 해로한다 하였으므로, 마침 두 쌍이기도 하니 한 쌍쯤 선물로 보냄은 가하다 싶어 곧 북경으로 보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그저 늘상 있는 일 같았는데, 그 이후로 이상한 소문이 북경 저자에 돌기 시작했다.

이르기를, 조선왕이 기이한 짐승을 바쳤는데, 생김새는 여우이되 그 귀는 고양이와 같고 울음소리는 어린아이와 같으며, 수시로 털빛을 바꾸니 하루는 불여우가 되고 또 다른 날에는 백여우가 된다는 것이었다.

“황망한 풍문이 돌아 자칫 두 나라의 우호를 망칠 수도 있는데, 중원의 선비들은 이런 요설을 어찌 방치한다는 말인가.”

경쟁자 『경화시보』에 실린 기사를 읽으며 황현이 혀를 찼다. 어쩌다 『청구시무』 지에 기고하기로 한 것이 점점 커져서, 근 몇 주를 시달리다 보니 ‘청(靑)’자만 보아도 어딘가 뒷골이 아려올 정도였는데, 간만에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나 살피고자 주워온 신보에 실린 소식이 이처럼 흉흉하였다.

“무릇 도의는 밝으니 태양과 같고, 요설과 풍문은 밤에야 겨우 조금 보이는 별과 같은 것이지요.”

퇴청하고서 집으로 가는 길에 저의 아는 형 위로하고자 황현네 사랑방에 찾아온 박은식이 한마디 하였다.

“말 잘 했네. 볕이 쇠미하게 되니 저런 어리석은 풍문 또한 날뛰어 붙잡지 못하는 것 아닌가.”

“아니, 제 말은, 별은 밤에 뜨고 해는 낮에 뜨니 아무리 밝은 도의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괜스레 부풀려 해석한 황현이 머쓱해 하니, 처음 어설픈 비유 들이댄 박은식도 덩달아 머쓱해졌다. 급히 부연하기를,

“전하려던 뜻은 무엇인고 하니, 참언(讖言)이니 요설이니 하는 것들이 절로 날뛰기도 하지만 떳떳하지 못한 일을 이루는데 쓰는 비밀스런 방편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당장 아조만 하더라도 전하는 이야기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을 지어내 정암(조광조) 선생을 무고한 이야기 등등이 전하지 않습니까.”

“허면 지금 북경에 사화(士禍) 일으키고자 하는 파당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내 근래 소식에는 조금 어두워서.”

어두운 까닭은 바로 청국 서생 강유위 때문이었다. 그자가 곡부에서 열린 첫 만방대회에서 자신있게 펴낸 『공자개제고』 때문에 일어난 논쟁은 아직도 조선과 중원, 일본을 막론하고 계속되고 있었는데 – 그 덕에 『청구시무』는 나날이 찍어내는 부수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 특히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과연 주나라의 예법을 공자가 지어낸 것인가, 아니면 본래 그 전적이 전했는데 진시황의 분서(焚書)로 사라지고야 만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근세의 이름 별로 안 알려진 선비의 이야기도 아니요, 대성 공자를 직접 거론하는 사안이므로, 선비연하는 식자 셋을 붙잡아 의중 물으면 주장 여섯 개가 나올 것이었는데, 이 일대 대논쟁을 정리하여 글로 써내기로 한 황현은 차라리 옛적 산학 문제 풀면서 머리 싸매던 시절이 그리울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금씩 논쟁이 끝날 기세였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금세의 학자들이 설왕설래한들 이천 년도 훌쩍 전의 일이라, 결국 양자간에 전거로 들이밀 수 있는 것은 옛 서적들뿐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중원 유생들이 닦아온 고증학 쓸 부분이요, 갈고 닦은 언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라 조금씩 조선 선비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사화는 아니고, 듣기로는 아국을 모해하여 사사로운 이익 취하려는 자들이라 합니다. 개중 의화단인가 하는 작자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간혹 황망한 도참(圖讖)이나 각종 요설로 백성들 꾀어내는 무리가 있답니다.”

“아무리 대국 사정이 근래 어지러웠다지만, 언로를 크게 트고 여러 나라와 고루 사귄다 한 이래로 평온해지는 줄 알았네. 그게 아닌 모양이군.”

“형이야 중원의 학문하는 서생들 이야기를 주로 접하시니 아마 모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근래 청국 자의원이 남북의 두 당으로 나뉘어 크게 다투고 있는데, 사안 중 하나가 우리 조선국을 걸고 넘어지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가? 우리가 청국에 무엇 하나 잘못한 것이 없는데 무슨 일인지 도통 떠오르지 않는군.”

“수호의 조규를 맺은 이후로 그 땅에서 통상의 이익을 얻고 있거니와 이제 철도로도 이어지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도 대국 조정과 서태후 전하의 비장해둔 보화가 적잖이 들어갔으니 우리가 중원의 물산으로 말미암아 이익 취함은 많은데 돌려주는 것은 적고. 더구나 우리 땅에서 나는 기물 탓에 그들 땅에서 공상(工商)의 업 일으키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자 한 사람이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의원과 자정원을 막론하고 다들 조선을 좋게만 보지 않음이 이즈음에는 명백하였다. 차라리 언로가 막혀 있었다면야 백면서생이 감히 나랏일을 논하느냐며 곧장 막았겠지만, 위에서 원하여 시작한 백가쟁명일진대 무얼 어찌하랴.

하필 그런 시국에 또 조선국에서 교섭을 청하기를, 아라사국이 근래 연해주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놓으려 하고 있는데, 동삼성을 지나게끔 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하였다.

조선 쪽에서 생각하기로는 철도 지나는 땅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요, 조선인 농사꾼들이 올라가지도 않는 쓸모 없는 북쪽 땅에 철도 놓이고 사람 오가면 그 통상의 이익은 고스란히 청국의 것이라, 모두에게 이로운 방편이라 여길 뿐이었는데, 하필 민감해진 시국에 그런 제의를 하였으니 한껏 역풍이 불었다.

“그러면 남북의 당이라 하였으니, 강남 제성(諸省) 파벌이 우리 조선국과 교류함이 이롭다고 하고, 화북 일원에서는 당장 막아서 중원의 부가 새어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고 저들 뜻을 내세우고 있겠군그래.”

“얼추 맞추셨습니다. 다만 백문제개를 천명한바 아국만 별도로 지정해 막을 수는 없으니, 대신 다른 방도로 제약하여 이로움이 한쪽에 쏠리지 못하게끔 하자곤 한답니다.”

“허, 그러면 이번 여우의 일도 따지면 북쪽 파벌에서 나온 것인가. 이것 참, 대국 다툼으로 자칫 우리가 재액 입을 수도 있게 되었군그래.”

밝은 도의로 세상의 빼어난 선비를 고루 모으고 매사를 공론에 따라 처리하면 치국의 도가 바르게 선다. 이런 이상론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것만은 아님을 모르지 않는 황현이었지만, 실제로 그것이 바로 옆의 큰 나라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하니 영 뒷맛이 깔끔하지 못하였다.

“이번 일로 두 나라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되겠군.”

“풍문 하나로 그렇게까지 되겠습니까? 물론 그런 풍문이 돈다는 것 자체가 따지고 보면 우리 조선국을 불신하는 풍조가 우리도 모르는 새 퍼졌다는 뜻일 테니 길게 보아 경계하기는 해야 하겠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해동과 중국의 사이가 여간 나라와 같은가? 신인(神人) 나시어 나라 열기로는 고작 십오 년 차이요, 또 문물로 말하자면 그 옛날 기자께서... 엇.”

말하던 황현의 눈이 옆에 펼쳐둔 『경화시보』의 지면에 가서 닿았다.

“말씀을 하다가 왜 그치십니까. 듣는 사람은 궁금할 따름입니다.”

“기다려보게, 잠깐. 내 뭔가 생각이 났네.”

뭔가 기똥찬 이야기라도 실렸는가 하여, 박은식이 서안 반대편 황현 쪽으로 가서 신보를 살피니 별 이야기는 없고, 대서 여러 나라 소식이 전부였는데, 영길리 윤돈에서 작(雀, 잭 더 리퍼)이라 이름하는 흉한이 또 살인하였으니 참으로 천인공노할 일이다, 또 그 도시에서는 의생(醫生) 고씨-옆에 국문으로 병기하기를 아싸·고난도일-가 소설(小說)을 쓰는데 그 내용이 흥미진진하여 여러 사람 이목을 끌더라. 이렇게 점잖지 못한 소식들이었다. (『청구시무』에는 금을 주고 기고해달라 청해도 싣지 않을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죽 따라 읽으면서 보니, 박은식 눈총 닿는 곳에 이런 단신이 실려 있었다. 지난해 겨울에 작고한 덕국 학자 수씨 –핸리히·수리만(하인리히 슐리만)- 는 고성의 유허(遺墟)를 파내어 나라와 문물의 흥망 내력을 직접 밝혀내기로 이름을 떨친 사람인데, 얼마 전 그 유고가 집사람에 의해 출간된바 화제가 되었더라 하는 것이었다.

“자네, 유경(평양)도 종종 가보았지?”

저 수씨와 기자가 무슨 관계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불쑥 황현이 물었다.

“그야... 소싯적에 한두 번 구경을 갔습니다. 장성하고 면학하게 되면서부터는 그럴 여유가 별로 없었지만요.”

“기전(箕田)은 그 제도가 남아 있는가?”

기전이 무엇이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얼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평양 외곽에 있는 밭인데, 전해 내려오기로는 그 옛날 기자가 동래하였을 적에 은나라 제도에 맞추어 정전을 시행했다는 터였다.

“정양문(正陽門) 바깥에 남아있는 논밭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말하기로는 옛 정전(井田)의 흔적이라지만, 그 구획이 사라진 지가 오래되어 말로만 전하더군요. 후에 듣기로는 숙묘조에 이미 구획을 나눈 것이 무너졌다고 합디다.”

“그래도 어쨌든 남아는 있는 셈이군.”

“그리고 무너져 없어진 셈이기도 하지요. 사실상 이름만 남은 것인데, 어떤 연유로 물으시는지요?”

“저 수씨도 이천 년을 훌쩍 넘긴 이야기만 듣고서 땅을 파내려갔는데 옛 일료성(Ilios. 트로이)의 흔적을 찾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당장 내 앞에 살아 숨쉬는 자네가 직접 그 전하는 말을 듣기까지 했던 기전은 어떻겠는가?”

사람이 일에 치이다 보면 저런 황당한 생각도 하는 것인가. 이것이 박은식의 단상이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 황현에게 물드는 것인지는 몰라도 – 왠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게. 지금까지 그 구획을 살펴서 옛 정전의 제도가 어떠하였는지 의론한 선비는 많았지만, 그 땅을 파헤쳐볼 생각을 해본 사람은 아마 위만이 찬탈한 이래 우리네가 처음일 게야. 만약 그리해서 기자께서 처음 해동 당도하셨을 시절 문물의 제도가 어떠하였는지를 밝혀내게 되면, 작게는 일신의 광영이요. 크게는 해동과 중원 양쪽이 기껍게 여길 일 아닌가?”

아마 기자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은나라의 옛 현인이 직접 동방에 찾아와 팔조의 금법을 세웠으니, 사이(四夷)의 가운데 유독 해동만은 문물 융성하여 중화에 버금간다 하였다. 그것을 처음 스승께 들었을 때 참으로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다면 어찌 조선의 사람이라 할까?

“이럴 때가 아니군. 내 얼른 밖에 나가서 아직 문 닫지 아니한 전화소를 찾아봐야겠어. 이만하면 면암 선생께 직소하여 곧장 조정의 공론에 부칠 일 아닌가?”

벌써 그의 머릿속에서 노씨권학상 받는 모습까지 그리는 황현이, 그의 말대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하지만 모두의 관심을 받으면서 시작한 발굴의 대업이, 몇 달을 파헤쳐도 고작 깨진 토기와 돌로 만든 기구(로 추정되는 무언가) 몇몇만을 내는 데서 그칠 줄 알았더라면 그만큼 요란하게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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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소방업무는 본디 공조 예하의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에서 맡았습니다만, 양란 이후 인조 재위기에 그 업무가 사소하다 하여 혁파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소방업무는 한성부로 이관되어 방범과 화재 방지를 겸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완전히 복원된 것은 1986년에 이르러서입니다. 귀남옹이 창경원을 기억하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북극여우는 당연히 사막여우처럼 거래금지종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입에는 규제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본래 서식지가 북극이니만큼, 가정에서 키우는 데는 애로가 많겠지요. 귀남옹이나 광서제처럼 어느 정도 서식환경을 보장해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조금 얘기가 다르겠지만요.

원 역사에서 광서제는 서태후의 의지에 따라 서태후의 조카딸(효정경황후)과 1889년 혼례를 올립니다. 하지만 원해서 맺어진 사이가 아니기도 했고, 본인의 성격도 여러모로 광서제와 맞지 않았는지, 광서제가 직접 효정경황후의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문밖으로 내쫓은 일도 있었다는 야담이 전합니다. (그에 따르면, 그로부터 열흘 뒤에 광서제는 독살당합니다.)

한편 역시 서태후의 계획에 따라 같은 해에 타타라씨 자매를 후궁으로 들였는데, 그 중 동생인 각순황귀비(속칭 진비珍妃)는 광서제와 사이가 좋았습니다. 이로 인해 서태후의 경계와 박대를 받았고, 의화단의 난 시기에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야사에 따르면 서양 문물을 도입하는 일에 매우 호의적이었고, 광서제에게 개혁을 권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도 궁 안에 유럽인 사진사를 들여와 많은 사진을 남기기도 한 것을 보면 일말의 근거는 있는 듯합니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 발굴로 유명하지요. 제대로 훈련을 받은 고고학자가 아니라 무역업자라는 본업이 있던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실수도 많이 했고, 유물을 빼돌리는 등 학자로서 떳떳하다고는 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굴은 여러모로 유럽 전체에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1890년 내이 감염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트로이에서 네 번째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그가 사망한 이듬해에 그 성과를 담은 보고서가 발간되었습니다.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 잭 더 리퍼는 1888년에 대부분의 범행을 저질렀지만, 이후에도 모방범죄가 여럿 발생했는데 1891년 봄에도 그러한 사례가 여럿 있었습니다. 함께 국제뉴스란에 단신으로 언급된 것은 『셜록 홈즈』 시리즈의 상업적 성공을 알린 <보헤미아 스캔들>입니다 (1891년 7월).

기자는 조선 이전부터 이미 널리 숭앙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조선 시기에 들어와서는 특히 조선이 지닌 중화문명의 일원(그리고 후에는 유일하게 남은 계승자)으로서의 지위를 상징하는 측면에서 더욱 존숭되었습니다. 이는 그와 함께 단군을 드높였던 것과 무관치 않은데, 즉 중국의 상고시대에 요순이 있던 시기 단군이 나라를 세웠고, 주나라가 세워질 무렵 은나라의 마지막 명신 기자가 조선에 와 중화의 문명을 전했다는 것이지요. (흥미롭게도, 송시열이 주자의 학통을 이었다고 보았던 노론계 학자들은 이러한 기자 존숭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반면, 소론·남인 계열은 매우 적극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특히 평양에는 기자가 은나라식 정전제를 도입하였다는 전승이 있는 ‘기전’이 있었는데, 그 기원이나 정확한 실체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중국의 사신들도 보고 시문과 기록을 남긴 점,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를 비롯해 조선 중후기의 수많은 서적들이 이를 바탕으로 역사지리학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조선 후기까지 이에 대한 전승이 잘 남아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이 직접 찾아갔을 무렵에는 이미 논밭의 구획이 사라져서 확인이 어려웠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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