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실밥 뜯어질 무렵 (2)
판서쯤 되는 고관이면 모처럼 순휴(旬休)하는 날이라 한들 한 번쯤 찾아뵙고자 하는 자들이 늘상 있기 마련. 그러나 실제로 돈이나 권세가 오가는 자리라면 모를까, 예조판서를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들은 끽해야 신보에서 채사하는 사람이 전부다.
물론 작정하고 나선다면 청탁도 받고, 인정도 챙기고 하겠지만, 그렇게 하여 저의 앞길을 스스로 파헤칠 만큼 어리석은 김윤식은 아니었다. 예전처럼 그것이 상례라면야 부득불 따르겠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그와 정반대이지 않은가.
하여 간만에 서책이나 읽으면서, 후일 다시 공론에 부치자 하였을 뿐 딱히 결론짓지 못한 일본국 일을 어찌 대처하면 좋을까 궁리나 할 생각이었는데, 곧 집사 찾아와 이르기를 일본 공사의 추천하는 글을 들고 온 사내가 하나 있다 하였다.
글 받아 읽어보니, 찾아온 객은 이름이 이등박문이요, 친절하게 곁에 국문으로 이름 읽는 법 덧붙이기를 이토 히로부미라 하였다. 예조에 몸담은지도 꽤 오래 된 김윤식이 잊을 이름은 아니었다. 십 년하고도 조금 전, 소위 『일본책략』인가 하는 서책이 나와 일본국 조야 시끄러울 때, 국회 안의 파벌 하나를 이끌던 자로 동맹의 일이 거론되자마자 갑자기 당직 내려놓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다.
그러니 겉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필히 처음 일본 안에서 조선과의 사이 이간질하는 공론 일어날 적에 한몫 거들었거나, 나아가서는 뒤에서 주동하였을 사람이 이 이등박문인데, 그런 사람이 어찌하여 이곳 한양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결국 본인에게 듣는 것이 가장 확실할 터였다.
곧장 사랑방에서 객을 맞이하는데, 분명 김홍집 연배나 되었을까 싶은 중년의 사내 이등박문은 일본국 사람일진대 곁에 통변을 따로 들이지는 아니하였다. 과연 접견을 승낙해준 데 대해 곧장 영어로 감사하는 뜻을 표하였다.
“한 나라의 장관이라면 참으로 높은 자리일진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직접 서양의 말과 글을 배우셨다 하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칭찬으로 운을 떼는 것은 김윤식 자신을 떠보는 것이요, 굳이 통변 없이 영어로 문답하려 함은 가운데서 새어나갈 여지를 미리 없앨 만한 사안을 의논하기 위함일 터이다.
“과찬의 말씀이구려. 이토 선생께서는 무슨 일로 오시었소?”
“돌려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옛적에 『일본책략』을 펴내어 조야를 모두 흔들었던 것이 바로 소생이올시다.”
“우리 쪽에서도 짐작은 하고 있었소. 그 『일본책략』에 이르기를 우리 조선국은 일본국 국운을 쇠미하게 만드는 악덕한 나라라 하였는데, 그런 나라에서 무엇을 얻고자 이 사람을 찾아왔다는 말이오?”
대뜸 의심가는 바가 맞다고 실토함은, 앞서 칭찬에 이어 저를 떠보기 위함일 터. 슬슬 긁는 말로 응대하였다. 허나 객의 표정은 외려 태연자약하니 일말의 분기도 없이 대꾸하기를,
“무릇 나라 사이 일이란 항상 그러한 도의도 없고, 반드시 맞는 이치도 없기 마련입니다. 현 총리시라면 모를까, 장관께서는 여기에 어느 정도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굳이 지금 이곳에 찾아온 까닭은, 조선 속담에도 이르기를 범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 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 격입니다.”
하였다.
“만약 나라 사이에 상정(常情)이랄 게 있다면, 그것은 이미 가진 자는 저의 것을 굳게 지키려 하고, 아직 가지지 못한 자는 남의 것을 탐하여 빼앗으려 한다는 것. 이것 하나이겠지요. 장관 각하께서 보시기에, 지금 조선과 일본 두 나라를 보면 어느 나라가 어디에 속하는지, 너무나 명백하지 않습니까? 장관 각하께서는 식견이 높으시니 이미 스스로 그런 결론에 도달하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굳이 이 사람을 찾아온 것은 무언가 제의하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지 않소? 지금 두 나라 사이에 필요한 것은 진단이 아니라 처방이니.”
“처방이라! 옳은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지금 명의가 있어 처방을 내려준들 조선국이 스스로 그것을 조제할 수는 있습니까?”
강한 말이 나와 심부를 찌르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의 아주를 보면, 결국 나라 사이의 형국을 앞장서서 만들어낸 것은 귀국 조선이었지요. 분란이 일어날 것을 서로 이해를 얽어내어 막아버리고, 다툼을 일으키면 모두가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저 승냥이 같은 무리들이 이빨을 감추게 만들었습니다. 일본도 분명 그 덕을 보았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마땅히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결국 어느 하나를 확실히 제압하여 우열을 가린 것도 아니요, 그저 모두가 좋게끔 처분하고 넘어가는 것은 미봉책(彌縫策)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에야 단단하게 박음질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시일이 지나면 옷감은 해지고 실밥은 뜯어지기 마련입니다.
동맹이 닻을 올린 후 십 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동등한 두 나라의 동맹이라기에는 한쪽에 이익이 쏠리고 있으며, 한 나라가 다른 하나를 거느리는 동맹이라기에는 주도하는 나라가 가냘픕니다. 현 총리시라면 모를까, 장관께서는 여기에 어느 정도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어제 조정에서 김홍집 대동하고 성상과 차대에 들었을 때 나온 이야기도 비슷하였다. 사안의 본질은 일본국이 조선에 제공하는 것만큼 받아내지 못한다는 불만에 있으므로, 지금 불거진 것을 적당히 무마하고 넘어간들 후일 다시 터질 일이며, 더구나 이번에 확인하기로는 그런 자가 없다지만 언제고 여론을 이용해 저의 이익 챙기는 구실로 삼을 자가 등장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빚진 것을 갚겠다는 듯 베풀어준다 하면, 지금 조선이 스스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 것이며, 나라 백성들 살림이 이제 막 윤택해지려는 차에 그것을 ‘왜놈들’에게 나누어주겠다 하면 과연 그들이 받아들이기는 할 것인가? 이웃에게 이익 얻는 만큼 나누어준다 하는 것은 참으로 숭고한 뜻이지만, 막상 실천하고자 하면 어렵기 마련. 영의정 최익현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백성이 군자가 되지 않고서야 불가한 일일 테다.
더구나 그것을 받는 일본국이, 어찌 이것만으로 족하다 하느냐, 우리가 있어 그대 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아니하고, 지금 누리는 영화를 얻어낼 수 있지 않았느냐 하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러므로 차라리 일본국을 달래는 대신, 정 그리 조선국이 마뜩잖으면 다른 나라와 교분 쌓을 궁리를 하라면서 내치는 시늉을 함도 한 가지 방도는 방도일 터였다.
허나 어느 쪽도 이웃 간에 지킬 법한 도의와는 거리가 멀고, 또 그간 쌓인 아쉬움과 설움을 해소한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라, 이토의 말이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었다.
“설마 아국의 교린하는 법도가 그릇되었다고 비평할 생각으로만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라 믿소. 유세하는 사람이라면, 듣는 이의 마음이 한 번 동할 때 더 흔들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소?”
그렇다 하여도 속내를 내보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라, 애써 차분함을 지키며 이만하면 관심은 끌었으니 제안할 바를 내어놓으라 종용하였다.
“영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색잡기 사양하지 않는 데 있어서는 이토 본인과 비슷한 이노우에라, 저의 모아둔 고료로 한 잔 살 터이니 따라오라 하고 기루(妓樓)로 향하니 곧장 따라왔다.
물론 그런 기루 어딘가에 조선 공안서의 끄나풀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나랏일 이야기하고자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옛 벗끼리 노닐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큰 상관은 없었다.
그리하여 간만에 거나하게 취한 이노우에는 먼저 기생 무릎팍에 고꾸라지고, 아직 말똥말똥한 이토는 그 흐트러진 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옛 유신의 지사들도 이제는 다들 늙어, 아직은 젊다고 스스로 속일 수 있는 이토 정도를 제하면 적어도 초로(初老)에는 접어들었다. 더구나 갈수록 정부에서 찬밥 신세 되어가는 이노우에라면 어떻겠는가. 그렇게까지 친한 벗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토 자신이지만, 그래도 이곳 조선에 틀어박힌 이노우에에게는 간만에 그나마 흉금 터놓을 수 있는 사람 만난 것이었으리라.
한때는 그들에게도 꿈이 있었다. 스승 요시다 쇼인의 아래에서 동문수학하던 시절, 존황양이 네 글자 짊어지고 천하를 뒤집어보겠다는 그런 야심이 있어, 이리저리 날뛰고 또 이곳저곳 뒤집어놓았다. 그로부터 삼십 년. 세상은 어떻게 되었고 그들은 또 어떻게 되었는가.
바깥의 휘황한 전기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지금쯤이면 일본 이곳저곳에도 들어와 거리를 밝게 비추고는 있겠지만, 눈앞의 한성에 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봐, 슌스케. 뭘 그리 보는가?”
“어, 아직 깨어있으셨습니까. 바깥 야경을 보고 있었지요. 우리 히노모토 땅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지난 십 년간 지냈던 미국 땅보다야 정겹군요.”
“이 사람,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솔직히 말해보게. 질투겠지. 그렇지 않은가? 저 성세, 저 번영... 응당 우리 것이어야 했는데.”
“하하, 질투라... 글쎄요.”
물론 그렇다 한들 저 겉보기 번영도 이토 그가 미국에서 본 진퉁 번영에 비하면 참새의 눈물(새발의 피). 그러므로 그가 조선을 부럽게 여긴다면 저 눈앞의 광경 때문은 아닐 것이었다.
부러운 것을 따지면, 저 뒤의 여유였다.
그가 처음 배우기로 서양 오랑캐들은 동양인들을 무지몽매하다 치부하여 낮잡아본다고 했다. 뜻밖의 사정으로 미국 건너갔을 때 그에게 쏟아졌던 시선을 생각하면 딱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은 주눅들어하기는커녕, 동양을 업신여기는 이들에게 오히려 어찌 그리 생각하는가. 그대들 말에도 일리는 있으나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니, 함께 이야기 나누며 서로 잘나고 못난 점을 따져 보자 하면서 당당하게 대들곤 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그가 살핀바, 그리 당당하게 나서니 처음에는 어리석고 무모하다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바뀌는 것은 구미의 사람들이요 그들의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바다 건너 별천지로 생각하던 동아시아가 어느새 기회의 땅이 되었고, 그 땅에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인식도 총칼로 깨우쳐야 할 반개(半開)와 야만의 무리에서, 나름의 원칙과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는, 대화와 협력으로 서로 이롭게 해줄 수 있는 상대로 변모하였다. 당장 자신이 그 흐름 덕에 호구할 수단을 얻는 것을 넘어 의도치 않은 명성까지 적잖이 얻었으니, 조선에 고마워할 일이었다.
물론 그런 여유는 옛 지나인들의 허장성세와는 다른 것이었으니,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자신감과 그 자신감을 지탱하는 힘이 겸비된 것이었다. 둘 중 무엇이 먼저 나왔는지는 알 수도 없고, 그리 중요하지도 않겠지만.
“어찌 되었건, 이들 조선인들이 앞장서서 주변의 풍파를 정리해주었으니 그 공은 고맙게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이를 이용해 날아오를 채비를 해야겠지요.”
그가 김윤식에게 전한 계책의 요지가 그러하였다. 조일동맹의 틀 안에서는 조선이 일본에게 아무리 양보를 한다 한들 분란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요, 그렇다고 맺은 동맹을 스스로 끊어 없애자니 난세의 풍파 가운데서 홀로 서기에는 아직 두 나라 모두 아쉬움이 많은 것이라, 차라리 함께 영국에 의탁하자는 것.
양이들이 속담처럼 인용하는 말로, 검으로 일어선 자 검으로 망한다 했던가. 자신은 외교의 일로 일본에서 쫓겨나 외교의 일로 돌아가고자 하고 있었으니 그 느낌이 오묘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하루이틀 생각해 실천에 옮긴 계책은 아니었다.
늙고 지친 오쿠보가 홀로 식산흥업을 이끈다 하지만, 아무래도 동국 농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애국공당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모두 들어주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더구나 이런 상황을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조금씩 다가오는 총선에서도 애국공당이 가뿐히 승기 잡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자신에게 이익되는 바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나와 남을 분간하는 것 역시 사람의 본성. 이번에 조선과의 관계를 놓고 불만 튀어나온 것은 그 발단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조선이 계속 지금처럼 흥성하게 된다면 이 목소리 역시 커질 것이요, 잘만 다루면 애국공당을 누를 방편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조선이 여기에 동의함을 알고서 일본에 건너가 다시 입헌정우회를 끌어들여 저들 공약인 것처럼 내세운다면, 그런 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국제적으로 살펴보아도 나름의 토대는 있었다.
좀처럼 동맹이니 조약이니 하는 것에 흥취 보이지 않던 영국이 요새 부쩍 저들 섬 바깥의 돌아가는 모양새에 관심을 주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연히 저들 편이리라 여겼던 독일에서, 벙어리 카이저의 강력한 주도로 자유주의 개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오히려 영국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대중의 여론이 일어나고 있고 – 근시일 내에 제위를 물려받게 될 황태자 빌헬름 본인부터가 그런 흐름을 알음알음 주동하고 있었다 – 발칸에서는 일전에 보장된 자치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이제 영영 독립하겠다며 소란 일으키는 이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었다.
얼마 전의 러시아 황태자 건만 놓고서도, 아마 지금쯤 다우닝 가 10번지에서는 과연 조선의 뜻이 무엇인가. 이러다 중국과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 전역이 영국의 사자를 때려잡겠다고 돌아서는 것 아니냐 하면서, 머리 맞대고 설왕설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시국에 앞장서서 일·조 양국이 힘을 보태주겠다 하면, 나서서 청하지는 못할지언정 맨정신으로 내치지는 못할 것이다. 직접 러시아와 닿아있으면서 무시할 수 없는 육군도 지니고 있는 조선에게 아무래도 비중이 쏠릴 것이므로 조선에도 좋고, 영국이 끼어들게 되면 조선이 마음대로 일본을 엉뚱한 계획에 끌어들이지는 못할 것이므로 일본에도 이롭다. 여기까지가 이토가 가져다 붙인 이유였다.
그런 사정을 고스란히 김윤식에게 전해들은 국왕 귀남의 반응은 이러하였다.
“경의 말을 듣고 보니 이등박문 그 자는 참으로 간악하구려. 그런 자가 발의한 것이라면 설령 듣기에 그럴듯하여도 반드시 후일 화근이 되기 마련.”
“신이 살피기에도 그자는 스스로 이득될 것이라면 안색 변하지 않고 능히 남을 해하는 계교도 부릴 수 있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당장 우리와 교류하는 양이들도 그 속셈에 있어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합니다.”
직접 이등박문과 이야기 나눈 김윤식의 단평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헌책한 바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일리라? 무엇을 이름이오?”
영 못마땅한 물음에도 곧장 아뢰는 것은 어지간히 귀남의 성정 익숙하지 않은 신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테다.
“아조가 영길리와 아라사 사이에서 한쪽을 택하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구주 여러 나라에서 나온 것이 벌써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세력의 우열을 따진다면 둘 중 앞선 것은 영국이요, 비록 아라사가 우리와 접경하였다 하나 사귀어 나라에 이익될 소지 많은 것 역시 영국입니다.
그러나 아국이 직접 영국에 청하거나 영국의 청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니, 러시아와 바로 적대하는 것이요, 우리와 근래 부쩍 교류가 늘어나는 미국 역시 아직 영국을 소원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일본을 가운데에 두어 그들이 나서는 쪽으로 이끈다면, 그러한 일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발의한 사람이 사람이다 보니 여전히 못마땅한 것은 사실이요. 외세 사이에 끼게 되면 꼭 나라에 힘든 일이 일어남을 기억하는 귀남으로서는 설령 이등박문이 아니라 대원군이나 영의정 최익현이 들고 나온 제안이라 하더라도 적잖게 주저할 만한 것이었다.
“매번 이렇게 영길리와 아라사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서 달라 하는 청을 받고는 하는데, 꼭 여기에 따라야만 하겠소? 다른 방도는 없소이까? 예컨대...”
그때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물론 필사적으로 반론을 생각하다 보니 떠오른 것이었지만.
“저들을 속여 우리가 각각 어느 한 편을 들었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소? 이왕 권도(權道) 택한다면야...”
그리하여 나온 발상이, 조선은 러시아 편을 들고, 일본은 영국 편을 들면 어떻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바다를 두고 서로 병비 갖추는 주안점이 다르니,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싸울 수도 없는 것이고, 미리 합의하여 만일 일이 어그러지면 서로 싸우는 시늉만 하자고 할 수도 있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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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19세기 말 영국의 대외정책을 ‘위대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고 지칭하고는 합니다. 특히 솔즈베리 내각 집권기에 두드러진 이러한 경향은, 어떤 강대국과도 공식적이고 구속력 있는 동맹을 맺지 않고 유럽 국가들 간의 관계에 대한 개입은 최소화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1902년의 영일동맹이었지요. 하지만 이러한 위대한 고립이 과연 ‘위대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의도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적지 않습니다. (당장 ‘위대한 고립’이라는 말부터가 영국이 아니라 캐나다 정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지요.)
특히 ‘위대한 고립’은 비스마르크 체제의 붕괴로 유럽 내의 자체적인 세력균형이 뒤흔들리고, 독일이 ‘현실정치(Realpolitik)’ 대신 ‘세계정치(Weltpolitik)’를 내세우며 영국과의 건함경쟁 및 식민지경쟁에 나서게 되면서 결코 ‘위대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받게 됩니다. 러시아의 남하와 극동 진출이 재개되고, 프랑스와는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충돌하고,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미국과도 갈등이 고조되면서 이미 1890년대 중후반부터 문제인식이 등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영국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세기가 바뀌기 전, 미국과 영국은 어느 정도 합의에 성공하면서 오늘날까지 부상하는 강대국과 기존 패권국이 충돌하지 않은 얼마 안 되는 사례로 남았습니다. 극동에서는 청일전쟁 이후의 삼국간섭과 의화단 사건 등으로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영국은 일본의 조선 내 이권을 인정하고 일본은 영국의 중국 내 이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합의가 이루어져, 서로 ‘특별한 이해관계’를 보장하고 분쟁상황에서의 우호적 중립과 필요시 집단행동을 명시하는 제1차 영일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이후 1905년 제2차 영일동맹으로 보다 군사동맹적 성격이 강화됩니다.) 작중에서는 러불동맹이 훨씬 일찍 체결되고, 독일과 연대해야 할 필요성이 그에 따라 부상하면서 ‘위대한 고립’의 관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