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85화 (185/320)

61. 실밥 뜯어질 무렵 (1)

간혹 개화군자 자처하는 철부지들 중 속히 서양 나라들 따라 태양력을 도입하자는 주장 펴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러한 청은 속속 불허되곤 하였다. 연유인즉 역법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궁의 안팎에서 관원들이 농지거리하기로는, 서양 역법은 열흘이 아니라 이레를 하나로 묶어 ‘주(週)’라 일컬으니 자칫 기무회의 주기 짧아질까 두려워 가운데서 누군가 농간부린 것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그런데 농 안에 뼈가 있던 것이, 기무회의는 한 순(旬)에 한 번 열림이 금상 치세의 상례가 되었는데, 그 사이 무언가 굵직한 사안이 불거지게 되면 중신들 앞에서 그 일 맡아 보는 쪽에서 나아와 일의 선후와 전말을 설명하곤 하였다.

나라의 소소한 일이야, 스스로 처리하고 후에 상께 아뢰는 것이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렇게 되니 오히려 기무회의에서는 정말 중대사만 다루게 되어, 서양 말 옮겨 ‘약통(略通, 브리핑)’이라 하는 이것이 곧 체통과도 관련이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번 일본국의 여론 심상찮은 일에 있어서도, 관원들 발등에 불 떨어진 셈이었는데, 다음 기무회의가 아직 나흘 남았음을 고맙게 여겨야 할 일이었다.

“금번 동삼성에 아라사 철길 놓는 것으로도 가운데서 거간 노릇하여야 하니 마땅히 올 한 달은 괴롭겠거려니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게 또 뭐란 말인가.”

“아국이 아무리 승평(昇平. 태평)하다 한들 여러 큰 나라 틈바귀에 끼인 것은 변함이 없으니, 항상 일 많은 것은 우리 예조 아니겠습니까.”

마침 각사 옆 다방에서 뜨끈한 가배 두 잔 대령하였기에 자연스레 머리 식힐 여유 얻게 된 두 관원이 투덜대며 떠들었다.

아무래도 국외인 드나들 일 많은 예조다 보니, 양옥 올리는 것도 삼군부와 병조 다음이라, 함께 각종 편리한 기물들이 설치되어 업무 치이는 관원들을 조금이나마 달래곤 하였다. 그 하나가 이 유리창이었는데, 바람이나 쐴 생각으로 창호를 훌쩍 여니, 서울 토박이에게는 상쾌할지 몰라도 갓 상경한 이들은 매캐하다 할 만한 가을바람이 들어왔다.

“내 이럴 줄 알았으면 고시 보지 않고 가친(家親) 말씀대로 계속 대학원에 있을 것을 그랬네.”

“그랬다가는 가야산 자락을 영영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존형께서 좋아하시는 가배는 입에 대기 어렵게 되었겠지요. 그쪽이나 이쪽이나 밤잠 길지 못한 것은 같지 않겠습니까.”

“예끼, 이 사람. 그래도 마음이나마 편한 쪽이 낫지.”

“이 정도로 그리 한숨이 나오면 장래에는 어찌할 생각들인가. 덕국 변법(變法)하는 사정부터 시작해, 반드시 알아야 할 남의 나라 사안이 한둘이 아닌데.”

등 뒤에서 남의 언성 들리기에 돌아본즉 다름아닌 예조판서 김윤식과 바로 그 아래의 김홍집이라, 자칫 뜨뜻한 가배 콩뜨물에 관복 버릴 뻔하였다.

“이번 일은 다음 회의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차대(次對)에서 아뢸 사안이니, 격식은 챙기지 말고 우선 갖춰야 할 내용들부터 모두 틀림이 없는지 살피도록 하게나. 여유가 그리 많지 않네.”

물론 겉으로만 보면 일본국이 단순히 불만을 표한 것이므로 멋모르는 이들이야 그리 시급한 일은 아니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주상이 가장 걱정으로 삼고 있는 나라가 어디인지를 그 옛날 경연관 시절부터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나흘을 기다릴 것도 없이 곧장 아뢰고 대책을 마련함이 옳았다.

더구나 하필 경진약조(조일동맹)의 재연장이 임박한 시기였으니, 신하된 도리로 어찌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직접 진두에 나서니, 일은 일사천리라. 나라 사이 재정에 관한 것이 있으면 곧장 ‘일재(어윤중)에게 물으라’ 하면 해결되고, 또 병조에 물어야 할 일도 외무참판의 명의로 청하게 되면 곧장 답변 돌아오니 미관말직 스물이 뭉친 것보다도 더 빨리 진전이 되었다. 그러나 전후의 사정을 알면 알아갈수록 대처할 방도는 더욱 아득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 한들 우선 입궐하여 아뢰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지요.”

헌데 막상 각사 나서 광화문으로 발걸음 옮기려 채비를 하는데, 함께 복도로 나선 김홍집은 엉뚱하게 출구 반대편을 향했다.

“도원, 어딜 가는가.”

“허허, 형님, 잊으셨습니까.”

잠시 생각하다, ‘아’ 하는 짧은 탄성으로 답변을 갈음하였다. 양옥 올리면서 들어온 기물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속칭 덕률풍이라고도 하는 전화가 그 중 하나였다.

“흠흠. 거 계시오? 아, 내 예조 외무참판이올시다. 그간 평안하시었소?”

어투로 보아 아마 궐내의 승지쯤 되는 사람이 직접 받은 모양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예조의 사무로 긴히 상을 뵙고 아뢸 사항이 있소이다. 무슨 사무인가 하면, 그 일본국 시무(時務)로 아라사와 교섭한 것에 이의 제기한 건이오. 그 일 때문이라 아뢰면 될 것이외다.”

그리고서 적당히 나머지 안부 묻고. 차자(次子)가 금번에 참한 처자와 가약(佳約) 맺었다 들었는데 잘 되었다. 절기 바뀌는 시기 몸져눕는 이 적지 않으니 부디 강녕하시라 하고서 얼추 마치었다.

“곧 윤대 마치신다 하니, 지금 나서서 조금 바삐 발걸음하면 편전에서 뵐 수 있을 듯하다 합니다. 가시지요.”

“아직 윤허하는 비답은 받지 못하였지 않은가?”

김윤식이야 이 전화로 궁 안팎의 사무를 크게 편리하게 하기 전에 대감 소리 듣게 되었으니, 절차를 모를 만도 하였다.

“어지(御旨)는 전화로 주고받지 않음이 통례(通禮)입니다.”

전화라는 기물이 나라에 들어오자마자 그것이 참 좋은 물건이니 널리 쓰자 제의한 것은, 그런 문물을 항상 좋게 여기는 주상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미리견에서 전영(특허)의 법도를 통하여 국내에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그 사용에 불편한 바 많아 아직은 시기 이르다고 몇몇 신료들이 반대한바, 어차피 전화 없으면 아쉬운 것은 신료들이니 다음을 노리자 하고 귀남이 잠시 뜻을 접어둔 것이었다.

그 사이 민간에서 전화가 널리 퍼져, 공사(公私) 막론하고 업무 번다한 도회(都會) 일대에서는 비록 진기한 구경이기는 하나 도깨비 놀음 취급은 받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새 문물 들어오면 늘상 있기 마련인 난리통과 각종 사고도 잦아들었다.

그리하여 다시 어느 날 재론하여 궁과 각사 사이에도 전화를 널리 놓자 하였는데, 그랬더니 이번에는 전화로 왕명을 출납할 때의 예가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전화를 처음 써 보는 사람이었다면야 신기해서라도 억지로 자신이 쓰려 하였겠지만, 귀남이야 그럴 일 없는 것이라, 정 그러면 아예 예를 차릴 필요 없는 사무에 대해서만 전화를 쓰면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그랬더니 그것이 어느새 예로 굳어졌다.

“그랬는가. 나야 그저 ‘전화로 미리 청하였습니다’ 하는 얘기만 듣고 바로 오갔으니 이제야 알게 되었네. 거 참, 공연히 품계만 오르다 보니 또 이런 일이 있군그래.”

머쓱해진 김윤식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가랑비에 옷 젖듯 전기라는 문물도 어느새 도성 전역에 퍼졌는데, 퍼진 것은 전화만은 아니었다. 일례로 옛 서울 생각하던 국왕 귀남이 서양에서 새로 들이고 있다는 전차라는 물건을 도성에도 놓자고 발의하자 곧장 일이 추진되고 있기도 하였다. (사실 어심이 새로운 문물 들여옴에 거리낌 없음을 알던 공조에서 물밑에서 준비하고 있기도 하였으나, 성상 전하의 하유로 진행될 공사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선수(先手)가 필승(必勝)’이라는 시쳇말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간만에 광통이도국이 솜씨 발휘 – 겸 돈벌이 – 할 때가 되어 대로의 포석을 뒤집어놓으니 모양새가 썩 좋지는 않아, 예조 대문 나서서 광화문으로 향하던 김윤식이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공사를 언제까지 한다고 하였던가? 절기가 곧 백로(白露)니 진창이 되지는 않겠지만, 막상 저렇게 헤집어놓은 것을 보니 썩 좋지는 않군.”

“그것은 한성판윤이나 저기 공판 대감께 문의함이 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새 눈과 발에 익어서 그렇지, 우리 소싯적만 해도 맨땅이 드러나 있던 육조거리 아닙니까.”

“그건 또 그렇군그래.”

“그보다 저 전차 들여오는 것도 결코 가볍게 할 수 있는 건은 아니었을 터인데, 그 자금 융통함이 마치 솜털 드는 것처럼 쉬웠다 하니 의외입니다.”

“천하가 하나로 묶여가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는 것이겠지. 내가 읽고서 이해한 바가 맞다면, 호조에서 보내온 글도 얼추 그런 뜻이었던 듯한데.”

이조에서 한 해에 등청하지 않는 일수를 법규로 정하자 하고 있었으나, 어찌 나랏일 논하는 것을 저 제조국에서 하는 것과 같이 할 수 있겠느냐며 반발이 적지 않은바 – 물론 겉치레 핑계일 공산이 컸다 – 아직 칭병하고서 등청하지 않는 것이 딱히 문제되지는 않고 있었는데, 가을철 감모(感冒, 감기)로 몸져누운 어윤중도 그리하여 오늘은 호조에 나아가지 않고 쉬고 있었다.

그를 대신해 얼마 전 재무참판으로 천거된 홍종우라는 이가 답변을 써서 품의하였는데, 과연 법국 다녀온 이 답게 식견은 넓었으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나라의 정승감이라는 과분한 세평을 그대로 믿어 이 정도로 간추려도 능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인지, 그 답변의 내용이 다소 난해하였다.

이르기를, 남미리견주(남아메리카) 알제친(아르헨티나)국이 대란(大亂) 맞이하여, 농사는 해마다 대흉(大凶)에 얼마 전에는 역적질하는 무리도 있었다 하였다. 그러니 그 땅에서 벌이는 여러 사업에 밑천 대고 있던 미국과 구주의 여러 상고(商賈)들 보기에, 그처럼 불안한 나라에 계속 자금 들이밀어 좌불안석으로 지내느니 차라리 국운 융성한 해동 조선국 같은 곳에 저들의 자산을 의탁함이 가당한 것이었다.

“천하의 재보가 우리 땅으로 모여드는 것이야 물론 사양할 일은 아닙니다만, 우리 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니 조금 근심되는 바가 있습니다.”

바닥의 포석 들어낸 곳을 옆으로 비켜가며 김홍집이 말했다.

“영상(최익현)이라면 ‘재물은 본디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 이르시겠지. 자네도 그쪽이었나? 요새 고균과 종종 만난다 들었는데 의외구만.”

“무릇 재물 몰리게 되면 시기하는 마음도 들기 마련이지요. 사정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동철로 이익을 얻고, 동삼성과 연해주를 경영하고, 거기에 미리견 땅에서 온갖 기이한 재주가 들어오는데, 마치 이웃 나라들을 제치고 우리만 이익을 얻는 것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딱히 부정하지 않는 답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한 요점을 짚었기에 김윤식의 마음도 그리 쏠렸다.

“자네 말이 그럴듯허이. 아닌 게 아니라 일본국에서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겠어. 다른 큰 나라들이 우리와 더불어 사업을 벌이든 자금을 융통해주든 하여 고루 이익 얻고자 함은, 물론 우리가 도의 아는 나라로 세평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함부로 침노하여 노략질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겠지.”

“이르신 대로입니다. 그리고 그런 위세를 북돋아준 것이 아국과 일본국 두 나라가 맹약하여 서로 지키기로 한 일이었으니, 속된 말로 저들 몫도 내놓으라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수문(守門)하는 이들이 김윤식을 알아보고서, 깍듯한 군례 갖추고는 문을 열었다. 회중시계 꺼내서 보니, 지금쯤이면 아마 주상도 윤대 마치고 아직 편전에 머물고 계실 터.

“허나 섭섭하긴 하군그래. 두 나라가 수호한 이래 우리만 이득을 보았는가? 당장 삼 년 전 하와이국 일만 하여도 그렇고. 그 전 일본국과 다른 서양 나라들 사이에서 중재하여 조약을 개정케 도운 일도 그렇고. 우리가 도와준 바도 많은데.”

“사람 마음이란 것이 남 도와준 일은 한 갑자 전의 일도 어제처럼 기억하지만 남 도움 받은 일은 어제 일도 한 갑자 전처럼 까마득하게 잊기 마련이지요.”

차라리 옛날 『일본책략』 소동 때처럼, 일본국 나라 안에서 분란 일으켜 뭔가 이익 얻어보고자 몇몇 사람들이 작당하여 이간질을 하려 했다면 모를까, 공안서에서 아무리 동향을 살펴 보아도 그런 정황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없었다.

그러니 일본국 식자들 중 일부가, 딱히 노리는 바 없이 순수하게 나라 걱정하는 마음에 그런 말을 꺼낸 것일 테니, 이익으로 꾀어낼 수는 없고, 마음 속에 세운 도의가 다르므로 의리 내세워 타이르기도 어려운 일.

“어려운 일이고 의리로써 밝힐 수 있는 상도(常道)도 쉬이 알 수 없는 것이나, 공론에 부쳐 함께 고심하다 보면 명안까지는 아니어도 권도 하나쯤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 방책 하나를 마음속에 품은 불청객이 정동 일본 공사관에 와 있음은 꿈에도 모르는 김홍집이 말했다.

조선국 국운이 쇠미해지는가 싶었는데 다시 솟아오르니, 약간의 오만한 마음 담아, ‘주나라는 비록 오래되었지만, 그 천명만은 외려 새롭구나(周雖舊邦 其命維新)’ 운운하는 서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옆의 일본국으로 말하자면 나라 문호 열기 전까지 스스로 문물 빼어나기가 천하의 으뜸이라 여김은 조선과 같았는데, 문 연 뒤의 사정은 조선과는 판이하였으니, 비록 태평하기는 하지만 언제고 그것이 계속될 지는 알 수 없는 것이라, 과연 앞으로 다가올 풍파에서 저들보다 작은 나라인 조선국에 의지함이 옳은 길인가 의문 던지는 이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 누군가 나서서 슬슬 중재하든, 정리하든 해야 하겠지요. 그럴 방책이 있어 조선의 의중을 묻겠다 하는 것인데, 뭐, 대단한 일을 요구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 집인 것처럼 접견실 푹신한 의자를 만끽하며 헤실대며 웃는 중년 남자는 분명 일본 안에 설 자리 사라져 도미(渡美)하여야 했을 이토 히로부미였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본국에 보고할 수밖에 없네. 태평양 반대편에 있어야 할 자네가 여기 한양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불쑥 이곳 공사관을 찾아와서는 그런 요구를 한 것도 그렇고.”

“선배께서 보고를 해야 한다면 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니지요. 저는 지금 일개 야인입니다. 미국에서 문명(文名)이야 조금 떨치고 있다지만. 그래서 집필을 위해 자료도 찾고, 하는 길에 겸사겸사 조선 고관 ‘인터-뷰우’도 조금 하고. 그러려고 이곳 조선에 온 것이지요.

제가 무슨 수배범도 아니고, 그 정도 자유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때의 동무 조선공사 이노우에 카오루의 모호한 답변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확연하여, 이토의 너스레와 대비를 이루었다.

“그래서 다리를 놓아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단 이것부터 물어야 하겠네. 대체 왜 김윤식 공을 만나려 하는 겐가?”

“머릿속에 두 나라 모두에 이익 될 계획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아직 알려드릴 수는 없지만요. 옛 정이라는 게 있기는 하지만, 소싯적에 함부로 입방정 떨다가 크게 데인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쇼. 어쨌든 황국이 지금 이대로 조선에 버금가는 자리에 머물게 되면 모두에게 좋지 못합니다. 국익뿐 아니라 우리네 옛 지사들 입장에서도 그렇지요. 당장 선배쯤 되는 사람이 기껏해야 일개 공사로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조선국 공사라면야 공사들 사이에서는 가장 중요한 축에 들겠지만, 그래도 선배 정도면 내각에서 대신 자리 하나쯤은 맡고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쳇. 언변은 막둥이 슌스케 (히로부미의 옛 이름) 시절 그대로구만.”

이토야 그냥 적당히 그러려니 생각하고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과연 적중하였는지 이노우에의 표정에 파문이 일었다.

“좋네. 한 번 연통은 넣어 봄세. 허나 조심하게. 풍문에 따르면 이유는 몰라도 조선 국왕이 자네를 꺼린다는 얘기도 있네.”

“흐흐, 사내 대장부가 되어서 그 정도 각오도 하지 않으면 어찌 큰일을 하겠습니까.”

저 웃음은 짓궂은 것이라 해야 할까, 음흉한 것이라 해야 할까? 옛 정에 반절, 이토의 슬슬 긁는 말에 반절 이끌린 이노우에는 끝내 단정하지 못한 채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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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도 아르헨티나는 1890년 밀 흉작과 ‘공원혁명(Revolucion del Parque)’의 실패로 인해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을 통해 아르헨티나에 투자를 진행하던 유럽계 자본들이 대거 철수하였는데, 비슷한 시기 호주 같은 다른 신흥국 및 신흥 지방에 대한 투자가 전반적으로 위축되었지요. 작중에서는 그 자금이 보다 안전하면서 고수익을 보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조선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 조선에 처음 전화가 소개된 것은 의외로 빨라서, 1880년 천진에 시찰을 나갔던 일행이 국내로 들여왔습니다. 하지만 이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정국이 혼란하여, 본격적으로 정부 행정에 사용이 추진된 것은 훨씬 뒤인 1893년 무렵에서였습니다. 이 역시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등으로 한동안 표류하다가, 마침내 1896년 궁내부 소속 통신사가 관리하는 한양(경운궁)-인천 전화선이 가설되었고, 1902년에는 통신원이 국영으로 설립되어 민간에서도 한양-인천 전화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도 궁내 전화는 행정용으로 널리 쓰였습니다만, 왕명의 출납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신문물에 관심(만) 많던 고종답게, 직접 어명을 전화로 내리기도 했는데, 이때 사모관대를 차려입고 전화를 향해 절을 올린 뒤 엎드려 받았다는 것은 후대에도 전하는 유명한 이야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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