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재투성이 처자 (3)
교태전 뒤편에 딸린 건순각(健順閣)은 중전 자영이 근래 교태전 본전보다 더 자주 머무는 곳이니, 대개 일을 맡아보면서 심정 답답할 때 창호만 열면 곧장 정원 정경이 문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문득 답답한 심정에 찬바람 쐴 각오 하고서 문을 여니, 아미산(峨眉山)의 앙상한 화초 사이 남은 눈이 희푸렇게 달빛 받아 빛났다.
한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기에, 집안이 한미하기에, 국모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기에 사사건건 가로막히지만 않는다면, 하늘을 뒤집고 땅을 갈아엎을 수도 있을 줄만 알았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서야 깨달은바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부숴서 무너뜨리기도 전에 벽이 절로 허물어지더니, 대원군의 유구국 유람을 시작으로 정말 공언하였던 대로 공안서 일이 하나씩 운현궁에서 궐문 안으로 넘어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실무는 내팽개치고 그저 자신도 국사 돕고 있으니 참으로 훌륭하다며 스스로 달랠 요량이었다면야, 그런 달콤한 생각에 홀로 빠져 허송세월함도 족할 것이련만, 제대로 된 일을 손에 잡아보았으니 그런 얄팍한 허깨비 놀음은 도저히 내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직접 나라의 대소사를 살피고 중한 것은 저의 배필과 의론도 해보고 하면서 처결하다 보니, 부쩍 자신의 부족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제 자영의 나이도 마흔. 만족함을 알고 물러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싶어, 찬 공기 들이마시며 뚫리지 않는 가슴을 탓했다.
그때 바깥에서 밤을 뚫고 낮은 목소리 울려, 지존 행차를 알렸다. (양기 가득한 사내들이 내관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예전과 소소하게 달라진 점 중 하나였다.) 창문 닫고서 잠시 기다리니 주상이 문 열고 다가와 곁에 풀썩 앉았다.
“흠흠, 야심한 때까지 건순각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서, 필히 마음고생 심하리라 생각하고 찾아왔소.”
생업 외에 변변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요. 이제 와서 하나쯤 재미 붙이려 하니 국왕의 체통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그새 몸도 조금은 (다시) 나이를 먹어, 간혹 밤에 잠 못 이룰 때가 있었으므로, 밤에 종종 이곳저곳 궁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취미 아닌 취미가 되었다. (귀남이 반쯤 농담처럼 생각하기로는, 이렇게 넓은 궁을 저의 집으로 지어 놓고서 돌아다니지도 않을 것이라면 지어놓은 보람이 없는 일이었다.)
“베풀어주시는 심려에 어찌 보답하기를 그치겠습니까.”
“그때 그 서한으로 외국 사정 탐문해보겠다 하였던 것이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구려.”
대원군이 물려주는 연줄만으로 어찌 만족하겠는가 싶어, 대서와 미주 여러 나라에 나가 있는 공사들의 아내와 서간 주고받으면서 그들을 마치 간자(間者)처럼 써볼 요량으로 얼마 전 계획을 짠 바 있었다. 허나 말 다르고 풍속 다르다 보니 들어오는 소식은 대개 믿기 어려운 것이 많았고, 또 그러면서 지나치게 성실하게 한 마디 놓치지 않고 저들 들은 바를 상세히 고해바쳤으므로, 홀로 취합하는 자영으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차라리 국모 자리 외에 제대로 된 벼슬 하나쯤 쥐고서, 실무 맡길 만한 그런 자들 데려다 일꾼으로 쓰면 훨씬 잘 풀릴 것이었다. 대원군도 암암리에 부리는 수족이 예로부터 있었다지 않은가.
그런 사정을 직고하였더니, 망설이면서 얘기 꺼내기를,
“으음.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관아를 새로 세워 아래에 남녀 관원을 두게 한다면 어떻겠소이까. 물론 그 공안서처럼 당당하게 어디 염탐하거나 하는 그런 관아는 되지 못할 것이지만.”
난데없이 제안하니 궁금한 기색 감추지 못하였다.
“실은 사정 여차하게 되어, 축첩을 금하면서 그와 함께 궁 안의 여러 여인들이 마음 맞는 배필 찾아 통혼할 수 있도록 국법을 바꾸고자 하게 되었소.”
생각해보면 이미 내관의 법도가 바뀌었을 때부터 예정된 일이기는 하였다. 뭇 나인들이 꿈에만 그리는 주상은 비빈 더 들일 생각을 하지 않고, 혈기왕성한 내관들이 새롭게 들어온다면 불미스러운 일은 언제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떤 폐단이 또 생길지, 너무 훤하지 않소이까. 궁인에게 장가든 이들이 그것을 연줄로 삼아 부정을 저지르려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궐 안팎으로 부산히 드나들다 보면 그 외에도 적잖이 골치아픈 일이 터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과부의 재가를 허통한 이래 자영 그보다 연로한 여인들도 종종 새살림 차리는 세상일진대, 정말로 혼사를 단념한 늙은 상궁들이 아니고서야 다들 바깥에서 배필을 찾으려 할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도 못하게 궁 안에 줄 댈 기회가 생겼으므로, 여러 거족들은 급히 머나먼 친족까지 수소문해 숫총각부터 홀아비까지 인물 변변한 이들 그러모으려 할 것이었다.
축첩을 금하는 일을 놓고 앞장서서 반대할 법한 이들이 대신 이 일에 몰두하게 되었으니 의도치 않은 공효였다만, 당연히 이렇게 인사(人事) 번잡해지면 꼬이기도 쉽기 마련이라, 차라리 궁중의 법도를 단속할 새 관아를 둠이 어떻겠느냐 하는 이야기가 어디선가 나오게 되었다.
“하여, 내·외명부(內外命婦)를 합하여 명부사(命婦司)를 궁내부 아래에 둠이 어떻겠느냐, 그런 생각이외다. 아직 다른 중신들 대부분에게는 거론하지 않았으나, 중전 그대가 이 일을 맡음이 가장 온당할 듯하여 이리 뜻을 묻게 되었소.”
국정에서 너무 오래 마음을 떨어뜨린 탓인지, 귀남의 – 본인 생각으로는 – 재치에 할 말 잃고서 어영부영 문안 마치자 하고 물러난 대왕대비 조씨의 생각도 아니요, 귀남 본인이 온전히 떠올린 발상도 아니요, 신촌향약으로 인한 탁지(재정)의 일을 맡아보느라, 판서씩이나 되어서 밤을 새울 기세로 일하던 어윤중의 발상이었다.
물론 호조판서에게 관청 직제를 물음은 영 이상한 일이지만, 옛 경연하던 시절 정을 내세우며 청하였더니 마지못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맨입으로 엉뚱한 일 시키기는 미안한 것이라, 다음번 기무회의에서 은근슬쩍, 호조는 판서가 실로 근면하니 그 아래의 참판 이하 여러 관원들은 참 편하겠다고 언질해주기로 약조를 하였다.)
“생각해보면 지금 마음 쓰고 있는 것도 세상일의 이면에서 드러나지 않는 사정들 탐문하는 것이지 않소? 내 생각에는, 흠흠, 그것만큼 중전 그대에게 긴요한 방편도 드물 듯한데.”
‘내 생각’이 아니라 어윤중의 생각이었으므로 멋쩍은 헛기침이 나왔는데, 어찌 되었건 일리가 있고도 남는 말이었다.
만약 궁 안에 저들의 눈과 귀를 얻을 심산으로 거족들이 머나먼 친인척을 데려다 궁녀들과 연을 맺게 한다면, 반대로 이곳 교태전에서도 궐 밖을 언제든 살필 길이 열리는 셈이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제의를 했다면 그 저의를 의심하고 보았겠지만, 옛적의 그 순박한 미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아니한 용안으로 이런 제의 내놓으니, 바깥 밤공기와는 사뭇 다른 온기가 마음 한 편에서 솟아오르는 듯하였다.
처음 법국서 건너온 이들이 ‘삼월당(三月堂)’ 차린 이래 그 재주도 꽤 퍼졌고, 더구나 솜씨 좋은 손씨 부인의 빈관(賓館)에서도 종종 양과자 만드는 재주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도성의 백성 중 쌈짓주머니에 널널하니 동전 남는 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가배 파는 찻집, 혹은 청국서 들여온 말대로 면포점(麪包店, 빵집) 등등이 여기저기 한둘씩 생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사람은 많고 땅값은 헐한 삼포(三浦. 마포 주변) 일대에 신식 건물도 많은 고로 이 일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중 자육원 옆에 있는 면포점 겸 다방은 어디서 재주 배워왔는지를 당당하게 밝히듯 당호를 ‘유월당(六月堂)’이라 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아래에는 (아마도 틀렸겠지만) 저들 점포 이름을 꼬부랑 글씨로 옮겨 써 놓기까지 하였다.
물론 자세히 살피면 모자란 구석 적지 않아, 정작 안에 들면 의자 대신 마루 놓여 있고, 영 조잡한 서양 그림이 벽에 붙어 있는 것은 어설픔의 화룡점정과도 같았지만, 사정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무릉도원 별세계와 진배없었다.
이러한 유월당 한가운데에는 정정한 사내 넷이 저들끼리 무슨 재밌는 이야기 나누는 시늉 하면서 은근슬쩍 주변을 살피고, 그 옆에는 상투보다는 차라리 댕기가 어울릴 법한 앳된 젊은이 하나 앉아 『서울 타임스(Seoul Times)』라 이름 붙은 영문 신보 보고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안양대군 규(邽)였다.
『서울 타임스』는 곧 얼마 전 뜻 세운 김옥균이 개화당에서 운용하던 자잘한 신보사 여럿을 통합하여 발족한 『경화시보(京華時報)』의 영문판이었다.
『경화시보』는 개칭 후 새로 낸 첫 호에서 당당하게 선포하기를, 오직 ‘독자 제현에게 재미와 보탬 되기만을 바랄 따름’이라 하고서 한동안 작첩하는 남정네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또 그 집안에 화란 생기기 쉬운지를 다루고 있었다.
개화당 젊은이들 중 글재주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아, 나름대로 재치있게 풀어서 쓰고는 하는데, 그러면서 은근슬쩍 교훈을 제시하고 있었으니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 유홍기 한 사람을 제하면 고루한 개화당 옛 중진들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런 사정을 나라 밖에 함부로 알릴 수는 없는 것이므로, 대신 『서울 타임스』는 나라 안과 주변의 자질구레한 소식 정도를 다루고, 때로 조선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는데, 어차피 양이 글에 밝지 못하여 읽지도 못하는 것을 어린 마음에 자랑삼아 가져온 안양대군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바였다.
곧 문호 열리고, 어디 가면 아직 ‘계집아이’ 소리 들을 만한 처자 하나가 빼꼼히 고개 들이밀었다. 그러던 중 신보 읽는 시늉 하던 규와 눈이 닿자, 언제 주변 살폈냐는 듯 곧장 걸어들어왔다.
“도련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나야 뭐.”
한두 번 밀회도 아니었다. 종종 이렇게 둘이 만나는 모습을 보고서, 이 찻집에 어울리지 않는 백발 성성한 고릿적 서생들이 대놓고 면박 주는 일도 없지 않았는데, 그럴 때면 이규는 피식 웃으면서, 근래 도성 사류의 자제들 풍습이 대개 이러하니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처로 찾아오라 최대한 공손하게 일러주고는 하였다.
그러면서 대는 곳은 장의동부터 시작해 옛 세도가들 모여 사는 동네라 (미리 외워두는 정도의 준비는 평소 해두고 있었다.) 설령 돌아가서 탓하더라도 남의 집안에만 손해 갈 것이었다.
“별단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더냐.”
“잊을 리 있을까요.”
별단이, 그러니까 마포 사는 조별단이는 변변치 못한 집안의 여식으로, 부모가 모두 허드렛일 하여 입에 겨우 풀칠하고 사는 그런 처지였다.
별단이 나이 열두 살 먹던 해에 그 어미가 말하기를, 이제 나이가 찼으니 마땅히 가계에 보태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생각하기로는, 마흔도 되기 전 온갖 고생으로 마치 환갑은 다 된 것 같은 어머니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한 번 사는 인생을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을 면하면서 몸도 상하지 않으려면 결국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고, 밥벌이 대신 공부를 하려면 우선 집안이 빈궁하지 않아야 하므로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딴에 명안을 떠올렸으니, 근방 자육원에서 일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우면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하여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중, 이곳의 후원자라는 왕비와 연줄 닿으면 아들 윌리엄의 선교사업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자육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스크랜턴, 즉 시란돈(施蘭敦, Mary F. Scranton) 씨의 눈에 들어, 허드렛일을 가끔 돕는 조건으로 입교를 허락받았다. 처음에는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 공부를 하겠다 하느냐며 말리던 별단의 부모도 조금 알아보았더니 이쪽이야말로 강대와 삼포에서 허드렛일 하는 것보다 벌이는 좋고 뒷전도 확실한 것이라, 어느새 일가가 모두 자육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낸 지도 여러 해가 되어, 어느새 슬슬 혼처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잔걱정 많은 어머니가 주변 수소문을 시작할 때가 되었는데, 별단이는 사실 눈에 드는 남정네가 딱히 없는 고로 – 자육원에 있으면 생기기가 어려웠다 – 그것은 알 바가 아니었고, 부러운 것은 단 하나, 자육원 앞에 새로 생긴 다방에서 구수한 면포 굽는 내음 나는 것이었다.
“그것이 벌써 딱 한 해 전의 일이구나. 솔직히 처음에는 그렇게 당차게 나올 줄 몰랐다.”
“저인들 도련님께서 그리 흔쾌히 응낙할 줄 알았겠어요?”
자육원의 일이야 항상 바쁘기 마련인데, 시란돈이 아무리 영특한 별단을 아낀다 한들 그 바쁜 일 중에서도 허드렛일만 조금 맡아 하는 별단에게 새경(봉급)을 더 쳐서 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얼마 안 되는 돈을 아등바등 모아서, 휴일로 정해진 보름날 마침내 큰 결심 품고 다방에 들어섰는데, 가게 주인이 어디 땟국물 흐르는 계집아이가 사람 오가는 길목 막느냐며 막 내모는 것이 아닌가.
“땟국물 아니라 연탄재고, 재투성이라 한들 동전은 멀쩡하다... 그리 대들었던가.”
“대든 게 아니라 정당하게 누릴 바를 구한 것이었지요.”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아니한바, 분기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여드레쯤 뒤에 기껏 목욕재계하고서 찾아가도 남루한 복장은 그대로이므로 여전히 퇴짜요, 그렇다고 저의 아는 사람 전부인 자육원 식구 한 명을 붙잡아 함께 가자고 청하기도 민망한 노릇이라, 그렇게 한 서너 번쯤 문전박대를 당했는데, 지난해 이맘쯤에 또 안쪽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나왔을 때 이 도련님과 마주하게 되었다.
‘거 지난번에 이쪽 지나갈 때도 맞닥뜨렸던 듯한데,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게요?’
생김새는 대갓집 말쑥한 자제인데 말투는 어째 또래 없이 어른들하고만 어울렸던 듯하여, 조금은 우스웠지만 꾹 참고 답답한 사정을 토로하였다.
그런데 대군 규가 듣기에는 말하는 것이 재미있기는 하되 어차피 전국에 많고 많은 민려(民黎)의 한 사람 이야기라. 크게 개의치 않고 흘려보냈는데, 그래도 환궁한 뒤에 계속 떠오르는 것은 금할 수 없어, 일부러 한 달 뒤에 다시 마포를 들렸다.
헌데 또 문지방도 넘지 못하고 길가에서 씩씩대고 있을 줄 알았던 그 처자가 이번에는 다방 안에 들어가 있는 것 아닌가. 남루한 행색은 그대로인데 무슨 전고로 이번에는 안에 들었는가 궁금하여 따라 들어갔다.
사연인즉, 이 말썽꾸러기가 반가의 자제인 듯한 젊은이와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본 다방 주인이, 대갓집 옛 유모의 딸 정도는 되는가보다 단정하고서 별단을 들여보내준 것이었다. 가게 안쪽 단장만큼이나 어설픈 면포를 아껴서 깨작깨작 먹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여, 저의 들고 나온 돈으로 뭐라도 더 사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외려 먼저 묻기를,
‘모두 나리 덕택입니다. 소녀가 비록 배움은 짧지만, 미물도 받은 은혜를 갚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혹 들고 싶으신 양과자라도 있으신지요?’
하는 것이었다. 별단 딴에는 비장해둔 동전을 모두 털어 없애는 정도의 지출이었으므로 예사로운 각오로 한 제의는 아니었다. 듣는 안양대군 보기에는 여간 흥미롭지 아니하여, 대답하기를,
‘내 무엇이 아쉬워 네 신세를 지겠느냐. 정 값을 내고 싶으면 다음 보름날 신시(申時)에 다시 이리로 오라. 내 가배 값은 대신 내 주겠다.’
하였다. 그때 이후로도 종종 만났으니 벌써 꼬박 한 해 전이다.
“그때 이후로 국법이 크게 바뀌었던데, 들었는가 모르겠구나.”
“사내의 작첩(作妾)을 금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렇지. 내 듣기로, 그리 되었으니 나라의 풍속도 정녕 마음에 맞는 사람과 통혼하는 것으로 바뀔 것이라 하더구나.”
대군이 홀로 한 생각은 아니요, 당연히 신보 등등 – 주로 『경화시보』 -에서 본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지만.
“그러면 도련님께는 좋은 일인가요? 도련님처럼 집안 훌륭하신 분이라면 벌써 혼담이 여럿 오가고 있을 듯한데...”
언제고 한 번쯤 물어는 볼 생각이었다. 옆에서 시비 거는 이 있으면 어느 집안 자제라고 둘러대고는 하는데, 정확히 어디 문중의 후손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매번 바뀌는 것으로 보아 그리 사칭하여도 뒤탈 없을 만큼 탄탄한 집안 사람일 것이었다.
허나 막상 말로 꺼내고 보니 선을 넘겨도 한참 넘긴 것이라, 걱정에 절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언짢은 기색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하, 그것이, 집안의 문벌이 적당히 훌륭하다면 그렇겠지만 우리 집안은 그에 비할 바가 못 되어서.”
“엇, 그런가요?”
이미 사세의 흐름이 처음 자신이 노렸던 바와 같이 되었으니, 무엇을 더 거리끼겠는가. 눈 한 번 질끈 감고 대군이 털어놓았다.
“집으로 말하자면 장동도 정동도 아니요, 광화문 안쪽이란다.”
무슨 살벌한 농담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옆에서 다과상 차지하고 앉은 사내 중 하나에게 ‘도련님’이 넌지시 고개 돌려 ‘김 처사?’ 하고 조용히 부르니,
“흠흠. 아가씨, ‘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 사내들 중 하나가 별단에게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등골 오싹해지고 천장은 핑그르르 도는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도련님’ 말씀이 맞다면 그것이 무슨 뜻인가, 저의 앞에서 저리 밝힘은 또 무슨 마음에서 말미암은 것이겠는가 하는 데 생각 닿으니 정신이 절로 아득해졌다.
그때였다. 다른 궁인들 몰래 운현궁에서 슬쩍해온, 국문으로 옮긴 양이 패설에서 본 것이 불현듯 떠올라, 주저하는 마음을 세 번쯤 물리치고서 대군이 별단이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어멋. 그... 어, 옥수가.”
허나 움츠리는 대신 손은 그대로 머물고, 대신 배시시 짓는 미소 양옆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듯한 기분으로 운현궁 돌아와, 이제 미복을 벗고 다시 금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안양대군의 조부 되는 대원군이 우연히 마주친 시늉을 하였다.
“이 늙은이가 감히 안색을 살피니, 대감께서 꾀하신 바가 모두 이루어진 듯합니다. 만물이 생동할 채비 하는 계동(季冬)의 절기에 참으로 맞는다 하겠습니다.”
“사심 품은 바 없으니 무슨 꾀함이 있겠습니까? 혹 그리 잘못 받아들여질 만한 일이 있었다면 부디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침침해지고 있을지언정 세상사에는 닳고 닳은 대원군의 눈에 어찌 귀여운 손주의 황망해하는 안색이 들어오지 않겠는가?
“두 귀하신 분 중 어느 분께서 언제 출타하시는지는, 가장 은밀한 사안으로 삼고 있으니 도성 안에 이를 아는 사람이 손에 꼽을 만합니다. 그런데 장안의 저자에는 ‘귀하신 분께서 자육원을 자주 왕래하신다’ 하는 풍문이 근래 돌기 시작하였지요.
주상 전하께서는 실로 성현의 인덕을 지니신 분이시므로, 두 분을 모두 굳게 믿어 광명정대한 도의에서 벗어남이 없으리라 여기고 계십니다. 허나 세상의 일은 결코 ‘필히 이리 된다’ 단언할 수 없는 것. 누군가는 항상 살피고 또 경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대군은 눈앞의 대원군이 어떤 분인가 새삼스레 깨달았다. 손주를 귀엽게 여기는 할아비는 그와 동시에 한때 조선 팔도를 벌벌 떨게 하였고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심 움직여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둘 중 무엇이 먼저인가. 영영 알지 못하는 것이 대군에게는 최선일 것이다.
“시위하는 무관들이 가끔, 어디선가 그런 청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한오라기 사심도 없으니, 곧장 받은 청이 이러하였다고 반드시 고하기 마련이지요. 동궁 저하의 큰 경사(국혼)가 이루어질 채비를 하고 있으니, 그러한 풍문이 퍼진다 한들 종실의 위엄에 해악이 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아마 그런 풍문을 능히 단속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하지 않은 것일 터입니다.
이 늙은이가 가없는 은총 입어 예로부터 드문 나이(고희)에 이르렀는데, 그러면서 깨달은 바 하나 있으니 곧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저들 믿고 싶은 대로 외물(外物)에 색을 덧씌운다는 것입니다. 국혼이 다가왔는데 그런 풍문 퍼지니, 누가 동궁 저하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여기겠습니까.
그런데 풍문에 덧붙여, 혹 한미한 집안에게 한량없는 성은이 내린 적 있느냐, 동궁 저하께서 그리 물으셨다더군요. 과연 동궁께서 사사로운 마음으로 그리 물어보신 것일지, 아니면 직접 거론하였다가 힐난하는 말이 돌아올까 두려워하신 대군께서, 춘궁(세자) 앞에서 공공연히 그 자육원 앞에서의 일을 꺼내어 한탄하신 것은 아닌가. 하여 어지신 동궁께서 혈육의 정에 이끌려 그리 물으신 것은 아닌가.”
앞서 별단이의 심정이 일면 이러하였을까? 갑자기 달빛조차 시렵게 느껴졌다.
“물론 늙은이의 헛된 생각이니 대군께서 귀담아 들으시지 아니하여도 족할, 그런 일입니다. 사사롭고도 망령된 이야기로 괜히 심려를 끼치지는 않았을까, 때늦게 두려운 마음 뿐이로군요.”
그런 사정 모르지 않는 대원군이 말꼬리를 흐렸다.
세자와 대군의 일은 종실과 직접 관계된 일이므로, 그의 숨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와 주상 두 사람 외에 간여하지 못하게끔 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차에 시위하던 무관에게서 보고를 받고 전모를 얼추 파악하게 되었으니, 아들 주상에게 곧장 아뢰려 하였건만 ‘이미 세자에게서 이야기는 들었다’ 하는 답이 돌아왔다. 다행히 잘 풀리기는 하였다만, 걱정되는 바가 없지 않아 이렇게 직접 깨우쳐줄 생각을 품었다.
대군이 나름대로 치밀한 꾀를 내었으니 대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였다. 안타까움이라 하면 무엇인가. 고작 연모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거창한 술수를 부렸으니 그릇이 작다는 것이 안타까움인가? 그렇지 않다. 대군 나이의 대원군 자신은 저의 앞가림조차 하지 못하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지 않았는가.
오히려 지략이 치밀하여 아들 주상과 손주 세자를 합한 것보다 나았으니 그것이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쩌면 금세(今世) 아니라 한 백 년 전쯤 태어나 왕통 이었으면 좋았을 그런 재목이 바로 안양대군은 아닌가 하는 걱정. 지금까지 군주가 오직 인덕 하나만 있으면 결코 무너지지 않을 나라를 함께 만들어왔는데, 만약 그 자리를 안양대군이 탐내려 하였을 때 어찌 될 것인가. 인덕보다 일신의 지모로, 마치 대원군 자신이 흥선군 시절 꿈꾸었던 것처럼 다시 나라를 한손에 꽉 쥐려 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나라가 불행해지든, 손주 안양대군 한 사람이 불행해지든 할 것이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지나친 걱정이요, 설령 그날이 온다 한들 대원군 자신이 살아서 볼 일은 없을 것이지만.
“추호라도 거리끼지 않으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허허, 요즘 가을 터럭(추호)은 참 굵기도 한 모양입니다.”
안양대군 답에 돌아오는 대원군 너털웃음이 겨울바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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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개화기에도 축첩제는 폐습으로 널리 비판받았습니다. 처음 비판을 주도했던 것은 천주교 쪽이었지만, 이후 개화파도 축첩제를 악습으로 몰아가게 됩니다. 이는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조선을 ‘개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본처와 첩, 적자와 서자 간의 갈등으로 인해 가정의 윤리가 무너지게 된다는 보다 전통적인 문제의식에 말미암은 것이기도 했지요. 두 가지 요인이 맞물리면서 『독립신문』뿐 아니라 『제국신문』 같은 보다 대중적인 언론에서도, 또 개화기 신소설에서도 축첩제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실제로 뿌리뽑힌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지만요.
원 역사에서도 갑오개혁을 전후해 궁내부 산하에 외명부와 내명부를 통합한 명부사가 창설된 바 있습니다. (물론 작중의 명부사와 조직 취지 및 기능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광무개혁 시기에 다시 분리됩니다.
자육원이 있는 것으로 설정된 용산~마포 일대는 원 역사에서도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인구의 증가를 경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789년 조사에 따르면, 이 일대의 인구가 한성부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달했는데, 이는 이전에도 종종 언급되었듯 한강 수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조별단은 원 역사에도 짤막하게 그 이름이 전하는데, 메리 스크랜튼의 회고에 따르면 바로 이화여대의 전신이 된 이화학당의 두 번째 학생입니다. 미국의 감리교 목사 집안 출신인 스크랜튼은 예일대를 갓 졸업한 아들 윌리엄이 조선행을 결심하자 결코 젊지 않은 몸(1832년생)이었음에도 아들과 함께 선교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은, 설립 후 몇 달은 교사는 있으되 학생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첫 학생은 어떤 고관의 첩실인 김씨였는데, 궁중 통역관이 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가지고 찾아왔지만 오래 수학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두 번째로 찾아온 조별단은 가난한 소녀였는데, 작중에서와 마찬가지로 공부를 해서 가난을 면하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합니다만, 서양인을 불신한 어머니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사는 곳에서 ‘단 10리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쓴 다음에야 겨우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1887년 공식적으로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이 내려지게 되는데, 당시 학생은 7명이었다고 합니다만 그 중 조별단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