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재투성이 처자 (1)
팔도에 발 닿지 않는 곳은 궁궐뿐이라는 소문 도는 서슬 퍼런 공안서답게, 간밤에 눈이 적잖이 내렸건만 그 문앞에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트집 잡히기 싫었던 한성부에서, 근래 채용한 소제군(掃除軍, 환경미화원)을 동원하여 동틀 무렵부터 쓸어낸 것이리라. 암만 도성의 문물예악(文物禮樂)이 크게 정비되면서 그 외견도 일신되었다 하나, 육조거리도 아니요 그 옆 인적 한산한 골목에 있는 관아 앞이 이리 정돈되어 있으니, 그 범과 같은 위엄을 알만하였다.
허나 맹호도 사나운 원숭이 비위(狒胃)를 만나면 곧장 뜯어먹히고, 뼈 없는 짐승 활(猾)을 잡아먹으면 안에서부터 파먹힌다 하였다. 제대로 된 관직 하나 없지만 무슨 일 하는지는 공안서 모두가 아는 김가진이 공안서 앞에서 회중시계 어루만지고 있으니, 문지기 노릇하는 자는 왜 하필 내 입번(入番, 근무)할 때 이분께서 왕림하시었는가 속으로 한탄할 뿐.
누구에게는 천추(千秋)와 같은 일각이 지나고, 안에서 사람 하나 헐레벌떡 나오니, 어느새 공안서 안에서 국(局) 하나 맡은 자리까지 올라온 이용익이었다.
“자, 겨울해 짧네. 얼른 움직이세나. 세 군데 모두 들리려면 빠듯허이.”
얼굴 보이자마자 채근하니, 이 인간과 인연 생기게 한 천지신명을 탓해야지 누굴 탓하겠는가.
“세 군데나 말입니까? 인력거꾼이라도 부를깝쇼?”
“되었네. 같은 북부 안에서만 오가면 되니 두 다리 멀쩡한 남아가 어찌 남에게 수고를 끼치겠는가.”
그러면 저에게 수고 끼치는 것은 무어냐 따질 법도 하였지만, 감투 보전하고 싶은 이용익은 조용히 따라나설 뿐이었다. 저보고 인력거 끌라고 하지 않는 것에 만족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첫 모임은 바로 옆 삼군부일세.”
일과 사람은 늘어나지만 건물 올린 땅은 그대로이므로, 눈치껏 조금씩 양옥을 올리는 것이 육조 아문 사이의 통례였다. 그나마 삼군부는 궐에서 꽤 떨어져 있어 적당히 층고를 올려도 궐내가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기탄없이 착공하여 벌써 공사를 끝마친바 주변 아문과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게 멈추시오!”
누군가 외치기에 살펴보니 대문 지키는 젊은 위병이었다. 김가진 그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것을 보아하니 근래 새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내 동농(東農)이라는 사람이오.”
“선생께서는 무슨 일이신지요?”
아호 곧장 나오니 일단 사족인 듯하여 말이 공손해졌다.
“허허, 무슨 일인지 꼭 밝혀야만 들어갈 수 있소이까?”
“그렇습니다. 금일은 중한 모임이 안에서 열리고 있은즉 물금첩(勿禁帖)이 없으면 외인(外人)의 출입을 허할 수 없습니다.”
“허, 그런 것은 없는데.”
“그리하면 문을 열어드릴 수 없은즉 삼가 양해를 청합니다.”
‘이분이 뉘신줄 알고서 그리하느냐’ 나서려던 이용익을 김가진이 가로막았다.
“자네는 물금첩이 있겠지?”
“물론입지요.”
공안서 명의로 된 것을 보여주니, 위병 얼굴에 긴장 감돈다. 너털웃음 짓고서, 근무 잘 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이리 하라고 격려 같지 않은 격려와 함께 안으로 들었다.
비록 삼층 양옥이 지지난해에 완공되었다지만 아직도 벼슬 높은 이들 대다수는 바닥 따뜻한 것을 선호하기 마련이라, 정작 중대한 사무는 옛적 건물 – 옛적이라 한들 지은 지 스무 해도 채 되지 않았지만 –에서 그대로 처결하고 있었다.
그 안에 모여든 이들로 말하자면, 정운구와 한성근, 윤웅렬 등등 무명(武名) 쟁쟁한 사람부터 얼마 전 이름 바꾼 홍계훈(洪啓薰, 옛 홍재희)까지, 말 그대로 군부의 원로와 실세가 한데 모인 셈이었다.
그 사이 비집고 김가진이 들어가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하고 앉은즉 모여든 군부 사람들이 절로 몸을 움츠리는 듯하였다.
“허허, 걱정들 마십시오. 세상 일은 모르는 것이요, 항간의 사람 중 간사한 무리도 적지 않으니, 제장(諸將)께서 한데 모여 훌륭한 말씀을 나눈다 한들 무고하는 자가 혹 생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찾아온 것이니, 없는셈 치고 말씀들 나누시면 되겠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물론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정도는 빠짐없이 기억할 것이련만, 어지간히 무엄한 소리 하지 않으면 늦기 전에 쳐내야 한다고 운현궁이나 중궁전에 아뢰지도 아니할 것이었으니.
그러나 다들 머뭇거리는 것이, 정말로 무엄한 소리 하려 모여든 듯하였다.
마침내 개중 가장 연로한 (그래도 아직 환갑도 되지 않았다) 정운구가 말문을 열었다.
“흠흠. 금일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것은 오로지 이 사람이 발의한 것 때문이니, 이를 분명히 밝히도록 하겠소이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직접 책임을 지겠다 하였으니 거리낄 바가 조금은 줄어든 셈이다. 김가진도 그저 중대사를 논의한다는 얘기만 듣고 찾아온 것이라, 이처럼 엄중한 가운데 나올 이야기가 무엇인지 귀기울여 듣고자 하는데, 곧 돌아가는 사정을 깨닫고서 얼추 이해하게 되었다.
“저궁(儲宮, 세자)께서 군문에 들게끔 하시려는 것이 지극한 어지(御旨)이니, 우리 무부(武夫)들이 나서서 이를 거스름은 가당치 않은 일이오. 하여 대책을 마련코자 제장을 이리 모으게 되었소.”
꽤 오래 고심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정운구와 다른 장수들끼리 미리 머리 맞대고 고민한 전적이 있던 것인지, 이어서 죽 의제를 내놓는데 의외로 상세한 사안이 많았다.
“먼저 저하께 어떤 직을 맡기며, 그 품계는 어찌할지, 그것을 정해야 할 듯하오.”
사류의 자제는 아무리 낮아도 하사(下士)로 시작하기 마련인데, 세자에게 감히 경대부(卿大夫)도 아닌 일개 ‘사(士)’라는 직함 붙이는 것부터가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족친위(族親衛)의 예를 상고함이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 애초에 그렇게 처분코자 성상께서 군역의 일을 거론하셨겠는가.”
한성근이 가볍게 질책하였다. 그 말대로 허직(虛職) 맡게끔 하자고 진언하였다가 역으로 그것이 무슨 군역이냐. 용흥지지(龍興之地) 함경도를 지키는 정도는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는 하유 내려오면 그날로 군부는 뒤집히는 것이다.
“흠흠, 소장이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유구국 다녀온 이래 대원군의 잔병치레가 부쩍 늘어나면서 은근슬쩍 운현궁 정강계 모임도 유명무실해졌지만, 그 모임에서 홍계훈이 저의 두각 드러낸 일은 다른 무관들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헛기침에 이목이 쏠렸다.
“무릇 나라의 중대한 일을 일컬어 군국(軍國)의 기무라 하니, 성지(聖旨)도 여기에 있을 듯합니다. 금궁 안에서는 배울 수 없는 나랏일의 한 부분을 나아가 배우게끔 하시려는 것이겠지요.”
조정의 중신들이야 저들 맡은 업무가 가장 중하다 여기기 마련이므로, 병조는 항상 재정에 쪼들리기 마련.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성상께서 항상 새로운 병기의 개발을 명하시며 상무(尙武)하는 뜻을 밝히심은 모두가 아는 바다.
“성지(聖旨)를 받들면서도 예덕(睿德, 세자의 덕)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장이 생각건대 몸은 군영 안에 있으면서도 맡은 일은 군무 전체에 걸치는, 그런 직책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몸은 상할 일 없지만 군무(軍務)의 중한 일과 맞닿아있게끔 하려면 역시 삼군부 안에 하나쯤 자리를 만들어야 할 것인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무 관직이나 신설할 수는 없는 일.
“허나 오직 동궁 저하를 위하여 없던 자리를 만든다면, 다른 귀한 분들이라면 몰라도 상감께서는 족히 여기시지 않으실 것일세.”
“다행히 국혼(國婚)의 일을 마치고 군영에 들어오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겉으로는 세자 저하와 무관하게, 우리끼리 일대 개혁을 이룬다고 내세우고 채비를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 기회에 저들 생각하던 제도를 시행케 할 수 있겠다고 판단이 섰는지, 다른 무관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동삼성 북벌 이후로 한동안 진행이 없던 막료(幕僚) 체제를 더욱 세밀하게 가다듬자는 것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장 호응이 좋던 제안은 이것이었다.
“직책에 대하여는 많은 이야기가 나왔으나, 품계에 있어서는 아직 방안이 나오지 않은 듯합니다. 소장이 생각건대, 보통의 백성이 병졸로 충군(充軍)되고, 사족의 자제가 상사부터 하사까지를 맡는다면, 종친은 적어도 참위(參尉, 소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허나 동궁 저하께만 각별한 예를 적용하게 되면 성상께서 가납하지 않으실 것이오.”
“그러므로 겉으로 이런 제도를 두자 하는 것입니다. 이미 학문을 이룬 인재가 하사로 충군되면 그 또한 아쉬운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향시를 통과하거나 대학원을 마친 이들은 참위로 종군케 하겠다고 하고, 세자 저하께서는 여기에 해당한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북변에서 실제로 병졸을 지휘해본 이들이 크게 호응하였다. 나이 차서 들어온 젊은 서생들이 부대의 운영에 미주알고주알 참견하게 놓아두느니, 차라리 제대로 직함 하나를 맡겨서 저의 재능 발휘하게 하는 편이 서로에게 편한 것이었다.
“참으로 훌륭한 계책일세! 계속 이렇게 명안을 내놓는다면 해 저물기 전에 마칠 수 있겠구만!”
갈 길 바쁜 김가진으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다음은 장의동까지 가야 한다네.”
노변의 가게에서 이른 저녁밥을 비우며 김가진이 말했다.
“장의동이라면 영초대감(김병학)께 찾아가는 것인지요?”
“잘 아는군그래. 집안 사람이 찾아뵙겠다 하는데 어찌 내치시겠나.”
김가진도 비록 서출이라지만 엄연한 장동 김문의 사람이다. 물론 그 때문에 찾아가는 것은 아니요, 국혼의 일을 두고 거족들의 원로가 한데 모인다 하여 곁에서 슬쩍 엿듣고자 집안 어르신께 가는 것이었지만.
“허나 어르신께서, 음, 어디와 교분이 있는지 아실 텐데 영초대감께서 가만히 두시겠습니까요?”
“하하, 그러면 그걸 아시는 분께서 나를 문전박대하시겠는가?”
비록 근래는 서로 늙었기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으로 합의되었다지만, 소싯적 운현궁 매운맛은 질리도록 본 김병학이다. 차라리 모임 열리는 곳 옆에 공공연하게 김가진을 앉혀두고서 적당히 수상한 이야기 하는 편이, 김가진을 내쫓고 심히 수상한 이야기 나누었다는 의심 받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다.
설령 트집을 잡는다 하더라도, 역으로 그 트집 잡을 이야기는 어찌 들었느냐, 설마 간자(間者)를 거족의 집에 붙여둔 것이냐, 이것이 어진 성상께서 하신 일은 아닐 것이니 필히 공안서의 잘못이다, 이렇게 정면으로 맞붙게 되어 김가진의 수족이 묶이게 되면 운현궁 쪽에서도 손해였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 집안 아래서 여러 일 맡아보는 이들과 교분 트는 쪽이 자네 사업에도 이롭지 않은가? 내가 자네였다면 직접 청해서라도 이런 자리에 동행코자 하였을 듯한데.”
“그건 그렇습죠.”
이용익이 공안서 외에도 딴살림 차려서 꽤 재미를 보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서 안에서는 모르는 이가 드물다. 금강산 자락에 차린 여각도 비록 본전 환수까지는 몇 해쯤 남았다지만 사시사철 성업 중이요, 근래에는 배 무어라 하는 코쟁이 젊은이와 손잡고서 도성과 인천부에서 새로 사업을 시작한다 들었다.
비록 그 옛날 전국의 재물이 오가던 때에 비할 수는 없다지만, 광통이도국이 열린 이후로 집안의 성세도 어느 정도는 돌아왔고, 더구나 여러 명문가 어른들이 모여든다면 홀로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니, 그 아래에서 이런저런 일 보는 이들과 면식 다질 기회였다. 그렇게 이야기 나누다 보면 김가진의 하는 일에 도움 될 소식이 걸려들기도 하기 마련이므로, 당연히 이용익 좋으라고 그리 안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니 국밥 값은 자네가 내게. 어, 국물 시원타.”
이용익이 ‘깍쟁이’ 운운하며 궁시렁대는 것을 못 들은체하면서 김가진이 이를 쑤셨다.
때는 뉘엿뉘엿 저무는 겨울 해를 밥 짓는 연기가 가릴 무렵이었다. 집안 어른들에게 문안 같지 않은 문안을 마치고, 곧장 자리를 잡았더니, 곧 인기척 부산하였다.
눈이든 서리든 사실 언 물인 것은 같듯, 아무리 오고가는 인정(人情, 뇌물)과 여기저기서 포탈한 전답 대신 당당하게 제조국과 동삼성 농장 등으로 가산을 불린다 한들 소위 명문가의 사람들은 그대로다. 적어도 그런 이들 아래서 서린 한이 모두 녹아 없어지지는 않은 김가진 생각에는 그러하였다.
물론 그가 여기를 나선 뒤에 찾아갈 김옥균 같은 이들이 문중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되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져, 겉치레가 외려 본질이 되겠지만, 여기 모여든 늙은이들 – 김가진 본인도 그리 젊다고는 이제 못하겠지만 – 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성(慈聖)께서 지극한 합일(合一)의 도를 지킴에 어그러짐이 없으니, 참으로 훌륭하고도 아름답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분명 듣기로는 좋은 이야기인데, 문장 끄트머리에 여러 사람의 끙끙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과연 옛 사람들답게 말을 가볍게 하지 않았다. 말 한 마디로 꼬투리 잡으면 능히 대신 여럿 목숨 거둘 수 있던 시절의 유풍(遺風)이리라. 아마 이 자리에 김가진 자신이 앉아, 어떤 문중의 누가 찾아올 것인지 미리 확인해보지 않았더라면 쉽게 속뜻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여인의 힘이란 결국 그 지아비의 마음 붙잡는 데서 나온다고 굳게 믿는 이들 보기에, 이제 그 자색이 쇠하였을 때인데도 주상이 후궁 하나 들이지 않음은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얼마나 금슬이 좋으면 대왕대비마저도 후사 생각하라고 설득하기를 단념하고 동궁의 국혼을 추진하게 되었을까.
그런데 그처럼 곤전(坤殿) 안주인으로서 변함없는 총애 받아 위세 등등한 중전 앞에, 쟁쟁한 명문가의 여식이 세자빈으로 들어오게 되면, 과연 그 집안을 아름다운 연 맺은 사이라 하여 우대해줄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힘껏 경계하며 허튼 생각은 꿈결에도 품지 못하도록 풍비박산을 내려 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당연히 후자가 훨씬 그럴듯했다.
그러므로 저 연이은 침음이 나오는 것이리라.
“국혼물실(國婚勿失) 네 글자의 큰 뜻이 아직 남아있으니, 어찌 가볍게 여기겠소이까.”
“허나 금상께서 가례 올리신 이래, 흠흠.”
“허, 옛 당색을 다시 되새겨보아야 하겠습니다.”
국혼의 상대가 되어 외척으로 행세하게 되면 집안에 힘 실림은 오래된 이치다. 허나 금상의 치세는 그보다 더 오래된 이치, 그러니까 여차하면 제사도 받들지 못하도록 할 기세로 매섭게 몰아치던 그 옛날 태종대왕 시절의 무서운 면모를 방불케 하는 면이 있었다.
차라리 정말 흉참한 모의를 했다며 옭아맨다면 앞날 걱정이라도 덜할 텐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괴롭히니 – 민승호가 살아 숨쉬는 증좌 아니던가 – 외려 언제 어디서 허를 찔릴지 몰라 두려운 것이었다. 물론 여흥 민문이 단합되지 못하여 제때 운현궁과 중궁전 아래로 들어간 이들 외에는 기세를 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국혼물실’하던 것이 그들 대에서 끊어지게 되면, 명문가 명성에 먹칠하는 셈이다. 어느 한 문중이 대놓고 나서서 온갖 견제를 다 받아내야 할 터인데, 아무리 명문 벌열의 체통이 있다지만 과연 그것이 다른 집안 – 그것도 그들 선대에는 서로 나뉘어 으르렁대던 사이의 –을 위하여 고생할 만큼의 의리인가 하면 다들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옛 당색을 되새겨서’ 견제를 당하지 않을 법한 집안 중 한미한 방계의 사람을 함께 받들어 내세우는 편이 상책이었을 텐데, 또 누군가 말미에 걱정 담아 첨언하였다.
“그, 가끔 동궁과 대군 저하께서 미복잠행을 나오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재작년에 자칫 기무회의의 안건으로 올라올 뻔하기도 하였지. 어찌 그런 중대한 일을 잊겠소이까.”
안전을 위해 이런저런 방책을 마련하고 – 예컨대 동궁과 대군이 함께 출타하지 않는 것이라던가, 무관 넷을 항상 대동하는 것이라던가 – 운현궁에서도 재차 손주들 바깥구경 힘껏 돕겠다 하였기에, 아래에서는 공론에 부치지 않고 위에서는 공론에 부쳐질 일 없게끔 하겠다고 서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바 있었다.
“헌데 듣기로, 그 잠행에서 간혹, 바깥의 여인에게 마음을 내보이시는 일이...”
“이 사람, 말을 삼가시오!”
“흠흠, 저 또한 비슷한 풍문 도는 것을 들었습니다.”
풍문이라면 김가진도 듣기는 하였다. 공안서 끄나풀 중 당연히 여인도 있고, 남정네들 듣지 못하는 소식이 훨씬 빠르게, 그리고 다채롭게 그들 귀를 통하여 들려오기도 하였다.
귀하신 분이 간혹 자육원 근처에서 묘령의 처자와 만나곤 한다는 이야기는 그 중 하나였다.
“설령 만분지일이라도 그러한 뜬소문에 뿌리가 있다 한들, 명명한 도리를 생각해보시오들.”
“글쎄올시다.”
‘명명한 도리’라면, 개국 이래 지금까지 외척을 죽이든 살리든 우선 현달한 집안과 연을 맺어오던 전통을 이르는 것일 터인데, 돌아오는 침음성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
아무리 개국 이래의 관행이 이러쿵저러쿵 하여도, 전례 없던 일을 거리낌 없이 – 당장 세자가 군문 들어가는 이야기만 하여도 그렇지 않은가 – 행하는 금상이므로 안심하려야 할 수 없던 것이다.
거족의 우두머리들이 모였다 한들 그 자리에서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결국 우선 할 수 있는 것 – 한미한 집안 여식 중 참한 규수 찾아보기 –을 해보고 재론하자는 점만 재확인하고서 모임은 해산하였다.
“휴우, 이제 둘 끝났고, 하나 남았군.”
해는 인왕산 넘어간 지 오래요, 달은 목멱산이 어디 있느냐 하고서 그 둥근 면상을 고루 보이고 있었다.
“자네는 들어가보게. 시각도 시각이거니와, 지금 생각해보니 이번에 찾아갈 이는 나 혼자 만나는 쪽이 피차 편할 것이야.”
“헛, 감사합니다.”
이만하면 되었으니 내일 다시 하면 안 되겠느냐고 할 참이었던 이용익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허겁지겁 사라지는 이용익 – 원래 발걸음이 빠르기도 하건만, 지금은 그가 과연 저와 같은 두 발 대신 바퀴라도 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을 뒤로하고, 김옥균의 집을 향해 바삐 걸어가는 김가진이었다.
본래 오늘 느지막이 집 나오면서부터 늦어질 것을 각오하기도 하였거니와, 김옥균은 요즘 사람이라, 전등이든 촛불이든 켜고 밤늦게까지 무언가 하는 데 익숙하였다. 반면 말 많고 귀 열린 이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으므로, 밀담 나누기에 지금과 같은 때가 또 얼마나 있으랴.
회중시계 한 번 확인하고서 문앞에서 기척하는 대신 문고리-서양식으로 새로 지은 집이었다-를 두드렸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집주인 김옥균이 직접 나와 그를 저의 서재로 데리고 들어갔다.
서양식으로 새로 지은 집의 방바닥에는 융단이 깔렸고, 마루바닥 대신 의자가, 서안 대신 책상이 있었다. 김가진 본인도 그런 집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시절 몇 번 보지 못하였으니 신기하게 여길 법도 했지만, 그와 김옥균의 사이가 그런 이야기를 꺼낼 만큼 친밀하지는 않았다.
“하루 말미를 드렸으니, 충분하였으리라 믿소.”
“물론이오. 곧장 답을 올리지 못함도 송구스러운 일일진대 어찌 더 지체하겠소이까.”
자신이 어제 전한 밀지가 무슨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김가진은 알지 못하고 감히 알려 하지도 않았다. 운현궁의 뜻이라면야 자신도 알고 있어야 하니, 사전이든 사후든 대원군에게 보고하고서 그런 월권을 저질렀겠지만, 그보다 훨씬 위에 계신 분의 뜻이니 어찌 넘보겠는가?
그런데 밀지 받아본 김옥균은 잠시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곧 붉으락푸르락하고, 마침내 무언가 마음을 정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하루만 기다려주면 답을 써서 올리려 하는데 가하겠느냐 되묻는 것이었다.
신도(臣道)에 그것이 맞는가 하는 것은 김옥균과 주상 사이의 일이요, 주상께서 저와 같은 집안의 사람인 이 옥균을 나름대로 아낌을 아는 김가진이었으므로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였다.
“부족한 이 몸으로 사직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몇 번이나 지극한 뜻을 베풀어주셨으니 그 감사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하겠소이까. 그 은혜를 털끝만큼이라도 갚고자 이리 힘쓰게 되었소.”
하고서 서랍을 뒤지더니, 곧장 봉인된 글월 한 통을 건네주었다.
“무엇이라 아뢰리까.”
“근래 국혼의 일을 두고 다시 여러 거족들이 크게 놀라고 있으니, 그에 대하여 나름의 시무책을 생각해보았소. 성상께서 하유해주신 바를 읽고 깨달은 바 있어 부족하고도 무엄하게나마 붓을 놀렸으니, 부디 잘 아뢰어주기를 바랄 따름이외다.”
역시 김가진이 판단할 일은 아니었다.
초반에 나오는 비위와 활 등은 모두 가공의 동물입니다. 박지원이 『호질』 서두에서 인용하기도 하지요.
대원군이 무관들 모아 북벌 논의하던 시절 등장하였던 군인들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그 사이 개명한 홍계훈(정확한 개명 시점을 몰라, 작중에서는 이 무렵 한 것으로 설정했습니다.)부터, 아직 한창 현역인 윤웅렬, 한성근까지 모두 나왔습니다.
뜬금없이 작중 조선에서 먼저 선보이게 된 학사사관 제도는, 원 역사에서는 20세기 초, 대전쟁의 전운이 드리울 무렵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전시 대규모 동원과 인력 소모에 대비하여 장교 인력풀을 육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하였지요 (1908년 영국의 국토방위군Territorial army 창설이나, 1900년대 초 미군의 루트E. Root 개혁 등). 시기적으로 보아 매우 앞서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도입의 원인으로 말하자면 굉장히 동떨어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보불전쟁에서의 경이적인 승리 이후 프로이센-독일식 군사혁신은 서구(및 일본)의 보편적인 모델로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산업화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동원하여 승리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19세기 후반 모든 전략사상가들에게 이상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지요.
하지만 이것은 군의 관점이고, 시민사회의 관점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군대는 국가의 강압 수단인 동시에 세금을 잡아먹는 존재였고, 또 때로 군의 개편과 확장은 군의 보수파들에게도 위협이 되었지요. 결국 독일적 모델이 완전히 수용되는 것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역사의 한 가지 역설이라면, 1차대전에서 독일을 상대한 프랑스와 영국, 미국이 독일식 모델을 가장 잘 수용한 열강이었던 반면, 독일의 편에서 함께 싸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터키는 낙제생에 가까웠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각국의 독일식 군사모델 수용에 대해서는 설인효(2012), “군사혁신의 전파와 미중 군사혁신 경쟁”. <국제정치논총> 52(3)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