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78화 (178/320)

58. 국제적 문제의 국제적 해결 (3)

『익정신보』가 처음 시작한 이래 대개 여러 사람들이 보는 신보는 진서 대신 언문으로 풀어 쓰곤 하였는데, 겉으로 내세우기야 큰선비 환재 선생의 뜻을 따르네 어쩌네 하였지만 실제로는 보는 이를 늘려 이익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청구시무』는 무상한 시류(時流)의 흐름에 함부로 흔들리지 않기로 하고서 – 어차피 언문으로 옮긴다 한들, 학문과 거리 있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볼 글은 아니지 않은가 – 지금껏 진서로 써내는 것을 고집하고 있었다.

젊은 서생들 사이에서는, 고시의 제도에서 시권을 언문으로 써도 된다 한 이래 장차 문리(文理) 박한 자들이 늘어날 것이므로 이제라도 갈아탈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조심스레 얘기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주장은 쑥 들어갔다.

이유인즉, 옆 대국에서 만인소의 일이 크게 일어난 이래 조선에 대한 관심도 함께 확 높아졌고, 마침 저들이 능히 읽을 수 있는 문언(文言)으로 된 글이 나오고 있었으므로 인천부 통해 사들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언문 운운하던 소리 잦아들고 대신 조선국 안쪽 사정이 아니라 바깥 사정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다른 신보도 창간함이 어떻겠느냐 하는 주장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었다.

허나 현달하여 재상의 자리에 올라간 면암대감 최익현의 청을 받고서 유례없는 이번 행사의 준비를 맡게 된 전우로서는 그런 사정까지 알 필요는 없었고, 그저 조선국 자유당과 화서·노사·한주 세 대학원이 조정의 재가를 받아 성림(聖林, 공자의 묘)에 향사(享祀, 제사) 받들고 크나큰 대회 열어 천하의 선비를 모으고자 한다는 뜻을 널리 알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격문을 써서 널리 돌리기를,

‘아! 하늘이 성인을 내림은 밝고도 밝은 도덕을 크게 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요, 바른 학문의 도통이 마치 강물과 같이 끊어지지 않음은 훌륭한 학문을 널리 알리고 이어가기 위함이로다.

작금 천하에는 고금에 없던 형국이 펼쳐지고 있으니, 만국의 사람들이 서로 오가고, 기물의 정교함은 나날이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이치만은 변함이 없으니, 섣달 그믐이 지나도 다음날 해가 그대로 떠오름과 같다.

훌륭하도다! 성인은 나시고서 모든 이치를 곧장 깨달으신 분이나, 오히려 호학(好學)을 이르시고 또 이르셨으니, 그 도 따르는 이들이 어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으랴! 그러니 만세사표(萬歲師表)를 기리는 자리에서 학문을 논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논할 것인가?’

하고서, 이에 오늘날 시국에 어찌 성현의 가르침으로써 세상을 의롭고 또 이롭게 할 것인가 의론하고자 하니 뜻있는 선비는 만리길 마다하지 말고 모두 모이라 청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때를 맞이하여 성현의 기풍 어린 땅 이곳 곡부에 서생들 하나씩 모여드니, 자연히 유자(儒者)라 하면 저들과 같은 의관(衣冠)이리라 지레짐작하던 조선 선비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선왕의 복식을 잃어, 체발하고서 만인의 복식 걸치고 있는 중원 선비들이 안타까웠던 것인가? 물론 그런 감상 가지는 이도 없지는 않겠지만 함부로 꺼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원 선비들도, 개중 고루한 이들은 조선의 대학원에 있는 자들이야말로 오랑캐 학문을 가져다 성현의 학문과 함께 가르치고 있으니, 가랑비가 도포 적시듯 양이에게 물들어간 것 아니겠는가 하여 은연중 반발하는 마음 있었으나 함부로 붓 놀리지 아니하였다.

“성현의 말씀이 이리도 널리 퍼졌다니, 놀라서는 아니 될 일이건만 놀라운 마음을 금할 수 없기도 합니다.”

두 해 전 작고한 한주 선생을 대신하여 참석한 곽종석(郭鍾錫)이 전우에게 저의 단평을 밝혔다. 아무리 연성공(衍聖公, 공자의 직계후손 직위) 공령이(孔令貽)가 있다 하지만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젊은이요, 이 일은 조선국 유생들이 나서서 시작한 것이므로 세세한 사무는 그들이 맡음이 옳았다.

아무래도 이런 학문의 큰 모임을 꾸리는 데는 대학원 사람들이 가장 뛰어나기 마련이어서, 석전대제 올린 뒤 이어질 모임의 얼개를 짜는 일도 이들에게 고스란히 떨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는 여러 나라 학자들의 명단을 정리하고, 개중 저의 이론이나 논변을 남 앞에 내놓고 의견 듣고자 하는 자들 – 미리 가운데서 『청구시무』를 통해 그 제목을 취합한 바 있었다 – 의 일정에 따라 모임을 짜고, 거의 나랏일 방불케 하는 어려운 일을 하게 되었는데, 물론 세부적인 일이야 그들을 따라온 박사와 저작(석사)들이 하겠지만 검토는 온전히 전우 같은 이들의 몫이었다.

“어찌 아니 그렇겠소. 오직 배움에 뜻을 두었음이 같을 뿐 말도, 학통도 다른 이들이 먼 길 걸음하여 이곳까지 찾아왔으니 이 사람도 사문(斯文)의 사람으로서 소회가 작지 않소이다.”

조선 쪽에서는 학문 닦는 이들의 일이므로 환로(宦路, 벼슬길)에 나온 자들은 스스로 삼가자 하는 것이 누가 발의하지 않았는데도 합의되었지만, 청에서는 반대로 멀리서 중원을 찾아온 이들을 소홀히 대접할 수 없는 것이라, 실권은 없어도 황제의 신임을 받는 그의 스승 옹동화가 직접 내려오고, 장지동은 저를 대신하여 역시 학문에 있어서는 할 말이 (때로는 과도하게) 많은 장패륜을 보냈으며, 이홍장은 저의 막료 중 왜 서책을 가까이한 자가 없는가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대신 북양학당(北洋學堂)의 총판(總辦, 교장) 엄복(嚴復)을 내려보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신정부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요, 애국공당 입장에서는 쓰임 다한 패로 이름은 국학(國學)이되 정작 나라 안에서는 날로 입지 좁아지던 일본국 국학도들도 저들끼리 힘을 모아 쓰와노(津和野) 학통 잇는 후쿠바 비세이(福羽美静) 이하 대표단을 보냈다.

그 소식 들은 옛 메이산샤(明三社) 개화신사들은, 고루한 무리가 신국의 학명(學名)에 누를 끼치게 두어서야 되겠냐며 후쿠자와 유키치의 등을 마구 떠밀어 보냈고, 속으로는 모임 취지에 큰 감명 받았지만 겉으로는 성현 집안에 이천오백년을 내려오는 전설의 가주(家酒) 맛보겠다는 명분 내세우고 찾아온 기인(奇人) 복색의 나카에 초민(中江兆民)도 어디선가 나타났다.

그뿐인가? 은인의 나라 조선을 따라하겠다는 것인지, 요 근래 여기저기 끼어다니는 데 재미 붙인 유구국에서도 사람을 보내고, 어디서 전해들었는지 – 열에 아홉은 조선이 개입되었을 것이었지만 – 배 타고 먼 길 찾아온 월남국 사람들, 중원에 내려온 문수보살의 화신 공자를 기리려 만방 사람들이 찾아온다는데 흥미 느낀 열하와 오대산의 라마교(티베트불교) 승려 몇몇. 심지어 가형의 강권 받고서 온 오씨양행 주인 오배의 동생(본래 전공은 인도였으나 너무나 잘 나가는 저의 형 에른스트 때문에 반강제로 전공이 바뀌고야 말았다.)까지.

“복식 기괴한 이들이 이리 많은데, 대향(大享, 대제)의 예를 정함이 참으로 어렵겠습니다.”

“마땅히 연성공을 도와야 하지 않겠소? 가감할 것은 가감하되, 예법의 큰 틀은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겠지.”

말하고 나서도 퍽 이상하였다.

아직 한창때라지만, 계해년 이전의 세상이 어떠하였는지 기억할 만큼의 나이는 먹었다. 만일 스무살 때의 자신에게, 곡부에서 이런 모임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과연 믿었을 것인가? 믿지도 않거니와, 어디 그런 사특한 오랑캐들이 성현 모신 곳을 더럽히게 내버려둘 것이냐며 길길이 뛰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무엇이 달라졌는가? 어쩌다 대학원이라는 곳에 끼어들게 된 것도, 그로 인하여 세상 반대편 요지경 윤돈(런던)에 가서 그 땅에도 나름의 학문 있음을 알게 된 것도, 그리고 그 학문 닦는 이들과 때로는 합심하고 때로는 말로 다툰 것도 모두 생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그런 변이(變異)가 하나씩 쌓이고 쌓이다 보니, 어느새 정변(正變)의 구분은 흐릿해지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과연 부끄러운 일인가? 만약 정말 지금 세상이 오랑캐만 가득하여, 마지막 남은 중화의 조각조차 사라질 지경이었다면 당연히 부끄러운 일. 당장 벽에 머리를 던져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나라의 문을 여니 문물과 풍교(風敎)가 더불어 풍성해지고, 그러므로 비로소 정학을 버리지 않고 오랑캐 문물 품을 수 있음을 알았다. 나라에서 선비를 존숭한 지 오래건만, 산림에서 먼저 이런 길 있음을 미리 밝히지 못하고 천지가 개벽한 이후에야 비로소 용하변이(用夏變夷)니 흥국부도(興國扶道)니 하는 소리 하게 되었으니, 반대로 더 일찍 지금 여기서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지 못하였음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판이었다.

옆에서 명단을 검토하던 곽종석이 또 한 마디 던졌다.

“그런데 선생께서 고안하신 것을 보니, 학통 달라 서로 다투기 좋은 이들을 한데 묶으셨더군요. 혹 이로써 아름다운 행사의 뜻이 어지럽게 되지는 않을지요?”

“바로 그것이 노리는 바요.”

“소생의 귀가 어두운지 잘 듣지 못하였습니다. 노리는 바가 다툼 일으키는 것이라 하셨는지요?”

“잘 들었소.”

가야산에서 소식 듣고 상경하였을 때, 최익현이 신신당부하기를 그러하지 않았던가.

‘내 간재 그대를 특히 이번 일의 적임자로 천거하였소이다.’

솔직히 전우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지만, 반대편 화서학원에서나 같은 편 노사학원에서나 그들 스승을 모두 공박한 자신을 썩 좋지 않게 생각함을 알고 있었다.

최익현이야말로 이항로의 애제자이므로, 결코 자신에게 감정이 좋을 수는 없을 듯하여, 참 의외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입에 담기는 참으로 민망한 일이나, 나라의 선비들 중 소생을 들어 교언(巧言)으로 분란 일으키는 자라고 헐뜯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오. 우리 당에서 부족하게나마 계책을 꾸린 바가 그와 같다오.’

어찌 보면 우스운 일 아닌가. 가장 선비다워야 할 사람이 가장 선비답지 못한 생각을 하였으니. 그러나 오히려 나라의 우두머리 선비라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앞장서서 그런 생각을 내놓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 주상이 별 생각 없이 부추긴 말에 크게 깨달은 최익현이었다.

‘그대가 영국 땅에서 일찍이 밝히지 않았소이까. 만물은 갈라져 다툴 때 발전하고, 그것이 극에 이르면 절로 도덕이 일어나 비로소 문명에 이르는 것이라고. 우리 정학의 성쇠를 보아도, 희주(姬周) 쇠한 뒤 다시 성세 만들 방도 구하고자 제가(諸家)가 일어났고, 이로써 우리 부자(공자)께서 떨쳐 일어나 만세의 가르침을 남기지 않으셨소이까.

그러니 생각하기를, 장차 계속 다투면서도 교분 끊어지지 않도록, 또 사귀면서도 뇌동(雷同)하지 않도록 하면, 스스로 다 찼다 여기어 더 나아가지 못하는 폐단을 영영 끊어 없앨 수 있을 것이외다.’

듣는 전우의 심사가 꼬여서 그런가, ‘너 정도면 어딜 가든 분란 일으킬 것이니 특별히 지목하였다’ 하는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허나 말에 일리가 있기도 하였으니, 따른다 한들 무슨 해가 있겠는가.

“여하간 이번 모임의 취지는 이와 같소. 그러니 단순히 편 가르고 다투는 것을 넘어, 그로써 정학 전체가 더욱 격물치지(格物致知)에 힘쓰도록 북돋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자 이리 모임의 대강을 짠 것이외다.”

당장 여러 해 전 영국에서 골턴과 주고받은 문답을 바탕으로 저 나름대로 펴낸 『천연론변(天演論辨)』을 들고 온 것도 (물론 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런 취지에서였다.

미리 모여든 이들의 면면을 살피니, 천진에서 온 그 엄복이라는 자는 영국에서 대논쟁 벌인 일을 너무나 감명깊게 보았다면서 크게 찬탄하고, 일본에서 온 복택(후쿠자와 유키치)은 참으로 치밀한 논지이나 현실과 맞지 않으니 자칫 공허한 언사로 끝나지 않겠느냐며 토를 달았다.

그러므로 이 정도만 되어도 여러 편을 갈라 싸우면서 각자 학업에 정진케 하는 땔감이 될 것이다. 비슷하게 조선국 선비들이 아직도 성리의 학문에만 천착하여 경의(經義)와 치용(致用)에서 모두 멀어지고 있다고 지적한 왕개운(王闓運)에게는 화서학원 사람들을 잔뜩 붙여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들이 정말 최대의 화제가 될 법한가, 최익현이 자신에게 이른 크나큰 뜻을 이룰 만한 것인가 하면,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라 확신을 품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 인기척이 있었다. 한주학원에서 함께 건너온 젊은 유생이었다.

“두 분 선생께 여쭐 사안이 있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방금전 글 한 편을 더 받았는데, 함께 서한을 보내어 알리기를, 학문이 부족하여 급히 집필한바 제출하는 기한을 넘기고 말았으나 이번 모임에서 꼭 제현(諸賢)의 가르침과 비평을 받고자 하는 글이 있다 하였습니다.”

“허, 이번 모임이 결코 한 번으로 끝날 것도 아닌데, 무슨 급함이 있어 그리한다는 말인가.”

곽종석이 혼잣말로 혀 차더니,

“무릇 아름다운 전례를 남기는 이번 대회일진대, 처음부터 비례(非禮)를 허여하면 아니 될 듯합니다. 기한을 미리 정한 것은 비록 우리의 편의를 위한 일이지만, 또 대회의 규율과 맞닿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내침이 어떠실지요.”

하였다.

그런데 대체 어떤 간 큰 서생이 그런 청을 넣는가 보았더니, 바로 강유위였다.

“강유위라 하면 지난번 강남에서 크게 소청(疏請)하는 일이 있을 때 이름 떨친 서생입니다. 사세의 변덕으로 이름 날리게 된 것에 오만해져서 이렇게 지금 글을 보낸 것은 아닐지요?”

“우선 무슨 글을 보냈는지부터 살피도록 합시다.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라!”

언뜻 살피니, 범상한 글은 아니었다.

이르기를, 요순의 성세란 실제 있던 것이 아니라, 만세사표 공부자가 탁고(託古, 옛것에 의탁함)하여 당대와 후대에 널리 가르침을 펴기 위해 만들어낸 이상이며, 이미 그의 대에 이르면 주나라의 전적도 거의 전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른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겸양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하하, 이 정도면 가히 일대 대논변이 되겠군. 대서에 이런 속언(俗諺, 속담)이 있더이다. 예외 없는 법도는 없다고. 전례 없는 이론이나 언뜻 보기에도 정연하니, 잘 가다듬으면 일세의 기서(奇書)가 될 만한 글이외다.”

옛날 기풍에 따랐더라면 곧장 불살라 없애고 눈과 귀를 목욕재계하였을 법한 글이건만, 정도를 벗어나되 벗어나지 않으니 참으로 기분이 오묘하였다.

유림의 공분을 산 공산당 만방대회는 어찌 되었건 일단락되었고, 탱천할 뻔하였던 분기는 곧장 곡부에서 열리는 유례없는 석전대제에 쏠렸다. 대학원에서는 누구를 뽑아 보낼지 매일같이 논쟁 오가고, 서원에서 가르치는 이들도 청탁을 넣어, 함께 따라가도 되겠느냐, 자신이 이번에 이러이러한 문집을 내었는데 혹 언급이라도 해줄 수 있겠느냐 운운하고는 하였다.

그렇게 일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기축년(1889) 저물기 전, 세자의 국혼이라는 훨씬 큰 사건이 터졌다.

아무리 주변에서 강하게 권하여도 도통 중전 외에 다른 비빈 들일 생각을 하지 않는 주상인데, 왕실의 여러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세자가 있고 아래에 연년생으로 안양대군, 그리고 올해 열하나인 경양대군(慶陽大君) 이렇게 셋이 전부라면 점차 손이 귀해지는 종실을 생각하였을 때 완전히 안심이 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 걱정을 입 밖으로 내었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 것인가 두렵기 이를 데 없었는데, 후사 걱정 외에는 삶에 하등 여한 남지 않은 신정왕후 조대비가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설 것인가’ 싶어 마침내 앞에 나섰다.

‘세자의 국혼이라도 빨리 추진하여 후대를 생산케 하면 될 일이다.’

여러 사람들이 듣기에도 이것이 왕실 어르신의 처세하는 도리요, 막힌 데를 뚫지 않고 돌아가는 지극한 수덕(水德)이었는데, 정작 국왕 귀남은 답 내리기를,

‘무릇 혼례라 함은 사람의 삶에서도 극히 중한 것인데, 마땅히 세자가 장성한 뒤에 스스로 판단하여야 할 일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것이 까마득한 임오년(1882) 일이었는데, 이제 세자도 관례를 마쳤으므로 슬슬 그 얘기가 나올 때였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어느 날 귀남이 기무회의에서 별 생각 없이, 때가 되면 세자도, 대군도 다른 백성들과 매한가지로 군문(軍門)에 들어 무(武)가 무엇인지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하였으므로 조정 신료들로서는 만방대회니 ‘인타-내쇼날’이니 하는 것 따위와 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곧장 앓아누운 조대비 대신 대원군과 중전 민씨를 필두로 모든 사람들이 나선 끝에, 타협하기를 이번에야말로 세자의 국혼을 확실히 마무리짓고 그 뒤에 재론하기로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귀남이 작정하고 노리던 이완용이의 일은 어느새 뒷전이 되어버렸다.

국사는 다망한데, 장차 저 이가 놈이 나라 파는 엄청난 악행을 할 것이므로 마땅히 경계하여야 한다고 일러준들 누가 믿겠는가. 갑자기 그의 말주변이 제갈무후와 같이 된다 한들 어려울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기회에 완전히 처분하지는 못하더라도 뭔가 손을 쓰기는 해야 할 듯하였는데, 문제의 그 이완용이를 불러와 직접 이야기 나누어보니 문득 떠오르는 바 있었다.

‘남이 딱히 이유가 없어 이완용 이놈 목덜미를 노리지 않는다면, 이유를 만들어주면 되지 않겠는가?’

도덕군자인줄로만 아는 조정 중신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속내였는데, 귀남 생각하기에 이완용 정도면 그런 특별대우를 받을 만한 연유가 타당하고도 남았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완용에게 대뜸 무슨 연고로 공산당 모임에서 파란 일으켰느냐 하문하였더니, 계산이 지나치게 빠른 이완용은 답하기를 장동구락부 김가 옥균이 낸 꾀라고 아뢰었던 것이다.

총명한 젊은이가 왜 이런 자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은근히 답답하게 여기면서, 공안서 통해 슬쩍 밀지 전달하기를,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이는지는 몰라도 깊게 생각한 연후에 행하고, 함께하는 이들도 재차삼차 고심하여 골라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물론 이완용이라는 젊은이가 모두 얘기해주었다고 상냥하게 덧붙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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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사상가들이 대거 등장한 화가 되겠습니다. 엄복(옌푸)는 원 역사에서도 북양수사학당(北洋水師學堂) - 작중에서는 이홍장의 군벌화가 훨씬 빨리 이루어지면서 ‘북양군’ 명칭이 조금 일찍 등장하였기에, ‘수사’ 두 글자가 빠졌습니다 –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특히 1890년대에 사회진화론을 ‘천연론’이라는 이름으로 들여와, 청일전쟁 패배로 일약 혼란이 빠진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요.

일본 국학은 메이지 유신에 일부 영향을 주기도 하였지만, 정작 유신 이후에는 근대화가 시급했던 신정부에 의해 토사구팽을 당했습니다. 이들에게 메이지 유신은 막부 설립 이전, 천황이 중심이 되는 옛 일본을 재건할 ‘새로운 진무 창업(神武創業)’의 기회였는데, 신정부와는 방향이 많이 달랐지요.

결국 유신정부에서 보다 완고한 입장이었던 국학의 최대 유파 히라타 파는 그 명맥이 끊기게 되고, 현실적인 온건 노선을 채택한 쓰와노파 국학이 주류로 부상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국학은 이후 국가신토 구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전에 잠깐 언급되었던 것처럼, 오페르트의 형제들은 모두 동양학자였는데, 동생 구스타프 솔로몬은 인도, 특히 드라비다계 언어와 철학 전공자였습니다. 작중에서는 처세 잘못한 (잘한?) 둘째형을 두는 바람에 중견 학자로 활동할 시기에 졸지에 전공이 바뀌게 되었습니다만.

강유위의 『공자개제고』는 원 역사보다 8년 일찍 출간되었습니다. 작중에 언급되는 것처럼 고증학을 바탕으로 유학에서 말하는 상고시대는 사실 존재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공자가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 위한 근거로써 만들어낸 가공의 이상향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이러한 시도는 이후 ‘성왕(聖王)이자 교주(敎主)’로서의 공자상으로 이어져, 이른바 공자교(孔子敎) 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해외여행이라는 것이 성립하기 어려웠던 전근대의 제약을 벗어난 원 역사의 조선 선비들도 종종 곡부를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작중에도 등장한 유인석이 을미의병 실패 이후 곡부로 이민을 갈 생각을 품기도 하였고, 그 외에도 1890년대 후반에는 개인적으로 중국을 여행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국권침탈 이후에는 보다 본격적으로 곡부를 찾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소중화’ 조선이 몰락하면서 세계관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 무렵 청의 몰락과 함께 중국에서 가속화된 공자교 운동이 이때 조선에도 전해지게 되었지요 (세부적인 내용은 서동일(2013) 『1910년대 한중 유림의 교류와 공교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7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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