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76화 (176/320)

58. 국제적 문제의 국제적 해결 (1)

중국은 아직 위험 요소가 크지만, 조선과 일본은 떠오르는 시장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이 영국 상인들 사이의 중론으로 자리잡은 지도 어언 십수 년은 되었다. 사업에 실패한 채 무일푼으로 건너가, 정부의 고문관 자리를 얻어내고 나중에는 거창한 회사까지 다시 차린 독일인 오버트인가 오퍼트(오페르트)인가 하는 사람도 있다지 않은가.

늘어나는 교역량과 비례해 인천항 일대의 유럽인도 늘어나고, 대개 그 유럽인이라면 가까운 홍콩과 상하이에서 가장 세력 떨치는 영국인이 주를 이루었다.

예컨대 지금 단골 고객의 집을 찾아, 현지 일꾼에게 넉 달 전 사들인 ‘지-게’에 책꾸러미 얹고서 언덕길 올라가고 있는 앳된 청년 어니스트 베셀(Ernest T. Bethell)의 사례를 보자.

삼 년 전, 그의 아버지 토마스(Thomas H. Bethell)가. 두 달 닷새 안으로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인천이나 요코하마에 당도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반도·동방증기운송회사(P&O)의 광고를 보고서, 고향 브리스톨(Bristol)을 떠나 조선으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어니스트는 반신반의했더랬다.

그런데 사업이 의외로 번창하여, 그의 동생 허버트 – 지금은 요코하마에 가 있다 – 과 더불어 일가족이 모두 동양에서의 사업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부친과 그 동업자들의 그늘에 머물 수는 없는 것이므로, 잡다한 업무를 도우면서도 새로운 기회를 항상 엿보고 있었는데, 그 중 우연찮게 유망한 사업 구상 하나가 떠오른바, 이제 슬슬 선선한 가을바람 등지고서 굳이 땀 흘리며 두 발로 걸어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인천부에 유럽인들 사는 곳이라면 대개 거기서 거기인데, 유독 조선인들 사는 동네에 거주하는 부부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조선인 남편과 영국인 아내 부부였는데, 이름이 마르크스였나, 실제로는 독일인이라고 하기도 했다.

여하간 다른 유럽인 고객들은 곧장 점포나 사무실로 와서 찾아가는 물건을, 대신 소정의 요금을 받고서 직접 가져다주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어차피 이곳 인천부, 그리고 철도로 이어진 한양으로 말하자면 의외로 인구밀도는 높은데 인건비는 싸서, 우편이 처리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 해준다는 느낌으로 이렇게 구매한 물건 등을 직접 가져다주는 사업을 해볼 만도 하다 싶었다.

(마르크스 부인이 하루는 제의하기를, 그의 성과 음이 비슷하게 현지 말로 배달(配達)이라고 사업 이름을 붙여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하기도 했는데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조선인 동네라지만 영국으로 비유하면 대략 중산층 거주하는 골목과 비슷한 느낌이라, 공장 사이에 있는 노동자들 주택과는 달리 언덕 기슭 따라 나름대로 구색 갖춘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개중에는 이삼층 벽돌집으로 개축한 곳도 있고, 막 개축하려는 곳도 있지만 아직은 동양 전통가옥이 더 많았다.

곳곳의 공사판 사이로 제비처럼 날렵하게 지나가, 마침내 목적지 대문 앞에 당도하였다. 완전히 굵어진 지 얼마 안 된 목소리로, 나름 근엄한 시늉으로 헛기침을 했다.

“헴헴, 계십니까?”

“베셀 군?”

곧장 억양 있는 여인 목소리 들려오니 누구인지가 벌써 훤하였다.

“네, 맞습니다, 부인. 올 봄에 주문하신 책입니다.”

“들어와요.”

곧장 들어가 마루 위에 묵직한 꾸러미를 내려놓으니, 그리 낡지 않은 마루였지만 조그마하게 비걱대는 소리가 났다.. 물론 엘러노어가 보기 위해 사들인 것도 있지만, 남편이 저의 집필에 자료 수집을 도와달라 요청하여 주문을 넣은 것도 적지 않아, 애먼 베델의 허리만 혹사하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어서, 책꾸러미 옆에 또 조그만 봉투가 하나 딸려 있었다.

“아, 그리고 저희 회사가 유럽 곳곳에 - 조금 무리해서 - 광고를 낸 덕분인지는 몰라도 우편이 한 통 왔어요. 겉봉을 보니까 프랑스에서 온 것 같던데...”

받아서 보니, 엘러노어의 작은언니 되는 로라(Laura Marx)에게서 온 편지였다. 적당히 젊은이에게 사례하고서, 가지고 들어가 곧장 펼쳐보니 답답한 이야기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은 전람회를 개최한 프랑스 정부뿐만은 아니었다. 당연히 ‘만국의 노동자’들이 함께 단결할 수도 있는 것이었고, 각국의 탄압으로 흐지부지 끝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 흔히 하는 말로 ‘인터내셔널’을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 보다 정확하게는 ‘조선 문제’가 제기되었다.

차르의 암살 이후로, 러시아부터 점차 서쪽으로 퍼져나가는 대(對) 불온세력 정책은 사회주의 정당을 널리 인가하고 적극적으로 내부에서 분열공작을 펼치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다. (거기에 저도 모르게 조선이 한몫 거들었다는 사실은 아마 조선인 중 그 누구도 모를 것이었다.)

한쪽에서는 그런 시도를, 자신들을 체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이려는 비열한 음모로 치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양날의 검이니, 잘 역이용해 오히려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끌어올 수단이라고 간주하면서 가뜩이나 갈라져 있던 사회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반목이 일상화되고야 말았다.

그런 시국에 하필 동양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치루어진 첫 총선이 자칭 공산당(영어로 옮기기는 ‘인민의 공산당’)의 과반 차지로 끝났다 하였으니, 1887년 총선에서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SPD)이 역대 최대의 득표를 거두어 비록 의석 수는 줄었지만 원내 5당 자리를 지켰다는 정도에 희희낙락하던 유럽 사회주의자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어째 우리에게는 초대도 오지 않았더라니, 그런 사연이 있었다지 뭐야.”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만...”

근래 신촌향약을 계기로 고을마다 조그마하게 공산당 모임이 생기면서 부쩍 일이 바빠진 – 엘러노어에게는 분한 일이다만, 코쟁이 여인네가 ‘공산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였다가는 기겁할 촌부(村夫)들이 나라에 아직 수두룩하였다 – 전봉준이 돌아오자마자 그런 사연을 전해준 엘러노어는 씁쓸할 따름이었다.

가뜩이나 중도파와 무정부주의자가 각각의 사유로 불만 가득한 상황에서, 괜히 조선의 만민공산당을 끌어들였다가는 ‘제2인터내셔널’이 시작도 하기 전에 분해될 위험이 있었다. 조선 쪽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쪽에서는 저들 말대로 체제 내에서의 투쟁에 전 역량을 동원해야 성공할 수 있지 않느냐 우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저 얼치기 무리가 무슨 공산당이냐며 반발하여, 잘 깔린 화약에 불 붙은 성냥 던지는 모양새 될 것이 명백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조선에서의 성공이라는 샴페인을 유럽 ‘동지’들 – 특히 얄밉기 그지없는 영국의 하인드먼 같은 작자- 면전에서 터뜨릴 수 있을까 고심하던 엘러노어에게는, 아무리 로라와 그의 남편 폴(Paul Lafargue)이 사과하고 양해를 구해도 울분 쌓이는 일이었다.

“우리 공산당이 이질적이기는 하잖아. 내가 하고 있는 작업도 공개되면 당장 장인어른 사상과는 맞지 않다면서 날뛸 사람들이 한가득인데.”

전봉준이 시간을 쪼개어 쓰고 있는 ‘비(非)유럽적 공산주의’ 이론 – 어차피 아무리 극단적인 말을 써 보았자 당장 군주정을 폐하자는 말만 없다면 운현궁에서는 출간해줄 것이었다 –을 언급하며, 끝내 머쓱한 듯 (아직도 어색한) 단발머리를 긁적였다.

“흥, 만일 아버지께서 여기 계시면서 직접 운동을 이끌었다 하더라도 저 치들은 우리를 배제하려 했을 거야.”

당장 병상에 누웠을 시절 칼 마르크스 가로되, 자기 둘째 사위 폴이 하는 것이 마르크시즘이라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닐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이론과 현실 사이에 간극이 있었는데, 폴 라파르그와 칼 마르크스 사이가 영불해협이라면 전봉준 자신과 장인어른 사이는 지구에서 달까지는 될 것이었다.

그러니 반절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기도 하거니와, 아내 울적한 심정 달랠 방도도 찾아야 하겠다 싶어 궁리하던 끝에 나름 – 자기 생각에는 – 묘안을 내놓았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 모임을 차려보는 게 어떨까?”

“뭐?”

“그렇게 우리를 빼놓고도 내가 듣기로 결국 같은 날 두 군데에서 따로 모임을 열었다는데, 이왕 둘로 갈린 인터내셔널이 셋이 되면 안 될 건 또 뭐야.”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내셔널’이 아니라 ‘인터내셔널’인데 우리 혼자서 할 수는 없잖아.”

“뭐, 세상에 공산당이 유럽에만 있나? 생각해보니 일본의 사이온지 선생도 가타야마에게 이야기만 듣고 직접 뵙지는 못했지...”

대중정당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도 할 겸, 형조판서 오경석을 당당하게 당의 영수로 내세운 만민공산당이었다. 환재대감이니 면암대감이니 하는 거창한 어르신들 대신, 역관 출신으로 입신한 사람이 당의 얼굴로 나와 있으면 사람들을 더 끌어모을 수 있으리라는 심산이 있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과거의 사람인 오경석은 그런 시도에 영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지만)

덕분에 빈자리가 된 녹사(당서기) 자리에는 자연스레 전봉준이 올라갔는데, 그러다 보니 들려오는 것도, 알게 되는 것도 적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진보적인 것 같기도 하고, 덕국 비스마르크처럼 반대로 진보를 차단하는 것 같기도 하여 늘 두루뭉술한 상감의 의중이었다.

전해 듣기를, 장차 자유당이든 공산당이든, 그 사상을 널리 퍼뜨려 다른 나라가 조선을 해치려 할 생각 자체를 품지 않게 함이 성상의 심계(深計)라 하였다. 그러니 오경석을 통해서든 대원군을 통해서든, 이 따로국밥 인터내셔널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소매 걷어붙이고 후원에 나설지언정 탄압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구색을 갖추려면 못할 것도 없지. 일단 진퉁 공산당이 있는 일본도 있고, 여기 인천에서 공부하는 중국인도 적지 않고, 그리고 저기 류큐나 하와이에도 찾아보면 사상 비슷한 사람 하나 없을까. 그리고 뱃삯 지원해준다는 얘기 곁들여서 처형과 동서 쪽에도 연통 넣으면, 프랑스에서 옛 코뮌 사람 한둘 쯤은 또 오지 않겠어?”

어째 영 엉뚱한 구석으로 굴러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손해볼 일은 아니겠다 싶은 엘러노어도 끝내 동의하게 되었다.

장동구락부의 매캐한 연기를 저의 입에서 나오는 또 다른 연기 한 줄기로 헤치며, 서재필에게 김옥균이 말했다.

“이번에 공산당에서 만방대회(萬邦大會)라는 것을 연다더군. 들어보았는가?”

“예, 말이 만방이지 제대로 참여하는 것은 우리 조선과 옆 일본에 그칠 듯하기는 합니다만.”

얼치기 ‘스포츠맨’ 노릇은 단념하고 언론의 일에 직접 뛰어든 서재필은 확실히 소식에 밝아서, 발 넓기로는 구락부 단골 중 김옥균에 버금갈 터였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자네, 그 대회를 천하에서 우리만 여는 것이라 여기면 오산일세. 이미 여러 해 전 비슷한 모임이 여럿 시도된 바 있지.”

“그렇습니까?”

“그렇지. 그리고 이곳 조선에서야 그 흉흉한 마음을 어찌 잘 단장하여 꾸미고 있다지만, 저들 무리끼리 모이게 되면 부득불 본색이 드러나게 될 것이야. 그러니 적당한 사람을 하나 물색해서 그 사이에 집어넣자 이 말일세.

올무 놓는 것마냥 잘 말을 만들어서 옭아매면 더욱 좋고. 공산당 뒤에 아직 운현궁이 있으니 아예 난신적자(亂臣賊子) 무리로 몰아가지는 못하겠지만, 지금부터 살살 여론을 조성해 두어야 훗날 무슨 노림수를 부리든 디딤돌로 쓸 수 있겠지.”

운현궁 이야기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서재필의 표정에 긴장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개화당 중심으로 거족들이 뭉치기 전까지 전전긍긍하였던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으므로, 대원군의 표한(慓悍)하고 모진 마음씨 이야기가 조금은 아련해졌을지언정 더욱 부풀려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 형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운현궁이 있으니 조금 꺼려지기는 합니다만...”

“염려 거두게. 내 이래 봬도 한때 성총 입으면서 어심의 편린이나마 엿보았다 자부하고 있네. 상감께서는 결코 공산당을 좋게 보지 않으시니, 만일 우리가 작게나마 의심될 바를 그 작자들 언행에서 찾아 만천하에 드러낸다면 운현궁도 함부로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이야.”

지금이야 세월이 조금 지나서 가라앉았다지만, 본래 성상께서 공산당 하면 크게 질겁하셨음을 모르는 김옥균이 아니다. 당장 지난 1874년, 그러니까 갑술년에 한창 도중 소동 일어날 적에, 강경한 진압을 아뢰었던 자신에게 ‘내 말하려던 바가 그대 말한 것과 같다’고까지 말씀하신 성상 아닌가. 물론 어심이 모질지 못하여 결국 어물쩍 넘어가 버리고 말았지만.

“그렇지만 그런 소지를 찾지 못하면 더욱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허, 이 사람. 아직도 내 말을 믿지 못하는가.”

다들 저 잘난 맛에 사는 구락부 젊은이들 사이에서 구심점 할 만한 사람이라면 김옥균이 있을 뿐이다. (일단 김옥균 본인이라면 백 번 동의할 생각이었다.) 서태후가 금의환향 – 조선으로 쫓겨올 때도 비단옷은 입고 있었지만 – 한 이래 공식적인 직함 하나 없이 한량으로 지내고는 있다지만, 지난 추거 참패 이후로 도리어 고개에 힘 팍 들어간 개화당 젊은이들 중심에 누가 있는지 명백하였으므로, 여러 문중들도 눈여겨보고 있는 사내가 바로 김옥균이기도 하다.

“우리 조선의 국시가 무엇인가? 국제로 밝힌 것 외에는 우리 면암 대감이 그리 좋아하는 이른바 정학이 있을 뿐이지.”

“그건 그렇지요.”

서양 문물 접하고 그것을 누릴 여력도 있는 구락부 젊은이들은 대개 유학을 고리타분하게 여기고는 하였지만, 김옥균은 유난히 그 정도가 심하였다. 허나 무언가를 꺼리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법.

“그런데 따져보면 그 공산주의라는 것은 유학과 맞지 않네. 견강부회(牽强附會)도 하루이틀이지, 아무리 그 맞지 않는 아귀를 억지로 맞추고 그럴듯한 이론으로 틈을 감추려 한들, 누군가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결국 밑천이 드러나고야 말겠지.”

“제 견문을 어찌 고균 형님께 비하겠냐만, 알기로는 여기 만민공산당은 나머지 공산당 무리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새로 녹사 자리 꿰어 찬 사람이 그 마극 선생의 막내사위일진대 본바탕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를 교묘히 이용해 저들 사이에 분란 일으키면 우리 당으로서는 어떻게 풀리든 이익일세.”

요컨대, 무엇을 빌미로 삼든 트집만 잡으면 될 일이었다. 공산당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면 운현궁과 당 사이가 벌어지는 셈이니 이득이요, 공산당을 잘 꾀어 성현 말씀과 어긋나는 바 있음을 저들 입으로 드러내게 만든다면, 총리대신 최익현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자유당과 공산당 사이를 벌릴 수밖에 없을 테니 또 이득이며. 국정과 거리를 둔다지만 마치 하늘처럼 모든 것 위에 있는 성상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 그럴 공산이 크리라고는 김옥균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 그만한 이득이 또 없다.

“형님 말씀이 늘 그렇듯 참 심오하면서도 사리에 닿습니다. 헌데 이곳 구락부 젊은이들 중 형의 의중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이라면 벌열의 자제뿐일 텐데, 저들이 우리 사람들을 끼워줄까, 그것이 또 걱정입니다.”

아무리 젊음이 과감한 용기를 낳는다지만, 한 번 사는 인생일진대 홀로 운현궁 미움 살 일을 맡고 싶지는 않았던 서재필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흠, 구락부 드나드는 젊은이가 한둘이 아닌데, 사람 하나 없겠는가? 정 걱정된다면 운현궁과도 사이 원만한 집안 자제를 대동하고 가면 될 일이지.”

서재필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했다. 얼추 살피니 오늘도 저 구석에서, 남들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면서 속 모를 미소만 짓고 있었다. 김옥균도 그쪽으로 고개 돌리는 것이, 아마 저와 마음이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일당(一堂, 이완용)이라면, 그 부친께서 각신(閣臣, 규장각 당상관의 별칭) 지내고 계시니 지금 조정과도 적당히 연이 있고, 또 운현궁과도 집안이 멀지 않지. 어떤가?”

--- *** ---

『대한매일신보』로 유명한 어니스트 베델은 1872년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짧은 실업교육을 마친 뒤 곧장 생업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는 경제적 어려움보다는 경제적 자립을 강조하는 상인 집안의 가풍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원 역사에서 1886년 그의 아버지 토마스는 고베에서 무역업체를 창립하였는데, 사업이 계속 확장되어 1899년에는 아우 허버트와 함께 ‘베델 브라더스’라는 별도의 법인으로 독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무역업 대신 양탄자 제조업에 뛰어든 것이 패착이 되었습니다. 연줄도, 딱히 내세울 이점도 없는 영국인이 일본 국내의 경쟁자들을 이기기는 어려웠고, 결국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부업으로 현지 특파원을 겸직하게 되었는데, 그 무렵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처음 한국과 연을 맺게 되었지요.

작중에서는 경제적 발전과 중국-일본 사이의 묘한 입지, 그리고 만주 지역과의 연결성 등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어니스트의 아버지 토마스가 요코하마 대신 인천을 사업의 무대로 선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과의 인연이 무려 15년이나 빨리 맺어지게 되었지요.

카탈로그를 이용한 우편 판매는 15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책을 제외한 다른 품목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19세기 중후반부터입니다. 교통과 매체가 동시에 발달하면서, 잠재작인 소비자의 저변이 대폭 확대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지요. 비록 2018년 파산하기는 하였지만 한때 미국 내 최대의 유통업체였던 시어즈(Sears)도 이때 시계 우편판매로 창업에 성공하였으니, 베델의 창안이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것은 아닌 셈입니다.

제니 로라 마르크스는 엘러노어보다 열 살 많은, 칼 마르크스의 차녀입니다. 쿠바 출신의 크리올 혼혈(정확히는 쿼터) 폴 라파르그와 결혼하였고, 두 부부는 해로했지만 – 1911년 더 늙기 전에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취지를 밝히고 동반자살합니다 – 슬하에 요절하지 않은 자녀는 없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스페인어권에 사회주의를 전파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제2인터내셔널은 제1인터내셔널보다는 보다 유연하고 느슨한 구성으로, 1차대전으로 인한 갈등으로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기까지 꽤 오래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창립 초기부터 작중에 묘사된 것처럼 중도파(‘가능주의자’) 노선과의 갈등을 겪었고, 결국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첫 모임은 같은 날 같은 때에 별도의 모임을 개최하는 쪽으로 진행되었지요. 여담으로, 폴 라파르그는 24개국이 참여한 ‘마르크스주의’ 모임에서 개회사를 맡았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