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다투어 우짖게 하라 (2)
떠들썩하던 박람회장에 하루의 휴식이 찾아왔다. 에펠 탑에 휘황한 조명이 하나씩 켜질 때마다, 한두 곳씩 전시장의 불이 꺼졌다.
두둥실 떠오른 달은 조선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듯, 다른 듯. 사람 마음 어지러우니 외물(外物)도 그에 따라 흐트러짐인가 싶었다.
해동문화각 문 닫히는 것을 보고서 여각(호텔)로 향하려는 김홍집 뒤에 문득 베베르가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아는 조선 정부의 관리라면, 쉽게 마음 정하지 못하고 지금쯤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과연 예상이 맞은 듯하군요.”
“하, 역시 조선에 오래 계신 위 공 답습니다. 말씀마따나 심란하기 그지 없군요.”
“술이라도 한 잔 하러 가시겠습니까? 커피라면 이곳 조선관에 계시면서 실컷 드셨을 테니까요.”
주량이야 사람 따라 다를지언정, 선비부터 머슴까지 술이라면 사양하지 않는 것이 조선의 기풍이다.
“어디 조용한 곳이라면 좋겠군요. 파리에 오기 전 지인에게 추천받은 곳들은 모두, 음, 점잖은 신사가 드나들기에는 영 맞지 않아서.”
지인이라 하면 서태후가 본국에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철 이사 자리 내려놓고 돌아온 김옥균이다. 이번에 나랏일로 파리에 가게 되었는데 혹 들릴 만한 좋은 곳 없느냐 물었더니 근 스무 해 전 기억을 잘도 더듬어 알려주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김옥균의 성향을 알고서도 그에게 물어본 김홍집 자신을 탓할 일이었다.
“저도 이곳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다행히 대사관에서 잘 정리해둔 – 술이라면 우리 러시아 사람들도 사양하지 않지요 – 리스트가 있더군요. 그 중 가까운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베베르도 사실 현지 사람은 아닌지라, ‘조용한 곳’을 찾는 데는 실패하였다. 하필 독일 순회공연을 마치고 다음 북미 일정을 준비하고자 파리로 돌아온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의 단골집이었으니, 제자로 받아달라, 자작곡에 대한 감상평을 듣고 싶다, 사라사테 씨가 생각하는 현대 프랑스 음악계의 실정은 어떠한가 등등. 도저히 대화 나눌 여건 되지 않아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뭐, 세상이 협조하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조선 땅에서 인연이 깊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분명 술기운 빌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으셨겠지요?”
부득불 점잖지 못하게 술집 바깥에 앉아 국사를 논하게 되었으니, 어디 이것이 일국의 차관급 관료 체통에 맞는 일이겠냐만, 더 멀리 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해결함이 가할 듯하였다.
“예, 맞습니다. 짐작은 하셨겠지만, 모렌하임 남작 각하의 지시를 받고서 찾아온 것이지요. 하지만 지시가 없었다 하더라도 아마 찾아와서 비슷한 말씀을 드렸을 것 같습니다.”
비록 지금처럼 예조의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다지만, 김홍집도 외무 맡아본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나, 정동 공사관 일대에서 전하는 인물평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굳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선과 쌓은 신의를 배신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까지 제 조국을 비롯해 많은 유럽 나라들이 조선을 대할 때 순수한 선의를 가지고 움직인 적은 없었습니다. 애초에 국가 간의 교섭에 도덕이 끼어들 자리가 그리 많지 않기도 하지만요.
그렇지만, 이번 일은 조선에 다시 없을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흐름에 휩쓸리는 것보다는 미리 올라타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투는 것은 유럽 국가들이요, 우리 조선은 이 거대한 땅덩이 반대편의 작은 나라입니다. 아메리카를 내버려 두고 있는 것처럼, 아시아도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지내도록 서로 합의할 수는 없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미국만 하더라도 먼로 대통령이 그 유명한 선언(먼로 독트린)을 내세우기 전까지, 나라 세우기 전 한 번, 세우면서 한 번, 그리고 세운 뒤에 한 번, 이렇게 세 번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스스로 홀로 서기에 앞서 유럽 국가들 중 어느 한 쪽과 힘을 합함이 조선과 이웃나라 모두에게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양 진영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중립은 스스로 하고자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의 동의가 있어야지요. 지금 유럽에서 두 진영이 각각 뭉치고 있다지만, 아직 힘으로 따지면 저희 쪽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바깥에서 새 우군을 얻으려 노력할 수밖에 없고, 곧 영국도 눈치를 채겠지요.
그리고 지금과 같은 흐름 속에서 중립을 유지하게 방치할 만큼 조선이 중요하지 않은 나라인가 하면, 이십 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한때의 우려와는 달리 적어도 외교에 있어서는 신중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새 차르였다. 부황과 친분이 있지만 저와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슈발로프 공작을 내치고 대신 작고한 고르차코프 공작이 추천한 바 있던 기르스(Николай К. Гирс)를 기용한 이래 그에게 외무를 일임하였으니, 조선을 판에 끌어들이자는 발상도 기르스의 대아시아정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무리 연해주의 사정을 지역 유지와 지방관들이 감추려 노력한다 한들, 그 넓은 땅의 상황을 고작 한 줌의 사람들이 모두 감출 수는 없는 법. 적어도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공될 때까지는 어차피 조선과 함부로 척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겉으로 보이는 성과에만 고양되어 ‘홍콩이 영국이 가진 동양의 진주라면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가 가진 진주’라는 말까지 하면서 떠드는 언론을 생각하면, 차르의 체통과도 맞닿은 문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의 정권마저 앞날이 불투명해지고 있으니, 필요한 대비를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까지 귀국에서 중국 사정을 잘 아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아직도 별반 다를 것은 없습니다. 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동양에 해박한 축에 들 정도니까요. 다만 우리의 동맹 프랑스는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그쪽은 근래 동철 덕분에 더 세세하게 현지 사정을 알게 되었다지요. 거기에 김 공의 친우인 다른 김 선생이 관여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사람 연줄이라는 것이 한 번 이어지면 양쪽으로 쓰이기 마련이니, 여기서 김옥균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는 했다.
“우리 사이 이야기지만, 사실 러시아 안에도 다양한 민족들이 있고, 이들이 모두 차르 폐하의 통치에 만족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루스 인들이 가장 많은 우리도 그럴진대, 하물며 한족이 만주족을 수로 압도하고도 남는 중국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자치의회도 아니고, 숫제 인구에 따라 서양식으로 의회를 만들겠다고 했으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중국 황제가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는 몰라도 - 어쩌면 뒤에 영국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곧 영국이 따라붙게 되겠지요 - 동양식 표현으로 자승자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베르의 설명을 들어보니, 서양 사람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기는 하는 일이었다. 프랑스나 러시아로서는 오히려, 조선에서 발목 잡으며 통사정해야 할 법한 일을 먼저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니 호의 베푼다고까지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중국 문제가 해결되어야 동양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어느 쪽도 오해하지 않도록 세력의 경계를 획정하는 것이고요. 조선으로서는 정말 어려운 결단이 되겠지만, 신의를 담아 말씀드리건대 피할 수 없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후, 와인을 곁들이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솔직한 심정 담아 김홍집이 한탄하였다.
진서의 이로운 점 하나는 나라의 중대사로 전보를 주고받을 때, 미리 역보(譯報)하는 수법을 다르게 해 두면 가운데에서는 도저히 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서양 문자야 대개 거기서 거기이므로, 우선 신호를 가로챈 뒤 자주 나오는 부호를 하나씩 대입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통상 쓰이는 것만 하여도 수천 자인 진서를 무슨 수가 있어 그리하겠는가.
그리하여 김홍집도 하등 거리낌 없이 – 보안회선을 빌려달라 청할 것도 없었다 – 본국에 저의 제의받은 바를 전하였는데, 예상대로 기무회의에서도 크게 의견이 갈리었다.
그나마 군자국(君子國) 자처하는 나라로서 어찌 이와 같은 책동에 함께 하겠느냐며 손사래 치는 이는 없었다만, 그래도 남의 나라 갈라놓는 궁리를 즐겨 하는 자도 있기 어려운 지금의 조정이었다. 하물며 대국에 대해서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김홍집이 간략하게 함께 전한 베베르의 조언에도 일리가 있었으므로, 김윤식은 부득불 해야 하는 일 아니겠냐며 조심스레 찬동을 표하고, 한 사람이 그렇게 나서니 몇몇 사람들도 거기에 따라붙었다.
“신의로써 함께 해온 이웃나라를 해치는 것은 매우 흉악한 일입니다만,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나라라면 도와서 반절이나마 부지할 수 있게 함이 계절존망(繼絶存亡)하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왕(先王, 옛 왕들)께서도 걸주를 폐하시되 기(杞)와 송(宋)을 남기어 그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시었습니다.”
더구나 법국 판서가 이르기를, 오히려 이것이 작금 구주 땅에서 대란(大亂)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우선 천하를 양분(兩分)하는 묘책이라 하였으니 그럴듯하게 여기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성상께서 일찍이 교린(交隣)하는 법도를 높이 세우셨으니 그 뜻이 밝고도 큽니다. 그러나 나라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하여는 우선 서로 싸워서 쉽게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인데, 이는 우선 열국 사이에 균세(均勢, 세력균형)한 형국 갖추어진 뒤에야 가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일 옛 사교의 난과 같이 대국에 다시 어지러운 일이 일어난다면 오히려 그 반대가 될 것이니, 미리 대비함이 마땅한 방책일 것입니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그처럼 순박한 생각 품는 이들은 없겠지만, 나라 전체로 따지면 이번에야말로 존주대의(尊周大義)에 따라 대국의 절반이라도 이적(夷狄)에게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우기는 무리도 없지 않을 터였다.
차라리 도의보다 당장 살아남을 방도 마련하는 데 힘을 기울이라고 누군가 단언하였더라면, 그때는 결단코 반대하든, 잘못을 깨우쳐주든 할 생각을 하였겠지만, 지금은 외려 사세에 따라 권의책(權宜策, 임시변통) 택함이 도의에 합당하다 하니 또 그럴듯하기도 한 것이었다.
결국 우선은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되, 논란 끝에 그 이름이 각각 자정원(資政院)과 자의원(諮議院)으로 굳어진 청국의 상하 의원이 어찌 운영되는가 조금 더 살피기로 애매한 결론을 내리고서 파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다들 청국이 조만간 어지러워질 것이라고만 단정하는지 모르겠소.”
오늘로 말하자면 조금은 일정이 한산하여, 모처럼 사제간 회포를 풀자며 형조판서 오경석을 불러세운 귀남이 말했다.
“신은 과분한 성은을 입었을 뿐, 지재 모두 부족하니 어찌 함부로 나라 사이 일을 거론하겠습니까.”
“경은 사사롭게는 나의 스승이요, 또 옛 인연으로 따지면 대대로 대국의 사정에 정통하였소. 겸양하지 아니하여도 족한 것이니 편히 이야기하도록 하시오.”
사실 아직도 자신이 대감 소리 들으면서, 나라의 가장 중한 일이 다루어진다는 기무회의 자리에 한몫 차지하게 된 것도 얼떨떨할 때가 있었기에 완전히 겸양하는 말만은 아니었다. 아래에 있을 때는 어떻게든 마루까지 올라가보겠다며 박규수와도 결별하고 공산당에 투신하게 되었다지만, 막상 이렇게 올라와 역관들뿐 아니라 뭇 중인들의 선망을 받게 되었으니 뿌듯하기에 앞서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임금께서 하문하시기도 하셨거니와, 또 역관으로서 어지간한 화족(華族)보다 이웃 청국 사정에 정통하였다 자부하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계속 감춤도 비례(非禮)라, 마침 시위하던 내관이 빈관 운영하는 손씨(손탁)가 진상한 양과자를 내왔기에 잠시 틈이 생겨서, 그 사이 오경석은 마음 속으로 얼추 답을 내볼 수 있었다.
“감히 아뢰건대, 청국은 본디 국초에 북변에 살던 여진의 족속이 중원 어지러움을 틈타 대국을 자처하게 된 것으로, 한인들로서는 한을 품지 아니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미리 우리의 참의원과 같은 제도를 두어, 노한 백성들의 마음이 비등하기 전 타이를 수 있는 기틀을 다졌습니다만, 우리와 달리 나라 안의 상하(上下)가 마치 물과 기름과 같아 어울릴 수 없으니 막혔던 것이 통하고 감추었던 것이 드러날수록 위아래의 다툼은 오히려 거세게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듣는 귀남 생각에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리 한인과 만인이 다르다지만,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말이 같을 뿐 엄연히 위아래가 있었지 않소? 경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당장 내 사위(嗣位)하기 전 시강원에 있을 때 경도 이렇게 판서 자리까지 올라오리라 여기지는 않았을 터. 그런데 문물의 전변(轉變) 극심하여 오늘에 이르렀지만 외려 나라는 예전보다 나아진 바 있지 않소이까. 대국도 그리할 수 있지 않겠소?”
물론 처음 새마을운동, 아니, 신촌향약이라는 것을 기획할 때 노렸던 것 중 하나가 민생이 나아지는 형세를 갖추어 이웃나라도 따르게 함에 있었지 않았던가. 그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옆 나라 중국이 평온하여야 할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옛날 ‘청요릿집’이 언젠가부터 ‘중국집’이 된 것처럼 지금의 청도 언제고 망해 없어진 뒤 그 뒤에 중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졌을 것인데, 그 중국이라 함은 곧 중공이요, 중공이라 하면 모택동인가 무언가 하는 자가 시켜 동란 통에 끼어들었던 되놈들이었다.
그런데 이완용이야 자신이 맡아 허튼짓하면 바로 내칠 수 있도록 감시하면 되고, 아직 그 아비도 태어나지 않았을 법한 김일성이는 저의 아들 세자에게 맡기면 되지만, 마찬가지로 태어나지도 않은 모택동 – 어디서 태어나 본래 무엇 하던 작자인지도 모르지 않던가 –을 방비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가 하면 결국 행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치 않는 것 외에 답이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애초에 그러면 공산당이 중국에 퍼지지 못하게 막았어야 하지 않았던가 싶어 ‘아차’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만약 어찌 방도를 마련하여 청국 조정이 한인 향신들과 합심해 국체를 하나로 지키게 된다면 가하겠지만, 이미 쌓인 원한이 이백 하고도 오십 년 넘게 묵었으니 단언컨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구주의 열방(列邦)이 대국을 나누어 가지려 한다면 이러한 마음을 읽고 더욱 간사하게 나설 터인데, 우리로서는 이를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전에 대국의 천자가 우리의 도움을 구한 바 있지 않소? 더구나 그 나라 사람들이 대체로 우리의 나라 일군 바를 본받고자 한다 하였는데, 우리가 나서서 뭔가 도와주면 대국이 갈라설 일도 없고, 그런 대란 일어나지 않는다 하면 자연스레 우리가 법국이든 영국이든 세상 반대편 나라들 싸움에 합세할 필요도 없어지지 않겠소이까.
그리고 서양 나라들을 거론하였는데, 우리야 나라가 작아 만방과 고루 사귈 수는 없지만 대국은 충분히 가하지 않겠소?”
귀남이야 그저 결론을 정해두고서 우선 거기에 맞지 않는 말들을 반박하였을 뿐이었지만, 의외로 오경석 듣기에는 사리에 맞는 바가 있었다. 더구나 우선 지켜보기로 중론이 정해졌으니, 그 사이에 뭔가 살짝 찔러봄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조선에 청국을 지켜줄 의리까지야 없다지만, 그래도 미운 정도 정일진대 일 생기게 되면 곧장 중원을 나누어 가지자 하는 제의에 따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희태후가 ‘오랜 병환’이 모두 나은바 마침내 태어나고 자란 북경으로 돌아왔으니, 동삼성총독 공친왕은 이와 같은 황실의 경사에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며 저의 공왕부를 헌납하였다. 물론 말이 ‘자신의’ 공왕부이지, 실제로는 이홍장이 관저로 쓴 이래 여러 해가 지난 상태였으므로, 졸지에 남의 글월 한 편에 대청의 북양대신이 쫓겨나게 된 셈이었다. 아마 공친왕도 옛 원한을 소소하게 갚고자 하는 못된 심보로 그리 하였으리라.
“정말 조선이 그리하리라 여기시오?”
“여왕 폐하의 정부에서 판단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급하게 차린 북경의 치소에 찾아온 첫 손님은 같은 대국 백성도 아니요, 영국 공사 존 월셤(John Walsham)이었다. 통변(통역)은 필요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물론 조선이 근래 불온한 면이 있다 하나, 그렇다 한들 염치는 아는 나라요. 우리 대청도 참여한 박람회에서 그런 음흉한 의론에 한몫 거들지는 않을 것이외다.”
“이번 박람회의 참가자들을 지나치게 높은 인사, 그 미스터 김이라는 사람이 직접 인솔하여 갔다고 하였잖습니까? 충분히 의심해볼 만한 정황이지요.”
하필 7년전쟁 시기의 세력 구도가 다시 갖추어지게 될 수도 있는 시국이었다. 삼제동맹이 무력화되었다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여전히 독일 편이었으므로 그때보다야 상황이 조금 낫다고 해야 하겠지만.
만약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영국이 할 일은 독일이 열심히 프랑스와 러시아를 상대하는 동안 지구의 다른 모퉁이에서 자신의 세력에 걸림돌 되는 것들을 치워버리는 데 있었고, 7년전쟁에서 아메리카와 인도가 그런 전장이었다면 이제는 중국이 될 터였다.
“그렇지만 본관이 아는 조선의 동향은 결코 그렇지 않소. 만약 그대 말대로 조선이 법·아 두 나라의 손을 잡았더라면, 이번에 황상께서 조선국에서 올린 시무의 조언을 받으시고 백가쟁명(百家爭鳴) 하듯 만백성이 하등의 꺼림 없이 나라에 도움 될 방도를 진언케 하겠다고 포고하신 것은 어찌 보아야 하겠소?”
“그야...”
“거기에 더불어, 대국이 어느 한 나라에 마음을 주게 되면 비로소 다른 나라들이 질시하여 어지럽게 다툼이 일어나게 될 것인즉 장차 백문제개(百門諸開, 문을 모두 열다)를 원칙으로 하여 치우침이 없게 하자 하시더이다.”
중국식으로 차린 의회에서 마구 반정부 여론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를 잘 이용해 이홍장과 조정을 확실한 친영파로 포섭하라는 지시만을 받고 찾아왔던 월셤으로서는 금시초문.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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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협상의 기반 작업을 진행하였던 주역 니콜라이 기르스가 등장하였습니다. 고르차코프 공작의 후계자 경쟁 대목에서 잠시 언급되었는데, 유능하였지만 집안이 슈발로프 공작이나 이그나티예프 백작 등 다른 경쟁자들만큼 훌륭하지는 못하였고, 더구나 슈발로프 공작은 알렉산드르 2세와 친밀한 사이이기까지 하였지요.
하지만 결국 알렉산드르 2세가 사망하면서, 다소 늦기는 하지만 기르스가 기용되게 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국내적으로는 보수적·반동적이었지만 외교에 있어서는 평화주의 노선을 선호했던 알렉산드르 3세는 신중하면서도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기르스를 높이 평가하여, 1895년 사망할 때까지 그에게 계속 외교를 맡겼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1887년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놓고 영국과 합의에 성공하여, 그레이트 게임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고 훗날 영-불-러 삼국협상으로 이어지는 초석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작중에서는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이 이미 국지전으로나마 전쟁으로 비화되었고, 비스마르크 본인도 러시아와의 관계 유지가 어려워진 것을 인정하고는 영국과의 연계에 힘을 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조선을 끌어들인 것은 이렇게 된 상황에서 우선 진영 구도를 확립하여 안보의 불확실성을 줄이려는 시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파블로 드 사라사테는 “집시의 노래(Zigeunerweisen)” 등 여러 명곡으로 지금도 이름이 전하지만, 그의 생전에도 기교가 뛰어난 명연주자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작품 중에도, 바이올린 애호가인 홈즈가 사라사테의 콘서트를 보러 간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지요 (『붉은 머리 연맹』). 여담으로 원 역사에서는 1889년 아메리카 순회공연을 마치고 남아프리카를 거쳐 극동까지 갔는데,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작중의 김병학에게는 희소식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원 역사에서 청의 의회 설립은 최후의 개혁인 광서신정 당시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 반포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입헌군주제 일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서태후와 보수파 후당(后黨)에게까지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1906년 헌정 수립 방침을 발표하고 1908년에는 공식적으로 흠정헌법대강을 공포하면서 9년 후 정식으로 헌법을 제정한다는 계획을 공개했습니다.
이후 1909년에는 정식으로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자문기구로서 각 성에 자의국이 수립되었고, 이듬해에는 전국 단위 기구인 자정원도 개설되었습니다. 자의국은 각 성의 선거 (작중 조선과 유사하게, 제한선거이기는 했으나 재산 외에도 학력 기준을 충족하면 투표권이 보장되었습니다.)로, 자정원은 민선의원과 관선(정확히는 황제가 임명하는 欽選)의원 각 백 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작중에서는 그런 과정 없이 바로 상하원 체제가 갖추어졌습니다만.
마지막에 언급되는 ‘백문제개’는 의화단의 난을 전후하여 미국이 주창한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만, 이것이 어떻게 진행될 지는 다음 화에서 더 살펴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