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73화 (173/320)

57. 다투어 우짖게 하라 (1)

“아,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장차 나아갈 길이로다!”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에 광통이도국도 한 자리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 자격으로 저의 가형도 들린 바 있던 이 도시에 발 들이게 된 김병국으로 하여금 찬탄 금치 못하게 하는 문물이 있었다. 치국(治國)의 새로운 도리도, 성리(性理)의 심오한 논변도 아니요, 바로 파리 어디서든 보이는 저 왜필씨탑(矮弼氏塔, 에펠 탑)이었다.

“이것이 처음 저 탑을 보았을 때 이 사람의 느낀 바였다오. 우리 조선국은 예로부터 땅은 좁은데 사람은 많고, 더구나 그중에도 다시 산이 많아 사람 살 터전이 넓지 않은 바, 저처럼 집을 높게 짓는 것이 곧 대세가 될 것이오.”

저 정도면 높이를 길로 세는 것이 아니라 리(里)로 헤아려야 할 지경. 저만큼 높이 지을 필요까지야 (아직은) 없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저보다 훨씬 낮은 건물 정도는 쉬이 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늘 천하를 이롭게 할 방도를 생각하시니 이것이 동양 속담에서 이르는 자강불식(自彊不息) 아니겠습니까. 여전히 건강하시고 사업도 창성한 것을 보니 저 역시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이들 개화당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친러파’로 분류된 이래, 여러모로 연이 많은 사이였던 베베르가 미소로 화답하였다.

두 사람 앉은 곳으로 말하자면 조선관, ‘석파거사(石坡居士)’ 친필로 된 진서 현판 기준으로는 ‘해동문화각(海東文華閣)’이었다.

내세울 문물 무엇이 있겠는가 하면, 국왕 귀남 생각하기에 그가 알던 젊은이들 날라리 풍속이 곧 서양 풍속이라, 그 중 하나가 역시 커피집인지 다방인지에 앉아 소일하는 것이었다. 하여 조선관에서 전시하는 것 중에도 – 법국 글로 떡하니 ‘하이럼 S. 맥심 발명’이 붙어있기는 하였으나 – 자칭하기를 서양의 기술과 동양의 신비가 결합된 ‘왕실 레시피 인스턴트 커피’가 있었다.

하여 저의 지인이 이곳 박람회에 한 자리 내었다는 소식 듣고 동정 묻고자 찾아온 베베르가 여기 이 자리에 앉아 달고도 씁쓸한 가배 향취 즐길 수 있던 것이다.

“그나저나, 내 견문 넓지 않으나 듣기로는 아라사국은 금번 박람회에 불참하였다 들었는데, 위 공(베베르)은 무슨 연유로 오시었소?”

“이르신 대로, 공식적으로는 불참하기로 하였습니다만, 흐흠.”

“아, 본래 국사(國事)란 것이 꼭 표리(表裏, 겉과 속) 같지 않을 수 있는 것이지. 알 만하오.”

하필 올 기축년(1889)에 이런 성대한 행사를 연 까닭은, 올해가 배소대(排簫臺, 바스티유)를 난민이 들이친 지 꼭 일백 년 되는 때여서 이를 기리기 위함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여기는, 임금 모시는 나라 영국, 덕의지, 아라사 등등은 공공연히 불참을 선언하였는데, 그들 사정은 어떠한지 알 바 아니지만 병국 생각하기에는 과한 것이었다. 본래 인군이 실덕하면 그 국인(國人)이 일어나 꾸짖고 벌주기도 하는 것인데, 당장 『춘추』에서도 이를 시(弑, 시해)로 새기지 아니하였으니 성현의 뜻을 익히 알 수 있었다.

어느 멋모르는 서양 공사가 정동에서 열린 어느 연회에서, 역모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함이 가당하냐 넌지시 물었다가, 그 말대로라면 우리 태조께서도 범상(犯上)하신 게냐는 호된 질책 받기도 하였다지 않은가. 같은 논리로 청국도 거하게 참여하였고, 조선과 청 두 나라가 끼었는데 일본이 차마 빠질 수는 없는 것이라 (당장 서양 말을 옮겨 ‘박람회’라는 말을 만든 것부터가 일본이지 않던가), 정작 역사 유구한 ‘전제군주정’ 국가들은 참여하는 기묘한 형국이 되고야 말았다.

“어째 도원(道園) 그 사람이 직접 찾아왔다 싶었더니, 필히 무언가 일이 있는 게구려.”

“죄송합니다. 조선을 떠난 지 시일이 조금 지나다 보니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도원이라 하면 김홍집 씨를 말씀하는 것인지요?”

“하하, 아직 젊으시구려. 잘 기억하고 있소. 지금 외무참판(外務參判) 맡고 있는 김 공이 맞다오.”

나랏일은 번다해지는데, 육조의 체제는 예로부터 율령(律令) 따라 내려오는 것이므로 바꾸기 저어되는바, 대신 판서 아래에 참판을 늘려 그 맡는 바를 나누기로 하였는데, 예조로 말하자면 참판 자리를 둘로 쪼개어 문교(文敎)와 외무 두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늙은이는 이제 나랏일에서는 슬슬 손을 떼고 있으니 더 묻지 않겠소이다.”

물론 운현궁 대원군도 공식적으로는 국사와 연을 끊은 지 수십 년이라지만, 김병국이 하는 말은 (그의 옛 벗 석파와는 달리) 진담이었다. 지난 추거에서 대패한 이래, 서로 잘잘못 따지면서 다투는 판국에 끼어드는 것보다는 이쪽이 낫지 않은가. 언뜻 듣기로 다음 세대의 촉망받는 인재 옥균이 뭔가 노리는 것이 있다 하였으니, 문중을 위해서라면 방해되지 않게 뒷전으로 물러나 은근슬쩍 힘 실어줌이 마땅한 일이기도 하였다.

“예, 배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언뜻 살펴보았는데, 이곳은 다소 한산한 감이 없잖습니다.”

“그야 이곳 서양 풍속이 기물의 화려함을 즐기니 그런 게지. 물론 우리네 문물도 단아한 멋이 있지만, 아무래도 범상한 눈으로 보게 되면 청국이나 일본 문물이 더 마음에 맞지 않겠소? 물론 인천부 공장들이 만든 이런저런 기물도 전시하고 있지만, 정교함으로 따지자면 아직 서투르고, 둘러보았으면 알겠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다 내놓을 법한 기물에 자개 박거나 옻칠하여 조금 멋을 부린 정도요.”

허나 말하는 김병국은 전혀 안타깝거나 서럽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애초에 조선관 꾸릴 때 그런 기물은 그저 한구석에 놓을 뿐, 중심에는 서화나 새로 서양 글로 옮긴 서책 등을 전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인(凡人) 열 명 오가는 것보다 대서 선비 한 명 찾아오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랑은 아니다만, 우리 광통이도국이 차지한 쪽에는 사람이 꽤 몰리고 있다오.”

더구나 성상 하유하시기를, 이왕 광통이도국도 한 자리 차지하게 되었으니 거기서 사람 끌 수단을 마련하면 대서 사람 상하가 모두 즐길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때마침 조선에 전영(특허) 낸 미리견 사람 중 단번에 섭영(사진) 찍어내는 신묘한 방도 고안한 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고답(顧踏, 코닥)이라는 기기창 운영하는 이씨(조지 이스트먼 George Eastman)였는데, 또 그 소식 들은 귀남이 생각하기를 젊은이들 좋아하는 것이 또 사진 찍는 일이라, 필히 지금 미리 선점하면 후일에 소소하게나마 도움 될 듯하였다. 하여 광통이도국이 신작로 놓으면서 전국 누볐으니 나라 안의 절경도 가장 잘 알 것이라 생각하여 제의하기를 조선 산하 명승의 섭영 찍어서 전시하면 그 또한 하나의 멋 아니겠느냐 하였다.

그리하여 이씨의 고답 섭영기 홍보해주는 조건으로, 첫 양산된 물량을 모두 들여와 산천초목의 아름다움을 수묵(水墨) 빛깔로 옮겼으니, 지재가 범상한 듯하면서도 엉뚱한 구석에서 허를 찌르는 성상답게, 내방하여 구경하는 무리가 과연 적지 않았다.

“그렇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비록 지금은 조선을 떠났지만, 만약 제게 다시 외직 나설 기회가 생긴다면 주저없이 한양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인데, 이렇게라도 조선이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반절은 진심이지만, 아마 우방 하나가 급한 저들 조정의 뜻을 대신 전하는 면도 있을 것이었다. 허나 어쨌든 치사하는 말 듣고 기껍게 여기는 마음 드는 것은 사람의 상정.

“마음 같아서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공무가 있어서 이만 작별을 고해야 할 듯합니다. 전람회가 끝날 때까지는 아직 서너 달은 더 남았으니, 언제고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회중시계 한 번 꺼내보고서 자리를 뜨는 베베르였다.

조선관을 떠나 마르스 광장과 예나 교(橋)를 가로질러 마침내 트로카데로(Trocadéro) 궁에 도달하였다. 정원과 안쪽 홀까지도 박람회 전시장의 일부였으니 인파가 적지 않았지만,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사관 관원들이 용케도 그를 찾아서 궁의 한쪽 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를 기다리던 주프랑스대사 모렌하임 남작(Артур П. Моренгейм)이 곧장 물었다.

“카를 이바노비치(베베르), 구경은 잘 하고 왔는가?”

“각하의 배려 덕분에 면밀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우리나 프랑스 쪽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는 없으며, 단순히 전람회 참여만이 목적인 듯합니다.”

“잘 알겠네. 세계의 동향에 관심이 없는 것이든, 가만히 자리 지키다 보면 풍파가 지나갈 것이라 여기든 하는 것이겠군.”

“예, 미리 누군가 귀띔을 해주거나 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래, 자네를 보좌 역으로 보내달라고 특별히 본국에 요청한 보람이 있군그래.”

베베르가 있는 동안 조선이 정말 러시아 편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되, 반대로 영국 쪽으로 아예 옮겨가지도 않았거니와, ‘인민의 의지’ 사건에서도 협력한 바 있었고 또 조선이 유난히 친하게 지내는 나라가 영국에 감정 좋지 않은 미국이라 하였으므로, 본국에서 그에 대한 평은 상당히 좋았다. (근래 ‘친러파’ 개화당이 부쩍 부진하다 하나 다행히 그가 떠난 다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영 불온하게 보이는 세력이 선거에서 압승한 데다가, 파리가 불순한 무리의 모반으로 점령당했을 때 그들 무리를 구명해준 자가 총리가 되기까지 하였으므로, 이번 접촉에 대해 불안하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이 ‘인민의 의지’ 반역도당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서, 차르를 비롯해 적잖은 중신들은 적당한 조건 하에 반체제 세력의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면 오히려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게 되었고,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런 조치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므로, 그 의회의 정당이야 어찌 되었건 조선 자체가 불온한 세력에게 넘어가지는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죽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저들이 러시아의 적과 손을 잡고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임페라토르(차르)의 정당하고 거룩한 통치 자체를 문제삼을 수도 있을 터.

만에 하나 그럴 가능성은 없을지, 이번 전람회에 조선 쪽의 주요 인사가 하나쯤은 찾아올 것이니 미리 확인해보도록 하고자 모렌하임은 베베르을 시켜 조선관 일대를 살피게 하였던 것이었다.

“존경하는 아르투르 파블로비치(모렌하임), 이번 접촉에서 조선 쪽에 제시하실 사안이 무엇인지, 소관은 모두 알지 못합니다만,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말씀드리건대 우리에게 익숙한 유럽의 국제정치는 결코 조선에게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우리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그때야말로 뭔가 엉뚱한 오해가 있을 공산이 큰 것이므로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의견은 십분 숙고하도록 하겠네. 하지만 이 사람 생각에는 꼭 그렇지도 않을 듯하군. 충분히 큰 유인만 제공된다면 저들도 우리 쪽으로 넘어올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와 생각이 다른 것이지, 아예 어리석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러시아의 친우 프랑스가 운영하고 있는 저 ‘세네갈 진보관’만 보아도 알 수 있지.”

모렌하임의 말마따나 프랑스는 ‘세네갈 진보관(進步館)’이라 이름한 전시장을 차려놓고, 그 지역에서 데려온 토인들과 더불어 체스를 두게 한다던가,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시를 읊게 한다던가 하는 등등의 구경거리를 차려놓기도 하고 있었다. 하필 그 자리가 (역시 비공식적으로 참여한) 벨기에의 전시장 바로 옆이었다는 데서는 그 의도가 선히 보여 약간이나마 실소가 나왔지만.

“좌우지간 우선 차르 폐하의 종복으로서, 지시받은 사항은 이행하여야 하네. 때가 거의 되었으니, 이제 슬슬 움직이도록 하세.”

같은 궁 안에 마련된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더니, 문 너머로 아프리카나 동양보다 러시아와의 외교가 중요해지면서 벨로네 백작 대신 새 장관으로 기용된 에밀 플루랑스(Émile Flourens)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 조선 측 담당자 – 외무차관(?) - 김홍집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저의 형은 1871년의 불우한 파란 속에서 작고하셨지요. 불우하게 누명을 쓸 뻔한 코뮌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귀국에 대해서는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번 선거에서 당시 활약하였던 무슈 최가 총리로 당선되기까지 하였잖습니까. 역시 개인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반가운 소식이라 하겠습니다...”

노크와 함께 당도한 사실을 알리니 곧 이야기 끊어지고 문은 열렸다.

“아, 환영합니다. 오시는 길에 불편은 없으셨는지요.”

“물론입니다. 실로 볼거리 풍성하고 개중에도 프랑스와 속국의 문물 창성함이 드러났으니, 경하드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로도 적당히 이어진 인사 뒤에 본론이 나왔다.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직접 이곳까지 찾아오시게 만든 것은, 그만큼 중한 의제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요.”

“장관 말대로입니다. 우리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을 공식화한 이래, 세계 정치의 흐름이 조금씩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선 또한 슬슬 설 자리를 정할 때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저의 예상이 틀리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던 김홍집의 표정이 조금은 어두워졌다.

“귀국이 문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임은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국을 분할하자는, 이런 제의를 안심하고 건넬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알고 보니 김홍집의 예상은 틀려도 한참 틀린 것이었다.

“중국을 분할한다니요? 그 무슨...”

“귀국과 중국은 역사적으로나, 지금 당장의 관계로 보나 긴밀한 사이이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 역시 개인적으로 – 귀국이 이번 제의에 응해줄 것이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중국도 이제 귀국과 마찬가지로 의회를 두게 되었지요. 그런데 귀국의 정당들 중에는 중국 국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세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이야 틀리지 않았다. 인천부에서 공산당이 가르치고 있는 후생(後生)들 중 청국인도 없지 않거니와, 몇 해 전 강남만인소 사건 이후로 청국 향신(鄕紳)들 중 불치하문(不恥下問)하는 심정으로 조선에서 배워올 것 무엇 없겠는가 살피는 이들이 많았으므로.

“여기 베베르 씨에게 들은 얘기로는, 중국 고전에 이런 말이 있다지요? ‘합쳐진 지 오래되면 나뉜다(合久必分)’라고. 그럴 때가 되었을 뿐이지 않겠습니까.”

모렌하임이 옆에서 첨언하였다.

“지금 당장 쳐들어가 중국 정부를 전복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두 나라는 공통적으로, 지금처럼 중국 정부가 자유주의 개혁을 계속할 경우 결국 어느 한 쪽에서 반기를 들 수밖에 없고, 설령 그럴 의사가 없더라도 국제 환경이 그렇게 만들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장 얼마 전 독일 정부의 무기 판매 건을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때는 그저 호들갑에 지나지 않을 이야기였지만, 속속들이, 조선이 모르거나 신경쓰지 않는 동안 세상도 변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티베트를 얻을 수 있다면,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에 구축된 영국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다시 인도를 노릴 길이 열린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공된다면, 그때는 이전의 두 차례 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병력을 직례까지 순식간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좌시할 영국은 아니었다.

그런 실정을 역설하며, 프랑스·러시아 두 나라 사람은 연이어 저들 말을 이어갔다.

“세상은 좁아지고 있고, 점차 강대국들은 어깨를 맞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러시아와 프랑스는 귀국에 공식적으로 동맹을 제의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의 중국 정부가 무너지든, 무너지기 전 최후의 발악으로 조선을 공격하려 하든, 어떻게든 불안정한 사태는 벌어질 수밖에 없고,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 최악의 경우에는 그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결국 결연한 동맹으로서 어느 한 쪽이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수밖에 없지요.”

“귀국이 평화를 사랑한다면, 마땅히 전쟁을 준비해야 할 터. 이렇게 두 세력 간의 균형을 지키는 데 일조하는 것이야말로 세계를 평안하게 하는 길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함께할 수 있는 나라로 여겨주심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나, 쉽게 가부를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은 아니로군요.”

침묵 끝에 내어놓을 수 있는 답은 이뿐이었다.

“그렇지요. 귀국의 입장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러시아와 프랑스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다음에는 영국과 독일이 다시 중국이나 일본에 같은 제의를 할 것입니다.”

그나마 조선의 입장을 이해하는 듯하였던 플루랑스가 한 마디 덧붙였다.

“이런 선택을 강요하는 자리가 된 듯하여 송구스럽군요. 하지만 위로의 말씀은 건넬 수 있을지언정, 현실 자체에 대해 사과할 수는 없는 것이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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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의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는 작중에서 나오는 것처럼 바스티유 습격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영국, 독일, 러시아, 스웨덴, 벨기에 등 유럽의 군주정 국가들은 공식적으로 불참을 표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민간 위주의 참여는 활발히 이루어졌고, 청과 일본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참여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건립 이후 세계 최고(最高)의 건축물 자리를 1930년까지 고수하였던 에펠 탑은, 높이가 300m에 달하였습니다. 물론 척이나 길 대신 리로 높이를 재야 한다는 것은 과장이지만, 고층건물 자체가 드물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높이이기는 하지요. 높이도 높이지만, 건축 당시 ‘흉물’ 논란이 있을 정도로 철골만을 활용하였기 때문에 토목공학 측면에서도 의의가 큰 건물입니다. 졸지에 관료에서 사업가가 된 김병국이 찬탄하는 것도 그런 측면이 있겠습니다.

사진술이 처음 등장하였을 때부터 이를 예술로 다루고자 하는 움직임은 존재하였습니다. 아마 1853년 런던에서 사진협회(현 왕립사진협회)가 창립되었고 이듬해에는 파리에서 프랑스사진협회가 창설되었지요. 이 시기만 하더라도 회화로 그릴 소재를 사진으로 찍어 예술작품으로 만든다는 정도의 관념이 지배적이었기에, 사후 보정이나 상징적·은유적 소재 사용, 모델과 무대장치를 이용한 연출 등이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1880년대 영국을 시작으로 자연 자체를 사진으로 찍는다는 개념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우연찮게 이 흐름에 조선이 편승하는 모양새가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작중에 잠깐 언급되는 이스트먼은 – 디지털 시대에는 점차 낯설어지고 있는 – 필름을 이용한 사진 촬영 및 인화 기법을 발명하였습니다만 한동안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난항을 겪었습니다. 이후 1888년에 겨우 투자자를 구해 지금도 존재하는 이스트먼 코닥社를 세우게 되었지요. 그러니 동양의 한 소국에서나마 지원을 해주는 것은 현 시점의 이스트먼에게는 큰 힘이 될 듯합니다.

원 역사의 1889년 세계박람회의 한 구경거리는 프랑스령으로 편입된 아프리카 식민지의 ‘원주민 생활상’ 전시였지요. ‘전통 마을’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원주민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전시한 것이었는데, 역설적으로 이를 위해서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고 연출자가 원하는 형태를 이해할 만큼 서양 문물에 밝은 이들이 필요했습니다. 작중에서는 반대로 프랑스가 얼마나 현지 개발과 발전에 힘을 쏟고 있는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역시 일방적·제국주의적인 의도가 있습니다만) 반대 형태의 ‘원주민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잠깐 등장한 에밀 플루랑스의 형 귀스타브는 본래 작가였는데, 이후 코뮌에 가담하여 1871년 4월, 코뮌군을 이끌고 베르사유에 주둔한 공화국군을 습격하는 작전을 지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전 파리 코뮌 에피소드에서 잠시 언급되었듯 공격은 실패했고, 귀스타브 역시 도주하던 중 붙잡혀 처형당했지요.

원 역사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보불전쟁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전쟁에 가까운 위기를 여럿 겪었습니다. 이전에 작가의 말에서 지나가듯 언급된 1875년 위기도 그 중 하나였고, 알자스 출신 프랑스인 경관 기욤(빌헬름) 슈네벨레(Guillaume Schnaebelé)가 간첩 혐의로 국경에서 독일 비밀경찰에 체포되면서 촉발된 1887년 ‘슈나벨레 사건’도 비슷한 사례에 속합니다. 당시 대표적인 주전파였던 전쟁성 장관 조르주 불랑제(Georges Ernest Boulanger)는 동원령 선포까지 주장한 바 있었는데, 에밀 플루랑스는 쥘 그레비 대통령과 함께 이를 막아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여전히 열악한 프랑스군의 현실을 알았기 때문이었고, 플루랑스 본인은 대신 영국과의 타협과 러시아와의 연계를 통해 – 이 구상은 훗날 삼국협상으로 이어지는 한 가지 원동력이 됩니다 – 독일을 막아내고자 하였지요. 1884년부터 1897년까지 주프랑스 러시아 대사를 지낸 아르투르 폰 모렌하임은 원 역사에서도 이러한 시도에 응해 협력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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