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새벽에 울리는 종소리 (3)
본가에 급한 사정이 생겼다 하여 급히 재당숙 유중교(柳重敎)와 함께 가정리(柯亭里)로 향한 유인석을 기다리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아, 정말 일이 생겼구나’ 할 만큼 진중한 분위기로 한데 모인 일가 친척들이었다. 얼핏 둘러보니 가정리 바깥의 족친들, 심지어 인근 백양리(白楊里)와 방곡리(蒡谷里)에 사는 이씨 문중 사람들도 몇몇 끼어 있었다.
“그래서 어찌하여야 하겠는가? 이번 일은 문중뿐 아니라 일대의 사류(士類) 마음을 오롯이 모아야만 비로소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다들 한마디씩 거들어들 주게나.”
모임에서 가장 연로한 축에 드는 그의 생부 유중곤(柳重坤)이 서두를 던졌는데, 유중교가 헛기침을 하였다.
“흠흠, 저와 여성(汝聖, 유인석의 字)을 비롯하여 춘천부 동향에 어두운 이들이 몇 있을 터이니, 청컨대 주변 사정을 한 번 더 일러주심이 어떠할지요.”
듣자하니 사정은 이러하였다.
처음 그 신촌향약 포고가 여기저기 붙었을 때는 다들 생각하기를, 춘천 고을에 부족한 것이 없지 않으므로 이로써 개선할 단초를 얻었구나 하였다.
“당연히 가장 시급한 것은 널리 식목(植木)하여 산천의 재보로 삼는 일 아니겠는가? 헌데 여차하면 글 올리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참의대부 김 공에게 연통을 넣었더니 답하기를, 이대로 가면 우리 춘천부가 나라의 베품을 영영 받지 못할 것이라 하지 않던가. 하여 급히 부내에 사람 보내어 여론 알아보았더니 난장(亂場)도 그런 난장이 없었네.”
같은 춘천 안에서도 동리 생긴 지 오래된 곳 일대의 산은 중턱 아래로는 헐벗었는데, 반면 동면 정족리(鼎足里)처럼 근래 새로 생긴 마을은 아직 시목(柴木, 땔나무) 마련에 하등 어려움이 없었다. 허나 그런 (근본 없는) 마을에 사는 이들이라면 대개 신세 고쳐보고자 야심차게 새 터전 일구는 이들일 터인즉,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꿔주겠다는 데 훨씬 혹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하니 종두법 배운 의생 보내달라는 청을 넣자는 이들도 적잖다지 않은가.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요, 나라가 좁은 것도 아닐진대 손 귀한 집에서 알아서 의생 찾아가면 될 것을... 쯧쯧. 심계의 모자람이 이와 같네.”
다들 신보는 읽으니 종두가 무엇인지는 알기 마련인데,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본래 소에서 나온 것을 집어넣든,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을 집어넣든 수지부모(受之父母)한 몸에 엉뚱한 기운 들어옴은 매한가지라, 곧장 민간의 정설로 퍼지기를 이 시술을 잘못 받으면 소와 같이 우둔해진다 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아무에게서나 술수 베품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솜씨 좋게 놓는 이라면 대개 도성이나 인천부에 있을 것이요, 그런 이들을 찾아가는 것도 큰일, 그 공비 마련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딱히 빈궁함이란 것을 겪지 않아본 이 일대 사류의 자제들로서는, 아무리 인술(仁術)이라지만 역병으로 제사 끊어지는 일 막아주는 큰 공인데 값을 어찌 가볍게 치르겠느냐 하였지만.
“헌데 그런 부족한 무리가 소란을 일으키게 되면, 위에서 살피기에는 우리 춘천도호부 민심이 합일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청하는 바가 시급하지 않다 여길 것이란 말일세.”
마음 같아서야 그 무엄한 무리에게 혼쭐을 내주고 싶다지만 – 예전에는 종종 그러기도 했다 하지 않은가 – 지금은 그렇게 부릴 수 있는 노복도 없는 데다가, 서슬 퍼런 공안서가 또 있었다.
“그러니 진퇴유곡이라 함이 가당한 실정일세.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그렇다고 아예 속된 말로 산통 깨버리게 되면, 그때는 또 누가 가장 서러운 지경에 처하는가 하면 결국 일대에 뿌리내린 사족들이었다. 예컨대 이곳 춘천부는 공론 모으지 못하여 나라의 도움도 못 받게 되었는데, 사풍(士風) 약한 다른 고을에서는 곧장 마음이 모여서 지극한 은총을 입게 되었다 해보자. 세인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부민들을 탓하겠는가, 이를테면 이곳 가정리에 모여 있는 유씨 문중 같은 이들을 탓하겠는가?
“반상(班常)의 분별이 이리 흐트러졌으니 돌이키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본디 향약이라 함은 유현(儒賢)이 세우신 제도일진대, 그 기풍을 어지럽게 만드니 어찌 온당하다 하겠습니까.”
혀 차는 유중곤을 필두로 어르신들의 한탄이 이어졌다.
하지만 마룻바닥 뚫을 만큼 한탄을 한들 꼬인 매듭이 절로 풀리겠는가? 그쯤 되어 얼추 돌아가는 사정 파악한 유인석이 입을 열었다.
“이르신 말씀이 모두 옳으나, 사세 여차하게 되었은즉 부득불 그런 무리를 타이르고 또 달래가며, 우리 원하는 바대로 마음 모으도록 끌어와야 할 것입니다. 우선은 저들 뜻도 조금 들어주면서, 장차 온후한 풍속이 다시 뿌리내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유인석 그가 가르치는 대진국(로마) 역사에도 옛적에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싶었다. 벌열 거족의 무리와 여항 민려(民黎) 무리가 서로 대치하여, 결국 백성들이 모두 도읍을 떠나 산 위로 올라가 버렸다 하였던가. 물론 대진 귀족이라 한들 그때는 학문 없는 오랑캐였으니 어찌 함부로 문중 어르신에 비하겠냐만, 백성 무리와 자칫 척을 지게 되면 곤란하게 될 것은 비슷하였다.
“저들의 바라는 바를 다는 들어주지 않더라도, 마땅히 일정한 만큼은 또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종두법 같은 것으로 말하자면, 부내의 모든 백성에게 놓는 데는 적지 않게 비용이 들지만 인천부에서 의생 하나를 데려와 의원 열게 하는 것은 우리 춘천부의 사족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태면 또 못할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의 습속이란 대개 선한 심성에 막힌 곳이 많아, 하나를 베풀면 열을 내놓으라 하기 마련일세.”
“그러니 향약의 제도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을 안에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사안이 굳이 헤아려보면 적지 않습니다. 개중 재화를 요하는 일에 우리가 힘을 써 주었으니, 사람을 써야 하는 일에는 너희 민서(서민)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 이렇게 이르고 타이르면 모두에게 좋은 쪽으로 풍속을 굳힐 수 있을 듯합니다.”
가만히 듣던 유중교도 한 마디 덧붙였다.
“거기서 그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학풍을 크게 일으키면 어르신께서 이르신 거칠고 비루한 습속이 절로 고쳐지지 않겠습니까? 가세 어려운 백성의 자제 중 총명한 이들을 가려, 서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면, 같은 사람으로서 어찌 그 은혜를 잊겠습니까? 이로써 비로소 사류를 절로 존숭하는 기풍이 일어나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반신반의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대학원에서 세상 문물 이것저것 배우고 가르치는 이들이 이렇게 발의하기도 하였거니와, 마땅히 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인지라 결국 한 번 해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런던 머물 때 그의 장인이 하도 면박을 주어서 단발을 하였던 전봉준은 – 장인어른의 수염을 생각하면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말이 동양에 있다고 쏘아붙이고 싶어지기는 하였지만 – 돌아온 뒤에도 도통 상투를 틀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그의 안사람 엘러노어 때문이었다. 머릿니 많으면 건강하다는 속설이 조선 땅에 있다고 하루는 농담 삼아 이야기했더니 정색하면서, 기르는 것은 남편 하나로 충분하니 인천 앞바다 파도에 머리 감고 싶지 않으면 처신 잘 하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런던으로 떠나기 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 적어도 인천부나 도성에서는 – 단발하고 다니는 사내가 늘었다는 점이었다. 청국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이발하는 사람들도 함께 늘어서, 서양인 시늉에 재미 들린 철부지들이 여차하면 망건으로 쓸어올려 상투 시늉은 낼 수 있을 만큼 절묘한 길이로 머리를 자르곤 하였다. 정작 단발하고 다니면 편리할 뱃사람이나 공장 일꾼들은 지금도 편하다는 듯 상투를 고수하곤 하였건만.
“그래도 놀라시지 않으니 의외인걸요.”
“반절은 사문화되었다지만, 어쨌건 동삼성 오갈 때 교인(敎人) 아니면 체발(剃髮, 삭발)하여야 한다는 청국의 국법이 아직 남아는 있잖소. 아마 의주 같은 곳에는 단발한 이들이 훨씬 많을 게요.”
새로 취임한 총리의 초대를 받아 예상보다 훨씬 검소한 그의 자택에 방문한 엘러노어의 물음에, 뭘 그런 것을 묻냐는 듯 태연한 답이 돌아왔다.
전봉준 보기에 더 의외인 것은, 천생 선비인 줄 알았던 최익현이, 인천부에서 이곳 도성까지 오는 길에 마주친 조선인 중 구 할과는 달리 부부가 함께 나타난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하여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하하, 코뮌에서는 여인들이 장총 들고서 싸움터 나가는 것도 보았는데 이 정도야 하등 괴이하게 여길 구석도 없소. 더구나 이름 높은 마르크스 선생의 여식이 어찌 규방(閨房) 지키고 있겠소?”
아직 이십 년도 채 되지 않은 코뮌의 일을 다시 거론하니 문득, 이 사람이야말로 지금 조선에서 전봉준 그 다음으로 ‘진짜’ 공산당에 가까운 이라는 데 전-마르크스 두 사람의 생각이 닿았다. 한편으로는 반갑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 작당하는 속내를 같은 편의 대원군이나 김가진보다도 더 잘 꿰뚫어볼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그들 부부가 공산당의 모사 비슷한 자리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많아도 대원군 생각과는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것까지 아는 이는 얼마 없을 터였다. 물론 어쩌면 엘러노어보다도 소위 ‘극단주의자’들과 많이 마주해보았을 최익현으로서는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지만.
“주상 전하께서는 만민공산당이 장래에 큰 우환이 될 것이라 여기시어 근심으로 삼고 계시오.”
그 바뀌는 기색을 읽었는지, 최익현도 곧장 낯빛 바꾸고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희 공산당으로 말하자면...”
“운현궁이 있지. 알고 있소.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요, 또 세상 일이라는 것이 시작할 때는 이론과 실익이 모두 온당하나 세월이 지나면 폐단 쌓이기 마련. 성총(聖聰)으로 헤아리시어 우려하시는 바가 과연 머나먼 훗날의 이야기인가, 그것을 직접 묻고 또 듣고자 이리 두 사람을 부른 것이외다.
당장 거기에 걸리는 사안이 하나 있지 않소? 적어도 앞으로 네 해는 함께 나라 이끌어갈 사이이니, 기탄없이 말해보도록 하시오. 이 사람도 그리하면 생각하는 바를 허심하게 털어놓을 테니.”
아마 최익현이 지목하는 바는 운현궁에도 진솔하게 의도를 털어놓지 않고 진행하고 있는 – 설령 모두 알렸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것이었다 – 계책일 것이었다.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면 또 듣게 되는 바가 있다오. 인천부에서 그대 부부가 가르친 이들이 다시 팔도 군현 중 이번에 새로 향약을 꾸린 고을마다 찾아가 이런저런 말로써 무리를 모으고 있다던데, 틀린 말은 아니지 않소이까.”
“말씀하신 대로 국정을 함께하게 된 사이이니, 감추지 않겠습니다. 이제 향약이 널리 생겼으니, 우리 공산당이 참의원에만 머물지 않고 전국으로 퍼질 때도 되었지요. 이곳 조선뿐 아니라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당장 고향으로 돌아간 가타야마로부터 들려오는 말도 그러하였다. 언론계에 투신한 사이온지 긴모치를 대신하여 ‘일본공산당’의 실질적인 총책을 맡고 있는 그의 말로는, 애국공당의 그림자에서 힘을 숨기면서 전국에서 지지자를 모은 뒤 메이지 30년(1897) -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조슈 번 사람들의 결연한 반대로 겨우 미루고 미루었다 - 으로 예정된 총선거에서 떨치고 일어나는 것이 목표라 하였다.
“이 사람도 모르지 않소. 허나 벌써 그 당원으로 들어온 이에게 단발을 권유한다던지 하여, 벌써 고을의 문교(文敎)를 흐리고 있다는 몇몇 수령들의 보고가 들어오고 있소. 노리는 바는 어디에 있소이까.”
“아버지의 글을 읽으셨으니 걱정하시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옛 코뮌처럼 반란까지 일으킬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역적 모의라고 하면 몸서리부터 쳐지는 두 사람에게 신경쓰지 않고서 엘러노어가 먼저 말했다. 몸 추스른 전봉준의 첨언이 뒤따랐다.
“안사람 말대로입니다. 물론 가진 것 부족한 백성들을 한데 모으는 데 뜻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만, 어디까지나 한 번 꾸려진 향약 내에서 힘을 결집케 하려는 것이 노리는 바입니다. 고을에 뿌리 내린 사족들이야, 이미 이런저런 모임으로 서로 다툴지언정 쉽게 합심할 수도 있는데, 동리의 평범한 백성들은 그렇지 않잖습니까.”
“저는 완전히 동의하지 않지만, 이 사람 표현을 빌리면 ‘제도 내에서의 개혁’ 노선이지요.”
대원군이야, 오경석 바라보고 공산당을 지지하는 향리들만으로는 사족들에게 대항할 수 없으니 근왕하는 백성들을 크게 모으자 하는 말에 넘어갔지만, 최익현에게는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훤히 보일 것이었다.
“허, 그리하여 지금 참의원에서 한 것처럼 전국 군현에서 위세를 떨치고, 연이어 집정하겠다, 이것이오?”
“그렇습니다. 제 장인 되시는 마 선생께서 빈부에 따라 국인(國人)의 뜻 갈리고 마침내 쟁투에 이르게 되는 소이(所以)를 밝히셨는바, 이왕 다툴 수밖에 없다면 창칼이 아닌 도의로써, 흉참한 일이 아니라 보국하는 상언(上言)으로써 다투어 뭇 문물을 더 좋게 바꾸어나가고자 하는 것이 아직 모두 정리되지 않은 저의 주의(主義)입니다.”
“잘 알겠소.”
“당연히 동의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물론.”
당초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실망도 없었다. 허나 어찌 되었건, 이미 시작된 신촌향약이요, 벌써 고을 곳곳마다 의정의 틀이 갖추어지고 있었으니, 이 대업이 오래 계속될수록 그에 힘입어 빈부와 반상의 다툼은 더욱 가열차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 대세는 공산당에게 있음을 부부 간에 의심하지 않았다.
“그대들은 마 선생의 학설을 따르고 있으니, 장차 다툼이 계속될 것이요, 설령 한 사람이 이를 막고자 하여도 막을 수는 없다 생각하겠지. 그렇지 않소? 하지만 이 사람 생각에는 그러한 다툼을 모면할 방도가 또 있소이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군자는 가난하더라도 즐거워하며, 부자이더라도 예를 좋아하는 (貧而樂富而好禮) 것이라고 성인께서는 이르셨소. 만백성이 이와 같이 된다면, 아무리 빈부가 갈린다 한들 국론마저 갈릴 리 있겠소이까. 그때가 되면 비로소 모든 사람이 어떤 원한도, 두려움도 없이 저의 원하는 뜻을 펴게 될 터이니 이것이 내 생각하는 자유이외다.
그대들이 공산당을 나라 안팎에 널리 펼치는 것이 어떤 뜻에서인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 방편만을 취해 우리 자유당도 하고자 하는 바를 널리 행하고자 하오.”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다 뜬금없이 『논어』 구절이 나왔으니, 과연 이것이 어느 편에 이로운 궁리인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흩어졌던 나라 안의 선비들이 다시 뭉쳐, 산림을 꾸리는 데서 머물지 않고 이제 더 불릴 궁리를 해야겠지. 그럴 때도 되었지 않소.”
결의 다지는 혼잣말에 가깝게 최익현이 읊조렸다.
“그러면 경쟁이 되겠군요. 누가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더 끌어오는가의 경쟁.”
“그리 될 테요. 선비 아닌 백성들을 선비로 만드는 것이 먼저인가, 그대들이 말하는 그 프롤레타리아로서 뭉치는 것이 먼저인가. 이왕 오월(吳越) 사이에 같은 배 타게 되었은즉, 대서에서 쓰는 말대로 신사다운 결투를 벌임이 가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성상께는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소. 비록 장래에 다툼의 연고가 될 소지가 많지만, 우선은 앞날의 아직 모르는 해악보다 지금의 당장 이로운 것을 취하면서 후일을 대비함이 가하겠다고.”
어찌 되었건 향약은 크나큰 문제 없이 첫 발을 내딛었고, 대원군이 꺼렸던 것과는 달리 나랏돈이 엉뚱한 구석으로 새는 일도 일단은 막을 수 있었으며, 나아가 지금 공산당이 하려는 것처럼 자유당도 우선 진서 통하는 곳에는 – 당장 『청구시무』만 하더라도 안인수에게 손 벌릴 것도 없이 자신이 나서면 따라올 것이었다 – 저들 하는 바를 알릴 것이므로 다른 나라가 군비에 신경 쓰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 계책 이룰 단초를 얻은 셈이었다.
그러니 ‘신사다운 결투’에 최익현이 나서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으랴.
성상 말씀마따나 새벽 종이 울리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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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장 작가의 말에서 거론하였던 것처럼 향약에는 지방자치의 성격이 있습니다만, 그와 더불어 재지사족에게 사적 제재의 권한을 부여하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즉 ‘과실상규(過失相規)’의 명목으로 유향소나 향회에 낄 수 없는 향리나 일반 백성을 제재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일례로 이황의 『예안향약』에서도 하벌(下罰)에 속하기는 하나 ‘원악(元惡)’한 향리, 폭리를 취하는 방납업자, 양반가 자제를 능멸하는 일반 백성 등을 벌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같은 향약에서 이황은 상민(“鄕人”)들도 말석에 나이 순으로 앉을 수 있어야 함을 명시하였으나, 제자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실제로 시행된 다른 향약에서도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류가 아니면 함께하지 않음(非士類則否)’을 명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우성 1990, “퇴계선생의 예안향약과 <향좌>문제.” <퇴계학논집> 68).
실제로 향약 시행보다 민생이 우선되어야 하며, 자칫 왕권이 약화될 수 있다는 논리 (본심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깁니다)로 선조대에 향약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던 유희춘(柳希春)은, 향약이 지닌 사회질서 유지· 강화의 측면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이 점만은 권장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작중에서는 (원 역사의 새마을운동과 비슷하게) 경쟁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부득불 ‘아랫사람’들에게 양보를 해주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최익현의 의도대로 흘러갈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조선시대 복식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상투를 하더라도 그 모양과 크기를 유지하기 위해 머리카락 손질을 하였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론상 잘라낸 머리카락을 정중히 처리하기만 한다면, 단발이 유교적 관점에서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언정 죽음을 불사하고 반대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반대로 상투를 지나치게 가꾸는 것 역시 좋지 못한 풍속으로 간주되고는 하였는데, 『후한서』에 나오는 ‘도성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니 지방에서는 한 척이나 높였다(城中好高髻 四方高一尺)’ 하는 구절이 사치스러운 풍속을 경계하는 뜻으로 상투적으로 사용된 것은 이를 방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내 머리를 쳐라’ 하는 완강한 반대여론이 일어난 것은, 무엇보다 단발의 시행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컸습니다. 스스로 자르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일인데, 이를 같은 양반도 아닌 순검이나 아전 등이 강제로 시행하려 하니 체통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었지요. 더구나 1895년 단발령이 하필 양력으로의 전환과 함께 발표된 것도 저항감을 키웠는데, 기존에 쓰던 음력은 단순한 음력이 아니라 전통 천하질서 하에서 천자가 해마다 내리는 달력으로서 조선이 천하질서의 일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소중화’를 오랑캐로 만들고자 단발령을 단행한다는 것이 적어도 당대 선비들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주장이었던 셈이지요.
반면 작중에서는 긴 시간에 걸쳐서 자발적으로 풍속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만주 땅에 들어갈 때 변발 대신 단발을 선택하는 전례가 시행된 지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심리적 저항감이 비교적 약한 상태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할 수는 있다’ 정도이지 ‘나도 하겠다’는 아닐 것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