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새벽에 울리는 종소리 (2)
대원군의 아내 민씨가 천주교에 입교만 아니 하였을 뿐 실상 신자임은 운현궁 식구라면 모두 알음알음하게 아는 바였다. 허나 정작 그 지아비 되는 대원군 자신은 큰 시주로 환국 이후에 후원하여 중건케 한 도성 근방 절간만 세 곳이라.
부부유별이라지만 믿는 바까지 다르므로 퍽 이상한 것이었는데 대원군은 종종 농으로 말하기를,
‘임자는 나를 위해 기복하고 나는 임자 위해 공덕 쌓으면 둘 중 누가 맞든 극락왕생하지 않겠소?’
하였다.
그런데 오늘 노안당에서 객 맞이하면서 보니 세상사 돌고 도는 것이, 결국 석교(釋敎, 불교)의 이론이 맞지 않은가 싶었다.
“어찌 그리하지 않겠소. 세인들이 무어라 떠들든 이 사람은 적어도 겉으로는 권세 내려놓은 것이 벌써 스무 해를 넘었는데, 이제 그대가 이리 찾아와 나랏일을 묻고 있으니.”
처음 이항로와 더불어 여론을 몰아가려 할 때 그의 제자 중 면암이라는 자 있다 들었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 그 사람이 나라의 재상으로 우뚝 서서는, 저에게 당당히 찾아와 삼정승 –아니, 본인은 정해졌으니 ‘이정승’ - 육판서 벼슬자리 주인 정하는 일을 묻고 있었다.
이제 젊다고는 못해줄 연배인 데다가, 명색이 (조정에서는) 일인지하의 사람일진대 하게체로 하대할 수는 없는 노릇.
“그나저나 개각(改閣)이라 하였소? 그대가 만든 말이오?”
“옮긴 것은 이 사람이되 본래 대서에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비근하게는 영길리에서 재상 구씨가 권병 내려놓고 소배후(蘇裵候) 가씨(賈氏, 솔즈베리 후작)가 집정하면서 행한 바 있습니다.”
국제에 이르기를 문무백관의 진퇴는 모두 지존 한 사람의 일이되, 실지로는 이를 아래에 맡기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최익현 그가 사직하기 전 김병시와 합의하여 함께 아뢰기를, 누가 국인(國人)의 선택을 받든 그 마음에 맞추어 육조 판서의 인선을 정하고자 한다 하였더니 기꺼이 윤허해주시는 것이었다.
헌데 개함례 하고 나서 보니, 처음 성균관 전적(典籍) 하던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하였던 높은 벼슬 얻은 것은 (솔직히) 좋지만 막상 참의원 과반은 공산당이 가져간 것이라, 설령 마음대로 판서를 정한다 하더라도 미리 운현궁에 연통 넣어두지 않으면 장차 후환이 될 듯하였다.
“이 늙은이의 벗들이 꾸린 당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번 추거에서 뭇 백성의 과분한 기대를 받은 것에 지나지 않거늘, 그대가 직접 이리 찾아오니 고맙고 또 부끄러울 따름이구려.”
내일모레 고희라지만 눈썰미 어디 가지 않은 대원군이 공연한 겸양으로 속셈을 감추었다.
대원군이 처음 두 사람 합의한 것을 들었을 때 걱정하기로는, 그 진퇴의 기일이 정해져 있을 뿐 국법으로 당당히 권신을 뽑는 것과 같이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지금처럼 참의원의 의향을 미리 묻는 것이 계속되어 관행이 된다면, 그 또한 처음 국권을 나누어 세운 뜻과 상통하니 외려 더 좋은 일이었다.
하여 재차 청해 최익현이 생각하는 판서 인선을 물었더니, 나오는 답이 의외였다.
“장동 김문과 그리 신의 돈독한 줄은 미처 몰랐소. 대저 권세 나누어주는 것은 기반을 다진 뒤에야 하는 일인데, 벌써 그렇게 내어주어서야 되겠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공조판서 자리에 김병시 앉히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나라의 곳간 다루게 되면서 목소리 커진 호조에서, 비록 근래 쓰임새 늘어났다지만 여전히 육조의 말단 취급인 공조로 옮기는 셈이므로 따지자면 좌천이겠지만, 아예 야인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자리 내어준다 하니 반발에 앞서 괴이쩍지 않은가.
“성상께서 하유하시기를 근시일 내 큰 사업을 일으키고자 한다 하시었으니, 무릇 일의 성패는 무엇보다 사람을 얻고 얻지 못함에 달려 있습니다. 신하된 자로서 어찌 그 뜻을 돕지 않겠습니까?”
“사업이라? 금시초문이구려.”
“나라의 가장 궁벽한 동리까지 풍속을 일신하는 대업입니다. 이르시기를 이미 있는 마을을 마치 새 것과 같이 하라 하셨으니, 그 친민(親民, 백성을 새롭게 함)이 정학의 도와 한 끗 어긋남이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천성이 사족(士族)에는 맞지 않는 – 애시당초 선원(璿源, 왕실의 계보)을 거슬러 올라가면 무반 아니던가 – 대원군 보기에 최익현은 천성이 사족인데, 그런 무리의 특성이라 하면 저에게 이로운 것 위에 도의를 뒤집어씌우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도의 위에 이로움을 억지로 뒤집어씌우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찬동해주면서 저의 얻어낼 바 받아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장동 김문이든 개화당이든 이 사람과는 좋은 교분만 다지지는 않은 사이라지만, 무릇 국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이곳 운현궁 왕래하는 이들에게 청하여 그대에게 힘 더해주라고 청하지 못할 것만은 또 아니외다. 헌데 무슨 일이기에 그 자를 원하는 것이오?”
잠시 고민하던 최익현이 주상께서 이르신 이 ‘신촌(新村)’ 대업의 어려운 상황을 마침내 꺼내었다.
새마을운동이라 하면, 새벽 종 울리고 새 아침 밝았다 하는 정도가 귀남이 아는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소싯적 소학교 다닐 때라면 모를까 상경한 지금은 흙내음 맡기도 어려운 상황이요, 무슨 중한 일이 있지도 않을진대 신문 같은 것을 보면서 무슨 세세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확인할 그런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떠오르는 것은 끽해야 단편으로 떠오르는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것만 하여도 언뜻 생각하기에는 족히 방안이 될 듯하였다. 당장 기와집에서 이밥 먹으면서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지내면 그것만으로도 일생의 한 복이 아니겠는가?
“우선 발상하기로는 이와 같소. 나라의 백성으로 가산 가멸차지 못한 이들은 대개 초가에서 기거하는 실정일 터인데, 알다시피 한두 해에 한 번씩 바꾸는 데 품이 적지 않게 들어가오. 그 공으로 밭일을 하든, 학업을 하든 하면 필히 공효 있을 것이오.”
“근래 광통이도국에서 양회로써 기와를 굽는 방도를 창안하여 이미 쓰고 있다고 하니, 전국에 널리 퍼뜨리면 이르신 대로 백성의 이로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처음 개함례 할 때 하였던 발상을, 다음 기무회의에서 곧장 발의하였는데, 재동 사랑방에서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은바 김윤식과 김홍집, 어윤중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찬동하는 말을 더하였다.
“또 생각해보니, 비록 나라의 전정(田政)을 개혁한 이래 화전으로 생업을 삼는 이들이 줄었다지만 천기(天氣) 한랭할 때면 대개 땔나무를 쓰기 마련이므로 나라의 명산들은 기슭부터 마루까지 헐벗기 마련이오. 식목(植木)하는 기풍을 널리 진흥함이 어떻겠소?”
“목재라 함은 한 번 심으면 다시 자라나는데 그 쓰임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허다하므로, 한 번 캐어 쓰면 사라지는 광산의 석탄보다 훨씬 이롭습니다. 성상의 헤아리심이 참으로 신묘합니다.”
“또한 예로부터 호환과 역병, 병란(兵亂)을 가장 무서운 재액으로 일컫는데, 그 중 호환은 연병법으로 얻은 장사로 하여금 착호(捉虎)에 힘써 적잖이 해소되었고, 병란으로 말하자면 역시 병비에 힘쓰고 있으니 적어도 고식(姑息)의 지경에는 이르렀소. 다만 역병만은 비록 양약이 들어왔다고는 하나 모두 퍼지지는 않았는데, 혹 방편이 있겠소?”
“무릇 역병 중에서도 가장 폐해가 큰 것으로 두역(痘疫, 천연두)이 있습니다. 이를 방비하는 묘책으로 종두(種痘)의 기법(奇法)이 있는데, 그 원리는 알아도 실제로 시행하는 재주가 부족하여 서책 안에 머물던 것을 십수 년 전 인천부 의생 박영선(朴永善)이라는 자가 서사인 두남(앙리 뒤낭)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방법을 창안하였습니다.
참으로 편리한 것으로 이미 나라의 행상이나 선인(船人) 등은 널리 쓰고 있는데, 정작 두역의 해악이 극심하게 나타나는 열읍(列邑) 벽촌(僻村)의 백성들은 그러한 효용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장려하면 설령 두창이 처음 퍼지더라도 다른 이에게 옮기지 않을 것이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음사(淫祀)에 의지하는 폐단도 함께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르고 답하기를 마치 베틀의 북이 오가듯 하는데, 특히 마지막에서는 툭하면 저의 스승 자랑을 하는 참의 지석영(池錫永) - 나이도 젊은 사람이 말은 어찌 그리 많던가 - 때문에 곰보자국 대신 귓구멍 위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던 김홍집이 길게 첨언하였다.
과연 이번 일을 성사케 하려면 적어도 저 셋은 판서로 데려가야겠거려니 생각하면서, 이제 지금껏 나온 방안을 들고 가서 공산당과 교섭할 생각을 최익현이 품고 있는데,
“교유하시는 방책이 참으로 지근하면서도 또 백성의 실리를 빠짐없이 돋우는 것이므로 미욱한 신은 찬탄치 않을 수 없습니다. 허나 전후의 사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방책은 모두 나라가 궁핍한 지경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데 그 뜻이 있을진대, 하나만 택하여도 국용(國用)의 쓰임을 크게 요할 방책이 여럿이므로 다소의 가감이 있더라도 자칫 재정의 어려움을 초래할까 두렵사옵나이다.”
그때 무엄함을 무릅쓰고 어윤중이 발언을 청하였다.
“지금 나라 사정이 그리 궁색하오?”
“나날이 국운이 창성하고 있으니, 하고자 한다면 못할 바는 아니오나, 또 이르시기를 정예한 기술을 갈고 닦아 훗날 능히 사방을 제압할 수 있는 병기를 개발하라 하시었습니다. 이를 위하여는 지금과 같이 방적으로 업을 삼는 경지를 넘어, 장차 스스로 양이의 것에 비할 수 있는 대선(大船)을 건조하고 거포(巨砲)를 찍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이 역시 지금 당장 돌아오는 이익 없이 여러 해에 걸쳐 수용(비용)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난 ‘강철과 피죽’ 소동때 귀남 본인이 내어놓았던 방안 두 가지가 서로 상충하는 셈이었다.
“하면 일전에 하였던 것처럼 영국이나 법국으로부터 긴요한 자금을 융통받거나, 아라사의 그 은행에 청하면 되지 않겠소?”
그랬더니 이번에는 김홍집이 치고 나왔다.
“감히 아뢰옵건대, 작금의 구주 정세가 결코 평온치 않아 마치 얇은 얼음 위를 밟는 것과 같습니다. 옛 계유년(1873)에 우리가 영국 정승 구씨의 도움을 받은 일로 인하여 아라사의 의심을 산 일을 상고하시옵소서.”
하면서 세세히 설명하기를, 덕의지국의 새 임금이 널리 신정(新政) 베풀 뜻을 표하고, 그 동쪽 아라사국은 저의 서쪽 변경에 있는 속민(屬民)이 이로써 작란할까 크게 두려워하여 더욱 법국과 힘을 합하고 있는 시국이며, 다시 영국은 덕국에 힘을 빌려주고 있다 운운하면서 그 복잡다단한 합종연횡(合從連橫)을 최대한 간략하게 – 그러나 귀남이 모두 이해할 만큼 소략하지는 않았다 – 짚었다.
“결국 이로운 방책을 지금 모두 택할 수는 없는 것이구려. 어찌 하여야 하겠소?”
“그래서 이 사람 심기 불편케 할 것을 알면서 공조의 우두머리 건을 가져온 것이었군. 그렇지 않소?”
입에는 술내, 눈에는 술지게미 나올 만큼 만취한 장돌뱅이일지라도 저의 물건 셈은 칼날같이 하는 법. 아무리 대원군이 연로하였다 한들 어찌 최익현 정도의 머리 쓰는 것을 못 따라갈까. 최익현 생각에, 똑같은 능구렁이 심사일지라도 적어도 대갓집 업(구렁이) 정도는 될 만큼 사람 사정 알아주는 것이 김병시라, 그런 이를 광통이도국 상대하는 거간으로 삼으면 조금이나마 헐하게 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 듯하였던 것이다.
“실로 정확하십니다.”
“허나 아니 될 일이오. 이미 나라에서 신작로와 법궁 중수의 일을 맡긴 이래로 광통이도국이 과하게 성대해졌는데, 이제 백성의 피와 같은 부세를 걷어 다시 그들에게 줄 수는 없소. 더구나 듣자하니 각읍의 소소한 동리까지 모두 건드리는 사업일진대, 이 일에 그들이 간여하게 되면 필히 가만히 양회만 납품하지 않고 반드시 향리와 촌로들을 상대하여 무언가 수작을 부릴 것이외다.
적어도, 나와 교분이 있는 만민공산당의 뜻있는 이들은 그리할 테지.”
당장 이번 추거 소동의 발단도 광양 고을 참의대부가 개화당과 합심하여 부정인 듯 부정 아닌 짓을 하다가 탈이 난 것 아니던가.
고심하던 최익현이 촌음의 망설임 끝에 답했다.
“제가 듣기로, 공산당 녹사로 있는 역매(오경석)로 말하면 그 일을 처리함에 맺고 끊음이 단호하여 가히 큰일을 맡길 만하다 하였습니다. 예컨대, 형판 정도라면 어떻겠습니까?”
예전처럼 초야의 맑은 선비 자처하던 시절이었더라면 입에 쉬이 담지 못할 거래였다. 대원군도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사정 이해하는 것과 거래 응하는 것은 별개의 일.
“내 연로하여 예전만큼 에둘러 말하기에는 심성이 고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부디 양해해주시구려. 물론 그대 이른 것처럼 역매도 빼어난 인재지. 허나 지금도 이미 참의원에서 공산당의 근왕하는 대부들이 과반하고 있거늘, 당상(堂上)의 반열에서 우리 당을 찾아오기만 기다려도 될 일 아니겠소?
흥정하는 일은 사류의 자제로서 즐겨 하면 아니 될 것이련만, 그래도 부득불 거론컨대 지금 그대 이른 바로는 과히 부족하다 하겠소.”
다시 고심하던 최익현의 머릿속에 불현 듯 뭔가 번뜩하였는지 곧 화색이 완연하였다. (저의 아들과 가까이 지내더니 저런 버릇이 닮은 것인가 실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일 이번 일로 국고를 최대한 적게 헐고, 광통이도국에 신세를 져야 할 일에 임하여는 오직 백성들이 스스로 필요한 만큼만 사들이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허, 그 정도라면 가하다 하겠소. 허나 내게 가한 것이지, 정말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서 가(可)한가 하면 그건 아니라고 보오.
내 팔도 유람한 것이 어언 서른 해 전이므로 자잘한 여항의 사정에는 밝다고 할 수 없지만, 내 대신 사정 알아봐 주는 이 말로는 뭇 촌락이 스스로 단합하지 못하게 된 것이 벌써 스무 해 남짓이라 하오. 지금 그대 이르는 방책은 동리 안에서 귀천과 상하(上下)가 합심하여야 비로소 이룰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이 되겠소?”
사실 대원군의 책임도 있는 것이라, 만일 대원군이 조금 더 염치 있거나 얼굴 얇은 이었다면 벌써 민망함이 드러났을 터였다.
서원 난립할 무렵 익문사를 시켜, 모 진사가 실은 김문에 초피(貂皮) 넣어 벼슬 얻었다더라, 어디 고을 어느 문중은 산송(山訟)에서 이기려 하옥대감 애첩에게 전답 몇 마지기를 바쳤다더라 하는 세세한 사정을 여기저기 흩뿌린 대원군이다. 향전(鄕戰)이니 무어니 하는 것도 결국 진영이 있어야 싸움이 붙는 법.
나라가 지금까지 급격한 개화의 길을 밟아왔지만 끽해야 고지식한 서생 몇몇이나 반기를 들고 나머지는 조용히 있는 듯하였던 데는 또 그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공안서 통해 듣는 나라 안 사정을 정리하면, 만백성이 스스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은 있을지언정 저들끼리 작당하여 무언가 할 생각은 쉽게 하지 못하고, 하물며 당장 어깨 부대끼면서 으르렁대는 사이인 이웃끼리는 더욱 어려운 실정. 설령 은원 없는 사이라 할지라도 저들 동리에 무엇이 시급하냐 물으면 저의 생업이나 부쳐먹는 토지의 입지에 따라 의견 갈리고 다툼 일어날 것이었다.
“상께서 이르시기를, 이번 사업의 제호(題號)를 ‘신촌(新村)’으로 정하자 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나라 안에 향약(鄕約)의 제도가 있었으니, 이로써 새 마을을 이루는 요결을 삼을 만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뒤이어 털어놓는 방법을 대원군이 곰곰이 짚어보니, 마치 그 옛날 진문공(晉文公)이 군자의 도리 지키면서 초나라 군대를 물리친 것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신촌향약(新村鄕約)을 널리 시행하겠다는 포고가 뭇 신보와 관헌의 공고로써 팔도에 퍼지게 되었는데, 요체는 이러하였다.
“무릇 사람의 마음은 하나가 채워지면 비로소 여럿을 욕심내기 마련이요, 가장 긴요한 물목이 없으면 누구든 이 한 가지만을 희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위에 이른 방책들 중 각 군현 안에서 시급한 바가 있다면 스스로 해소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 도와주고 또 공 있는 자는 포장할 것이로되, 고을 안에서 한 가지 청만 올라오는 곳을 우선하여 베풀 것이니 현량한 백성들은 그리 알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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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천주교 신자(까마득한 작 초반에 몇 번 언급된 바 있습니다)였던 반면, 흥선대원군은 독실한 불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영종도 용궁사에는 대원군이 아직 흥선군이었던 시절 1854년 중수를 후원하면서 직접 쓴 현판이 남아있는데, 해당 사찰에는 그가 이 사찰에 거의 10년을 왕래하면서 아들의 왕위 등극을 축원했다는 설화가 전합니다 (이정주 2015,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불교 후원과 그 정치적 의미.” <역사와 담론> 73). 또한 집권 후에는 도성 인근의 보덕사, 흥천사, 화계사 등의 중건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현전하는 그의 초상에도 역시 염주가 그려져 있지요.
흔히 우리는 ‘종두법’ 하면 바로 지석영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이는 교과서 서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일례로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도 근세에 우두법이 만들어졌지만 조선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비로소 지석영이 일본에서 배워와 도입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지요. 하지만 당대 동아시아의 천연두 처방을 집대성한 정약용의 『마과회통(麻科會通)』에 이미 관련 기술이 있고, 그 다음 세대인 이규경 역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정약용이 ‘젖소의 두종’을 이용하는 ‘기방(奇方, 기이한 처방)’을 창안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두법이 (재)도입된 것은, 물론 낯선 처방에 대한 거부감도 있지만 이를 도입하고자 한 초기 시도들이 모두 ‘서학’ 신도들이나 초기 급진개화파 등을 중심으로 국지적으로 이루어져 그 저변이 넓지 못하였던 것 때문이기도 할 듯합니다. 작중 조선에서야 이미 ‘금계랍(키니네)’을 필두로 여러 양약이 도입되어, 본래 아내가 콜레라에 걸려 죽는 바람에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함께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은 오경석도 멀쩡히 살아있을 만큼 서양 의술의 도입이 상당히 이루어졌으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요. 그 때문에 지석영은 평범한 유의(儒醫) 겸 관료로 지내고 있고, 그의 스승 박영선이 대신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향약은 대표적인 유학 기반의 사회조직입니다. 처음 주희가 편집한 『여씨향약』이 들어온 이래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향촌 전반에서 자생적인 향약이 등장하고 또 향약이 아닌 기존 지방 결사와 조직도 향약의 외형을 모방하는 등의 양상이 나타났지요. 그러나 지방에 따라 향약의 시행 정도는 차이가 있었고, 지역 내의 갈등으로 인해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문제도 꾸준히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정조 연간에 지방관 주도의 향약 시행이 적극적으로 논의된 이후, 19세기의 사회적 도전을 맞이하여 본격적으로 ‘관영’ 향약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좋은 풍속’을 권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가작통법을 병행하는 등 사회 통제를 강화하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지속되던 향전과 동학·천주교 발흥, 만연한 부패 등으로 인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만).
이후 갑오개혁 당시 내부 주관으로 ‘향약판무규정(鄕約辦務規定)’이 마련되어 성리학적 색채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관영 지방자치조직으로 향약을 변모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역시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만), 엉뚱하게도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지방관이 등장한 1920년대 이후 다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이때 향촌 단위로 다시 향약을 부활시키던 것이 총독부에게 착안되면서, 1932년에는 전국 57개 단체에 향약 장려보조금을 지급하고, 심지어 동년 함경북도에서는 도지사 도미나가 후미카즈([富永文一)의 주도로 ‘관북향약(關北鄕約)’이 시행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은 정말 조선인에 의한 지방자치를 구현하기보다는, 시기에서 볼 수 있듯 ‘제국 신민’을 만들어내고 표창과 처벌의 기제를 통해 그 생활양식을 침투시키기 위한 성격이 강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국권피탈 후 간도로 망명한 유림도 유인석과 이소응 등의 주도 하에 간도의 조선인 마을에서 향약을 부활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여러모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러한 간도 향약이 1920년대 독립운동 노선갈등과 일본의 공격 등으로 인해 와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향약이라는 것이 당시 조선인들에게 가졌던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귀남의 생각에 대해서는 이용기(2012) 등 여러 연구에서 인용하고 있는 신중섭 외(1981)의 설문조사 결과를 참고하였습니다. 대도시·중소도시·농촌을 나누어 지금까지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인식을 조사하였는데, 여러 흥미로운 인식차가 나타납니다. 먼저 새마을운동의 실질적 생활개선 효과에 대해서는 농촌에서 긍정 답변이 과반(아주 많은 도움 20%, 약간의 도움 31.5%)을 차지한 반면 대도시에서는 긍정답변은 6.8%에 불과하고, ‘그저 그렇다’가 59.7%에 달했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설문조사 6백 건 중 미비한 것 140개를 배제했음에도 새마을운동의 성과에 대해 ‘모르겠다’라고 답한 비율이 대도시에서는 25%, 중소도시에서는 35%에 달했다는 점입니다. 귀남옹은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즉 무언가 막연하게 ‘좋고 훌륭한 것’이지만 막상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해서 어떤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모르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