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63화 (163/320)

53. 근래 유생들은 풍속이 박하다 (3)

귀남은 그의 첫 선거를 기억한다.

휴전하고서 바로 이듬해에 있던 선거야, 표를 던지고 싶어도 저의 주소가 지금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 –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적었더니 그 사이 도와 군의 경계가 마구 바뀐 것인지 끝내 등록이 되지 않았다. - 그저 종일 한 대도 얻어맞지 않고서 (비교적) 편히 쉬었다는 데 만족할 뿐이었다. (지금 같은 시국에 군인은 마땅히 이박사님과 자유당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장장 두 시간을 연설한 연대장을 헛수고하게 만든 셈이었다.)

그 다음 투표에서는 확실하게 주소를 서울로 옮겨두었기에, 이번에야말로 그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자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씩은 신문도 주워다 보고 하면서, 누구에게 표를 주어야 자신과 나라에 모두 좋을까 고민했다. 그런데 정작 기표소에 가 보니 신익히인가 하는 그 사람이 선거에는 나오지 않은 것 아닌가. (선거를 열흘 앞두고 작고하였다는 것은 후에야 알았다.)

여하간 그런 소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되었건 그의 평생 선거라는 것은 계속 되어왔다. 물론 때로는 조금 뒤틀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큰 소란이 나기도 하는 것이었지만, 여하간 그 누구도 선거를 폐해야 한다고 하지는 않았잖은가.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귀남이 자평하자면 언제고 갖춰두어야 할 제도인데, 차기 총리대신으로 유력한 최익현과 김병시 두 사람 앞에서라면 몰라도 또 뒷전에서는 대신들끼리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오죽했으면 유구국 다녀와서 난초 갈음하여 종려수(야자나무)에 바다까지 곁들인 새로운 화풍 개척하고 있는 대원군이, 기껏 입궐해서는 역작을 선보이는 대신 이리 한탄하고 있겠는가.

“성상 전하께서는 어지시고 또 밝으시니, 뭇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 능히 그것을 나누어주실 수 있겠지만, 장차 그런 법도가 실지로 이루어지면 바로 얽매이게 될 문무 백관들이 어찌 이리도 화평 지키고 있다는 말입니까. 나라의 풍속이 과연 이전과 같지 않다 하겠습니다.”

물론 공산당 입장에서는 손해볼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서 돌아왔을 적 전봉준이 저에게 고하기를, 길게 보면 결국 나라는 대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에게 힘 나누어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요, 그러니 지금부터 조금씩 민서(民庶)의 마음을 붙잡아나가야 한다고 계책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가을까지 준비를 하여, 지금 있는 참의대부를 모두 체임하고 새로 나라 전체에서 추거를 시행하겠다 하니, 전 모가 이른 대로 형국 갖추어지는가 싶어 어찌하면 새로 짜이는 판에서 개화당 거족들 억누를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그런데 그 고민은 결국 공(空)으로 돌아갔는데, 이유인즉 이 추거에 대하여 개화당이 할 이야기는 조정에서 먼저 나오고, 공산당이 할 이야기는 주상이 먼저 답으로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조정의 논의를 보면 이런 식이었다.

김병시와 최익현이 영의정 겸 총리대신 자리까지 추거의 법도로 정하자는 데 동의하고서는, 지금의 권세로써 상서로운 정사의 첫머리부터 어지럽힐 수 없다면서 곧장 사직하고 세 모으기에 들어갔으므로, 졸지에 중신의 반열에 빈자리가 생겼다.

그리하여 호조에서는 어윤중이 판서 대행으로 올라오고 예조에서는 김윤식이 올라왔는데, 이런 판국에 영의정 심순택까지 물러나면 곤란한 고로 사정 여차하게 되었다 이르고서 그를 붙잡아놓고 있었다.

편히 노후 즐기려던 차에 일이 차고 넘치는 조정에 더 머물게 되었으니 – 수십 년 전 조정과 같았더라면, 오히려 그 권세 누리고자 하루라도 더 머물 생각을 했겠지만 – 심순택이 (무엄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최대한 툴툴대며) 이 추거의 일을 거론하기를,

”대소 신료의 소임을 정하는 것은 인군의 위엄 중에서도 중한 것입니다. 어찌 이를 함부로 백성들에게 내어주려 하시는지, 늙고 어리석은 신은 쉬이 헤아릴 수 없나이다.”

하고는 하였다.

“한성부는 수선(首善)한 곳이라, 제도의 예외를 두어 추거의 법도를 시행하였습니다만, 아직 팔도를 통틀어 헤아리면 어리석은 백성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성현께서도 이르시기를 백성은 이끌 수는 있을지언정 알게 할 수는 없다 하시었는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이제 부족한 무리에게 공론 거들 단초를 허여하신다면 그 가운데서 품성 간특한 무리가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강하게 서두를 떼고서, 더 젊은 신료들이 함께 따라와 주기를 기다리는데, 정작 반대해야 할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인즉, 최익현이 곧 영상 자리에 올라 저들 앞길 터 주리라 기대하는 무리는 침묵을 지키고, 개화당에게서 귀띔 받은 형조판서 조영하(趙寧夏) 같은 이들은 뭇 백성이 나라 정사에 끼어들 수 있도록 제도 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보다, 이로써 어찌하면 자신과 저들 무리의 이익 삼을 수 있을지를 먼저 고심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니 심순택으로서도 요즘은 유생들뿐 아니라 관리들도 풍속 박하다고 혀 찰 일이었다. 먼저 조영하가 발의하기를,

“비록 다 같은 조선국 백성으로서, 국제의 조문으로도 밝히기를 만민이 균(均)하다 하였습니다만, 또 가려보면 그 가운데에 대부가 있고 사(士)가 있으며, 유일(儒逸)과 향원(鄕原)은 구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체 있고 없음에 따라 차등을 두어 추거하는 바의 경중을 따진다 하면 앞서 하유하신 바를 능히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두를 떼니 곧 비슷한 말이 주욱 이어졌다.

“우리의 추거와 비슷한 법도는 대서 나라에서도 행하는 곳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중 영국의 사정을 보면, 처음 추거의 법을 세울 때 그 국인(國人)의 풍속이 어떠한지 쉬이 믿고 맡길 수 없으므로, 대신 그 가산으로써 제한을 두었다 합니다. 이는 항산(恒産) 없이 항심(恒心) 있기 어려운 이치로 말미암은 것이니 도의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참의대부를 두신 큰 뜻을 신이 다시금 살피건대, 그 요체는 군현의 사족(士族)을 한데 모아 그 가운데 인망 있는 이를 뽑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도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몰래 책동하는 무리가 꼬이지 않도록, 정정당당히 중인환시(衆人環視) 하에 그 뜻을 밝히도록 하여 일체의 부정이 없게 함이 가할 듯합니다.”

그러나 귀남으로서는 그저 한 사람 당 한 표로, 누구 눈치 보지 않고서 알아서 표 던지라 하면 될 것을, 굳이 엉뚱하게 이리 움직이고 저리 변통하면 괜히 화란만 일어날 것을 익히 알고 있던 것이었다. 당장 그 옛날 이박사 하야하던 소동이 어쩌다 일어났는가.

그리하여 저기서 이박사 이야기만 빼고 최대한 포장하여 답하였다.

“지금 이른 바에도 일리가 있으나, 그렇게 되면 천운 따라 소출이 늘어난 농군은 추거하는 대열에 들고, 평생 배곯아가며 학문에 힘쓴 선비는 정사 돕지 못하게 되지 않겠소?”

하였다. 남 앞에서 투표하는 일에 대해서는 둘러댈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 대신 짓궂게 되묻기를,

“그리고 공공연히 마음에 품은 바 드러냄으로 말하자면, 내 여기서 증험해 보이겠소. 나는 그래도 추거를 함에 있어, 어떤 사람이 영규(영의정) 되기에 맞는가, 또 그 고을의 참의대부로는 누가 가장 합당한가 헤아리는 속내를 겉으로 보이지 않음이 옳다고 보오. 이 말이 이치에 닿지 않는다 여기는 대신은 지금 바로 거수하여 보시오.”

상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감히 정면으로 거스르기도 무안하지 않은가. 하여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데 빙긋 웃으며 이어 하유하기를,

“이처럼 권세 있는 사람 앞에서 뜻 마음대로 펼치는 것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오. 백관의 우두머리인 경들도 이리할진대, 여항의 백성들은 어떻겠소?”

억지로 없던 문물을 새로 들이는 것이라면 모를까, 한성부 안에서 이미 여러 번 치르기도 한 추거다. 거기에 이처럼 계속 상이 제의하니, 교유하는 말마따나 그 앞에서 반박하기도 마땅치 않은 것이었다. 거기에 한편으로는 한성부가 문물이 가장 개화한 것은 맞지만 또 풍속 야박하기로는 전국 제일인 면도 있었으므로, 우선은 지금껏 하던 대로 시행하고 나중에 폐해가 보이면 그때 가감하자 하는 성상의 말에 하나둘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전국 군현에서 추거를 하게끔 하고, 그 참여할 수 있는 자는 나라에 내는 부세로 우선 거르되, 향시 – 이 무렵에는 서원 졸업시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통과한 이들은 예외로 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굳이 따지자면 공산당에게 좋게 일이 풀렸는데, 대원군이 아들 주상 앞에서 굳이 한탄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하문하였더니,

“그 옛날 한 고조가 대풍(大風)의 노래를 끝마침에 읊기를, ‘어찌하면 용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까(安得猛士兮守四方)’ 하고 그쳤으니, 천하를 얻고 지키기만 하면 절로 안민(安民)하는 방도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시화연풍(時和年豐)하면 그것으로 족히 여기고 밝은 정사를 칭송하였을 것인데, 이제 풍속이 점점 박하게 변하니, 그 자강사 운운하는 서생들만 하여도 감히 함부로 논할 수 없는 것을 논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조정의 신료들도 이 시류에 함께하여 소소한 이익을 얻고자 틈을 노리고 계책을 꾀하니, 그것이 나라의 이로움으로 이어진다 한들 신으로서는 격세지감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조선국 사정이 아무리 나아졌어도 가진 이보다는 가지지 못한 이가 훨씬 많기 마련이므로, 단자(표) 던질 이가 늘어 저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될수록 공산당으로서는 고스란히 이익이었다. 그리고 대원군 생각에 공산당에게 이로운 것은 저에게 이롭고, 저에게 이로운 것은 만세토록 이어져야 할 종실에게 이로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씁쓸한 것은, 그가 아는 조정이라면 그가 들은 것보다는 더 주상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통촉하여 주시기를 망극하게 바라여야 했을 터인데, 너무나 수월하게 논의가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세상에서도 현달할 이는 현달할 것이련만, 적어도 이 늙은 사람과 같은 이들이 앞으로 더 나오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하여 헛되이 성심을 어지럽혔을 뿐인즉 헤아려주시옵소서.”

그래 보았자 결국 늙은이 푸념이었고, 본인도 익히 아는 바였다. 그저 시대가 바뀜을 한탄하고, 이제는 어쩌면 그도, 오경석도, 그리고 어쩌면 그토록 원수같이 싸워 왔던 세도가들도 슬슬 뒤편으로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서글프지는 않아도 무언가 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간만에 밤이라도 들겠소?”

그런 마음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딱히 해줄 말은 없어 그저 위로로 그칠 뿐인지. 그래도 푸념 받아주는 아들의 효성에,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가 살짝은 가벼워졌다. 앞으로 나라의 정국은 새로 그린 화폭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격랑(激浪) 일고 잦아들기를 반복할 터인데, 오히려 그런 때를 만나면 자신보다는 아들 같은 이가 더 대통(大統) 이어가기에 맞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자강사 모임이 청천벽력 같은 고시 소식에 놀라 흐지부지 된 것도 벌써 여러 해였다. 일찌감치 고시의 문턱 넘어 성균관에서 희희낙락 - 반궁(泮宮, 성균관) 안에 든 이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 하는 이들도 개중에는 적지 않고, 부모님 이름 높일 일이 과연 과거길만 있겠느냐 하고서 신보에 기웃거리거나 학당 차리는 이도 있으며, 심지어는 백성을 직접 이롭게 하겠노라면서 맥안공행이나 광통이도국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대개는 그런 경우 ‘이롭게 할 백성’이란 두둑한 봉급 받을 자신을 지칭하였다.)

허나 어찌 되었든 지금 조선국 팔도에 학문 깊게 배운 사람 일할 곳이라면, 큰 고을의 동·서헌이 아니고서는 대개 도성과 그 부근이기 마련이라, 박은식이 주도하여 사람을 다시 모으니 의외로 호응이 적지 않았다.

다행히 안태훈이 흔쾌히 (아마 아버지의 허락이 있었을 것이다) 정동구락부를 내어준 덕에, 박은식은 성균관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겨울날을 불태우면서 열심히 서간을 쓰고, 보내고, 읽고, 또 새로 쓰고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또 만나자 한 것인가? 제대로 모임을 꾸리려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매천 형님. 보시다시피 마음 보내오는 이들은 있어도 막상 가운데서 좌장 할 사람은 없는지라...”

그리고 처음 안태훈에게 신세 졌던 것이 그대로 굳어져, 우선은 이곳 정동구락부를 새로 꾸린 자강사, 아니, 가칭 ‘자강당(自彊黨)’의 회당처럼 쓰고 있었다.

“이제 다들 나름대로 자리 잡았으니 잘 찾아보면 그럴 여력 있는 이가 하나 없겠는가. 나는 당장 배움터로 삼았던 곳도 자네들과는 다르고, 더구나 또 내년 고시도 준비해야 하는 처지일세. 어찌 되었건 등과는 해야 남부끄름없이 참의대부든 뭐든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니면 지금 계시는 대부 분들 중 이 자강당에 이름 빌려주실 분 하나 또 안 계시겠는가?”

“그것이 실은 또 여의치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박병하를 다시 광양으로 돌려보내고 슬슬 혼자 이듬해 고시 준비할 생각하던 황현까지 불렀겠는가.

처음 일의 발단이 된 것이 개화당 참의대부였으니, 조금 오래 된 사람이었다면 곧장 운현궁 찾아갈 생각을 했겠지만, 자강사 젊은이들은 말 그대로 아직 젊었다. 그러니 사(社)든 당이든 새로 꾸리자는 쪽이었는데, 그런 열의는 넘쳐났지만 정작 새로 주창하여 당의 가운데에 세울 의론으로는 무엇을 끌어올 것이며, 그 큰 뜻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는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당장 박은식부터가 정말 진지하게 정권을 노린다기보다는, 그저 옛날 자강사 생각에 할 말은 하자는 생각으로 친우들 모으고 있었으니, 구락부 들어와 박은식을 찾던 최익현 보기에는 법국 말로 딱 ‘아마퇴르(아마추어)’였다.

“아무래도 학원에 모여서 벽계 하늘만 있는 줄 알고 지내던 개구리 시절과는 다르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저희들 할 말 하고자 모으는 무리인데 옛 사람들 데려다 놓기도 곤란함이 있고...”

차라리 그 옛날이었다면 ‘흥국부도(興國扶道)’ 같은 거창한 말이 세상 전부라 여겼으므로 진력하여 달려들었겠지만, 이제는 그 바깥에도 뭔가 있기는 함을 (강제로) 알게 되었잖은가.

“흠흠, 내 아직 그래도 환갑은 몇 해 남았는데, 연소하다고는 못하지만 그래도 기로(耆老)는 아닐세.”

은근슬쩍 저의 민망한 마음 – 이들 자강사에 끼어들어 헛소리 늘어놓았다고 아들 영조를 꾸짖은 것이 아직도 생생하였다 – 감추면서 말을 걸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 박 무어라 하는 젊은 유생도 놀랍고 불편해하는 기색은 매한가지라는 점일까.

“혹시... 면암 대감이십니까?”

“허, 또 어디서 이 사람 초상은 보았는가. 맞게 보았네.”

황급히 두 사람 모두 일어나, 평소라면 보기도 어려웠을 분께 예를 갖추었다. (따져보면 최익현 그는 바로 그 화서 선생으로부터 직접 수학한 사람이니 까마득한 사숙(師叔) 아닌가.)

“내 자네들이 당을 세운다 듣고 찾아온 것일세. 아무래도 지금껏 가운뎃길 지키기만 힘쓰면서 세간 풍파에는 눈길 주지 않고 살아왔더니, 이미 있는 당에 의탁하기는 꺼리게 되는 바 있었다네.”

박은식이 잠시 생각해보니, 옛 사람들 끌어오기 꺼려지기는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아예 처음부터 새로 뭔가 쌓아올리기는 또 신고(辛苦) 가득할 것이었다. 최익현 정도면 이전에 있던 참의원과는 연이 없으면서 또 홀로 쌓아올린 명성 고고하니, 모셔와 가르침 청하고서 좌장으로 세울 만하였다.

황현이 눈치껏 가배 한 잔 더 내오게 하는 동안, 이 정도면 취재(取才)는 통과하였다 여긴 최익현이 그 자리에서 곧장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우선은 당의 이름을 바꿈이 어떻겠는가.”

‘젊은 서생이 아직 환로 오르지도 않았는데 무슨 정사를 논하느냐’ 정도만 아니면 최익현이 무슨 말을 하든 받아줄 의향 있는 박은식이 귀를 곤두세웠다.

“생각해보면, 근래 유생들의 풍속이 박하다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유생이 늘었기 때문이지. 이제 여학이 일어나면 여인도 한 사람의 여유(女儒)로 자라날 것이요, 그 집안이 안자(顔子)와 같은 이들도, 자공(子貢)과 같은 이들도 모두 매한가지 서생이 될 터인데, 그리 사람이 늘어나면 마음도 맞지 않고 지켜온 가례(家禮)도 서로 어긋나 절로 풍속이 박해질 것이야.

말하자면 지금껏 깊은 용소(龍沼)였던 것이 한 번 크게 산사태 일어나 여러 줄기 얕은 계곡수로 화한 것인데, 흐르는 물을 주워담아 다시 못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지.”

“그러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흐르는 줄기마다 깊게 파서 저들 원하는 대로 흘러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름도 이왕이면 한 글자 바꾸어서, ‘자유당(自由黨)’으로 하고, 도의에 따라 때로는 공산당 하는 말도 취하고, 또 때로는 개화당 이르는 논의에 힘 실어주고 하는 것을 당의 주지(主旨)로 삼음이 어떻겠는가.”

일전에 주상께서도 대원군에게 하교하시기를, 저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모두 뭉치는 세상을 이르셨다 하던가. 조정 나와서도 정학과 성상 모두 지키는 신하 겸 선비로 남고자 하는 최익현의 생각은 이러하였는데,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백가(百家)가 쟁명(爭鳴)하였을 적 이단(異端)이 중원에 널리 퍼졌으니, 사람들이 원융(圓融)하는 것은 꺼리고 편벽한 것을 기껍게 받아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리할진대, 과연 이르신 대로 하여 세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요?”

어느새 가배 받아와 자리에 도로 앉은 황현이 공손하게 물었다.

“이 사람들, 그러면 설마 젊은 사람 몇 명이서 머리 맞댄 모임이, 달음박질 한 번으로 운현궁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가?”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애시당초 권세 얻을 생각이었으면 이런 모임은 왜 만들었는가 여기던 최익현이 줄 답은 너털웃음 뿐이었다. 어쩌면 엉뚱한 사람을 그들 좌장으로 모셔와 고생길이 환하게 열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은근한 두려움을 최대한 감추면서, 박은식도 그 옆에서 함께 웃었다.

그리하여 우선은 세 당이 정립(鼎立)하게 되었는데, 스스로 우리 당이야말로 탁월하다 치켜세우며 다툴 것도 없이 바로 그들을 시험하게 될 만한 건이 터졌다.

마적이나 고사 생번(대만 원주민)에게 늘 시달려오던 북해도 무사들을 하와이국에 풀어놓았더니, 백인 민병대 역시 생리 비슷하리라 여기고 선승을 취하고자 먼저 공격하여 사람 여럿을 도륙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차라리 그 반대였더라면, 어찌 본국에 말 한 마디 하지 않고서 그리 일을 키우느냐며 질책이라도 하였겠으나, 엄연히 미국 시민권자들이 죽고 다쳤으므로 워싱턴 D.C. 조야는 들끓었다. 그리고 그제야 사안 심각함을 깨닫게 된 일본국은 이럴 때에 대비하는 것이 조일동맹 아니겠느냐며 조선을 끌어들여 방패로 삼으려 하였다.

이런 사정이 신보 통하여 곧장 보도되었으므로, 누구의 당이 어떤 대책을 내어놓는가가 여러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 또한 어찌 보면 나라 풍속이 세상일을 세상의 일로 가만 내버려두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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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제3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신익희 (당시 선거 포스터의 표기 기준으로는 ‘신익히’)는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사망했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신문을 본다면 모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적 투표의 제반 원칙이 확립되는 데는 결코 순탄하지 않은 과정이 있었습니다. 특히 선거권의 경우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는데요, 작중 시점 유럽에서는 그래도 차티스트 운동 등이 성과를 거두어 남성에 대해서는 점차 유권자층이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영국의 경우 1832년 성인 남성의 약 7분의 1 정도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점차 소득 하한선이 낮아져 1884년 대의법(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 통과 시점에서는 성인 남성의 60% 정도가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작중 조선에 가까운 예로, 원 역사 일본의 첫 총선인 1890년 중의원 선거를 보면, 납세액 기준으로 남성 중에서도 유권자를 한정하여 총 유권자가 45만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이후 지속적인 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불리는 시기인 1925년에 납세액 조항이 삭제되었지요.

작중 조선의 유권자도 비슷하게 생각해보면 결코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식인이면 당연히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인 조선이기 때문에, 납세액 외에도 중요한 면제 조항이 하나 추가되었지요. 장차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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