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근래 유생들은 풍속이 박하다 (2)
구락부 나설 무렵에는 벌써 신시(申時, 15시~17시) 말미라, 조금 걸어서 육조거리 지날 무렵에는 벌써 서편 하늘에 해가 불그레하니 하직 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낙방거자 신세라지만, 황현은 당장 계유년(1873) 아라사와 두만강 두고 대치하던 시절 광양 사내들 데리고서 북변을 지키면서 고향에서는 부족하게나마 이름 날린 바 있었다. 이어서 스승 잘 만난 덕에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으므로, 광양현 참의대부 고영(皐潁) 선생, 즉 진사 양종호는 일찍이 황현이 고시 준비를 위해 도성에 머물게 되었다 소식 들었을 적부터 몇 번 황현을 청하여 만난 바 있었다.
그러므로 황현도 양종호가 어느 방(坊) 어떤 골목에 사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름났다 한들, 나라의 대부씩이나 되는 사람을 한창 석반(夕飯) 들 무렵에 번거롭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발걸음을 서둘러야 할 텐데, 연신 서울 저자 구경하느라 정신 없는 이 박병하는 도저히 협조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허, 저 보게, 저, 저, 망측한!”
“가헌 형님, 우선은 잰걸음에 힘 쏟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필 지나는 길이 북촌 과부와 대갓집 며느리들이 한두 푼씩 모아 세운 여학 안정여숙(安貞女塾) 앞일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그날의 배움 마치고 젊은 처자들 우르르 나와서는, 남정네들 사이 헤치고 저들끼리 삼삼오오 무리지어 걸어가고, 개중 집안 형편 좋은 이들은 지나가는 인력거 없는가 두리번대니, 남녀간 내외하지 아니하면 인륜 무너지는 줄 아는 시골 서생은 기함할 노릇이었다.
이러다 노명등(가로등)에 점등까지 하게 되면, 또 그 구경에 최소 한 각은 잡아먹을 것이므로 서둘러야 했다. (어차피 밤새 켜져 있을 번개등불 아닌가. 나중에 구경시켜 주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 박병하의 소맷자락을 잡아끌다시피 한 끝에 아슬아슬하게 점등하기 직전 팔판동(八判洞) 들어설 수 있었다.
문앞에서 기척하니 곧 솟을대문 열렸다. 겉보기에는 조금 좁아도 그 골목에 늘상 있기 마련인 어중간한 기와집인데, 사랑채 대신 모시는 곳은 별채요, 그 별채는 나무기둥 기와집이 아니라 어색한 붉은 벽돌집이었다.
양종호는 처음 대부로 천거되어 올라온 이래 아예 도성에 새살림 차리고서 광양은 가뭄에 콩나듯 오갈 뿐이었다. 신작로 닦이고 기선 들어오면서, 한 번 상경길 떠날 때 무명 몇 동 짚신 몇 켤레와 함께 괴나리봇짐에 우겨넣고서 온 마을에 하직인사하던 것은 옛이야기 되었으니, 양 대부가 좀처럼 광양에 귀한 발걸음 하지 아니함은, 즉 할 마음이 없어서라 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속언(俗諺, 속담)에 이르기를 여우 같은 미물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거늘, 내 어찌 그러겠는가. 다만 벼슬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이 참의원의 일이라는 것이 참 복잡하고도 미묘하여, 자칫 그 세도의 치우치고 평평해짐과 도의의 옳고 그름을 놓칠 수가 있다네. 그리하여 지난 열 해를 통틀어 도통 광양 내려가 볼 틈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야.”
고향에서 어떤 선비가 올라왔다 하여 얼마 뒤 나타난 집주인에게, 박병하가 대놓고 어찌 광양에 자주 얼굴 보이지 않느냐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더니 양종호 답변하는 말이 이러하였다.
“헌데 선생께서 내려오신 것도 아니요, 향회에서 딱히 모임을 연 일도 없는데, 고을에서 수소문해 보니 이미 공론이 모여서 선생을 대부로 계속 세우기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혹시 선생께서는 아시는 일인지요?”
“그... 아마 실지로 모임을 열었는데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으이.”
“아니면 모임 대신, 이곳 도성에서 광양까지 인정(人情, 뇌물) 오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권세도 여러 해 부려보는 사람이 잘 부리기 마련이다. 황현이 합세하여 정면으로 추궁하니, 따지자면 벼락출세한 셈인 양종호는 끝내 뻔뻔하게 둘러대지 못하고 이실직고하고야 말았다.
황현이 비록 지금은 낙방거자 신세라지만 엄연히 윤돈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서생이요, 노사학원에 이름 올린 바 있는 이라, 같은 노사학원 사람들 중 현달한 이를 끌어들이게 되면 양종호야말로 곤란해지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계산은 우선 실토한 뒤에 덧붙은 것이기는 하였지만.
“후... 그래, 동향 사람에게 무얼 더 숨기겠는가. 매천 자네 말이 옳네.”
“무슨 연고로 그리하셨습니까?”
양종호는 비록 학문이나 지모로 이름나지는 않았지만, 사람됨이 원만하여 고을 안에 두루 인망 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탐학하게 토색질이나 하려 그리 부정한 일 벌이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한 박병하가 캐물었다.
“알다시피, 참의원에서는 단순히 나랏일만 논하는 것이 아닐세. 연병법에 의거해 삽과 곡괭이 든 장정들을 데려다 모처에 새로 제언(堤堰) 놓자, 어떤 바닷길에 새로 기선의 운행을 허하자, 이런 것들이 모두 참의원에서 공론 모은 뒤 조정에 넘어가는 것이지.
그런데 이런 일은 아무래도 위와 아래의 마음이 잘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네. 속된 말로 이 사람은 거기서 거간 노릇을 해주는 것이야. 하여 아래에서 올라오는 말이 있다면, 예컨대 전동 영어(김병국) 대감께 전해주기도 하고, 반대로 영어 대감께서 이러이러하게 조처하려 하니 민심을 잘 위무해달라 하면 또 고을의 선비들에게 베풀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막상 말로 꺼내고 나니 저의 궁색함을 알았는지 머쓱해 하며 몇 마디 덧붙였다.
“그대들에게 어찌 보일지는 나도 잘 아네. 하지만 고릿적 토색질이 아니지 않은가. 그저 나랏일 도와 문물의 이로움을 펴는 데 있어, 사견(私見) 달라 부딪힐 일을 줄이면서 상하 간에 이익을 나누는 것뿐일세.”
“그렇다 한들 성상께서 처음 참의원을 두신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모나지 않은 술잔을 어찌 모나다 일컫겠습니까 (觚不觚 觚哉觚哉)?”
“내 입이 둘이라도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네. 허나 지금 다른 고을에서도 대개 풍속이 이렇게 되었는데, 우리만 사람을 갈게 되면, 또 처음부터 새로 연줄을 대고 해야 하네. 그리 되면 다른 고을은 모두 이익을 취하는데 우리만 동떨어지게 될 수도 있어.
사정이 이리 되었으니 내 약조함세. 가운데서 이익을 취하게 되면 지금처럼 몇몇 문중에만 알리는 것이 아니라 장차 향회 전체에 알리고, 또 지금보다 더 많이 고을 전체에 베풀도록 하겠네. 그러니 부디 일을 더 키우지는 말아주게나.”
차라리 ‘이거나 받고 돌아가라’ 하고서 그들 환심을 사려 했더라면, 오히려 선비 지조를 무엇으로 아느냐 하면서 항변하였겠지만, 당장 나라의 실정을 이야기하면서 고을 사람들 생각을 해 달라 하니, 간곡한 청을 모른 체 할 수도 없었다. 우선은 재차 생각해보겠다 둘러대고서 물러날 수밖에.
고고한 도의와 세간의 상정(常情) 사이에서 하는 고심은 낙방거자 황현과 시골 서생 박병하만 겪는 것은 아니어서, 지금 인력거 타고서 관자동(貫子洞) 사는 김병시를 찾아가는 최익현도 마음 속 사정은 비슷하였다.
인력거라는 것은 이전의 가마에 비하기 민망할 만큼 서로 편리한 물건이었다. 안락하고 빠른 것은 옛적 파리에서 타고 다녔던 마차가 더 낫겠지만, 또 구부정 뱀굴같은 도성 거리 – 비록 신작로 놓으면서 많이 정비가 되기는 하였다지만 – 나다니기는 인력거가 편하였다.
(한 번은 기무회의 끝날 무렵, 성상께서 이르시기를 언제고 수레 앞에 돌기름(石油)이라는 것을 태우는 화로 달고서 절로 움직이는 수레가 나오지 않겠느냐 하신 적이 있었는데, 언제 기물 만드는 술기가 발달하여 그런 경지에 이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아무리 몸이 편하다 한들 마음은 그대로 불편하였으니, 금일 낮에 상께서 넌지시 이르신, 다음 총리대신 자리의 건이 계속 남아 응어리진 것이었다.
곧 김병시의 집에 당도하여 안에 들었다. 그가 관자동 사는 것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것은 처음 일이었는데, 호조에서 나랏돈의 출납 주재하는 사람의 가택이라기에는 퍽 소박하여 도리어 놀랐다.
“퍽 소박하다 여기시는 모양이구려.”
마음 그대로 읽은 김병시가 가볍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그렇소. 아무래도 그대 문중이, 흠.”
“가형들께서도 종종 그리 말씀하시더이다. 집안의 위세라는 것이 있는데, 굳이 사욕 부리지 않더라도 더 꾸밈이 가하지 않겠느냐 하시는데, 이 사람은 도무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오.”
명문 거족들이 대대로 그 부귀를 전해 내려온다고는 하지만, 인재가 나지 않으면 결국 쇠하기 마련이다. 다른 문중과 초야의 서생 가운데서도 인재가 나지 못하게끔 못 박아놓으면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도 무색하게 만들 수야 있겠지만, 지금 정국에 그것이 과연 가한 일이겠는가.
장동 김문은 그래도 그 집안이 자자손손 번성한 축에 들지만, 임술년과 계해년 사이 파벌이 한 번 나뉘면서 반절쯤은 쇠락하고, 다시 남은 반절 중 대부분은 광통이도국 일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조정에서 그 가세 이어갈 사람은, 동철에 있는 그 김옥균이라는 젊은이가 갑자기 다시 어심(御心) 붙잡아 경복궁에 돌아오지 않는 한 김병기 한 사람이 끝일 터였다.
“짐작하셨겠지만, 영상께서 물러나신 뒤의 일을 의론하러 왔소이다.”
“허허, 물론이외다. 바둑 두러 찾아오시지는 아니하셨을 터인즉.”
농으로 받고, 사랑에 들어 마주앉기를 청하였다.
“이 사람도 김문의 자제로 난 이상 어찌 영달에 뜻이 없겠냐만, 적어도 허명(虛名)과 집안 위세 대신 스스로 얻은 것으로써 현달하고자 하고 있소.”
물론 유구국 유람 마치고 돌아온 대원군이 이를 좌시하지 않으리라는 심산도 있을 터였다. 떠밀려서 쓴 정승 감투에 운현궁의 경계만 산다면 어찌 사양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정녕 권세만을 바란다면 또 정면으로 돌파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김병시는 김병학과는 달리 대원군과 부딪힌 전력도 없거니와, 김문이 직접 나서는 대신 개화당 전체를 동원하게 되면 대원군도 부득불 전면에 나서는 대신 공산당을 내세울 수밖에 없을 터인데, 지금 공산당과 연 닿은 조정의 고관 중 김병시와 맞먹을 만한 사람이 있느냐 하면 그 또한 아니었다. 심지어 화서학원도 김문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최익현조차 굳이 따지면 – 스승의 구원(舊怨)이 있기는 하지만 – 공산당보다는 개화당에 가까웠다.
하지만 개화당 힘을 빌어 정승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때는 벼슬 제수받는 것은 김병시 한 사람이되 그 자리의 권세를 휘두르는 것은 개화당의 여러 거족들이 된다.
“그리 말씀 올리면서 꺼리는 뜻을 밝혔더니, 두 가형뿐 아니라 문중의 어르신들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릇이 작다’ 하시더이다. 조금은 기이한 말씀이라 하겠소.”
임진년(1832) 생으로 최익현보다 한 살 많은 김병시를 ‘젊다’ 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을 터. 그러나 김병시가 ‘기이하다’ 하는 것은 그 점 때문이 아니었다.
“환재 선생께서 어디 박문의 힘으로 일대의 재상이 되시었소? 물론 정말 선생에 견주어짐을 당하기에는 지재가 많이 모자람을 알지만, 그렇다 한들 홀로 뜻을 편 뒤 마음 맞는 이들을 모으면 적어도 그 버금가는 위명은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바라는 바가 이러할진대 그릇이 작다 하시니...”
사실 김병시와 기무회의에서 자주 마주하기는 하였지만, 호조의 주된 적이라면 예조보다는 병조와 공조라, 그저 김문의 자제 중 하나려니 하고 넘어갔던 최익현이었으므로, 김병시가 이런 심중 드러내니 조금은 놀라웠다.
물론 최익현이 보고 들은 바로 김병시가 그 정도의 재주를 지닌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도 조정에 은근히 남아 있는 세도의 그림자를 바로 그 세도가의 자제가 걷어내고자 함은 분명 훌륭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훌륭하고 어떠하고를 떠나서 당장 그 뜻을 이룰 수 없을진대 어찌할 텐가.
“아무래도 뒤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이목 때문에 일신의 뜻대로 하지 못함은 피차 마찬가지인 듯하구려.”
“실로 그렇소. 허허, 어찌해야 할지.”
아무리 말을 나누어도 쉽게 풀리지 않으니 고심은 곧 수심 되어, 다음날 등청할 때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이어지는 날은 곧 갑일(甲日)이니 기무회의 열리는 날인데, 회의 시작할 무렵 친람하는 주상이 문득 발의하였다.
“금일 『해동일보(海東日報)』에 자강사의 사람이라는 박 모가 논설을 실었는데, 참의원의 제도를 논하는 글로 가볍게 볼 수 없는 뜻이 담겨 있었소이다. 경들은 어찌 생각하오?”
옥음으로써 회의를 여니, 심순택 이하 중신들이 하나씩 발언하는데 정작 신보 읽을 틈 없던 최익현은 영문 모를 일이었다.
“성상께서 송구하옵게도 나라의 언로를 크게 트이게 하고, 아래의 뜻이 막힘 없이 고루 통하게 하고자 참의원의 제도를 여시었으니, 이는 고금에 보기 드문 아름다운 제도입니다.
그러나 근래 유생들의 풍속이 크게 박하게 되어, 제도의 한 말단을 꼬투리 잡아 큰 폐정(弊政)이라고 호도하니 어찌 옳다 하겠습니까?”
“박 모가 올린 글을 보면, 참의대부 역시 고과법(考課法)에 따라 그 근속하는 일수를 세어 포폄(褒貶)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참의원을 따로 두어 언로를 허통하는 것을 국제로 정하였는데, 다시 참의대부를 평정하는 법을 세우게 되면 이는 옥상옥(屋上屋)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매번 원수 같은 산학과 마주하여 – 산가지로 숫자 셈하는 것은 퍽 쉬웠지만, 그놈의 ‘몇 어찌(幾何)’만 나오면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 거듭 낙방하고야 있다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급제하고도 남을 재주 있는 황현이다. 그의 벗 박은식에게 찾아가 통사정하였더니 곧 안태훈에게 닿았다.
그들 무리 중 가장 참의원을 비롯해 나라의 의정에 소식 밝은 안태훈 – 당장 그의 가친 안인수가 『해동일보』도 경영하고 있지 않던가 – 이 말하기를, 광양현 참의대부의 말마따나 그런 폐단이 찾아보면 거의 고을마다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니 황현 생각하기에, 아예 나라의 법으로 참의원의 제도 전체를 바꾸어버리면 처음 양종호가 자신을 만류하며 꺼내었던 문제도 함께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근속하는 일수를 아예 정해버리자며 발의하고, 안태훈은 권세 가진 사람이라면 이를 가는 안인수에게 알려 이를 『해동일보』에 싣기로 하였다.
그런데 박은식 생각하기에 아직 벼슬길 나아갈지 정해지지 않은 황현이 여기에 연루되었다가 혹 더 어려워질까 걱정스러운 것이라, 황현 한 사람의 이름으로 올리는 대신 화서학원의 옛 벗들을 모아 자강사 다시 꾸려서 그 명의로 상소 올림은 어떻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한양에 머물던 옛 자강사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전의 용기 있는 서생들(勇士)이 다시 뭉쳤는데, 개중에는 서양에 지금 이르는 것과 비슷한 법도 있다고 지적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이미 권세를 거스르게 되었는데 구태여 더 반발 부를 것 없다는 생각에 자제키로 하였다.
허나 정작 듣는 국왕 귀남부터가 서생들 생각하는 그 서양 법도를 몸소 – 지금 차지한 이 몸뚱이로는 아니지만 - 겪어본 사람이었으니, 바로 그 자제하기로 한 대로 논의가 흘러가게 되었다.
“좌상의 말에 일리가 있는 듯하오. 참의원을 둔 까닭이 따로 있을진대 나라에서 이를 평정하여 옳고 그름을 함부로 농단함은 맞지 않소이다.
그렇지만 지금 저 글에서 이르는 폐단이 있는 것도 사실인 듯한데, 마땅히 처분을 내려야 하지 않겠소?”
국제의 이치로 따지면, 비록 기무회의에 성상은 친람만 하는 입장이라지만 국제를 바꾸는 일을 발의하는 권한은 여전히 상에게 남아있으므로, 처분을 내리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가르침을 청하옵나이다, 전하.”
“별반 대단한 발상은 아니오. 조정에서 직접 참의원의 대부를 들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인데, 생각해보면 대부 한 사람이 각각 그 군현 사람들을 대신하여 통하정(通下情)하기 위해 올라온 것 아니오? 그러니 각 군현에 그 진퇴를 결정토록 하면 될 듯하오. 이미 한성 5부에서는 추거의 법으로써 그리 하고 있지 않소이까.”
그야 임기제 하면 당연히 선거가 떠오르는 귀남이었으므로 그런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었다. 듣는 신료들 중 최익현을 비롯해 외국 사정 밝은 이들은, 자연스레 주상의 뜻을 이해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곧장 반발할 근거를 머릿속으로 마련하고 있는데, 이어서 다음 철퇴가 내리쳤다.
“생각해보니, 지금 영상의 후임을 정하는 일로도 은연 중에 조정의 의론이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소. 장차 총리대신의 자리도 그 일수를 정하고, 추거의 법으로써 그 자리에 앉을 대신을 정함이 어떻겠소?”
이쯤이면 슬슬 툭 나오는 주상의 발상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도저히 그럴 틈을 주지 않는 귀남이었다.
허나 그 충격 사이에서 김병시와 최익현이 생각해보니, 누가 할지 정하기 어렵다면 차라리 기간을 정해놓고 번갈아 가며 하자는 방안이 의외로 가당하였다.
세 사람이 말 모으면 호랑이도 만든다 하였던가(三人成虎). 국왕 귀남과 두 판서가 합심하여 총리대신 건을 밀어붙이니, 조정 대신도 추거로 뽑는다는 이 발상이 곧장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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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참의대부 양종호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원 역사의 개화기 조선에서도 서울의 부동산은 생계의 주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일례로 한성부 거주 독거노인들이 나머지 조선 팔도에서와 달리, 주택 임대를 통해 오히려 젊은층보다 윤택한 경제생활을 했다는 연구(이정주 2019, “구한말 인구 구성과 노인”)도 있습니다. 또한 미국 선교사 겸 독립운동가 헐버트(Homer B. Hulbert) 역시 한양 내에서 주택을 싸게 구매하려고 편법을 썼다가, 소송을 당해 조선 최초의 외국인 재판(조선인 집주인에 일본인 중개업자까지 얽혔습니다.)의 당사자가 되기도 했지요.
그중에서도 특히 집값이 비쌌던 고급 거주지역이 북촌이었는데, 양종호의 서울 집이 있는 팔판동도 그중 한 구역입니다.
원 역사의 조선에서 인력거를 최초로 조선에 도입한 것은 박영효로, 갑신정변 전 일본에서 유행하던 것을 들여왔다고 전해집니다. 교군 여럿에 가갈하는 사람까지 동원하는 것보다는 인공이 적게 들고, 말 타고 경마잡히는 것보다는 빠르고 편안하였기에 금방 유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필 곧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유야무야되었지요. 그 후 공식적으로 1894년 일본인 하나야마가 인력거 회사를 차리고 일본인 인력거꾼 위주로 영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한편, 몇 번 지나가듯 등장했던 김병시가 조금 더 비중있게 나왔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장동 김문의 마지막 거물 정치인이었던 김병시는, 고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지만 – 그의 호 용암(蓉菴)도 고종이 내려준 것입니다 – 동시에 고종의 치세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비판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전통적인 군주 개인의 수양이라는 해법 외에 별반 다른 대안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데서는 수구파 정치인으로서의 한계가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집안의 재보나 권세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 관리가 청렴하였다는 말은, 특히 세도가 자제에 대해서는 여러 번 걸러서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김병시의 경우 청렴결백하다는 평이 조선 정부뿐 아니라 야사(매천야록), 심지어 일본 공사관 기록에까지 전하고 있지요 (연갑수 2008, “용암 김병시의 삶과 현실인식”). 하지만 황현의 기록은 그와 더불어 그가 계속 정계를 떠돌면서 벼슬을 노렸음을 지적함으로써, 김병시의 청렴함이 개인의 도덕 수준을 넘어 일종의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도 암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