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61화 (161/320)

53. 근래 유생들은 풍속이 박하다 (1)

정해년(1887) 가을은 철에 맞지 않게 유난히 추웠다. 어쩌다 보니 가을에 보는 것으로 굳어진 고시는 볼 때마다 추위 찾아오니, 이 ‘고시 한파’가 새 일상이 되었는데, 올해는 그것이 훨씬 심하였던 것이다.

고시 - 아직 완전히 입말에 붙은 '과거'를 대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 볼 때도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그 급제자 알리는 방 붙을 무렵에는 어떻겠는가. 이곳 도성에 사는 서생이 급제하였더라도 춥게 여겨질 날씨에, 멀리 광양 사람이 낙방하였으니 또 얼마나 시려오겠는가.

“분명히 뽑혀들어가는 사람은 있을진대 번번이 낙방이니, 이 무슨 일인가.”

노사학원에서 학업 마치고 청운의 꿈 품고 올라왔건만 낙방거자 면치 못하는 황현이 한탄하였다. 난세에는 선비가 벼슬함을 부끄럽게 여긴다지만 성세에는 외려 벼슬하지 않음이 부끄러운 것이라 말하면서, 간만에 족보에 급제한 이 한 명 올려야겠다는 욕심에 계속 달려들었지만, 연달아 미끄러지니 안타까울 뿐.

나라의 재정이 풍족해지고, 대신 나랏일은 갈수록 번잡해져, 어쩔 수 없이 관원의 수는 늘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고시 치르고, 성균관 거쳐서 실직 나아가는 사람으로 빈자리 계속 메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라 전체로써 나라를 살피는 국왕 귀남이나, 대원군이 유구국 별세계 유람하며 간만에 노구를 편히 하는 동안 떠밀려오는 각종 업무의 산에서 허덕이는 – 사서 고생하는 격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 중전 민씨나 할 생각이고, 용문(龍門) 오를 생각하는 잉어 같은 서생들에게 고시는 그저 어려울 뿐이었다.

“분명 다음에는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매천 형. 너무 낙담하지 마시지요.” 황현과 마찬가지로 몇 번 낙방한 끝에 이번에는 저 방에 이름 올리게 된 박은식이 애써 달랬다. 물론 급제했다 하여도 장원·탐화(探花. 3등)는커녕 말미에 겨우 올라온 정도였지만, 어찌 황현의 심정에 비기겠는가.

“하기야, 울적해하는 것은 나 한 사람이면 족하지 않은가. 좌우지간 자네에게는 많이 신세를 졌네.”

소속으로 따지자면 한 명은 노사학원이요, 한 명은 화서학원이라, 지연으로 보나 학통으로 보나 서로 스칠 일 없는 두 사람일 텐데, 두어 해 전 고시 보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치고서는, 곧장 맞는 면이 있어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맞는 면이라 하면 무엇인가. 하나는 해서 황주 사람, 하나는 호남 바닷가 사람으로 각각 그 일대에서는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 들었던 것이 하나요, 그처럼 성현의 말씀과 그 깊은 뜻 새김에는 능하지만 산학이 나오게 되면 깜깜이가 되어버림이 또 하나였다. 그리하여 어디 가서 ‘나는 산학이 어려워 과거는 어렵겠소’ 말할 수는 없는 사이에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고 하면서 지난 한 해 같이 한양에 – 박은식은 유명한 안인수의 아들 태훈과 연이 있었다 - 머물렀는데, 이리 희비가 갈리고야 만 것이다.

“날이 춥습니다. 가배라도 한 잔 들러 가시지요.”

뜨끈한 탕약 국물 들어가면 조금 기분 풀리지 않겠는가 생각하며, 황현 데리고 정동구락부로 향하였다.

옆나라 청국이 얼마나 시끄럽건, 조선과는 바다와 동삼성 두고 떨어져 있으니 무관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발등의 불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천자가 직접 나서서, 백성의 뜻을 가납하여 장차 하의원을 두고, 거기에 이왕 있던 군기처의 제도를 다시 살리어 상의원을 세우고, 나아가서는 아예 이를 법으로써 만들어 영세토록 이어지게 하자 하였으니, 겉 모양새로만 따지면 그나마 소란하였던 것도 잦아들었으므로, 조선국 조야에서는 그저 ‘잘 되었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어가곤 하였다.

간혹 이 일로 억눌려 있던 한인들이 마침내 기세를 다시 펴게 되었으므로, 장래에 더 큰 어지러움을 불러올 것이라 우려하는 이도 있고, 초야의 선비 중에는 마침내 화이의 구분이 다시 새로 서게 될 것이라며 은근히 기대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보다 하와이(霞窪怡)국의 정세에 관심이 더 쏠려 있었다.

“일전에 보낸 통문에 그 국왕 가씨(칼라카우아)가, 국제의 일이 그리하다면 차라리 따르겠다고 답해왔으니, 마침내 그 나라 안의 민심도 평온을 되찾을 듯합니다.”

“참으로 잘 된 일이오.”

칼라카우아야 그저 아시아 조선국이 다른 나라 돕기를 좋아한다 하여 손 뻗어보았던 것이었는데, 귀남이 들어보니 마침 그 나라에 안에 의리 아는 나라인 미국이 항구 하나를 빌리고 있다 하였으므로, 손을 잡아 그 나라의 몇몇 불온한 무리가 소란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라 조언해주었다. 그런 무리들도 태반이 미국인이라 하니, 저들 원래 있던 나라의 말이라면 더 잘 듣지 않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백인들이 주청한 국제를 보면 군민공치(君民共治)하는 아름다운 뜻이 있었으니, 이를 받아들이지 않음이 도리어 잘못된 일이라 일러주기도 하였다.

“더불어 일본국에 연통을 넣은 일 역시 잘 마무리되어, 이로써 두 나라의 연이 맺어지게 되었으니, 그 나라 안 백인들이 혹 일시에 잘못된 마음 품지 않도록 방비하고 충후(忠厚)한 기풍이 일어나게 하는 근간을 마련케 될 것입니다.”

또 사정 더 들어보니 나라 안에 일본인도 적지 않아 하여, 만에 하나 몇몇 백인들이 전횡하지 않도록 일본국과 북해도국에서 도움을 받으라 하며 두 나라를 이어주었다.

마침 아라사를 상대로 여차하면 저들 섬을 지키고자, 풍림화산류(風林火山流)니 일도일포류(一刀一砲流)니 하는, 적은 무리로 많은 적을 제압하는 병학(兵學)의 한 재주를 갈고닦는 이들이 북해도에 많았는데, 개중에는 일거리 찾아 동삼성 만주 땅으로도, 남쪽 대만 섬으로도 흘러드는 자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 중 일부가 바다 건너 하와이까지 가게 되었으니, 바야흐로 그 땅에서 백인만 군역(軍役) 지는 폐단도 없어질 것이었다. (적어도 건너건너 풍문 듣는 귀남이 판단하기에는 그러하였다.)

“예판이 고생이 많았소. 덕분에 널리 교린하는 덕이 베풀어져 절로 호호(皡皡, 여유롭고 평온함)한 기색이 이루어지게 되었구려.”

“한없이 작은 공을 일컬어 그처럼 망극한 언사 베풀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나이다.”

보고 마친 최익현이, 치사하는 말에 겸양 갖추고는 물러날 채비를 하였다.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최익현이 예조판서 자리를 지킨 지도 벌써 수 해가 되어, 관제를 고치기 전 기준으로 따지면 오히려 더 유임(留任)케 함이 이상할 지경이 되었다. 이는 비단 최익현뿐 아니라 호조의 김병시도 마찬가지로, 중간중간 다른 관직으로 옮긴 적도 있다지만 판서 자리만 같은 조에 거의 십 년 가까이 머물게 된 셈이었다.

그야 나라 안에 정란(政亂) 없어진 것이 오래였고, 아직 따로 무슨 임기를 정한 것도 아니였으니, 누가 탄핵하거나 자신이 사의 표하기 전까지는 계속 그 자리 머무르는 것이었지만, (물론 개중에는 덕의지인 오배처럼, 저의 사업에 전념하고 싶다고 사의를 표하여도 윤허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흠흠, 실은 얼마 전 기무회의 마칠 때 영의정이 은밀히 아뢰기를, 곧 사직소를 올리려 한다 하였소이다.”

은밀하게 아뢴 바를 이리 알려줌은 무슨 뜻이겠는가.

총리대신 자리를 비우게 되면 좌우의정 둘 중 하나가 오르기 십상이니 결국 빈자리는 생기기 마련. 열에 아홉은 저더러 그 후임으로 오를 생각은 없느냐 의중을 묻는 것일 테다.

“이미 지난 갑신년에 환갑 지난 영상이니, 연로하여 사직함도 불가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최익현도 사람일진대 어찌 감투 욕심이 없겠는가. 어쩌면, 예컨대 자신이 출사하고 있는 것이 한 이백 년 전쯤이었더라면 황공무지한 마음 곧이곧대로 아뢰면서 덜컥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옛날 스승 이항로 이르기를, 정사(正邪) 크게 흐트러질 때 오직 자신만은 그 분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였다. 항상 그것을 경계로 삼아온 그였기에, 오히려 그 자리 나아가기가 저어되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이러하였다.

심순택이 연로하여 물러날 생각 품었다는 소문은, 마치 해 떨어지고 전등 켜지는 것과 같이 경복궁과 궐외각사에 퍼져서, 벌써 속된 말로 김칫국 마시는 이들이 있던 것이다.

‘면암 대감께서 영달하시면 비로소 우리 조정에도 정학(正學) 품은 이들이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벌열의 자제들이 비록 선비로 행세한다고는 하나, 이미 그 마음이 말엽에 치우쳤을진대 스스로 명신 되고자 욕심 부림을 어찌 가하다 하겠습니까.’

계해년(1863) 지난 지도 오래라, 옛 붕당이나 세도가 전횡하던 시절 조정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당상관 이하로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김병시를 필두로, 그 가문 위세 있는 이들은 어찌 되었든 여전히 환로에 남아 있었고, 그러니 과거를 보든 고시를 보든, 오직 저의 일신 재주만 있으면 바로 영달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이들이라면 그런 자들 – 설령 같이 정정당당하게 고시 보고 들어온 이들이라 한들 –을 곱게 여기기 어려웠다.

물론 환재의 덕을 입어 이미 주상의 총애 얻은 김윤식과 그 동문들이라던지, 그저 국록 먹고 나랏일 돕는 데 만족하는 홍종우라던지 하는 이들이라면 괜찮겠지만, 모두가 그렇게 믿을 구석 있거나 더 부릴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그들끼리 뭉쳐서, 서로 이끌고 밀어주는 모임을 사사롭게 만들고, 저도 모르는 새 최익현 자신을 우두머리로 모시려 하고 있었다.

그리 영달하고 싶다면 차라리 선비들 모아둔 사법원으로 가거나, 사직하고 낙향하여 참의대부로 나오라 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지만, 그렇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조정의 환로에 투신한 까닭은 대감 소리 들으면서 나랏일 만지고 위세 부리고픈 욕심 있었기 때문임을 알았으므로 그리 꾸짖을 수도 없었다.

‘근래 나라의 환로가 다시 경색되고 있었는데, 면암 선생께서 의정대신이 되시면 이러한 폐해를 뚫어 없애 우리도 함께 뜻 펼 수 있게 해주실 것이외다.’

애초에 위엄은 있을지언정 권력이라 할 만한 것은 없는 사법원은 논외로 두더라도, 참의원도 요새 조금씩 그 폐단이 나오고 있어 믿을 만한 기반 없는 서생들로써는 화중지병(畵中之餠) 가까워지는 면이 있었다.

처음 그 자리에 올랐던 기정진이 네 해 채우고 물러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것이 관례로 굳어져 하다못해 안인수처럼 비교적 지체 낮던 이도 그만한 햇수 채우면 만족하여 물러나곤 하였다. 그런데 박규수가 한성 북부 참의대부 마치고 물러날 무렵부터는 슬슬 그런 기강이 흐뜨러지더니, 요새는 아예 저의 고을에 사람이 자신만 있다는 듯 계속 눌러앉는 이들이 하나둘 생기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조정에서 저를 바라보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도, 빈자리가 좀체 생기지 않는 탓이 있었다. 나라에 인재는 많지만 여전히 그 인재 태반은 출사하여 이름 남김이야말로 문중의 자랑이요 효(孝)의 한 끝이라 여기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기찰하여 탄핵하려 한들, 애시당초 그 자리에 유임하는 기간을 법으로 정하지 않았으니 근거가 없고, 그런 폐단 있으므로 새로 법을 정하자 하면 세인들의 갈대 같은 마음가짐으로 보았을 때 면암 선생이 공명정대하게 그런 건의한 것이 아니라 저의 후기지수들에게 자리 만들어줄 생각에 저리하였다 운운할 것이 명백하였다.

그리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그가 섬기는 주상께도, 넌지시 그 자리 받기 어려움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에서 방 데울 때 쓴다는 난로로 말하자면, 구들장 데우는 대신 직접 훈기(薰氣) 돌게 하는 것이라, 그 쇳김 쐬면 몸에 해롭다 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 정동구락부는 애시당초 그런 사람이라면 찾지 않을 곳인 데다가 살림집도 아니므로, 거리낌 없이 뜨거운 김 나오는 서양 기물로 추운 밤낮의 반가운 벗을 삼았다.

과연 문 열고 들어서자마자, 거리에 감돌던 칼바람 대신 따뜻한 기운이 온 몸을 에워싸니, 스스로 처량하게 여기던 마음도 약간은 누그러졌다.

“먼저 자리 잡고 계시지요. 가배 두 잔 내오라 이르고 오겠습니다.”

슥 보니 멀리 박은식과 면식 있는 구락부 주인 안태훈이 보였다. 저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지만, 박은식이 저의 급제한 사실을 여기저기 알리고 싶어 입이 참 간지러울 것임을 알았기에, 눈치껏 ‘그러겠네’ 하고서 빈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구락부 한 구석에 우스꽝스러운 사람 하나 있었다. 해진 도포에 나막신 차림인 것이야 그렇다 치자. 혼자 앉아 기껏 시켜놓은 가배를 가져다 놓고 마치 선승(禪僧) 면벽수련하는 것처럼 가만히 응시하는 저 모양새란 무어란 말인가?

조금 더 살펴보았더니 생김새가 언뜻 아는 사람 같기도 하고, 다시 더 생각해보니 하는 모양새도 자신이 아는 사람이 맞았는데, 다만 한 가지, 이곳 도성에 있기 어려운 사람이라, 결국 직접 묻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혹시 가헌(可軒) 선생 맞으신지요?”

“맞소만, 뉘신... 엇, 매천(황현) 아닌가!”

가헌이란 곧 박병하(朴炳夏)로, 딱히 벼슬살이에 마음 두지 않고서 오직 고지식하게 성현의 배움만을 따르는 이로 유명하였다. 스스로 이르기는 나라의 풍속이 이상해진 것이며, 자신은 오직 지금까지 선정(先正)들 밟아오신 길을 그대로 따를 뿐이라 하곤 했지만.

“거 잘 만났네그려. 이곳에 그 용한 탕약을 내주는 곳이라 하여 찾아왔건만, 식히지도 않고 이리 주니 객을 박대함이 참으로 야박허이.”

그제야 대체 왜 가배를 앞에 두고 명상을 하고 있었는가 이해가 되었다. 선비로서 체통이 있는데 휙휙 불어서 식힐 수도 없고, 혹 완상하는 다른 법이 있는가 묻기에는 또 주변에 일면식 있는 이도 없어, 그저 멍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으리라.

그리 생각하니 몇 해 전 고향 찾아갔을 때 들었던 그의 소문과 딱 들어맞았다.

“하하, 가배란 본디 차와 같이, 한 번에 들이키지 않고 향을 즐기는 것입니다.”

‘아, 그랬는가’ 하고 소탈하게 받아들이는 시늉을 하지만, 퍽 머쓱하였는지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모른 척하며 – 그것이 예의다 – 그제야 안부를 물었다. 슬쩍 보았더니 박은식도 여전히 안태훈과 두런두런 – 말이 퍽 많은 것이, 나중에 신보라도 하나 차리면 대성하겠다 싶었다 – 이야기 나누고 있었으니, 고향 소식 묻는다 한들 크게 폐 될 것은 없으리라. (아마 자신이 또 다른 사람과 말 튼 것을 보고 더욱 기탄없이 떠드는 것이겠지만.)

그리고 슬슬 그 ‘탕약’ 다 식을 무렵, 용건을 슬쩍 물었더니,

“내 우리 광양현 참의대부 어르신을 만나 뵈러 왔다네. 우리네 향회(鄕會)에 조금 이상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을 이르심인 여쭈어도 될지요.”

“실은 이러하다네. 지금 고영(皐潁) 선생께서 벌써 열 해 넘게 대부로 계시지 않은가. 하여 이번에 지기(知己) 몇몇과 의론하기를, 어쩌면 물러나셨을 때 우리 사이에서 그 자리 메울 만한 인재를 구하지 못할까 두려워 그리하심은 아니겠는가, 이렇게 얘기 나누었다네.

헌데 나중에 좌수 맡으신 사백(泗栢) 선생께서 찾아와 꾸짖기를 이미 향회에서 거국적으로 고영 선생을 계속 대부로써 두기로 합의하였거늘 어찌 분란 일으키느냐 하시더군. 하여, 혹 고영 선생께서도 아시는 일인가 싶어 이리 찾아왔지.”

즉 대부를 뽑는 데 있어 부정이 있었는가 하는 물음을 바로 그 대부 본인에게 묻겠다 하는 것 아닌가. 황현 본인도 어디 가서 선비 자처하기는 한다지만, 박병하 이 사람도 퍽 고지식하다 싶었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건 일의 본말(本末)과 시시비비는 분명 밝혀야 할 일 아니겠는가. 어차피 내년 고시까지는 이제 삼백오십일이나 남았으니, 간만에 만난 동향 사람 돕는 것도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터였다.

그리하여 가배 한 잔 잘못 마신 선비 탓에 참의원에 한바탕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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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시는 수험생이 계신다면, 모쪼록 문운(文運) 깃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이전에 한 번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조선시대 과거의 기강이 말기로 가면서 흐트러진 것은 사실이지만, 진짜 부정이 많이 개입된 것은 그 다음, 급제자의 임용에 있어서였습니다. 벼슬 얻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직 많고, 자리는 작중에 나온 것처럼 아무리 늘어도 결국 한정되어 있는데, 하다못해 그렇게 부정한 수를 써서라도 벼슬길 오를 수 있는 방도도 딱히 없는 실정이므로, 작중에 나오는 적체 문제는 언제고 터질 만한 것이었다고 자평해볼 수 있겠습니다.

작중에 잠깐 언급되는 풍림화산류나 일도일포류 같은 것은 실재하지 않는 일본 고류 무술의 유파입니다. 특히 에도 막부 시기에 이런 무술들이 유행했는데,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 전쟁에서 쓰기에 실전성이 떨어지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무예는 무예였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좌막과 토막 양쪽에서 활약한 사람들을 보면 ‘~류’를 갈고 닦은 이들 - 예컨대 사카모토 료마의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 이 많이 있지요.

그런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메이지 신정부는 무사 출신들에 의해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76년 폐도령(廢刀令)을 내려 군인과 경찰 외의 도검 휴대를 금지하였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사족들의 반란 끝에 많은 고류 무술의 맥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작중에서는 ‘무사들의 나라’ 홋카이도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경비업 내지는 용병업을 통해 명맥을 잇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사라져갈 많은 무술이 시대에 맞게 변용될 기회를 얻었습니다. 물론 작중에 나오는 것처럼 근대적 화기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점점 소규모 전술과 근접격투술이 혼합되는 형태로 변하기는 하겠지만요.

미 해군이 진주만을 조차한 것은 1875년 ‘호혜조약(Reciprocity Treaty of 1875)’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를 통해 하와이산 설탕이 관세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그 급부로 진주만을 이용할 권리를 획득한 것이었지요. 그 결과 하와이의 대미수출은 금액 기준 15년 사이 7배로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늘어난 소득과 영향력은 하와이 정부보다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던 미국인 및 미국계 하와이인 지주들에게 더 많이 돌아갔지요.

원 역사에서 일본인들의 하와이 이주는 메이지 유신과 뒤이은 혼란으로 인해 한동안 금지되었습니다. 당시 이주 브로커들의 질이 결코 높지 않아 거의 인신매매에 가까웠음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조치였습니다. (훗날 총리대신이 되는 재정의 달인 다카하시 고레키요도 이때 유학 사기를 당해 ‘계약직’ 노예로 팔려간 바 있습니다.)

작중에서는 그런 제한이 없었고, 오히려 동국의 옛 다이묘들이 ‘남아도는’ 영민을 보냈다는 묘사도 중간중간에 있었지요. 그로 인해 작중 하와이는 원 역사와는 백인 대 비백인 비율이 크게 다를 듯합니다.

한편, 풋풋한 나이에 북방에서 군생활하는 모습으로 한 번 나오고, 전우와 함께 영국 유학을 간 것으로 또 한 번 나왔던 매천 황현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사고를 치게 되는 것은 녹둔도 사건 이후에도 동일한 모양입니다.

원 역사에서 그는 1888년 생원시 복시에 장원급제를 하였습니다만, 딱히 벼슬은 하지 않고 – 아마 당시 많은 선비들처럼, 시국에 환멸을 느꼈을 것입니다 – 바로 낙향하여 구례에 머물렀습니다. 작중에서는 구례에 머물게 될 틈도 없이 경흥에서 군생활, 런던에서 유학생활을 한 탓인지 광양과의 연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의도치 않게 – 아마 본인도 모를 듯합니다 – 황현의 과거길을 막아버린 박은식은, 1886년 향시 합격 후 능참봉 벼슬을 받은 것 외에는 따로 출사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의 출신이 황해도였고, 집안도 한미했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을 듯합니다. 그러던 중 불혹의 나이에 독립협회에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정치에 끼어 들어가면서, 훗날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삶이 이어지게 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원 역사에서 두 위인의 수학 실력이 어땠을지는 알 방도가 없습니다. 작가의 창작으로 보아주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온 박병하는 1847년 광양에서 태어난 이래 주로 광양에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순국 자결하였으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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