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필부의 책임 (4)
올해 보령 열여섯인 황상은, 이미 그 성총(聖聰) 드러나매 친정한 지가 여러 해였다. 그간 나랏일을 도와 정사를 돌보면서 몸 상한 자희태후가, 하등의 거리낌 없이 안심하고 조선에서 요양에 전념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적어도, 자금성 바깥에서 남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을 때 말하는 바는 그러하였다. 천안문을 도통 나오지 못하는 소년 아이신기오로 자이티얀(載湉)이 무슨 생각을 하든, 누가 신경이나 쓸 것인가. 황상의 뜻을 받든다는 이들은 많아도 정작 그 거창한 이름 뒤의 사람이 무슨 뜻 품었는지 알고자 하는 이는 얼마나 되랴.
적어도 요새 다시 마음대로 궐을 드나들 수 있게 된 이홍장은 거기에 들지 아니하였으며, 아라사 뒷배 잃고서 저들 앞가림 급급한 그의 친부 순친왕과 다른 만인들도 역시 그에 들지 않을 것이었다. 그나마 스승으로 옹동화(翁同龢) 한 사람이 있어 마음을 써준다지만, 이홍장과 척진 사이요 유일한 벗 공친왕은 멀리 동삼성에 있으니, 그저 마음으로 그칠 뿐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단문(端門) 지나 성큼성큼 금궁 안쪽으로 들어가는 이홍장의 앞길 가로막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포석으로 깔린 대리석 밟을 때마다 거구에 맞는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 들릴 만큼 주변에는 정적뿐이라, 오히려 앞서 장지동이 공왕부 집무실에서 그에게 호소하던 말이 귓가에 도로 울렸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대인!”
“삼고(三考)한들 바뀌지 아니할 것이니 물러가시오.”
당연히 자신이 강남의 만인소 올린 소두를 추포하자고 상주하였다는 말이 퍼지는 즉시 장지동이 저의 소맷자락을 잡아끌 것이라 생각하였으므로, 이홍장은 딱히 노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라 안에서 자신 다음으로 심려 깊을 장지동의 모책(謀策)이 원려(遠慮)에만 쏠려 목전의 시급한 일은 가볍게 여김을 안타깝게 볼 뿐.
“대저 불이란 아궁이나 등잔에 머물면 만백성이 편리로 삼지만, 이를 벗어나면 곧 재난이 되오. 지금 나라의 민심은 마치 어린아이가 불장난을 하는 것과 같소이다. 그대도 보지 않았소? 아무리 아조에 서생 많다지만, 부마다 일만 명을 채울 수 있을 리가 있소?
저것은 초야의 현사(賢士)가 건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난언(亂言)에 마음 흔들린 어리석은 백성들이 떼를 이룬 것에 불과하오. 내 그런 일은 소싯적 종군하면서 많이 보았으니 잘 알고 있소이다.”
그나마 그 역괴 홍가처럼 무슨 해괴한 사교를 내세운다던가, 염군처럼 도둑질 하나만을 대의로 내세우지는 않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하지만 사사로이 정사를 논함은 곧장 그런 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요, 누차 이야기하였듯 그렇게 될 위험을 감수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나라 사정이었다.
장지동이라면 바로 그런 생각이야말로 백성을 반역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쏘아붙였을 터였으니,
“대인! 아무리 저들이 고작 거인(擧人) 넘지 않는 용렬한 필부라 하나, 모두 대청의 백성이요 사직의 기둥입니다! 지나친 바가 있다 하여 모두 쳐내면 어찌 천조가 다시 서겠습니까! 정녕 또 강남에 병란 일으키실 마음이십니까! 어찌 불을 끄겠다 하시면서 마른 섶 옆에 횃불을 가져다 대려 하십니까?”
이리 말함도 놀랍지는 않았다. 결국 백 번 말해도 설복하지 않을 것이었는데, 말이 닿지 않으면 거기서부터는 결국 힘이 나서야 하는 법.
“그대 이르는 바에도 일리가 있소. 그러니 교묘한 말을 꾸며 속이거나 꾀어내는 대신, 이렇게 직접 알려주겠소이다.
내 당장 입궐하여 앞서 주청한 대로 당장 군병을 내자고 아뢸 것이오. 일벌백계하는 심정으로 각 부현을 돌면서, 먼저 만인소 올린 소두를 잡아들여 신문하고, 그러고도 민심 어지러우면 하나씩 내려가 잡아들일 것이오. 그리하여 경거망동하는 무리를 끊어 없애고야 말 것이외다. 불살라 없애려 하는 것은 개중의 독버섯에 불과하오. 섶에 불이 옮겨붙는 것이 두렵다고 하는데, 미리 그 섶을 치우는 것이 그대가 힘쓸 바 아니오? 강남 여러 성의 총독과 순무들을 이끄는 자로서, 어찌 감히 불충한 생각을 품겠소이까.”
세상 만사를 장지동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야, 그가 좋아하는 저 강남 민심대로 공회니 뭐니 하는 놀음에 함께해 주겠지만, 만약 이렇게 북양군이 곧장 상해와 소주부터 시작해 만인소 올린 순서대로 고을들을 훑기 시작한다면 결국 택할 수 있는 길은 돕든가, 돕지 않든가, 이렇게 둘 중 하나뿐이었다.
전자를 고른다면 이는 대청을 위하여 민심을 거스름이지만 또한 신하로서 충의 다하는 것이요, 후자를 취한다면 반민을 위하여 대청을 거스름이니 후대에 무어라 평하든 금세에는 곧 역(逆)이었다. 그리고 어떤 쪽도 택하지 않는다면, 양쪽에서 모두 매도를 당할 터.
“이 장 모, 대인의 의중을 잘 알겠습니다. 어찌 더 말을 꺼내어 대인의 심중을 어지럽게 하겠습니까. 이만 물러가고자 합니다.”
“그리 하시오.”
물론 이를 모를 리 없는 장지동이므로, 굳이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부득불 이홍장 자신의 뜻대로 따르겠지만 그 전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든 북양군이 내려가지 못하게 할 터였다.
그 옛날 처음 철도의 일이 거론되었을 때는 벼슬 내려놓고 조선국까지 찾아간 장지동이다. 비록 그때 이후로 그도 나이를 먹었다지만, 여차하면 천안문 옆 성벽을 직접 타는 한이 있더라도 저의 옳다고 믿는 바를 직소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장지동이 최대한 끓는 마음 숨기면서 예 갖추고 나가자마자, 곁을 지기던 원세개를 불렀다.
“위정(慰庭. 원세개의 字).”
“예, 대인.”
“천진에 전보를 보내게. 북양군 5개 영을 차출하여 우선 상해를 들이치고, 거기서 철도를 따라 남경까지 올라갈 계획이니 출병을 준비하라고.”
“따르겠습니다.”
마침내 뭔가 일어난다는 만족감에 머리 숙인 원세개의 입꼬리가 슥 올라가는 것을, 눈높이 과히 높은 이홍장은 보지 못하였다.
“장 대인의 일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남양대신은 내 남벌을 주청하기 전에 황상을 직접 뵈려 할 것이야.”
“예, 말로써 타이르는 시늉을 하며 붙잡아두도록 하겠습니다.”
원세개가 뒤에 덧붙이려던 말을 곧장 받아 완성하였다.
근래 부쩍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원세개였다. 연배로 따지면 한참 젊은데, 오히려 마건충 같은 오랜 막료들보다도 더 저의 뜻을 잘 따라주는 면이 있어 이홍장은 근래 그를 아끼고 있었다. 도의와 원칙을 놓고 고민하는 것은, 북양대신 한 사람으로 족할 터였다.
“너무 무리할 것까지는 없네. 나 또한 지금 바로 입궐을 청할 것이니.”
아마 지금쯤이면 장지동도 자신이 입궐하였음을 눈치 채고, 분기 삭이면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물론 직제로 따지면 저와 같은 급인 남양대신이니, 저의 아랫사람들이 막아본들 오래 붙잡고 있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 전까지 확실히 어지를 받아내기만 하면 될 일. 그리 되면 장지동이 아무리 홀로 고심해본들 없는 수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니, 결국 저의 뜻대로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
만에 하나 엉뚱한 사람이 있어, 황상의 마음을 달리 움직여 저의 뜻대로 처분하지 못하게 하는 일만 없으면 될 것인데, 강남에서 올라온 만인소가 본래 어느 나라에서 기원하였는지를 미처 심계에 넣지 못한 이홍장의 실책이 여기서 드러났다.
“북양대신 각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눈앞의 오문(午門) 쪽문이 열리기에 누구인가 살피었더니, 조선국 공사 김기수(金綺秀)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 무슨 일인지 묻자,
“근래 대국 안팎의 사정을 황상께서 하문하시기에, 알현하여 아뢰었습니다.”
‘근래의 사정’이라 하면 굳이 지금 만인소의 일이 아니라 하여도, 유구국 찾아간 흥선군의 건, 멀리 하위이(하와이)국에서 도움 청한 건. 당장 떠오르는 일만 하여도 한둘이 아니다.
대청과 조선국이 같은 자주지국이지만 그럼에도 상국으로 모시는 예를 폐한 것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종종 조선 공사가 이렇게 배알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전례로 따져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이니, 어찌 의심하지 않겠는가? 더 물으려 하였더니,
“군국의 사무로 바쁘실 터인데 어찌 함부로 붙잡겠습니까. 모쪼록 뜻하시는 바를 이루시어 좋은 공을 세우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하면서 은근슬쩍 빠져나갔다.
확인하는 것은 뒤에 할 일로 남겨두고, 발걸음 재촉하니 어느새 중화전(中和殿) 앞에 당도하였다.
목소리 한 번 가다듬고 입시를 고하였다니, 곧장 여린 목소리로 ‘들라’ 한 마디. 아무리 연소한 황상이라지만, 추호라도 가볍게 생각함은 가당하지 않은 일이다. 세간에서 무어라 하든 스스로 권신의 축에 든다 여기지 않는 이홍장이므로, 한 번 더 몸가짐을 삼가고서는 들어 예를 갖추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책상 위에는 서책이 한가득이요, 개중에는 양서(洋書)도 적지 않게 끼어 있었다.
잠시 고개 살짝 올려 서책을 살피니, 표지만 보아도 옛적 『사주지(四州志)』부터 근래 조선국에서 나와 한문으로도 옮겨진 바 있는 옛 조선국 대신 박 모의 『만국사정(萬國事情)』까지, 천생 옛 서생인 옹동화가 보면 까무러칠 만한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저 서책을 바쳤겠는가? 저를 공연히 자극하려 하지 않는 순친왕은 아니다. 자신도 비록 진충보국하는 마음 가득하다 자부하지만, 또 황상의 주변에 어지러운 혀 놀리는 자 많음을 알았기에 저런 근래의 시무(時務)를 함부로 고하지 않으려 힘썼다. 공친왕으로 말하자면 역시 저의 동삼성에 안주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빌미를 주지 않는 한 이렇게 몰래 뒷공작을 펼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의심가는 곳은 단 하나인데 -
“앞서 조선 외신(外臣) 김 모가 들어와 이처럼 서책을 헌납하였으니, 어찌 기특하지 않은가.”
당황한 기색 애써 감추었다.
“번병 조선국이 이처럼 밝은 정사 돕기를 마다하지 않으니 실로 사직의 홍복이옵나이다.”
“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어찌 절로 그리 되었겠는가? 먼저 스스로 돕는 덕이 있어야만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되어 덕과 복이 베풀어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이름인가? 쉬이 짐작할 수는 없으나 평소 자신을 대하기 어려워하던 황상이므로 – 신하로써 참 무엄한 얘기지만, 우선 덩치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 지금 그가 듣는 것은 짧지 않은 시간을 들여 공들인 말과 구(句)임이 명백하였다.
“뭇 백성이 아름다운 정사를 돕고자, 분발하여 상소를 올렸으니 이는 전고에 없던 일이다.”
친부 순친왕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정작 저를 ‘아버지’라 부르라고 강요하던 서태후도 조선으로 쫓겨가, 두 번이나 아버지를 잃게 된 외로운 소년에게도 어찌 되었건 세월은 지나, 지난 정변이 없었더라도 슬슬 친정(親政) 나섰을 법한 때에 접어들었다.
허나 좌고우면한들 저의 편은 벌써 마음이 늙어버린 서생 옹동화 한 사람이 전부요, 세간에서 헛되이 저를 두고 총명하다, 지재 특출하니 대청의 홍복이다 하는 말의 사분지일 정도만큼은 들어맞았기에, 그런 고장난명의 형국을 모르지 않았다.
“하물며 그 수효를 보면, 지금도 계속 상언하는 글이 들어오고 있는바 가히 수백만이 될 것이니, 몸은 이 전각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벌써 장강을 건넌 듯하다. 열성조 이래 짐과 같이 백성의 지극한 마음을 받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저를 억누르는 사람도, 부르는 사람도, 의지하는 사람도 없어 그저 문연각(文淵閣) 서책을 벗삼고 있었는데, 저 절절한 상소문을 보게 되었다. 물론 그 글에 자신에게 간청하는 글귀 들어있는 것이 진심은 아니요, 그저 겸양하기 위한 뜻임을 모르지 않았건만, 그럼에도 울컥하는 마음 드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이는 이름이 십만을 넘어 백만까지 차곡차곡 쌓여가는 동안, 그리고 장지동과 이홍장이 공왕부에서 티격태격하는 동안, 자이티얀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었던 조선국에 직접 묻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도 외세를 끌어들인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여러 왕조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혼자 웃기도 했다.)
김기수 그 자에게 물어 그대 나라에서는 이처럼 신정(新政) 베풀 때 반대하는 자 있으면 어찌 하였는가, 완강하게 막으려 하는 자는 어떻게 설복하였는가 등을 묻기도 하고, 또 긴요한 서책이 있으면 구해서 바치라 하기도 하였다.
그랬더니 – 자이티얀은 알 수 없는 사정이었지만 – 멀리 한양의 귀남 생각하기에 어려서 부모님과 생이별한 어린 황제가 스스로 공부를 하고자 한다 하니 참 기특한 것이어서 (물론 그런 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진력하여 도우라 하였으므로, 곧 이렇게 자이티얀 앞에 각종 서책이 쌓이고, 무엇보다 귀남이 지금껏 대신들을 설득하는 데 종종 썼던 심법(心法)의 일부가 기묘하게 전해지게 되었다.
“강호의 백성들마저도 폐정을 고쳐 함께 선왕의 아름다운 법도 이루자 하면서 이와 같이 상언하였다. 한낱 필부도 그리할진대, 대청의 무거운 사직을 받드는 이 한 사람이 저들 백성만 수고롭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장차 변법(變法)을 크게 베풀어, 우선 저들이 청한 대로 공회(公會)를 널리 두고자 한다.”
“황상께서 깨우치시는 바가 그윽하여, 어리석은 신에게 크나큰 가르침을 내려주시었으니 참으로 황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허나 우려되는 바가 있으니, 혹 망측한 마음을 품은 자들이 그 사이에 끼어, 오직 대업을 어그러뜨리고자 분란 일으킬까 싶어 미신(微臣)은 이를 두렵게 여깁니다.
더불어 강남 백성이 청하는 공회라는 것은 전례가 없는 새로운 법도인데, 지금과 같이 부흥의 이로움이 있는 때를 맞이하여 서두를 일이 그 외에 적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덕은 서생 강씨를 신원하는 데서 이미 드러났으니, 지금 칙유(勅諭)하신 바를 마음에 새겨 훗날 더욱 성대하게 이룩함이 어떠하겠사옵나이까?”
과연 예상한 반박이 나왔으므로, 예비한 답변을 꺼낼 때였다.
“그러나 지금 그대가 이르는 그런 간악한 자들은, 오히려 감추려 하면 파고들고 숨기려 하면 더욱 퍼지기 마련이다.”
이홍장이 서둘러서, 강남 서생들 청하는 대로 공회의 제도를 널리 둔다면 비단 강남뿐 아니라 모든 성에 그리하여야 할 것인데, 전례가 있던 제도도 아니요, 좁은 조선국의 방도를 따오는 것이므로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라 둘러대자,
“우선 행하지 않고서 어찌 폐단을 알겠는가? 내 서책을 상고하여 보니, 다스리는 강역 넓은 대서의 나라들은 간혹 율호사(律好司, 영국 상원, 귀족원)와 감문호사(甘文好司, 영국 하원)를 따로 두고는 하는데, 이는 『사주지』 등에도 그 법도가 상세하게 나와 있을뿐더러 그 나라에 가 있는 우리 흠차대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다.
이로써 향신들이 하나의 모임을 이루고, 군기대신들이 그 위에 하나의 모임을 이루게 하면, 폐단은 반이 되고 효험은 곱절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으므로, 이번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으면 반드시 의결이 어려워지고, 더구나 제도가 크게 번잡하여 급한 기무를 살피기 어려울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덕의지국의 제도는 어떤가? 그 나라는 하나의 대신에게 힘을 실어주어 그대가 이르는 폐단이 적다고 하였다. 그것도 불가하다면 법국은 어떻겠는가?”
자이티얀이 전해 듣기로, 조선국왕은 무엇을 할 때 신료들이 불가를 아뢰면 이렇게 다른 안들을 마구 내어놓았다고 하였다. 그리하다 보면 그 중 차마 택할 수 없는 것과 그래도 폐단 적은 것이 절로 가려져, 알아서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었다.
과연 ‘법국’이야기가 나오자 이홍장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나라는 임금이 있다가 중간에 폐한 것이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하지만 딱히 이홍장에게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처럼 바다 밖의 제도 중에는 천조에 들일 수 없는 것이 있고, 또 반대로 들여서 크게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으니 적당히 가감함이 마땅한 일이다. 그대가 아조를 보필하는 공은 실로 보천욕일(補天浴日)이라 일컬을 만하니, 바라건대 이러한 일에도 힘써 나라의 다스림에 통하정(通下情, 아래의 사정이 통함)하게 할지어다.”
“황은의 망극함을 어찌 말로써 다하겠사옵나이까.”
공왕부로 돌아오니 원세개뿐 아니라 이곳 북경에 머물 때 대동하는 막료 몇이 모여, 그의 말을 듣고자 하고 있었는데, 최대한 돌려서 황상께서 하명하신 바를 털어놓으니 그나마 답답한 심정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되니 조금은 냉정하게 사안을 볼 수도 있게 되었다.
무엄한 언사로, 조정이 함풍(咸豐) 연간 이래 조정답지 못하였던 이유는 지존의 무심함이 그 중 하나였다. 그 자리에 쌓아올려진 막강한 힘이 있는데 이를 쓰지 않고, 정작 엉뚱한 사람이 기웃거리며 조금씩 빌려 쓰는 정도였으니, 그나마 서태후 정도가 한때 거기에 가까웠을까.
차라리 아무도 그 힘을 꺼내어 쓰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정국에서와 같이 오직 자신이 지닌 것만으로 겨룰 터이니 이홍장 자신만한 이가 없겠지만, 이제 한편으로는 강남 땅에서 서생들 중 간혹 홍흉(洪凶, 홍수전) 같은 자들이 있어 당당하게 저의 목소리 들으라며 나설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으신 황상께서 칙유 내리실 터이니, 자신이 꿈꾸던 양무와 강병의 일은 더더욱 멀어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길이야말로 충심 가득한 것이라고 여겨왔지만, 시운이 이리도 돕지 않으니, 누굴 탓하겠는가?
“대인, 허나 이야말로 천하의 민심을 한데 모아 중흥의 대업에 힘 다하게 하는 방도가 될 지도 모릅니다.”
원세개가 문득 발의하였다.
“대인께서 이루신 공이 막대함을,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자 중 모르는 이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 눈과 귀를 가리는 흉한들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운몽(雲夢)의 연회를 여시지요.”
나이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이가, 꽤 그럴듯하게 절묘한 꾀를 내놓으니 좌중의 이목이 쏠렸다.
“개중 반드시 삿된 마음 품은 자들이 나올 것인데, 이들을 모두 잘라내고 민심을 한데 모으면, 그때야말로 천하의 총의를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놓고 북양군을 쓸 수도 없는 일인데, 넓고도 넓은 중원 천하에서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문이 다른 이들 눈에 어림을 본 원세개가 말을 이었다.
“조선국이 쓰는 꾀를 저 강남 백성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듣기로 조선국 대신 흥선군은 행상들을 그러모아 저의 수족으로 부렸다 하는데, 계책이 절묘하여 취할 만합니다.
소인이 얼마 전 천진에 들렸을 때, 저자에서 광대 놀음하는 자들을 보았습니다. 말하기를 몸뚱이가 쇠와 같아, 칼과 창으로도 상하게 할 수 없고, 그 주먹으로 부술 수 없는 것이 없다며 뽐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놀음을 자세히 보니, 기실 권법(拳法)에 바탕한 것이었으며, 그 행하는 바는 사실 깊은 도로써 심신을 단련하여 마침내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자들로 하여금 나라의 훌륭한 정사를 거들게 하면, 마침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홍장이 그들의 이름을 어떻게 할 것이냐 묻는다면, ‘의화단(義和團)’은 어떻겠냐고 덧붙일 생각 품으며 원세개가 말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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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서세동점의 상황에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특유의 정치체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명대를 거쳐 황제의 권력은 계속 강화되었고, 청의 황제들은 이를 인수하여 막강한 힘을 행사하였지요.
그런데 건륭제 이후 아이신기오로 황가는 이러한 권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황제를 배출하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함풍제 사후 즉위한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는 모두 너무 어릴 때 즉위하여 황제의 권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지요. 이는 한편으로는 점점 약화되는 물질적 국력을 한데 결집시키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정당한 권력을 행사할 기반이 사라지면서 많은 비효율이 발생했습니다. (조선에서 숙종의 환국정치가 훗날 세도정치로 이어졌던 과정을 생각하면 좋은 비교가 됩니다.)
예컨대 흔히 서태후의 사치로 비판되는 것 중 하나로, 해군 예산을 자신의 생일잔치에 사용해 청일전쟁에서 북양함대가 진흙으로 만든 모의 포탄을 쏘아야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물론 서태후 본인의 행실도 완전히 바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과시적 소비를 통하여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는 것 외에 다른 정치적 생존의 방법이 없던 측면도 있었습니다. 즉 인품뿐 아니라 구조의 문제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앞서 언급한 세 황제 중 그나마 장수하였던 광서제는 역설적으로 셋 중 가장 승계의 정당성이 약했습니다. 순친왕 이후완의 아들인 광서제는 이모 서태후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으로 제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원래는 광서제의 다음 항렬 (즉 선통제 푸이의 항렬)에서 황제가 나와야 했던 것을 억지로 비튼 것이었습니다. 아마 여기에는 황제로 하여금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서태후의 심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야사에 따르면 광서제는 어려서부터 서태후에게 완전히 ‘붙잡혀 사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강요하였다고도 하지요. 하지만 그처럼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의지만은 꺾이지 않아, 청일전쟁의 충격을 이용해 마침내 강유위 등 변법파를 등용해 변법자강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과격한 개혁이 이어지면서 서태후를 중심으로 다시 보수파가 결집하고, 야심만만한 젊은 군벌 원세개의 배신까지 겹치면서 강유위는 캐나다로 망명을 가고, 광서제는 사실상 궁내에 유폐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이후 1908년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는 후일 독살로 밝혀졌습니다.
그나마 개혁노선의 몇몇 가닥은 서태후와 보수파들도 그 필요성을 인정했기에, 의화단 운동의 실패 후 최후의 몸부림이라 할 수 있는 광서신정(光緖新政)이 추진됩니다만, 이미 청일전쟁 패배 후 개혁 대신 의화단 운동을 택하여 열강의 반식민지 지위로 전락해버린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정치구조와 과거제 혁파로 인해 자신의 설 자리를 잃게 된 향신과 여타 지방세력들은 청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대신 무장투쟁이나 분리독립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는 신해혁명 시기 동시다발적으로 중국의 각 성들이 분리독립을 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길게 보면 광서제 시기의 개혁 실패가 훗날 군벌 시기의 대혼란과도 일종의 연관이 있는 셈이지요.
작중에 언급되는 ‘율호사(House of Lords)’와 ‘감문호사(House of Commons)’는 아편전쟁 직전의 활약으로 유명한 임칙서가 『사주지』를 편찬하면서 사용한 음역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