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필부의 책임 (3)
북양대신 이홍장은 끽해야 경조(북경)와 천진, 보정을 오갈 뿐인데, 자신은 왜 치소 지키는 날이 이리도 드물다는 말인가. 순식간에 모여든 만인소 전부, 그러니까 『소주만인소』와 『항주만인소』, 『소흥(紹興)만인소』, 그리고 『통주(通州)만인소』 지참하여 북경까지 올라온 장지동의 실없는 한탄이었다.
이 만인소라는 것은, 조선을 오가던 시절 ‘이런 것도 있다’ 정도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나라가 작다 보면 그렇게 상소도 올리고 할 수는 있는 일이요, 또 예로부터 조선은 인군(人君)은 약한데 인신(人臣)은 강한 풍속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땅에서 행하는 바를 이곳 중원에 그대로 옮기려 하니, 자칫하면 그대로 무함하여 모두 반역죄인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을 터였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 그리고, 일이 완전히 어그러지게 되면 저의 변명 정도는 할 수 있도록 – 이렇게 직접 배 타고 올라오게 된 것이었다.
여전히 이홍장이 북경에 머물 때의 집무실로 쓰고 있는 공왕부는, 중간에 잠시 이곳저곳 쓰기 위해 손을 대었다가 급히 도로 물린 흔적이 역력하였다. 시세의 흐름 하나 놓치지 않는 이홍장이므로, 아마 이대로 만인과 한인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 ‘만주지국(滿洲之國)’ 동삼성에서 공친왕이 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괜히 트집잡힐 일이 없도록 조처한 것이리라.
허나 어찌 되었건 아직 북양대신의 위세는 등등하여, 사람과 문서의 출납으로 번잡하였다. 그의 시위를 맡은 원 모의 안내를 받아, 공왕부 안쪽으로 들어섰다. 서양식 책장에는 양이의 서책 몇 권, 익숙하게 장정된 서책 몇 질, 그리고 반대편에는 만국전도 병풍. 책상 위에는 어지럽게 놓인, 보고하고 통지하는 수본(手本)들.
금궁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척 보아도 이곳이야말로 나랏일 다루어지는 곳임이 명백하였다. 그 옛날 파천으로 조정은 얼마 없던 위엄을 또 잃고, 그렇게 기껏 체통 버려가며 얻은 아라사의 지지는 또 속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니, 나라의 정사가 자연스레 북양대신에게 몰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일 터.
“아, 향암(香巖, 장지동의 호), 어서 오시오.”
“이 대인을 뵙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소.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이홍장은 서둘러 보고 있던 글에 수결을 하고서, 저와 함께 들어온 원 모에게 넘겨주었다. 전혀 밝지 않은 안색은, 썩 좋지 못한 심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 인천부에서 들어온 동정 보고였소. 유구국에 이어, 멀리 바다 가운데 하위이(夏威夷, 하와이 왕국)가 또 조선에 도움을 청하였다 하더이다. 나라 안의 미리견인들이 국왕이 실덕(失德)하였으니, 국헌(國憲)을 고쳐 그 위엄을 한정하여야 한다면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더군.”
실제로는 그나마 가깝겠지만, 영국을 가운데에 둔 만국전도에서는 오른쪽 끄트머리에 조선이 있고 왼쪽 끄트머리에 그 하위이라는 나라가 있어 정말 그 사이가 멀게 느껴졌다.
“천조에 입조하기는커녕, 그 어떤 사서에도 나온 바 없는 오랑캐 나라요. 그런 나라까지도 도움이 필요할 때 천진이나 상해 대신 조선국을 찾아가고 있다 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소.”
“그렇습니까.”
바다 바깥 오랑캐가 무엇을 하든, 장지동이 생각하기에는 이 나라와 백성의 힘을 다시금 북돋는 것이 훨씬 중한 일이었는데, 이홍장 생각은 또 다른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 옆으로 가서는, 대서 여러 땅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내 근래 서양의 사서를 여럿 구해 읽고 있소. 그것 아시오? 전조 홍치(弘治) 연간에 서반아(스페인)와 포도아(포르투갈) 두 나라가 천하가 저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있었는데, 곧 서반아가 포도아를 병탄한바 무엄하게 자처하기를 천하의 주인이라 하였다 하오. 그 강역은 서쪽으로는 아미리가의 절반을 차지하고, 또 동쪽으로는 주사(舟師)의 흥성함에 의지하여 천축(인도)을 지나 여송(루손)에 닿았소.
그런데 그때 화란국(네덜란드)은 서반아에 번속된 나라로, 그 나라에 입조하여 섬기고 있었는데, 저들의 힘이 강성해지자 곧 반심을 품고, 바다 건너 영길리와 맹약을 맺고, 또 스스로 바다를 가로지르며 저들의 세력을 떨쳤소. 그리하여 마침내 떨어져 나가겠다며 싸움을 걸어오니,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쇠락하고야 말았다 하오.”
“허나 조선국은 아직 의리를 다하고 있습니다. 여태껏 우리를 위하여 도운 일이 몇 번이나 되었습니까.”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천진 교안에서 한 번 도움을 받았고, 또 본인이 직접 한몫 하였던 동철의 일에서도, 또 근래 유영복의 월남 사안에서도 조선이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를 위함이라! 어쩌면 그대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허나 앞으로도 계속 그리하리라는 보장이 있소이까? 저들이 우리 땅과 재보를 빌려 흥성케 한 국운으로, 날카로운 창칼을 닦아 우리의 복심(腹心)을 노리지 않으리라는, 그런 장담을 그대는 할 수 있겠소?
그러니 믿을 것은 오직 무위(武威)뿐이오. 이번원의 제도를 혁파하고 새로이 외번(外藩)에 건성(建省)하여야 한다고 상주하였던 것도, 대서 나라들이 우리를 노리지 못할 때 변경에 세력을 다져야 하기 때문이었소이다. 이처럼 하루가 급한 판국이니 오직 국론을 하나로 모음이 중할 뿐이오. 지금 강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의원과 공회 운운하는 의론은, 후일로 미루어도 될 뿐 아니라 반드시 미루어야 한다, 이 말이외다.”
“허나 이르신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굳이 성현의 말씀을 거론할 것도 없이, 당장 정교한 총포와 매서운 전선(戰船) 갖춤에 은이 들지 않는 일이 없고, 그 은의 출처는 결국 백성의 소산(所産)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한들 아조 이백오십년, 아니, 도당씨(陶唐氏) 이래 오천 년간 백성이 작란한 일은 있을지언정 부세(賦稅)의 쓰임을 놓고 가부를 직접 논하겠다며 나선 일은 없었소이다!”
마침내 본론이 나왔다. 반발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나이 먹고도 덩치는 그대로인 육척 장사 이홍장이 한 번 인상을 쓰니 곧장 방 안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나라 안에서 조정의 위엄이 무너진 것은 몇 년이며, 또 나라 안 다툼으로 허송세월한 것은 몇 년이오? 그런데 이제 또 하찮고 자잘한 의론에 스스로 얽매이고자 하면 언제 무너진 위엄을 다시 세우겠소? 우리 백성들조차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을진대 어찌 바깥 나라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겠소?”
소주에서야 당장 억울하게 붙잡힌 강유위의 석방을 탄원하는 것이 주(主)요, 그가 설파한 이른바 ‘필부의 책임’을 위하여 참의원이든 공회든 하의원이든 둠이 가하다고 하는 것은 그저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강유위와 같은 마음임을 보이고자 하는 뜻이었으니 객(客)에 지나지 않았건만, 당장 부의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그러한 구분은 흐려지기 시작하였다.
천하를 경륜함에 만사를 공(公)에 따르게 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부세를 징수하는 일에서 사사로움이 없게 한다. 말은 거창하지만 결국은 나라가 물리는 세금을 조금이라도 줄일 방편을 향신(鄕紳)에게 쥐어주겠다는 뜻이었는데, 중원의 풍속이 치부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 것이 적게 잡아도 수백 년은 되었으므로, 이러한 부세의 논리가 강유위인지 강무위인지의 석방보다는 훨씬 중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르시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요.”
더 말해본들 화만 돋울 것이 명백하였다.
“내 상주하여 소주 백성들의 뜻을 따라 강씨 서생을 신원(伸冤)케 하자고 건의하겠소. 대신 그대도 민심을 위무하여 공회나 의원 같은 헛된 말이 더 나오지 않도록 함이 가할 듯하오.”
“말씀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남쪽에서는 한 고을이 나서면 그 옆도 따라하는 식으로 연이어 만인소를 써 올리고 있을 터인데, 이는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각 부(府)마다 이렇게 상소문을 올린다 한들, 소주와 그 주변을 다 합하여도 고작 십만, 더 해도 이십만을 넘지 않을 것이오. 그 정도로는 천하의 민심이라 하기 어렵지. 그러니 여기서 관이 나서서 놀란 민심을 어루만지면, 이번 소동은 자연히 움츠러들고 공론(空論)은 세인에게 잊힐 것이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부득불 상서롭지 못한 방편으로써 아조의 나머지 민심을 구하여야 할 것이고.”
그러나 이미 장지동이 타고 온 그 다음 연락선을 통해 또 만인소 열 통이 올라오고 있었으며, 강소성과 절강성 넘어 안휘, 호북, 강서, 심지어 호남까지 소문이 퍼지고 있었으므로, 이홍장의 움직임은 늦어도 너무 굼뜬 것이었다.
호남성 장사부(長沙府)에서 상강(湘江)을 거슬러 백 리 물길을 올라가면, 대읍 상담현(湘潭縣)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산 따라 팔십 리쯤 들어가면 거기서부터는 소산(韶山)인데, 전설에 따르면 옛날 옛적 순임금도 족적 남겼다 할 만큼 유서 깊은 곳이라지만 지금은 별난 면도, 별 볼 일도 없는 조그만 고을이었다.
그 둘레에는 더 조그만 마을들이 나지막한 산기슭 따라 점점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런 마을 중 하나에 야심찬 젊은이가 있었다. 나이는 열여덟이지만 아비가 일찍 작고하여 벌써 한 집안의 가장 노릇하는 이 젊은이의 이름은 모이창(毛貽昌)이라 하였는데, 물론 그 야심이라 해보아야 가난한 농군 신세 벗어나 번듯하게 장사나 해볼까 하는 정도였지만, 여하간 남들처럼 평생 땅 파먹고 살 생각 하지 않는 데서 벌써 야심이 있다고 일컬을 만하였다.
그 야심의 첫 한 발 내딛게 된 것은 네 해 전으로, 북쪽의 한양(漢陽, 현 우한)에 엄청난 기기창인지 병공창(兵工廠)인지 하는 것이 생겼다 하여 이것이야말로 신세 고쳐볼 기회다 직감하고서 나이 열넷에 혈혈단신으로 강 오르내리는 배에 몸을 실었다.
풍문에 따르면, 그 강남에서 위세 높은 남양대신 장 대인이 세 치 혀로 고려국 임금이 비장해 둔 은자 수천만 냥을 얻어와서 지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장대인이니 고려니 하는 것보다, 그 은자 중 일부가 짭짤하게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또래보다 큰 허우대 덕에 공장 경비로 취직을 했는데, 틈틈이 공장의 일도 이것저것 돕다 보니 불과 두 해 사이에 그의 아비가 남긴 빚을 갚고도 남을 은을 모았다.
그리하여 비단옷까지는 아니어도 고려산 인천목으로 새 옷 차려입고 고향에 돌아왔다. 한 번 그렇게 은을 만지다 보니 다시 농사로만 먹고살 생각은 영영 없어졌으므로,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 이런저런 채소나 곡식 따위를 읍에 내다 팔고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들여오는 일을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 생각에도 모이창에게 시장 쪽 일을 맡기고 그 시간에 김이나 한 번 더 매는 편이 훨씬 나았으므로, 곧 그의 작은 사업은 번창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서너 해 안에는 행상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점포도 하나 낼 수 있을 것이요, 계속 하다 보면 농토도 사들여 지주 소리 들을 수도 있을 터였다.
“망할 여편네... 논두렁 지나가다 돌부리에나 걸려 자빠져라!”
그렇지만 정작 읍내로 향하는 그의 머릿속에는 신나는 상상 대신 짜증 가득하여, 입에 욕지거리 감돌고 있었는데, 연유를 살피자면 오늘 아침 집 나서기 전 아내 문씨(文七妹)와 대판 싸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온 뒤 곧 아내의 배가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아이가 닷새를 못 넘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히 사람이 태어나기도 하면 죽기도 하기 마련이요, 간혹 불행하게도 태어나자마자 죽기도 하고 그러는 것인데, 아내는 필히 무언가 자신이나 저의 남편이 잘못한 것 (대개는 후자)이 있어 그리 된 것이라 툭하면 우겨대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지나가는 자칭 도사에게 아까운 쌀을 거하게 퍼주고는 점을 보았는데, 그자가 말하기를 집안에 화기(火氣) 가득하여 그런 것이라면서,
‘반드시 아이의 이름자 가운데에 수덕(水德) 있는 글자를 넣어야만 아이가 복을 받을 것이외다.’
하는 것이었다. 이름까지 지어주겠다며 복채 더 내놓으라 할까봐, 허황된 소리 관두라며 쫓아내었더니, 아내는 그것을 마음에 꾹 담아두고서, 그가 읍내로 갈 때마다 그때 그 도사 만나면 반드시 얼마를 주어서라도 이름자를 받아오라 하였다.
그가 조금만 더 글에 밝았더라면야 적당히 아무 이름이나 지어서 둘러대었겠지만, 좀처럼 그럴듯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계속 욕지거리 삼키기도 하고 내뱉기도 하면서, 늘 그렇듯 달구지 끄는 짐말과 함께 읍으로 향하고 있는데, 멀찍이 늪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늪은 네 해 전 산사태로 물길이 막히면서 생겼는데 - 아직 이름이 없어서 그냥 ‘동쪽 늪’이라고 부르곤 했다 – 어쩌다 보니 위치가 딱 진가장(陳家莊), 노왕장(老王莊), 철피촌(鐵皮村) 세 마을 가운데라, 왕래하는 사람들 많고 소일하는 노인도 종종 찾곤 하였다.
“엇, 소산촌 쪽에서 오는 행상이면 젊은 모가 아닌가?”
“호, 그렇군. 이보게, 마침 잘 만났네. 여기 잠깐 들렸다 가보게나.”
오늘도 어김없이 노인 몇몇이 서 있기도, 앉아 있기도 했는데, 저를 부르기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그 구성이 조금 달랐다. 진가장의 진씨 어르신, 노왕장의 왕씨 어르신, 그리고 이름은 몰라도 어째 상담현성에서 나온 듯한 말쑥한 서생 몇몇.
공손하게 예를 갖추자마자 – 평소 인상이 장사의 절반이라는 것은 그가 한양에서 배운 세상살이 비결 중 하나였다 – 그 중 진씨 어르신이 곧장 묻기를,
“자네 이름 좀 빌리세.”
“이름 말씀이십니까, 어르신?”
“그렇지. 자네 이름 석 자 말일세.”
흘깃 들여다보니 조그만 책상 하나 가져다 놓고서 그 위에 두루마리를 펼쳐 놓았는데, 빼곡하게 들어찬 것이, 배움 짧은 자신이 보아도 우선 경서는 아니요, 인명과 수결(서명)을 죽 나열한 것이었다. 그 표제를 보니 이름하기를,
“장사... 만인소(長沙萬人疏)? 맞게 읽은 것인지요? 이런 소장은 처음 봅니다만.”
“우리도 처음일세. 그런데 뭐, 그렇게 따지면 자네 일하다 온 그 병공창인지 뭔지는 원래 있던 것인가.”
왕씨 어르신은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마침내 세상이 조금 나아지려는 모양이야. 암, 우리 젊었을 적만 하여도 그렇게 대란하였던 천하가 마침내 조금씩 태평해지지 않는가. 그 유 장군이라는 분도 나오고 말이야.”
소싯적에 천하를 조금 주유하여 – 상군을 따라 종군하였는지, 아니면 은근슬쩍 도적 무리에 끼어들었다가 나왔는지는 영영 모를 일이었다 – 근방에서 식견 있다고 뽐내는 진씨 어르신이 토를 달았다.
“지금 강남, 어쩌면 중원 전체에서 이렇게 민의를 모으고 있소. 처음에는 멀리 소주에서 어떤 서생을 방면해달라면서 시작했다는데, 그것이 점점 번져서 이리 되었소이다. 하여 어지간한 현이라 하면 다 이렇게 나름의 『만인소』를 써서 올리고 있는데, 어찌 우리 상담이라 하여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이까?”
도시 사람인 듯한 이름 모를 서생이 열정적으로 덧붙였다. 아무래도 대개가 농사꾼 아니면 상인이다 보니, 북쪽 장사에 비해 이 주변의 문풍(文風)은 훨씬 덜한 편이었다.
“그래서 여기 이 서생으로 말하자면 이쪽 소산 기슭에서 열 명을 채워서 현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마지막 한 명을 못 채우고 있다네. 원래라면 거인(擧人, 향시 합격자) 정도는 되어야 이름을 올리기 마련이지만...”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게. 편법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옳은 길이라네. 여기 이 젊은이는 비록 학문이야 하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자네 말마따나 병공창에서 일하다 왔으니 그것도 나랏일 돕는 것 아닌가? 그러니 어떻게 보면 거인 정도의 공은 세운 셈이지. 험험.”
말하고도 멋쩍었는지, 진씨 노인이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정확히 무얼 청하는 것입니까?”
글에는 밝지 않아도, 무릇 거래를 할 때 함부로 수결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아는 모이창이 도로 물었다.
“이건 지금 현과 부마다 그 옮기는 말이 조금 다르기는 한데, 쉽게 말해서 공회(公會)를 두자는 것이오.”
전혀 쉽지 않았다. 그 공회는 또 무엇이며, 이미 이런저런 관아가 많아서 툭하면 세금을 떼어가는 마당에 또 무슨 제도를 더 둘 생각이라는 말인가?
물으니 진씨 어르신이 대신 대답하기를,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런 것이야. 자네, 한양 가서 좋은 벌이 할 때, 세금도 적잖이 내었겠지?”
“물론입지요. 아마 그때 떼인 것만 하더라도 족히 논밭 한 마지기 값은 나올 터인데...”
“자, 그런데 세금은 왜 내는 것인가? 모두 나라에 쓰임새가 있기 때문인데, 결국 그 쓰임새라 함은 백성을 위하는 데 있다는 말이지. 그런데 우리 중원이 워낙 광활하다 보니, 아래에서 모으고 위로 올려서, 다시 아래를 위해 베풀 때에는 엉뚱한 데 쓰이기도 하고, 또 중간에 여기저기서 포탈하기도 하고, 그런 것이야.”
“특히 후자가 매우 많기 마련이지.”
왕 노인의 첨언이었다.
“그러니 이제 이 공회라는 것을 부마다 두어서, 그 해에 거둘 조세는 이만하면 되겠다. 그리하여 그 중 얼마는 조정에 바치고, 얼마는 우리 부 안에서 긴요한 사업에 쓰자. 이렇게 공론에 부치자는 말일세.”
“엥,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언뜻 생각하여도 그렇게 하면 적어도 도둑맞듯 세금 빼앗기는 일은 없을 듯하였고, 어쩌면 정말 세금 내는 만큼 무언가 돌아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 용한 방법이 있다면 여태 왜 아무도 실행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사실 우리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네.”
“알려지기야 양이 땅에 그런 법도 있다고 하고, 또 근래는 조선국에서도 참의원이라 하여 백성의 뜻을 널리 듣는 제도를 두었다고 하는데, 이번 일로 그 소주의 강씨가 쓴 글이 널리 퍼져서 그 세세한 내막이 모두 잘 알려지게 되었다오.”
(‘조선이 어디입니까?’ 묻자 ‘인삼과 인천목 나오는 그 고려일세.’하고 넌지시 왕씨 어르신이 일러주었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주산을 해보니, 손해 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이름처럼 만 명을 채운다면, 설마 조정에서 벌을 준다고 해도 끽해야 주도한 사람 한둘이나 족치지 않겠는가.
“어디에 쓰면 되겠습니까?”
“여기, 왕 어르신 함자 옆에 쓰게.”
이렇게 강유위가 처음 생각하였던 것처럼 필부까지 나서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소기의 뜻을 이룬 셈이었다. 솔직히 제대로 이해했다고는 모이창 본인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의 이름 세 글자가 저렇게 들어가니 기분은 좋았다. 이 일이 장차 민생을 이롭게 하는 법도로 굳어지게 된다면, 그때는 언제고 낳게 될 그의 아들에게 ‘네 아비가 이처럼 중한 일에도 한몫 거들었느니라’ 하고 자랑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아들 생각을 하니, 자신이 이곳 못가에 이르기 전 한창 심란하였던 사유가 다시 떠올랐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오늘 여기서 이렇게 세상일에 한몫 거들게 된 것 정도면 충분히 사람 이름으로 기념할 만한 것이었다. 하여 문득 떠오른 발상에 진씨 어르신에게 한 마디 물었다.
“어르신, 그런데 혹시 못(沼)을 이르는 말 중에 사람 이름으로 쓸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보통 그럴 때는 택(澤) 자를 쓰기 마련이지. 왜 그러는가?”
“하하, 별일은 아닙니다.”
그러면 ‘동쪽 못(東澤)’인데, 아내를 홀린 그 도사 말대로라면 수기(水氣) 있는 글자가 가운데에 가야 하므로, 뒤집어서 택동(澤東)이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이 정도라면 또 언제 낳을지 모르는 아들 이름을 미리 지어둔 것 치고는 꽤 그럴듯하다 여기면서, 모이창은 노인과 서생에게 하직을 고하였다.
그리하여 천진에서 북경의 천안문 앞까지, 연이어 강남 각 부의 만인소가 당도하였는데, 개중에는 벼슬은커녕 경전 하나도 제대로 읽지 않은 한 젊은이의 서명이 칠천사백 하고도 예순두 번째 자리에 들어가 있는 『장사만인소』도 있었다.
그런 사정은 사실 다른 부도 마찬가지여서, 억지로 만 명을 채우기 위해 향신(鄕紳) 축에 겨우 드는 자들, 나아가 향신은커녕 이름 석 자 겨우 쓰는 이들까지 끼워넣고는 하였다.
하지만 그런 이들일수록 오히려 저들이 어디에 끌려들어가는지 꼬치꼬치 캐묻고는 하는 것이라, 자연스레 이 공회의 이론이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음을 이홍장도 알게 되고, 장지동도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든 억지로 다시 민심을 찍어누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을 타고 새로이 나라의 법도를 세울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또 의론이 나뉘었다.
결국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될 일이었는데,
“아, 어찌 우리 천조에 이러한 어려움이 연달아 닥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저 흉도들이 저들의 무수함을 믿고 이처럼 방자하게 날뛰니, 상소의 소두(疏頭)만 붙잡아도 그 일당을 색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이홍장이 이처럼 혼란에 빠진 조정에 건의하게 되었다. 허나 과연 그 말대로 피바람 불게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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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대에 이르러 중국 전근대국가의 전제적 통치체제가 완비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황제권력은 무소불위에 도달했고, 같은 유교 기반 국가인 조선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막강한 권력이 황제 한 사람에게 몰리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방의 차원에서는 오히려 국가의 통제가 약화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상업의 발달과 서양 작물의 도래로 인구가 폭증하고 실효지배 영토가 넓어지면서, 지방관의 수는 정해져 있는데 관할하는 지방을 통제하기는 계속 어려워진 것이지요.
이 사이에서 국가의 통제를 유지하게 하는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 향신, 즉 신사들입니다. 주로 지주나 상인들로 풍족한 경제력을 가진 동시에, 과거제를 통해 일정한 학식 및 정치참여의 정당성을 가졌던 이들은, 질과 양에서 항상 부족했던 지방통치체제를 보완하여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중간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청말에 들어서면서 신사층의 향촌지배는 흔들리기 시작하고, 한편으로는 무능한 통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편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침투에 직면하게 됩니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역사가 없는’ 것처럼 정적이던 청대 중국에서, 태평천국부터 신해혁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사회적 변혁이 ‘갑자기’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표면 아래에서 엄청난 정치적 저력을 가지고 있던 향신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 중국 지식인들에게 체제 변혁이 필요하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 것은 청일전쟁의 패배와 이에 따른 중화질서의 완전한 종언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조선의 부상, 유영복의 등장에 따른 조정의 상대적 무능함에 대한 인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중국 지식인들의 의회제도 수용은 그 기반이 되는 서양 정치철학의 수용 이전부터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가장 핵심이 되었던 의회의 존립 근거는 다름아닌 재정권이었습니다. 의회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입법 기능은 오히려 무술변법 이전에는 크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지요. 굳이 ‘돈 좋아하는 중국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환기하지 않더라도, 오랜 역사 동안 상업 전통이 발달하였던 중국 사회의 특성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경제적 논리를 바탕으로 정치적 동원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결코 이상하지 않을 듯합니다. (조기유신파의 의회제도 수용에 관해서는 이춘복(2007), “서구 의회제도에 대한 중국 근대 지식인들의 인식과 그 의의”(중국근현대사연구 34집)을 많이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이전에 잠시 등장했던 하와이 왕국이 지나가면서 다시 거론되었습니다. 당시 국왕 칼라카우아는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이올라니(‘Iolani) 궁을 축조하고 비자금을 조성하는 등의 움직임을 취했는데, 이 중 후자를 빌미 삼아 미국인 및 미국계 하와이인들이 입헌군주제 도입을 요구했습니다. 무장조직 ’호놀룰루 소총대(Honolulu Rifles)’ -아이러니하게도, 이 민병대를 공인하고 자신의 근위대로 삼으려 했던 것은 칼라카우아 국왕 본인이었습니다 - 를 앞세운 미국계 하와이인들은 1887년 헌법 제정을 강요하였는데, 이로 인해 1887년 헌법은 ‘대검 헌법(Bayonet constitutio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왕의 권한이 제약되는 한편, 이전 헌법에서 인정되던 비백인 – 특히 부유한 중국계 주민 및 빠르게 늘어나던 일본계·류큐계 주민들 – 의 참정권이 부정되었습니다. 결국 이 헌법을 뒤엎으려던 후임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시도까지 좌절되면서 국제법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은 비서구 국가였던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로 병합되게 되지요.
후반부에 등장한 모이창은 작중에 명시되었듯 모택동(마오쩌둥)의 아버지입니다. 원 역사에서도 아버지가 죽자마자 상군에 입대하여, 불과 2년 만에 악착같이 모은 봉급으로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았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원 역사보다 훨씬 일찍 생긴 한양병공창에 가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영 무능력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상재가 있었던 모이창은 곧 장사를 시작해, 소산촌 마을의 유일한 구멍가게를 운영하게 되었고, 상당한 토지를 가진 지주로 올라섰습니다. 지금 중국의 대표적인 ‘홍색 관광’ 명소로 보존되어 있는 모택동 생가를 보아도, 그가 종종 말했던 것처럼 ‘빈농의 아들’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택동과 그 동생들 – 이남 모택민(마오쩌민), 막내 모택담(마오쩌탄), 양녀 모택건(마오쩌지안)- 의 이름에 화기를 다스리고자 ‘택(澤)’ 자를 집어넣었다는 것은 실제로도 전하는 야사입니다. 민간 신앙을 독실하게 믿었던 모이창의 아내 문칠매(본명은 문소근文素勤이라고도 합니다.)가 아무래도 여기에 관련되어 있을 듯해 작중에서는 조금 윤색을 하였습니다. 다만 원 역사의 모택동이 1893년생임을 고려하면, 아직 그가 등장하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남아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