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58화 (158/320)

52. 필부의 책임 (2)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에서 새로 들여온 기기의 설치를 친히 감독하고 치소 남경으로 돌아가던 장지동은, 저의 대리로 세워둔 장패륜이 백 년 묵은 문자옥(文字獄)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는 황당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황망한 소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그런 큰일을 처결하기 위해 소주에 내려와 있었다는 장패륜을 찾아가려 역에 내렸더니, 관아 대신 엉뚱한 졸정원(拙政園)으로 찾아와달라는 간곡한 청을 사람 보내 전하였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급한 것은 자신이니, 우선 소식 듣고 난 뒤에 한 소리 하든, 두어 대 쥐어박든 – 요새 사무에 치이면서 성정이 많이 거칠어졌다 – 해야 할 것이었다.

소주는 예로부터 그 정원으로 유명하였는데, 아무래도 정원이 있고 저택이 있으면 비장한 재보도 많기 마련이라, 사교의 난 때 반민과 관군이 하나 되어 약탈하는 바람에 대부분 황폐해졌다. 그렇게 방치되는가 싶던 것을 동철이 헐값에 매수하여, 한쪽에는 학당을 차리고 또 한쪽에서는 정원을 복구하여 주변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확실히 잘 꾸며두기는 하였군. 그렇다고 내 심사 누그러질 것이라 착각해서는 아니 되네.”

“어찌 그런 얕은 생각 품었겠습니까, 대인.”

때는 바야흐로 가을이라, 기화요초는 그 해의 마지막 무성함을 뽐내고, 정원 곳곳의 크고 작은 못에는 각각 크고 작은 하늘이 담겨 아련하니 파란데, 가끔 부는 바람 한 점에 비로소 물결 일어나 진짜 하늘은 저 위에 있음을 보는 이에게 알렸다.

이처럼 정원은 원래 아름다워 그저 복원만 하여도 정취가 비범하였으므로, 말이야 날카로워도 정말로 심사 누그러지는 것을 금하기 어려웠다. 그런 속마음 읽었는지, 장패륜 옆에 선 김옥균이 한 마디 보태었다.

“허나 사안이 중하니 마땅히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면서 숙고하여야 할 것인데, 그러려면 또 이런 정경이 가히 벗삼을 만하지 않겠습니까?”

이 김옥균인가 하는 조선인은 확실히 잔머리는 있는 사람이라, 그럴듯하게 핑계도 하나 만들기를, 철도라는 물건은 침목 위에 쇠가 가지런히 놓이니 즉 금극목(金克木)인데, 그 눌리는 목기(木氣)를 이곳 정원에서 보하고, 더불어 정원의 흙과 물로써 토생금(土生金)하고 금생수(金生水)하는 순리를 갖추니 절로 날카롭게 넘쳐나던 금기(金氣)는 다스려질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조선국에 전해지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비법이라 하니, 그런 소리에 혹하는 이들은 대개 어리석은 백성뿐이요, 나머지 식자들은 그것이 겉치레 명분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런 명분을 갖춰주는 것만 해도 어디란 말인가.

“실은, 혹 오시며 보시었는지 모르겠지만, 성내 민심이 어지럽습니다. 관아로 모시려 하였지만 지금 그 앞이, 조금...”

“좁지 않은 거리가 선비로 가득 메워졌으니, 소주 고을의 풍교(風敎)와 문물 흥성함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항의하는 사람으로 가득 찬 치소 앞 상황을, 에둘러 말하는 김옥균이었다. 잠깐 누그러진 마음에 도로 주름 잡혔다.

“그래, 유초(幼樵, 장패륜의 자), 말해보게나. 대체 왜 그리 조처한 것인가? 아직은 잡아들여 신문만 하고 있다지만, 내 오는 길에 들은 뜬소문만 하여도 곧 직례로 압송하여 참형에 처한다, 그 강 모를 필두로 일대 피바람 불 것이다 운운하던데.”

“죄의 빌미가 된 구절 이야기도 들으셨는지요?”

“들었고말고. ‘천하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 있으니 (天下興亡 匹夫有責), 능히 나아가 일깨워야 할 것이다.’ 정림(亭林, 고염무顧炎武) 선생 문집에서 나온 구절을 짜 맞추지 않았는가.”

그 문제의 『조선변정고』는 조선국의 현 국왕 즉위를 전후하여 조선국의 폐정(弊政) 많았던 사정과 그것을 일신한 이야기를 해에 따라 정리하고, 말미에 그 요결(要訣)을 따로 빼내 적고서 간략하게 평까지 달았다고 들었다.

이르기를, 조선국의 신정(新政) 중 으뜸은 다름 아닌 참의원의 제도에 있으며, 이는 향신(鄕紳)으로 하여금 천하의 공의(公議)를 모으고 작게는 부세(賦稅)와 탁지(度支, 재정)를 올바르게 한다고 하였다. 거기서 끝내면 그나마 나았을 터인데, 그런 좋은 제도를 이곳 중원에도 세우기 위하여 모든 선비가 힘써야 한다면서 하필 저 문제의 구절로 마무리를 지은 것이었다.

“정림 선생이라면 조선국에도 학문으로 이름 높으신 분 아닙니까? 더구나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거론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함께 힘쓰자 하였을 뿐인데요. 실은 문제될 것이 무엇 있는가 하여 문의코자 이렇게 괴재(蕢齊, 장패륜의 호) 선생을 손으로 모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김옥균도 눈치는 있었으므로, 저 정도 말로도 굳이 문제를 삼으려면 문제 삼을 수 있음을 알았다. 한창 문자옥으로 서슬 퍼렇던 시절에는, 시구 한 줄 잘못 인용하여 ‘청풍명월(淸風明月)’ 같은 소리를 하여도 ‘대청이 바람과 같이 금방 지나가고 명(明)이 돌아온다는 말이냐’ 하여 능지형으로 다스리기도 했다고 들었다.

고염무로 말하자면 대학자이기도 하되 유로(遺老)의 한 사람이기도 하니, 오랑캐 천자를 모실 수 없다면서 속세 등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론상 그 글을 인용함에 반심 있었다고 몰아갈 수는 있겠지만, 고염무의 학풍이 길이 남아 후대에 쓰임새 있는 배움 원하는 자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므로, 고염무를 인용한 것만으로 죄를 준다면 공양학(公羊學) 하겠다며 나선 모든 강남 선비들의 목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그래. 이 사람이 묻고자 하는 바도 저와 같네. 유초, 무슨 생각으로 그리한 것인가?”

“한 사람을 벌하여 아흔아홉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어라?”

“여기 고균이 이른 것처럼, 저 구절만으로는 죄를 주기 어렵지요. 그러니 잡아들여 문초만 하고, 죄질이 가벼워 단순히 멋모르는 서생이 실수한 것으로 보이는바 석방함이 어떻겠느냐, 그렇게 조정에 아뢰려 하였습니다.”

장패륜도 비록 장지동만은 못하지만, 한때 청운의 꿈 안고 출사하여 나라를 고쳐보고자 했던 사람이다. 이홍조가 억울하게 죄를 쓴 이래 이곳 강남에 틀어박히게 되었다지만.

“지금 조정에 이곳 향신(鄕紳)과 거인(擧人)들이 설 자리 없어진 것이 벌써 십수 년이 되었습니다. 설령 한인이 나아가더라도, 모두 북양대신의 아랫사람들이요, 그나마 태후 전하께서 요양을 떠나신 이래로는 그 자리 태반이 다시 만인 차지가 되었지요.

저 서생 강 모의 글은 그런 와중에 나온 것 중 가장 온건한 축에 듭니다. 그러니 그만한 글도 벌줄 수 있음을 보여, 나머지 무리로 하여금 잠시 필화(筆禍) 입지 않도록 자제케 하려 한 것이었습니다만...”

그렇게 된 데에는 굳이 유영복을 데리고 민심을 어지럽히는 이 조선인 김옥균의 잘못도 있었으므로, 은근슬쩍 눈을 흘겼다.

“당장 오는 길에도 누가 이런 황망한 괘서(掛書) 붙였기에, 떼어서 가져왔습니다. 보시지요.”

‘부끄러워할지어다, 중원의 사람들이여!

살피건대, 우리 중원은 예악과 문물이 천하의 으뜸이었다. 뭇 성인이 이 땅에서 나시었으며, 이로써 하(夏)의 앞에 화(華)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조선국은 우리 중원에서 배운 화하의 법도로써 나라의 문물을 일신한바, 세상 나라에 성현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있으니, 최근 조선의 선비가 영길리국에서 천연론(天演論, 진화론)의 이치를 새로이 개진한 것과, 근래 유구국왕이 조선 사람들을 청하여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 모두 이를 증험한다.

우리 또한 능히 이를 이룩할 수 있으니, 우리 사람 유영복 장군을 보라! 남월 강역에서는 신묘한 계책으로 법국을 무찌르고, 물러나서는 그 충의로써 만국을 감응케 하였다.

그렇다면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이다. 나라 안에 인재가 없어, 도광·함풍 연간에 양이의 변(1·2차 아편전쟁)을 당하였는가? 그 후로 나랏일을 일신한다며 삼십 년을 보냈건만, 어찌 해동의 작은 나라 조선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가? 연유를 찾자면 오직 한 가지, 한인은 능히 할 수 있는데 만인이 위에 있어 이루지 못한 것이다.

저들이 오랑캐로서 화하를 본받지 않고 오히려 화하를 오랑캐 지경으로 빠뜨리니, 스스로 중화 되고자 하여 뜻을 이룬 해동 조선국보다 뒤처지는 것이다!

깨어날지어다! 오직 멸만(滅滿)하여야 흥한(興漢)이 가하도다!’

이 글을 쓴 자의 물정 어두움과, 글 읽을 자들의 미쳐 날뜀이 모두 눈앞에 선한바, 장지동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실로 그렇습니다...”

멸만흥한이라, 섬뜩한 말이지만 어찌 되었건 그럴듯해 보일 수는 있었다. 당장의 울분을 저 만인들에게 풀어서, 아예 조정을 뒤집어엎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물론 대개는 그러기 전 북양군에 의해 벌집이 되겠지만),

하지만 만에 하나 성공하여 만인들을 모조리 몰살한다면, 그것으로 국운이 다시 펼 것인가? 간신히 버티는 나라가, 고작 변발 자르고 다시 머리 기른다 하여 기운을 차릴 리가 있는가?

물론 길게 본다면야, 상하동욕(上下同欲)하게 되면 나라에 힘이 돌아오기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 그럴 여력이 있느냐 하면 결국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노릇.

“하지만 우리도 참 어리석지 않은가. 가운데 끼어서 어찌 하든 불충(不忠)하게 되었는데, 누구 다른 이를 탓할 수도 없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강남 이남에서 장지동 한 사람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없다. 그 이름이 먼 훗날 ‘청사(淸史)’ 쓰일 제 반역열전에 오를 각오만 한다면, 더한 일도 저지르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것을 막는 것이라면 하나는 끝내 버리지 못하는 충심이요, 다른 하나는 현실이 어떠한지를 아는 식견일 터.

“단순한 오해로 치부하고, 방면해줄 수는 없겠습니까? 그리 해주신다면, 저희 쪽에서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을 약조드립니다.”

김옥균이 은근슬쩍 겁박하는 말을 넣었다. 학당을 세우고, 정원을 매입하고, 또 철도 지나가는 주변 마을의 유지들에게 은근슬쩍 성의도 베풀고 하는 것이 모두 철도를 비롯한 서양 문물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겠다며 하는 일인데, 자칫 이번 일로 관이 동철을 핍박하는 모양이 나오게 되면, 유럽 투자자들 앞에서도 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도 어려운 일임을 알지 않는가.”

“그래도 둘 중에서는 더 나은 길 아니겠습니까.”

지금 보니 조정의 명령에 충실히 따라 불만 많은 서생들을 잡아들임도 결국 대청의 끝을 앞으로 잡아당기는 일이요, 그 명을 거역함도 매한가지였다.

장강 이남에서는 만인 조정보다 장지동 한 사람의 령이 더 중하다, 그런 이야기 퍼져나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다른 성의 총독과 순무들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물론 눈앞의 이 조선인이야 그런 사정 알 바 아니므로, ‘더 나은 길’이라고 가벼이 단언할 수 있겠지만.

갑자기 스산한 바람 스쳐, 가뜩이나 심란한 장지동 마음에 파란 일으키는데, 정작 함께 잔물결 이는 정원의 연못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만 비추고 있었다.

“와, 정말 남양대신 장 대인이 왔다 가셨습니다.”

“그러냐.”

그런 높으신 분들과 마주치면 피차 불편한 일밖에 더 있겠는가. 졸정원 한 구석에 마련된 전각의 목 좋은 방 침상에 벌렁 드러누운 유영복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였다. 과연 정원이 작지는 않아 정말 노력하지 않으면 찾아오는 객끼리도 마주치기 어려울 터였는데, 아직은 혈기 넘치는 고홍명은 정말 노력하는 축에 들었다.

기실 소주는커녕 중국 본토도 이번에 처음 밟아보는 고홍명은, 이 졸정원에 동철에서 숙소 마련해 주었을 때 참 정원이 멋지다. 이것이 정말 중국 오천년의 아름다움이다 호들갑을 떨었는데, 확실히 무엇이든 처음 일이라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기는 한 법이었다. (당장 유영복도 자신이 오원청(吳元清) 아래에서 병졸로 지내던 시절, 처음으로 사람 머리통 따던 그 느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싶었다.)

그러던 차에 바깥에서 무슨 서생의 글을 가지고 잡아 가두었다, 무고한 사람이니 당장 풀어주어라 하면서 우우 함성 오가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잠시 나갔다 온 고홍명은 벽에 가득 붙은 괘서 보고서 잔뜩 흥분해 돌아왔다.

“그런데 장 대인도 이곳 소주에 오셨으니, 정말 큰일은 큰일인 게지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어르신에게 하는 얘기냐?”

“아니, 그럼 또 누가 있습니까?”

요 몇 달 사이 유영복은 참으로 행복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 이상한 재판 놀음 끝난 뒤, 높으신 서태후께서 운영한다는 ‘동쪽 버금 쇠길(東亞鐵道)’이라는 회사에서 돈 받고서 팔자에 없던 양강(兩江) 여행을 하는데, 대개 이런 식이었다.

천하 대영웅 유영복 장군이, 철도 지나가는 조그만 시골 마을에 찾아간다. 아이고, 어르신. 저 쇳덩이 때문에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하십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하의 불랑국(佛浪國, 프랑스) 양귀자 무찌른 저 영복이가 살아 있는 한, 저런 오랑캐 물건들이 사람들을 해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힘을 내십시오. 저는 오랑캐 물건을 잘 다루어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여러분도 열심히 노력하면 저 기차라는 물건을 잘 써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서는 그 무지렁이 촌로, 혹은 무식한 촌로인 척하는 신사에게 같이 따라다니는 조선인 김옥균이 슬쩍 뭔가를 찔러 넣어준다. 절로 얼굴이 펴고, 허허 웃고, 주변의 마을 사람들도 세상만사 잘 풀리는 것처럼 얼굴 활짝. 밤에는 잔칫상. 그리고 이상 없으면 다음날에는 또 다른 마을.

조금 더 머릿속에 생각 많은 사람이라면, 결국 지금 하는 것은 남의 꼭두각시 노릇 아니냐, 더 보람찬 삶을 살고 싶지 않으냐 했을 텐데, 유영복은 그런 사람이 앞에 있다면 언제고 한 번쯤 멱살 드잡고서 네깟 서생이 알기는 하느냐, 아침마다 저녁 끼니 걱정하는 그 기분, 관군에게 쫓겨 언제 목 달아날까 두려워하는 그 기분. 그런 밑바닥 삶의 편린 (고홍명에게 배운 단어였다)이나마 맛본 적이 있느냐 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이 정도 삶이면 족했는데, 세상은 그가 이 정도 삶 누리는 것을 족히 여기지 않았다.

“물론 장군께서는 그런 거창한 명분은 신경 쓰지 않으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 안다. 망할. 다들 내가 이번 일 놓고서 한두 마디쯤 뭐라 해주기를 바라고 있겠지.”

그의 비서 노릇하는 고홍명이 얘기해주지 않더라도, 뭔가 자신을 걸고 넘어질 만한 일이 주변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이번 소란 일어나기 시작할 때부터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하기도 싫거니와, 뭔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게 문제지. 아니, 이건 촌로 몇몇과 어울려서 술동이째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으냐?

나오는 말을 보니까 정말 천명이 어쩌구, 뭐 만인과 한인이 저쩌구 하던데, 그런 것 가지고 떠드는 건 홍명이 너처럼 머리 좋은 친구들이나, 아니면 그 누구냐, 왜 그 강 누구 있지 않으냐, 이번에 잡혀간. 그런 서생들이 해야 할 일이지. 왜 너희 일을 나 같은 사람에게 미루려 하는 게야?”

하지만 생각 많고 욕심 많고 꿈도 많은 고홍명은 좀처럼 채근을 멈추지 않았다. 유영복은 스스로 그저 운 좋은 도적 정도라고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고홍명이 보기에는 그저 문자와 연이 없을 뿐이지 그 밀어붙이고 빠지는 직감과 잔머리를 잘만 쓰면, 지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거하게 이름 남길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따지자면야 한쪽은 지나치게 낮추어 보고 한쪽은 지나치게 높여 보는 것이었지만, 어차피 방 안에 두 사람뿐인데 무슨 객(客)의 관점을 논하겠는가.

“그래도 뭔가 하기는 하셔야 합니다. 물론 장군께서 훌륭한 공을 세우신 것은 맞지만, 솔직히, 그 공이 이만큼 대접받을 만한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으면 뺨부터 한 대 올려붙이고 보았겠지만, 어쨌건 월남 싸움 말미에나마 찾아와서 저와 동고동락했던 고홍명이다. 살짝 올라오는 분기 낮추었는데, 또 연이어 말하기를,

“다들 바라는 게 있어서 그랬던 겁니다. 장군이야 풍운을 만나서 신세 고쳤다지만, 보셨지 않습니까. 그렇지 못한 동포들이 수두룩합니다.”

‘동포’라는 낯선 말은 아마 중원 바깥에서 태어나 자란 고홍명이었기에 무심결에 내뱉었으리라,

“그러니 장군 같은 분께서 떨쳐 일어나 뭔가를 해주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따르는 것이지요. 높으신 분들과 서생들을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런 사람들이 지난 수십 년을 헛되이 보냈잖습니까. 거기에 이번 강씨처럼, 바른 말하려는 사람을 잡아 가두기까지 하고 있지요.

그러니 그 사람 말마따나 이제는 필부들이 나설 차례입니다. 장군께서도 이미 스스로 좋아서 그 맨 앞에 서 계신데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젠장, 말이나 못하면.”

세상을 바꾼다. 말은 좋다. 하지만 그렇게 바뀐다 한들 자신이나, 자신이 겨우 탈출한 밑바닥에 아직 남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바뀌는 것이 있는가? 그저 목숨 건사하여 배 곯지 않고 살면 족하였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적어도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이야기라도 들어달라 운은 꺼낼 수 있을 것이었다. 만일, 그러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그렇게 질문이 들어온다면, 그때는 나몰라라 하고 저의 뒤를 따라오던 이들에게 겸양하는 시늉 하면서 말을 맡기면 될 것이다. 그중에 이 고홍명이처럼 총명한 사람 한둘은 있을 것이요, 어쩌면 그러다가 정말 삶이 나아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좋아, 해보자. 그러면 뭘 하면 좋을까? 흑기군이야 해산했다지만 너는 여전히 내 모사이니 네가 꾀를 내 보아라. 단, 대놓고 뭐 모반을 하자, 나라에 반기 들자, 그런 건 안 된다. 항상 빠져나갈 구멍은 있어야 해.”

“그건... 음...”

처음에는 그냥 묵고 있는 객잔 바깥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군중을 대동하고서 강유위 잡혀있을 관아로 쳐들어가자고 하려 했던 고홍명이, 바로 생각을 고쳤다. 아닌 게 아니라, 무슨 대의나 명분을 신경 쓰지 않아서 그렇지, 순수하게 싸움의 감각으로 말하자면 저 같은 서생 열 명을 데려와도 못 따라갈 유영복이었으니 그 말이 맞을 터였다.

그런데 막상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는가 하면, 딱히 소주에 교분 있는 사람도 없고, 저의 친족은 중국은커녕 저기 해협 식민지(Straits Settlements)에 모여 살고 있으므로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강씨 서생이 조선을 본받자,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하지 않았나?”

“‘본받자’까지는 아니고 비슷하게 해보자 정도입니다만, 일단 대략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써 봄 직한 술수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김옥균 씨가 자기 집안 어르신들이 이곳 소주에 묵고 있다고 했던 듯한데.”

중원의 사람들이 보기에, 무릇 부정한 짓으로 치부를 한다 하면 고래로는 석숭(石崇)을 들고 근세에는 화신(和珅)을 꼽기 마련이므로, 조선국 안동의 김문으로 말하자면 가히 하나의 세가(世家)라 일컬을 수는 있으되 탐학하게 가산을 그러모았다 하기에는 그 부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얼마 안 되는 재보를 털어 심지어 기기창을 세우고 나랏일 거들었다 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중원 땅에 알려지기로, 김문은 물론 흠결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훌륭한 조선의 세족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아첨인 줄 알았는데 실지로 이렇게 믿는 것이라, 김병학과 김병국은 잠깐 황당하게 여겼다가 곧 그 착각을 고쳐주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손해볼 것은 없지 않은가?)

그러던 차에 지혜를 빌려달라며 양이처럼 생긴 서생이 찾아와 묻는데, 알려줘서 손해 볼 것은 또 무엇인가 싶어서, 보통 이럴 때는 상소를 올리기 마련이다 하였다.

그런데 또 묻기를, 지금 상황이 여론은 들끓고, 관은 묵묵부답이라, 뭔가 상소만으로는 부족할 듯하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정말 병장(兵仗)에 호소하자니 그것은 유영복이 패착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이라.

그런 사정을 에둘러 설명했더니, 김병국이 뭔가 떠오르는 것 있어 말했다.

“이곳 중원은 민호(民戶) 많기가 천하의 제일이지, 그렇지 않은가? 더 사람이 많은 곳이야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비 많이 모으기로 가장 쉬운 것은 이곳 강남일 터.”

“그렇습니다. 용한 계책이 있으신지요?”

“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무언가 조정에 건의할 때 뜻이 닿지 않을 듯하다면 만인소(萬人疏)라 하여 널리 연명하여 소를 올리는 경우가 있곤 했다네. 공론이 이렇게 모였으니, 부디 다시 깊게 헤아려 달라고 간곡하게 청하는 것이지.”

고홍명 듣기에 그럴듯하고, 어떻게 되었든 (기껏 친해진) 관과 척지고 싶지 않았던 유영복도 나쁘지 않은 방안이라 여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양강 일대의 서생이 결코 일만 명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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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은 고염무가 남긴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가 한 말을 양계초(梁啓超, 강유위의 제자이기도 했지요)가 추려서 쓴 것입니다.

고염무는 황종희(黃宗羲), 왕부지(王夫之)와 더불어 명말청초의 대표적인 학자로, 명이 멸망하고 청이 중원을 점령한 후 위세를 날로 떨쳐가는 중에도 반청 기조를 유지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고증학의 시초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고증을 통해 유학에 본래 담겨 있던 실천적인 뜻을 살려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후대에 전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에도 알려졌는데, 고증학 외의 다른 학문 풍조가 문자옥으로 인해 억눌렸던 청과는 달리 오히려 성리학의 비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학풍에 획기적인 변화까지는 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의기 있는 태도는 높이 평가되었지요.

문자옥의 목적은 정말 반체제 세력을 색출하는 것보다는, 언제든 문인들의 생사여탈이 가능함을 보임으로써 그 세를 위압하는 데 있었으므로 (예컨대 강희제는 지식인을 탄압하다가, 때로는 그 탄압을 실행하던 지방관들이 ‘과했다’는 이유로 반대로 사면을 하고 지방관을 처벌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사소한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기도 하고, 다른 죄가 있는 사람을 글을 빌미로 처벌하기도 했습니다. 악명 높은 사례로 옹정제 연간, 사사정(査嗣庭)이라는 문인이 유(維) 자와 지(止) 자를 한 문장에 쓴 것이 옹정(雍正) 두 글자의 머리를 자르겠다는 뜻이라고 억지로 우겨서 처벌한 예가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양무운동의 실패가 드러나기 전인 1880년대 중반부터 중국 지식인 사이에서는 의회 개설에 대한 제안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임칙서가 『사주지』를 쓰던 시절부터 영국의 의회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해 1870년대에 청과 유럽 사이의 인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본격적으로 그런 논의가 진전되지요.

한편, 만인소는 조선에서도 후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난 특이한 현상입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영남 유생 이만손 – 작중에도 박규수와 글로 논쟁을 벌이는 사람으로 잠깐 나왔습니다. - 이 주도한 1881년의 『영남만인소』입니다만, 사실 1792년부터 시작해 총 7회에 걸쳐 그런 사례가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7회 중 서얼차별 철폐에 관한 삼남 유생의 만인소(1823)를 제외하면 모두 영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영남 유생들의 정치참여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던 당대의 정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장동 김문 사람들, 그것도 세도를 잡은 지 수십 년이 지난 시점의 김병학 형제에게 만인소가 무슨 의미였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만, 감히 추측해보면 적어도 적대적이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물론 세도가들이 자신들의 정계 장악을 위해 정조가 시도했던 영남 복권을 유야무야시켰고, 대원군이 이를 이용해 반대로 영남 출신(대표적으로 류후조가 있습니다)의 중용을 시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최초의 영남만인소가 사도세자 추숭을 주제 중 하나로 삼았고, 이것이 노론 시파였던 김조순에게 도움이 되었을지언정 해가 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만인소라는 개념 자체를 꺼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여담으로 막판에 언급되는 석숭과 화신(니오후루 허션)은 각각 서진(西晉)과 청대의 전설적인 거부 겸 탐관오리입니다. 둘 다 공통적으로 벼슬을 이용해 (전근대 국가에서 국가권력과 결탁하지 않은 거부가 존재하기 어렵기도 합니다만) 엄청난 치부를 했지요. 석숭의 경우, 밥을 할 때 밀랍을 땔감으로 쓰고, 금과 제호탕(유제품의 일종입니다)만 먹여 키운 닭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사서에 전합니다. 허션은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엄청난 축재를 했는데, 그의 사후에 국고로 몰수된 재산은 청의 국가재정 12년치에 상당하는 은 9억 냥이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에 비하면 '고작' 망조 든 조선 팔도만 착취한 장동 김문은 청백리 집안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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