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필부의 책임 (1)
열하행궁(熱河行宮, 피서산장)을 보수하는 일은 스물다섯 해 전 서태후가 중단을 지시한 이래 죽 뒤로 밀려 있다가, 그래도 황가의 체통이 있으니 적어도 외팔묘(外八廟) 공사는 끝내자 하여 얼마 전 공식적으로 중수(重修)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선대의 덕이 어린 곳이므로 마땅히 행차하여 그에 맞는 예를 행하여야 할 것인데, 오래 전부터 영명함이 드러나 친정(親政)하고 있는 천자가 직접 거둥하기는 어려우므로 대신 그의 친부 되는 순친왕 이후완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 외팔묘에 불사(佛事) 위하여 찾아온 공친왕 이힌과 마주하게 되었다.
“기체 무고하시니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순친왕께서도 만강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적서(嫡庶) 따지지 않고 헤아리면, 아이신기오로 이힌은 아버지 샹안 후왕디(도광제)의 여섯째 아들이요. 이후완은 여덟째 아들이며, 터울은 일곱 해에 이른다. 이후완은 본래대로라면 보위에 오를 수 없을 금상의 생부 되는 이요, 이힌은 누가 대놓고 말은 하지 못하지만 엄연히 모반하였다가 쫓겨간 이라, 떳떳하지 못한 구석은 양쪽에 고루 있고, 그 세력으로 따지자면 늘 좌불안석인 이후완이 어찌 되었던 동삼성에서는 친왕(親王)의 ‘친(親)’자 떼어도 무방할 이힌에 비길 바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색한 안부인사 마치고, 공친왕이 무슨 연고로 저를 불렀는가 물어보려 하는데, 멀리서 경 읽는 소리 끊어지고 승려 일행의 발소리 부산하였다. 송경 마치고 들어선 이는 아직 연소한 달라이 라마를 대신하여 찾아온 그의 스승, 부랴트인 악왕롭샹이었다.
공손하게 예 올리고, 만약 그 이르는 말의 백분의 일쯤이라도 이루어졌다면 천하가 절로 태평해졌을 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번 생의 달라이 라마와 젭춘담바 후툭투(후대의 복드 칸) 두 분께서는, 현세의 중생에게도 마땅한 자비가 베풀어져야 한다고 여기시어 밤낮없이 고심하고 계십니다.”
거의 반 시진을 이어간 덕담 중에 결국 뼈 있는 것은 하직인사 올리기 전 마지막 한 마디뿐이었는데, 그 무게가 적지 않았다.
본인 찾아온 이유인 저 한 문장을 전하고 이제 멀리 라싸(Lhasa)까지 머나먼 길 돌아갈 채비를 하러 방을 나선 악왕룁샹 뒷모습을 보면서, 이힌이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이야기인지요?”
“찾아오시기 전에 미리 이야기 나눈 바가 있었습니다. 지금 북양대신이 건의하여 조정에서 오가는 말 중에, 장차 번부(藩部)를 폐하고 모두 중원이나 신강처럼 성(省)을 두자, 그런 안건이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서 잠시 고민해보니, 방금 악왕롭샹이 한 말이 얼추 해석되었다.
“허어, 어렵게 되었군. 그러니 저 말은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 그런 뜻이지 않습니까.”
‘이번 생’의 달라이 라마(달라이 라마 13세)는 아직 어리다지만, 금세의 젭춘담바 후툭투는 동치(同治) 8년생이니 어설프게나마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을 나이다. 허나 그 두 소년이 무슨 생각 품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현세의 중생’을 위하여 무언가 할 뜻이 있다는 말.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어찌 반심까지야 품겠습니까. 그저 마음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글쎄요...”
저 악왕도, 어찌 되었건 태생은 아라사 속민인 부랴트라, 여차하면 이제 그 옛날 달라이 라마가 ‘너희’ 칸을 위하여 이곳 열하까지 찾아왔던 때와는 다르다, 아라사 천자도 관세음보살의 후신이니 따른다 하여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하면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럴 가능성을 이후완은 모르는 것인가, 알면서도 그저 허황된 일이라 여길 뿐인가. 말꼬리 늘이면서 답답한 마음을 감추었다.
“듣기로, 지금 중원 강남에도 심상하지 않은 공론이 향신들 사이에 퍼진다 하였습니다. 순친왕께서는 알고 계시는지요.”
“대략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원래 서생이란 무리들은 공연히 떠들기를 좋아하는 부류 아닙니까. 만일 정말로 지극한 일을 건드리는 난언(亂言)의 무리가 있다면, 사안에 따라 처결하고 벌주면 될 일입니다.”
인덕 베푸는 뜻으로 가경(嘉慶) 연간부터는 조금 느슨하게 다스리고야 있다지만, 고작 백 년 전만 하더라도 글자 하나를 가지고서도 능히 죽음을 내릴 수 있던 것이 대청 천자의 힘이었다. (당하는 쪽에서는 그것을 원한으로 여길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은, 이힌이라면 모를까 이후완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개 그들이 원하는 것이란, 곧 아조가 다시 창성하여 스스로 천하의 수선지구(首善之區)라는 이름값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요. 비록 북양대신이 이때를 맞이하여 헌책한 것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아뢴 바를 면밀히 살피면 또 때에 맞는 궁리가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번부의 일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가 여쭙고자 이렇게 사사로이 청하게 된 것이지요.”
동삼성에서 흥업(興業)에 힘쓰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이힌 자신은 세세한 실무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만일 천하에 변란 없어 서태후 아래에서 꾸준히 총리기무아문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면, 말로만 양이 기물을 받아들인다 떠들면서 정작 내실은 없었다며 탄핵을 당했을 수도 있겠거려니 싶었다.
그나마 마신이가 연로하였지만 아직 재상 비슷한 무언가로 저를 보좌하고 있고, 또 뜻있는 만인 젊은이들이 제 발로 찾아와 일 거들어주니 여기까지 온 것이리라. (가뜩이나 믿고 쓸 만인이 없는 조정에게는 안쓰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천하의 대국을 바라봄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머리 총명하지만 처세술 외에 다른 안목은 없는 이후완과는 달리 아마 만인 중 아직은 제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북양대신은 아마, 아라사가 쇠미하였으니 우리의 변경 땅을 탐낼 여력이 없을 것이고, 영국은 이 기회를 노려 아라사가 뻗어나올 수 있는 곳마다 울타리 치기를 원할 것이다. 그리 진언하였겠지요.”
“역시 영민하십니다.”
“그러나...”
말하면서도 스스로 절로 삼가게 되는 것이 있어, 잠시 침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백 번 무엄함을 참고 말하자면 ‘두림바이 구룬(중국)’에게 이로운 것이지, ‘다이칭 구룬(대청)’에게 이로운 것이 아닙니다. 처음 우리가 외번(外藩)의 제도를 세운 것은, 사방의 다른 백성을 각각 저에게 맞는 법도대로 다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역대의 어떤 천명 받은 이들보다 성대한 강역을 아우르게 되었으니, 처음에는 심복하지 않던 한인들마저도 따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니고서는 이를 지킬 수 없다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것을 한인을 다스리는 군현의 제도로 바꾸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힌이 펼치는 논리를 이어가게 되면 자연스레 닿는 것이 있었다.
“... 아마, 굳이 만인을 위에 모실 것 없이 저들 한인끼리...”
두 사람 모두 말을 마치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나 그렇다 한들,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면 할 수 있는 일이 적습니다. 이르시는 말씀이 참으로 무거운 것이라 함부로 내놓으신 생각이 아님을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어찌 나라의 명운이 그리 쉽게 갈리겠습니까.”
애초에 금상부터가 보위에 오를 수 없는 항렬이다. 서태후 한 사람이 억지를 부려서 열성조의 대업을 떠맡게 되었는데, 정작 그 억지 부린 사람은 저의 꾀에 스스로 발 걸려 넘어져서 저기 조선으로 도망치고야 말았다.
남은 사람들이 지지할 구석은 아라사 하나인데, 그 아라사마저 근래 영국에게 패퇴하고, 그 임금도 흉수에게 당하여 비명에 훙(薨)하고야 말았다. 그 뒤 이은 아들은 아라사가 굳이 다른 양이들과 다투면서까지 세력 뻗칠 필요 있겠느냐 여긴다 하였으므로, 실력으로 보나 의지로 보나 순친왕과 그를 따르는 만인들이 더 이상 북녘에도 기댈 수 없음이 명백하였다.
그러므로 그동안 조용히 군병의 힘만 기르면서 있던 이홍장이, 침묵을 깨고 발의한 것이리라. 비록 회민의 반란과 뒤이은 이리 싸움으로 황폐화된 신강에 대해서라지만 어쨌건 전례도 있는 일이었다.
“만국의 사정에 밝으시니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는 조용히 가라앉고 있습니다. 조정의 영이 선 듯하면서도 사실은 기울고, 양이는 잠잠한 듯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를 갉아먹으며, 번국들은 날로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있던 덕의지 군함 건도 그러했다. 북양대신 이홍장이 목인덕(묄렌도르프)을 통하여 그 나라에서 요새 만들고 있는 큼직한 전함을 들여오려 했는데, 알고 보니 조선도 저들을 따라 똑같은 배를 발주한 것이었다.
그 옛날 조선의 은을 두둑하게 받은 목인덕이 받은 만큼의 값을 한 것이었지만, 이홍장 생각하기에는 이미 강남에서 저들 공인들을 대거 데려가 어설프게나마 철갑함도 건조하는 조선이 이제는 숫제 자신의 북양함대를 따라잡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은 아닌가, 경계하는 마음이 절로 치솟았다.
나중에 예부 자문으로 조선국 병조에 문의하니, 저들은 사실 큰 배 한 척이면 족하다. 더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지만, 그 조일동맹인지 무엇인지가 합세하여 함께 쳐들어오게 되면, 지금은 몰라도 이홍장 자신이 노쇠하여 벼슬 내려놓을 즈음에는 북양함대로 막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홍장이 넌지시 아뢴 바였다.
“말로는 아직 상국으로 모신다지만, 정말 그들이 그렇게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심지어 얼마 전에는 우리에게 말 한 마디 없이 조선왕의 친부가 유구국에 찾아가 그 백성을 위무하는 일까지 있었지요. 그러니 지금 당장 무엇이든 해서, 다시금 성세를 되찾아야 하는데, 시일의 여유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고하신 바는 마음에 잘 새겼습니다. 황상께도 반드시 말씀 올리도록 하지요. 이러한 조치를 할 때 민심이 요동칠 수 있으니, 나라의 위엄을 세워서 걱정하시는 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고, 혹 여기에 합하여 쓸 만한 계책 없느냐 물어보기 위해 저를 부른 것임을 그제야 깨달은 이힌이, 무어라 더 말해보려다 단념하였다.
바로 그 요동치는 민심에 기름 붓고 또 불씨까지 줄 자들이 저들의 강남 땅에 이미 와 있음을 알았더라면, 발목이라도 붙잡고 재고해달라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만.
살아 숨 쉬는 사람이 대원군으로 일컬음 받는 것도 개국 이래 처음인데, 그런 나라의 높으신 분이 바다 밖으로 구경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더욱 전례 없는 일이었다.
바다 밖이라 하면 한 제주도 정도만 되어도 범상치 않은데, 남해절도(南海絶島) 유구국까지 간다 하였으니 이것을 유람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아예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할까. 세인들 고심하던 차에 주상 이르시기를 ‘이는 그 나라 관광(觀光)하는 것이라’ 하니, 상고해보면 또 때로 쓰던 말이라 곧장 세간에도 퍼지게 되었다.
무릇 효도라는 것은 사람으로 난 이상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어찌 장동 김문 사람들이라고 가만히 있겠는가. 때마침 명문의 자제로 뜻있는 젊은이들이 힘을 합하여, 대국 강남 땅에 선비들 쉬이 오갈 수 있게끔 향도(嚮導, 가이드)할 사람을 구하고 능히 몸 뉘일 만한 여각(旅閣) 마련한다 하였다.
장동 김문의 큰 어른이라면 역시 (정작 자신들은 장의동 아닌 전동에 살지만) 김병학과 김병국 두 사람이다. 마침 김병국도 작년 회갑 이후로 연로함을 핑계 삼아 다른 공직은 내려놓고 오직 광통이도국 하나만 잡고 있었으며, 김병학은 아예 환로에서 물러난 터라, 아직 열심히 일하는 김병시라면 모를까 두 형제는 한두 달쯤 자리 비우고서 천하의 명산대천 둘러보러 나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영복과 함께 남경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움직이며 상해까지 가던 김옥균은, 엉뚱하게도 소주(蘇州) 성안에서 집안 어르신 두 분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과 다른 문중 어른들 묵는 여각 찾아가 문안하니, 김병학은 자신의 소회 풀어놓고 김병국도 나름대로 품은 생각을 말했다.
“백거이(白居易) 읊기를 ‘강가 꽃 불보다 더 붉고 강물은 쪽빛만큼 푸르다’하였으니 그 구절 거짓 아님을 알게 되었다. 또 떠나면서 ‘언제 또 다시 노닐까’ 탄식했으니 내 마음이 그와 같구나.”
“허어, 그렇습니까? 저는 서호(西湖) 있는 줄만 알았는데 이곳 태호(太湖)야말로 절경이다 싶었습니다만.”
“두 분 모두 즐겁게 둘러보고 계신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혹 계시면서 어려우시거나 맞지 않으시는 일은 없으셨는지요?”
어찌 되었건 문중에서 이렇게 천하의 일 거드는 인재 나와 가문의 이름 드높임은 참 좋은 일이라 – 중간에 잠시 파직되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건 잘 풀리지 않았는가 – 좋은 세상이라 생각하며 김병학이 답했다.
“그런 일이 있겠느냐. 이 철도 닿는 곳뿐 아니라 배 타고 간 저 항주(杭州)에도, 해동 조선국에서 온 선비라 하면 다들 대접이 깍듯하여, 동철에서 일하는 백온(伯溫, 김옥균의 자)이 우리 집안의 자제라 이야기 꺼낼 것까지도 없었다.”
뒤에서야 고려귀자(高麗鬼子)라 욕할지 몰라도, 소매에서 두둑하니 은량(銀兩) 나오면 절로 고려귀인(貴人) 대접하기 마련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심지어 이곳 강남 서생들도 몰려들어 우리 땅 사정을 묻더구나.”
의외의 이야기에, 두 사람의 무탈함을 확인하여 안도하던 김옥균의 신경이 다시 쏠렸다.
“그렇습니까? 무슨 곡절이 있었기에 그러하였는지 여쭤도 될지요.”
“뭐, 별다른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이곳 강남을 궁금해하듯 이곳 서생들도 우리 해동을 궁금해하기 마련이지.”
“굳이 열거하자면, 우리가 어떻게 바깥 문물 받아들이면서도 예교(禮敎) 버리지 않았느냐, 나라에 분란 없이 파란을 헤쳐나오고 있으니 그 인정(仁政)의 요결 중 혹 신하된 이로서 말할 수 있는 바가 있겠느냐, 뭐 그런 것이었단다.”
“필담으로도 문답하고, 또 너희 동철에서 붙여준 역관 통하여 이야기하고, 하였더니 저들도 자못 감명을 받았는지 자기들끼리 떠들고 또 기뻐하더구나.”
그러나 듣고 보니, 단순히 멀리서 온 손님에게 묻기에는 조금 이상한 것이었다. 조선에서야 정말 참흉한 이야기 꺼내지 않는 이상에야, 하다못해 길가의 선술집에서도 정사가 이것은 잘 되었다, 모 판서는 공으로 국록 축내는 사람이다 운운할 수 있겠지만, 청국의 사정은 또 그렇지 않았다.
비록 가경(嘉慶) 연간부터는 사그라들었다지만, 불과 백 년 전만 하여도 가혹한 문자옥(文字獄)의 탄압이 있던 청국이다.
사사로이 남의 나라 정사를 묻고 떠든다고 하면, 이곳 강남에서도 제 목소리 내어도 안전할 것이라 생각한다던가, 아니면 할 말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던가 둘 중 하나일 터.
그래도, 설마 그 정도까지 하겠는가 하면서 잠시 드는 불안한 생각을 뒷전으로 밀쳐두는 김옥균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둘 다 해당되는 것이어서, 백 년의 침묵을 깨고 새롭게 문자의 옥이 시작될 무렵, 동철이 세운 학당에서 학문을 가르치던 젊은 교사 강유위(康有爲)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가 쓴 글이란, 이름하기를 『조선변정고(朝鮮變政考)』라 하였는데, 스스로 이르기를 써놓은 뒤 낼지 말지 고심하다가, 조선국에서 찾아온 김 무엇이라 하는 나이 지긋한 신사를 만나 뵙고 마침내 마음 정하여 세상에 보이게 되었다 하였으니, 어찌 보면 조선의 책임도 조금은 있는 셈이었다.
유영복을 희대의 국제재판으로 구명하여 준 것은 조선이요, 그렇게 풀려난 유영복을 데려와서는, 이런 영웅호걸이 있어 양이의 기물을 능히 화인(華人)이 다스릴 수 있노라 (그러니 우리 동철을 많이 사랑해 달라) 홍보한 것은 김옥균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관헌에 붙들린 강유위로 말하자면 불만 품은 서생들 중 가장 온건한 쪽에 속하였으니, 역시 만인 조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며 배만(排滿)이니 척만(斥滿)이니 하는 무리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조선이 기름 붓고 불씨 들려주었다 한들, 그 불씨 온전히 간수하지 못하고 끝내 기름 못에 떨어뜨리고 만 것은 청국 조정이었으니, 조선만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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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은 의외로 출전이 『주역』에 있는 유서 깊은 말입니다. 그 나라에 찾아가 문물을 배운다는 뜻으로, 근대 이전부터 종종 쓰인 표현으로 『실록』에도 많이 보입니다. 본래는 보다 발전한 나라나 상국(上國)을 찾아간다는 뜻이었지만, 계속 쓰이다 보니 단순한 구경과 유람까지 의미가 확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남송대의 이름인 임안(臨安)으로도 익숙할 항주는, 소주와 더불어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소주·항주가 있다”하는 유명한 고장이지요. 김병학이 읊는 중당(中唐) 시기의 문호 백거이의 시 『억강남(憶江南)』은, 그가 항주 자사로 지내던 때 지은 것입니다.
청말민국초에 명멸한 수많은 사상가와 개혁가 중 첫 번째 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강유위는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광동성 바닷가 출신으로, 1882년 북경에서 본 과거에 낙방한 후 돌아오던 길에 상해에 들려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여기서는 한창 방황하던 시기일 1880년대 중반에, 바로 그런 지식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이 동철에 의해 설립되는 바람에 원 역사처럼 1891년에 사숙 만목초당(萬木草堂)을 여는 대신 조금 더 일찍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청을 중화제국의 오랜 계보를 잇는 마지막 왕조로 생각하는데, 실제 청은 그보다는 복잡한 통치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중화제국으로서의 청이 있었고, 열하(승덕)를 중심으로 하는, 유목제국으로서의 청이 또 있었지요. (물론 후자에 익숙하지 않았던 당대 조선인들은, 열하의 행궁을 단순히 ‘피서산장’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이 유목제국 청을 한데 묶은 것은 힘의 논리도 있었지만, 티베트 불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질서도 있었습니다. 중간에 언급되는 외팔묘 중 티베트식 사찰이 많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 중 하나인 보타종승지묘는, 건륭제의 지시로 라싸의 포탈라궁을 모방해서 지어지기도 했지요.
그러한 질서의 중심인 열하는 건륭제 이후 조금씩 방치되었다가, 제2차 아편전쟁 당시 함풍제가 이곳으로 이어하면서 다시 중요한 장소로 부상합니다. 함풍제는 열하의 궁궐과 주변 시설 보수공사를 지시했는데, 함풍제 사후 서태후가 (이화원 재건비용 확보를 겸하여) 공사를 중단시키지요. 이후 군벌과 일본군에 의해 수난을 겪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많은 유적이 잘 보존되어, 산장과 외팔묘가 하나로 묶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작중에 지나가며 언급되는 달라이 라마 13세는 아직은 나이 열하나, 그리고 후대에 몽골의 지배자 복드 칸이 되는 젭툰담바 후툭투 8세는 열여덟 살입니다. 작중에 직접 등장한 달라이 라마 13세의 스승이자 친우 악왕롭샹, 즉 아그반 도르지예프(Агван Лобсан Доржиев)는, 러시아령인 울란우데 근교에서 태어나 출가해 승려가 되었습니다. 이후 티베트의 독자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던 달라이 라마 13세를 보필하였으며, 특히 자신의 출생을 연줄 삼아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내려 했지요. 심지어 1909년에는 러시아 황실의 지원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티베트 불교 사찰을 건립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