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55화 (155/320)

51. 식후경 금강산 (1)

요 근래 도성 저자에 떠도는 시쳇말 하나 있으니, 무언가를 거리낌 없이 연달아 던져대는 모양새를 일컬어 ‘따발총 쏘듯 한다’라고 하였다.

따발총이란 곧 ‘다발(多發)’ 총이라, 두 해 전 맥안공행의 맥 선생(하이럼 맥심)이 창안하여 ‘감사의 뜻’으로 세 정을 헌상한 바 있었다 (국왕이 총기의 개량에 관심이 많다고 그는 평소 들었던 것이다.). 물론 놀랍기로는 이전의 회륜포(개틀링 건)도 참으로 놀라웠지만, 회륜포 선뵌 것은 고릿적 신미년(1871)이고 다발총 시연은 작년이었으니, 사람들 기억에 무엇이 먼저 떠오르겠는가.

허나 지금 이곳 팔각정 앞 공터를 빙 둘러싼 군중이 연호하는 ‘따발총’이란, 흉흉한 기세로는 화포와 다름없지만 어쨌건 물건 아니라 사람인 ‘강대 따발총’ 김오흥이었다.

거기에 또 사직골 권제비에 자칭 선달 원봉석이까지, 그러니까 성내와 성저를 막론하고 한양의 이름난 석전꾼이 한데 모인 셈인데, 평소라면 저 유명한 만리재(萬里峴) 석전에서 한쪽은 애오개 쪽에, 다른 쪽은 삼문 패거리에 서서 싸워야 할 이들이 이렇게 한데 뭉쳐있는 것은, 바로 반대쪽에 서 있는 자들, 깃발도 휘황하니 ‘유경(柳京, 평양) 척석군(擲石軍, 석전꾼)’을 자처하며 상경한 무뢰배를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그간 우리네 서북 사람들을 어즈간이도 괘롭헷다고(괴롭혔다고) 들었다. 인제 오늘 우리네 피양 척석군이 이래 올라왔으니 님자 만난 줄 알라우.”

“너희야말로 그 알량한 솜씨 믿고서 여기까지 왔으니 참 안타깝고 우스울 뿐이다. 오늘 지나면 머리통에 눈알 두 개 온전히 붙어있지 않을 수도 있으니 도성 구경이나 얼른 해두거라.”

평양은 예로부터 조선에서 내로라 하는 대읍(大邑)인데, 요새는 예전같지 않아서 조선국 안에서도 인천과 개성에 치여 크기로는 넷째요, 경부선까지 완공되면 어쩌면 다섯째로까지 떨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언제고 경의선이 저기 심양과 연경까지 이어지게 되면 옛 성세를 되찾겠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이야기였다.

하여 적잖은 서북 사람들이 평양이나 의주에서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여 도성과 인천 일대로 올라오고는 하였는데, 고향 생각 때문인지, 집값 때문인지 성 밖 서북쪽에 옹기종기 모여 살곤 하였다. 그리하여 무악재(毋岳峴) 넘어 홍제원(弘濟院)까지는 서울 말씨 듣기가 외려 어렵다 할 지경이었다.

나라의 경기가 조금은 피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일반 백성들 살기가 완전히 넉넉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각박한 가운데 이웃 동네에 평소 깔보고 업신여기던 서북 ‘평치’(평안도 사람의 멸칭)들이 몰려 살고 있으므로, 도성 민심은 저 평치들이 흐린다, 온량한 풍속에 때 끼게 만드니 참 그 죄 크다 하면서 그 흉을 보고, 있는 텃세 없는 텃세 다 부리고는 하였다.

그리하여 이대로는 계속 못 참겠다. 올해 단오에 이름난 대동강 석전 맛을 보여주면 조금 주눅이 들 것이다 하는 속셈으로, 아직 고향 땅에 남아 있는 싸움꾼들을 하나둘 불러들였는데, 그것이 어쩌다 보니 점점 불어나 이렇게 하나의 ‘군(軍)’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자존심도 있고, 또 판 커지게 되면 오가는 동전도 늘어나는 이치라, 올해는 도성 안에서 한 사람 몫은 하는 석전꾼들도 저들끼리 싸우는 대신 이곳 팔각정 앞에 모여들었다.

양편에 싸울 사람들은 주욱 늘어서고, 기세 흉흉한 가운데 저쪽 편에서 한 사람, 이쪽 편에서 한 사람 나와서 이제 싸움 시작만을 알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곳 도성은 나라에서 제일가는 문명한 곳이라서, 석전을 할 때도 막싸움 우격다짐이 아니라 먼저 결련태껸으로 시작하는 법이다. 자, 목숨 아깝지 않은 놈부터 덤벼 보거라.”

김오흥이 나서서 평양 석전꾼들을 도발하였다. 저들 하는 대로 따라오게 만들어서 기선을 제압하려는 속셈이리라. 점잖은 시늉은 시늉대로 하지만 태껸하는 옷차림대로 웃통은 까고 있으니 모양새가 퍽 우스웠다.

반대편에서도 그 속뜻을 곧장 알아차렸는지,

“거 우틔(옷) 까고서 우세부리면 무서워라 할 줄을 아나 본데, 어디 대동강 편쌈 한 번 맛보고서도 그런 말 나오나 보자우.”

하면서 은근히 저의 뒤에 손짓을 하였다. 허리춤에서 주섬주섬 주먹만한 돌이 나오는 모양새에,

“제길, 텄다! 다 족쳐라!”

하는 외침과 더불어 도성 패거리는 곧장 버드나무 몽치 꺼내들고서 달려들었다.

“붙었다!”

“모두 팔다리 분질러 돌려보내라!”

“잘한다! 기래! 저 들즘성(들짐승)같은 놈들 싸그리 한강수에 빠뜨려버리라우!”

한쪽에선 서울 말씨로, 다른 쪽에서는 관서 말씨로 응원하고 또 서로 욕지거리도 여력 될 때마다 퍼붓는데, 망패(돌팔매) 놀리는 솜씨 예사롭지 않은 서북 패거리 앞에 도성 쪽이 의외로 고전하였다.

전세가 그러하니 일신의 재주로 승부 볼 수밖에 없는 노릇. 김오흥은 더욱 분주하게 이리 야무지게 던지고, 저리 날래게 피하고, 절로 나오는 것은 ‘과연 강대 따발총이다’ 하는 탄성이라.

허나 세상 일이란, 잘한다고 칭찬해주게 되면 그때부터 삐끗하기 마련이었다. 바쁘게 이리저리 돌을 던지다 보니, 암만 솜씨가 빼어나도 백 번쯤 던지면 개중 하나쯤은 엉뚱한 곳으로 새기 마련이라, 맞추라는 ‘평양 상것’ 머리통 대신 멀찍이 지나가면서 구경하던 젊은 내시를 맞추었다.

벌써 나이 마흔 넘겼지만, 철딱서니 없게 애먼 남의 집 담벼락에 올라가 고함 지르며 응원하는 천덕만이의 눈에도 피 흘리며 쓰러지는 그 젊은이가 들어왔다.

석전 철에 사람 한 명쯤 돌에 맞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천덕만이가 쓸데없이 늘기만 한 눈썰미로 보니 저 사람 입은 옷은 새로 만든 관복이요, 수염 없는 것을 보니 열에 아홉은 내시였다 (물론 근래는 그 면도라는 것을 한다는 작자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자칫 일이 커져서 제게도 문책이 들어올 수 있겠다 싶어 – 아무리 실효 없다지만 어쨌건 철마다 나라에서 석전에 금령(禁令) 내리지 않던가 – 곧장 담벼락에서 뛰쳐 내려와 날아오는 돌을 피하면서 힘껏 외쳤다.

“자, 자! 비켜라! 비켜! 지금 누가 몸 상한지를 모르고 그러는 것이냐!”

그간 그냥저냥 호구하려 군문 들어왔다가 군공도 적잖이 세워, 어느새 벼슬, 아니, 계급도 참령(소령에 해당)이라, 호령하는 것도 어느새 꽤 자연스러워졌다.

저만큼 당당하게 호령 내는 사람이면 필히 그럴 만한 밑천이 있기 마련. 사람들은 눈치껏 길을 내주고, 그러다 보니 싸움 흐름도 절로 끊어졌다.

그러나 반 각도 되지 않는 동안 상한 사람은 부지기수에 재수 없게 급소에 명중하여 절명한 이도 둘이었는데, 거기에 하필 다친 내시가 근래 경복궁과 운현궁 오가며 나라의 중요한 사람들과도 연 쌓고 있던 유재현(柳載賢)이었으므로 일이 커졌다.

관제를 바꾸고, 또 바꾸고 하다 보니 끝내 궁인들의 관직을 어찌할 것인지의 문제만 남았다. 궁녀들이야 중전에게 맡겨서 알아서 잘 하게 하면 되는데, 문제는 조종 오백 년을 이어내려온 내시의 제도였다.

사정 들어보니 집안 빈궁하여 그 길 택한 사람도, 어렸을 적 안타까운 사고 당하여 부득불 들어오게 된 사람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건 바깥에 나가면 사내 구실도 못하는 자라며 은연중 손가락질당하는 신세였으니, 그런 사정 들은 귀남은 이를 안쓰럽게 여겼다.

이미 구실 못하게 된 물건에 그 기능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는 제도는 고칠 수 있는 것이라, 우선은 머리 잘 돌아가는 유재현에게 시켜 내시들 사이의 공론을 알아보게 하고서, 그를 바탕으로 작년 가을에는 하초(下焦, 사타구니)에 봉변한 사람만을 내시로 뽑던 전례를 아예 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저의 후대에 그런 설움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곧 지금 누리는 위세와 부귀 내려놓는 마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므로, 오히려 진짜 내시들은 유재현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다. 그러니 실세까지는 아니어도 유재현은 꽤 중요한 벼슬아치 축에 든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런 사람이 관자놀이에 돌 얻어맞아 자칫 불시에 이승 하직할 뻔하였다 하니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석전이라 함은 국초부터 금하려 하였으나 끝내 폐하지 못하였는데, 온갖 불량한 무리가 이를 명분삼아 날뛰니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고질로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이처럼 궁인 중에서도 지체 높은 이를 상하게 하여 지존의 위엄에까지 병폐 미치게 하였으니, 마땅한 처분을 내려서 이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대책을 논의한다면서 근엄하게 앉아 있는 참의대부들 중에는 아마 엊그제 석전판 구경 나간 이도 없지 않겠지만 – 물론 체통이 있으니, 멀찍이 성벽 위에서 천리경(망원경)으로 바라보든 했을 것이다 – 이 자리에서는 하등의 티 내지 않고,

‘허어, 큰일이로다.’

‘나라의 풍속이 어찌 이리 어지럽혀졌다는 말인가.’

하면서 혀 끌끌 차곤 하였다.

“그러나 무릇 법(法)이란 개울이 흐르는 것처럼, 막는 바가 있으면 트이게 하는 바도 있어야 합니다. 그간의 금령에도 석전을 끊어 없애지 못한 까닭은, 비록 난행(亂行)의 축에 들고 또 인명이 종종 상하기는 하지만, 그 동리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로 묶이게 하는 덕이 있었음이 하나요, 또 세시(歲時) 따라 즐겁게 노니고자 하는 본성에 맞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이런 일은 공산당이 백성들 편을 들고 개화당이 선비들 편을 들기 마련인데, 박정양이 나서서 이렇게 발의하니 잠시 사람들이 놀랐다. 곧 본론이 나왔으니 그런 놀람은 사그라들었지만.

“그런데 근래 대서 땅을 보면, 공놀이에 짜임새를 갖추게 하여 노소와 남녀를 막론하고 즐기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발로 차고, 어떤 것은 막대로 치는데, 그 법도는 정연하고 또 체덕(體德) 함양하는 공효가 있으니 권장할 만합니다.”

나라 안에 가끔 이런 해괴한 발상이 나올 때면, 열에 너덧쯤은 경복궁 광화문 안쪽에서 나오는 것이요, 또 두셋쯤은 (늘 이름 바뀌는) 장동구락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아마 홍영식이든, 윤치호든 누군가가 서양 공놀이 이야기를 듣고서 그것으로 고공들 싸움 붙이자는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었다.

들어가는 시간은 적고, 또 가끔 불온한 마음 품을 법한 자가 있다면 여기에 열과 성을 모두 쏟을 터이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 생각이 놓치는 바 많음을 걸고 넘어지는 이 있었다.

“인천부의 고공이나 마포의 선인(船人)이라면 그러한 놀이로써 점차 옳은 풍속을 권면할 수 있으나, 오늘날 석전의 폐해를 보면 그 동리에서 가산 있는 자들끼리 재화를 모아 장사와 무뢰배를 모으는 것이 더 근저에 있는 원인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더 이롭고 즐겁게 노닐 수 있는 방도가 생기지 않는 한, 무엇을 하든 폐단이 생길 것입니다.”

박정양의 문객으로 있다가 개화당 돌아가는 모양새에 다소 실망하여 낙향하고서는, 자신의 고향 서천군 참의대부로 뽑혀 역대 가장 연소한 참의대부로 이름 날리고 있는 공산당의 이상재(李商在)가 지적하였다. 평소 재담꾼으로 이름난 그가 농 하나 섞지 않고 발언하니 필히 진지한 이야기라, 과연 좌중 생각하기에도 일리가 있었다.

나라가 겨우 빈궁함을 면하여 하루 일해 하루 먹고 사는 정도라면 모르겠으나, 저렇게 여력 있는 이들이 있으니 또 문제였다. 바쁘게 일하다 보니 나라의 사정 궁벽하지 않아 가산은 티끌씩이나마 쌓이는데, 그것으로 무언가 쓸모 있는 일을 할 여력까지는 되지 않고, 더구나 그럴 짬을 낼 수도 없었다. 그러니 석전처럼 쓸모 없는 일로 잠시의 즐거움을 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상재가 그것을 지적하였다 하여 딱히 대안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우선 개화당 말대로 해볼 수 있는 만큼은 해보자 하는 쪽으로 다시 공론이 돌아갔다. 그 서양 놀이들을 나라에 소개하자는 의론이 일어나고, 또 대서에서 저들 공놀이를 그렇게 유익한 것으로 바꾸었으니 우리네 석전도 어떻게 그리 개화한 풍습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느냐 하여 그런 방도도 모색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런 시국에 엉뚱한 구석에서 해결하는 한 가지 단서가 나오고야 말았는데, 그 근원은 아니나 다를까 만인지상 귀남이 마련한 것이었다.

“참으로 맛이 좋습니다. 소관이 처음 부임하였을 때부터 이 가배는 천하의 명물이라 들었는데, 가히 명불허전이라 하겠습니다.”

류큐국 초대 주조선공사로 얼마 전 부임한 코치웨카타 초조 - 이곳에서 부르는 말로는 향덕굉(向德宏) - 가, 정동 외교관들 사이에서 소문난 조선 왕궁 특산 가배를 조용히 한 모금 마시고서는 말했다. 달달하면서도 씁쓸함이 일품이라 해야 하겠지만, 그 설탕은 오키나와도, 아마미(奄美)도 아닌 대만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므로 실은 씁쓸하기만 하였다.

“그렇다니 다행이오. 다만 입에 썩 맞지는 않는 듯한데, 성의니 무어니 생각하여 억지로 모두 마실 필요는 없소이다.”

그 복잡한 심경이 바깥에 드러난 것인지, 곧장 조선국왕 귀남이 알아챘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가배를 만든 숙수의 탓은 아니니 청컨대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허, 그러면 무슨 어려움이라도 있는 것이오?”

이왕 드러난 일이니 어찌 더 감출까. 사실 자신이 이곳 조선에 오게 된 것도, 그 옛날 적십자사 배에 밀항하여 왔을 때처럼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었으니, 감춘다 한들 득 볼 것도 없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막으면서 말을 올렸다.

“근래 이곳 도성에서는 백성들끼리 편 갈라 싸우는 놀이를 벌인 일로 시끄러운 듯합니다. 허나 감히 말씀드리건대 오히려 전하의 백성들이 소관으로서는 부러울 따름입니다.”

류큐 왕국이 명줄 보전하게 된 이래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결국 류큐도 다른 나라에 그 공사라는 사절을 파견함이 가당하지 않겠느냐 하는 여론이 조정에서 일어난바, 우선 가장 중요한 두 이웃에게만 공사를 보내기로 하였는데, 즉 조선과 일본이었다 (이를 두고 청국에서 곧 아쉬운 소리가 나올 것이었지만, 류큐로서는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어째서 그렇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저희 유구국에는 그럴 여력도 없는 백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조선국왕 하문함에 속마음 담은 답이 나왔다.

물론 그가 이곳에 와서 배운 조선 속담으로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았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하는 격이었으니 염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말하는 바가 거짓은 아니었다.

무역 외에 먹고살 길이라면 설탕뿐인 류큐인데, 조선이 류큐를 남기는 대가로 일본인들의 대만 경영을 도와주고 또 저들도 한몫 거들게 되면서 그 하나 남은 구명의 방도까지 잃게 되었다. 아무리 기후가 사철 온난하다지만, 결국 바다 한가운데 조그만 섬 몇 개에 지나지 않으니, 대만에서 설탕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곧 판로를 송두리째 잃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섬의 사람 중 사지 멀쩡한 자들은 한때 그렇게 원수처럼 여기던 사츠마, 아니, 가고시마(鹿兒島)와 그 일대로 (얼마 전 선거구를 재조정하면서 마침내 형식상으로나마 폐번이 이루어졌다) 일거리를 찾으러 떠나가고, 개중에는 바다 건너 하와이라는 섬에서 일손을 구한다기에 그곳까지 가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것이라면, 저탄소(貯炭所) 하나 정도 남아서 오가는 기선들이 들려주는 정도일까. 섬 안에서 조용히 살자는 반대를 묵살하고 류큐국왕 쇼타이가 조심스레 조일 양국에 공사를 파견한 것도, 이들이 어떻게 살 길 하나쯤 마련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그대 나라는 조그마하다고는 하지만, 바다 한가운데의 명승(名勝)인데 어찌 살아갈 방도가 없겠소?”

“이르신 대로입니다. 물론 전하께서 다스리시는 조선국의 산수도 실로 빼어나 가히 중원 바깥의 중원이라 할 만합니다만, 감히 말씀드리건대 저희 유구국도 산과 바다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이 백성의 경영할 방도를 절로 마련해주지 않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오.”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귀남이 코치웨카타의 말을 끊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먹고 사는 문제가 얼추 해결되면 금강산 구경을 가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요즘 세상에, 꼭 배 채운 뒤에 구경 가는 곳이 금강산일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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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발총’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사용하던 PPSh-41 기관단총에서 기원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총탄을 마구 쏟아붓는다 하여 ‘다발(多發)총’이라 불렀다는 것이 민간어원입니다만, 실제로는 PPSh-41 특유의 드럼형 탄창을 ‘따발(똬리의 방언)’이라고 부른 데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는 반대로 다발(多發) 쪽이 원조가 되었고, 지칭 대상도 소련군 기관단총이 아니라 맥심의 기관총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세시풍속 석전은, 통상 정월 대보름과 단옷날에 치러졌고, 대개는 이웃한 마을끼리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돌만 던지며 싸웠던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주먹싸움부터 변형된 격구까지 다양한 싸움 형식이 혼합된 패싸움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석전에 있어 또 눈여겨볼 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개화기 서양인의 눈에는 들어오곤 했던 그 특유의 폭력성입니다. 길게는 열흘 남짓 계속되는 석전에서는 당연히 사망자가 나왔고, 조정의 지속적인 금령에도 불구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 등으로 정당화되며 (작중에 언급되는 애오개 대 삼문 패거리의 ‘만리현 더비’가 그 예입니다.) 일제강점기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풍속의 차원을 넘어, 유교윤리가 기층까지 스며든 사회에서 이러한 단체적 폭력의 발산이 일종의 ‘카니발’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즉 사회의 규율과 관습이 의도적으로 역전되어, 그 동안 존재했던 울분과 갈등을 일시적으로 표출하는 전근대적 축제의 성격이 있던 것이지요 (Siegmund 2018).

여담으로 평양 석전은 특히 돌팔매질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벌이기도 했다고 할 정도로 사격전(?) 중심이었던 듯합니다. 심지어 대한제국 시기에는 석전 금령을 위반하고 어김없이 모여든 석전꾼들을 해산시키려 출동한 진위대가 바로 그 문제의 석전으로 진압을 시도하는 아이러니한 일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한편 서울에서 석전은 동네별 대항전의 형태를 띠었는데, 이는 동마다 술 종류가 다르다고 할 정도로 집단별로 확연히 구분되는 거주 양상을 보였던 조선시대 서울의 공간 구성과도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 그 와중에 언급되는 ‘강대’는 현재의 용산~마포에 해당하는, 한양 성저 중에서 한강변을 따라 남서쪽으로 형성된 지역의 속칭입니다. 뱃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성정이 거칠고 의협심이 강하다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작중에 언급되는 김오흥, 권제비, 원봉석 등은 일제강점기 조선 신문에 소개된 석전 관련 일화를 정리한 김영만·최종균(2020, “서울의 무형유산 결련태껸과 석전의 상관성 연구”)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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