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54화 (154/320)

50. 무엇을 할 것인가 (3)

원산의 체르니셰프스키네 ‘은신처’ 앞 조그만 공터에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어지간한 거목 아래가 늘 그렇듯 그 그늘에는 널찍한 평상 하나 놓여 있어 동정 감시하는 김가진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가뜩이나 좌불안석이던 인민의 의지 사람들로서는, 밖에 계속 서성이는 저 사람이 복장은 평복이지만 분위기는 고관이라 – 오흐라나의 밀정들을 종종 마주하다 보면 생기는 직감이 있었다 – 하여, 일행 중 가장 연소하고 또 누설할 비밀도 적은 ‘어린 울리야노프’를 내보내 뭔가 수상한 짓을 따로 꾸미지 못하게끔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요 며칠, 조선 사람이었으면 아직 댕기머리도 어색하지 않을 소년이 나와 저의 말동무 노릇 하고 있으니, 그 수가 뻔히 보이기도 하였거니와, 소년이 흘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집안 사정 탐문할 수도 있는 것이라, 김가진은 답장도 기다릴 겸 그 수작에 놀아나 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아직 결론이 안 났다는 말인가? 마트(мат, 체크).”

김가진의 상(象, 비숍)이 오른쪽 앞으로 네 칸 움직여 블라디미르의 졸(폰)을 잡았다.

노름이라면 조선사람들 중 누가 싫어하겠냐만, 북변의 춥고 고된 겨울은 더욱이 놀거리 없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 해삼위 다녀온 사람들을 통하여 ‘마우재 장기(체스)’가 금방 퍼졌다.

본래 있던 장기말에서 사 하나와 포 둘을 떼고, 졸만 세 개 더 넣으면 그대로 할 수도 있거니와, 미미한 졸이 상대편까지 가는 전공 세우면 다른 벼슬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재미였다.

“나흘 말미 주었으면 슬슬 결론도 날 법한데 말이지.”

“간단한 질문이라고 해서 대답까지 간단한 것은 아니어서요.”

무심한 듯 우회하는 대꾸를 내어놓으면서, 블라디미르는 멀리 있던 자신의 차(車, 룩)를 스윽 움직여 만족스러운 ‘탁’ 소리와 함께 괘씸한 상을 잡았다. (나무로 둥글넓적하게 만든 말이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익숙해지고 나니 나름의 손맛이 있었다.)

불의의 일격에 도통 속 모를 것 같던 김가진의 얼굴에 난색이 감돌았다.

“어이구야. 물러달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겠지?”

“물론이지요.”

“하여간, 어르신이 청하는데 어린 녀석이 건방지기는. 이곳 조선에서 흔히 하는 말로, 그렇게 마음 야박하게 쓰면 나중에 머리 벗겨진다고 하는데...”

“아직은 수북하니 걱정 마시지요.”

김가진은 성급하게 자신의 하나 남은 마(馬, 나이트)로 장(將, 킹)을 다시 노렸다.

어린놈이 장기 좋아한다고 하여 가볍게 응한 이래, 어제오늘 합하여 지금껏 한 예닐곱 판은 두었을 것이련만, 어째 한 번을 이기지 못하니 어른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어딘가 잘 풀리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결정적인 한 수를 두지 못하고, 그러다가 훅 들어오는 외통수에 번번이 당하였으니, 이번에야말로 그렇게 되기 전 결착을 보겠다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가면, 나도 엄연히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인데, 언제쯤 답하는 글을 받아볼 수 있을지, 그 정도는 알려줘야 하지 않겠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호승심에 더 중요한 일을 잊을 김가진은 아니었다.

“그것이, 말씀드린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서요. 아시겠지만 사람이 여럿 있고 하다 보니...”

지금까지 이 울리야노프가 이런 식으로 은연중에 흘린 내용을 사금파리 짜 맞추듯 한데 모아보면, 아마 금상께서 노리신 것 – 적어도 김가진 생각하기에는 그러하였다 – 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였다.

“그뿐인가?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당혹스러워서, 남을 탓하든 세상을 탓하든 하고 있는 것이겠지.”

블라디미르가 저의 졸 하나를 슬쩍 내지르는 사이 김가진이 또 살살 건드렸다.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마침 달려들던 김가진의 마가 자신의 다른 졸 하나를 또 잡으면서 장군 부를 채비를 하고 있었기에, 정곡 찔린 당혹감은 감출 수 있었다 (아마도).

“그렇다고 해도, 다들 좋은 뜻으로 모인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곧 합의를 이루어서 저희 쪽 입장을 잘 정리해서 드릴 테니 걱정 마시지요.”

김가진이 섣불리 옮긴 마의 틈을 멀쩡히 남아 있던 다른 차로 파고들면서 블라디미르가 응수하였다.

“샤흐 이 마트(Шах и мат, 체크메이트).”

“허 참! 또 그놈이 언제 거기까지 가 있었는가!”

하지만 외통수에 걸려든 것은 저 담장 너머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딱히 승리의 기쁨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정들 하게! 진정들!”

집주인 체르니셰프스키가 밖으로 들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목청 높여 말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진정될 무리는 아니었다.

체르니셰프스키의 집은 조선 기준으로 작지는 않았다. 오히려 칸수로 따지면 쉰일곱 칸에 달하여 수십 명 남녀를 근근이나마 수용할 정도였으니 대가(大家) 축에 들었다.

하지만 다들 적어도 조금 산다 하는 집안 출신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지하’ 생활을 한다지만 대개 남들 사는 것처럼 문명의 삶을 누려왔던 인민의 의지 사람들이다. 그들 눈에는 방은 영 좁고, 가구는 불편하며, 천장은 낡고 또 낮았다.

그러던 차에 문제의 그 서한이 당도하였으니, 화약고에 불씨 당긴 것과 무엇이 다르랴.

“어찌 되었든 속히 답을 보내고, 이곳 정부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언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것까지 있습니까? 아무리 최근 근대화를 하고 있다지만 동양 나라의 지방 항구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몰래 배편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일본으로 밀항해서 유럽행 여객선 하나쯤 잡는 것은 어렵지 않을 텐데요.”

“그랬다가 그걸 빌미로 놈들이 우리를 체포하려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가 뭔가 저들 법을 어기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데요? 고작 서너 명 빠져나가겠다고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위험에 처하게 할 생각입니까?”

지금까지 그들 조국의 사법체계를 보면, 정말 황실에게 손을 대지 않는 한, 어지간하면 시베리아 유형 정도로 끝을 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이 불거진 뒤에도 과연 그럴 것인가? 딱히 관대해서라기보다는, 시베리아에서 딱히 도망할 곳이 없으리라 여겨 사형 대신 유형을 선고하는 것이 더 클 터였다.

그러니 최악의 경우, 이 집이 어느 날 불시에 조선 경찰에게 포위되고, 그대로 그들 수십 명이 압송되어 오흐라나에게 인계되고, 전원이 슐리셀부르크(Шлиссельбург) 같은 감옥으로 끌려가 다시는 라도가 호수 바깥으로 발을 내딛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렇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짰어야 했을 테지만, 이 자리에 없는 어린 울리야노프의 제의를 받아들일 때만 하더라도 거사가 성공하면 곧장 러시아 전역에 소요사태가 일어날 테고, 그렇게 되면 주변 나라들도 모두 러시아 본토의 사정에만 눈길 쏟을 것이므로 저들이 망명을 하든 도피를 하든 신경 쓸 여력 없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생각을 품었던 것이었다.

“어차피 조선 당국이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눈치채고 뭔가 행동을 취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거기에 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된 것, 최대한 우리 대의의 정당함을 알려야지요.”

“그 말이 옳으이. 내가 이곳 조선을 도피처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지. 그대들도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나라가 어떤 헌법을 제정했는지?”

체르니셰프스키가, 애초에 조선이 자유주의를 어설프게나마 시도하는 나라로 그들 사이에 알려지게 된 계기를 상기시켰다.

“물론 전제주의를 자칭하고는 있지만, 분명 우리 고국의 전제정치와는 같지 않으니 설득하고 타협할 구석이 없지 않을 게야.”

“어르신 말씀이 맞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기에 무어라 답해야 하겠습니까?”

“사실대로 써야지. 러시아 인민들을 위해 거사를 일으킨 것이지, 무슨 무정부 상태를 위해서 난리를 일으키려 했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다. 만약 귀국이 우리의 사정을 양해해주어, 무사히 유럽으로 넘어갈 수 있게 협조해 준다면, 반드시 더 나은 나라를 위해 노력할 것이며 러시아의 벗 조선에게도 이는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정도면 어떻겠는가?”

사랑방에 모여들어 누구는 불편하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고, 누구는 항구에서 상자를 집어와 의자로 삼고, 또 누구는 마루에 옆으로 걸터앉아 고개 돌리고 있는데, 이렇게 체르니셰프스키가 먼저 발의하니 개중 고개 끄덕이는 이와 잘래잘래 흔드는 이가 동시에 나왔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후자가 훨씬 더 많았다.

“‘더 나은 나라’라니요?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 아닙니까?”

“그 무슨 소리인가? 바쿠닌주의자 같으니라고!”

“그러면 플레하노프 그 타협주의자의 이상한 독일 사상을 우리의 핵심 주장으로 삼자는 말인가!”

“‘이상한 독일 사상’? 당장 그 말 취소하시오!”

다시 한 번 기력을 끌어모아 체르니셰프스키가 모두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자, 자. 정숙들 하게! 중요한 것은 저들이 무엇을 듣고 싶어하느냐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야.”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 당장의 구명을 위해서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반대합니다. 우리 원칙을 곧이곧대로 써서, 비록 지금은 탄압의 구실이 되더라도 떳떳하게 우리의 대의를 알려야 합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무엇하러 이곳까지 온 것입니까! 동지들이 억압당하고 죽어가는 동안, 혁명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우리들이 우리 동지들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최대한 많은 수를 남기기 위해, 지하에 숨어들 수 없을만큼 당국의 주목을 받는 인물들을 모두 시베리아로 도피시키려던 집행위원회의 계획이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문제였다. 입이 많으면 믿는 바라도 한 가지여야 할 터인데, 그저 플레하노프와 그의 흑토재분배당(Чёрный передел)에 반대하여 뭉친 세력들이 이들 ‘인민의 의지’ 사람들이었으니, 통일이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체르니셰프스키는 최후이자 최악의 수를 두게 되었다.

“어쩔 수 없게 만드는군그래. 어차피 자네들 모두 이곳에 찾아온 객이고, 나는 그나마 몇 해 전부터 이 도시에 머물렀기 때문에 현지 관헌과는 면식이 있다네. 그러니 의견 합일은 뒤로 미루고, 우선 나 혼자서 답신을 쓰도록 하겠네.”

“그 무슨 전제주의입니까? 그렇게 하면 차르 독재와 무엇이 다르지요?”

“그만! 우리 모두의 명운이 걸린 일이야! 계속 그렇게 다투느니 차라리 나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는 게 낫네.”

“흥! 이 집에 펜이 하나만 있답니까?”

열한 번째 판에서는 그나마 소년의 기물을 더 많이 잡아내기는 하였지만, 다 이겨가는 줄 알았다가 마지막 한두 수에 외통으로 빠져버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온갖 심란함이 다 내비치는 얼굴로도 그렇게 자신을 이기고 있으니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지난 번 판에서 어떻게 자기가 이길 방법은 없었을까, 기억 나는 대로 복기를 하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소년이 툭 나왔다.

김가진은 저 집 안에 ‘아라사국 난적(亂賊) 민의당’이 여럿 숨어있음을 진작에 알고 있었고, 아마 저 집 안의 사람들도 김가진 자신이 알고 있음을 또 알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대놓고 나와서 답을 전해주지는 못하고 대신 마치 수줍은 규방 처자가 언간(諺簡) 주고받듯 애먼 블라디미르만 가운데서 고생하게 만들고 있으니, 김가진이 보기에는 퍽 우스웠다.

“또 한 통 더 건네주러 나왔나?”

블라디미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보통 서간이 한 통이 있으면 답신도 한 통이기 마련이지. 블라디보스토크 생활이 러시아 경험의 전부이기는 하지만, 그런 이치는 러시아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음은 익히 알고 있는데, 이 무슨 일인가.”

물론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보고 들었으니 운현궁에 보고할 일이 적지는 않을 것이었다.

안에서 다투는 소리가 점점 고조되더니, 이렇게 어제부터 한두 통씩 따로 답변이라고 글이 나오고 있었으므로, 안의 사정이 어떠한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언뜻 보았더니 그 내용도, 몇몇은 온건하게 저들은 그저 아라사 겨레를 위한다 쓰기도 하였지만, 또 과격을 넘어 흉참한 지경에 이르는 글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개중 몇몇은, 다른 글들은 대개 그들 중 분란 일으키는 삿된 자들이 적은 것이므로 중히 살피면 안 된다고 첨언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그 뒤에는 가릴 것 없이, 어찌하여 자신의 주장하는 바가 옳으며 조선국 국왕 전하께서 삼가 헤아려주셔야 하는 까닭은 이러하다 하면서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읊어내려가는 것이 길게는 수십 쪽에 달하였다. (대체 저 자들은 목숨을 위해 도주하는 마당에 무슨 공책을 저리도 많이 들고 다닌다는 말인가.) 허나 그런 자질구레한 이론은 저 공산당의 전 무어라 하는 젊은이라면 모를까 김가진 자신이 살필 바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슨 스무 해 전 이양선 문정(問情)하던 것도 아니고, 글월로 그 속뜻을 묻는데 무엄하게나마 이의 품었지만, 이처럼 효험 있으니 어찌 지금에 와서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겠는가. 저렇게 한 번 갈리면 이제 아라사로 고스란히 추포해 넘기든, 아니면 저들 처음 뜻한 대로 구주로 도망하는 것을 방관하든, 이제 그 모임을 오래 이어가지 못할 터였다.

“이건 제 글입니다.”

“오호, 이제는 자네도?”

주섬주섬 또 한 통을 꺼내면서 덧붙이는 말에, 김가진이 흥미를 보였다.

블라디미르로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역사에 남을 거사를 일으킨 형 알렉산드르를 위해서라도.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를 또 한 대여섯 번 읽었을까. 그 안에 나오는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다. 주인공 베라 파블로브나처럼 농민들을 계몽하여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도, 멋진 사나이 라흐메토프처럼 평소 단련한 몸으로 직접 배에서 보트를 끌고, 무쇠로 연장을 만드는 것도 퍽 멋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책을 쓴 체르니셰프스키조차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하였다.

“우습게 보시는 것 압니다. 저라도 아마 그럴 것이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누군가는 할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받아들어 보니 정직하게 딱 한쪽이었다.

‘세상을 뒤엎어 더 좋게 바꾸고 싶습니다. 그 이상의 뜻은 아직 없지만, 장차 찾아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허, 짧군.”

“나이는 어리지만 배운 것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고민하면서 듣고 본 바로는, 배운 것이 많다고 해서 절로 답이 찾아지는 것은 아니더군요.”

따로 부추기지도 않았는데,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속뜻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며칠 전이었다면 ‘저들 편’을 생각하여 끝내 입을 잠그고 열지 않았을 터이니, 그 사이 안쪽의 어지러움을 보고 환멸도, 실망도 느껴 심기일전하기에 이른 것이리라.

어째서 세상은 올바르지 못한가. 잘은 몰라도, 누구는 많이 가지고 누구는 적게 가지고 있는데, 시일이 지날수록 그것이 균등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많이 가진 자에게 가산이 더 몰리더라.

이것을 어떻게든 바꾸어야만 할 것인데, 조선국은 몰라도 러시아와 다른 유럽 나라에서는 가진 자들은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모르면서 오히려 없는 자들을 더욱 억누르려 하고, 빈한한 무리들은 저의 빈한함이 어디서 말미암은 것인지를 모르고 그저 당하고 있을 뿐이니, 그 궁색한 상황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한바탕 뒤집어엎지 않고서 능히 그리할 방도가 또 있겠는가.

열여섯 소년의 학식이 깊으면 얼마나 깊겠냐만, 그랬기에 도리어 그 언설이 진솔하였다. 김가진 본인도 지금이야 호가호위하는 여우의 위엄을 다시 빌린 족제비마냥, 조선 팔도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쏘다니지만, 그에 앞서서는 또 서얼로 태어난 한 서린 사람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더욱 심금을 울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확실히 언변 하나는 대단하였다. 아라사 말이 유창할지언정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조선 사람인 김가진이 듣기에도 그럴듯할 만큼.

잘 가다듬으면 난세를 일으키고 마무리 짓는 천하의 효웅(梟雄)이 되든, 후대에 길이 그 가르침 남기는 철인(哲人)이 되든 할 터였다.

“... 잘 들었네. 생각이 깊군그래.”

“아직 한없이 부족합니다.”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야. 그러니 공부를 하게. 물론 그런다고 절로 답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 단서는 얻을 수 있을 테니. 나로서는 사실 자네 당여들이 이번에 저지른 일은 무엄하고 흉참하다고밖에 평할 수 없어. 그런 평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마냥 탓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당장 그 옛날, 서얼이라는 이유로 글공부 대신 돈벌이 재주를 배우라고 떠밀려나갔을 때, 일시의 울분에 차 자칫 나라에 화란 몰고 올 뻔한 것이 자신이었지 않은가. 그때의 자신보다도 훨씬 총명하고 재주 넘치는 소년이므로, 어쩌면 엄청난 공을 이루어 천하를 한바탕 뒤집어엎을 수도 있을 것이련만, 반대로 엉뚱한 생각 품거나 잘못된 무리와 교유하여 정말 이번 일에 비할 수 없는 화란을 몰고올 수도 있을 터. 그러니 지금 당장 눈앞의 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러하였다.

“이번에 자네 형이 거들었다는 그것이 과연 임금을 시해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죄인을 벌한 것인가. 결국 후대의 평은 자네 가형뿐 아니라 자네의 행적에도 달린 것이야. 천하를 한바탕 뒤엎어서 천하를 고치겠다는 생각이 훌륭한지, 아니면 요사스러운 것인지. 나도 학식이 깊지 않아 함부로 말은 못 하겠네.

하지만 항상 길은 있기 마련이고, 길이 없다면 하나 만들면 될 일이야. 이 나라를 보게. 우리의 역사가 남들 보기에 항상 떳떳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지난 이십 년은 어디 내어놓아도 부족할 것은 없다고 자부하네. 세상의 운수를 바꾸는 일이, 꼭 피 흘려서 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리고 그처럼 길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견문을 넓혀볼 필요가 있을 테고.”

물론 이 나라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하지만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요, 홀로 가는 길이 외롭다 하여 쓸모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자신도 그렇게, 잠시 신세 망칠 뻔하다가 쓰임을 얻지 않았는가. 처음에는 그저 대원군 한 사람의 공덕을 입은 줄 알았지만, 또 그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성싶지만 실은 나라 전체에 그 손길 닿은 성상이 계시었다.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공부가 깊지 못해서겠지요.”

복잡한 심경 곧이곧대로 드러내는 목소리 큰 소년이었다. 물론 정말 자신의 일장연설에 이 동양인이 감화되리라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심드렁하게 ‘과연 그렇기만 하겠느냐’ 하는 답이 곧장 나올 줄은 몰랐다. 가뜩이나 요 며칠 마음 속 의심이 증폭되는 와중이었기에 그 반향도 작지 않았다.

“그래. 뭐, 나도 그저 안타까운 심정에 이런 생각도 한 번 해보아라 하고 화두 던진 것이니 너무 담아두지는 말게. 뭐,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이름이 앎의 시작이라고 하지 않던가. 내 어디 가서 함부로 얘기하지 않을 테니, 언제고 제대로 된 답을 한 번 내어보도록 하게.”

그러나 또 그의 말마따나, 이것이 끝일 리가 없기도 하였다. 오히려 하나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것. 블라디미르 그가 생각하는, 더 좋은 세상을 찾아나기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답을 찾을 때까지는, 글쎄. 오늘 일은 함부로 어디 가서 얘기하지 않을 테니 걱정은 말게나.”

그 자리에서 성냥 – 요새 조선 땅에서도 조금씩 만들고 있는데, 매우 편리한 물건이었다 – 꺼내어, 블라디미르의 눈앞에서 종이에 불을 붙였다.

물론 잡배 무리 가운데 범상치 않은 소년 하나 있었다고 운현궁에 보고하여야 할 터인즉, 그의 앞에서 지금 화르륵 타오르고 있는 저 종이는 사실 빈 종이에 불과하였지만.

그리하여 궁에서도 결론짓기를, 지금 원산부에 있는 무리로 말하자면 비록 흉참한 일을 저지르기는 하였으나 뭉쳐서 작란할 소지까지는 없다 하여, 아라사 당국에는 만일 추포하기를 원한다면 맨입으로는 어려워도 대신 추포는 해 주겠다 알리고 마무리 짓기로 하였다.

아라사 쪽에서도 역시, 직접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일에 가담하지 않은 무리들이라면 굳이 잡아들여 벌 줄 필요는 없고, 대신 계속 추적만 하면 되리라 결론을 지었으므로, 감시 대상인 자들이 원산을 떠날 때 무슨 배편으로 어디로 향하였다 하는 정도만 알려달라 답변하였다.

또한 더불어, 대체 어떻게 그들의 속셈을 알아내면서 또 분란의 씨앗을 뿌렸느냐 문의하기에, 그대로 그 문답 주고받은 내용을 알려준바, 불온세력들을 소탕함에 있어서는 우선 그들을 양지로 끄집어내어 저들끼리 싸우도록 하면 된다는, 어쩌면 한참 잘못되었을지 모르는 교훈이 우랄 산맥을 넘어 멀리 유럽의 당국 사이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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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체스를 좋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년에는 수를 궁리하면서 허리를 잔뜩 굽히는 습관 때문에 만성적인 소화불량으로 고생하기도 했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기와 체스는 모두 인도에서 비롯한 놀이입니다. 장기가 한중일 삼국에서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듯, 유럽의 체스 역시 우리가 아는 형태로 표준화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체스의 기물을 뜻하는 말이 조금씩 다른 것은 그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러시아어에서 체스의 비숍은 ‘코끼리(Слон)’, 나이트는 ‘말(Конь)’로 각각 부르지요. 퀸은 유독 ‘페르지(Ферзь)’라 부르는데 이는 본래 장기의 사(士)에 대응하던 중세 체스의 기물이 이름만 남은 것입니다.

레닌의 가족사진을 보면, 그의 탈모는 유전이었던 듯합니다. 심적으로 고생을 해서 그런 것인지, 나이 스물셋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탈모가 진행되었지요 (작중 시점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리하여 러시아의 전설적인 ‘대머리 법칙’, 즉 모발 풍성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이 번갈아 집권하는 경향(볼셰비키에 의해 무너진 임시정부의 수반 케렌스키는 모근 수에 있어서는 레닌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을 이어가게 되지요.

러시아의 반체제 운동은 지난 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처음에는 추구하였습니다. 이것이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하자, 점진적인 개량노선을 택한 것이 잠깐 언급되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흑토재분배당이었고, 일단 테러를 통해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믿었던 세력의 집합이 ‘인민의 의지’가 되겠습니다.

이후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스에 주목하게 되었고, 1883년에는 최초의 러시아인 마르크스주의 결사인 노동해방단(Освобождение труда)을 스위스 제네바에서 꾸려,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러시아어로 옮기고 국내에도 유포하였습니다. 원 역사에서도 가뜩이나 형으로 인해 의심을 받던 중 카잔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는 바람에 퇴교당한 레닌은, 1888년과 1889년 사이에 처음으로 『자본론』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혁명운동 세력은, 인민의 의지가 강행한 각종 테러 활동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차르의 전제정치가 더욱 강화되는 추세에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러시아에 소개된 마르크스주의는 새로운 길로써, 빠르게 젊은 반체제 인사들 사이에서 수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레닌이 가장 즐겨 읽었던 책은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일 것입니다 (이는 레닌의 부인 크룹스카야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귀족과 상류층 출신의 젊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버리고 일반 민중생활의 개선과 경제적 자립, 발전을 위해 헌신한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당시 레닌뿐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덕분에 『무엇을 할 것인가』는 1902년 레닌이 출간한 팜플렛의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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