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50화 (150/320)

49. 세상을 절반쯤 노리고 (2)

때를 잘못 만났다 해야 할지, 아니면 때마침 일을 벌였다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엘러노어 마르크스가 중인환시 하에 기득권 세력에 대한 첫 타격을 감행하였을 때를 즈음하여 참의원과 조정에서도 남녀의 문제 놓고 골머리 앓고들 있었다.

주상의 발의를 계기 삼아, 궁 안에만 있던 전기의 설비는 틈나는 대로 도성 곳곳에 퍼지고 있었다. 거의 마무리에 들어간 경복궁으로 말하자면 마침 공사가 다 끝나기 전이라, 벽과 바닥에 아예 전선을 넣어서 쓰기 편하게끔 한다고도 하였다.

헌데 문물이 바뀌면 풍속도 따라 변함이 상정(常情)이라지만, 그 변하는 방향이 반드시 모든 이의 마음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성상께서 열성조의 대업을 부흥케 하시어, 해동에 뭇 백성을 아끼시는 뜻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천하 만방에 우리의 문명함을 뽐내게 되었습니다. 허나 요순의 성덕이 기황(畿荒)을 가리지 않고 펼쳐졌을 때에도 오히려 성인께서는 이르시기를, ‘민심은 위태로울 뿐이요, 도심(道心)은 미미할 뿐이로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하시었으니 항상 경계하고 스스로 가다듬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올해 노씨권학상 정하는 일에 한주학원 대표로 위촉되어 간만에 서울 구경도 할 겸 상경하였던 안동 선비 곽종석(郭鍾錫)이, 밤은 대낮같이 훤한데 외려 남녀가 부끄럼 없이 서로 거리에서 상종함을 보고 대경(大驚)하여 올린 상소였다.

”신 듣기로,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그 분별이 있고 난 뒤에 비로소 천기(天氣)의 화육(化育)하고 지덕(地德)의 베풀어짐이 일어나 만물이 능히 자라난다 하였습니다. 전등은 그저 기물일 뿐이니, 따지면 더 밝고 편리한 호롱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남녀의 분별이 흐트러져, 황음(荒淫)하는 무리가 기승을 부리게 된다면 결코 이로운 물건이라 일컫지 못할 것입니다.”

근년 사이 상소라 하면 대개 참의원의 대부가 성심(聖心)보다는 세간의 이목을 끌고자 올리는 것이요, 실지로 어떤 비답을 받았는가 하는 것보다 상소의 요지가 제때 신보에 실려 널리 알려짐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던 중 간만에 이렇게 제대로 된 상언(上言) 있었으니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로가 훤히 밝혀져, 옛 순라군인 경무서 사람들을 굳이 야금(夜禁) 지키는 수고로운 일에 내몰 필요가 없다 하였으니, 비슷하게 전기 갖추는 큰 고을들에서도 곧 도성의 전례를 따를 것이었다.

그런데 국법으로 따로 정한 바는 없지만 오랜 관습으로, 인정(人定) 치고 이경(二更, 21시~23시)까지는 사내의 통행은 막아도 아낙네들은 거리낌 없이 오갈 수 있게 하였다. 그러던 차에 야금하는 법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레 사내만 오가는 때와 여인만 돌아다니는 때의 분간도 사라져, 모두 저들 원하는 만큼 밤새 노닐 수 있게 되었다. 도성의 여유 있는 집안이라 하여 가법(家法) 엄한 곳만 있는 것은 아닌지라, 내외(內外)하는 도리 중히 여기는 선비가 보면 아닌 게 아니라 기함할 법도 하였다.

“항간에 이르길, ‘을축년 이래 사람 버릇 든 이 적다’ 하더니 맞는 말이로고.”

문제의 상소 실린 신보를 접으면서 대원군이 혀를 끌끌 찼다.

“문중 단속이 서투른 것이니 참으로 부끄러워 고개 숙일 따름입니다.”

그로 하여금 신보 마저 보지 못하고 중간에 접게 만든 이는 개화당 대표로 반쯤 떠밀려 온 박정양이었다. 서자일지언정 엄연히 벌열의 자제인 그 조 모가, 대원군과 연 닿은 양인 아낙을 건드렸다 봉변하였으니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인천부 관아로 끌고 가기에는 너무나 거한 사안이라 어지간하면 입단속하여 조용히 처리하였겠으나, 문제는 하필 일이 난 곳이 인천부로, 바깥세상 소식 듣기 위해 귀 쫑긋 세우고 있는 신보의 서리 – 도중 꾸린 이후로는 ‘서리’라는 이름도 구실아치에게 어울리는 것이라 하여 저들끼리 보쾌(報儈)니 보보인(普報人)이니 불렀다 – 들의 붓이 공안서나 세도가 문인들보다 먼저 움직이면서 커졌다.

그리하여 어떤 어리석은 한량이 백주 대낮에 다름 아닌 마극 선생의 막내딸을 욕보이려다 도리어 욕을 보았다 하는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당장 엊그제 주안상 펴놓고 오경석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귀신같이 옛 인정 치던 시각에 소매자락에서 시계 꺼내보더니, 급히 일어나면서 골백번 사과하고서 가로되,

‘근래 안사람이, 외유가 어째 날로 늘어나니 저도 그 마씨 막내딸처럼 권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여서 말입니다.’

하기도 했다.

오경석이 아내를 끔찍이 아끼면서도 또 쥐여 잡혀 살고 있음을 익히 아는 대원군이라, 자칫하면 천하의 만민공산당 녹사가 여간 공처가도 아니요 매 맞는 남편이라는 소리까지 나오겠다 싶어 곧이 보내주었다.

좌우지간 사정 여차하여 거리에서 거리로, 안방에서 안방으로 소문 일파만파 퍼져갔으므로 양주 조문으로서도 발등에 불 떨어진 셈이었는데,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 생각하기에 윤돈 마 선생이라 하면 태서의 큰 선비라, 따지자면 벽계 화서 선생이나 성주 한주 선생의 여식을 건드린 것과 진배없던 것이다.

“이보게, 예전 정묘조에는 과부가 저의 험담하는 사내의 복장을 난자(亂刺)하였어도 나라에서 열녀로 정려(旌閭) 세워준 일도 있었다지 않은가. 하물며 이번 일로 말하자면 잘잘못이 확연하거늘, 내 무얼 더 해주겠는가.”

“허나 지금 공론 일어나기를, 또 남녀의 분간이 크게 흐트러진 것이 하나의 연유라 하니, 이 또한 그릇된 말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김병학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슬쩍 뒤로 물러나고, 김병국도 공무에서 손을 뗀지 여러 해가 되었다. 예전 같았더라면 이대로 중추원에 자리라도 하나쯤 차지하였겠지만 관제를 바꾸면서 그런 허직이 모두 사라졌고, 그렇다고 벼슬 경력 쌓인 대로 정승 자리까지 올라가게 하자니 두 사람이 보기에도 대원군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작고한 환재대감의 빈자리 채울 사람은, 여전히 호조에 매여 있는 김병시 한 사람 정도를 제하면 박정양이 끝인데, 대원군 눈에 속내 훤히 들여다보이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 사람, 더 꾀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어느 안전이라고 더 감추겠습니까.”

남녀의 분간이 지켜지면 좋은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이 마땅한 처사요 올바른 도리다 하는 선비들은 한 편으로 치워놓고 산가지 늘어놓아 보면 개화당으로서는 남녀유별을 외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아무리 국운이 날로 일신한다 한들 가난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고, 또 토지의 산출 늘어나는 만큼 먹일 입도 늘어나는 것이었다. 사내아이라면 모를까 계집아이는 예전처럼 어디 대가에 의탁하여 비녀(婢女)로 들여달라 할 수도 없으니, 여러모로 곤란하던 터였다.

그런데 그 무렵 인천부에 공장 있는 이들 몇몇이 생각하기를, 사내들을 일꾼으로 쓰다 보니 허튼 물이 들어서 도중(노조)이니 뭐니 하는 것도 만들어서 장차 화란이 될 듯하였다. 물론 어명으로 도중 여는 것을 허통할 제 단 조건이 사사로운 욕심 차릴 방편으로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므로 대놓고 삯을 늘려달라 하지는 않겠지만, 반대로 삯을 줄이겠다 하면,

‘우리도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않는데, 그대는 어찌 욕심을 부리는가. 우리가 도중 세운 것은 나랏님께서도 이르시기를 오직 나라에 도움 되고자 해서인데, 이처럼 나랏일과 맞닿는 데서 지금 그대가 마음대로 삯을 깎으려 함은, 옛날 환자(환곡)에 겨와 모래 넣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면서 막아설 것이 뻔하였다.

그리 다툼 일어나면 공안서에서 당당하게 이 일은 본래 저들 관할이니 어찌 끼어들지 않겠느냐 할 터인데, 세도가 거족들 생각하기로 그 공안서의 사실상 우두머리인 대원군은 저들 세도가들을 건드리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니, 다툼 일어나면 당연히 운현궁이 백이면 아흔아홉은 일꾼들 편 들 것이라 여겼다.

어찌하면 고공들 삯으로 나가는 것을 줄이고 저의 몫을 늘릴 수 있을까 고심하던 차 떠올린 방도가, 길쌈은 본래 여인네 일이니 그런 가난한 집안 계집아이들을 데려다 여공(女工)으로 쓰는 것이었다.

박정양 생각하기에, 지금이야 그 공장에서 길쌈하는 일이라는 것이 어깨너머로 배워도 보름 안에 그럭저럭 따라올 수 있을 법한 것이니 그렇게 대충 아무 처자들이나 데려다 일 맡겨도 무방하였지만, 나라 전체로 보면 솜씨 있는 일꾼 하나하나가 귀하니 쉽게 어느 한쪽이 옳다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당장 메우기 너무나 어려운 구멍을 메워야 하는 판국에, 어찌 그들 사이에서 옳고 그름으로 다투겠는가.

“이미 세워놓은 노명등(가로등)을 도로 때려 부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껏 들여온 전등을 밤에 켜지 말라 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허나 그렇다고 하여 합하께서 거두신 사람의 아내 되는 이에게 함부로 죄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청하는 바는, 예의 그 상소에서 청한 것처럼 나라 안에 남녀간 내외하는 도를 바로 세우고 부덕(婦德)을 널리 행하자 하는 것이었다.

“깊은 잘잘못을 따지지 아니하고 이처럼 대의로써 타이르면, 그 행실에 티끌 많은 자들은 비로소 저의 허물을 깨닫고 스스로 삼갈 것이요, 장차 작란할 근원도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대원군은 곧 흔쾌히 답하였다.

“자네 청이 일리가 있네그려. 성상께서는 나라에 다툼 일어나는 것을 가장 꺼리시니, 이처럼 참의원에서 목소리 모으면 어찌 가납하시지 않으시겠는가. 기무회의에서도 그리 공론과 어심의 향방이 정해지게 되면 대세를 거스르지는 아니할 게야.”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아마 저 안에 나름의 경국하는 방도와 옳고 그른 도의 판별하는 마음이 모두 들어있을 것이련만, 안타깝게도 아직 세상 풍파 넘나드는 경륜은 부족하였으니, 이번 일로 조금은 더 깨닫게 되리라 생각하며 대원군도 빙긋 웃었다.

이미 저의 아내가 시작한 일이 결코 그 후과 작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 전봉준이 진작에 운현궁에 글월 보내, 자신이 외유하며 생각한 대계의 한 조각과 더불어 이번 일을 어찌 처리하면 좋을지 그 방안을 고하였던 것이다. (엘러노어 본인의 손길도 꽤 들어가 있었지만, 대원군으로서는 아낙네 궁리가 얼마나 치밀할까 하여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원군 보기에도 그럴듯하여, 이를 다시 고스란히 궁으로 보내 우선 상에게 전달하고, 또한 중궁전 앞으로도 적당히 첨삭하여 또 한 통을 보냈다.

이제 개화당에서는 공산당이 반대하지 않을 것을 알았으므로, 마음껏 목청 높여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를 아뢸 것이었다. 허나 처음 이 문제 거론한 초야의 서생들 여론을 눈자위에만 둘 수도 없고, 또 지금 그 당 사람들 중 꾀 있는 유홍기나 박정양은 모두 그 권세가 부족하므로, 나오는 대안은 끽해야 고리타분함을 면치 못할 터.

아마 나라 전체에 효자와 열녀를 포장하는 법도를 새로 세우자, 『여훈(女訓)』 같은 서책을 언해하여 널리 퍼뜨리자, 아니면 부녀자에 한하여 야금하는 법도를 다시 만들자. 이 정도가 전부일 것이었다.

허나 대원군 그가 아는 성상이라면, 저의 공산당을 항상 (그 이름에 무슨 그릇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꺼리는 듯하면서도 은근슬쩍 그 행하는 바는 따라왔으니, 개화당이 아뢰는 방책 정도라면 나라 안에 남녀유별하는 도를 새로 세우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여길 것이요, 그때를 즈음하여 공산당이 은근슬쩍 발의하고 중전이 옆에서 거들어 청할 것이었다.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하고, 나아가 조혼(早婚) 금하는 정도라면 참의원에도, 학원에도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머무는 고루한 서생들도 딱히 반발하기 어려울 것이요, 불우한 오경석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보이지 않게 여기저기 힘 쓸 수 있는 조선 팔도의 여염집 안주인들로 말하자면 티끌만큼이라도 저들 편 들어주는 만민공산당 다섯 글자를 마음 속에 새길 것이었다.

개화당에게 반하지 않겠다 하였지, 돕겠다 한 것도 아니지 않던가.

귀남도 원래 살던 생에서는 어지간한 구닥다리 노인네가 아니어서, 남자의 본 자리는 바깥이요 여인들은 본디 집안이 그 있을 곳이라 하면 크게 보아 과히 틀리지는 않았다 여기겠지만, 당초에 세상에서 그런 류의 원칙이 지켜지면 얼마나 지켜지던가.

더구나 어려운 시절 억세게 홀로 살아가는 여인들도 적지 않아서, 그의 어머니가 그러하였고, 식모살이하던 그의 원 아내도 그러하였다. 중전에게 일전에 들은바, 그의 이번 생 장모 되는 감고당의 한산 이씨도 처음 흥선군의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친척집 전전하며 어렵게 그를 키웠다 하지 않았는가.

물론 정말 날라리 풍속이라 하면, 버스 오르내리는 처자들 치마 길이 재던 시절처럼 망신스러운 짓을 해서라도 단속할 수 있겠지만, 밤에 여기저기 이웃집 돌면서 수다 떠는 것이라던지, 시비 거는 남정네에게 주먹 날리는 일 정도라면 점잖지는 못할지언정 그렇게 나라의 법도로 막을 것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그 주먹 날린 것이 빨갱이 대장이라는 마씨의 딸이라는 점은 조금 걸렸지만.)

“... 이러한바, 참의원에서 개화당이 발의하여 다시 내외하는 도리를 세우고자 청하니 다른 이들도 이의 없어 이와 같이 상언하옵나이다.”

박규수를 이어 한성 북부 참의대부를 하고 있는 박정양이 소두(疏頭) 격으로 나서서 올린 글이었다. 국제로 이르기를 나라의 법 세우는 것은 참의원의 소관이되, 겉치레로나마 국왕인 자신의 재가를 받게 하였으니, 아직은 말 그대로 법의 안(案)이어서 가감하려면 그리 할 수 있었다.

“무릇 주나라가 예법을 크게 진흥하고 천하를 다스릴 때, 안으로는 원망하는 여인이 없고 바깥으로는 홀아비가 없었다 하였다 (內無怨女,外無曠夫). 이로써 훌륭한 정사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보듬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무릇 양(陽)의 덕은 강하고 굳건하며, 음(陰)의 덕은 무르고 부드러우니, 그 힘쓰는 바 다르다 하여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상언한 바는 그 뜻이 참으로 훌륭하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하기에 개화당이 말한 것에 이것저것 자신이 생각한 상책을 덧붙였으니, 승지들이 달려들어 가다듬고 가다듬은 윤답을 정리하면 대개 이러하였다.

“그러나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아조의 백성일진대, 어찌 이것만으로 시무의 대책을 다한다 하겠는가? 생각건대 규방(閨房) 에워싼 담을 높임은 장구한 계책에 들지 못하며, 오로지 가르쳐 깨우침으로써 남녀가 모두 부끄럽고 당당함을 밝게 알도록 함이 가할 것이다.

전례를 상고해보면, 옛 대부 기결(冀缺)은 그 부부가 서로 귀한 손님과 같이 대하여 그 공경함이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 덕이 이름나자 비로소 진문공(晉文公)이 청하여 경(卿)으로 삼았으니 이는 『좌전』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번 마씨의 일에서 볼 수 있듯 여인으로서 스스로 지킬 바를 지키기 위해서는 또 부부의 도리뿐 아니라 여인 스스로 힘쓰기도 하여야 하니 (女人當自强), 이 또한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이다.

생각건대 이는 지금 소에서 진언한 것처럼 서책을 널리 퍼뜨리고 옳은 도를 현양한다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가르쳐 그 소질을 계발하고 온 나라와 집안의 복락이 될 근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덧붙여 제언하기를 나라의 상서(庠序, 학교)의 기풍을 드높이는 한편으로 여학(女學) 널리 세우고자 하니, 참의원에서는 헤아려 다시 아뢸지어다.”

하였다.

던지는 귀남이야 범상하게 저 기억 속에 있던 여학교 생각하여 내린 교지였기에, 승지들이 저들 귀를 의심하건 말건 그저 쉽게 거론하였지만, 대원군 이하 여타 만백성에게는 그리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치적으로 하나쯤 알려볼 수 있을까 고민하던 민자영은, 어차피 누가 보아도 자신이 먼저 얘기 꺼냈으리라 여기리라는 데 마음이 닿자, 한편으로는 그의 남편 주상에게 고마움 느끼고 다른 한 편으로는 – 아직은 조금 낯선 – 미안함도 느꼈다.

그리하여 인천부 부둣가에서 날린 주먹 한 방이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이야기로 비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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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가 무엇이 그리 중한가, 하면 다음 편에 조금 더 부연하겠습니다만 1898년 한양 북촌의 양반가 및 중인 집안 규수 3백여 명이 꾸린 찬양회(贊襄會. 오해하기 쉽지만 기독교 단체는 아닙니다.)가 『황성신문』에 ‘여권통문(女權通文)’을 기고하면서, ‘여중군자’를 길러낼 수 있는 최우선 시무로 여학교 설립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단순히 개화에 따른 의식 변화인가를 따지게 되면,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만, 조선 내에서도 여성의 역할 인식에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지적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여권통문이 게재된 1898년, 충청도 선비 김상즙이 쓴 『본조여사(本朝女士)』는 조선시대를 거쳐 등장한 여러 ‘열녀’들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남편 따라 수절하거나 자해·자살 등으로 ‘정조’를 지키는 이야기도 물론 실려 있습니다만, 이전 시대의 열녀전과는 달리 오히려 독자적인 안목으로 집안을 지키고 남편을 도우며, 심지어 혼자서도 이름을 남기는 사례들을 비중 있게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개화기~일제강점기 유교 지식인들의 열녀전 기술에서도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종사(從死)하는 사례보다, 노동과 지혜로써 가계에 보태는 것을 ‘효(孝)’로 간주하여 열녀의 범위에 포함시키는 사례가 많이 나타나게 되지요.

그러나 이것을 순전히 우리가 아는 근대적인 남녀평등의 맥락에서 이해하여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개화기 지식인들이 주장한 남녀동등의 경우, 조선을 기본적으로 야만으로, ‘남녀동등’이 이루어진 서양을 ‘문명’으로 인식하고, ‘노예 상태’에 있는 조선 여성들을 (같은 조선 남성으로부터) 해방하여야 한다는 등, 동시대 제국주의적 논리를 내재화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유학 내에서의 열녀 개념 변화 역시, 이전 세대의 열녀 개념에 대한 비판이나, 정확히 무엇이 ‘여덕’을 이루는가에 대한 문제의식 등이 나타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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