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49화 (149/320)

49. 세상을 절반쯤 노리고 (1)

세상이 점점 하나로 묶여가는 듯하였다. 처음에는 조선 안에만 있어서 그런 사정을 모르는 것이라 여겼는데, 전봉준이 이곳 윤돈, 아니, 런던에서 보고 들은바 지금과 같은 긴밀한 형국은 그들도 나라 세우고 처음 보는 것이라.

꼬박 두 해를 채운 유영복 재판의 심리가 끝났다. 어깃장 놓을 줄 알았던 프랑스가 칠개국 학자들의 합의에 이의 제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으므로, 더 거리낄 것 없이 소신껏 권고안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무기 밀수를 제외한 모든 혐의에서 대부분 무죄라는 결론을 내었고, 그나마 그 밀수 조항에 있어서도 청국의 관리부실이 더 크다 하였으므로, 유영복 본인에 대해서는 월남국 영구 입국금지 및 프랑스에 대한 소정의 배상금 지불 (청국이 대납하기로 하였다.) 정도의 벌을 주면 족하겠다는 데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 (유영복의 변호 맡은 고홍명이 신나서 덩실덩실 추던 춤사위가 고스란히 섭영(사진)으로 찍혀서, 런던의 수많은 도평(만평) 화공들에게 그림 그릴 거리를 주기도 하였다.)

영국 법학자들이야 엄청난 판례가 나왔다며 흥분하고, 해협 건너편에서도 여기서 제기된 비유럽 관습법 인정이 어쩌고, 국제법 일반원칙이 저쩌고 하면서 설왕설래하는 모양이었지만, 어디까지나 학계의 일이었다.

다른 식자들 보기에, 비록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지만 국제정치에서 공으로 돕는 일은 솔잎만 먹는 범과 같은 것이라, 하필 그 무렵 조선이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프랑스의 편을 들어주었다 하니 필히 두 일 사이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정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불러온 효과도 적지 않았으니, 그 무렵 동아철도회사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고문’들을 대거 고용하여 철도 지나는 지역의 중국인들에게 회사의 사업을 ‘홍보’하고 있다 하였다. 청국 여론이 하나같이 유영복을 칭송한다 하니, 하필 지금 그런 수를 쓰는 것은 반드시 그 이름에 편승하려는 뜻이 있을 터. 누가 생각해낸 것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동철의 유럽인 투자자들이 낸 발상은 아닐 듯하였다.

열강 사이의 합의로 청국에서 사실상 쫓겨난 서태후가 이렇게 다시 기웃거리는 데 질색 표할 나라가 하나는 아닐 테니, 그런 자들을 어떻게 잘 설득할 만한 언변 좋은 사람이 있거나, 마음에 안 들면 또 어찌할 것이냐며 당당하게 압박할 배짱 있는 사람이 있거나 할 것이었다.

아마 그의 작고한 장인 칼 마르크스라면 이 일을 놓고 무어라 꽤 근사하게 논평도 내어놓았을 것이지만, 말주변과 달리 글재주는 도통 지니지도 길러내지도 못한 전봉준인 고로, 그저 거기까지 생각만 하고 신문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때, 이제 ‘신혼’집이라고 하기도 뭣한 집 문이 열림과 동시에 정겨운 조선말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분명 자신은 조선에서 유학을 준비하던 시절, 정중하게 ‘하우 두 유 두’ 하는 것부터 영어를 배운 것 같은데, 엘러노어는 조선어를 배울 때 상말부터 따라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가르쳐달라 하여 곧이곧대로 가르쳐준 전봉준 자신이 어리석었다.) 아마 지금 당장 조선에 떨어뜨려 놓으면 장터에서 흥정은 못 해도 싸움판에서 상대방 일가친척부터 육대조 조상까지 모두 싸잡아 욕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 원인을 따지자면, 다른 공산당 사람들 만날 때 그들 앞에서 대놓고 험담을 하고 싶다는 엘러노어의 강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아우, 내가 진짜, 하인드먼(Henry M. Hyndman) 그 사람 턱수염을 잡아뽑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과연 곧 한껏 씩씩거리면서 엘러노어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매부리코에 주걱턱. 툭 튀어나온 눈두덩에 짙디 짙은 눈썹. 조선 기준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유럽 기준으로도 미인은 아닌 아내다. 서로 생각하는 바가 같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성혼하고서 지금까지 논쟁 한 번 안 하고 저녁을 보낸 것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자기도 조선 기준으로도 녹두 알맹이만하다 소리 듣는 데다가, 아무리 운현궁 뒷배 있다지만 객지 나도는 광부(曠夫, 홀아비) 신세인 자신이니, 어디 가서 배필의 자색을 거론할 처지는 아니었다. 매일같이 사회주의 이론부터 저녁밥 반찬까지 모든 일을 놓고 사사건건 다투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하루라도 마음이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나이 벌써 서른이라 어디 가서 어리다는 얘기는 못 들어도 그 왈가닥 말괄량이 성정은 그대로인 아내를, 전봉준은 친하게 여겼다. 총각 딱지 막 떼던 시절, 작고한 전 아내 송씨와는 서로 서방님 안해님 하며 점잖게 공대하였으니, 엘러노어와 그의 사이는 굳이 따지자면 그보다 더 전, 함께 논두렁 누비던 동무와도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또 그 사람이 무슨 헛소리를 했길래?”

“자꾸 선을 넘잖아. 제멋대로 다 할 거면 그게 무슨 사회주의인가. 전제주의지.”

“또 국제주의 건을 꺼낸 모양이지?”

“어. 그렇게 국제 국제 하고 싶으면 댁 남편네 나라에나 가서 하라고 하데.”

영국 내 사회주의자들 중 가장 위세 높은 하인드먼은, 사실 대원군처럼 우선 권세 얻으려 마음먹은 연후에 사회주의를 접하고 저의 소신으로 삼게 되었다고 들었다.

장인 마르크스가 작고하기 얼마 전 이름하여 사회민주연맹(Social Democratic Federation)이라고 자칭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었는데, 그 전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몸 담고 있던 이들은 과연 진지하게 사회주의를 할 사람인가, 반신반의하면서 그래도 우선은 힘 합쳐보자 하는 사람 반절, 도저히 같이 어울려 일할 자가 아니라 하면서 거리 두는 이 반절이었다.

“엥겔스 어르신께서 들으시면 ‘내 뭐라 하였느냐’ 하시겠군.”

“내 말이.”

어찌 되었든 엄연히 영국인은 아닌 전봉준은 하인드먼과 그렇게 마주칠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내 없는 자리에서 ‘매부리코를 보면 천상 유대인이다.’,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유대 기질 어디 가지 않는다’ 운운하며 험담하였다는 얘기를 건너건너 듣곤 하였으므로 감정이 좋다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가자.”

“가자고? 어디를?”

“가자고. 당신 나라에. 어차피 영영 여기 남아 있을 수는 없잖아.”

가뜩이나 독선적인 성격에, 내가 아니었으면 영국의 누가 마르크스를 읽기는 하겠느냐며 거들먹거리는 – 사실 일정 부분 참이기도 했다 – 데다가, 최근에는 국제주의 노선은 헛된 것이고, 우선 영국 내 선거에서 유권자를 끌어모을 생각부터 해야 한다며 사사건건 엘러노어와 부딪히고 있었다.

“어차피 그 사람 성격에, 제대로 정당을 이끌기나 하겠어?”

하면서 복수의 계획을 풀어놓았다.

어차피 지금 세상에 제대로 의회 안에 자리 잡은 공산당은 몇 곳 되지 않는다. 더구나 권력을 실제로 얻어낼 만한 자리에 있는 공산당은, 어쩌면 가장 공산당 답잖은 조선의 만민공산당일지도 모른다.

듣기로 그 우두머리라는 프린스 흥선도 이제 연로하여, 언제까지고 그 위를 지키지는 못할 터인즉, 슬슬 돌아가 그 당으로 하여금 이름값 하게 만들고, 나아가 국제적 연대에 힘을 보태게끔 하면 – 지금 당장 활동비 1파운드가 궁하지 않은가 – 엘러노어 생각하기에 그의 아버지 유지를 잇는 길이자, 돕는 일 없이 말만 많은 이곳의 자칭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콧대를 제대로 눌러줄 수 있는 방도였다.

허나 그 이야기 듣던 전봉준의 생각은 ‘조선으로 돌아간다’ 그 말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었다.

언제고 돌아가야 할 고국이다. 고부(古阜) 새둥지말(鳥巢里)서 아직도 서당, 아니, 일단 말로는 서원을 지키고 있을 늙으신 아버지도 다시 뵙고 싶고, 또 이곳까지 오면서 대원군에게 신세 진 것도 갚아야 했다.

허나 처음 떠나올 때 찾고자 하였던, 그 구민(救民)하는 도는 끝내 찾지 못하였으니, 정교한 이론을 보고, 듣고, 배워서 심득한다 한들, 조선은커녕 당장 그가 기억하는 고부 고을에도 어찌 적용해야 하는가 감을 잡기 어려웠다. 물론 그가 아버지에게 배웠던 성현의 도리보다는 훨씬 더 현실에 가깝고 그 논의에도 짜임새가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이루어내려다 도리어 현실을 이론에 끼워맞추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고작 책상물림이 되기 위해서였다면, 애초에 인천에서 모든 일의 발단이 된 대동사 그 모임을 이루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 하여 언제까지고 만리타향의 객으로 머물겠는가? 그 동안에야 새장가 들었으니 장인 병구완 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아직 학문이 깊지 못하다, 스스로 이런저런 이유 대어왔지만, 이제 안사람 말마따나 움직일 때가 되었다.

“그래, 돌아가자. 너만 괜찮다면야.”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괜찮다고 얘기했잖니.”

그리하여 빌린 집을 잘 이야기해서 처분하고, 그나마 값나가는 세간살이는 정성스레 싸면서, 홍콩으로 향하는 배편을 알아보게 되었다.

처음 조선행을 마음 먹고서 석 달쯤 지났을까. 아무리 말로 이르기를 이역만리라 한다지만, 그나마 같은 북반구에 있으니 계절이 같음은 다행이었다.

런던 떠나기 전 미리 고부 고향집에 편지 한 통. 또 그의 든든한 후원자 대원군에게 사정 여차하여 슬슬 학업 정리하겠다 고하는 글월 한 통. 그렇게 미리 넣어두었더니, 노부모님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그의 벗 가타야마 센에게는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들어가 인천 부두에 마중을 나왔다.

“허, 인천 부두라.”

“그렇지요. 이제는 제물포와 인천부를 따로 나누기도 어려워졌으니 말입니다.”

몰라보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 공장도 늘고, 제물포와 인천부 사이의 그나마 헤싱헤싱하던 곳도 모두 메워졌다. 더구나 처음 대동사 꾸릴 때만 하더라도 막 러시아가 국제를 놓고 억지부리던 때였기에, 일할 자리 잃은 고공들, 일자리는 있으되 정작 공장이 돌지 못하여 하염없이 노는 고공들이 없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말 그대로 항구부터 공단까지 모두 살아 움직이는 활황(活況)이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형님. 이제 저도 미국이나 뭐 그런 나라 구경 갈 수 있게 영어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새 그럭저럭 돈은 모았으니까요.”

보자마자 콱 악수 한 번. 뒤이어 인사 한 번. 그리고 이름만 들었던 마르크스의 막내딸 겸 저의 형수에게 또 인사 한 번. 그렇게 용건 마치자마자 뻔뻔한 억지 청 넣는 것이, 비록 사람은 그새 나이 먹었을지언정 그가 대동사 시절부터 알던 그 편산이 맞았다.

“여전하구만, 자네. 하기야, 그 옛날에는 저기 양근리까지 가서 소동도 일으키고 했으니 뭐. 성질 죽이느라 고생 좀 했겠는걸.”

아무리 조선말에 능하여도 어쨌든 나라 다른 사람이라, 대원군은 가타야마의 사정과 편의를 조금 보아줄지언정 숫제 전봉준처럼 유학을 보내주거나 하지는 아니하였다.

허나 어려운 살림에 동전 몇 푼이라도 보태줌은 대동사 입장에서 크나큰 도움이요, 무엇보다 왜인이 인천부에서 사람 모아 무엇하느냐 시비 걸었을 법한 자들이 그 김가진이 몇 번 오간 이후로는 스스로 삼가고, 가끔 눈이라도 마주치면 도와드릴 것이라도 하나쯤 없겠냐며 실실거리는 것이 적잖이 편하였다.

“그래도 그 사이 사람을 꽤 모았습니다. 우선 형님 돌아오신 뒤에 이론화든 사상투쟁이든 하려고, 일단은 학당 바깥에 야학이라고 고공들 가르치는 자리도 만들고, 요새는 짬 날 때마다 제 고향도 기웃거리면서 눈치 살피고 있지요.”

“그래? 일본국에도 말인가? 이것 참. 정말 아내 말마따나 국제주의의 희망이 여기 아주에 있는 것인가.”

“국제주의가 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요. 그거 아십니까? 일본에는 진퉁 『공산당 선언』이 퍼진 것이 벌써 십 년을 훌쩍 넘겼답디다. 그간 그쪽도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보니까 아직 싹이 트지 않았을 뿐, 씨앗은 이랑마다 잘 뿌려진 셈이지요.”

그러면서 솔직히 어디 붙어있는지는 모르지만, 차마 모른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이런저런 일본 지명들을 거론해 가며 어떤 마을의 누구는 벌써 우리네 대동사처럼 공부하는 모임을 꾸렸다. 저 도시 공장은 여공들끼리 작당하여 계(契) 만들었다더라, 계속 떠들었다.

하기야, 그간 이런 이야기를 또 누구에게 풀어놓을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와 대원군 생각만 하였던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지는 전봉준이었다.

“... 그러하니, 이제는 누군가 제대로 이론만 설파해주면 확! 불길 번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형님, 불씨는 챙겨오셨는지요?”

정말 불씨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끄적거려둔 것이 있기는 했다. 물론 오는 내내 엘러노어와 이것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고, 심지어 아내 말하기를 자신이 써놓은 것이 공산주의라면 저의 증조부는 로마 교황일 것이라고 빈정거리기까지 하였다.

“음, 장인 어르신 말씀마따나 ‘철학의 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선 우리가 이곳에서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고민한 바가 있기는 하다네. 이것으로라도 일단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족하리라 자부한다만...”

하지만 전봉준과 엘러노어가 조선 땅에 불러올 첫 변화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데서 터져나왔다.

배에서 내려서 마중나온 가타야마와 신나게 얘기 나누는 사이, 잠깐 처음에 인사 나누었던 엘러노어는 이 말만 들었던 남편의 나라 구경에 빠져서, 옆으로 새어나간 지 오래였던 것이다.

저의 옆구리가 허전함을 깨달은 전봉준이, 그제야 고개 두리번거려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 무렵 인천 부두에 유명한 망나니 하나 있으니, 성은 조가요 이름은 병갑(秉甲)이었다. 풍양 조문에는 한참 못 미친다지만, 정승 여덟에 문형(대제학) 셋을 낸 거족 양주 조문의 서자로, 어려서부터 그 됨됨이는 썩 미덥지 못하다는 평 들었지만 저의 욕심껏 재물을 얻어내는 데는 문중의 앞가림을 하고도 남을 만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니 한량으로 있다가 적당히 출사해서 어디 현감이나 할 법한 서자들에게 대신 공학이나 어학을 배우게 하든, 문중에 내려오는 전답 팔아 세운 양행이나 제조국을 맡기든 하는 거족들 풍속에 따라, 조병갑도 인천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맡아, 특히 세곡 – 이제는 세금으로 곡식 걷지 않는다지만, 서울 사람들도 쌀은 먹어야 하니 계속 들여오고 있었고, 그 통칭하던 이름도 고스란히 남았다 –을 옛 조운선 대신 기선으로 나르는 일에 손을 대어 적잖은 이문도 내고 있었다.

이 무렵 나라의 살림살이는 다시 한창 피어오르고 있었다. 더구나 총 대신 삽과 곡괭이 받은 삼남의 젊은이들이 – 마침 지리산 호랑이도 씨가 말랐으므로, 총 잡을 일은 더 줄었고, 젊은이들도 대개는 북변 가느니 그냥 삽질하기를 원하였다 – 여기저기 쌓아올리고 파내던 제언(堤堰)과 수로가 마침내 그 공효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조병갑이 아니라 지나가던 양민 아무나 앉혀놓아도 그만한 밑천 대어주면 성과 어찌 없었겠냐만, 조병갑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는 오롯이 저 한 사람 잘난 공이었다.

그렇게 되어 콧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니, 적당히 저와 비슷한 자들 모아서, 꽤 그럴듯하게 행세하고 다니곤 하였다. 무지렁이들에게 원님 소리 듣지는 못하게 되었으니, 대신 거느린 뱃놈들에게라도 어르신 소리 들으면서 위세 부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조병갑 생각하는 사람 사는 맛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딱히 바쁜 일도 없겠다, 누구 만만한 사람 하나 건드려 재미 볼 일은 안 생기는가 하고 바닷바람 쐴 겸, 저의 무리 서넛 거느리고서 부두를 거닐고 있는데, 멀찍이 기이한 사람이 하나 서 있는 것 아닌가.

희멀건하고 코는 큰 것이 영락없는 서양인인데, 다시 보니 아낙이요, 지아비는 어디에 두고 연신 여기저기 고개 돌리면서 조선국 구경에 열중하고 있지 않은가.

한 스무 해 전이었더라면 괜히 건드렸다가 무슨 화란 일어날지 모르니 알아서 자중했겠지만, 지금은 서양 사정이 어설프게나마 알려져서, 서양이라 하여 모두 영길리니 아라사니 하는 나라처럼 강대한 것도 아니고, 그 백성이라 하여 무슨 마씨니, 맥씨니 하는 사람처럼 대단한 위인들만 있지 않음도 알고 있었다.

허나 희롱하려 다가간 조병갑이 미리 알려야 알 수 없는 사정 여럿 있었으니, 첫째로 상스러운 조선말이라면 엘러노어도 일가견이 있어, 차마 생면부지 남정네 앞에서 먼저 꺼내지는 못하더라도 저쪽에서 희롱하는 말투가 결코 관광객 환대하는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머릿속 뒤져서 최대한 정중하게,

“시끄러운 일 만들기 싫으니 스스로 삼가시오.”

하였더니 이제는 조선말 잘 한다면서, 도리어 재미 붙여 희롱하였다. 그러니 그 욱하는 성질이 툭 나와서,

“이 잡놈들이 정말!”

하였으므로, 조병갑도 정색하고,

“어디서 여편네가 감히!”

하면서 역정을 내었다.

그러니 코 큰 여인도 덩달아 역정 내어, 아옹다옹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구경꾼도 없지 않았다. 차려입은 모양새로 보아 어디 귀부인도 아닌 여인네가 무엇이라도 되는 양 허리 꼿꼿하게, 턱 당당하게 치켜들고는 조선말로 무어라 계속 타박을 주니, 졸지에 마나님에게 꾸중 듣는 마당쇠 꼴이 되었다 여긴 조병갑은 더욱 목청을 높였고, 저쪽에서 목청 높이니 이쪽도 따라서 올라갔다.

그러다가 결국 먼저 성질 못 이긴 조병갑이 손을 올렸는데, 여기서 조병갑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사정이 있었으니, 엘러노어는 저의 남편의 후원자가 누구이며, 어느 정도 지위에 있는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부르주아의 이윤추구 기구로서의 국가권력은 물론 궁극적으로 부정되어야 하지만, 이렇게 당장 급할 때에는 기댈 수도 있는 것.

그리하여 저의 남편과 그 뒤의 대원군을 믿으며, 엘러노어가 선수를 쳐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하는 관운장마냥 단호하게 주먹 내지르니, 퍽, 하는 육중한 소리와 더불어 고개가 휙, 돌아간 조병갑은 그대로 차가운 부두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여권(女權) 말하기에 앞서 여권(女拳, 여인 주먹)이 먼저 나서게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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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집안이 한미하기도 했거니와 동학농민운동 이후 많은 기록이 은폐되었기 때문에 – 관계자들로서는 연좌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그의 본명이 전병호(全炳鎬)이며 초명은 철로(鐵爐)라고 기재하고 있는 천안 전씨 『병술보(丙戌譜)』에 따르면, 전봉준은 1877년 첫 부인인 여산 송씨와 사별하였다고 합니다 (송정수 (2000), “전봉준의 가계와 출생지에 대한 연구” 조선시대사학보 12호). 여기서는 그 설을 따릅니다.

엘러노어의 남은 사진과 그림을 보면, 누구 딸인지 정말 확연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름지기 연애란 얼굴만 보고 하는 것이 아니지요. ‘혁명적 동지애의 결합’에 외모가 무엇이 중하겠습니까.

보다 진지한 이야기로, 원 역사에서 1884년 엘러노어는 하인드먼이 주도하는 사회민주연맹에 가입합니다. 하인드먼은 자칭 사회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사민주의에 훨씬 가까운 지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결코 꺼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특히 1881년 마르크스의 핵심 주장을 요약한 『모두를 위한 잉글랜드(England for All)』를 내어 마르크스주의를 영국에 널리 알렸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꾸린 사회민주연맹에서는 독단적인 의사결정으로 인해 많은 반발을 샀고, 결국 1885년 엘러노어와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사민련을 탈퇴, 보다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회주의자 연맹(Socialist League)을 결성합니다.

한편 하인드먼은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르크스 본인으로부터 유대인의 형질을 물려받았다’라며 엘러노어를 공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적어도, 빌헬름 리브크네히트에게 엘러노어가 하소연한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엉뚱한 방식으로 전봉준네와 악연을 맺게 된 조병갑은 작중에 나온 것처럼 명문가의 서조카로, 앞서 개화 초기에 잠시 이름이 언급되었던 조두순의 서조카입니다 (이전에 ‘풍양 조문의 조두순’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작가의 실수입니다.). 원 역사에서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행악할 수 있던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지요. 더구나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뒤 1898년에는 고등재판소 판사로 임용되어 오히려 품계가 올라갑니다. 심지어 동학의 교주 최시형에게 직접 사형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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