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사슬의 이치 (3)
비스마르크의 관저 슐렌부르크 궁은,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외교관들을 맞이하여 한창 부산하였다. 회의도 중하지만, 그 전의 모임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었으니, 속이야 시꺼멓든 시뻘겋든, 서로 안부를 묻고, 세계 평화를 위해 건배 한 잔. 각자의 조국을 위해 또 가볍게 한 잔. 부질없는 짓이지만 함께 하는 부질없는 짓이기에 의미가 있는, 그런 일들이었다.
그렇게 본 회의 시작하기에 앞서 이 사람 저 사람 떠들고, 비록 지난 번 싸움으로 아프가니스탄의 거의 대부분을 내주고서 소강 상태에 들었다지만 여전히 전쟁 중인 영국과 러시아 두 나라 대표단은 서로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있어, 그 서먹함으로 홀을 가득 메웠다.
그 외에도 프랑스부터 시작해 각 나라 대표단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다들 그 낯빛과 언행은 대충 비스마르크가 예상한 대로였다. 흡족하게 내심 여기며 도로 자리 앉으려는데, 문득 아프리카 전도를 앞에 놓고 말굽 모양으로 놓인 탁자 끄트머리에 엉뚱한 사람이 하나 앉아 두리번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양복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페즈(Fez) 쓴, 투르크 대표 메흐메트 사이드 파샤(Mehmed Said Pasha)인가? 아니, 그는 오히려 ‘나보다 더 튀는 놈 있어 다행이다’ 하는 느낌 물씬 풍기며 창밖을 보고 있다.
객은 중국식 관복 차려입어 연미복 일색인 회의장에서도 두드러지는 동양인이었다. 허나 비스마르크가 자세히 살펴보니 옷이 달라져서 몰라보았지 실은 익은 낯이었다.
“헤어 윤(윤 씨), 뜻밖의 만남이구려.”
“각하, 그간 기체 무강하셨습니까. 저 또한 다른 이들처럼 나랏일을 받들어 이곳에 찾아뵙게 되었답니다.”
다름 아닌 이곳 베를린에 부임한 지 두 해째인 주덕의지 공사 윤태준(尹泰駿)이었다.
“그대 나라 정부와 프랑스 측의 뜻에 따라 참관을 허하기는 했다만, 그대 나라가 식민지를 운영하지는 않을 터인데 무슨 사무가 있어 이리 찾아왔는지는 참 궁금하군. 내 발설하지 않을 터이니 미리 살짝 귀띔해줄 수 있겠소?”
식민지의 정의가, 말 그대로 백성을 그 땅에 심어서(植民) 농상과 공장의 일에 힘쓰게 하는 것이라면 이미 대만과 동삼성, 연해주까지 발 뻗친 조선이 오히려 이제 막 카메룬과 토고란트(토고)를 보호국으로 선포한 독일보다도 더 식민주의 국가에 가까울 터였지만, 윤태준은 굳이 거론하지 않았다.
“하하, 다름 아닌 어명을 받들어 직접 왔습니다. 아마 아시겠지만 프랑스 쪽의 추천을 받았지요.”
“그야 이 사람도 당연히 아는 바인데, 그것 말고 굳이 찾아온 이유가 있는가, 하는 얘기요.”
다른 나라 대표단들도 아프리카와 관련하여 자문역으로 이런저런 사람들을 대동하고 왔으니, 이론상으로 프랑스가 저들에 유리한 무언가를 획책하고자 조선인을 데려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사전에 비스마르크에게 통지된 바로도, 단순히 조선 국왕이 이번 회의를 맞이하여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증언한 내용을 대독하는 것이 이 조선 외교관이 맡은 임무의 전부였다.
“허허,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께름칙하기는 하지만, 굳이 여기서 더 밀어붙일 만한 이유도 없는 것이라, 우선은 놓아주었다.
곧 때가 되었다. 어찌 되었든 회담을 개최한 것은 독일이었으므로, 모두(冒頭)를 떼는 것은 비스마르크의 일이었다. 적당히 외교적인 수사로 아무런 의미 없는 많은 말을 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여러 대표단이 이곳에 모인 것은, 각국의 이익을 확인하고, 이들 사이의 조화를 이룩하기 위함입니다. 각국의 상업적 이해관계를 최대한 반영하고, 아프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의 이익 역시 보장하는 방향으로 대륙의 영유권 문제를 해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 예컨대 이 모임에서 한 자리 차지하여 목소리 높이기를 원하였던 잔지바르의 술탄 같은 이들이 들었더라면, 대체 무슨 권리로 유럽의 몇몇 국가끼리 작당하여 저들과 자신들의 이익을 운운하느냐, 어찌 그 땅 주민들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지도만을 보고 그 드넓은 땅을 가를 모의를 하느냐 따졌겠지만, 국제정치에 정의니 평등이니 하는 것이 들어설 자리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비스마르크뿐 아니라 적잖은 외교관들이 공유하는 생각이었다.
권력 없는 이들이야 이를 위선이라 고발하겠지만, 권력 있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현실일 뿐이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언급하신 것처럼, 이번 회담을 통해, 각국의 소유권 분쟁에 있어 합의를 이루는 한편, 장차 동일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영국은 노예제에 앞장서서 반대해 왔던 국가인 만큼, 아프리카 현지의 야만 부족들 및 이들을 착취하는 모슬렘(무슬림) 세력에 의해 현지에서 지속되고 있는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나아가 더 평화롭고 도덕적인 경제체제를 갖출 수 있도록 적절한 개입이 필요함을 주장합니다.”
비스마르크로서는 전적으로 환영할 만한 발언을, 영국 대표단이 먼저 해 주었다. 순풍 불어오니 돛을 펴야 하지 않겠는가.
“참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독일은, 이번 분쟁 해결의 일반적 원칙으로서 실효지배(effective occupation)라는 개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음에도 단지 지도상의 점유를 근거로 다른 나라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은, 결코 유럽과 아프리카를 통틀어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아프리카의 지도 위에 점유하고 있는 땅은 아직 없지만 실제로 뻗어나갈 힘은 넘치는 독일이다. 올 것이 왔다는 듯 체념한 표정의 포르투갈 대표단과, 이미 ‘협회’의 이름으로 콩고를 집어삼킬 만반의 준비를 마쳐 득의양양한 벨기에 대표단이 좋은 대비를 이루었다.
이미 아프리카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얻어낸 바 많은 영국이 뭔가 이의를 제기할 법하였는데, 엉뚱한 데서 지지 선언이 나왔다.
“우리 프랑스는 비스마르크 백작과 독일의 발의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들 중 유럽 사정에 가장 어두울 사이드 파샤까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동시에 들어가는 문장에, ‘동의’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반드시 그 뒤에 뭔가 신랄한 반어법이나 비난이 따라와야 할 법하였지만, 프랑스 대표 알퐁스 드 쿠르셀(Alphonse de Courcel)은 불발탄을 방불케 하는 간략한 발언 한 줄만을 마치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비스마르크가 도대체 프랑스의 노림수가 무엇인가 궁리하는 사이,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어찌 되었던 비스마르크가 원했던 원칙은 준수되었고, 이 정도면 국내 여론이 만족할 만한 정도로 동·서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에서의 이익은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사이 지루한 지리 공방이 계속되어, 위도와 경도를 놓고 기싸움이 벌어지고, 강줄기와 호숫가를 두고 말다툼이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와 조선의 존재는 잠시나마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났다.
“자, 그러면 동경 14도선을 기준으로 카메룬 북동쪽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이익권을 분할하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되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귀국이 양보로 일관하니 독일로서도, 또 회의를 주관하는 내 개인으로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오.”
“하하, 저희로서도 원칙에 기반한 합의는 환영할 일입니다.”
‘그만큼 퍼주어도 되겠느냐’ 하는 말을 외교적으로 물어보아도 반응은 덤덤하였으므로, 무언가 올가미에 발을 들여놓는 느낌이 농후하였다.
비스마르크에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회담 막판에 드러난 그 올가미가 독일의 발만을 붙잡지는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이제 영유권 주장을 둘러싼 각국의 입장이 얼추 정리되었으니, 마지막으로 일반 원칙인 실효지배라는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설마 지난 석 달 간의 합의를 무르자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기껏 국제콩고협회 - 말이 ‘국제’지, 누구의 것인지는 공공연히 드러나지 않았던가 - 가 관리하기로 합의된 콩고를 도로 뱉어내라는 말은 아닐까 걱정한 벨기에 대표단 쪽에서 성급한 질의가 나왔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지금까지 호혜적인 관계, 자유로운 통상 같은 것을 계속 원칙으로 언급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깊게 다루지 못했지요. 그렇게 되면 결국 특정한 국가의 이해에 따라 본래의 좋은 취지가 왜곡되지 않겠습니까? 문명의 이름이 탄압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되겠지요.
어떤 지역을 지배하고 그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우선적인 이익을 얻는다면, 마찬가지로 그 주민을 보호하고 나아가 그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베풀 책무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는 지배라기보다는 약탈에 불과하지요.”
“물론 이론상으로는 옳은 말씀입니다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예, 그런 반응이 나오리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프랑스는 이미 극동에서 그런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한 바 있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슈 윤,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석 달 전의 불발탄이 비로소 기폭되었다.
조선국왕의 국서는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얼마나 프랑스가 열성적으로 조선의 발전을 도왔는지를 세세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물론 국교를 맺는 과정에서 잠시 무력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프랑스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근대적 군사개혁을 돕고, 학교를 설립해 현지 인재 육성에 힘썼다.
이후 조선의 유학생을 받아주었으며, 대규모 행정고문단(그들이 사실상 유배된 파리 코뮌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양국의 편의를 위해 생략되어 있었다.)을 파견하여 나라가 문명으로 나아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귀남이 이왕 도와주는 김에 덤도 조금 얹어주는 감으로, 이전에 어윤중과 호조 관리들에게 시켰던 경제 관련 통계들을 덧붙여주니, 정말로 프랑스와 통교한 이래 국운이 날로 창성하였음이 명백하였다.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까지 문명을 전파하고, 우리 인류 모두의 이익에 이바지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모범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이 모든 것이 프랑스가 앞장서서, 단기적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문명의 표준을 세운 결과물이었다는 양 포장하니, 곧 그 이면의 간교한 계산을 읽어내게 된 다른 대표단들 사이에 당혹감이 퍼졌다.
모두들 눈치를 보고 있는데, 먼저 그 계산을 마친 영국 대표단이 발언을 청했다.
“비록 지금 말씀하신 조선의 사례가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점은 지적해야 하겠지만, 우리 영국으로서도 프랑스가 제기하는 주장 자체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미 문명을 널리 퍼뜨리는 책무를 스스로 짊어졌으며, 실제로도 많은 발전과 진보를 이끌어낸 영국은 앞으로도 모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본국의 글래드스턴이 쌍수 들어 환영할 주장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번듯한 나라 세워져 있던 곳으로 어지간히 잘 알려진 지역이라면 미리 가서 깃발 꽂아둔 대영제국 전체로 보아도 딱히 손해 볼 주장은 아니었다.
아무리 비스마르크가 여론전의 달인이라 하여도, 영국이 재빨리 입장을 정해버리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나마 저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독일 내에서 열심히 헛바람 불어넣고 있는 확장주의자들을 마찬가지로 눈엣가시인 자유주의자들의 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으리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그리고, 브뤼셀에서 콩고가 벨기에령도 아닌, 국제콩고협회의 관리 대상, 즉 사실상 자신의 사유지로 인정되었다는 결과만을 기다리던 레오폴 2세에게는 그만한 불행이 없었다.
“이 무슨 말인가! 무상의 권리는 없다니?”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실효지배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내건 것이... 음, 현지를 점유하고 있는 정치 세력에 대한 문명화 지원, 그런 노력의 성과에 대한 공개, 그 외에도 적지 않습니다.”
외교관도 아닌 스탠리가 그의 집무실에 대신 들어와 레오폴 2세의 분기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것은, 자신은 도저히 그 노기를 감당할 수 없으니 총애받는 사람으로서 대신 보고해달라는 청탁 (그리고 ‘그만큼 우리 전하로부터 받아먹은 것이 있지 않으냐’ 하는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 보니 얼른 콩고의 정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말도 안 돼... 이건 악몽이야.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개인의 인품을 떠나 지모로만 따지면 유럽 군주 중 평균 이상은 된다 자처하는 레오폴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좋게 이 새로운 ‘실효지배’ 해석에 동의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저 악랄한 놈들이 이제는 이런 수작까지 부리다니... 저들은 먼저 사다리 올라가서 볼 재미는 모두 보아놓고, 이제 와서 그 사다리를 걷어차겠다고?”
“하지만 식민사업으로 이윤을 창출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게는 없네. 없단 말일세!”
말이야 맞는 말이라는 것이 레오폴 2세를 더욱 괴롭게 하였다. 충분한 투자를 하면 그 이상의 이익이 창출됨을 (그 이익이 본국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 있음은 프랑스에 의해 의도적으로 누락되었지만) 과히 상세한 수치로 조선이 입증하지 않았는가.
어찌 되었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군대를 파견해 사업장과 국경을 지키는 것보다, 현지인을 교육하여 자체적인 경비 인력을 확충하는 것이 더 타산이 맞는 일이고, 농장과 공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한 번 현지 인력이 육성되면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는 않을 것이니, 결국 처우에 있어서 또 한 차례 양보를 해야 하고...
그런 악순환을 견뎌내고서 흑자를 올릴 수 있는 것은, 지금 세상에 얼마나 될까. 영국이나 프랑스 정도가 아니라면, 직접통치는 꿈 속의 꿈이요 끽해야 현지 정권을 잘 육성해 자신을 따르게 하는 수밖에 없을 터이다. 레오폴이 지금껏 협회를 내세워 추진하던 콩고 운영 계획과는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감히 말씀 올리건대 어떻게든 수를 쓰셔야 할 겁니다. 여론이, 음.”
“날더러 양위라도 하라던가?”
“그 반대인 것이 문제입니다, 전하. 문명의 선구자로 칭송하고 있더군요.”
이미 있던 보호국이나 식민지라면 모를까, 새로 야만의 땅을 개척하여 그 주민을 교화하고 문명의 세계에 편입하는 것은 이제 쉽게 엄두 내지 못할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니 그런 막중한 일을 스스로 맡겠다 나선 레오폴 2세에게 찬사가 쏟아지지 않겠는가. 회담이 열리기 전부터 기독교인의 의무니, 문명인의 짐이니 하면서 소란 일으킨 사람이 자신이었으니 남의 탓을 하기도 뭣하였다.
(실제로는 바로 그것을 알고 있던 프랑스의 그레비와 벨로네가, 은근히 혹은 대놓고 낄낄거리면서 언론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지만.)
“휴우, 어쩔 수 없지. 장기적으로 이 여론을 이용해서 의회에게 떠넘기든 해야겠지. 내 사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니...”
“그래도 명성과 위신은 얻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달라고 했는가? 으윽...”
위산이 역류하였는지, 답답함을 못 이긴 레오폴 2세가 가슴팍을 탁탁 쳤다.
그가 십 년 넘게 고심하여 짜낸 대계가 이렇게 반 년 만에, 그것도 엉뚱한 나라의 개입으로 망가져 버렸다는 사실이 갈빗대 사이로 그의 가슴을 찌르는 듯하였다. 사무치는 한을 어디 가서 토로할 수도 없게 되었으니, 그를 칭송하는 여론 앞에서,
‘사실 내게는 유인원과 구분도 되지 않는 그깟 흑인들 따위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 놈들보다 상아나 고무가 훨씬 귀하지 않은가.’
하는 속마음을 내비칠 수도 없었다.
주치의를 부르려 하는 스탠리를 손짓으로 만류하고서, 홀로 얼굴 찌푸린 채 한 5분쯤 고심하던 국왕이 마침내 다시 말을 꺼냈다.
“어쩔 수 없지... 강제로 사슬 채워져 무대에 오르게 되었으니, 배역에 따라 연기를 할 수밖에.”
이왕 이렇게 된 것, 국제적으로 투자도 받고, 기부도 받아야 했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그의 사재에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이었다.
“저 프랑스 놈들은 사슬로 상대를 옭아매면 자신도 함께 묶이는 셈이라는 것을 모르는 겐가? 복잡하고도 기괴한 세상일세...”
분기 모두 쏟아낸 레오폴 2세의 쓸쓸한 넋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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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회담은 단순히 영토를 분할하는 것을 넘어, 이후 1차대전까지 이어질 제국주의의 식민지 확보 경쟁의 원칙을 정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닙니다. 회담이 설정한 일반원칙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노예제의 종식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종종 지적된 아이러니 내지는 위선이었지요. 심지어 일반원칙 중에는 ‘현지 부족민들의 도덕적 및 물질적 복지 향상’에 대한 책무를 명시하는 조항도 있었습니다.
그런 성격을 보여주는 한 예로, 글의 중간에 잠깐 언급된 것처럼 잔지바르 술탄국의 제2대 술탄 바르가쉬 빈 사이드(Barghash bin Said)는 실제로 베를린 회담에 참여하고자 하였지만, 영국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냉대로 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회의의 결과에 따라 곧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였던 탕가니카(탄자니아)를 독일에 빼앗기게 되지요.
한편, 원 역사의 베를린 회담에서도 신흥 강대국 독일과 기성 강대국 영국, 그리고 둘 사이에서 확장주의 노선을 모색한 프랑스의 세력 갈등이 나타났습니다. 실효지배 개념 역시 그런 갈등과 합의의 결과물이었지요. 식민지 확보에 부정적이었던 비스마르크였지만, 이미 1880년대면 상승하는 국력에 맞추어 하루라도 빨리 식민지를 얻어내야 한다는 국내의 여론이 무섭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국위 선양을 내걸고 있던 프랑스의 쥘 페리 내각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것이지요.
하지만 작중에서는 식민지 확장에 부정적인 쥘 그레비와 클레망소가 프랑스의 정책결정자 지위를 확보하고 있고, 영국 글래드스턴 내각의 자유주의 기조도 탄탄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후일 군비경쟁과 유사한 소모적인 식민지 경쟁 대신, 현상을 유지하고 기존 식민지 유지 비용과 추가적인 식민지 확보 자체의 비용을 확 올려버리는 방향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 조선이 적당한 명분을 제공해주면서 레오폴 2세만 십수 년 일찍 고통받게 되었지요.
실제로 유럽 열강들은 식민지 확보만큼이나 ‘경쟁적 탈식민화(Competitive decolonization)’도 전략적 수단으로 활용한 바 있습니다. 경제라면 모를까, 정치와 안보의 논리로 따지면 자기 국력을 강화하는 것만큼이나 상대 국력을 약화시키는 것도 바람직한 선택이기 때문이지요.
잘 알려져 있듯 레오폴 2세의 콩고 경영은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베를린 회담의 결과로 레오폴 2세의 사실상 사유지로 인정된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에서는 저항하거나 생산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한 원주민의 손목을 자르는 등 가혹한 수탈이 이루어졌고, 19세기 말 고무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이는 가속되었습니다.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에 당시 콩고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지요.
이후 콩고 ‘자유’국의 참상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레오폴 2세는 국제여론의 비난에 직면하였고, 결국 1908년 콩고 자유국은 공식적으로 벨기에령으로 편입되었습니다. 하지만 레오폴 2세와 콩고 자유국에 대한 비난에는 그가 고무와 상아를 독점하고, 심지어 회계부정까지 저지르면서 자신의 사재를 불렸다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인도주의의 승리로만 볼 수 없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