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사슬의 이치 (2)
요 두어 해 사이 한양에 크게 유행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전기, 정확히는 전등이었다. 맥안공행에서 전등도, 발전기도 만들고 있으니 – 물론 복잡한 기물은 아직 조립만 하는 정도를 겨우 넘겼다지만, 그래도 홍보하기로는 순수하게 조선 사람 공력으로 만들었다 우겼다 – 적어도 도성 대로에는 전깃불을 주욱 장대 위에 늘어놓고서 밤마다 켜놓았으니 이름하기를 노명등(路明燈, 가로등)이라 했다.
이것이 해 떨어진 뒤에 밤새도록 켜져 있으니, 도성 사람들 생각하기에 이만큼 편리한 물건도 근래 드문 것이라, 마침 야금(夜禁, 통금)하던 것도 노명등 들인 이후 없어졌겠다, 대로변 목 좋은 곳에 누구는 평상 가져다 놓고 누구는 돗자리 펴고서 한담도 나누고 술도 한잔씩 하고 하는 것이었다. (베베르 부인에게 법국 도성 파리의 공원 이야기 듣고서 한양에도 그런 곳을 하나쯤 조성할 생각을 중전이 품고 있기는 하였으나, 아직은 구상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하여 재담 잘 하는 사람들은 종종 떠들기를, 낮에는 국문으로 글 읽으니 문(文)이요, 밤에는 전등 밝게 켜니 명(明)이라, 확실히 나라가 문명하게 되었노라 하고는 하였다.
거리낄 일이라면 누가 도깨비불 아니랄까봐 발전기 소리 요란하여 민가 바로 옆에는 두기가 곤란한 점이 있었는데, 몇몇 약삭빠른 주가(酒家, 술집)에서는 생각하기를, 어차피 떠들썩한 장사이므로 그깟 퉁퉁거리는 소리 얼마나 크겠는가 싶어, 조그만 발전기 들여와 술집 안팎을 훤하게 밝히고는 하였다.
이를테면 유서 깊은 기루 청작루 맞은편에 새로 문 연 명촉루(明燭樓)가 그리하였는데, 자부하기를 손님이 한 사람이라도 남으면 불을 끄지 않겠다 하였다. 과연 도성 술꾼들에게 제대로 들어맞아, 기생 없어 흥 아니 오른다 하는 난봉꾼들 외에는 다들 좋다 하였다. 허나 사람이 많이 몰리니 부득불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운양(雲養) 형님, 죄송합니다. 이리 요란스러울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사과하는 김옥균처럼 지체 높은 객들을 위해서는 별채를 마련해두기는 하였다. 허나 문풍지 한 장 너머로는 바깥의 왁자지껄함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건너편 청작루로 갈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기도 뭣한 것이, 그곳은 외려 조용하기 때문에 듣는 귀 걱정을 해야 하지 않던가.
“뭐,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외려 고균 자네 덕에 이런 구경도 해보지 않는가.”
올해로 벌써 천명(天命) 아는 나이가 된 김윤식이 털털하게 받았다.
“지금이야 아직 전등이란 물건이 신기하니 저렇게 몰리지만, 성상께서 얼마 전 하교하시기를 몇 년 내로 그 설비를 늘려서, 원하는 자들은 납금(納金)하여 발전기 들이지 아니하고서도 집안을 밝힐 수 있게 하라 하셨다네. 그러니 이곳 명촉루도 한 철 장사 아니겠는가.”
어지간한 나랏일은 요새 신보에 실리기 마련이니, 아직 나오지 않은 최근의 일이리라.
“전기를 여항(閭巷)에서도 널리 쓸 수 있게 한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처음 제도 세울 때는 나랏돈 써야 하는 일이니 일재(一齋, 어윤중) 형께서 또 한동안 폐침망식(廢寢忘食)하시게 되시겠군요.”
“하하, 그렇지. 하루아침에 될 만한 일은 아니니 아마 자네가 오늘 불렀더라도 응하지 못하였을 게야.”
“아쉬울 따름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사형들까지 하여 넷이 간만에 회포를 푸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였는데 말입니다.”
한때 사총(四寵)이라 불리던 김옥균과 김윤식, 어윤중, 김홍집 중 김옥균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떨어져 나가니, 곧 나머지 셋도 뿔뿔이 흩어져 저들 할 일을 하게 되었다. 어윤중은 또 다른 김옥균의 벗 홍종우와 함께 여전히 호조에 있고, 김윤식은 예조에 남았다.
김홍집은 외무를 계속 맡기가 부담된다 하여 – 속으로 마음앓이하는 성격 탓에 예전 청국 일이 마음 한구석에 남았던 것이리라 – 얼마 전 이조로 몸을 옮겼다. 지금은 국문교정청 일로 바쁠 터이다.
“허, 그 옛날 경연 들던 시절에 미련이 남았는가.”
“시무(時務)의 일로 긴히 아뢰고자 하는 바 있으니 꼭 미련이 없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옛 정이야 고스란히 남았다지만, 어윤중은 그 시절은 다 지났다 여기고, 김홍집은 비록 사이가 틀어지지는 않았다지만 여전히 서로 서먹함이 있었다. 그리고 김윤식은 그들 사이에서 그저 허허 하고 웃어넘길 뿐인 나이 지긋한 큰형이었으니 도저히 속을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나랏일로 청탁하게 되었으니, 이를 빌미로 끌어모으면 도로 네 사람을 한데 엮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다시 불러모은들 형님 아우 하던 예전 같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사소한 정 여기, 은근한 청 저기 하다 보면 마치 사슬로 묶은 것처럼 움직일지언정 아예 떠나가지는 못하게 할 수 있으리라.
“유영복 그 자의 처결을 내림에 어려움이 생겼다 들었습니다.”
“다들 들어 알 만한 얘기지만, 법국이 그리 갑작스레 변심하니 어찌하겠는가. 남의 나랏돈으로 호의호식하는 유씨만 좋을 일이지.”
일곱 나라의 학자들이 모여 공법(公法)이니 나라 사이 도의니 운운하고 있으니, 천하의 많고 많은 나라 사이에도 법이 있으며 그 법에 따라 잘잘못 가리는 일이 다름아닌 조선국 도성에서 벌어지고 있다는데 이 나라 사람들이 어찌 궁금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양이 사정 따위 관심 없다 하는 초야의 서생도 은근슬쩍 신보 들춰보고, 저자의 한량도 아는체하기 위해서라도 적당히 주워섬길 이야깃거리를 찾아보곤 하였다.
허나 옆 나라들은 사정이 또 달랐다. 예컨대 저들의 학자로 가장 명망 높은 복택유길(후쿠자와 유키치)이라는 자를 보낸 일본국에서는, 이번 일로 저들이 서양 나라들과 어깨 나란히 하였음을 그 나라 안에서 열렬히 알리고 있다 하였다.
반면 김옥균이 이번에 철도의 일로 탐방하고 온바 청국의 민심은 또 달라서, 유영복의 처결 그 자체에 귀 기울이고 있었으니 종종 만나는 청국 식자들은 물론 마을의 변변찮은 신사들까지 곧장 이번 재판의 향방을 묻곤 하였던 것이다.
“지금껏 그 제의하고 논박한 것을 살피니 법국이 어깃장 놓기 전까지는 얼추 영복에게 죄가 없거나 적다 하는 쪽에 힘이 실렸던 듯하였습니다만.”
“그건 그렇지만, 무얼 그리 아쉽게 여기는 겐가? 언뜻 보아서는 자네의 일신에 맞닿는 바가 따로 없을 듯한데...”
그새 속마음이 나왔던 것일까? 허나 어차피 저의 사정을 알리지 않고서는 끌어들일 수 없을 터. 서태후 앞에서 호언장담하였던 저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실은 동철의 일을 놓고 구상한 계책이 있었습니다...”
철도 놓는 실무를 맡은 현지의 서양인들이 호소하기를, 철도를 놓는다 하면 우선 반대부터 하고 보는 청국인들이 있다 하였다. 말하기로는 웬 쇳덩이 줄기가 지맥(地脈) 끊으니 필히 흉사 몰고 올 것이라고 하고, 또 기차라는 기물은 요사하기 그지없으니 저들 조상의 땅에 들일 수 없다고도 하면서 공사를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기기로는 저들과 비슷한 김옥균이 나타나 그들의 글로 써서 물으니 또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다. 일례로 한 고을의 나이 지긋한 서생이 글로 써서 저에게 주기를,
‘초야의 어리석은 선비지만, 풍수의 방술(方術)이란 곧 산천의 기운으로 인화(人和) 다스림을 넘지 않음은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일대에 양이가 들어와 풍속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괴롭힌 것이 벌써 십수 년간의 고질이 되었는데, 이제 철도가 놓이고 양이의 기물이 온종일 땅을 오가게 되면 또 무슨 화란이 닥칠 것인가, 백성들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런 사정을 그대의 지현(知縣) 같은 관헌에게 이르지 않고 허황된 말 뒤에 숨었던 것입니까?’
한사코 답하지 않으려 하는 이를 붙잡고서 묻고 또 묻자, 제발 다른 데서 이런 말을 옮기지 말아달라 청하며, 이렇게 답했다.
‘지금 조정이 무도하여 황상의 밝은 뜻을 가리니 천조의 크나큰 폐단이 되었습니다. 오직 양이의 힘으로 저들의 권세와 치부만을 노릴 뿐입니다. 예컨대 흑기군을 일으켜 양이의 무도함을 홀로 징치한 우리 유 장군 같은 이는 그 의기가 천고에 드문데, 귀국이 돕지 않았더라면 도리어 법국과 결탁하여 죄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서슬 퍼런 정국에서, 어찌 양이의 삿됨을 함부로 공박하겠습니까?’
“... 그 말을 듣자 떠오르는 바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에서 입 밖에 내는 것 정도면 그 늙은 서생도 무어라 하지 않으리라 곁가지로 생각하면서 김옥균이 말했다.
“허어, 내가 알던 고균 맞는가?”
거기까지 듣자 김옥균의 계획이 무엇인지 그 전모를 얼추 알아차린 김윤식이 농담과 진담을 반절씩 섞어 반문하였다.
“이번 처결이 내려지면 그 민심이 날뛰게 될 테고, 대국 조정이 나서지 않으면 능히 중재할 수 있는 것은 온양에 계신 태후 전하 뿐이라... 이렇게 내세울 생각이겠군그래?
분명 일전에는 나라의 힘으로 억누르고 다투는 것만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은데, 민심을 이용하겠다니 과연 다시 볼 때마다 눈 비비라는(刮目相對) 말도 일리가 있구만.”
김윤식이 너스레 섞어 대꾸했다. 사실 김옥균이 생각해보아도, 예전 같았으면 그깟 어리석은 청국인들이 무얼 하든 알 바 아니라 여겼을 듯하였다.
“거기서 그쳐서야 되겠습니까. 말로만 하지 않고, 무실(務實)하여 동철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뿌리를 뽑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도록 단단히 민심을 묶어두어야지요.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바깥 세상에 저들 편도 있음을 보여야 하는데, 이번 유씨의 일이 만일 그를 도적으로써 벌하는 쪽으로 결착된다면 참으로 곤란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허나 애초에 법국으로서는 유영복 그 자를 원수로 여길지언정 가벼이 풀어줄 수는 없었을 터였으니, 이번에 갑자기 반대하고 나선 것도 필히 그 체통과 닿아있을 것이야. 이를 타이르든 억누르든 하려면 필히 조정으로서도 공력을 적잖이 들여야 할 테지.
동철의 일이 비록 우리와도 연이 있다 하지만 엄연히 우리 조정과는 유별한데, 고균 자네와 사제의 연이 있다 한들 어찌 나라의 방책을 정하는 데 그런 청만으로 움직이겠는가?”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존형께서도 생각해보십시오. 유씨의 이번 일은 성상께서 발의하여 여러 나라를 끌어들인 데 그 근원이 있으니, 법국 하나로 인해 파국하게 되면 그 역시 아니 될 일이겠지요,”
이렇게 운 떼고서, 그간 닦아온 언변으로 어찌하여 유영복이 방면되는 것이 조선에 이로운가 구구절절 설명하였다. 설복된 듯하였지만 또 여전히 의심 품은 듯하기도 한 김윤식이 고심 끝에 답했다.
“내 한 번 다른 아우들과도 이야기를 해보겠네. 나 한 사람만으로는 사정(私情) 이끌리니 쉬이 판가름할 수는 없으니.”
그 다음 입궐할 때, 어윤중과 김홍집을 불러 이야기하니 다들 한편으로는 그럴듯하다 여겼지만 저들 조선만큼이나 체통 중시하는 나라인 법국과 자칫하면 원한 맺힐 수도 있는 건이라, 저울질하여 어느 쪽이 더 이롭다 섣불리 말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김홍집은 넌지시 최익현에게 묻고, 최익현은 다시 넌지시 성상에게 ‘이런 말이 있다’ 아뢰어 마침내 지존의 귀에까지 이 건이 – 동철 이야기는 쏙 빠진 채 – 들어가게 되었다.
당초 김옥균이 생각하였던 모양새는, 조선이 앞장서서 법국을 도로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다. 비록 국력으로 따지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지만, 순수하게 수만 따지면 아주 나라가 넷이요 구미 양주의 나라가 셋인데다가, 그 셋 중에서도 법국을 돕느니 차라리 무어라 하든 조선 편을 들 영국도 있지 않던가.
그런 심산을 김윤식이 알았더라면, 금상을 모신 것이 그래도 족히 몇 해는 되었는데 아직도 어심을 그리 모르느냐며, 농으로라도 혀를 찼으리라.
이야기 들은 성상 귀남 전교하기를,
“물론 그것도 좋지만, 그보다 왜 법국이 급한 마음을 먹었는지, 그것을 먼저 따져보아야 하지 않겠소?”
하였으니, 곧 마음 먹은 대로 하여 법국 공사 튀렌느 백작으로 하여금 입궐케 하였다.
무릇 만사는 주먹 나서기 전에 말로 해결함이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다. (특히 그 주먹 가냘픈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이왕 끼어든 법리 공방이라면, 드잡이질하느니 차라리 말로 끝내는 편이 피차 좋지 않겠는가? 귀남이 생각하는 인간사 생리는 그러하였다.
그러니 오래 걸리기는 하였지만 원만히 풀려가던 월남국 일을 놓고 법국이 느닷없는 트집을 잡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무슨 일이 되었든 우선 사정 들어보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 듯하였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 턱 없던 튀렌느 백작은, 느닷없이 입궐하라 하여 어전에 임하였더니, 조선국왕이 살벌할 만큼 인자한 표정으로, 근래 유영복 재판의 일에 관련하여 혹 속앓이하고 있는 바가 있느냐, 있다면 내게도 알려주어 함께 해결할 수 있도록 함이 어떻겠느냐 하니 속절없이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일에 조선 국왕이 끼어들 생각을 품은 이상, 일개 외교관이 함부로 모르쇠 하거나 거짓부렁으로 답하였을 때 또 어떤 후과가 닥칠지, 뒷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근래 저 멀리 아프리카에 콩고라는 곳 있어, 그곳을 놓고 여러 나라 사이 신경전 벌어지고 있는바 속히 이 유영복 건을 매듭지으라 하는 명이 떨어졌다고, 그의 직무상 발설할 수 없는 것들은 애써 배제해가며 고하였더니, 의외로 멀쩡한 제안이 나왔다.
“외교부장관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동양 속담에 ‘닭의 갈빗살(鷄肋)’이라는 말이 있다더군.”
튈르리 궁의 집무실에서, 넓은 책상 대신 티 테이블 위에 아프리카 지도 놓고서 조르주 클레망소와 머리 맞대고 있던 쥘 그레비 대통령이 넋두리를 했다.
외교부 장관이란 통킹 사태로 페리 내각이 총사퇴한 이후, ‘동양의 문제는 전문가에게!’를 외치며, 전 총리 페리가 겸직하던 자리를 얻어낸 벨로네 백작이었다.
“딱 우리네 식민정책에 맞는 속담이군요.”
머리 맞대고 있는 상대방 조르주 클레망소의 단평이었다.
“그렇지. 우리가 얻지 않으면 남들이 가져갈 테지만, 정작 우리가 얻어내면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니...”
식민지라. 말은 참 좋았다. 모양새도 그럴듯하니, 유럽의 사내로서 조국의 색이 지도 위 이곳저곳 요지마다 칠해져 있는 것에 자부심 느끼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렇게 식민지를 경영해온 것도 길게 보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향료 제도를 점거할 때부터 따져서 벌써 이백 년이 훌쩍 넘었다. 어떤 지역은 속된 말로 보물단지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고, 특히 아직 지구에 백지로 남은 곳은 대개 기업들에게 맡겨 적당히 손만 대게 하는 편이 나은 정도의, 그런 변변치 못한 땅이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나라에게 ‘너나 가져라’ 하고 그 백지의 땅을 떠넘길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 땅에 들어가는 비용을 조금이나마 환수해보겠다고, 저 중국의 만리장성보다 드높은 무역장벽을 세우고서 프랑스인은 발도 못 들이게 한다면, 기껏 얻어낸 정권을 고스란히 반납해야 할 판이었다.
그동안 페리 그 자가 우격다짐으로 세상 곳곳에 밀고 들어가 프랑스의 삼색기를 꽂는 것을 그저 어리석다고만 여겨 왔던 그레비와 클레망소였지만, 막상 다모클레스의 검이 머리 위에 대롱거리는 자리에 올라오니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정황이 있었다.
“외교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겠습니까? 통킹 사태 때, 그렇게 명분을 통해서 다른 나라들을 옭아맬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 드렸던 듯합니다만...”
“바로 그 명분을 저 레오폴 2세가 내걸고 있지 않은가. ‘인류 진보의 대의를 위하여, 대승적 차원에서 중립적인 국제콩고협회의 의견에 따르자’라, 하!”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고 다시 바다의 터주대감 노릇을 할 여유를 되찾게 될 듯하였으므로, 상황이 더욱 다급해졌다.
러시아가 순순히 물러날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곧장 새로운 도발을 벌일 수도 없을 테니, 찾아올 것은 처음부터 끝이 보이는 평화였다. 그러면 영국은, 여유 있는 사이 조금이라도 더 넓은 땅에 깃발을 꽂겠다 날뛸 것이요, 설령 그럴 생각이 없다 한들 프랑스와 독일의 여론은 영국이 그리하리라 믿을 것이다.
프랑스야 그렇다 쳐도, 새롭게 부상하는 독일이 바다 밖에 저들의 발 뻗을 구석을 탐낸다고 하면, 영국의 글래드스턴도 국내 여론을 영원히 억누를 수는 없을 것이었다.
레오폴 2세가 노린 부분이 여기에 있었다.
‘어느 강대국도 아프리카를 차지하지 않으면 될 일이지 않소? 나는 오직 기독교인으로서 야만과 노예제로부터 불우한 흑인들을 구제하고자 할 뿐이라오. 우리 벨기에처럼 어떤 욕심도 없는 소국이야말로 콩고, 그 땅을 관리하면서 모든 나라에게 이익이 고루 돌아가게 보장할 수 있는 것이외다.’
야만의 굴레에서 고통받는 노예 상태의 아프리카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 레오폴 2세가 내건 대의명분이었다. 학자와 탐험가들까지 끌어들여, 문명과 진보라는 명분에 같은 명분으로 고스란히 맞불을 놓으니, 너희는 틀리고 우리는 옳다 할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소국이 명분 놀음으로 대국들 틈바귀에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조선에게 번번이 당한 프랑스로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재간이었다. 그러나 또 눈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으니 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우지간 통킹 때처럼 여론을 잘 무마하기도 어렵게 되었네. 우리의 벨기에 국왕 전하께서는 그걸 또 얄밉게 잘 이용하고 있고.”
“그래도 뭔가 뾰족한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명분을 무기로 삼기로 하였으니, 말을 잘 꾸미면 될 듯하기는 합니다만.”
“국력 경쟁이라면 모를까, 같은 유럽 국가들끼리 말로 다퉈서 결론이 날 문제가 아니지 않나? 동방박사라도 갑자기 나타나서, ‘내 이 프랑스야말로 선량하고 도덕적인 나라임을 증언하노라’ 하지 않는 이상에야...”
희색 완연한 벨로네가 문 두드리고서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바로 그 동방에서의 소식입니다, 각하!”
“무어라?”
“조선 국왕이 제의하기를, 리우(유영복) 재판의 법리적 판단에 승복할 것을 보장해 준다면, 장차 있을 식민지 분쟁에서 우리 프랑스를 지지하는 선언을 해주겠다더군요.”
어이없는 소식으로부터 먼저 회복한 것은 아무래도 조금 더 젊은 클레망소였다.
“그...건 조금 의외이기는 합니다만, 확실히 잘 꾸미면 호재가 되겠습니다. 선언을 해주겠다고만 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잖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율할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체결 당시의 군말이야 어찌 되었건, 프랑스는 비서구 국가와 처음부터 거의 동등한 조약을 체결해준 – 그들이 알기로는 유일한 – 유럽 국가다. 벨기에든, 독일이든 인도주의니 문명이니 얘기하지만 이처럼 실천한 적이 있느냐, 우리처럼 일시의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인류를 위해줄 그런 각오도, 경험도 없으면서 무슨 인류문명의 진보와 윤리를 말하느냐.
반박하려면 애를 꽤 써야 할 것이고, 무슨 말을 내어놓든 결국 가뜩이나 수익을 내기 어려운 식민지 경영에서 자신을 더욱 옭아매는 사슬로 고스란히 돌아올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조선이 우리에게 선의를 베풀어주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도 멋지게 잘 포장해서 말입니다. 고스란히 우리의 반가운 이웃에게 건네주어야지요.”
“그렇지. 아무래도 말싸움이라면 우리 프랑스가 유럽 제일 아니겠는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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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자영업계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이상하게 요식업의 비중이 높다고들 하는데, 이는 서울의 경우에 한정지어 보면 조선시대로부터의 내력이 있던 경향입니다. 조선 후기 한양 거주자들은 공통적으로 도성 안에 술집이 많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조대에는 도성 상가의 절반이 술집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지요. 이는 보는 관점에 따라 사회적 문제로도, 조선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한양만의 독특한 문화로도 인식되었습니다.
원 역사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지금쯤이면 갑신정변의 실패를 저의 맘대로 해석해서 점점 극단적인 탈아론으로 선회하고 있을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서세동점의 시대 속에서 이를 거부하거나 변용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본의 국익-이라고 그가 인식했던 것-만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의 사고를 보였던 그입니다. 물론 일본 내에서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기에 대표로 파견된 것이겠지만, 자신이 처음 생각하였던 것과는 다르게 뒤틀리고 있는 본작의 상황을 목전에 두고서 많은 속앓이를 하고 있을 듯합니다.
일반론적 관점에서 식민지 경영이 경제적으로는 이익을 내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19세기 후반 정치엘리트 사이에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특히 콩고를 비롯한 아프리카 연안 지대의 경우, 식민지로 삼게 되었을 경우 근대적 통치제도를 밑바탕부터 재구축해야 하는 데다가 자연환경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지요.
그러므로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네덜란드나 영국의 동인도회사처럼, 거대 기업을 중심으로 효율적·합리적인 무역 – 그것이 결코 더 호혜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을 수행하는 것이 훨씬 나았습니다. 그런데도 작중에 언급되는 것처럼, 다른 국가가 식민지를 독점하여 무역장벽을 세울 가능성, 안보적 관점에서의 고려, 그리고 점차 과열되던 여론 등으로 인해 거의 모든 유럽 강대국들은 자신이 감당 가능한 수준 이상의 식민지를, 그것이 언젠가 경제적 이익과 제국의 영광을 불러오리라는 믿음만을 가지고 떠안고 가게 됩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과확장(overstretch)은 1차대전으로 이어지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만, 애초에 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났는지,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치·경제·사회학적으로 다양한 이론들이 병립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