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낡지 아니할 큰일 (2)
항간에 떠들썩한 그 박규수의 ‘사정’을 마침 다른 일 보러 나갔던 김가진이 구하여 가져왔다. 무릇 이러한 일은 직접 보고 평해야 하는 것이니, 대원군은 더듬더듬 애체(안경) 찾아 쓰고서 서안에 올려둔 책의 표지를 펼쳤다.
‘남 앞에서 아는체하는 기벽奇癖은 글쓴이의 고질痼疾이라 일전 연경燕京에서 양인洋人이 창제創製한 지구의地球儀 얻어와 문인門人에 보이며 묻기를
‘이 둥근공 어디에 가운데가 있는가. 짚으면 곧 그곳이 가운데라.’
하였다. 그러나 말하면서도 자문自問하기를 천하天下에 중中이 없으면 중국中國이란 무엇이며 또 중화中華란 무엇인가 의심疑心품어 고민하기를 스무해더라.’
검은 것은 글씨요 희누런 것은 종이인데, 어째 쓰인 것이 낯설었다.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똑같은데, 그러면 무엇이 다른가? 소싯적에 몰래 책쾌(冊儈, 서적 대여업자)에게서 구해 읽었던 언문 패설(稗說)을 떠올려보니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문명개화文明開化 찬란燦爛하여 직방職方바깥 여러나라의 교통交通하는 사정事情 속속들이 알수 있게 되었노라. 피彼를 알아야 비로소 차此를 살필수 있으니 그리하여 인국隣國의 일 미루어 원국遠國을 알고 원국遠國의 사정 살피어 비로소 아국我國을 알 수 있음이라.’
대개 패설이란 손가락으로 훑으며 이야기 한 마당 듣는 것처럼 읽어내려가는 그 재미가 유별나기는 하되, 시종 언문으로 되어 있으니 규방(閨房)이라면 모를까, 점잖은 서생의 사랑방에 있기는 많이 무안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박규수가 써놓은 것을 보면 진서와 언문이 함께 쓰인 것이 언해본에 가깝되, 진서의 음까지 언문으로 옮기고 그 뒤에 진서를 마치 협주 달듯 작게 적었다. 더구나 어지간한 말은 아예 입말을 그대로 언문으로 적어 썼으니 또 다르고, 뜬금없이 글 가운데에 입겻(어조사) 붙을 만한 곳은 반 칸씩 떼어두었다.
거기에 또 이런저런 해괴한 부호 따위가 문장 끝나는 곳에, 때로는 시작과 끝 양쪽에 붙어있으니 이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퍽 이상한 글도 다 있다 하고서 몇 장 넘기니 비로소 그 뜻을 일러두는 곳이 나와, 심정 고약한 늙은이라고 속으로 투덜댔다.
그래도 정말 사람 골려주려 저렇게 쓴 것만은 아닌지, 이 부호는 남의 말 옮길 때 쓰는 것이다. 저 부호는 곧 고릿점과 같으며, 문장 앞에 공격(공백) 둔 것은 원권(圓圈, ○ 부호)을 갈음하여 다른 이야기 나오는 단락을 눈에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둥 이런저런 설명을 붙여두었다.
그러니 낯설기는 낯설되 점차 읽어내려가다 보면 금방 익숙해져, 나중에는 읽는 대로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 진서와 진배없었다. 저의 조부로부터 글재주 물려받은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언문으로 제대로 된 글을 써보겠다고 열심히 궁리한 효험을 거두었다 함이 옳으리라.
‘그리하여 돌이켜보니, 세상의 가운데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론과 제도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비로소 우리 글(我文)로써 내 궁리한 바를 널리 알릴 마음을 품게 되었다.’
만약 저 구락부니 뭐니 하는 데를 드나드는 풋내기 젊은이가 그런 글을 썼다면, 그저 젊은이의 치기로 여기어 굳이 진중한 자리에서 거론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지만, 박규수 같은 이가 이리 글을 쓰니 누구도 가볍게 여기지는 못할 터.
하지만 어지간한 사대부도 아니요, 계해년 환국 이래 어찌 되었든 자신과 함께 나라의 대들보로 자처하고 또 그만한 공도 세웠던 박규수가 격 떨어지는 언문으로 글을 써서 펴내었다는 것은 논쟁 피하기 어려울 터였다. 어렵고 어려운 심성과 이기(理氣)의 논변을 가지고도 토에 토를 달며 몇 해를 내리 싸울 수 있는 선비들이 허다한데, 그런 이들이 과연 박규수가 무슨 뜻을 품었든 내버려 두겠는가.
언문이란 곧 언(諺), 즉 상스러운 말이라. 누대에 걸친 문장의 법도가 없으니 그저 저의 입에서 나오는 대로 곧이곧대로 옮기는 것이었으니, 아무리 박규수의 개진하는 바가 고매하다 하여도 귀한 술을 질그릇에 대충 부어서 내는 격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난 치는 것을 제하면 훌륭한 선비는 되지 못하는 대원군이다. 그러니 그가 처음 의심 품은 것은 아마 어지간한 서생들도 모두 할 수 있는 생각일 터요, 박규수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세인들은 언문은 격식이 없다 하나, 풍류 즐기며 읊는 것은 그러면 무어란 말인가? 대저 말이란 때에 따라 변하니, 난삽함이 절로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요, 정연함이 절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덮어두고 격식이 없다 함은 어찌 잘못이 아니랴?
이 글처럼 언문으로써 세상에 보탬 되는 글을 쓰고 널리 알려야만 비로소 격식이 갖추어져 체통 있는 사람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 일을 후대로 미루겠는가?’
과연, 그런 생각 품자마자 푹 찌르는 박규수의 반박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언문은 결국 나라의 입말을 옮기는 것인데, 아무리 격식을 갖춘다 한들 진서의 심오한 뜻을 모두 담아낼 수 있겠는가 싶었다.
‘또 반박하기를, 나라의 속언(俗言)은 화언(華言)만 못하니 정교한 말뜻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고 한다. 허나 그렇다면 그 글자를 빌려와 뜻을 새기면 될 일이요, 실제로 우리 입말도 그리하고 있다. 나라의 선비 중 경의(經義)를 되새김에 있어, 마음 속에서 스승에게 배운 토씨를 덧붙여 되뇌지 않는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이미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을, 겉으로만 ‘나는 그리하지 않는다’ 둘러대면 이만큼 부끄러운 일이 또 있는가?’
늙은 범도 범은 맞아서, 한창때의 그 번뜩이던 재치가 어디 가지 않았다. 하기야, 뒷공작과 세력 싸움 없이 말로만 다툰다면 어떻게 대원군 자신이 박규수를 따라가겠는가. 더 반박해볼 생각은 겸허히 접어두고 계속 읽어내려갔다.
‘또한 비판하기를, 우리 입말은 부단히 변하고, 참된 글(眞書)은 불변하니 이 중 어떤 쪽에 도를 담을(載道) 수 있는지는 분명하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하기로는 오히려 그 이치로 따지면 화언으로 쓴 글일지라도 반드시 아문(我文)으로 풀어 써야 한다.
만약 화언이 이미 불변의 참된 글로써 하나의 제도를 모두 이루었다면, 지금 중국에 문언(文言)이 있고 또 백화(白話)가 따로 있음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그러므로 부자께서도 당대의 사람을 위하여 술이부작(述而不作)하시매 역(易, 주역)에 전(傳, 해설)을 보하셨다.’
여기까지 읽으니 갑자기 다시 글의 뜻보다 이것이 언문으로 쓰였음이 새삼스레 느껴지며 소름이 돋았다.
고작 글자 하나하나를 띄엄띄엄 읽는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누가 한 번 글자의 뜻만 알려주면 저 말을, 그리고 그 위에 실린 논리를 곧이곧대로 듣고 따라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가던 서생이, 네놈이 어찌 감히 여항의 상한(常漢)으로써 그런 말을 입에 담느냐며 노기 터뜨리면, 이어지는 이 박규수의 말을 고스란히 들려줄 것이었다.
‘세인을 위하여 지금의 말로 선현의 글월을 풀이함이 잘못이라면, 주자께서 사서를 집주(集註)하심도 잘못이라는 말인가?’
위문제(조비) 이르기를, 무릇 문장(文章)이란 나라 일구는 큰일이요, 낡지 아니할 성사(盛事)라 하였으니 (蓋文章經國之大業不朽之盛事), 정말 말로써 나라에 큰일을 일으킬 것이요, 나라 무너지고 백성 모두 흩어지지 않는 한 입에 오르내릴 것이니 결코 낡지 아니할 터였다.
조용히 늙어가다 죽을 줄 알았건만, 아직도 이렇게 나라를 시끄럽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서책이 서책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잘 벼려진 환도와도 같이 되었으니, 어찌 기서(奇書)가 아니랴?
“지금이라도 글을 물려주실 수는 없으실지요?”
“그럴 글이었으면 내 왜 침침한 눈 억지로 고생시키며 붓을 놀렸겠느냐. 이미 찍어내기 시작했으니 읽을 이들은 손에 넣었을 것인데 물릴 수도 없지.”
박정양이 직접 찾아왔으니, 아마 유홍기를 통해 넘긴 원고가 잘 출판되어 도성 저자에 풀린 듯하였다. 말하고 나서야 저의 청이 무리한 것임을 알았는지, 한결 말투가 누그러졌다.
“물론 손수 쓰신 글월이 참으로 훌륭하여 보배와 같다고 모두들 평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앞길 창창한 젊은 사람이 벌써 아첨이 입에 붙으면 안 된다.”
“송구합니다.”
박정양도 나이 불혹 넘겼으니 그를 젊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눈앞의 환재대감 박규수 외에 많지 않을 것이다. 병중의 사람이 기체 어지러워질까 두려워 말을 삼갔는데 아첨이라며 가볍게라도 꾸짖음 당하였으니 억울한 노릇이지만, 그렇다 한들 어찌 박규수에게 대들 것인가.
“내 비록 병석에 누웠다 한들 바깥에서 돌아가는 일을 어찌 모르겠느냐.”
“예. 실은, 당의 사람들 사이에 아무래도 의론이 분분합니다.”
“그 참의대부 자리의 격을 정하는 일 때문이더냐?”
긍정을 갈음하는 침묵에, 박규수는 힘겨운 한숨을 내쉬었다.
골병이 든 이래 도통 밖을 나다닐 수 없게 되었을뿐더러, 글의 본론인 서양 여러 나라의 사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끽해야 연경 두 번 다녀온 것이 전부인 박규수가 혼자서 쓸 수는 없는 일이니 서책을 그러모으는 데 다른 사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미운 마음 버리지는 못하여도 또 언제고 작고할지 모른다 생각하면 옛정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 당색 다른 오경석도 저의 역관 지인들을 모아 서양 서적을 수소문해주었다.
그러나 가까운 개화당 안의 사정으로 말하자면 또 어지러운 바 없지 않았으니, 유홍기를 통해 이런저런 도움 받다 보면 그가 병석 누운 사이 진행되는 바를 부득불 들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개화당이 이름만 ‘당’이요, 그저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이렇게 세 사람 모임이었던 시절부터 그 중 우두머리는 박규수요, 모사 역할은 유홍기라. 박규수가 자리보전한 지 오래이니, 자연히 처음부터 개화당이 좋아서 따라붙은 이들은 ‘백의 참의대부’ 유홍기를 따르고, 그저 저의 편이 필요해 개화당에 붙은 명문의 사람들은 저들끼리 뭉쳤다.
그 중 목소리 큰 축에 드는 것은 누구인가, 하면 당연히 김병학 형제였다. 반남 박문 자체로 말하면 박규수 한 사람이 있어 저들과 어깨 나란히 한 것이었으니, 비록 그 인물이 모자라지는 않다 하여도 뒷받침할 위세가 적은 박정양이 어찌 김병학에 비하겠는가.
그러니 박정양으로서는 가뜩이나 세 밀리는 판에 (문중 어르신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등에 비수 꽂히게 하는 박규수의 그 ‘사정’ 책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박규수도 이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장차 나라의 뭇 백성이 스스로 높아지게 되면 누군가 하여야 했을 일이었다.
너는 나라의 선비들이 반발하고, 그보다 우리 당여들이 마뜩잖게 여길 것을 걱정하겠지만, 사세가 그러하지 않으냐. 이미 초야에 숨은 이들을 제하면, 나라의 모든 선비는 속세에 나왔으니 양이의 때가 묻었고, 백성은 평생 논밭 일구는 데서 벗어나 조금씩 저의 재주 따라 혹은 공장(工匠)이 되고 혹은 상고가 되며, 저마다 배워서 일문(一門)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사세가 그러한 것과 이를 글로 드러내어 나라의 법도로 정함은 별개의 일입니다.”
박정양 말마따나, 다름아닌 반대편 개화당의 큰어른 박규수가 하필 이런 시국에 언문으로 책을 내었으니 공산당은 갑자기 힘을 얻었다. 차라리 무슨 자질구레한 패설 같은 것이었다면, 조심스럽게 환재 대감의 총기가 예전 같지 않다며, 미어지는 마음을 꾹 참으며 다른 사람 입 빌려 둘러대었겠지만, 몸은 쇠했을지언정 마음 쓰는 솜씨는 그대로였다.
“치중(致中, 박정양의 字) 네가 보기에, 개화란 무엇이냐.”
한참의 정적 후 뜬금없는 질문. 하지만 답을 내놓아야 했다.
“닫혀있던 것을 열리게 하여, 풍속과 문물을 일신하는 것입니다.”
“그뿐이더냐? 내 국제 정하는 일이 불거지던 시절 이르기를, 우리 당은 백성을 부유하게 할 방도를 마련하여야 한다 하였다.”
“어찌 잊겠습니까. 그날 그 자리에 있지는 아니하였더라도 전해들은 뒤 곧장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이르기를, 그리하여야 우리 당이 운현궁에 밀리지 않고 세를 지켜내리라 하였지. 허나 그뿐인가? 부민(富民)을 모두 이루고 나면 어찌 될 것이냐? 개화가 거기서 그치는 것이더냐? 더 나은 나라, 더 나은 천하를 위하여... 쿨럭!”
거기까지 말하다 갑자기 넘어오던 가래가 막혔는지, 갑자기 기침을 하였다.
그런데 한 번으로 그치지를 않고, 두어 번 더 마른 기침이 이어지더니, 마치 끈을 끊어버린 꼭두각시처럼 보료 위에 쓰러졌다.
“대감! 대감! 게 누구 있느냐! 어서 의원을 대령하거라!”
아무리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학원이 전국 각지에 열려 우리야말로 조선 팔도에 제일가는 배움의 터전이라 자처한다지만, 결국 조선 사람이라면 나라의 중심이 국도 한양이라는 데 추호의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고, 그 나라에서 으뜸가는 선비가 앉는 자리는 실제가 어찌 되었든 공식적으로는 문형(文衡, 대제학)이었다.
그리하여 오랜 준비를 거쳐 세 해 전부터 수상을 시작한 노씨권학상의 심사가 그 무렵 문장으로 이름난 대제학 김상현(金尙鉉)을 그 좌장으로 하여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절기가 여름을 넘어 만물 성숙하는 가을에 닿았으니, 음양 적절히 갖추어져, 따뜻하되 염서(炎暑, 불볕더위)는 멀리 지나갔구려. 금일 모임을 열겠으니, 각 학원의 고명한 선생들께서는 뜻하는 바를 내어주시기 바라오.”
화서대학원에서 나온 김평묵이 먼저 발의하였다.
“환재 대감은 어떻겠습니까?”
좌중 긴장하되, ‘당치도 않은 소리다’ 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데 가까운 숨죽임이라.
“처음 노씨와 더불어 이 권학상의 제도를 마련할 때, 후학을 장려하는 뜻을 살리기 위하여 반드시 살아서 배우고 가르치는 이에게만 상을 주자 하였습니다. 소생 듣기로 환재 대감께서 쓰러지신 이래 아직 깨어나지는 않으셨으되, 원기가 아직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하니, 아직 늦지는 않았다 하겠습니다.”
성현의 말씀을 언문으로 배우고 익히며, 나아가 언문으로 다루기까지 하겠다 하였을 때, 누가 무어라 하지 않아도 당장 귀를 의심하고, 그 뒤에는 혀를 몇 차례 끌끌 차는 것. 그것이 선비된 자의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국에 나온 박규수의 책을 돌려보니 – 하도 세간의 이목을 끌어서, 한 질 구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 범속한 이들은 그저 고상한 이야기가 저들 아는 언문으로 나왔다, 신기한 서양 사정이 적혀있으니 재미있다 여길 뿐이었지만, 그 가운데 숨은 말들이 있어, 역시 환재 대감이다, 하는 그런 안도감과 더불어 선비로서의 무언가 깊은 마음을 건드리는 바 있었다.
‘중화가 꼭 그 땅과 사람 안에 머물러야 하는 법이 있겠는가? 그러나 오직 성현께서 나시고 가르치신 중원 땅의 문물만이 가장 뛰어나며, 이는 문헌으로 증험할 수 있다고 하는 의론이 있어, 한 번 일어나 자리잡고서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르기를, 화이(華夷)이 구분이 엄중하니, 왜국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었으나 성인의 교화가 미치지 아니하였으니 겉과 속이 모두 오랑캐요, 천축(인도)은 석씨(釋氏)가 그 땅에서 일어났으니 더 볼 것이 없고, 나아가 비주(아프리카)와 대양주의 토인(土人)들은 부족치치아간(不足置齒牙間, 거론할 필요가 없음)이라.
또 이르기를, 그 중에서도 가장 형국 망측한 것은 태서의 양이이니, 정교한 기물과 야소의 사학으로 사람 홀리니 미리 죽여 없애지 않으면 장차 우리 해동이 오랑캐 소굴로 전락한다 하였다. 이 얼마나 우활하면서도 무서운 말인가?’
사람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 경중의 차이는 있어도 이곳 명륜당에 모인 선비들도 대개 스무 해 전에는 저와 비슷한 생각 품었던 이들이었다. 그러니 달랑 저런 글귀만 적혀 있었더라면 김평묵의 제의에 곧장 항의 빗발쳤겠지만, 그 뒤로 몇 줄이 더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태서 땅에서 비슷한 이론 있어, 저들의 도로써 다시 문명과 야만이라 하여 화이를 나누니, 그 이론에 의거하면 같은 양이 사이에서도 서반아와 이태리의 족속은 개중 퇴락한 무리요, 우리 황인은 문명으로 나아가던 중 정체하니 반절의 문명이요, 비주의 흑인은 인류의 말엽에 간신히 든다 한다.
지금까지 살핀바 저들이 옳고 우리가 그른 것도 아니요, 저들이 그르고 우리만 옳은 것도 아니로다. 화(華)는 높고 이(夷)는 낮다 하지만, 생각건대 화이의 가름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고, 그 마음이라 함은 성인의 도로써 비로소 다스릴 수 있다.
풍속의 교화를 인군 한 사람이 홀로 하면 오직 요순이나 기자 같은 성현이 있어야만 이를 화(華)로 바꿀 수 있다. 선비 만 명이 이를 도우면, 힘써 일구어 여러 세대를 이어간 뒤에야 비로소 문풍(文風)이 일어나고 예악(禮樂)의 제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억만 백성이 함께한다면, 능히 오랑캐 세상을 중화의 세상으로 만들고, 만천하가 문명으로 가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글을 언문으로 쓰는 또 다른 큰 뜻이다.’
물론 그 노리는 바가 거창할 뿐 경의를 깊숙이 파고들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주장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박규수 역시 끝내 그 빈칸을 채우려다 이루지 못하고, 임종을 앞둔 지금에야 깊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리라.
어찌 되었든 이미 오랑캐 기물 받아들인 속세에 나아와 때 묻은 선비들에게, 그것은 때가 아니요 그저 세운 공을 입증하는 징표라 하니 논리의 정연함에 앞서 심금이 먼저 울렸다.
(병석에 누운 박규수가 들으면 진작에 내 편으로 넘어오지 그랬느냐며 한 소리 하였겠지만.)
“확실히... 뒤로 가면 그 의론에 부족한 바가 없지 않았지만, 그 세운 대의와 백성에게 널리 알린 공효는 범상하다 할 수 없소.”
“어쩌면, 후학들에게 일러 그 빈자리를 채워나가라 이르시고자 그리 하였는지도 모르지요.”
“다른 선생들께서는 어찌 보십니까?”
이견 없이 유학상 받을 사람으로 박규수를 정하였는데, 과연 박규수가 그것을 기다려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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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부호가 개화기에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통념은 절반만 맞습니다. ‘오늘날 쓰이는’ 문장부호가, 정확히는 불과 한 세대 전까지도 익숙했던 세로쓰기에 적합하게 일본에서 개량된 서양식 문장부호가 개화기에 들어온 것이고, 그전에도 한문을 쓰면서 중국을 통해서든, 자연적으로 나타났든 다양한 구두점이 쓰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한글소설 등에서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 (음각처리된 ‘각셜’ 등)를 제외하면 구두점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경전이나 실용서적처럼 정확한 독해의 필요성이 낮았을 뿐 아니라, 입말 그대로 된 것을 옮긴 특성상 굳이 구두점을 달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 역사에서 최초로 국한문혼용체를 진지하게 사용한 것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유견문』은 대중을 대상으로 했다기보다는 같은 양반 지식인층을 독자층으로 상정하고 있었고, 국한문의 혼용도 일종의 정치적 행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문체도 고지식하게 어조사를 제한 거의 모든 말을 한자로 표기하여, 어찌 보면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텍스트보다도 더 한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유견문』이 처음 전례를 남긴 이후 비슷한 문체가 개화 관련 서적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다시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입말에 가까워지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으므로 그 영향을 가볍게 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처음부터 순한글을 채택한 『독립신문』의 방식이 끝내 – 어찌 보면 현대 한국에 이르기까지 – 완전히 보편화되지 못했음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지요.
작중에서는 유길준과는 비할 수 없는 거물인 박규수가 선례를 남긴 데다가, 본인의 궁리로 나름대로 근대화된 표기법의 초석을 다졌으므로, 그런 변화가 훨씬 용이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박규수의 사상은 아무래도 개화파가 이어받다 보니, 그 맥락에서만 조명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만, 실제로는 유학의 전통적 화이론에서 근대 국제질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과도기적 면모를 지니는 동시에 여러 갈래의 가지 못한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특히 작중 시점에서 약 스무 해 전, 통리기무아문을 이끌던 시절 용하변이 같은 명분을 내세운 데서 잠시 암시되었듯, 박규수는 사상을 통한 동서 문명의 조화, 나아가 국제질서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벗 윤종의가 지은 책 『벽위신편』에 대한 평인 『벽위신편평어(闢衛新編評語)』에서는 번역된 유학 경전이 싱가포르를 거쳐 서양으로 수출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만약 이를 잘 가다듬으면 서양 국가들의 사상 자체를 바꿈으로써 무력에 호소하지 않고도 척사론이 주장하는 것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이상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가 청과의 관계 설정 문제를 놓고 제기하는 주장을 살펴보면 더 흥미로운 면이 있습니다. 청에 비해 절대적으로 국력이 열세하고, 그 청마저 아편전쟁 이후 위기에 봉착한 상황에서, 박규수는 조선이 장차 중국의 스승이 되어나가자고 주장했습니다. 즉 청의 위기는 한 나라가 아닌 동아시아 지역, 나아가 문명 전체의 위기이며,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국력이 현저히 부족한 조선은 여기에 사상적으로 기여함으로써 부족한 국력 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성배(2012), “환재 박규수와 시무의 국제정치학” 한국정치학회보 46집 2호).